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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까지는 단순히 나는 하여커나 죄인이거니 하여 면목 없는 마음, 반성하는 마음이 골똘할 뿐이더니 그날 김(金)군의 P사에서 비로소 그 일을 당하고 나서부터는 일종의 자포적인 울분과 그리고 이 구차스런 내 몸뚱이를 도무지 어떻게 주체할 바를 모르겠는 불쾌감이 전면적으로 생각을 덮었다. 그러면서 보름 동안을 머리 싸고 누워 병 아닌 병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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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용 문필하는 사람의 마음 한가로움이라고 할까 누그러진 행습이라고 할까, 가까운 친구가 간여하고 있는 잡지사고 출판사고 하면 일이야 있으나마나 달리 소간이 긴급한 때 외에는 그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는 않게 되고 들어가 앉아서는 신문 잡지도 뒤척이고 많이 잡담하고 조금 문담(文談)하고 방담도 싫도록은 하고 하기에 세월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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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주인편에서는 흔연히 맞이하여 주고 같이 섭쓸려 이야기하고 하되, 한결같이 폐로와하는 법이 없고 출판사나 잡지사의 사무실은 문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이를테면 동네 쇠물방처럼 임의롭고 무관함이 있어 김군이 주간하는 P사도 나의 그런 임의롭고 무관한 자리의 하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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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거리엘 나가면 그래서 출판사나 잡지사를 몇 곳씩은 자연 들르게 되고, 그날도 남대문 밖까지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 별 볼일이 있던 것이 아니요 지날녘이고 해서 푸뜩 P사를 들렀던 것인데, 무심코 들르느라고 들렀던 것인데…… 김군의 말따나 일수가 매우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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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나절부터 그무릇까무릇하던 하늘이 정녕 보슬비라도 내릴 듯 자욱히 다 흐리어 가지고 있는 사월 그믐의 저녁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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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거리의 잡답한 보도에서 가로수의 나붓나붓한 잎사귀가 거리의 잡답함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무엇인지를 숙명처럼 기다리는 듯싶은 그런 가벼운 침울이 흐르는 시간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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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의 P사는 바로 길 옆의 빌딩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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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장처럼 사층 꼭대기의 한 방에 들어 있는 빌딩의 마흔 몇개나 되는 층계를 숨차 하면서 올라가다 마침 맨머리로 내려오고 있는 김군과 마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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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에 조선출판계의 왕좌 될 꿈은 꾸면서 사무소가 이게 무어람? 사람이 숨이 차구 대리가 맥이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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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대신 이렇게 구박을 하는 것을 김군은 그 커다란 눈과 코와 입과 얼굴과에다 한꺼번에 웃음을 흐트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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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사가 사무실이 가난한 것은 자네가 그 흔한 왜놈의 집 한 채 접술 못하구서 쓰러져가는 셋집살일 하는 것허구 내력이 어슷비슷하니 피차 막설하구…… 그리잖어두 기대리던 참인데 잘 왔네. 내 이 아래층에 가서 전화 좀 걸구 오께시니 올라가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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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尹)이라고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아래나 일찌기는 세대를 같이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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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과 인사를 하면서 그의 눈치가 먼저 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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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내가 어려워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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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마는 것이 고작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리 없이 모자만 들었다 놓는 시늉하면서 지나쳐버리고 하는 그저 거기 어디 흔히 있는 ‘아는 사람’의 하나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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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이라는 사람을 아는 것이 별로 많지 못하였다. 일찌기 일본 동경서 어느 사립대학의 정경과를 마치었다는 것,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고향에서 잠시 동안 신문지국을 경영한 경력이 있다는 것,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기 전후 2,3년은 서울 어느 신문사의 정치부 기자로 있으면서 논설도 쓰고 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잡지에 발표한 당시의 구라파 정세에 관한 정치 논문을 두 편인가 읽은 일이 있고. 그 문장과 구성이 생경하고 서투른 혐의는 없지 못하나 사상만은 대단히 진보적인 것을 엿볼 수가 있었고. 대강 이런 정도의 것이었었다. 그 밖에 사람이 성질이 어떠하다든가 가정이나 주위 환경이 어떠하다든가 하는 것은 알지를 못하였고 알 기회도 없었다. 공적으로 혹은 사사로이 생활상의 교섭 같은 것도 물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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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윤에게 대하여 아는 것도 많지 못하고 친구로서의 사귐도 없고 하기는 하지만 꼭 한가지 매우 중대한 것을 잘 안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인정치 않아서는 아니되었다. 윤은 대일협력(對日協力)을 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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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전쟁이 일던 아마 그 이듬해부터인 듯싶었다. 잡지나 또는 신문의 기명논설(記名論說)에서 윤의 이름은 씻은 듯 없어지고 말았다. 신문기자의 직업도 버려버리고 서울을 떠났는지 거리에서도 통히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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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윤이 무엇을 쓴다면 그의 전문에 좇아 정치와 시사에 관계된 것일 것이요, 정치와 시사에 관계된 것이면 반드시 세계 신질서 건설(世界新秩序建設)의 엉뚱한 명목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킨 동서의 전체주의 파시즘을 합리화시킨 논문이 아니고는 용납을 못하였을 것이었었다. 안으로는 내선일체를 승인하는 것이었어야 하고, 밖으로는 추축군의 승리와 미영의 몰락의 필연성을 예단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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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신문사원으로의 직업을 버리지 아니하였다면 신문이라는 대일협력체(對日協力體)의 수족 노릇을 싫어도 하였어야만 할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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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 그러나 일체로 붓을 멈추고 신문사원의 직업도 버리고 함으로써 대일협력의 조그마한 귀퉁이에도 참여를 하지 아니하였다. 아니한 것이 분명하였다. 이렇게 대일협력을 하지 아니한, 그래서 지조가 깨끗한 윤에 대하여 많으나 적으나 대일협력을 한 것이 있음으로 해서 민족반역자 혹은 친일파의 대열(隊列)에 들어야 할 민족의 죄인(民族의 罪人) 나는 그에게 스스로 한팔이 꺾이지 아니할 수가 없고, 따라서 그가 어려운 사람이 아닐 수가 없던 것이었었다. 동시에 죄지은 사람의 약한 마음이라고 할까, 섬뻑 그를 만나자니 눈치가 먼저 보여지지 아니할 수가 또한 없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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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대답하는 윤의 말 억양과 표정에는 역력히 경멸하는 빛이 머금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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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은 있다 윤이 뒤척이던 신문축을 내려놓으면서 생각잖이 붙일성있게 오래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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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불 우리는 퍽 오래간만이었다. 일중전쟁이 일던 그 이듬해 윤은 문필 행동을 정지하고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거리에서 자취마저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에 근 10년 만에 오늘 이 자리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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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 그러나 인사상으로만 오래간만이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닌 것은 그 다음 수작으로써 바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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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이랑 옥수수랑 많이 수확하섰읍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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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독특한 시니칼한 입초리로 빙긋 웃기까지 하면서 하는 아주 노골한 경멸과 조랑이었다. 생각하면 윤으로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경멸과 조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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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1945년) 사월에 나는 소개를 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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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의 이유는 지방으로 소개를 하여 스스로 폭격을 피하며, 그리 함으로써 소위 국토방위에 소극적 협력을 하기 위한 이른바 당국의 방침에의 순응이었지만, 실상은 구실이요 소개를 빙자코 도피행(逃避行)을 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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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서 독일이 연합군의 육중한 공세를 바워내지 못해 연방 뒷걸음질을 치다 어느덧 독 안의 쥐가 되었을 때는 동쪽에 있어서 일본의 패전도 거의 결정적인 것이 된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물론 일본이 패하였으면 하는 희망적 예측이 다분히 가미되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뭏든 일본이 질 날이 멀지 아니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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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15의 그런 편안한 해방을 우리가 횡재할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하였다. 일본이 눌러서 우리의 지배를 할 것이냐 혹은 새로운 지배자가 나설 것이냐, 또 혹은 우리가 요행 우리의 주인이 될 것이냐 이 판단은 막상 깜깜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일본이 패전을 하는 그날 그 순간부터 그동안까지의 치안과 사회질서는 완전히 무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의 구렁이 되고 말리라는것 이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나는 믿고 있었다. 하되 그것은 새로운 주권이 서고 새로운 질서가 생기는 그 기간까지는 제 마음껏 계속이 될 것이었다. 그 기간이라는 것이 한 달일는지 두 달 석 달일는지 반 년이나 1년일는지 그 이상 더 오랠는지 그것은 짐작을 할 수가 없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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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패전을 하는 그날 그 순간부터 치안과 질서가 무능한 것이 됨을 따라 칼 찬 순사와 기관총 가진 패잔 일병과 주먹심 있는 평민과가 강도와 폭도질을 함부로 하고 일변 필연적인 사태로써 식량 부족으로 인한 대규모의 기근이 오고 하여 거리는 삽시간에 살육과 약탈, 능욕과 방화, 질병과 기아의 구렁으로 변하고 그 죽음과 공포의 거리에서 아무 구원의 능력도 주변도 없는 약비한 아비를 그래도 아비라고 떨면서 울고 매어달리는 나의 어린것들을 데리고 서서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기나 할 따름일 나 자신의 그림자를 환상할 적마다 나는 등골이 서늘함을 금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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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都市)가 그러한 데 비하여 고향은 차라리 안전하였다. 우선 당장은 각다분하겠지만 일을 당한 마당에서는 역시 고향이 나을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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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대 살아온 고향이요 일가친척이 여러 집이 있어 생소하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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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 되어 난세를 당하여 제일 두려운 ‘사람’ 그 ‘사람’을 두려워 아니하겠으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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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토나마 조금은 있으니 하다못해 감자 포기를 심어 먹어도 주려죽기는 면할 수가 있으니 더욱 안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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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디어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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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만 그럴 뿐이 아니라 몇몇 친지들더러도 그런 소견과 실토정을 말하면서 반드시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만 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바엔 각기 고향으로 내려가기를 권하기까지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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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의 돌발적인 변화를 겪고 난 지금에 이르러, 지금의 심경을 가지고 그때 당시의 나의 그러던 심경이나 행동을 곰곰이 객관을 하자면 지배자의 압력이 약하여진 그 계제에 떨치고 일어나 해방의 투쟁을 꾀할 생각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서, 오직 저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데까지밖에는 궁리가 뚫리지 못한 것은 적실히 나의 약하고 용렬한 사람 됨됨이의 시킴이었음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 혼자만이 유독 그렇게 약하고 용렬하였는지, 혹은 대체가 개인적이며 소극적이요 퇴영적이기가 쉬운 망국 민족의 본성의 소치였는지 그 분간은 막시 모르되, 하여커나 그처럼 약하고 용렬하였던 것이 사실이요, 겸하여 무가내한 노릇이었었다. 