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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담(白鹿潭) (시집) ◈
◇ 백록담 Ⅴ ◇
카탈로그   목차 (총 : 5권)     이전 5권 ▶마지막
1941년
정지용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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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이목구비(耳目口鼻)

3
사나운 짐승일수록 코로 맡는 힘이 날카로워 우리가 아무런 냄새로 찾아내지 못할 적에도 세퍼드란 놈은 별안간 씩씩거리며 제 꼬리를 제가 물고 뺑뺑이를 치다시피 하며 땅을 후비어 파며 짖으며 달리며 하는 꼴을 보면 워낙 길들인 짐승일지라도 지겹고 무서운 생각이 든다. 이상스럽게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도적을 맡아내는 것이다. 설령 도적이기로서니 도적놈 냄새가 따로 있을 게야 있는 말이다. 딴 골목에서 제 홀로 꼬리를 치는 암놈의 냄새를 만나도 보기 전에 맡아내며 설레고 낑낑거린다면 그것은 혹시 몰라 그럴싸한 일이니 견주어 말하기에 예(禮)답지 못하나마 사람끼리에도 그만한 후각(嗅覺)은 설명할 수 있지 아니한가. 도적이나 범죄자의 냄새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사람이 죄로 인하여 육신이 영향을 입는다는 것은 체온이나 혈압이나 혹은 신경작용이나 심리현상으로 세밀한 의논을 할 수 있을 것이나 직접 농후한 악취를 발한대서야 견딜 수 있는 일이냐 말이다. 예전 성인의 말씀에 죄악을 범한 자의 영혼은 문둥병자의 육체와 같이 부패하여 있다 하였으니 만일 영혼을 직접 냄새로 맡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견디어내지 못할 별별 악취가 다 있을 것이니 이쯤 이야기하여 오는 동안에도 어쩐지 몸이 군시럽고 징그러워진다. 다행히 후각이란 그렇게 예민한 것으로 되지 않았기에 서로 연애나 약혼도 할 수 있고 예를 갖추어 현구고(見舅姑)도 할 수 있고 자신하여 손님 노릇 하러 가서 융숭한 대접도 받을 수 있고 러시아워 전차 속에서도 그저 견딜 만하고 중대한 의사(議事)를 끝까지 진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더욱이 다행한 일은 약간의 경찰범 이외에는 세퍼드란 놈에게 쫓길 리 없이 대개는 물리어 죽지 않고 지나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말하면 그의 후각의 불완전함으로 인하여 고식지계(姑息之計)를 이어 나가거니와 순수한 영혼으로만 존재한 천사로 말하면 헌 누더기 같은 육체를 갖지 않고 초자연적 영각(靈覺)과 지혜를 갖추었기에 사람의 영혼 상태를 꿰뚫어 간섭하기를 햇빛이 유리를 지나듯 할 것이다. 위태한 호수가로 달리는 어린아이 뒤에 바로 천사가 따라 보호하는 바에야 죄악의 절벽으로 달리는 우리 영혼 뒤에 어찌 천사가 애타하고 슬퍼하지 않겠는가. 물고기는 부패하려는 즉시부터 벌써 냄새가 다르다. 영혼이 죄악을 계획하는 순간에 천사는 코를 막고 찡그릴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 세퍼드를 경계할 만한 인사는 모름지기 천사를 두려워하고 사랑할 것이니 그대가 이 세상에 떨어지자 하늘에 별이 하나 새로 솟았다는 신화(神話)를 그대는 무슨 이유로 믿을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그대를 항시 보호하고 일깨우기 위하여 천사를 따른다는 신앙을 그대는 무슨 이론으로 거부할 것인가. 천사의 후각이 햇빛처럼 섬세하고 또 신속하기에 우리의 것은 훨석 무디고 거칠기에 우리는 도리어 천사가 아니었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으니 이 세상에 거룩한 향내와 깨끗한 냄새를 가리어 맡을 수 있는 것이니 오월(五月)달에도 목련화 아래 설 때 우리의 오관(五官)을 얼마나 황홀히 조절할 수 있으며 장미의 진수(眞髓)를 뽑아 몸에 지닐 만하지 아니한가. 세퍼드란 놈은 목련의 향기를 감촉하는 것 같지도 아니하니 목련화 아래서 그 놈의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것이다. 대게 경찰범이나 암놈이나 고깃덩어리에 날카로울 뿐인 것이 분명하니 또 그리고 그러한 등속의 냄새를 찾아낼 때 그 놈의 소란한 동작과 황당한 얼굴짓을 보기에 우리는 저으기 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4
사람도 혹시는 부지중 그러한 세련되지 못한 표정을 숨기지 못할 적이 없으란 법도 없으니 불시로 침입하는 냄새가 그렇게 요염한 때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얼굴을 다소 장중(壯重)히 보존하여 불시로 초조히 흐트러짐을 항시 경계할 것이요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고르고 삼갈 것이로다.
 
