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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국인기(亡國人記) ◈
해설   본문  
1947년
김동인
1947년 3월 '백민'에 산문 '망국인기(亡國人記)', 1948년 5월 '백민'에 산문 '속 망국인기', 1948년 3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신천지'에 산문 '문단 30년의 자취'등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 수 많은 친일 활동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등 논조를 썼다.
1
작년(1945년) 초가을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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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인에게 독립을 허여한다’는 카이로와 포츠담의 결의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을 ‘우리 땅에서의 일본인의 전퇴’쯤으로 해석하고 ‘일본의 항복’과 ‘연합군의 조선 진주’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하던 그 무렵이었소.
 
3
전쟁 통에 소위 ‘소개’라 하여 16년간 살던 집을 없이하고, 공중에 떠 있던 나와 나의 가족들은, 이 기꺼운 시절에, 몸 의탁할 근거(주택)를 마련 하느라고 쩔쩔매고 돌아갔었소. 가뜩이나 주택난에 허덕이는 경성 시내에서, 더욱이 독립한 내 나라를 찾아 돌아오는 많은 귀환인이며 전쟁에 밀려서 시골에 내려갔다가 도로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며, 독립한 내 나라 수도를 사모하여 몰려드는 무리며 등등으로, 서울의 주택난은 과연 극도에 달하여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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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상한 시절에, 집을 구하려 하니 좀체의 일이 아니었소. 돈이나 넉넉하면 그래도 돈의 위력으로 우겨볼 것이요 무슨 다른 튼튼한 배경이라도 가졌으면 배경의 힘으로라도 운동해보련만, 아무 배경이며 힘을 못 가진 가난한 소설가로, 곁눈질도 하지 않고 단 한길을 47년간 걸어온 나는, 손톱 눈만한 협력을 바랄 길도 없이, 흥분과 혼란으로 웅성거리는 이 도시에서 주택 한 채를 구해보려고 돌아갔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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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날이 주택 문제는 긴박의 도수를 더해 가며, 집은 좀체 손안에 들어오지 않고, 엄동은 차차 가까워오고…… 가족 일곱명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몸을 눕힐 안주처를 못 마련한 나의 책임은 여간 급하고 무겁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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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보름에서 9월로 10월로, 11월로 엄동은 목전에 임박했는데, 주택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과연 딱하고 급하였소. 이제 수일 내로 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비상한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소. 그 비상한 수단이란, 즉 가족의 이산이오. 가정이라는 한 집 단체를 헤치고,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을 나누어 맡아가지고, 각각 여관이나 하숙이나 셋방이나를 얻어가지고, 헤어져서 사는 것. 주택이 없으매 가정을 이룩할 수 없고, 가정이 없으매, 이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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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과연 크나큰 비극이오. 나라가 해방되었다고 서울로 돌아와보니, 내 나라 서울은 내 가족 하나를 포옹할 수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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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의 전생을 아무 야심도 없이 허심탄회 오직 소설도에만 정진해왔고, 지금 천하가 모두 정치적 야망이거나 매명적 야망이거나 모리적 야망에 뒤끓는 판국에서도 그런 데서는 멀리 떠나서 다만 내 가족이 몸을 쉬고 또는 조용히 앉아서 글 쓸 만한 집 한 채를 구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지극히 담박한 욕망이거늘, 이 욕망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사정이 진실로 딱하고 한심스러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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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도 인젠 엄동이 들어섰고, 집은 마련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가족 이산의 비극적 각오를 한 그때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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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마울 일이 어디 있으리오. 군정청 광고국장으로 있는 ○씨가, 이내 딱한 사정을 어디서 듣고, 매우 동정해주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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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김동인이는 내 평소에 가까이 사귄 일도 없고, 나는 문학이라는 것에는 전혀 문외한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을 안다. 즉 그 김동인이는 과거 50년간 단 한가닥의 길(영리 행위가 아닌)만을 걸어왔고, 더욱이 최근 한동안은, 조선어 사수를 위하여 총독부 정보과와 싸우고 싸우고, 8·15 그날 까지도 이 일로 싸워온 사람임을, 조선이라는 국가가 있고, 그 국가에서 과 거의 공로자에게 어떤 보상을 한다 하면, 마땅히 김동인이에게는 어떤 정도의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해방되었다는 이때, 집 한 칸 없이 가족이 이산하게까지 된다면 이것은 도리가 아니요 대접이 아니다. 광공국(鑛工 局)에서 일본인의 사택을 접수하여서 가지고 있는 것이 100여 채가 있다. 국가 보상으로서 집을 거저 주지는 못하는 우리의 애달픈 처지나마, 그 광공국 접수 사택 중에서나마 마음에 드는 집이 있거든 한 채 골라 가지라자. 