그렇다고 시방은 제법 굳세고 용맹스러워졌다는 자랑이냐 하면 물론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약하고 용렬한 지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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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패전 그 다음에 오는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이것말고서 그 이전에 또 한가지의 절박한 위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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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시내에서 동쪽으로 30리나 나간 경충가도(京忠街道)의 한강 기슭 광나루(廣津)에 우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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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는 서울 시내로부터 소개를 하여 나오는 곳이지, 그래서 소개령이 내리자 집값이 연방 오르던 곳이지, 이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소개를 가도록 마련인 곳은 아니었다. 이것만 하여도 나는 실상 소개를 간다고 나설 터무니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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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가 처음으로 서울 하늘에 나타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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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나는 마침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 있다가 언덕의 솔숲을 거닐던 중에 공습 싸이렌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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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라고 하기보다는 강가에 가 바로 오똑이 솟은 조그마한 구릉이었다. 그 깎아지른 낭떠러지 바로 아래로는 시퍼런 강물이 바위를 스치고 흘러 흡사 평양의 청류벽을 연상함직한 곳이었다. 그뿐 아니라 강을 건너서는 퍼언한 벌판이요, 벌판이 다한 곳에 먼산이 암암히 그려져 있는 것이랑은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이라고 읊어낸 그것과 많이 비슷한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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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에는 당집이 있고 주위로 솔과 참나무가 울창하여 그늘이 짙었다. 잔디도 좋았다. 그런 그늘 아래 앉아서 장강을 굽어보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혹은 잔디에 누워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끝없는 시간을 지우기란 울적하고 삭막한 나의 생활 가운데 만만치 아니한 위안의 하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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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마침 이조사(李朝史)를 읽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의 대문에 이르렀던 참이라, 병자란 당시에 조선군이 국왕과 함께 최후의 농성을 하던 남한산성(南漢山城)이며, 그러다 국왕이 마침내 청병의 군문에 무릎을 꿇어 항복을 한 삼전도(三田渡)며, 그리고 양방의 수없는 장졸이 화살과 창 끝에 고혼으로 스러진 풍납리의 토성(風納里土城)이며를 멀리 바라보기가 이날 따라 감개 저으기 깊은 것이 없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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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흥폐의 모양을 보았으면서 못본 체 이날이 한결같이 유유히 흐르기만 하였으며 앞으로도 얼마든지 되풀이할 세상과 인사의 변천을 보면서, 그러나 못본 체 몇천 년 몇만 년이고 유유히 흐르고만 있을 저 강 무심타고 할까 부럽다고 할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참인데 그 몸서리가 치는 공습 싸이렌이 별안간 울리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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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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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마나 안해는 물통을 들고 쫓아나갔어야 했을 것. 어린것들이 걱정이 되어 집으로 달려갈 생각은 급하나 가던 중로에서 경방단 서방님네들한테 붙잡혀 부역을 하지 않으면 대피호로 끌려들어가기가 십상일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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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하다 보니 잠자리보다도 더 적게 비행기(B29) 한 대가 흰 가스로 꼬리를 길게 쌍으로 끌면서 유유히 까마득한 창공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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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젓하고 초연함이라니. 그 고요하고 점잖스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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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완상(玩賞)거리일지언정. 그가 털끝만치도 적의(敵意)를 발산하는 것이 있다거나 황차 비행기의 폭격의 전주(前奏)인 바야흐로 강렬한 위협과 공포감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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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마음을 갈앉히고 기다리는 동안 이윽고 공습경보는 해제가 되었다. 나는 일종 섭섭한 마음이면서 행길로 내려왔다. 그러자 군용 화물차 한 대가 기운차게 달려오더니 동네 한복판인 행길 가운데에 가 멈추어서면서 경기관총을 가지고 잔뜩 긴장한 2,3십 명의 길병이 차로부터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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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경보를 듣고 강 건너 송파(松坡)의 병영으로부터 이 광나루 지구를 경계하러 온 일대였었다. 그러나 그 경계라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온 무기가 하다못해 고사기관총도 아니요 보통 산병전에 쓰는 경기관총인 것과 그것을 동네 복판에다 맞추어 놓고서 대기를 하는 것과로 미루어 적기를 쏘자는 것이 아니고서 폭격의 혼란을 틈타 폭동이라도 일으킬 염려가 있는 주민 ─ 조선 사람을 약차하면 쏘아대자는 것임은 말하지 앉아도 번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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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휘하는 자를 비롯하여 병정들의 눈을 똑똑히 보았다. 곧 사람을 살상하여 마지 않겠는 독기가 뻗혀나오는 눈들이었다. 나는 소름이 쪽쪽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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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습을 당하면서 적기를 쏠 방비를 하여주기보다는 센징을 쏘아죽일 채비를 차리는 그들의 앙심과 살기를 머금은 그 눈 눈 눈…… 앞에(B29)의 폭격이 있다면 등 뒤에는 일병의 기관총 부리가 있는 그 기관총을 또한 피하기 위하여서도 나는 하루바삐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옮아앉아야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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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5년 4월 마침내 집을 팔고 ─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었으나 설리 장만한 집이었었다 ─ 그것을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세간도 대부분 팔고서 짐 가벼운 것만 꾸려가지고 고향으로 소개랍시고 하여 오고 말았다. 나에게는 그러나 일본의 패전 그 다음에 오는 것의 불안과 공포랄지 눈에 살기를 머금은 일본 병정들의 등덜미를 겨누는 기관총 부리의 위협이랄지 이런 것 외에도 멀찍이 궁벽한 시골로 낙향을 하여야만 할 사정이 따로이 또 있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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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황해도로 강연을 간 것이 나로서는 아마 대일협력의 첫걸음이라고도 할 만한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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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와 총력연맹이 설도를 하여 경향의 종교·사상·예술·언론·조고·교육 등 각계의 사람 2백여 명을 그러모아 전조선 각군(郡)의 면(面)으로 하여금 제각기 면단위(面單位)로 열게 한 소위 미영격멸 국민총궐기대회에 몇개 면씩을 찢어맞겨 보내어 전쟁기세를 돋구는. 그중에도 미영에 대한 적개심을 도발하는 ─ 강연을 하게 한 그 강사의 하나로 나도 뽑혔던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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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협력도 첫걸음이려니와 40평생에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강연이라고 하는 것을 하여 본 적이 도대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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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가 서툴러 못 나가겠다고 하였더니 조선말도 무방하다고, 실상은 상대들이 시골 농민들인만큼 ‘국어상용’의 본의에는 어그러지나 조선말이 더 효과적일 것인즉 이번만은 되도록 조선말로 하게 하기로 이미 방침을 세웠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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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에 한번도 연단에 서본 경험이 없어, 강연이 하여질 것 같지 않다고 하였더니, 경험은 없더라도 열(熱) 하나면 되는 것이라고, 생전에 한번도 연단에 서보지 아니한 사람이 이 기회에 분연히 일어서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 벌써 청중을 감격케 할 사실이 아니냐고, 그러니 너야말로 빠져서는 아니될 사람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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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누웠고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나중이야 앙화가 와 닿겠지만 그 당장은 새끼로 목을 얽어 끌어내지는 못하였을 것이었었다. 그러나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갔었다. 영을 어기지 아니하여야만 미움을 받지 않고 일신이 안전하고 한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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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서 살고 있을 때요 태평양전쟁이 일던 전전해인 1938년이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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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그믐인데 볼일로 서울을 왔다 3,4일 만에 내려갔더니 가족들이 초상난 집처럼 근심에 싸여 있었다. 조금 전에 개성경찰서의 형사 두 명이 와서 내가 거처하는 방을 수색을 하고 서신과 몇 가지의 원고와 잡지 얼러 몇 가지의 서적을 가져갔고, 그러면서 물어볼 말이 있으니 돌아오는 대로 곧 고등계로 오도록 이르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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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그날 아침 ×××군과 ×××군이 붙들려 갔다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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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군은 나한테를 종종 다니는 이십 안팎의 문학청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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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이 과민한 정비례로 무식하고 그와 반비례로 일거리는 없어 상관 앞이 민망하고 한 시골 경찰의 고등계 형사들이 정히 무료하다 못하면 더러 그런 짓을 하는 행티를 짐작치 못하지 않는 터라 치안유지법에 걸릴 아무 내력이 없는 것은 번연한 노릇이요, 하여 설마 어떠랴고쯤 심상히 여기고 선길에 경찰서로 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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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하여도 마치 뱀을 쭈쩍 만난 것처럼 섬찍한 것이 경찰서의 사람들이었다. 들어서기가 무엇인지 모를 무시무시한 것이 경찰서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신고서 한 장을 들이러 가기에도 들어서면 벌써 눈 부라림과 호통과 따귀가 올라붙거니만 싶어 덮어놓고 공포증과 불안을 주는 것이 경찰서요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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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비록 치안유지법에 걸릴 아무 내력이 없다고는 하여도, 그래서 심상히 여겼다고는 하여도 노상 태연한 마음일 수가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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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히 기다리게 한 후에 일인 형사가 ─ 빼빼 야윈 몸과 얼굴과 눈과 심지어 수족에서까지 사나움이 졸졸 흐르는 자로 얼굴만은 진작부터 알음이 있었다 ─ 그자가 별실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군과 ×군과 나와의 상종에 대한 것을 묻는 것이었었다. 언제부터 어떤 반연으로 알았으며, 한 달이면 몇번씩이나 찾아오며, 만나서 하는 이야기와 하는 일은 무엇이며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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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는 한 반년 전에 그들이 찾아와서 비로소 처음 만났고, 하는 이야기나 하는 일은 문학을 공부하는 초보에 관한 것으로 쓰는 공부는 어떻게 하며, 읽기는 어떠한 책을 읽어야 하며, 어떤 작가는 어떤 작품을 썼고 어찌해서 그것이 좋은 작품인 것이며, 또 그들이 책을 읽다가 이해치 못하는 대문이 있어 가지고 와 묻는 것이 있으면 설명을 하여주기도 하고 하노라고 말썽 아니될 범위에서 대답을 하였다.
93
마지막 형사는 딱 어르면서 표독한 눈매로 눈을 부라리었다.
101
소리와 함께 따귀를 따악 거퍼서 따악 따악 따악 따악……
106
“너 이번 지나사변에 대해서 이야기두 있잖어?”
108
“너 일본이 아무리 무력으루는 한때 지나를 정복을 한다더래두 결국은 가서 실패를 하구 만다구 그런 말을 했잖었어?”
109
“그건 일본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한민족(漢民族)은 이상한 동화력(同化力)을 가진 민족이 되어놔서 그동안 누차 변방 족속한테 무력정복을 당했으면서도 그런족족 정복자를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동화·흡수를 하군 해서 어느 시간이 경과한 후에 가선 정복자요 지배자였던 변방족속이 피정복자요 피지배자였던 한민족한테 먹히어버리고서 존재가 없어지고 존재가 없어지고 했느니라구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일밖에 없읍니다.”
110
“그러니깐 이번 지나사변두 결국은 일본이 실패를 한다는 그 뜻으루다 한 소리가 아냐?”
111
“그렇게 억지루 가져다 댄다면 못 못 댈 것은 없지만서두 내 본의는……”
112
“요 앙뚱스런 자식 같으니로고. 네 따위가 어따 대구 고 따위루…… 이 자식아 대일본제국의 흥망이 달린 앞에서 너이 조선놈 몇 마리쯤 땅바닥으루 기는 버러지만치나 명색이 있을 줄 알아? 그런 것들이 얻다대구 감히 그런 발칙한 소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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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구둣발이 내 몸뚱이를 함부로 짓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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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나는 생후 두 번째로 유치장이라는 것을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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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쳐넣어 놓고는 달포를 아무 소리 없이 저의 말대로 곯리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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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군과 ×군과 그리고 또 한 사람 붙잡혀 들어와 있는 ×군과 이 세 사람만은 가끔가다 하나씩 끌어내다가는 노글노글하게 매질을 하여 들여보내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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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소리도 없이 처박아 두기만 하는 것은 당하는 사람으로는 무위한 유치장의 하루씩을 지우기의 답답하고 고통스럼과 일이 장차 어찌 되려는가의 불안 초조와 이런 것으로 하여 악형이야 당할값이라도 차라리 자주 끌려나가기만 못한 노릇이었다.