 

2. 예양(禮讓)

6
전차(電車)에서 내리어 바로 버스로 연락되는 거리인데 약 15분 걸린다고 할지요. 밤이 이윽해서 돌아갈 때에 대개 이 버스 안에 몸을 실리게 되니 별안간 폭취(暴醉)를 느끼게 되어 얼굴에서 우그럭 우그럭 하는 무슨 음향(音響)이 일던 것을 가까스로 견디며 쭈그리고 앉아 있거나 그렇지 못한 때는 갑자기 헌 솜같이 피로해진 것을 깨다를 수 있는 것이 이 버스 안에서 차지하는 잠시 동안의 일입니다. 이즘은 어쩐지 밤이 늦어 문붕(文朋)과 중인(衆人)을 떠나서 온전히 제 홀로 된 때 취기와 피로가 삽시간에 급습하여 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이것도 체질로 인해서 그런 것이 아닐지요. 버스로 옮기기가 무섭게 앉을 자리를 변통해 내야만 하는 것도 실상을 서서 쓸리기에 견딜 수 없이 취했거나 삐친 까닭입니다. 오르고 보면 번번이 만원인데도 다행히 비집어 앉을 만한 자리가 하나 비어있지 않았겠습니까. 손바닥을 살짝 내밀거나 혹은 머리를 잠깐 굽히든지 하여서 남의 사이에 끼일 수 있는 약소한 예의를 베풀고 앉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피로를 잊을 만하게 그렇게 편편한 자리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양 옆에 완강한 젊은 골격이 버티고 있어서 그 틈에 끼워 있으려니까 물론 편편치 못한 이유 외에 무엇이었습니까마는 서서 쓰러지는 이보다는 끼워서 흔들거리는 것이 차라리 안전한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만원버스 안에 누가 약속하고 비어 놓은 듯한 한 자리가 대개는 사양할 수 없는 행복같이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상생활이란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풀이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겠는데 이런 하치 못한 시민을 위하여 버스 안에 비인 자리가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보담은 겨우 있다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는 원리로 돌릴 만한 일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종시 몸짓이 불편한 것을 그래도 견디어야만 하는 것이니 불편이란 말이 잘못 표현된 말입니다. 그 자리가 내게 꼭 적합하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말하자면 동그란 구녁에 네모난 것이 끼웠다거나 네모난 구녁에 동그란 것이 걸렸을 적에 느낄 수 있는 대개 그러한 저어감(齟齬感)에 다소 초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로서니 한 15분 동안의 일이 그다지 대단한 노역(勞役)이랄 것이야 있습니까. 마침내 몸을 가벼이 솔치어 빠져나와 집까지의 어둔 골목길을 더덕더덕 걷데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튿날 밤에도 그때쯤 하여 버스에 오르면 그 자리가 역시 비어 있었습니다. 만원 버스 안에 자리 하나가 반드시 비어 있다는 것이나 또는 그 자리가 무슨 지정을 받은 듯이나 반드시 같은 자리요 반드시 나를 기다렸다가 앉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7
그도 하루 이틀이 아니요 여러 밤을 두고 한결로 그러하니 그 자리가 나의 무슨 미신에 가까운 숙연(宿緣)으로서나 혹은 무슨 불측(不測)한 고장으로 누가 급격히 낙명(落名)한 자리거나 혹은 양복 궁둥이를 더럽힐 만한 무슨 오점(汚點)이 있어서거나 그렇게 의심쩍게 생각되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무슨 실큼한 혈액(血液) 같은 것도 붙지 않았습니다. 하도 여러 날 밤 같은 현상을 되풀이하기에 인제는 버스에 오르자 꺼어멓게 비어 있는 그 자리가 내가 끌리지 아니치 못할 무슨 검은 운명과 같이 보이어 실큿한 대로 그대로 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밤을 연해 앉고 보니 자연히 자리가 몸에 맞아지며 도리어 일종의 안이감(安易感)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괴상한 노릇은 바로 좌우에 앉은 두 사람이 밤마다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가 실상 20 안팎 밖에 아니 되는 청춘남녀 한 쌍인데 나는 어느 쪽으로도 쓸릴 수 없는 꽃과 같은 남녀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차차 괴담(怪談)에 가까워 갑니다마는 그들의 의상도 무슨 환영(幻影)처럼 현란(絢爛)한 것이었습니다. 혹은 내가 청춘과 유행에 대한 예리한 판별력을 상실한 나이가 되어 그럴지는 모르겠으나 밤마다 나타나는 그들 청춘 한쌍을 꼭 한사람들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 괴담과 같은 버스 안에 이국인(異國人) 같은 청춘남녀와 말을 바꿀 일이 없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종시 불편하였던 원인을 추세(追勢)하여 보면 아래같이 생각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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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양 옆에 그들은 너무도 젊고 어여뻤던 것임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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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의 극상품(極上品)의 비누냄새 같은 청춘의 체취에 내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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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상인즉 그들 사이가 내가 쪼기고 앉을 자리가 아이예 아니었던 것이나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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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렇게 생각되기는 하나 그러나 사람의 앉을 자리는 어디를 가든지 정하여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늙은 사람이 결국 아랫목에 앉게 되는 것이니 그러면 그들 청춘남녀 한 쌍은 나를 위하여 버스 안에다 밤마다 아랫목을 비워놓은 것이 아니었을지요? 지금 거울 앞에서 아침 넥타이를 매며 역시 오늘밤에도 비어 있을 꺼어먼 자리를 보고 섰습니다.
 
 

3.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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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좀 으슬으슬 한데도 물이 찾아지는 것은 떳떳한 갈증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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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울이 메마르기에 꺼풀이 까실까실 이른 줄도 알았다. 아픈 데가 어디냐고 하면 아픈 데는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손으로 이마를 진찰하여 보았다.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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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대한 외과(外科)가 아닌 바에야 이마의 내과(內科)이기로소니 손바닥으로 알 수 있을 게 무어냐. 어떻게 보면 열이 있고 또 어찌 생각하면 열이 없다. 그러나 이 손바닥 진찰이 아주 무시되어 온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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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이 본래 할머니께서 내 어린 이마에 쓰시던 법인데 이 나이가 되도록 이 법으로써 대개는 가볍게 흘리어 버리기도 하고 아스피린 따위로 타협하여 버리기도 하고 몸이 찌뿌드드한데도 불구하고 단연 부정하여 버리고 항간으로 일부러 분주히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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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에서 지날 적에는 대개 펴 놓인 채로 있던 이불 속으로 가축처럼 공손히 들어가 모처럼만에 흐르는 눈물이 솜 냄새에 눌리워 버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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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손바닥 판단이 그대로 서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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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후 두 시의 나의 우울은 나의 이마에 나의 손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용이(容易)히 결정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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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차를 생각하였다. 탁자 위에 찻종이 모조리 뒤집혀 놓인 대로 있는 놈이 하나도 없다. 놓일 대로 놓여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찻종으로 차가 마시워졌다는 것 밖에 아니된다. 이것이 마신 것이로라고 바로 놓아두는 것이 한 예의로 되었다.
 