집세를 내는 셋집이나마, 집 없을 때는 이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 이요, 우리의 환경이 현재 이 이상은 할 수가 없으니, 이만한 것으로나마 미의(微意)를 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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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고마운 말이었으리오. 일가 이산도 안하게 되었소. 엄동을 지붕 아래서 지낼 수 있게, 그리고 가족이 함께 오붓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소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반갑고 고맙고 감격되는 것은 ○씨의 그 대접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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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서, 소설 쓰는 것을 직업으로 택해 가지고 이 길에 정진하기를 1918년부터 오늘(1945년)까지 무릇 28년…… 30년에 가까 운 세월을, 산업을 모르는지라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삽시간에 탕진하고, 가난한 살림을, 가난하기 때문에 받는 온갖 고통과 불만과 수모를 받아오며, 그래도 이 길만을 지켜온 나였소. 가난한데서 생기는 수모, 소설쟁이라는 데서 생기는 수모…… 하도 받았는지라, 인제는 수모도 그다지 역하지도 않도록 면역은 되었지만…… 받았소…… 받았소. 가족에게까지…… 형제에게까지…… 심지어는 내게 돈을 지불해야 할 출판업자에게까지 또는 책 장사에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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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시의 길을 밟으면서도, 나는 다른 직업으로 전향할 줄을 몰랐소. 명예나 공명을 위해서가 아니었소. 더구나 돈을 위해서도 아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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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학을 건설한다든가, 문학도를 위해서도 아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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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고 싶은 일이니 하였을 뿐, 무슨 다른 욕구라든가 의도 혹은 목표가 있어서 한 바가 아니었소. 그런지라, 수모를 받아도 ‘할수 없는 일’이라고 단념했고, 결코 누구에게 찬사를 듣자든가 사례를 받자든가 하여서가 아니니만치, 그저 허심탄회일 뿐이었소. 찬사를 안 바친다고 나무라지도 않 았고, 관심 안 해준다고 섭섭하지도 않았고, 해방된 아침에 집 한 칸 안 주는 무정한 국민이라고 불평도 가져보지도 않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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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과거 30년간의 문학 생활에 대하여 이만치 무관심하였는데, 지금, 문학과는 전혀 인연이 없고 평소에 가까이 사귀지도 않은 ○씨에게서, 나의 과거의 문학과 조선어에 대한 공적의 대상으로,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 이런 호의를 보인다 하니, 어찌 눈물나도록 고맙지 않겠소? 더욱이 눈앞에 막혀 있던 큰 문제가 ‘문학 공적에 대한 사례로’라는 명목으로 무사히 해소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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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장차 많은 수모를 받으려는 의도는 물론 아니요 또는 무슨 매명적 의도도 아니요, 단지 막을 수 없는 영적 욕구 때문에 문학의 길에 손을 붙인 때는 과연 이 땅은 문학에서는 ‘황야’였소. 농부가 화전을 갈려 가래와 삽을 둘러메고, 전인미도의 깊은 산곡에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의 가시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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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소설을 쓰려면 소설은 ‘글’로 조성된 것이라, 소설 용어와 용문(用文)이 있어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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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의 민족 발전사를 가진 우리 민족이매 물론 우리 민족 용어, 즉 조선어는 있었소. 그러나 괴상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이 광휘 있는 ‘조선어’와 ‘조선문’도 정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한문에게 압박되어 겨우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오던 비참한 현상이라, 많은 어휘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서야 비로소 표현할 수 있는 조선글 소설을 쓰려면, 다시 파고 헤치고 갈고 씻고 하고서야 비로소 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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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楊州)에 부인(富人)(오방어(吳防禦)) 거춘풍루측(居春風樓惻)하야 여환담군(與宦談君)으로 위린(爲隣)하야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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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위와 같은 재래에 글투에서 벗어나서 구어체의 문장부터 확립을 해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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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 이인직이라는 한 귀재가 생겨나서, 한 껍질 벗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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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다. 