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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를 듣고 여해는 하던 이야기를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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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간다고 설마 예까지 와서 끌어 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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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이야기에 잠차져서 모든 것을 잊은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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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궈 버리면 대수예요? 나 여기 자고 갈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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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화는 빈 침대 위에 눈을 주었다. 누울 자리를 보자 그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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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등살이 꼿꼿하군. 나도 저 침대에 누울 테니 얘기를 더 들려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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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상반신을 한 번 틀고 어깨 죽지를 몇 번 툭툭 치고 몸을 일으켜 빈 침대에 가서 누웠다.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나서 곧 여해쪽을 향해 옆으로 누우며 손으로 고개를 받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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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어데서 중두머리가 됐더라? 오 옳지, 협박장이 어쩌고 어쩌고 하다가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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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잘난 얘기는 왜 또 끄집어내시오. 인제 다른 얘기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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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쓰라린 제 내력을 늘어놓기에 지친 듯하였다. 그는 화제를 돌려 버리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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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끝끝내 영애 씨 말씀을 않으시고 배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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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갸륵한 사랑이시군! 시쳇말짝으로 신성한 연애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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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어데까지 여해의 말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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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웃으셔요? 그러면 두 분의 사이가 신성치 않았단 말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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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치 않기는. 너무나 신성하여요. 그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구려. 신성한 연애! 좀 싱거운 수작이오? 그러나 그때 소설 나부랭이나 읽고 하던 나는 이 신성한 연애란 말에 무한 매력을 느끼었소. 이 신성한 연애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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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시사! 그래 영애 씨와 신성한 연애를 하셨으니 징역도 꿀맛이란 말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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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를 썼소. 소설에 나타나는 연애는 모두 달이나 별과 같이 허공에 달린 것이고, 결코 손아귀에 쥐어지는 건 아니었소. 그리고 처음엔 마음이 오마조마하게 얼려 들어가다가는 끝판에 언제든지 슬프게 되는구려. 나는 「베르테르의 번민」을 읽고 「춘희」를 읽고 「장한몽」을 읽고 울었소. 그런데 우리의 연애는 허공에 매달리지 않았구려. 내 품에 참따랗게 안기었구려. 이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왼 세계에 오직 나 하나뿐인 듯하였소. 이 너무나 큰 행복! 그렇소, 그것은 너무 엄청난 행복이었소. 나는 이 행복에 눌리어 질식을 할 것 같았소. 암만해도 이 행복을 끝끝내 누리기는 너무 복에 과한 듯하였소. 곧 불행이 뒷덜미를 짚을 듯한 예감에 나는 까닭도 없이 마음을 졸이었소. 흉한에게 잡혀가는 그를 구해내다가 왼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넘어지는 꿈을 여러 번 꾸었소. 그를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광경도 눈앞에 여러 번 그려 보았소. 그를 멀리멀리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을 환상하고, 여러 번 울어도 보았소. 과연 불길한 예감대로 불행은 닥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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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밀 듯 밀려나오던 여해의 말은 잠깐 끊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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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그 동안은 궁금하다는 듯이 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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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의 이 말에 명화는 귀를 쫑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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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이만 저만한 불행이 아니시군. 왜 별안간에 애인님께서 변심을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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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을 했다느니보담 영애의 집안 사정이 어쩔 수 없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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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사랑에 집안 사정이 무슨 계관예요? 우리 기생년들같이 팔려 다니는 몸이 아닌 담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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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도 말하자면 불행한 " 여자였소.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오라비가 둘인데 작은 오라비는 찰난봉이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집안을 맡은 큰 오라비란 자가 여간 허욕꾸러기가 아니구려. 미두를 해서 여러 백석하던 살림을 일조에 깝살리고 말았소. 