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 다빈치!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한글  수정

◈ 적도 (赤道) ◈

◇ 급보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그 날 밤에도 병일과 석호와 명화는 명월관 별실에서 놀았다.
 
2
병일의 짝으로 명화를 불렀으면, 석호의 짝으로 초월이가 으레 대어 설 것이언만, 석호는 웬일인지 굳이 사양을 하였다. 명화가 기생 하나는 심심하니 기어이 초월을 부르자고 부득부득 졸랐으되 석호는 끝까지 거절하였다.
 
3
"언제는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그새 마음이 변하셨나요? 변덕스러우시긴."
 
4
"내가 초월에게 실없이는 굴었지만, 언제 좋아야 했나?"
 
5
석호는 진국이다. 그리고 그 고양이 상판 같은 얼굴을 살짝 붉힌다.
 
6
"암 그러시지, 어쩌면 저렇게 시침을 따실구. 가을 하늘과 사내의 마음!"
 
7
"정말일세, 참말일세. 내가 초월을 건드렸다면 맹서라도 하겠네."
 
8
석호는 뿌옇게 변명을 한다.
 
9
"왜 이러셔요? 맙시사. 이런 데 여럿이 모여서 엄벙덤벙 노는 것보담 단 두 분이 그림자처럼 붙어 앉아 노는 게 재미는 더 있을 게지. 그도 그래, 마음이 도저해지면, 제 애인을 남 보이기도 싫어지렷다. 그러지 마시고 고만 떼어들이시는 게 어때요?"
 
10
"이 애가 왜 이러는 게야? 생사람을 잡으니. 난 난 초월의 집에 발그림자를 한 일도 없단다."
 
11
"발 그림자는 않으셔도 몸 그림자는 하셨지. 그럼 벌써 떼어들여 앉히신 게로군. 초월이가 안방마님 노릇하는 꼴을 좀 보았으면……호호……."
 
12
"괜히 요릿집에서 자주 불렀더니만 헛소문이 났어. 그래 내가 기생 따위를 사랑할 것 같으냐."
 
13
석호는 얼굴이 뻘개지며 노발대발한다.
 
14
그 서슬에 명화는 무참해졌다. 그러나 기생 따위란 말이 비위에 거슬리어 뉘엿뉘엿 올라올 듯한다.
 
15
"그러시구 말구. 기생 따위를 사랑이야 하셨겠소? 데불고 작난이나 하신 게지. 작난이 지나쳐서 그 애 배가 퉁퉁 부은 게로군요. 그래, 산삭이 어느 달예요?"
 
16
명화는 초월의 애 뱄다는 얘기는 않으려 하였으나 석호의 꼴이 얄미워서 필경 그 말을 끄집어낸 것이었다.
 
17
"뭐, 초월이가 애를 뱄나?"
 
18
병일이가 귀가 번쩍 뜨이는 듯이 묻는다.
 
19
"애를 뱄으면 한두 달이야요? 아마 여섯 달은 되었을걸."
 
20
석호는 한 번 병일을 힐끗 보고 얼굴빛이 노오래졌다.
 
21
"그년이야 뉘 애를 뱄던지, 내가 무슨 상관이람?"
 
22
하고 어색하게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반들반들하는 눈은 명화를 당장에라도 뜯어먹을 것 같다.
 
23
명화는 심상치 않은 석호의 기색을 얼른 살피었다.
 
24
'요 깜찍스러운 놈팽이가 또 무슨 궁리를 하길래 초월의 말이라면 질겁을 할까? 초월의 애 뱄다는 게 아마 제일 듣기가 싫은가 부다. 실컷 골을 좀 올려줄까?' 명화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25
"그래, 그 애가 선생님 애가 아니란 말예요?"
 
26
"내 애? 원 말도 되지도 않는 소리를……."
 