아모 염려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게. 그리고, 걱정 말게. 자네 내외 두 식구쯤이야 어떻게 못 살겠나…… 그 소리 한 마디에 강 동지가 일변 대답을 하며 밖으로 나가더라. 김 승지가 춘천집이(필자 주 : 김 승지는 주인이요 춘천집은 그 첩이요 강 승지는 첩 장인이다) 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겁에 띄운 마음에 제 말만 하느라고 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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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정도로 구어체 조선어까지는 발전이 되어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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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초의 뒤에, 춘원 이광수가 나타나서, 「윤광호」,「무정」,「개척자」 등의 소설을 연해 써서 발표하여 문장의 구어화며, 조선어에 의지한 새로운 표현 방식이며 구어체의 미화 등에 큰 공적을 세우고 불멸의 탑을 세웠소. 그러나 아직 춘원의 문장에도 그냥 재래의 티가 적지 않게 남아서, ‘이러라’, ‘이더라’, ‘하더라’ 등은 그냥 소설용어로 썼소. ‘이러라’, ‘하더라’ 등은 구어체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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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우리 몇몇 동지가 문예 잡지(「창조」)를 간행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이러라’, ‘하더라’, ‘이라’ 등도 문어체의 잔재라 하여 일축하고 ‘했다’, ‘이다’, ‘이었다’ 등이라야 비로소 구어체라 용인했소. 춘원도 처음에는 ‘이러라’투를 그냥 많이 써왔는데, 뒤에 그것이 없어지고 구어체로 순화된 것을 보면, 역시 일거에 순구어체화할 용기가 부족하였던 모양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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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앉아서 보자면 혹은 변변찮고 작다란 일이랄지 모르오. 그러나 반만년의 전통을 깨뜨리고 ‘소설 용어’ 로는 순구어체만을 용인한다 하는 이 과단은 그리 작은 일이라고 결코 할 수 없을 것이오. 소설을 순구어체화 하기 위하여 2년간을 구어체 문장도(文章道)의 연구를 쌓았으며, 이런 것은 지금 소설의 길에 나서 있는 사람들이 밟아보지 않은 가시의 길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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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소설을 쓰는 데 한 큰 문제는 우리말에는 없는 ‘He’, ‘She’의 대명 사 문제였소. 소설을 씀에 절대로 필요한 여성의 대명사를 어찌하는가. 우리말에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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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이전의 춘원의 소설을 보자면 특수한 예외를 제하고는 모두 대명사를 안 쓰고 이름 ― 고유명사를 사용하였소. 도대체 우리나라 말에 적당한 어휘가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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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나 She를 정확히 우리말로 옮기려면 물론 ‘저 사내’, ‘저 여인’으로 되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이런 거추장스러운 어휘로 소설을 쓰려면 소설가의 영원한 고통이 될 것이오. 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가장 정당하다고 믿는 어휘를 지어내어 후인에게 제시하고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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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는 대명사를 여기 맞추기로 마음먹기까지는 적지 않은 습작과 휴지를 낸 뒤였소. 성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구별까지는 보류하고, He나 She를 모두 몰아 ‘그’로 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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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글 쓰는 사람 누구가 이러한 대명사 하나에 손톱눈만한 고심이나 주저를 하면서 쓰는 사람이 있으리오. 가장 쉽게 가장 자연스럽게 ‘그는 여사여사하고’, ‘그는 이러이러했고’라고 쓰고 있지만, 이 간단한 한자를 국민 앞에 내놓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주저와 고심이 있었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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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처음 한동안은 ‘그’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어 ‘빙허 현진건’ 같은 이는 ‘궐’, ‘궐녀’ 등으로 한동안 썼고, ‘천원 오천석’은 ‘저’, ‘저 여인’ 등으로 써보았지만 지금은 거진 ‘그’로 표준이 서고 통일이 된 모양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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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에 있어서, 동사의 과거사화도 어려운 문제의 하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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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군은 일어선다.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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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현재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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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군은 일어섰다.