집행이 나오느니 경매를 당하느니 난 가가 되었소. 큰 오라비 미두 빚도 빚이지만, 작은 오라비의 난봉 빚도 터져 나온 것이오. 그 때 내 하숙이 바루 그 집 옆집이었는데 대문간에 고물상들이 모여 서고 안에서 울음판이 벌어진 것을 여러 번 보았소. 이 때 구세주같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박병일이었소. 영애의 큰 오라비하고 병일은 은행 거래 관계로 잘 아는 터수이고 마츰 병일이가 상처를 한 무렵이었는데, 그 자는 영애를 한 번 보고 고만 넋을 잃었던 모양이오. 그는 천 원이나 하는 보석 반지를 영애에게다 사다 주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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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영애 씨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가 바루 그 때 그 반지로구먼. 그래 반지 한 개에 고만 마음이 돌아 앉았나요? 천연 심순애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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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그렇지 않았소. 그 반지를 내 앞에서 동댕이를 치며 울기까지 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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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댕이를 치고 울기까지 할 것이면, 왜 받기를 받아요? 참 아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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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받은 게 아니라오. 제 큰 오라비가 받아 가지고 왔더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값진 것인 줄도 몰랐고, 제 오라비가 사 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오. 한동안은 좋아라고 끼고 다녔소. 나한테 자랑까지 하고. 나종에야 제 오라비가 뚱겨 주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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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반지 하나로 혼인이 곧 된 모양입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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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지보담 더 중대한 문제는 은행에 진 빚 삼만 원 문제요. 영애의 집 전 재산은 가위 전부가 병일의 은행에 들어가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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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을 하면 그 빚을 탕감을 해 주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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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이가 직접 그런 말은 안 했겠지만 세 든 사람이 그런 소리까지 비친 모양이오. 그야 혼인만 된다면야 탕감은 몰라도 빠득빠득 졸르기야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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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튼지 영애의 집 운명은 이 혼인이 되고 안 되는 데 달렸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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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만원! 돈은 꽤 많군요, 그래 삼 만원에 꾸벅꾸벅 팔려 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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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는 죽어도 시집은 가기 싫다 하였소. 정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였소. 둘이 멀리 달아날까, 정사를 할까, 처음에는 이 두 길이 번차례로 머리에 떠올랐소. 그러다가 나는 돌려 생각해 보았소. 나 때문에 그를 불행하게 맨들 수는 없었소. 희생시킬 수는 절대로 없었소. 더구나 그의 집안을 망칠 수는 없었소 나 하나만 . 불행하면 고만이 아닌가. 쓰디쓴 실연에 울면 고만이 아닌가. 이렇게 결심을 하였소. 이 결심은 물론 슬펐소. 그러나 사랑을 잃고 운다는 것이 어쩐지 감격하였소. 나는 무슨 시인이나 된 듯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서 인생을 생각하고 운명을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하였소. 나는 사랑의 행복을 맛본 만큼 실연의 비애를 질근질근 씹어 보려 하였소. 나는 졸랐소, 시집을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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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시사. 그래 영애 씨는 애인의 영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집을 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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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리 시집을 가라고 졸라도 영애는 듣지 않는구려. 고만 죽어 버리자고 몇 번을 내 무릎에 울고 쓰러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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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니 그렇겠어요? 시집을 가자니 사랑을 버려야겠고, 아니 가자니 집안이 망할 테고.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렵고. 그 때 영애 씨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했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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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르다가 못해 나는 훌쩍 봉천으로 달아나 버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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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혼자요. 암만해도 내가 가까이 있고는 영애의 마음이 돌아앉지를 않을 것 같아서 비상 수단을 취한 것이오. 유언 비슷한 만지장서를 남기고 나는 몰래 경성을 떠났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내 마음은 슬펐소. 기차가 고동을 틀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어른어른 뒷걸음을 치며 물러가는 플랫폼과 수많은 전송꾼을 보고 나는 울었소. 모든 것이 하직이다 싶어서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려. 애인을 두고 나는 간다, 애인을 위해서 애인을 버리고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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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그 때 일이 선연하게 눈앞에 나타나는 모양으로 눈을 섬벅섬벅하며 목소리가 메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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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가엾어라. 참말 정거장 이별이란 못할 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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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정거장 이별이오? 정거장에 누구 하나도 없는데, 괜히 차창에 고개를 내어 밀고 사람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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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더 슬프지 않아요? 