120
정복자와 밑 그의 수족 노릇을 하는 일부 원주민으로 이루어진 지배자가 피정복자를 닦달함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인간을 학대하기에 경찰서의 유치장 이상 가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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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에다 냉수를 한 통씩 길어다 놓고 국자를 담가놓고 그 물을 떠 간수들이 저희들의 차도 달여 먹고 죄인들이 물을 청하면 한 국자씩 떠주고 하되 죄인들은 방방이 한 개씩 두어둔 양재기에다 물을 받아서 마시도록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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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내기 투전을 하다 붙잡혀 들어온 촌 농부 하나가 있었다. 지극히 가벼운 죄인이요, 또 생김새도 어리숙하게 생긴 젊은 친구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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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죄인이면 감방으로부터 불러내어 유치장 바닥의 비질도 시키고 죄인들의 잔시중 ─ 물을 떠준다거나 휴지를 들여준다거나 하는 심부름을 간수들 저네의 대신 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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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내기 투전꾼은 유치장 바닥을 다 쓸고 나서 마침 목이 말랐든지 물통에서 국자로 물을 떠 벌컥벌컥 시원히 마시고 있었다.
127
하고 벽력 같은 고함과 더불어 간수가 저의 자리로부터 쫓아 내려오더니 뺨을 치고 구둣발길로 걷어차고 하였다.
128
죄인은 국자를 놓치고 회사무리 바닥에 가 쓰러져 미처 다 못 삼킨 물과 볼이 터져나오는 피를 함께 흘리면서 연방 아이구머니 소리만 질렀다.
129
간수는 죄인의 몸뚱이를 옆구리고 머리고 상관 없이 퍽퍽 걷어 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꾸짖는 것이었었다. 국자에다 왜 더러운 주둥이를 대느냐고. ‘요보’는 도야지보다 더 더러운 놈들이라고.
130
도야지보다 더 더러운지 어쩐지 그것은 막시 모르나 정복자란 것이 피정복자의 앞에서는 도야지만큼도 명색이 없는 것만은 이 한가지로 미루어서도 분명하였다.
131
나는 유치장에 들어가던 날의 첫번 식사인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흥분이 되어 식욕이 없는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다지 입이 호강스럽지는 못한 나로서도 차마 그것을 밥이라고 입에 떠넣을 뜻이 나지 아니하였다. 찌그러지고 오그라지고 시꺼멓게 때꼽재기가 끼고 한 양은 벤또에다 골싹하게 담은 밥이라는 것은 쌀알갱이는 눈 씻고 잘 보아야 하나씩 둘씩 섞였을 뿐의 노오란 조밥이요, 찬이라는 것은 산에 가서 되는 대로 그럴싸한 풀잎을 뜯어다 슬쩍 데쳐서 소금을 뿌려 주물럭주물럭한 두어 저깔의 소위 산나물 한 가지로 하였다. 밥에는 그러나마 만주 좁쌀에 고유한 그 세모지고 얄따란 다갈색의 잔모래가 얼마든지 그대로 섞여 있고.
132
내 밥이 저깔도 대지 않은 채 그냥 도로 나가게 된 것을 알자 옆에 있던 절도범이 혼잣말처럼
134
하고 슬며시 집어가더니 볼퉁이가 미어지도록 퍼넣는 것이었었다. 그것을 여남은이나 되는 동방(同房)의 죄인 대부분이 너도 나도 하고 덤벼들어 단 한 젓갈이라도 빼앗아 먹으려고 다투고 불뚝거리고 욕질을 하고, 거기에 밥에 대한 인간의 동물적인 싸움이 잠시 동안 벌어지고 있었다.
135
이튿날도 나는 온 종일 먹지 아니하였다.
136
두툼한 솜바지 저고리에다 솜버선에다 차입한 담요까지 지니고 지내고 사식(私食)을 차입받아 먹고 하는 사기죄인 ─ 그가 이 5호방에서는 제일 고참으로 열여섯달째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점심때에는 나더러 간수한테 말을 하면 사식을 들여주니 이따 저녁부터라도 받아먹도록 하라고 권고하였다.
137
나는 글쎄…… 하고 애매히 대답하고 말았다. 나는 한 끼에 1원 50전씩 하루에 4원 50전이나 드는 사식을 들여 먹을 형편이 되질 못했었다.
138
저녁 역시 나는 관식 벤또를 동방엣 사람들에게 그대로 내주었다.
139
사기죄인이 저의 사식에서 부연 쌀밥을 절반이나 덜고 굴비랑 군고기랑 곁들여 내 앞으로 밀어놓으면서
140
“이거라두 좀 자시우. 보아허니 그렇게 함부로 지나든 아녀시든 분네 같은데, 그렇다구 사뭇 저렇게 굶기로만 들어서야 쓰겠수.”
142
미상불 나는 현기증이 나도록 시장하였다.
143
보드라운 흰밥과 맛있는 반찬이 어금니에서 신침이 흐르고 회가 동하였다. 그러나 나는 세 번 네 번 권하여서야 겨우 두어 젓갈 밥을 뜨는 시늉하고 말았다.
144
사식은 들여 먹을 터수가 못 되면서 입만 가져가지고 관식을 먹지 않고 앉아서 남이 덜어주는 사식 덩이를 멀쩡히 얻어먹다니 염치가 아니요 양반 거지의 주접이었지 갈데없는 짓이었다.
145
“그래두 자셔야지 별수 없읍넨다. 노형두 지끔은 첨이라 다 심사두 편안치 않구 해서 그렇겠지만서두 인제 두구 보시우. 배고픈 걱정 외에 더 걱정이 없을 테니. 어서 나가구픈 생각 집안일 죄다 잊어버리구 거저 먹을 것 생각밖엔 나는 게 없는걸.”
147
나는 설마 그러랴 하였으나 이레가 못 가서 그의 말이 옳았음을 나는 깨닫지 아니치 못하였다.
148
쌀알갱이라야 눈 씻고 보아야 하나씩 둘씩 섞였을 뿐의 불면 알알이 다 날아갈 듯 퍼슬퍼슬한 노란 조밥, 씹으면 모래와 흙이 지금지금하는 그 알뜰한 조밥과 쓰디쓴 산나물이 아니면 시꺼멓게 썩은 세 조각의 짠 무 조각 반찬이 어쩌면 그렇게도 입에 회회 감기고 맛이 나는지 35년의 반성을 두고 나는 일찌기 그런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라고는 없었다.
149
납작한 양은 벤또에다 골싹하니 푼 그 밥이 아무리 양이 적은 나에겔망정 양에 찰 이치가 없었다. 가에 붙은 좁쌀 한 알갱이까지 깨끗이 다 씻어 먹고 나쁜 젓갈을 놓으면 젓갈을 놓으면서 바로 배가 고프고 다음 끼니가 기다려졌다.
150
아침 일곱시면 밥구루마가 떨걱거리면서 온다.
151
아침을 먹고 나서는 열두시 점심이 올 때까지 간수의 앉았는 등 뒤에 걸린 시계를 백 번도 더 내어다보면서 떨걱거리는 밥구루마 소리를 기다린다.
152
가까스로 점심을 먹고 나서는 이내 또 백 번도 더 시계를 내어다보면서 여섯시 저녁을 기다린다.
153
이렇게 오직 밥을 기다리기를 일삼으면서 하루 하루를 지우곤 하던 것이었었다.
154
내가 나를 생각하여도 천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먹을 것만 탐하는 도야지나 다름이 없는 성싶었다.
155
모처럼의 기회는 기회겠다, 가만히 앉아서 정신을 집중시켜 사색 같은 것이라도 하염직한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책망은 하여 보나 첫째는 본시가 그런 유유스런 성격이 되질 못하였고 겸하여 형(刑)이 결정된 감옥의 죄수가 아니어 놓아서 도저히 안존할 수가 없었다.
156
아뭏든 조금은 자제력(自制力)이 있다고 할 내가 그러할 제 여느 잡범(雜犯)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157
누가 밥을 남기든지 통째로 안 먹는 것이 있든지 하면 서로들 먹으려고 다투는 양이란 차마 보기에 민망한 것이었었다.
158
규칙이 남는 밥은 도로 내보내되 아무도 함부로 먹지 못하도록 마련이었고, 그래서 그 규칙을 범하였다 발각이 나면 죽을 매를 맞고라야 말았다. 그러므로 남는 밥은 몰래 먹어야 하였고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하건만 그들은 감히 모험하기를 주저치 아니하였다.
159
제3호방에 밥 하나가 더 들어간 것이 드러났다.
160
4월이라지만 유치장의 감방은 겨울 진배없이 추웠다. 간수는 제3호 방에다 밥 하나를 더 먹은 벌로 물을 세 통이나 끼얹었다. 그리고 밥을 나눠 먹은 네 사람은 창살 밖으로 손목을 묶어 매달아놓고 한나절이나 격검채로 두들겨팼다.
161
해방 후의 경찰서와 그 유치장의 범절이 어떠한지는 막시 모르나 일본식 경찰은 피의자(被疑者)에서부터 이렇게 잔학하고 동물적인 대우를 하였었다.
162
저네의 소위 ‘도야지울’에서 과연 도야지의 대우를 받으면서 나 자신 역시 도야지 이상이질 못하는 채 한 달을 무료히 썩었고 한 달 만에 비로소 취조실로 불리어나갔다.
163
그 몸과 얼굴과 눈과 심지어 수족까지 사나움이 질질 흐르는 일인 형사였다.
164
“독서회를 조직한 사실을 ×××이가 자백을 했는데 너는 그래도 모른다고 버틸 테냐?”
165
형리는 쩡쩡 울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다잡았다.
167
나는 섬뻑 무어라고 대답할 말이 없어 두릿거리다 반문하였다.
171
모르면 몰라도 ×군이 매에 부대끼다 못해 허위의 자백을 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상투수단인 넘겨짚기일 것이었었다.
172
이날의 문초에서 나는 그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는가를 비로소 알아채었다.
173
여기에 좀 반지빨라 보이는 녀석이 있어 그 주위에 역시 주의거리의 젊은 아이놈들이 모여 문학을 공부한답시고서 책도 나눠 읽고 의견도 교환하고 시국에 대하여 방자스런 방담을 더러 하는 모양이어…… 이만한 건덕지면 혹시 잘만 납뛰면 독서회쯤 사건 하나를 뚜드려 만들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었었다. 마치 대장장이의 마치가 뚜드리는 곳에 아무것도 아니던 녹슨 헌 쇳덩이가 뻐젓이 도끼며 식칼이 되어 나오듯이 저 전라북도 경찰부가 뚜드려 만든 카프 사건도 그런 솜씨의 요술이었을 것이었었다.
174
한 열흘 후에 나는 두번째 끌려나갔다. 그동안 ×군은
175
“독서회 일건은 절대 부인하시오. 그들은 저더러 선생님이 벌써 자백을 하였다고 하지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일기책을 뺏겼는데 거기에 더러 선생님한테 불리한 것을 쓴 것이 있어서 저 그것만이 걱정입니다.”
176
하는 쪽지를 연필로 감방 휴지에 적어보낸 것을 받았고 그것으로 나의 추측이 한편치가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177
이번에는 그는 일인 형사의 짝패인 머리통이 엄청나게 크고 짧은 다리로 여덟팔자 걸음을 아기작아기작 걷는 김(金)가라는 조선 형사였다. 사납고 가혹하기로 개성 일판에서 이름이 난 형리였었다.
178
그런 김가가 뜻밖에 부드러운 얼굴로 공대하는 말까지 쓰면서 문초를 하였다.
179
“그 왜 고집을 부리구 생 고생을 하슈?”