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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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과거사의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면, 그 실재미에 있어서 어느 편이 더 현실적인지 거듭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아직 현재사로 쓰는 작가가 적지 않은 형편이다. 30년 전인 그때는 전혀 뒤죽박죽이 었소. 대체 현재사와 과거사가 독자에게 있어서 달리 감수되는지, 이 점을 이해하는 사람조차 적은 형편이었소. 춘원의 「무정」, 「윤광호」 등을 보 아도 현재사와 과거사가 꼭 반반으로 씌어 있는 형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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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판국에서, ‘이었다’, ‘이었었다’ 등을 혹은 캐내고 혹은 발명하여 소설 용어로 쓰던 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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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 ‘느꼈다’ 등의 야릇한 형용사를 처음 써볼 때의 주저와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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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심은 전연 보수 없는 고심이었소. 애초 보수를 바라지도 않았거니와, 누구를 혹은 어느 민족을 위하여 한 노릇이 아니요 자신의 욕구, 자신의 욕망에서 우러나와서 한 노릇이라 무슨 야망이든가 야심은 전혀 없는 일이었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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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그래도 나의 밟은 길이 옳다 인정되어 뒤따르는 사람이 생기고, 이 길에 의지하여 조선 문학이 움돋아 자라는 것을 볼 때에 다만 감격되고 기쁠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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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여상의 것뿐이겠소? 반만년간 덮어두었던 뚜껑을 열어젖히고, 지금의 세태에 맞을 한 개의 길을 터놓는 것이니, 1에서 10까지나 모두 신발명이요 신창안뿐이었소. 국초며 춘원 등의 전인이 얼마만치 첫 가래는 넣어놓았기에 말이지 그나마 없었더라면 어떠하였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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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방과 멸시와 박해와 방해 가운데서, 가시의 길 30년, 다른 훼방쯤이야 내 신념이 있으니 개의할 바 아니지만, 조선총독부 검열계의 방해만은 진실로 딱하였소. 다른 훼방은 단지 훼방에 그치지만, 총독부의 방해는 ‘박멸 을 목적으로 한 방해’였으니 게다가 박멸할 권한도 가진 사람의 박해니 가장 아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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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시의 길 30년을 지나서, 지금은 그래도 문장에도 틀이 섰고, 표현 방식에도 틀이 섰고, 내가 개척한 길은 조선 소설도의 한지표가 되어, 빈약 하나마 차차 자라는 광경을 바라보면, 스스로 가슴 무득히 일어나는 기쁨을 금하지 못하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충분히 보수를 받았거니 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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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영영공공 남의 비웃음, 멸시를 오불관언의 태도로 걸어 나올 때에, 무서운 강력한 박해가 튀어져 나왔소. 소위 조선총독부 ‘내선일체 운동 강화’ 와 ‘국어(일본어) 보편화’ 와 ‘조선어 박멸 운동’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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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 당국의 지휘가 있고, ‘체’하는 젊은이가 꽤 많은 사회 상태라, 이 위정 당국의 방침은 비교적 순순하고 활발하게 진척되었소. 소위 국어화 운동 관청이며 회사는 물론이요 상점이며 가게의 흥정에, 전차 차장 운전수며 내지 길 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데까지 일본말로…… 시골은 모르지만 도회는 일본인의 거리인지 조선인의 거리인지 분간하기 힘들 만치 일본어화한 세상으로 변해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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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이 있고서야 조선 문학이다. 조선말 없이 조선 문학, 조선 소설이 어디서 존재할 수 있으리오. 이야말로 그사이 20년간 길러온 조선 소설도의 구할 수 없는 재난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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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국의 방침에 따라서, 문자들 가운데도 연해 일본말로 쓰는 사람이 생기고 늘고 일본말로 안 쓰는 사람은 뒤떨어진 사람이라 비웃는 무리까지 생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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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에서는 혹은 권고로 혹은 명령적으로 ‘문단 국어화’를 강행하고 진척시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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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름 있는 작가는, 자기는 일본말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원작하여, 일본말 잘하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일어로 번역하여 발표하는 등의 구 차스러운 비극까지 연출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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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에서는 내게도 권고…… 마지막에는 위협적 태도로까지 일본말로 쓰기를 육박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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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그냥 조선문을 고집하였소. 