봉천 가신 새, 혼인은 되었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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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봉천에 몇 달 있지도 못하였소. 처음에는 큰맘을 먹고 떠나갔지만, 암만해도 견딜 수가 없구려. 애인을 멀리 그리며 눈물만 흘린다는 것은 소설로 볼 때엔 그럴듯도 하였지만 정말 겪어보니 못 견딜 노릇이었소. 나는 되돌아오고 말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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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는 생각은 없었소. 결심한 바도 있고, 또 떠날 때 편지도 남겼거니와 봉천 있는 동안에도 시집 가란 권고 편지를 여러 번 한 체면도 있으니 그를 만날 생각을 하랴 할 수가 없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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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지는 않더래도 한 걸음이라도 그가 있는 곳과 가까운 데 있으면 한결 나을 것 같았소. 서울과 봉천의 사이는 너무 멀었소. 그가 사는 한 나라 한 고을에나마 같이 있고 싶었소. 그가 밟는 같은 땅이라도 밟아 보고 싶었소. 그가 마시는 같은 공기라도 마시고 싶었소. 지금 생각하면 쑥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그 때는 그렇게 생각이 든 것을 어떡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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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으면 안 만나고 더 배기시기 어려운 줄 모르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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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배기기는 더 어려웠소. 그러나 나는 참았소, 이를 악물고 참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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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담은 참을 수 있었소.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수가 있다, 이 생각이 정말로 당장 안 만나고 참을 수 있게 하였소. 지금 당장이라도! 하는 사이에 날은 가고 밤은 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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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렇기도 하시겠군! 손에 잡힐 물건을 일부러 두고 보는 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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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도 사랑이 도저하셨는데 왜 첫날밤에 칼을 들고 들어가셨나요? 그건 정말 모를 일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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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무엇을 노리는 것처럼 이윽히 천정을 쳐다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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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니라오? 예수교인 같으면 마귀가 붙었다고나 할까? 혼인날을 딱 당하고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수 있다는 마지막 기회까지 놓치고 말았구려. 여태껏 만나려면 만나려니 하고 미룩미룩 참아 나려오다가 최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날이 닥치고 말았구려. 그 날이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쉽사리 닥칠 줄은 참으로 몰랐구려. 인제는 마지막이다, 인제는 고만이다, 인제는 만나려도 만날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은 어떠하였겠소? 왜 만나지 않았던고. 시시로 만나고 싶던 그 허구많은 시간 가운데 왜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지 않았던고! 아주 남의 사람이 되기 전에 얼굴이나마 한 번 가까이 보아둘 것 아닌가. 나는, 나는 정말 미쳐날 것 같았소. 하숙을 뛰어나왔소. 지향없는 발길이 진고개를 올라갔소. 철물전 앞에서 번쩍번쩍하는 단도가 눈에 띄었소. 나는 덮어놓고 그것을 하나 샀구려. 처음에는 그 칼을 갖고 어쩌자는 생각도 없었소. 교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꽂고 나왔는데 내 발길은 저절로 혼인식장으로 향해지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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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랑하던 여자를 남에게 내어주다니 말이 돼요? 치미는 불덩이를 그야 누르랴 누르랴 눌러낼 장사가 없겠지요. 그래, 오 년 징역을 사시면서도 늘 영애 씨를 그리워하셨겠군요. 남의 사내의 품에 참따랗게 안긴 애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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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게 아니라 첨에는 그리워도 하였소. 감방 쇠창살에 그의 흰 얼굴이 어른어른하는 듯하였소. 물론 그를 조금치라도 원망치 않았소. 나 때문에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되려 그에게 누가 안 될까 걱정하였소. 나는 그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었던 것이요. 내가 그를 위해 이 고생을 한다 하니 감격한 생각이 들었소. 내 몸의 고통이 곧 그의 행복이로구나 하매, 고생을 해도 고생을 하는 보람이 있는 듯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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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태 삼 년 지나갈수록 이런 감격이 줄어지는구려. 여러 죄수들과 접촉을 하는 사이에 어린 나는 차차 정말 인생의 꼴을 보았소. 내가 생각하던 바와 아주 다른 인생의 꼴을 보았소. 악착스럽고 참혹한 인생의 현실이 아름답던 내 꿈을 사정 없이 깨치고 만 것이오. 여기는 소위 신성한 연애도 없었소. 사랑을 위하는 희생도 없었소. 듣기만 해도 불쾌한 그저 치정 관계란 한 마디로 돌려버리는구려.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노릇을 한 듯하던 내 행동이 부질없는 짓만 같구려. 젖내 나는 어린애 작난만 같구려. 작난으로 징역을 살 노릇이오? 이 생각이 한번 들자 나는 살이 떨리었소.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연놈은 재미가 쏟아지렷다, 잘도 흥청거리렷다, 하매 이가 갈리었소. 연놈을! 연놈을 하고 내 가슴을 쳤소. 내 머리를 쥐어뜯었소. 연놈이 앞에만 있으면 한 주먹으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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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그 이야기만 해도 몹시 흥분해진다. 얼굴이 더욱 상기가 되고 숨소리까지 시근벌떡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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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머니나! 변하기는 잘도 하시는군요, 그 끔찍하던 사랑이 어쩌면 일조에 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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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겪어 보고는 그 속을 모를 거요. 그야 일조 일석에 변한 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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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달을 두고, 여러 해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변한 게 나종에는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오. 마음이 변하고 보니 징역살이가 더욱 고통이구려. 