21
예의는 이에 그치고 마침내 찻종이 있는 대로 치근치근하고 지저분하고 보리찌꺼기를 앉힌 채로 있게 되는 것이다.
 
22
오늘은 날도 몹시 흐리고 음산하다. 오피스 안에는 낮불이 들어왔는데도 밝지 않다.
 
23
목멱산(木覓山) 중허리를 내려와 덮은 구름은 무슨 악의를 품은 것이 차라리 더러운 구름이다. 11월 들어서서 비눌 같고 자개장식 같고 목화 피어나가듯 하는 담담한 구름은 아니고 만다.
 
24
시계가 운다. 울곤 씨그르르‥‥‥울곤 씨그르르‥‥‥ 텁텁한 소리가 따르는 것은 저건 무슨 고장일까 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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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운다. 이 약 종으로서 무슨 자차분하고 의젓지 않은 소리냐. 어쨌든 유치원 이래도 여운을 내보지 못한 소리다. 별안간 이 관제(管制) 중에 산도야지 귀창이라도 찢어 헤칠 만한 격렬한 사이렌소리를 듣고 싶다. 지저분한 공기에 새로운 진폭이 그립다.
 
26
약간 흥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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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가 덥다. 먼저 이마, 그리고 겨드랑이, 손이 마저 발열하고 보니 손이란 원래 간이(簡易)한 진찰에나 쓰는 것 밖에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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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낱이 듣는가 했더니 제법 떨어진다. 아연판 같이 무거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아연판을 치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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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비, 날리는 비, 부으 뜬 비, 붓는 비, 쏟는 비, 뛰는 비, 그저 오는 비, 허둥지둥하는 비, 촉촉 좇는 비, 쫑알거리는 비, 지나가는 비, 그러나 11월 비는 건너가는 비다. 2박자 폴카춤 스텝을 밟으며 그리하여 11월 비는 흔히 가욋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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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유리창에 날벌레 떼처럼 매달리고 미끄러지고 엉키고 또그르 궁글고 홈이 지고 한다. 매우 간이(簡易)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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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빗방울은 관찰을 세밀히 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오늘 유유히 나를 고늘 수 없으니 만폭(滿幅)의 풍경을 앞에 펼칠 수 없는 탓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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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을 시름없이 들여다보는 겨를에 나의 체중이 희한히 가볍고 슬퍼지는 것이다. 설령 누가 나의 쭉지를 핀으로 창살에 꼭 꽂아 둘지라도 그대로 견딜 것이리라.
 
33
나의 인생도 그 많은 항하사(恒河沙)와 같다는 별 중의 하나로 비길 바가 아니요, 한 점 빗방울로 떨고 매달린 것이 아닐런가.
 
34
이것은 약간의 갈증으로 인하여 이다지 세심하여지는 것이나 아닐까.
 
35
그렇지도 아니한 것이, 뛰어나가 수도를 탁 터쳐 놓을 수 있을 것이겠으나 별로 그리할 맛도 없고 구태여 물을 마시어야 할 것도 아니고 보니 나의 갈증이란 인후나 위장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순수히 신경적이거나 혹은 경미한 정도로 정신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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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를 벗어 나왔다.
 
37
레인코트 단추를 꼭꼭 잠그고 깃을 세워 턱아리까지 싸고 소프트로 누르고 박쥐우산 안으로 바짝 들어서서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가리어 디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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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이 피어오른 듯 호줄그레 늘어선 도시에서 진흙이 조금도 긴치 아니하려니와 내가 찬비에 젖어서야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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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이 흐리운다. 나는 레인코트 안에서 옴츠렸다. 나의 편도선을 아주 주의해야만 하겠기에 무슨 경황에 폴 베르렌의 슬픈 시「거리에 내리는 비」를 읊조릴 수 없다.
 
40
비도 추워 우는 듯하여 나의 체열을 산산히 빼앗길 적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이 날씬하여지기에 결국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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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마(驢馬)처럼 떨떨거리고 오는 흰 버스를 잡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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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쪽마다 빗방울이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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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한해서 나는 한사코 빗방울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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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후후룩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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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은 다시 날려와 붙는다. 나는 헤어 보고 손가락으로 비벼 보고 아이들처럼 고독하기 위하여 남의 체온에 끼인 대로 참하니 않아 있어야 하겠고 남의 늘어진 긴 소매에 가리운 대로 잠척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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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마다 도시가 불을 켰다. 나는 심기일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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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막(銀幕)에는 봄빛이 한창 어울리었다. 호수에 물이 넘치고 금잔디에 속잎이 모두 자라고 꽃이 피고 사람의 마음을 꼬일 듯한 흙냄새에 가여운 춘희(椿姬)도 코를 대고 맡는 것이다. 미칠 듯한 기쁨과 희망에 춘희는 희살대며 날뛰고 한다.
 