27
"정말이야요? 분명 그 애가 선생님 애가 아니란 말예요? 시침을 따도 작작 떼요. 초월이 말에는 선생님 만난 지 석 달만에 그 애가 들었다는데, 그리고 아들만 낳으면 곧 떼어들여 부인을 삼으시겠다구 떠먹듯이 약속을 하셨다는데, 초월이가 좋아라구 한턱 내는 걸 얻어먹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아니예요?"
 
28
"미친년이지, 내가 저를 상관이나 해야 애를 배든지 뭘 배든지 하지."
 
29
석호는 또 힐끗 병일을 본다.
 
30
"다 아는 그것을 그렇게 시침을 딴다구 누가 속을 줄 아셔요? 그러시지 말구, 언제 국수를 먹이실 테요? 네 선생님?"
 
31
명화는 석호에게로 바싹 대어들었다.
 
32
"응 못되게도 구는군. 국수? 왜?"
 
33
석호는 잇새로 소리를 내었다.
 
34
"초월이와 혼인하는 국수 말예요."
 
35
"초월이의 혼인 국수를 왜 날보고 달라는 게야?"
 
36
"선생하구 혼인을 할 테니 말이죠."
 
37
"왜 내가 미쳤던가? 원 그 애는……."
 
38
"그럼 남의 계집애를 배만 인왕산 더미만큼 맨들어 놓으시고 박차실 작정 이야요?"
 
39
어떤 놈의 애를 가지구 " 왜 내게 뒤집어씌우는 게야. 난 꿈에도 모르는 일이래두……."
 
40
"정 그렇게 잡아떼실 테요? 그럼 초월이를 불러 봅시다. 당자의 핵변(覈 辨)을 들으면 제일 좋을 것 아녜요. 네 선생님, 초월이를 불러 봐요? 네?
 
41
그러면 선생님의 의심도 풀릴 게구. 네, 박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42
명화는 말부리를 병일이에게로 돌리었다.
 
43
"불러도 좋지."
 
44
병일은 쉽사리 승낙을 한다.
 
45
"그래, 박 선생님도 승낙을 하셨으니, 자, 원 선생님, 고집 그만하시구 우리 초월이를 부릅시다. 네?"
 
46
명화는 잔상히 졸랐다. 명화가 기를 쓰고 초월을 부르려는 것에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그에게는 김상열이가 온다고 전보가 왔다. 그리고 그리던 애인은 온다. 꿈 아닌 생시에 그이와 만날 시간은 한 시 두 시 다가온다. 놀음에 오기는 왔지만, 그의 마음은 공중에 떴다. 전보가 다 저녁 때에 왔기 때문에 멀리 마중은 못 나갔을망정, 세상없어도 정거장에는 나가 봐야 될 것 아니냐. 무슨 탈을 어떻게 하더래도 몸을 빼어나가야 될 것 아니냐.
 
47
그런데 기생이 단 하나로는 탈하기가 매우 거북하다. 다른 손님 아니고 병 일이니 덮어놓고 뿌리치고 갈 수도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새는 병일이가 저에게 휘어들어 일이 그럴듯하게 되어가는 판이니, 이런 무렵에는 그의 의심을 사게 되면 그야말로 다 된 죽에 코가 빠지는 격이다.
 
48
어떻게 하든지 초월을 불러야 한다. 초월이만 오면 무슨 수단을 어떻게 쓰더래도 감쪽같이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 듯싶었던 것이다.
 
49
일이 공교스럽게 되노라고 으레 부를 초월을 석호의 반대로 못 부르게 되었다. 아모리 구슬러 보아도 석호는 천 길 만 길 뛴다. 배랑뱅이 석호가 초월이와 무슨 일로 어떻게 틀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로되, 제 일에는 정말 큰 낭패다. 홧김에 초월의 애 밴 것까지 들추어내고 만 것이다.
 
50
"네 선생님, 초월이를 불러 물어 봐요. 그러면 선생님 애 아닌 걸 곧 알 것 아녜요? 네, 자 불러요."
 