180
“고집이 아니라 없는 사실을 부르라니 어떡헙니까.”
181
“독서회라는 이름은 짓지 아녔드래두 독서회의 행동을 했으면 사건은 성립이 되게 마련인 법인 줄 알면서 그러슈?”
182
“무얼 독서회의 행동을 한 것이 있어야지요?”
183
“가사 또 사건은 성립이 아니 된다구 치더래두 당신이 시방 미움을 받구 있는 것만은 사실인데, 미움을 주기루 들면 한정이 없는 걸 모르슈? 1년이구 이태 3년이구 쳐가둬 두구서 곯리면 곯았지 별수 있나?”
184
고문보다도 또는 감옥으로 가서 징역을 살기보다도 가장 두려운 악형은 민두름히 그대로 경찰서 유치장에다 가두어 두고 생으로 사람을 썩히는 것이었었다.
185
사상 관계자로 붙잡혀 들어갔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는 사람이면서 몇해씩을 현재 그렇게 생으로 썩고 있는 사람이 전조선의 경찰서 유치장을 턴다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사실이었다.
186
또 사상 관계자만이 아니요 멀리 다른 곳에 실례를 찾을 것이 없이 당장 내가 갇혀 있는 한 방에도 사기횡령으로 몰리어 붙잡혀 들어와 가지고 1년과 넉 달이 되는 사람이 있지가 않은가.
187
나는 무쇠의 탈을 쓰지 아니한 ‘무쇠탈’을 연상하고 속으로 전율하였다.
188
김가는 짐짓 부드러운 얼굴과 공손한 말로써 회유를 하는 한편 무형의 ‘무쇠탈’로써 은근히 위협을 하자는 심담인 모양이었다.
189
나는 없는 죄를 자백하고 가서 징역을 사느냐 경찰서 유치장에서 장차 얼마일지를 모를 세월을 썩느냐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하였다.
190
이때에 나를 구원하여 준 것이 생각지도 아니한 한 장의 엽서였었다.
192
일인 형사가 끌어내 가더니 어인 셈인지 빈들빈들 웃으면서
195
나는 섬뻑 무어라도 대답을 못하고 눈치만 보았고 했더니 재차
200
그러고는 한참이나 내 얼굴을 여새겨 보고 나서
204
“조선 사람 문인들이 모여서 문학으루 나랏일을 도웁자는 것입니다.”
206
“총독부와 민간의 유력한 내지인들이 서둘러 주었읍니다.”
208
“찬조회원이나 명예회원은 내지인이 많습니다.”
209
“조선문인협회에서 북지 방면으루 황군위문대를 파견한다구?”
212
그러면서 한 장의 엽서편지를 내어놓았다.
213
문인협회로부터 북지 방면으로 황군위문대를 회원 중에서 파견하고자 하는데 그 구체적 협의회를 아무날 아무곳에서 열겠으니 참석하라는 엽서가 지난번 서울을 가기 조금 전에 온 것이 있었다. 바로 그 엽서였었다. 나중 놓여나가서 알았지만 내가 놓여나가던 10여일 전에 두번째 와서 수색을 하였고, 그때에 잡지 틈사귀에 가 끼었다. 떨어지는 이 엽서를 가져가더라고 집안 사람이 말하였다.
214
“거기 보면 3월 28일인가 위문대 파견하는 협의회를 열겠다고 했는데 참석했는가?”
215
“했읍니다. 실상 지난번에 서울 간 것도 그 때문이었읍니다.”
217
“회원 중에서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몇 사람을 뽑아 파견하기로 했읍니다.”
219
“그것은 전형위원에서 맡아 하기로 했읍니다.”
223
자는 이윽고 얼굴과 음성을 준절히 하여가지고
224
“이번 사건이 그대들은 암만 그렇게 부인을 해도 증거가 역력히 있고 하니깐 성립을 시키자면 충분히 시킬 수가 있단 말야 응?”
226
“그렇지만 첫째는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렇게 된 모양같고, 또 일변 조사를 한 결과 그대는 조선문인협회의 회원으로 대단히 열심이 있는 사람이 판명이 되었고 해서 이번 일은 특별히 용서를 하는 것이니 응?”
228
나는 실상 서울에 가 있었으면서도 그 협의회에는 참석을 아니하였었다. 회의 경과도 그래서 노상에서 우연히 ×××를 만나서 이야기로 들었을 따름이었었다.
229
또 형리는 조사를 해본 결과 어쩌고 하였지만 내가 그 뒤에 서울로 가서 알아본 것에는 개성경찰서로부터 문인협회서 나에게 대한 신분의 조회 같은 것은 온 것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었다.
230
“또 다른 세 사람은 나이알라 아직들 어리고 한데 전과자의 신분을 가져서는 정상이 가긍할 뿐 아니라 장차 나라를 위해 일을 할 때에도 상치가 될 것이요 해서 십분 용서를 하는 것이니 응?”
232
“이훌랑 각별히 주의를 하고 더욱더욱 나라일에 충성을 해야 해.”
234
“이 다음 만일 무슨 불미한 일이 있으면 그때는 일호 용서 없다?”
236
돈의 힘으로 경찰서를 쥐락펴락하고 형사나 순사 나부랑이를 하인 부리듯 하는 개성 제일 갑부의 젊은 자제가 나의 가형과 친구의 청을 받고 그 두 형사를 불러 술을 먹이는 길에 이 꺽지 같은 자식들아 할 일이 없거든 발바닥이나 긁고 앉았지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때려 가두어놓고는 지랄들이냐고 시퍼렇게 지청구를 해주더라는 소식을 놓여나와서 들었었다.
237
그것이 보람이 있기도 하였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역시 문인협회의 한장 엽서였던 듯싶었다.
238
문인협회에 대한 대답 가운데 요긴한 것은 임시로 그 자리에서 나에게 유리하도록 꾸며댄 대문이 많았으나 아뭏든 대일협력이라는 주권(株券)의 이윤(利潤)이 어떠하다는 것을 실지로 배운 것이 이 개성사건이었다.
239
나중 가서야 어찌 되었든 우선 당장은 나가지 않더라도 새끼로 목을 얽어 끌어내지는 아니할 것이며 누워서 배길 수가 없잖아 있는 소위 미영격멸국민총궐기대회의 강연을 피하려 않고서 내 발로 걸어나갔던 것은 그처럼 대일협력의 이윤이 어떻다는 것을 안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었다.
240
많은 수효의 영리한 사람들이 저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일본 사람을 따랐다.
241
역시 적지 아니한 수효의 사람이 핍박을 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 사람에게 복종을 하였다.
242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
243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는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었다.
245
눈이 쌓이고, 한참 춘2월 초생이었다.
246
송화군(松禾郡)에서 맡은 곳을 다 마치고 마지막 풍천읍(豊川邑)에서의 길이었었다.
247
강연을 마치고 나니, 다음 예정지로 가는 버스가 두 시간 후에 떠나는 것이 있었다.
248
주인편의 여러 사람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249
이 고장에 알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고 의아하면서 나가 보았더니, 초면의 두 청년이었다. 하나는 건장하고, 하나는 그와 정반대로 얼굴이 병적으로 창백하고 몸이 파리한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250
나는 그들이 모르는 사람인 것을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더럭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반가왔다.
251
그동안 다섯 차례를 강연을 하였는데, 청중 가운데 밀끔밀끔하니 땟물이 벗고, 표정이 다부진 청년들이 한 패씩 들어와 있지 않은 자리가 없었건만, 내가 강연이랍시고 맨 멀쩡한 소리를 지껄이고 섰어도 단 한번인들
253
하고 고함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254
황차, 밤 같은 때 사처로 달려들어 몰매질을 하고 하는 따위는 싹도 볼 수가 없었다.
255
안전과 무사가 물론 다행치 아니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까지가 이다지도 기운이 죽었는가 하면 적막하고 슬펐다.
256
그러던 차라, 미지의 젊은 사람네의 찾음을 만나니, 가슴 더럭한 것과는 따로이, 여기는 그래도 기개 있는 젊은이가 있는 것이나 아닌가, 노백린(盧伯麟) 씨의 생지가 그래도 다른가 보다 싶어, 그래 반가운 생각이 들던 것이었었다.
257
그러나 나는 그들이 너무도 적의가 없어 보이고, 말이랑이 공순한 것이며, 또 몰매질을 하러 온 것으로는 단둘이라는 것이 과히 단출한 것이며에 이내 도로 안심과 실망을 함께 느꼈다.
258
건장한 편이 노(盧)군, 창백하고 파리한 편이 이(李)군이었다.
261
“이따, 오후 버스로 떠나기루 했읍니다.”
262
나의 대답에 둘이는 문득 절망을 하면서 다시 노군이
263
“웬만하시면 낼 아침 버스로 떠나시게 하시구서, 오늘 저녁 저희들허구 좀 만나주섰으면……”
265
둘이는 서로 보면서 못내 섭섭하여 하다가, 이군이 이번엔 묻는다.
266
“정 그시러다면 단 한 시간이나 30분이라두 여기서 점심이 끝나시는 대루 저이허구 좀.”
268
주먹이 나올지 팥죽이 나올지 그것은 나중 보아야 할 일이요, 나는 나로서 지방의 젊은이들이 이 판국에 바야흐로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바라며 하는지를 아는 것도 일종의 의무처럼 생색 있는 일이었다.
269
첩경 그러기가 쉽듯이, 점심 자리가 술자리로 벌어지는 것을 속히 속히 끝내게 하느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워낙 시간의 여유가 많지 못했던 소치로 젊은이들이 기다리는 자리는 가 앉았다 그대로 일어서야 할 만큼 시간은 촉박하였다.
270
사과와 과실과 차를 준비하여 놓은 자리에, 노군과 이군 외에 한 또래의 청년이 두어 사람과 하나는 음악을 하나는 문학을 각기 좋아한다는 소녀도 둘이 와서 있었다.
271
다시 초면 인사를 하고, 둘러앉아서 한 잔씩의 차를 마시기가 바쁘게 버스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
272
노군과 이군이 서로가람, 내일 아침에 떠나도록 하고, 하룻밤 자기들과 이야기를 하여주어 달라고, 지방에서는 선배들을 항상 그리워하는데 모처럼 기회를 그냥 놓치기가 여간 섭섭치 않다고 간곡히 만류를 하였다.
273
나는 그날 풍천읍을 떠나 송화 온천까지 가 거기서 장연(長淵)으로부터 나를 맞으러 오는 사람과 만나, 다음날 장연으로 가서 준비를 하여 가지고 그 다음날부터 강연을 하기로 다 배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연편과 연락에 어긋나고, 가사 그래서 장연에서의 예정에 상치가 생기는 한이 있다더라도 이 젊은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어설 수는 없었다.
274
밤에는 열둘인가로 사람이 더 불었었다.
275
20으로부터 24,5세까지의 대개는 중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모두가 준수한 젊은이들이었다.
277
“우리는 시방 앞날이 깜깜합니다. 자꾸만 비관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279
그야 대답을 하기로 들면, 시원히 하여 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10여 명 이상이나 모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막상 다 미더운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이 자리에서 한 말이 한 집 건너고 두 입 건너 필경엔 경찰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고.
280
명색이 선배라고 믿고서 그들은 진심의 호소를 하던 것이었다.
281
모인 전부가 낮에 강연회에도 와서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낮에 강연회에서 지껄인 소리는 본의가 아니고 할 수 없이 그런 것이요, 진심은 그렇지 않거니 이렇게 나를 믿고서 자기네도 진심을 토로함이었었다.