이 고집에 대하여 당국은 보복 수단으로 내 글을 덮어놓고 삭제, 압수, 불허가 처분을 내렸소. 오래 글 써온 사람이라는 관록에 대한 체면상 세 편에 한 편쯤이나 허가되었지, 조선문에 의지한 문학 생활은 내게는 봉쇄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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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무슨 소설 한 편을 검열을 넣었더니 며칠 뒤 호출이 왔소. 그래 갔더니 내 원고를 내놓고, ‘여기에 이렇게 고쳐라’, ‘여기는 이렇게 고쳐라’ 등등 주의가 있으므로, 그 작품의 생명에 영향이 없는 한도 안에서, 지시하는 대로 고치고 돌아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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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무리 기다려도 출판 허가 통지가 없으므로 궁금해서 가 보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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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좋은 작품이다. 이런 좋은 작품은 국어(일어)로 번역하여 널리 내 지인에게도 읽히도록 다시 번역해서 허가원을 제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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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이었소. 나는 번역할 만한 어학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거절했더니, 열다섯 살부터 동경에서 공부하고, 중학과 전문학교를 동경에서 마치고서 그만 것을 번역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만약 정 못하겠으면 남에게 부탁하여 번역하라는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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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료를 주고라도 번역시키라 하므로, 번역료를 주어서까지 번역하면 나는 무얼 먹고 살라느냐 하였더니, 번역료는 당국에서 보조해주겠다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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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말을 모르는 조선 사람에게 읽히고자 쓴 작품이니, 그런 구차한 노릇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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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원고를 도로 찾아가지고 돌아왔지만, 이렇게 차차 ‘국어화’가 강화되어가면, 밥 먹고야 사는 인생인 나의 경제 생활은 나날이 궁박하게 될 것은 정한 이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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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한 나머지 안출해낸 것이, 매 주일 방송소설 한 편씩 쓰는 것이오. 조선어 방송에 쓰이는 작품이니, 작품의 용어는 조선말로 할 것이나, 그 대신 ‘국민 사상 선도(?)’를 목표로 하거나 ‘전력 증강’을 목표로 한 것이라 야 될 것이라는 조건이오. 그러나 부여 민족, 단군 자손의 ‘일본 황민화’ 목표로 한 글은 내 손이 부러질지언정 차마 쓰지 못하겠소. 여기서 안출해 낸 것이 일본 명치유신의 지사들의 약전(略傳)을 한 주일에 한 사람씩 써 내려가는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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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나지 않는 일이니 일이 될 까닭이 없고, 더욱이 소위 유신지사라는 것은 모두가 비슷비슷한 행로와 말로를 가진 사람들이니 이야기의 내용은 싱겁기 한량없는 것이요, 약간 거짓말을 쓸지라도 따지고 할 사람도 없는 글이라 쓰기는 흥그럽지만 스스로 맥이 빠지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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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유신지사라 하는 것은 불우의 룸펜들로서, 당년의 집권자인 덕천 막 부에 반항하여 이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매 따 라서 ‘집권자 타도’와 ‘혁명’의 이야기라, 총독부 당국으로서는 마땅히 쉬쉬하여 금지하여야 할 것이어늘…… 속으로 고소를 하면서, 매 주일에 한 편씩을 써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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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간신히 ‘조선어로 그냥 밥벌이를 하였다’하는 데 그치지, 우리 성주 세종께오서 창제하옵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이래, 400여 년의 세월을 이 역시 숱한 수모와 배척의 가실길을 돌파하여 우리 대에까지 상속된 우리의 거룩한 글을 그냥 폭력의 아래서 살려나가려는 노력에는 아무 도움 이 못 될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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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에서도 강행하거니와 민간 측에도 추종자가 나날이 늘어가서, 도회 둥지는 거진 ‘황국화’하고, 문사들도 마치 자기의 어학 능력을 경쟁하듯이 다투어 일본말 소설을 쓰고…… 이대로 그냥 가다가는 불출 10년에, 조선어는 다만 지방 ― 산골의 토어(土語)로 떨어져 버릴 형편이었소. 마음 여간 급한 일이 아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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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가 없어지면 조선 문학이 어디 있을 것이며, 조선어가 없어지면 조선 민족은 무엇으로서 나는 조선인이오 하고 자기를 증명하겠소?
 