48
마을 앞 고목 은행나무에 꿀벌 떼가 뒤웅박처럼 끓어나와 잉잉거리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뛰어 나와 이 마을지킴 은행나무를 둘러싸고 벌떼소리를 해가며 질서 없는 합창으로 뛰고 노는 것이다. 탬버린에, 하다못해 무슨 기명 나부랭이에 고끄라나발 따위를 들고 나와 두들기며 불며 노는 것이다. 춘희는 하얀 질질 끌리는 긴 옷에 검은 띠를 띠고 쟁반을 치며 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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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큰 개도 나와 은행나무 아랫동에 앞발을 걸고 벌떼를 집어 삼킬 듯이 컹컹 짖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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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막에는 갑자기 비도 오고 한다. 춘희가 점점 슬퍼지고 어두어지지 아니치 못해진다. 춘희가 콩콩 기침을 할 적에 관객석에도 가벼운 기침이 유행된다. 절후의 탓으로 혹은 다감한 청춘 사녀(士女)들의 폐첨(肺尖)에 붉고 더운 피가 부지중 몰리는 것이 아닐까. 부릇 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51
춘희(椿姬)는 점점 지친다. 그러나 흰 나비처럼 파닥거리며 흰 동백꽃에 황홀히 의지하련다. 대체로 다소 고풍스러운 슬픈 이야기래야만 실컷 슬프다.
 
52
흰 동백꽃이 아주 시들 무렵 춘희는 점점 단념한다. 그러나 춘희의 눈물은 점점 깊고 세련된다.
 
53
은막에 내리는 비는 실로 좋은 것이었다. 젖어질 수 없는 비에 나의 슬픔은 촉촉할 대로 젖는다. 그러나 여자의 눈물이란 실로 고운 것인 줄을 알았다. 남자란 술을 가까이 하여 굵을 수도 있다.
 
54
그러나 여자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다. 여자란 눈물로 자라는 것인가 보다. 남자란 도박이나 결투로 임기응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란 다만 연애에서 천재다.
 
55
동백꽃이 새로 꽂힐 때마다 춘희는 다시 산다. 그러나 춘희는 점점 소모된다. 춘희는 마침내 일가(一家)를 완성한다.
 
56
옆에 앉은 영양(令孃) 한 분이 정말 눈물을 흩으러 놓는다. 견딜 수 없이 느끼기까지 하는 것이다. 현실이란 어느 처소에서나 물론하고 처치에 곤란하도록 좀 어리석은 것이기도 하고 좀 면난(面赧)하기도 한 것이다. 그레타 가르보 같은 사람도 평상시로 말하면 얼굴을 항시 가다듬고 펴고 진득이 굴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먹새는 남보다 골라서 할 것이겠고 실상 사람이란 자기가 타고 나온 비극이 있어 남 몰래 앓을 병과 같아서 속에 지녀 두는 것이요 대개는 분장으로 나서는 것임에 틀림없다.
 
57
어찌하였던 내가 이 영화관(映畵館)에서 벗어나가게 되고 말았다.
 
58
얼마쯤 슬픔과 무게(重量)를 사가지고 ─ ─ ─ ─
 
59
거리에는 비가 이때껏 흐느끼고 있는데 어둠과 안개가 길에 기고 있다.
 
60
다이아가 날리고 전차가 쨍쨍거리고 서로 곁눈 보고 비켜서고 오르고 내리고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이 모다 영화와 같이 유창하기는 하나 영화처럼 곱지 않다. 나는 아주 열(熱)해졌다.
 
61
검은 커튼으로 싼 어둠 속에서 창백한 감상이 아직도 떨고 있겠으나 나는 먼저 나온 것을 후회치 않아도 다행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 떼를 지어 브로마이드 말려들어가듯 흡수되는 이들이 자꾸 뒤를 잇는다.
 
62
나는 휘황히 밝은 불빛과 고요한 한 구석이 그리운 것이다. 향그러운 홍차 한 잔으로 입을 추기어야 하겠고 나의 무게를 좀 덜어야만 하겠고 여러 가지 점으로 젖어 있는 나의 오늘 하루를 좀 가시우고 골라야 견디겠기에. 그러니 하루의 삶으로서 그만치 구기어지는 것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다.
 
63
별로 여색(女色)이나 무슨 주초(酒草) 같은 것에 가까이 해서야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를 지나고 저문 후에는 아무리 다리고 편다 할지라도 아주 판판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더욱이 절후가 이렇게 고르지 못하고 신열이 좀 있고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양식으로 볼지라도 아무리 청명하게 닦을지라도 다소 안개가 끼고 그을고 하는 것을 면키 어려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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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빗방울이라든지 동백꽃이라든지 눈물이라든지 의리 인정, 그러한 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고 해로울 것도 없고 기뻐함직도 한 것이나 그것이 굴러가는 계절의 마찰을 따라 하루 삶이 주름이 잡히고 피로가 쌓인다. 설령 안개같이 가벼운 것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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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더운 김으로 얼굴을 흠뻑 추기고 훌훌 마실 수 있는 더운 약을 마시리라. 집사람 보고 부탁하기를 꿈도 없는 잠을 들겠으니 잠드는 동안에 땀을 거두어 달라고 하겠다.
 
 

4. 아스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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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량이면 아스팔트를 밟기로 한다. 서울거리에서 흙을 밟을 맛이 무엇이랴.
 
68
아스팔트는 고무밑창보담 징 한 개 박지 않은 우피 그대로 사폿사폿 밟아야 쫀득쫀득 받치우는 맛을 알게 된다. 발은 차라리 타이어처럼 굴러간다. 발이 한사코 돌아다니자기에 나는 자꾸 끌리운다. 발이 있어서 나는 고독치 않다.
 