울화가 치받쳐서 그대로 펄펄 뛰다가 죽고 싶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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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사랑이 원수로 변하셨습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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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원수요 원수구 " . , 말구. 아까운 청춘을 철창 앞에서 썩히게 한 연놈이 원수가 아니고 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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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출옥하던 길로 영애 씨의 뒤를 줄줄 따라 박병일 씨 댁으로 가셨나요? 원수의 집엘 뭐 하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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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여해는 명화의 얼굴이 부신 것처럼 눈을 외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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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상하지 않아요? 원수라고 그렇게 치를 떨다가 출옥하던 맡에 그 집엘 꾸벅꾸벅 따라가신 것은 암만해도 모를 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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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법도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설마 대뜸 원수를 갚으러 가신 건 아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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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갚으려니 갚을 차비가 있소? 또 남 우세만 하고 말 것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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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말예요. 왜 따라가셨나요? 무슨 깊은 곡절이 있었을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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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은 말하자면 좀 창피하오. 서울에 친척도 없는 놈이 감옥에서 나서서 어딜 가겠소? 원수라도 같이 가자는 사람을 그양 따라갈 수밖에 더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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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러하시겠지만 분명 딴 까닭이 있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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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이 무어예요? 좀 들읍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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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얘기하시다가 그 까닭을 말 못하실 게 뭐예요? 남 궁금해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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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 궁금할 게 뭐요? 옛 애인을 따라간 걸로만 생각해 두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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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까닭이 있다면서 왜 남을 감질만 내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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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의미 있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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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씨! '씨'자는 뭐구 '여자'는 뭐예요? 놀아먹는 년이 무슨 여자 값에 나 가요? 사내 친구끼리 입에 못 담을 말이라도 기생에게 하는 건 괜찮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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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말하기를 몹시 꺼리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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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래도가 다 뭐예요? 괜찮아요, 괜찮대도 그러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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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내끼리도 " 할 얘기가 못 되오. 젊은 죄수들 끼리나 할 얘기요. 징역을 못 살아본 사람은 무슨 소린지를 모를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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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걱정은! 몰라도 좋아요. 들어만 둡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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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를 따라간 것은 영애가 여자인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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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 매우 거북해 하다가 필경 여해는 무슨 선고를 나리듯이 이렇게 말을 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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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영애 씨가 여자지 누가 사내래요? 따라가신 이유가 단지 그것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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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끔찍스러운 까닭을 들으려다가 이 신통치 못한 대답에 적이 실망을 한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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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영애는 분명 사내가 아니요, 여자인 탓이었소. 여자의 환영이란 젊은 죄수에겐 마치 독사와 같은 것이오. 몸에 칭칭 휘감기고 사뭇 가슴을 물어뜯는 것이오, 옥문 밖에 나서자 나는 여자를 보았소. 내 눈에는 영애가 보이지 않소. 옛날 애인도 오늘날의 원수도 보이지 않았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격으로 내 눈에는 계집만이 보이는구려. 환영으로 그리고 그리던 여자가 정작으로 참으로 내 코앞에 있구려. 손만 벌리면 잡힐 자리에 섰구려. 그 물씬한 살내에 나는 금세로 숨이 막힐 것 같았소. 나는 꿈속같이 황홀하고 말았소. 사랑이구 원수이구 다 잊어 버렸소. 이 여자를 버리고 어딜 가겠소? 보송보송 사내들끼리만 있는 지옥을 뛰어나와 이 사바세계에서 처음 만난 여자를 안 따르고 누구를 따라가겠소? 생각을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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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봐도 과연 잘 모르겠군요. 그럴 상도 싶고 안 그럴 상도 싶고!" 하고 명화는 생글생글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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