68
조선문 소설을 써서 이로써 의식을 하는 나는 또한 조선어는 나와 내 품안의 가족의 밥줄이었소.
 
69
막다른 곳에서, 이 국면을 어떻게 타개할까고 갈팡질팡할 때에 일루의 활로가 까마득히 비쳤소. 즉 춘원 이광수에게 한 패트런이 생겨서, 그 패트런이 ‘춘원이 무슨 사업을 하려면 50만 원까지는 내놓겠다’하는 것이었소
 
70
나는 이 예약된 50만 원을 가운데 놓고, 춘원과 여러 날 머리를 모으고 토의하였소. 그리고 그 토의한 결과 총독부로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인 아부달일(阿部達一)을 찾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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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일본)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큰 국난에 직면해 있다. 1억의 힘을 함께 모아서 이 난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국민 사상을 건전하고 강건하게 해야겠고, 국민 사상을 건 전화하고 강건화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문학’의 ‘선전력’과 ‘선동력’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강건한 문학을 산출하여 국민 사상을 선도 하는 것, 이것은 ‘싸우는 일본’의 최대 급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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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의 사반분의 일이라는 수효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인의 움직임은 일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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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만들어라, 보내라, 이겨라’ 등의 선전이며, 지금 당국이 장려하는 따위의 시국소설 등은 조선인은 ‘또 그 소리지’쯤으로 읽지부터 않는다. 더욱이 국어 일본어로 쓴 소설은 조선 총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부나 여인이나 노인은 알아보지도 못한다. 즉 무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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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 작가단의 조직을 공인하라. 그리고 언문(한글) 작품 검열을 완화하라. 그 작품 언문의 내용이 건실하여 능히 국민 사상을 강건하게 할 만한 것이면 이를 허가하고 장려하라. 지금 당국에서 종이를 배급주고 재정적과 정신적으로 보조하고 장려하는 많은 소위 시국소설 등은 무슨 효과를 보이고 있는가. 억지로 떠맡기고 안겨주니 받기는 받지만, 읽지도 않고 그냥 버 리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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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이 신용하는 작가를 동원하여, 대중이 읽을 줄 아는 글(조선어)로서 대중이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제작하게 하여, 은연중 대중에게서 나약한 사상을 제거하고 강건한 사상을 가지게 하여,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강건한 국민이 되게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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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당국에서 박멸하고자 하난 대(對) 조선어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바 있으나,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어가 없어질 것도 아니거니와, 방금 절박한 이 시국에 있어서, 조선어 박멸쯤은 뒤로 밀고라도 국민 사상 강건화를 급속히 하는 것이 급무일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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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조선인 현역 작가 가운데 소위 협력 작가와 비협력 작가의 두 가지가 있지 않느냐. 당국에서 ‘작가단’을 공인해주고, 언문 작품을 용인해준다면 과거의 ‘비협력 작가’까지도 모두 산하에 품을 수가 있다. 이는 내가 담당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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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정보과장에 대한 나의 주장이었소.
 