69
가로수 이팔마다 발발하기 물고기 같고 6월 초승 하늘 아래 밋밋한 고층건축들은 삼(衫)나무 냄새를 풍긴다. 나의 파나마는 새파랗듯 젊을 수밖에. 가견(家犬), 양산(洋傘), 단장(短杖) 그러한 것은 한아(閑雅)한 교양이 있어야 하기에 연애는 시간을 심히 낭비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것들을 길들인 수 없다. 나는 심히 유창한 프롤레타리아트! 고무볼처럼 퐁퐁 튀기어지며 간다. 오후 4시 오피스의 피로가 나로 하여금 궤도 일체를 밟을 수 없게 한다. 장난감 기관차처럼 장난하고 싶고나. 풀포기가 없어도 종달새가 내려오지 않아도 좋은, 푹신하고 판판하고 만만한 나의 유목장 아스팔트! 흑인종은 파인애플을 통째로 쪼기어 새빨간 입술로 쪽쪽 들이킨다. 나는 아스팔트에서 조금 빗겨 들어서면 된다.
 
70
탁! 탁! 튀는 생맥주가 폭포처럼 황혼의 서울은 갑자기 팽창한다. 불을 켠다.
 
 

5. 老人과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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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꽃나무를 심으시면 무슨 보람을 위하심이오니까. 등이 곱으시고 숨이 차신데도 그래도 꽃을 가꾸시는 양을 뵈오니, 손수 공드리신 가지에 붉고 빛나는 꽃이 맺으리라고 생각하오니, 희고 희신 나룻이나 주름살이 도리어 꽃답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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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이순(耳順)을 넘어 오히려 여색(女色)을 기르는 이도 있거니 실로 누(陋)하기 그지없는 일이옵니다. 빛깔에 취할 수 있음은 빛이 어느 빛일는지 청춘에 맡길 것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쇠년(衰年)에 오로지 꽃을 사랑하심을 뵈오니 거룩하시게도 정정하시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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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맞으시며 심으신 것이 언제 바람과 햇빛이 더워오면 고운 꽃봉오리가 촉(燭)불 혀듯 할 것을 보실 것이매 그만치 노래(老來)의 한 계절이 헛되이 지나지 않은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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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고담(枯淡)한 그늘에 어린 자손이 희희(戱戱)하며 꽃이 피고 나무와 벌이 날며 닝닝거린다는 것은 여년(餘年)과 해골을 장식하기에 이렇듯 화려한 일이 없을 듯하옵니다.
 
76
해마다 꽃은 한 꽃이로되 사람은 해마다 다르도다. 만일 노인 백세 후에 기거하시던 창호(窓戶)가 닫히고 뜰 앞에 손수 심으신 꽃이 난만할 때 우리는 거기서 슬퍼하겠나이다. 그 꽃을 어찌 즐길 수가 있으리까. 꽃과 주검을 실로 슬퍼할 자는 청춘이요 노년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분방히 끓는 정염이 식고 호화롭고도 홧홧한 부끄럼과 건질 수 없는 괴롬으로 수놓은 청춘의 웃옷을 벗은 뒤에 오는 청수(淸秀)하고 고고하고 유한하고 완강하기 학(鶴)과 같은 노년의 덕으로서 어찌 주검과 꽃을 슬퍼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꽃이 아름다움을 실로 볼 수 있기는 노경(老境)에서일까 합니다.
 
77
멀리멀리 나 ─ 땅끝으로서 오기는 초뢰사(初瀨寺)의 백목단(白牧丹)이 그 중 일점(一點) 담홍빛을 보기 위하야.
 
78
의젓한 시인 포올 클로델은 모란 한 떨기 만나기 위하여 이렇듯 멀리 왔더라니, 제자 위에 붉은 한송이 꽃이 심성(心性)의 천진과 서로 의지하며 즐기기에는 바다를 몇 씩 건너온다느니보담 미옥(美玉)과 같이 연마된 춘추를 지니어야 할까 합니다.
 
79
실상 청춘은 꽃을 그다지 사랑할 배도 없을 것이며 다만 하늘의 별 물 속의 진주 마음속에 사람을 표정(表情)하기 위하여 꽃을 꺾고 꽂고 선사하고 찢고 하였을 뿐이 아니었습니까. 이도 또한 노년의 지혜와 법열을 위하여 청춘이 지나지 아니치 못할 연옥과 시련이기도 하였습니다.
 
80
오호(嗚呼) 노년과 꽃이 서로 비추고 밝은 그 어느날 나의 나룻도 눈과 같이 희어지이다 하노니 나머지 청춘에 다시 설레나이다.
 
 

6. 꾀꼬리와 국화(菊花)

82
물오른 봄버들 가지를 꺾어 들고 들어가도 문안 사람들은 부러워하는데 나는 서울서 꾀꼬리 소리를 들으며 살게 되었다.
 
83
새문 밖 감영 앞에서 전차를 내려 한 십분쯤 걷는 터에 꾀꼬리가 우는 동네가 있다니깐 별로 놀라워하지 않을 뿐외라 치하하는 이도 적다.
 
84
바로 이 동네 인사들도 매(每) 간(間)에 시세가 얼마며 한 평에 얼마 오르고 내린 것이 큰 관심거리지 나의 꾀꼬리 이야기에 어울리는 이가 적다.
 
85
이삿짐 옮겨다 놓고 한밤 자고난 바로 이튿날 햇살 바른 아침, 자리에서 일기도 전에 기왓골이 옥(玉)인 듯 쨔르르 쨔르르 울리는 신기한 소리에 놀랐다.
 