51
하고 명화는 뽀이를 부르려고 손뼉을 쳤다.
 
52
"안 돼! 안 돼!"
 
53
잠자코 있던 석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54
"왜, 저러실까? 무슨 살이 붙었남? 선생님, 원 선생님, 한 번만 불러 봐요. 살풀이도 하실 겸."
 
55
"압다, 한 번만 부르라게그려."
 
56
병일이가 거들어주었다.
 
57
"그래요. 박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아모리 척이 지셨더래두 알던 사람이니 한 번만 더 불릅시다요."
 
58
석호는 명화의 말엔 대꾸도 않고 병일을 향해 진국으로,
 
59
"인젠 술도 아주 끊겠네. 기생도 끊겠네. 나도 갱생을 해 볼 작정일세.
 
60
나이 사십에 그렇게 엄벙덤벙 지나 쓰겠나? 난 깊이깊이 결심을 하였네."
 
61
병일은 그럴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호가 초월을 부르지 않는 까닭은, 물론 은주와 혼담이 있기 때문이었다.
 
62
그는 야멸치게도 병일에게 얌전히 보이려고 염량이 환하게 보이도록 애를 쓴다. 귀하신 아가씨를 맡을 몸이 전에 알던 계집을 보는 것만 해도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하였다.
 
63
명화는 손뼉을 쳤다. 뽀이는 들어왔다.
 
64
"배초월이 불러요!"
 
65
명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석호는 소리를 벽력같이 질렀다.
 
66
"구만둬라, 구만둬!"
 
67
"불러요, 불러!"
 
68
명화도 지지 않고 부르짖었다.
 
69
뽀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하이칼라 머리를 긁고 섰다가 병일을 향해,
 
70
"어떻게 하랍쇼?"
 
71
하고 묻는다. 병일은 묻는 뽀이는 보지 않고 석호를 보며,
 
72
"이 사람, 그렇게 고집 세울 것 없네. 불러보세그려, 응."
 
73
"안 되네, 안 돼."
 
74
"안 되기는 왜 안 된단 말이야? 원, 그 사람은 허허."
 
75
"아까도 말했거니와, 난 기생을 끊은 사람일세."
 
76
"기생이 술 담밴 줄 아세요? 끊기는. 아스세요. 오늘 밤 한 번만 더 보아요."
 
77
"한 번 아니라 반 번이라두 싫다니까."
 
78
"어떡하랍쇼?"
 
79
뽀이는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병일에게 또 한번 묻는다.
 
80
"있나 알아 봐라."
 
81
병일은 시비를 갈르는 듯이 판단을 나리었다.
 
82
뽀이는 몸을 굽실하고 나갔다. 조금 있다가 뽀이는 다시 와서 문만 열고 묻는다.
 
83
"배초월이 있답니다. 부르랍쇼?"
 
84
"그래 불러요."
 
85
명화가 가루채어서 얼른 대답을 해 버렸다. 석호가 미처 반대를 하기 전에, 뽀이는 '네에.' 긴 대답을 남기고 사라졌다.
 
86
석호는 깡충 뛰는 듯이 일어났다. 그는 모자를 떼어 썼다.
 
87
"이 사람이 왜 이래?"
 
88
병일은 말리는 눈치로 석호를 보았다.
 
89
"나는 가야겠네. 생각을 해 보니 볼일이 좀 있네그려."
 
90
석호는 아주 새모록하게 대꾸를 한다. 그의 눈썹에는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분기가 떠돌았다.
 
91
"그만 일에 가실 거야 뭐 있어요? 앉으세요, 안 부르면 구만 아녜요."
 
92
명화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뽀이를 불러 초월이 불르는 것을 구만두라 하였다.
 
93
석호는 다시 주저앉기는 앉았으되 여전히 뽀르퉁하게 성을 내었다.
 
94
요리상은 들어왔다.
 
95
석호는 앞에 놓인 술잔을 엎어놓았다.
 