282
소문이 퍼질까 저어하여, 경찰의 형벌이 두려워, 이 나를 믿고서 와 안기어 고민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의 진심에 대하여 한가지로 진심이지 못하는 나의 비겁함 그 용렬스럼.
283
나는 나 자신이 야속하고 또한 슬펐다.
284
“너무 범위가 막연한데…… 가령 어떤 방면으루 말이지요?”
285
나는 아무려나 우선 이렇게 반문을 하였다.
286
“여기 모인 우린 태반이, 징병이나 학병으루 끌려나가야 할 사람입니다. 끌려나가서 개주검을 해야 합니까?”
288
여럿은 먹기를 멈추고, 긴장하여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289
“우리가 앞으로 살아나가는 데 일본 사람과 꼭같은 권리를 주장하자면,피도 좀 흘려야 아니할까요? 피를 흘리면 흘린 피의 댓가를 요구할 권리가 생기지 아니합니까?”
292
그 불만이어 하는 것이 만족하여 하느니보다 얼마나 다행스런지 몰랐다.
294
“도무지 차별대우가 아니꺼워서 못견데겠어요.”
295
“차별대우를 받지 않도록 우리두 실력을 가져야 하겠지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그 사람네보다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해야 하겠지요. 우리 전체가 노력을 해서 그만한 실력을 가지는 다음에야 언감히 우리를 하시하겠읍니까?”
296
“같은 학교를 같은 해에 일본 아이는 꼴찌루, 조선 사람은 첫찌루 졸업을 했는데, 한날 한시에 들어간 회사에서 월급이 우선 다르지요. 일본 아이는 조금 있으면 승차를 하는데, 조선 사람은 만날 그 자리지요. 실력두 별수가 없잖아요?”
297
“개인으로는 우리가 일본 사람보다 나을 사람이 있다지만, 전체로야 어디 그렇습니까? 우리 전체가 일본 사람 전체보다 나은, 적어도 같은 수준에 이르도록 실력을 가져야 하고, 그때를 기대려야 하겠지요.”
298
이 실력론이나 먼저의 피의 댓가의 주장론, 친일파 가운데에서도 제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고, 내선일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극단파에서 하는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친일파는 친일파이면서도 총독부와 군부의 미움과 주목을 받는 패들이었다.
299
나는 목마른 젊은이들이 바라는 한 그릇의 시원한 냉수를 주는 대신, 그런 친일파의 괴설을 빌어 결국 한 숟갈의 쓰디쓴 소태를 주고 만 셈이었다.
300
뼈다귀가 부러지거나 골병이 들도록 늑신 몰매를 맞느니보다도 더 아픈 마음을 안고 사관으로 돌아가 누웠다.
301
잠을 이루지 못해 하는데 이군이 혼자 찾아왔다.
302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너무 여럿을 오게 해서 선생님 퍽 거북하셨을 줄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303
이군은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 앉아서 사과 겸 변명을 한 후에
305
하고 침통히 묻는 것이었었다. 징병이며 학병에 대한 것이었었다.
307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309
말없이 나를 보는 이군의 그 창백한 얼굴은 빛났다.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괸 눈물이 인하여 넘치어흘렀다.
311
“이왕 한마디 부탁이 있소이다. 꿋꿋한 정신을 길르구 지켜 주십시요. 강한 자에게 굽혀 목전의 구차한 안전을 도모하는 타협생활보다 핍박을 받을지언정 굽히지 않고 도리어 그와 싸워 물리치겠다는 꿋꿋한 정신을 길르구 이겨주십시요. 우리가 과거 수천년래 내륙민족의 압제를 받은 것이나 오늘날 일본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나, 우리를 침해하고 우리를 억누르는 외적과 마조 싸워내는 꿋꿋한 정신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강한 자에게 굽히고 아첨하여 구차한 일시일시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타협주의 이것이 우리 민족성의 큰 결함입니다. 오늘의 우리의 불행은 이 민족성의 결함에서 온 것이요, 그 결함을 고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민족적으로 멸망을 당하거나, 내일도 오늘처럼 영원히 불행한 것입니다. 시방 우리한테 특별히 젊은이들 한테 절절하게 필요한 것은, 굴치 않고 싸워내는 꿋꿋한 정신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따로따로이만 꿋꿋했자 아모 소용도 닿지않습니다. 여럿이 모이는 데서 비로소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313
이군은 머리를 소곳하고 듣고만 있었다.
314
나는 음성을 고치어 그 다음 말을 하였다.
315
“그러나, 조심하십시요. 첫째 서로 친하다는 것과 믿고서 속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둘째 혈기를 삼가시요. 혈기는 경솔과 상거가 항상 가차운 것이니까요.”
317
“그러고 또 한가지 내 소견을 말하라면, 시방 이 야만된 폭력주의가 아무래두 인류 역사의 노말한 현상은 아닐 것입니다. 정녕 한때의 변조 같습니다. 과히 암담해하거나 실망은 들 할라 마십시요. 수히 정상상태로 돌아갈 날이 올 듯두 합니다.”
318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신 말씀 명심하겠읍니다. 믿겠읍니다.”
319
이군은 고개를 들고 아직도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면서 목멘 소리로 숨가쁘게 그러던 것이었었다.
320
이 밤에 나는 조금은 속이 후련하고 짐이 덜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속하여 뭇사람을 모아놓고 미국 영국은 나쁜 놈들이요, 일본이 옳고, 전쟁은 시방이 한 고패요, 조선 사람은 어서 바삐 증산을 하고 저축을 많이 하고 하여 이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써 빨리 끝내도록 협력해야 한다는 강연을 하고 다니는 사람 ─ 보기 싫은 양서동물(兩棲動物)이 아니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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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944년 5월에는 작가 다섯 사람과 화가 다섯 사람을 추려 소설가 하나에다 화가 하나를 껴 다섯 패를 만들어 가지고 전라남도 목포의 목조조선소(木造造船所), 강원도 영월 무연탄광, 평안북도 강계의 무수알콜(無水酒精) 공장, 같은 평안북도 용천의 불이농장, 역시 평안북도 양시의 알미늄 공장 이 다섯 곳 생산 현장으로 그 한패씩을 파견하는 한패에 뽑히어, 나는 양시의 알미늄 공장으로 갔었다. 할 일이라는 것은, 가서 한 일 주일 가량씩 묵으면서 생산현장의 실지 견문을 얻어가지고 돌아와 화가는 증산하는 그림을, 소설가는 증산소설을 각각 쓰는 것이요, 주최와 발안은 총력연맹 문화과였었다.
322
나는 다녀와서, 2백자 스무 장인가를 써 내놓았고, 일어로 번역을 누구에겐지 맡겨서 시킨다고 하더니, 그대로 우물쭈물 발표는 되지 않았었다.
323
다시 그 해 가을에는 강원도 김화(金化)로 전년의 황해도 적과 비슷한 강연을 갔었다.
324
이보다 조금 앞서 매일신보에다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325
검열이, 신문사의 편집자를 시켜 작자에게 다짐을 요구하였다. 반드시 시국적인 소설이어야 할 것과, 소설의 경개를 미리 제출할 것과, 그 경개대로 충실히 써나갈 것 등속의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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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생화(生貨)가 그때나 지금이나 매문(賣文)이요, 매문을 아니하고는 2합 2작의 배급쌀조차 팔 길이 없는 철빈…… 요구대로 다짐을 두고 쓰기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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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가끔 배신(背信)을 하다가, 두어 차례나 불려들어가 검열관 ─ 퇴직 순검한테 꾸지람도 듣고, 문학 강의도 듣고 하였다. 잘하나 못하나 20년 소설을 썼다는 자가 늙마에 와서 순검한테 문학 강의의 일석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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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변 생각하면 받아 싼 욕이었다.
329
바이런인지는 자다가 아침에 깨어보니 제가 그렇게 유명하여져 있더라고 하였다지만, 나는 하루 아침 잠이 깨어 수렁(無底沼) 가운데에 들어섰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한정 없이 술술 자꾸만 미끄러져 들어가는 대일협력자라는 수렁.
330
정강이까지는 벌써 미끄러져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시방이라면 빠져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331
만일 이때에 빠져나오지 않는다면, 정강이에서 그 다음 허벅다리로, 허벅다리에서 배꼽으로, 배꼽에서 가슴패기로, 모가지로 이마로, 그러고는 영영 퐁당…… 하고 마는 것이었었다.
332
몸의 터럭이 있는 대로 죄다 곤두설 노릇이었다.
333
서울서 떠나 궁벽한 시골로 가 있기만 한다면 강연 같은 것을 하라고 불러내는 ‘곶감’의 미끼에 반겨 응하고 나설 기회가 태반 봉쇄될 것이었다.
334
시골로 가서 있으면 한 가락의 호미가 보리밥의 반량이나마 채워주어 창녀(娼女) 못지 아니한 그 매문질은 아니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335
일본의 패전, 그 다음에 오는 것의 불안과 공포랄지, 눈에 살기를 머금은 일본 병정들의 등덜미를 겨누는 기관총 부리의 위협이랄지, 이런것 외에도 멀찍이 궁벽한 시골로 낙향을 하여야만 할 또 한가지의 다른 사정이란, 곧이 대일협력의 수렁으로부터의 도피행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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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코 용감히 뿌리치고서 일어서고 하였던 바는 아니었다. 역시 나답게 용렬스런 가만한 도피행일 따름이었다.
338
새삼스럽게 무슨 지조(志操)가 우러나는 것이 있었음도 아니었다.
339
후일에 혹시 문죄(問罪)라도 당하는 날이 있을까 보아 그날에 벌을 가볍게 하자는 계책인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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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행적을 사는 고장을 옮김으로써 남에게 숨기기라도 하자는 것은 더우기 아니었다. 그런 점으로는 차라리 객지인 광나루가 더 유리하였다.
341
오직 그 대일협력이라는 사실에서 풍기어 나오는 악취 그것이 못견디게 불쾌하였고, 목전에 그것을 면하고 싶은 지극히 당면적인 간단한 욕망으로서일 뿐이었다.
342
아무리 정강이께서 도피하여 나왔다고 하더라도, 한번 살에 묻은 대일협력의 불결한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장화였다. 씻어도 깎아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죄의 표지(罪의 標識)’이었다. 창녀가 가정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생리(生理)가 숫처녀로 환원되어지는 법은 절대로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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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강이께서 미리 도피를 하여 나왔다고 배꼽이나 가슴패기까지 찼던 이보다 자랑스럴 것도 없는 것이었다. 가사 발목께서 도피를 하여나오고 말았다고 하더라도 대일협력이라는 불결한 진흙이 살에 가 묻었기는 일반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강이까지 들어갔으나 발목까지만 들어갔으나 훨씬 가슴패기까지 들어갔으나 죄상의 양에 다소는 일을지언정 죄의 표지에 농담(濃淡)이 유난히 두드러질 것은 없는 것이었다.
345
소개랍시고 고향으로 내려오기는 하였으나 막막하기 다시없었다.
346
4월이면 여느때에도 춘궁이니, 보릿고개니 하여 넘기가 어려운 고패인데, 지나간 해가 연사가 좋지 못하였었다. 그런데다 거두지도 못한 벼를 공출로 닥닥 긁어갔었다.
347
그러고는 명색이 배급입네 환원미입네 하고 한 달이면 한 집에 쌀 한두 되에다 썩은 강냉이 몇 되씩을 약 주듯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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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태반이 하루 한때 풀잎죽으로 아사를 면할락말락하면서 누렇게들 떠가지고 춘경이 돌아왔건만 파종할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환중에 보리가 흉년이었다. 백성들은 장차 10월까지 이 봄과 여름을 살아나갈 방도가 막연했다. 나의 고향집에는 80 넘은 노모와 60의 장형 내외가 있었다. 거기에다 나에게 딸린 가솔이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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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덟 식구를 나는 내가 책임을 저야만 하였다.