79
때는 바야흐로 전쟁도 최고조에 달하여, B-29는 매일 동경을 폭격하고, 오키나와의 싸움도 일본의 참패로 거진 끝장날 형편인 1945년 7월 말. 조선어 일어 따위의 말초적 문제로 운운할 경황이 못되는 일본인의 입장 이라, 한두 번 더 교섭이 거듭된 뒤에는, 조선문 검열을 완화하겠다는 내락이 났소.
 
80
그러나 ‘작가단’, 조직에 대해서는 현재 총독부 직할하에 ‘조선문인 보국회’라는 것이 있으니, 그 문인 보국회에서 알맹이 작가들만 뽑아내면, ‘문인 보국회’가 넘어지는 셈이니 ‘문인 보국회’의 이사장인 이등(伊䕨) 모의 양해를 얻어오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이등이를 찾았더니, 강원도 방면에 출장 중으로 며칠 뒤에야 돌아온다는 것이었소.
 
81
그때의 나의 계획은 예정은 이러하였소. 즉 작가단을 조직하고, (꼽아보니, 한 사람 몫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작가(소설)가 겨우 20여 명이었소) 춘원의 패트런에게서 나온 50만 원을 이들에게 한 사람 앞 2만원씩 현금으로 나누어주고, 이로부터 1년 안에 건실한 내용을 가진 소설 한 편씩을 완성시키라는 조건을 붙이고…….
 
82
때의 시국 형편은 이 전쟁이 절대로 1년을 더 끌 희망은 붙일 수가 없었소. 2만 원(2만 원은 당시에는 거액이었소)씩을 받은 작가들이 그때 굶주렸 던 창자에 자양분을 보급하며 마음에 드는 지방을 찾아가서 천천히 창작에 착수하여 이를 진행시키는 도중에, 전쟁은 ‘일본의 참패’로서 끝장이 날 것이오.
 
83
전쟁이 끝난 뒤, 우리 민족의 운명, 어찌될 것은 예측할 바 없지만, 그사이 여러 해 전쟁을 겪느라고 극도로 곤궁하고, 저축의 여유도 못 가졌던 우리의 작가들은, 갑자기 이런 혼란 시기에 봉착하면 그야말로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오. 그러한 우리의 작가들이, 2만 원씩만 받아 쥐면 그래도 나라가 정돈되기까지는 무사히 지낼 수가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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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의 패트런도 50만 원을 이렇게 썼다 하면 과히 나무라지도 않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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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등 모가 강원도에서 돌아오면 그와 의논하여 양해를 얻어서 작가단 을 조직하고…….
 
86
그 이등 모는 4월 열나흗날에야 돌아왔소.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작가단에 대하여 절대 반대를 하는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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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보국회’의 중심을 이룩하는 소설 작가만 뽑아낸다면 문인 보국회는 무력화하고 유명무실하게 되어 문인 보국회의 이사장의 입장으로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하는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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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완고에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어서, 다시 정보과장과 교섭하기로 그날은 그만치 하고, 이튿날 다시 총독부 정보과장실로 아부를 만나러 갔었소.
 
89
운명의 8월 보름날. 고관들 중에는 벌써 항복하기로 내정된 것을 암직한 데도 불구하고 아부는 그날 내색도 비치지 않고 시치미를 딱 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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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이사장이 양해할 수 없다면 총독부 당국으로도 할 수 없다.”
 
91
는 것이었소. 토론은 차차 격론으로 화하여, ‘이등, 이 같은 무능한 늙은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이렇듯 굴하니 이게 무슨 일이냐. 일·소까지 개전되어 일본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이 찰나에, 조선 2,600만 인구의 마음에 티끌만한 만족이라도 어서 주어서 조선의 환심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라. 도대체 긁어 부스럼으로, 가망 없는 조선어 박멸 정책을 써서 조선인의 반격심만 조장해놓은 너희들도 대체 위정가냐’고 책상을 두드리 며 그에게 육박하였소.
 
92
사실 지금의 형편으로는 일본이 오늘 항복할지 내일 항복할지, 맨 막판으로서 끝장나기 전에 어서 나 자신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생활하게 수속을 끝내 놓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라, 여간 뒤가 급한 것이 아니었소.
 
93
오늘 오정에, ‘미증유의 중대한 방송’이 있다 하니, 혹은 그것이 무조건 항복을 온 국민에게 알리는 것인지도 모를 바요, 만약 그렇다 하면 그 뒤는 또한 미증유의 혼란 상태가 현출되어서 아무 물질적 준비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은 그 고비를 어떻게 넘길지 아득하였소.
 
94
때는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 정각. 아부에게는 어디서 전화가 걸려왔소. 전화로 보내는 아부의 대답.
 