86
꾀꼬리가 바로 앞 나무에서 우는 것이었다.
 
87
나는 뛰어나갔다.
 
88
적어도 우리집 사람쯤은 부지깽이를 놓고 나오던지 든 채로 황황히 나오던지 해야 꾀꼬리가 바로 앞 나무에서 운 보람이 설 것이겠는데 세상에 사람들이 이렇듯이도 무딜 줄이 있으랴.
 
89
저녁때 한가한 틈을 타서 마을 둘레를 거니노라니 꾀꼬리뿐이 아니라 까투리가 풀섶에서 푸드득 날라갔다 했더니 장끼가 산이 찌르렁 하도록 우는 것이다.
 
90
산비둘기도 모이를 찾아 마을 어구까지 내려오고, 시어머니 진짓상 나수어다 놓고선 몰래 동산 밤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죽었다는 며느리의 넋이 새가 되었다는 며느리새도 울고 하는 것이었다.
 
91
며느리새는 외진 곳에서 숨어서 운다. 밤나무꽃이 눈같이 흴 무렵. 아침 저녁 밥상 받을 때 유심히도 극성스럽게 우는 새다. 실큼하게도 슬픈 울음에 정말 목을 매는 소리로 끝을 맺는다.
 
92
며느리새의 내력을 알기는 내가 열 세 살 적이었다.
 
93
지금도 그 소리를 들으면 열 세 살 적 외롬과 슬픔과 무섬탐이 다시 일기에 며느리새가 우는 외진 곳에 가다가 발길을 돌이킨다.
 
94
나라 세력으로 자란 솔들이라 고스란히 서 있을 수밖에 없으려니와 바람에 솔소리처럼 아늑하고 서럽고 즐겁고 편한 소리는 없다. 오롯이 패잔(敗殘)한 후에 고요히 오는 위안 그러한 것을 느끼기에 족한 솔소리, 솔소리로만 하더라도 문 밖으로 나온 값은 칠 수밖에 없다.
 
95
동저고리 바람을 누가 탓할 이도 없으려니와 동저고리 바람에 따르는 훗훗하고 가볍고 자연과 사람에 향하여 아양 떨고 싶기까지 한 야릇한 정서 그러한 것을 나는 비로소 알아내었다.
 
96
팔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주먹은 잔뜩 쥐고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고, 그 많이도 흉을 잡히는 일을 벌이는 버릇도 동저고리바람엔 조금 벌려 두는 것이 한층 편하고 수월하기도 하다.
 
97
무릎을 세우고 안으로 깍지를 끼고 그대로 아무데라도 앉을 수 있다. 그대로 한나절 앉았기로소니 나의 게으른 탓이 될 수 없다. 머리 우에 구름이 절로 피명 지명 하고 골에 약물이 사철 솟아 주지 아니하는가.
 
98
뻐끔채꽃, 엉겅퀴송이, 그러한 것이 모두 내게는 끔직한 것이다. 그 밑에 앉고 보면 나의 몸동아리, 마음, 얼, 할 것 없이 호탕하게도 꾸미어 지는 것이다.
 
99
사치스럽게 꾸민 방에 들 맛도 없으려니와, 나이 30이 넘어 애인이 없을 사람도 뻐끔채 자주꽃 피는 데면 내가 실컷 살겠다.
 
100
바람이 자면 노오란 보리밭이 후끈하고, 송진이 고여 오르고, 뻐꾸기가 서로 불렀다.
 
101
아침 이슬을 흩으며 언덕에 오를 때 대수롭지 않이 흔한 달기풀꽃이라도 하나 업수이 여길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적고 푸르고 이쁜 꽃이었던가.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102
요렇게 푸를 수가 있는 것일까.
 
103
손끝으로 으깨어 보면 아깝게도 곱게 푸른 물이 들지 않던가. 밤에는 반딧불이 불을 켜고 푸른 꽃잎에 오물어 붙는 것이었다.
 
104
한번은 닭이풀꽃을 모아 잉크를 만들어가지고 친구들한테 편지를 염서(艶書)같이 써 붙이었다. 무엇보다도 꾀꼬리가 바로 앞 나무에서 운다는 말을 알리었더니 안악(安岳) 친구는 굉장한 치하 편지를 보냈고 장성(長城) 벗은 겸사 겸사 멀리도 집알이를 올라왔었던 것이다.
 
105
그날사 말고 새침하고 꾀꼬리가 울지 않았다. 맥주 거품도 꾀꼬리 울음을 기다리는 듯 고요히 이는데 장성(長城) 벗은 웃기만 하였다.
 
106
붓대를 희롱하는 사람은 가끔 이러한 섭섭한 노릇을 당한다.
 
107
멀리 연기와 진애를 걸러오는 사이렌 소리가 싫지 않게 곱게 와 사라지는 것이었다.
 
108
꾀꼬리는 우는 제철이 있다.
 
109
이제 계절이 아주 바뀌고 보니 꾀꼬리는 커니와 며느리새도 울지 않고 산비둘기만 극성스러워진다.
 
110
꽃도 잎도 이울고 지고 산국화도 마지막 슬어지니 솔소리가 억세어 간다.
 
111
꾀꼬리가 우는 철이 다시 오고 보면 장성(長城) 벗을 다시 부르겠거니와 아주 이우러진 이 계절을 무엇으로 기을 것인가.
 
112
동저고리바람에 마고자를 포기어 입고 은단추를 달리라.
 
113
꽃도 조선 황국(黃菊)은 그것이 꽃 중에는 새 틈에 꾀꼬리와 같은 것이다. 내가 이제로 황국을 보고 취하리로다.
 