350
쌀은 사기도 어려웠거니와 내가 뭉뚱그려 가지고 내려간 3천 원의 돈으로 쌀을 사서 먹자면, 한 달을 지탱할까 말까 한 것이었다. 그러나마 나는 그 돈 3천 원으로 농자(農資)를 삼아 금년 농사를 지어야 하였다. 붓을 꺾어버린 이상, 서울서처럼 원고료의 수입은 전혀 없을 터이었다. 죽으나 사나 농사 한 가지에다 생도(生途)를 의탁하는밖에 없고, 그리하자면 그 돈 3천 원을 당장 아쉽다고 먹어 없애는 수는 없었다. 나는 하릴없이 80 넘은 노모를 그림자 보이는 나물죽을 드렸다.
351
배탈이 난 네살박이 어린 놈을, 썩은 배급 강냉이밥을 먹였다.
352
논(水田)농사는 숙련된 기술과 나로서는 감당치 못할 울력이 드는 것이라 부득이 비싼 삯군을 사대어야만 하였지만, 밭농사는 안해와 함께 둘이서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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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논의 신곡이 날 때까지 보태어 먹을 것으로 서속도 심고 감자도 심었다. 밭벼(陸稻)도 심었다. 채마도 가꾸었다.
354
그런 중에도 제일 빨리, 제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강냉이와 호박을 구석구석이 돌아가면서 많이 심어놓았다.
355
안해나 나나 일찌기 하여 보지 못한 노릇이라 대단히 힘에 겨웠다. 일쑤 코피를 쏟았다. 가끔 몸살이 나 앓기도 하였다.
356
몸 고단한 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시장이었다.
357
조반은 뜨는 둥 마는 둥, 점심은 없는 날이 많았다. 4,5월 기나긴 해를 허리띠 졸라매어 가면서 땅을 파고 풀을 뽑고 하느라면 석양 때에는 깜박 현기증이 나곤 하였다.
358
그렇지만 편안히 있다 굶어죽느냐, 밭고랑에 쓰러져가면서라도 심고 가꾸어 먹고 살아나느냐 하는 단판씨름인지라, 괴로움을 상관할 계제가 아니었다.
359
5월로 들어 일이 조금 너끔한 틈을 타 서울 걸음을 하였다. 짐을 꾸리어 남의 집에다 맡겨둔 채 내려오지 못한 것을 가 운송편으로 띄우고자 함이었었다.
360
매일신보에 들렀더니, 사회부원이 마침 잘 만났다면서 소개를 가서 지내는 형편을 말하라고 하였다.
361
무엇보다도 식량 사정이 핍절하노라고, 내 손으로 강냉이를 3,4백 포기, 호박을 5,6십 포기 심어놓고, 그것이 자라서 열매가 열어서 익어서 마침내 시장한 배를 채워 줄 날을 침삼키며 기대면서 일심으로 매가꾸노라고 이런 의미의 대답을 하였다.
362
그 다음날 지면엔 ‘소개의 변(疏開의 辯)’ 제2회째든가로 나의 사진과 함께 내가 소개를 가 붓을 드는 여가에 괭이를 들고 땅을 파며 강냉이를 3,4백 포기나, 호박을 5,6십 포기나 심고 하여, 시국하 식량증산운동에 크게 이바지를 하는 동시에, 농민들에게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요령의 기사가 잘 씌었다. 고마왔다. 그것으로 징용도 면하고 , 주재소의 주목 대신 ‘존경’도 받고 하였었다. 윤의 그
363
“호방이랑 옥수수랑 많이 수확하겄읍디까?”
364
하고, 빙긋 웃기까지 하면서 하던 노골한 경멸과 조롱은, 이 매일신보의 기사 ‘소개의 변’에다 두고 한 것이었었다.
367
타매(唾罵)와도 다름이 없는 것이었었다.
370
그는 출판을 하자면 선전 소용으로도 부득불 잡지를 조그맣게나마 하나 가져야 하겠다는 것과, 그 첫호를 쉬이 내고자 하니 누구보다도 자네들 두 사람이 편집방침으로든지 원고로든지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것을 간단히 이야기한 후에 나더러 먼저
371
“우선 자넬랑은 소설을 한편, 짤막하구두 썩 이쁘장스런 걸루다 한편. 기한은 2주일 안으루…… 이건 ‘명령적 성질을 가진’ 것야. 위반을 했단 괜히.”
372
“어떻게 생긴 소설이 그 이쁘장스런 소설인구?”
374
“가령 옐 든다면, 자네가 이번에 ××에다 쓴 ‘맹순사’ 같은 소설은 도저히 이쁘장스런 소설이 아니니깐.”
375
“그렇다면 다른 사람더러 부탁하는 게 술걸.”
376
“이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 8·15 이후 여지껏 침묵하구 있다 첫작품이 그런 거라군 좀 섭섭하데이.”
378
나는 차라리 그 자리에 윤이 있지 않았다면
379
“대작을 쓰느라구 침묵했던 줄 알았던감?”
383
“노상 그렇지두 않은 것 같습디다. 검열이 없어지구 보니깐, 인력거꾼이 마라송은 잘 못하듯기.”
384
“아, 내선일체 소설들두 썼을랴드냐 지금야.”
385
검열이 없어지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 도리어 쓰기가 헛심이 쓰인다는 말에 대한 반박이
389
나를 욕하고가 싶어 생트집을 잡는 노릇이었다.
390
나는 속에서 뭉클하고 가슴으로 치닫는 것을 삼키고 참았다. 아니 참고 대들었자 무엇 뀐 놈이 성낸다는 꼴이요, 치소나 더할 따름이었다.
391
험하여지는 공기를 눈치채고 김군이 얼른 말머리를 돌려놓는다.
392
“소설은 아무턴 그럭허기루 허구. 윤군 자넬랑은 이걸 좀 써주겠나? 패전을 통해 본 일본인의 민족기질.”
393
“내 영역두 아니지만, 그런 게 무슨 제목거리가 되나?”
394
“삼기루 들면 크지. 난 그래 좌담회라두 열까 했지만 그럴 것꺼진 없구. 아 학생들이 심지어 중학생꺼지두 10년 후에 보자면서 요새 여간 긴장과 열심들이 아니래잖아? 그런데 한편으루 재밌는 모순은 딱 전쟁에 지구 나니깐 그 흘개 빠지구 비굴하던 꼬락서닐 좀 보란 말야. 세상 앙칼지구 기승스럽구 도고허구 하던 거, 그거 일조에 다 어디루 가구서, 들그 따위루 비굴하구 반편스럽구 겁 많구 하느냔 말야. 난 사실 일본이 전쟁에 져 항복을 하는 날이면 굉장히 자살들을 하구 나가자빠지려니 했었는데, 웬걸…… 더구나 지도자놈들 고런 얌체빠지구 뻔뻔스럽다군. 그중에서두 조선 나와 있던 놈들, 그 기강(氣焰), 그 교만 다 어떡허구서…… 무엇이냐 고천(古川) 이 놈은 함북지사루 갔다 게서 붙잽힌 채 경찰서 고스까이질을 하구 있더라구?”
397
“명색이 지도자놈들이 얌체빠지구 뻔뻔스런 건 하필 왜놈들뿐이던가? 조선놈들은 어떻길래?”
398
“조선 사람 문젠 그 제목엔 관계가 없으니깐 잠깐 보류하구……”
399
김군이 나의 낯꽃을 살피면서 그러던 것이나 윤은 묵살하고 그대로 계속하여
400
“왜놈들의 주구(走狗)가 돼가지구 온갖 아첨 다하구, 비윌 맞추구 하면서 순진한 청년 어리석은 백성을 모아놓군 구린내 나는 아굴찌루다 지껄인닷 소리가, 소위 예술가니 평론가니 하는 놈들은 썩어빠진 붓토막으루 끼적거려 낸닷 소리가, 황국신민이 되라 하기, 내선일체를 하라 하기. 미국 영국은 도독눔이요 불의하구 전쟁에는 반드시 지구 멸망할 운명에 있구, 일본은 위대하구 정의요 전쟁엔 반드시 이기구 영원투룩 번영할 터이구 한다면서. 그러니 지원병에 나가구 학병에 나가구 증병에 나가 일본을 위해 개주검을 하라구 꼬이구 조르기. 굶어 죽더라두 농사한 건 있는 대루 죄다 공출에 바치라구 꼬이구 조르기. 가족은 유리하구 집안은 망하더라두 증용에 나가라구 꼬이구 조르기……”
401
“너무 과격해. 너무 과격해. 잡지 편집회의룬 탈선야.”
402
“개중에두 제 소위 소설가니 시인이니 하는 놈들……”
403
그러다 윤은 나를 힐끗 돌려다보면선 ─ 그것은 차마 정시하기 어려운 적의와 증오로 찬 얼굴이었다 ─ 그런 얼굴로 나를 돌려다보면서
404
“비단 당신 하나를 두구서 하는 말이 아니니 어찌 생각은 마슈.”
406
“잘하나 못하나 소설이니 시니 해서 예술일 것 같으면 양심의 활동이요, 진리(眞理)의 탐구와 그 표현이 아니냐 말야. 물론 소설가나 시인 두 사람인 이상 입으룬 거짓말을 한다구 하겠지만, 붓으룬 거짓말을 하길 싫여하는 법인데, 또 해필 아니 되는 법인데, 그래 멀쩡한 거짓말루다 황국신민 소설, 내선일체 소설을 쓰구, 조선 청년이 강제모병에 끌려나가 우리의 해방에 방해되는 희생을 하구 한 걸 감격하구 영웅화하는걸 쓰구 했으니 그게 예술가야? 예술과 예술가의 이름을 똥칠한 놈들이요, 뱃속에 가 진실과 선과 미를 찾아 마지않는 양심 대신, 구더기만 움덕거리는 놈들이 아니구 무어야?”
407
“대관절 이 사람, 패전을 통해 본 일본인의 민족기질을 써줄 심인가 말심인가?”