95
“응? 그건…… 두 시간만 더 기다려. 단 두 시간뿐이니 절대로 미리 말할 수 없어. 응, 응, 그러구, 예금이나 저금 있나? 은행에구 우편국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아내게. 방금 곧…… 12시 이전에…….”
 
96
그냥 아부의 전화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아부를 버려두고 뛰쳐나왔소. 아부의 말눈치로 12시의 중대 방송이란 즉 항복 포고임을 방금 알았기 때문에…….
 
97
집으로 달리는 전차를 잡아탔소.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승객들에게 외면을 하고도 눈을 앓는 체, 연해 눈을 부볐소.
 
98
일본이 패배하면 조선의 운명은?
 
99
한동안 계속된 혼란 시기를 한 푼의 저축도 없이 어떻게 돌파하는가.
 
100
이런 따위는 인제 근심도 안 되었소. 다만 인제는 자유 국민이노라는 비길 수 없는 기쁨에, 한없이 한없이 운 것이었소.
 

 
101
일어 장려, 조선어 억압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에, 어떤 잡지에 짧은 수필 한 편을 일문으로 쓴 일이 있소. 만약 이것이 어떤 후배에게, ‘김동인이도 일어로 글을 쓰니 아마 괜찮은가보다. 그러며 나도 일문으로 글을 쓰리라’ ─ 이런 생각을 품게 하였다 하면 이는 무덤에 가는 날까지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재료가 될 것이오. 그 밖에는 남에게 부탁하여 내 작품을 일어로 번역하여 발표하든가, 혹은 전연 변성명 혹은 익명으로 남의 눈만을 속인다 든가 하는 일은 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래도 조선문의 명맥만이라도 유지해 보느라고(그것은 또한 나의 밥줄도 되었소) 세 편 쓰면 한 편쯤이나 허가되는 이 좁은 관문을 목표로 끊임없이 붓을 놀렸소.
 
102
이 가여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문은 더욱 좁아가서 8·15의 연합군 승리만 없었던들 어찌 되었을까. 진실로 아슬아슬한 일이었소.
 
103
이 모든 것(소설 투의 확립이며 조선어 박멸의 당국 방침과의 사투 등)이 모두 누구의 부탁이거나 의뢰가 있어서 한 바가 아니요 나 자신의 막을 수 없는 욕구에서 우러나와서 한 일이라, 내가 개척한 투를 답습하는 나의 후인들이, ‘이것’에는 선인의 이러한 고심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아마 우리나라에 태고적부터 존재해 내려온 것쯤으로 가볍게 보고, 또는 혹 조선어를 힘 자라는껏 사수해보고, 검열 완화를 위하여 8·15 오전 10시까지도 싸웠다는 점은 모르고(이것을 자긍한다든가 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여기는 전혀 무관심할 때에, 조선 문학이라든가 조선어라든가 하는 방면과는 아주 교섭이 없을 군정청 광공국장 ○씨가, 이 점에 유의하고, ‘조선인의 한 사람으로 김동인이가 조선 문학과 조선어를 위하여 일본 위정 당국과 30년간 싸운 그 공적을 보아, 국가 해방의 이 기꺼운 아침에 한 채 집을 못 구하여 일가 이산의 비극을 연출하게 한대서야 이는 인사가 아니라’하여 광공국에서 접수한 일본 큰 회사의 사택 100여 채 가운데서 한 채를 자유 선택하게 한 것이었소.
 
104
소설도에 발을 들여놓은 지 30년…… 이 길에 들어선 탓에 많은 멸시와 수모와 위정 당국의 미움과 압박만을 겪어오다가 여기서 처음으로 대접을 받아보았소. 전혀 문외인에게.
 
105
그리고 다시금 생각해보니, 내가 선택한 직업은 수모만 받을 직업이 아니라, 도리어 대접을 받을 직업이요 사례를 받을 직업이오.
 
106
해방은 과연 기꺼운 것이라 하였소.
 
107
그리고 광공국에서 접수한 적지 않은 일본 큰 회사 사택 가운데서, 스미토모 경금속회사(자본금 1억 5천만 원) 사장의 사택을 골라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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