 

7. 비둘기

115
하루갈이쯤 되는 텃밭 이랑에 손이 곱게 돌아가 있다.
 
116
갈고 흙덩이 고르고 잔돌 줍고 한 것이나 풀포기 한 잎 거친 것 없는 것이나 갓골을 거뜬히 돌아친 것이나 이랑에 흙이 다복다복 북돋우인 것이라든지가 바지런하고 일솜씨 미끈한 사람의 할 일이로구나 하였다. 논밭 일은 못하였을망정 잘하고 못한 것이야 모를 게 있으랴.
 
117
갈보리를 벌써 뿌리었다기는 일고 김장 무배추로는 엄청 늦고 가랑파 씨를 뿌린 성싶다.
 
118
참새떼가 까맣게 날라와 안기에 황겁히 활개를 치며『우여어!』소리를 질렀더니 그만 휘잉! 휘잉! 소리를 내며 쫓기어간다.
 
119
그도 그럴 적뿐이요 새도 눈치코치를 보고 오는 셈인지 어느 겨를에 또 날라와 짓바수는 것이다.
 
120
밭 임자의 품팔이꾼이 아닌 이상에야 한두 번이지 한나절 위한하고 새를 보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121
이번에는 난데없는 비둘기떼가 한 오십 마리 날라오더니 이것은 네브 카드네살의 군대들이나 되는구나.
 
122
이렇게 한바탕 치르고 나도 남을 것이 있는 것인가 하도 딱하기에 밭 임자인 듯한 이를 멀리 불러 물어 보았다.
 
123
“씨갑씨 뿌려둔 것은 비둘기 밥 대주라고 한 게요?”
 
124
“그 어떻겁니까. 악을 쓰고 좇아도 하는 수 없으니.”
 
125
“이 근처엔 비둘기가 그리 많소?”
 
126
“원한경 원목사집 비둘긴데 하도 파먹기에 한번은 가서 사설을 했더니 자기네도 할 수 없다는 겁디다. 몇 마리 사랑 탐으로 기른 것이 남의 집 비둘기까지 달고 들어와 북새를 노니 거두어 먹이지도 않는 바에야 우정 좇아낼 수도 없다는 겁니다.”
 
127
“비둘기도 양옥집 그늘이 좋은 게지요.”
 
128
“총으로 쏘던지 잡어죽이든지 맘대로 하라곤 하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내버려두지요.”
 
129
농사 끝이란 희한한 것이 아닌가. 새한테 먹히고, 벌레도 한몫 태우고 풍재(風災) 수재(水災) 한재(旱災)를 겪고 도지 되고 짐수 치르고 비둘기한테 짓바시우고 그래도 남는다는 것은 그래도 농사 끝 밖에 없다는 것인가.
 
130
밭 임자는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고 간 후에 열 두어 살 전후쯤 된, 남매간인 듯한 아이들 둘이 깨여진 남비쪽 생철쪽을 들고 나와 밭머리에 진을 치는 것이다.
 
131
이건 곡하는 것인지 노래 부르는 것인지 야릇하게도 서러운 푸념이나 애원이 아닌가.
 
132
날짐승에게도 애원은 통한다.
 
133
유유히 날라가는 것이로구나.
 
134
날김생도 워낙 억세고 보면 사람도 쇠를 치며 우는 수밖에 없으렸다.
 
135
농가 아이들을 괴임성스럽게 볼 수가 없다.
 
136
첫째 그들은 사나이니까 머리를 깎았고 계집아이니까 머리가 있을 뿐이요 몸에 걸친 것이 그저 구별과 이름이 부를 수는 있다. 그들의 치레와 치장이란 이에 그치고 만다.
 
137
허수아비는 이보다 더 허름한 옷을 입었다. 그래서 날김생들에게 영(令)이 서지 않는다.
 
138
그들은 철없어 복스런 웃음을 웃을 줄 모르고 웃음이 절로 어여뻐지는 옴식옴식 패이고 펴고 하는 볼이 없다.
 
139
그들은 씩씩한 물기와 이글거리는 피빛이 없고 흙빛과 함께 검고 푸르다.
 
140
팔과 다리는 파리하고 으실 뿐이다.
 
141
그들은 영양이 없이도 앓지 않는다.
 
142
눈도 아모 날래고 사나운 열기가 없다. 슬프지도 아니한 눈이다.
 
143
좀처럼 울지도 아니한다 ─ ─ 노래와 춤은 커니와.
 
144
그들은 이 가난하고 꾀죄죄한 자연에 나면서부터 견디고 관습이 익어 왔다.
 
145
주리고 헐벗은 고독함에서 사람이란 인내와 단련이 필요한 것이 되겠으나 그들은 새삼스럽게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된다.
 
146
그들은 괴롭지도 아니하다.
 
147
그들은 세상에도 슬프게 생긴 무덤과 이웃하여 산다.
 
148
그들은 흙과 돌로 얽고 다시 흙으로 칠한 방 안에서 흙냄새가 맡아지지 아니한다.
 
149
그들은 어버이와 수척한 가축과 서로서로 숨소리와 잠꼬대를 하며 잔다.
 
150
그들의 어머니는 명절날이면 횟배가 아프다.
 
151
그들의 아버지는 명절날에 취하고 운다.
 
152
남부 이태리보담 푸르고 곱다는 하늘도 어쩐지 영원히 딴 데로만 향하여 한눈파는 듯하여 구름도 꽃도 아무 장식이 될 수 없다.
 