408
“그랬거들랑 저윽히 인간적 양심의 반 조각이라두 남은 놈들이라면, 8·15를 당해 조금이라두 뉘우치는 부꾸러하는 무엇이 있어야 할 꺼 아냐? 제법 보꾹에다 목을 매구 늘어지던 못한다구 할값이라두 죽은 듯기 아뭇 소리 말구 처박혀 있기나 했어야 할 게 아냐? 그런데 글쎄, 그러기는커녕 8·15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정말 나서야 할 사람보담두 저이가 먼점 나서가지구 ─ 진소위 선가(船價) 없는 놈이 배 먼점 오른다는 격이었다. ─ 그래가지군, 바루 그 전날꺼지, 그 전날꺼지가 무어야, 그날 아침꺼지두 총독부루 군부루 총력연맹으로 쫓어댕기구 일본을 상전처럼 어미아비처럼 떠받치구 미국 영국을 불공대천지 원수루 저주 공격하구, 백성들더러 어째서 황국신민이 아니 되느냐구, 어째서 증병이며 증용을 꺼려하느냐구, 어째서 공출을 잘 아니 내느냐구 꾸짖구 호령하구 하던 그 아굴찌, 그 붓토막으루다, 온 아무리 낯바닥이 쇠가죽같이 두껍기루소니 몇 시간이 못돼 그 아굴찌 그 붓토막으루다 눌러 그대루 악독한 우리의 원수 왜놈은 굴복했다. 우리들 피 빨아먹던 강도 왜놈은 물러갔다,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황국신민이니 내선일체니 하던 기만의 통치와 지배는 무너졌다. 강제모병 강제증용 강제증발의 온갖 압박과 착취의 쇠사슬은 끊어졌다. 자 해방이다. 4천 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와 독자한 전통으로 빚어진 3천만 겨레의 민족혼은 제국주의 일본과 36년 꾸준히 싸워왔다. 그러고 지금이야 3천리 강산에 해방이 왔다. 자 건국이다. 너두 나두 다토아 건국에 몸을 바치자. 그러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라. 그놈들은 왜놈에게 민족을 팔아먹은 놈들이다. 왜놈들이다. 왜놈보다 더 악독하게 우리를 괴롭힌 놈들이다. 오오, 우리의 해방의 은인이 온다. 위대한 정의의 사도 연합군을 맞이하자. 이런 소리가 아무려면 그래 제 얼굴이 간지라워서라두, 제 계집자식이 면괴스러워서라두 차마 지껄여지며 써지느냐 말야. 오늘은 이가의 내일은 김가의 품으루 굴러댕기는 매춘부는 차라리 동정할 여지나 있지. 고 따위루 비루하구 얌체 빠지구 뻔뻔스런 것들이 그게 사람야? 개도야지만두 못한 것들이지. 도독놈의 개두 제 주인은 섬길 줄은 안다구 아니해?”
409
“자, 인전 엔간치 막설하는 게 어때? 그만하면 자네란 사람이 얼마나 박절한 사람이란 건 넉넉히 설명이 됐으니.”
410
김군은 조금 아까부터 신문을 오려 스크랩에 붙이고 있었다.
411
김군의 음성은 자못 준절하였다. 얼굴도 그러하였다.
412
김군은 졸연히 흥분을 하거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시방 그만 정도의 준절한 음성과 얼굴은 다른 사람의 웬만치 성이 난 것이나 일반으로 보아도 무방하였다.
413
윤은 상관 않고 하던 말을 최후까지 계속한다.
414
“난 그러니깐, 그런 개도야지만 못한 것들이 숙청이 되기 전엔 건국사업이구 무엇이구 나서구 싶질 않아. 도저히 그런 더러운 무리들과 동석은 할 생각이 없어.”
415
“사람이 자네처럼 그렇게 하찮은 자랑을 가지구 분수 이상으루 남한테 가혹해선 자네 일신상두 이롭지가 못하구 세상에두 용납을 못하구……”
416
“무어? 하찮은 자랑이라구? 분수 이상이라구?”
418
김군은 일하던 것을 놓고, 두 팔로 턱을 괴고 탁자 너머로 윤을 마주보면서 응한다.
419
“윤군 자네, 나를 대일협력을 했다구 보나? 아니했다구 보나?”
421
“적실히 했다구 보지? 그런데 자네 일찌기 조선 사람 지도자나 지식칭에 대한 일본의 공세 ─ 총독부의 소위 고등정책이라는 거 말일세. 거기 대해서 반격을 해본 일이 있는가?”
423
“손쉽게 총력연맹이나 시굴 경찰서에서 자네더러 시국강연을 해달라는 교섭 받은 적 있었나?”
426
“없지. 신문사 고만두면서 이내 시굴루 내려가 있었으니깐.”
427
“몰라 물은 게 아닐세. 그러니 첫째 왈 자넨 자네의 지조의 경도(硬度)를 시험받을 적극적 기횔 가져보지 못한 사람. 합격품인지 불합격품인지 아직 그 판이 나서지 않은 미시험품. 알아들어?”
429
“남구루 치면 단 한번이래두 도끼루 찍힘을 당해본 적이 없는 남구야. 한번 찍어 넘어갔을는지 다섯번 열번에 넘어갔을는지 혹은 백번 천번을 찍혀 두 영영 넘어가지 않었을는지 걸 알 수가 없지 않은가?”
431
“그러니깐 자네의 지조의 경도(硬度)란 미지수여든. 자네가 혹시 그동안 꾸준히 투쟁을 계속해온 좌익운동의 투사들이나 민족주의 진영의 몇몇 지도자들처럼, 백번 천번의 찍음에 넘어가지 않구서 오늘날의 온전을 지탱한 그런 지조란다면, 그야 자랑두 하자면 하염즉하겠지. 그러지 못한 남을 나무랠 계제두 있자면 있겠지. 그러나 어린 아이한테 맡기기두 조심되는 한 개의 계란일는지, 소가 밟아두 깨지지 않을 자라등일는지 하옇든 미시험의 지조를 가지구 함부루 자랑을 삼구 남을 멸시하구 한다는 건 매양 분수에 벗는 노릇이 아닐까?”
433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리구 둘째루 자넨 자네의 결백을 횡재한 사람.”
435
“자네와 나와 한 신문사의 같은 자리에 있다가 자넨 사직들 하구 나가는데 난 머물러 있지 않었던가?”
437
“그것이 난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구 나면 이튿날버틈 목구멍을 보전치 못할 테니깐, 그대루 머물러 있으면서 신문을 맨들어냈구, 그 신문을 맨드는 데에 종사한 것이 자네의 이른바 나의 대일협력이 아닌가?”
439
“그런데 자넨 월급봉투에다 목구멍을 틀얹지 않드래두 자네 어룬이 부자니깐, 먹구 사는 걱정은 없는 사람이라 선뜻 신문기자의 직업을 버리구 말았기 때문에 자넨 신문을 맨든다는 대일협력을 아니한 사람, 그렇지 않은가?”
441
“그렇다면 걸 재산적 운명이라구나 할는지, 내가 결백할 수가 없다는 건 가난했기 때문이요, 자네가 결백할 수가 있었다는 건 부자집 아들이었기 때문이요 그것밖엔 더 있나? 자네와 나와를 비교 대조해서 볼 땐 적어두 그렇잖아? 물론 가난하다구서 절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 부꾸런 노릇이야 부꾸런 노릇이지. 또 오늘이라두 민족의 심판을 받는다면, 지은 죄만치 복죄(伏罪)할 각오가 없는 배두 아니구. 그렇지만 자네같이 단지 부자 아버질 둔 덕분에 팔아먹지 아니할 수가 있었다는 절개두 와락 자랑거린 아닐 성부르이.”
442
“그건 진부한 형식논리요 결국은 억담. 월급쟁이가 반드시 신문사 밥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있던가? 신문기자 말구 달리 얼마던지 월급쟁이질을 할 자리가 있지 않아?”
445
“은행은 대일협력 아니하구서 초연했던가?”
448
김군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뻐언히 윤을 바라보다가
449
“철이 안직 덜 났단 말인가? 일부러 우김질을 하자는 심인가?”
451
“진정이라면 나두 묻거니와 나랄지 혹은 그 밖에 자네와 가차운 친구루 불쾌한 세상을 버리구 시굴루 가 땅이라두 파먹을까 하구서 자네더러 얼마간의 토지를 빌리라구 했을 경우에, 선뜻 그것을 받아줄 마음의 준비가 있었던가?”
452
“누가 그런 계획은 했으며, 나더러 와 토질 달라구 한 사람은 있어?”
453
“옳아. 달란 말을 아니했으니깐 주지 아니했다. 그럼 그건 불문에 넘기구. 자네 말대루 시굴루 가 땅을 파…… 농민이 되는 거였다?”
455
“신문기자가 신문을 맨드는 건 대일협력이구, 농민이 농사해서 별 공출해서 왜놈과 왜놈의 병정이 배불리 먹구 전쟁을 하게 한 건 대일협력이 아닌가?”
456
“지도자와 피지도자라는 차이가 있지 않아? 신문은 대일협력을 시키구 농민은 따라가구 한 그 차이가 적은 차일까?”
457
“농민들이 벼 공출을 한 것이나, 젊운 사람들이 지원병과 학병에 나간 것이나 완전히 조선 사람 선배랄지 지도자의 말만을 듣구서 비로소 공출을 하구 병정에 나가구 한 거라면 지식칭의 대일 협력자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죄다 목을 잘라야지. 그렇지만 여보게 윤군. 농민 만명더러 일일이 물어본다구 하세. 구장과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들이 들끌어나와 뒤져가구 숨겨둔 걸 내놓라구 유치장에다 가두구서 떄리구 하는 바람에 공출을 했느냐. 모모한 사람들이 연설루, 소설루 신문에서 공출을 해야 한다구 하는 말을 듣구 그런가보다 여기구서 자진해 공출을 했느냐. 아주 곧이곧대루 대답을 하라구. 한다면 모르면 모르되, 나는 구장이나 면직원의 등쌀에, 순사와 형벌이 무서워서 억지루 공출을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조선 양반의 강연을 듣구 옳게 여겨서, 어떤 소설을 읽구 감동이 돼서, 아모 때의 신문을 보구 좋게 생각이 들어서, 그래 우러나는 마음으루 공출을 했소 대답할 농민은 만 명에 한 명두 어려우리. 지원병이나 학병두 역시 같은 대답일 것이구…… 도대체가 당년의 조선 사람들이, 더우기 청년들이 대일협력을 하구 댕기는 지도자란 위인들이 하는 소릴 신용을 한 줄 아나? 신용은 고사요, 자네 말따나 개도야지만두 못 알았더라네. 그런 지도자 명색들의 말을 듣구서 공출을 했을 게 어딨으며, 지원병이니 학병이니 나갔을 게 어딨어? 왜놈이나 공관리들의 강제에 못이겨 했지 아니면, 저이는 저이대루 호신지책으루 한 거지.”
458
“자네 논법대루 하자면, 그럼 친일파나 민족반역잔 한 놈두 없구 말겠네나그려?”
459
“지끔 이 방 안에만 해두 사람이 셋이 모인 가운데 둘이 민족반역잔데 없어?”
461
“많지. 그렇지만 벌이라는 건 그 범죄가 끼친 영향을 참작하구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하구, 그리구 범죄 이후의 심리와 행동을 참작하구, 그래가지구 처단에 경중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자네 같을래서야 3천만 가운데 장정의 태반은 죽이자구 할 테니, 그야말루 뿔을 바루잡으려다가 솔 죽이는 격이 아니겠는가?”
462
“웬만한 놈은 죄다 쓸어 숙청은 해야지, 관대했다간 건국에 큰 방해야. 38 이북에서 하듯기 해야만 해. 그리구 난 누가 무슨 말을 하거나. 그 비루하구 얌체빠지구 뻔뻔스럽구 한 인간성 그게 싫여. 소름이 끼치두룩 싫구 얄미워. 그런 것들과 조선 사람이라는 이름을 같이한다는 것꺼지두 욕스럽고 불쾌해.”
463
김군은 노상히 김군 자신의 일제시대에 신문이나 맨들었다는 실상 문제 이하의 대일협력 사실을 구구히 발명하자는 의사라느니보다도, 하도 민망하던 나머지, 그의 두루춘풍식의 처세법을 잠시 훼절을 하고, 나를 위해 윤에게 싸움을 걸었던 것이었었다.
464
그러나 김군의 대일협력자에 대한 변호는 윤의 말이 아니라도, 억지 엣 형식논리에 기울어진, 그래서 대체가 모두 옹색스럽고 공극투성이였었다.
465
가사, 완전히 변호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피고 격인 내가 우선
466
“아니 검사의 논고가 옳고, 변호인의 주장은 아모 소용도 없어.”