 

8. 육체(肉體)

154
몽끼라면 아시겠습니까. 몽끼, 이름조차 맛대가리 없는 이 연장은 집어 다지는 데 쓰는 몇 천 근이나 될지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저울추 모양으로 된 그 쇠덩이를 몽끼라고 이릅데다. 표준어에서 무엇이라고 제정하였는지 마침 몰라도 일터에서 일꾼들이 몽끼라고 하니깐 그런 줄로 알 밖에 없습니다.
 
155
몽치란 말이 잘못 되어 몽끼가 되었는지 혹은 원래 몽끼가 옳은데 몽치로 그릇된 것인지 어원에 밝지 못한 소치로 재삼 그것을 가리려고는 아니하나 쇠몽치 중에 하도 육중한 놈이 되어서 생김새 등치를 보아 몽치보담은 몽끼로 대접하는 것이 좋다고 나도 보았습니다.
 
156
크낙한 양옥을 세울 터전에 이 몽끼를 쓰는데 굵고 크기가 전신주만큼이나 되는 장나무를 여러 개 훨석 웃등을 실한 쇠줄로 묶고 아랫등은 벌리어 세워놓고 다시 가운데 철봉을 세워 그 철봉이 몽끼를 꿰뚫게 되어 몽끼가 그 철봉에 꽂힌 대로 오르고 나리게 되었으니 몽끼가 내려질리는 밑바닥이 바로 굵은 나무기둥의 대구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 나무기둥이 바로 땅속으로 모조리 들어가게 된 것이니 기럭지가 보통 와가집 기둥만큼 되고 몽끼는 땅바닥에서 이층집 꼭두만치는 올라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몽끼가 기여오르는 꼴이 볼 만하니 좌우로 한편에 일곱 사람씩 늘어서고 보면 도합 열 네 사람에 각기 잡어다릴 굵은 참밧줄이 열 네 가닥, 이 열 네 가닥이 잡어다리는 힘으로 그 육중한 몽끼가 기어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단번에 올라가는 수가 없어서 한 절반에서 삽시 다른 장목으로 고이었다가 일꾼 열 네 사람들이 힘찬 호흡을 잠간 돌리었다가 다리 와락 잡어다리면 꼭두 끝까지 기어올라갔다가 나려질 때는 한숨에 나려박치게 되니 쿵웅 소리와 함께 기둥이 땅속으로 문찍문찍 들어가게 되어 근처 행길까지 들석들석 울리며 꺼져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릇을 기둥이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줄곳 해야만 하므로 장정 열 네 사람이 힘이 여간 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초성 좋고 장고 잘 치고 신명과 넉살 좋은 사람으로 옆에서 지경 닦는 소리를 멕이게 됩니다. 하나가 멕이면 열 네 사람이 받고 하는 맛으로 일터가 흥성스러워지며 일이 실하게 부쩍 부쩍 늘어갑니다. 그렇기에 멕이는 사람은 점점 흥이 나고 신이 솟아서 노래 사연이 별별 신기한 것이 연달아 나오게 됩니다. 애초에 누가 이런 민요를 지어냈는지는 구절이 용하기는 용하나 좀 듣기에 면고한 데가 있읍니다. 대개 큰애기, 총각, 과부에 관계된 것, 혹은 신작로, 하이칼라, 상투, 머리꼬리, 가락지 등에 관련된 것을 노래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에헬렐레 상사도로 리프레인이 계속됩니다. 구경꾼도 여자는 잠깐이라도 머뭇거릴 수가 없게 되니 아무리 노동꾼이기로 또 노래를 불러야 일이 실하고 불고 하기로 듣기에 얼굴이 부끄러 와락 와락 하도록 그런 소리를 할 것이야 무엇 있습니까. 그 소리로 무슨 그렇게 신이 나서 할 것이 있는지 야비한 얼골짓에 허리아래들과 어깨를 으씩으씩 하여가며 하는 꼴이 그다지 애교로 사주기에는 너무도 나의 신경이 가늘고 약한가 봅니다. 그러나 육체노동자로서의 독특한 비판과 풍자가 있기는 하니 그것을 그대로 듣기에 좀 찔리기도 하고 무엇인지 생각케도 합니다. 이것도 육체로 산다기보다 다분히 신경으로 사는 까닭인가 봅니다. 그런데 몽끼가 이 자리에서 기둥을 다 박고 저 자리로 옮기려면 불가불 일꾼의 어깨를 빌리게 됩니다. 실한 장정들이 어깨에 목도로 옮기는데 사람의 쇄골이란 이렇게 빳잘긴 것입니까. 다리가 휘청거리어 쓰러질까 싶게 갠신갠신히 옮기게 되는데 쇄골이 부러지지 않고 백이는 것이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이번에는 그런 입에 올리지 못할 소리는커녕 영치기영치기 소리가 지기영 지기영 지기영 지기지기영으로 변하고 불과 몇 걸음 못 옮기어서 흑흑하며 땀이 물 솟듯 합데다. 짓궂은 몽끼는 그 꼴에 매달려 가는 맛이 호숩은지 둥치가 그만해가지고 어쩌면 하루 팔이로 살아가는 삯군 어깨에 늘어져 근드렁근드렁거리는 것입니까. 숫제 침통한 웃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네는 이마에 땀을 내어 밥을 먹는다기보담은 시뻘건 살뎅이를 몇 점씩 뚝뚝 잡어떼어 내고 그리고 그 자리를 밥으로 때우어야만 사는가 싶도록 격렬한 노동에 견디는 것이니 설령 외설하고 음풍(淫風)에 가까운 노래를 부를지라도 그것을 입시울에 드치고 말 것이요 몸동아리까지에 옮겨갈 여유도 없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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