467
이런 심리상태인데야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468
또 윤의 지조나 결백 문젠데, 이것은 더구나 문제가 아니었다. 윤의 지조가 아무리 미시험의 것이기로니, 결백이 재산의 덕분이기로니, 죄인을 공격할 자격이 없으란 법은 없는 것이었었다.
469
이윽히 기다려도, 윤은 더는 말이 없었다.
470
나는 이 자리에서의 나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알고 김군과 윤을 작별한 후 P사를 나왔다.
471
나의 얼굴의 한 점의 핏기도 없어지고 만 것을 나는 거울은 보지 아니하고도 진작부터 알 수가 있었다.
472
김군이 뒤미처 따라나와 아래층까지 배웅을 하여 주었다.
474
김군이 작별로 잡았던 손을 풀고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다.
475
나도 웃으면서 한마디 하였다. 그러나 김군에게는 울음같이 보였을는지도 몰랐다.
477
그랬더니 김군은 고개를 가로 여러 번 저으면서
478
“이왕 깨끗했을 제 분사(憤死)를 못했을 바엔 때가 묻어가지구 괴사(愧死)라니 더욱 치사스러이.”
479
듣고 보니 적절하였다. 빈틈없이 적절하였다.
480
그 빈틈없이 적절한 말을 해버리는 김군이 나는 문득 원망스럽다.
483
흐렸던 하늘에서는 어느덧 심란스런 비가 내리고 있었다.
484
사람과 건물과 거리로 된 세상이, P사를 들르던 한 시간 전과는 어딘지 달라져 보였다.
486
집으로 돌아와, 병난 사람처럼 오늘까지 꼬박 보름을 누워 있었다.
487
조반보다도 점심에 가까운 나 혼자의 밥상을 받고 앉아서 안해더러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내었다.
491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을 나갔던 사람이, 별안간 죽을 상이 되어가지고 돌아와 처음엔 병인가 하였으나 보아하니 병은 아니어. 그러면서도 여러 날을 않는 사람처럼 누워 있어.
492
정녕 밖에서 무슨 사단이 있었거니 하였었다. 그러자, 불쑥 그런 말을 내어. 일변 해방 후로부터 더럭 동요가 된 심경은 모르지 않는 터이라, 그 사단이라는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었었다.
493
안해는 한참만에야 대답이다. 그는 언제고 나보다는 침착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494
“내려가얄 사정이면 내려가는 것이지만서두…… 내려가니, 가서 살 도리가 있어야 말이죠.”
496
“낯모르구 아무 반연 없는 고장으룬 갈 수가 없구, 가자면 매양 고향 아녜요? 그 벽강궁촌에서 취직 같은 거래두 할 기관이 있어요? 천생 농사밖엔 없는데, 작년 1년 지나본 배, 어디……”
497
작년 1년 가 있으면서 농사라고 하여본 경험의 결론은, 우리 같은 사람은 도저히 농사를 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었다. 우리의 체력이 우리의 가족을 먹일 만한 농사를 해내기엔 너무도 빈약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498
우리 내외가 밭을 기를 쓰고 가꾸어도, 밭농사로 5백 평을 벗지 못한다. 밭농사 5백 평이면, 채마와 마늘, 고추, 호박 따위의 울안 농사에 불과한 것이다.
499
채마 등속의 울안 농사 외에 보리니 콩이니 고구마니 하는 것은 순전히 농군을 사대어야만 한다.
500
7,8명의 한 가족이, 소작농으로서 1년 계량의 벼를 확보하자면 적어도 3천 평의 논을 소작하여야 한다.
501
이, 3천 평의 논농사와 보리며 콩 같은 밭농사를 하자면, 줄잡아 연인원(延人員) 2백 명의 농군을 사대어야 한다.
502
바로 최근 시세로 나의 고향에서 농군 한 명에 대하여 점심 저녁 두 때와 술 한 차례 먹이고 품삯이 하루 6,7십 원이다.
503
먹이는 것과 품삯을 치면 2백 명 삯군을 대는 데 2만 5천 원이 든다.
504
그 2만 5천 원이 있어야 나는 시골로 가서 농사를 하고 사는 것이다. 옛날 돈으로 250원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2만 5천 원이 결코 쉬운 돈이 아니다.
505
그러나마 금년에 2만 5천 원의 농자(農資)를 들여놓으면 언제까지고 그것이 밑천으로 살아 있느냐 하면, 아니다. 명년 가서는 또다시 그만한 농자를 들여야 하는 것이다.
506
농사란 결국 제 가족이 먹을 것을 제 손발로 농사할 수 있는 사람 ─ 농민만이 하기로만 마련인 것이었다.
507
따스한 햇볕이 드리운 마루에서 다섯살박이 세살박이의 두 어린것이 재깔거리면서 무심히 놀고 있다.
508
오래도록 어린것들에 가 눈이 멎었던 안해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한다.
509
“정히 서울이 싫구 하시다면, 가 살다 못살값이라두 가기가 어려우리까만, 저 어린것들이 가엾잖아요? 젤에 교육을 어떡허겠어요? 내명년이면 우선 하날 소학굘 보내야 하는데 학교꺼지 10리 아녜요? 일곱살박이가 매일 10리 왕복이 무리두 무리지만, 그렇게라두 해서 소학굘 마쳐준다구. 중학 이상은 가량이 없잖아요? 무슨 수에 학잘 대서, 서울루던 공불 보내게 되진 못할 것이구……”
511
“시굴서 길러 소학교나 마쳐주구 만다면 천생 농민인데, 농민이 구태라 나쁠 며리야 없지만, 그래두 천품을 보아 예술 방면으루던 과학 방면으루던, 재조가 있는 게 있다면, 그 방면으루 발전을 시켜주는 것이 어미아비 도리가 아녜요?”
517
“죽은 심 치면 못 참을 건 있으며 못 견델 건 있어요?”
519
“당신, 죄지섰잖아요? 그 죄, 지신 채 그대루, 저생 가시구퍼요?”
520
안해가 나를 죄인이라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울면서 그 말을 하였다.
521
나를 죄인이 아니라 여기려고 아니하는 이 낡아빠진 안해가, 나는 존경스럽고 고마왔다.
522
“당신야 존재가 미미하니깐 이댐에 민족의 심판을 받지두 못하실는진 몰라두, 가사 받아서 벌을 당한다구 하더래두, 형벌이 죌 속량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524
“이를 악물구, 다른 것 다 돌아보랴 말구서 저것들 남매 잘 길러 잘 교육시키구, 잘 지도하구 해서 바른 사람 노릇 하두룩, 남의 앞에 떠떳한 사람 노릇 하두룩 해줍시다. 아버지루써 자식한테 대한 애정으루나, 죄인으루써 민족의 다음 세대에 다 속죌 하는 정성으루나.”
526
“어미 애비의 허물루, 그 어린 자식한테까지 미쳐가서야 어린것들을 위해 너무두 슬픈 일이 아녜요?”
528
“원고 쓰실랴 마세요. 차라리 영리회사 같은 데 취직이래두 하세요. 것두 싫으시거든 얼마 동안 집안에 들앉어 기세요. 내가 박물 보퉁이래두 이구나서리다.”
531
“그런 것 저런 것을 모르는 배 아니오마는, 하두 인생이 구차스러 못하겠구려. 구차스럽구, 울분이 도무지 어따 대구 풀 길이 없는 울분이 가슴 속에 가 뭉쳐가지구 무시루 치달아 오르구.”
532
마악 이러고 있을 즈음에 조카아이가 푸뜩 당도하였다. ××서 중학상급학년에 다니는 넷째형의 아들이었다. 조카라지만 정이 자별하여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조카였었다.
533
일요일도 아닌데 올라온 연유를 물었더니, 주저하다가 대답이었다.
534
“아이들이 동맹휴학을 했대요. 전 그래 거기 들기두 싫구 해서 일 해결될 때꺼정 여기서 공부나 할 영으루……”
538
“선생 하나가 새루 왔는데, 일정시대 서울 어떤 학교에 있을 적버틈 유명한 친일패였드래요.”
540
“창씨 아니한 학생 낙제시키기, 사알살 뒤밟다 조선말 하는 거 붙잡아다 두들겨주기, 저의 학교루 와서두 연성 일본말루다 지껄이구, 머 여간만 건방진 거 아녜요.”
541
“그 선생이 적실히 친일파요, 그런 나쁜 짓을 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542
“그 학교 댕기던 아이가 몇이 전학을 해왔어요.”
544
“그애들 말 듣구서 다시 조살 했대나 바요.”
545
“그러면…… 너두 인전 나이 20이요 중학 졸업반이니, 그런 시비곡직은 혼자서 판단할 힘이 있어야 할 거야. 없다면 천치구.”
547
“그래, 그런 선생을 배척하는 학생편이 옳으냐? 잘못이냐?”
549
“옳은 줄 알면서 어째 넌 빠지구 아니 들어?”
552
“낼 모레가 졸업인데, 공불 해야 상급학교 입학시험을 치죠. 조행에두 관계가 될걸요.”
554
아이 저는 물론이요, 옆에 앉았던 안해까지도 질겁해 놀라도록 나의 목청은 높았다. 가슴에 뭉친 그 울분의 애꿎은 폭발이었으리라.
555
“동무들이 동맹휴학이란 비상수단까지 써가면서, 옳은 것을 주장하는데, 넌 그것이 번연히 옳은 줄 알면서두 빠져? 공부 좀 밑진다구? 조행에 관계된다구?”
557
“저 한 사람 조그만한 이익이나 구차한 안전을 얻자구, 옳은 일 못하는 거 그거 사람 아냐. 너 명색이 상급생이지?”
561
“아이들이 널 어려워하구, 네가 하는 말을 믿구 잘 듣구 그랬드라면서?”
563
“그래 더구나 그런 놈이, 네가 나서서 주동을 해야 옳지, 뒤루 실며시 빠져? 넌 그러니깐 반역행윌 한 놈야. 그 따위루 못날 테거든 진작 죽어 이놈아.”
565
“옳은 일을 위해 나서서 싸우는 대신, 편안하구 무사하자구 옳지 못한 길루 가는 놈은, 공부 아냐 뱃속에 육졸 배포했어두 아무짝에두 못 쓰는 법야.”
567
“학문은 영웅지여사(學問英雄之餘事)란 말이 있어. 사람이 잘나야 하구, 학문은 그 댐이니라. 인격이 제일이요, 지식은 둘째니라 이 뜻야. 공부보다두 위선 사람이 돼야 해.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선 불 가운데라두 뛰어들어갈 용기. 옳지 못한 길에는 칼을 겨누면서 핍박을 하더래두 굽히지 않는 절개. 단체를 위한 일이면 개인을 돌아보지 않는 의협. 그런 것이 인격야. 그러구서야 학문도 필요한 법야. 알았어, 이놈아.”
569
“당장 가. 가서 겉이 해. 퇴학맞아두 좋다, 금년에 상급학교 들지 못해두 상관 없어.”
571
“비단 동맹휴학뿐 아니라, 어델 가 무슨 일에던지 용렬히 굴진 마라. 알았어?”
573
기회가 다른 기회요, 단순히 훈계를 하기 위한 훈계였다면 형식과 방법이 매양 이렇지도 않았을 것이었었다.
574
내가 생각을 하여도 중뿔난 것이었고, 빠안히 속을 아는 안해를 보기가 쑥스럽다.
575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무엇인지 모를 속 후련하고, 겸하여 안심되는 것 같은 것이 문득 느껴지고 있음을 나는 스스로 거역할 수가 없었다.
576
(1946. 5. 19. 鄕村[향촌]에서)
577
＜白民[백민] 16, 17호, 1948.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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