96
술을 치려던 명화는 무참해 하며,
 
97
"왜 술을 안 잡수셔요?"
 
98
"술도 끊었네."
 
99
석호는 팍 무는 소리를 내었다.
 
100
병일은 한 잔을 훌쩍 먼저 들이키다가, 석호와 명화와 승강하는 것을 보고,
 
101
"왜 그러나? 술까지 안 먹을 거야 있는가?"
 
102
하고 얼굴을 찡기었다.
 
103
"아닐세, 술도 끊겠네."
 
104
"그러면 나 혼자만 먹으란 말인가?"
 
105
병일도 화를 버럭 낸다. 석호는 난처한 듯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았다가 마지못해 하는 듯이,
 
106
"그러면 오늘밤에만 먹겠네. 인제는 아주 술하구 하직일세."
 
107
하고 씩 웃고 간신히 술잔을 받는다.
 
108
좌석이 턱 어우러지지를 못하고 어째 까실까실하게 되어 명화가 재조를 부리랴 부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사이에도 시간은 나래가 돋친 듯이 훨훨 날아간다. 십분, 이십 분! 명화의 정거정에 나갈 시각은 가까워온다. 명화는 속으로 기름을 끓이고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109
시간은 열 시를 넘었다 . 열 한 시 이십 분 차면, 여유는 한 시간밖에 남지를 않았다. 명화는 탈할 궁리를 아모리 해 보아도 그럴듯한 것이 나서지 않았다.
 
110
마침 뽀이가 왔다.
 
111
"박 선생님 댁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112
"내 집에서 전화가 와?"
 
113
병일은 얼근한 얼굴을 들었다.
 
114
"누가 걸었단 말이냐?"
 
115
하고 불쾌한 듯이 물었다.
 
116
"부인께서 거신 듯합니다."
 
117
"내 여기 없다구 하렴."
 
118
"대단히 급하신 일이라구 하시는뎁쇼."
 
119
병일은 여해와 영애가 병원에서 옥신각신이 있고 명화의 위조 전갈을 들은 뒤로 아직까지 한 번도 영애를 대하지 않았었다. 며칠만큼 집에 돌아가는 것이나마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사랑에만 휘 둘러나오고 말았었다. 영애도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하여, 여러 날 들어가지 않아도 은행에나 회사로 전화 한 번 거는 법도 없었다.
 
120
병일은 제 안해가 어떻게 괘씸한지 몰랐다.
 
121
'남편이 닷새씩 열흘씩 들어가지 않아야 한 번 찾을 생각도 않구…….' 병일은 노여웠다, 분하였다. 그러나 한 옆으로 쓸쓸하였다. 안해에게 대한 제 사랑도 식어 가거니와 제 안해가 이다지 끊고 빈 듯이 냉정해질 줄이야.
 
122
'그깟 년 내버리면 구만이지, 인제는 남이지, 아주 남이다. 남!…….' 속으로 부르짖고, 성날 대로 할 것 같으면 당장에라도 요절을 내고 싶었다.
 
123
'하로바삐 이혼을 해 버려야…….' 그는 여러 번 막다른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 결심을 실행하기엔 여러 가지 난처한 일이 있었다. 첫째는 왁자지껄한 것이었다.
 
124
여해를 고소를 하려다가 구만두고, 은주를 여해와 결혼을 시키려다가 말고, 석호와 정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이혼을 할 도리가 없었다. 까닭 붙은 자기네 부부가 갈린다면 왁자지껄해질 것은 환한 노릇이었다. 신문에 오르나리고, 남의 입길에 오르나리는 것이 그는 제일 무서웠다.
 
125
둘째는 영애를 제 안해로 맨드는 데, 그는 너무나 많은 물질과 정신을 희생하였다. 값진 것이 아까웠다.
 
126
셋째는 아직도 남은 듯한 애정의 찌꺼기와 질투다. 저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는 년이니, 내쫓아서 비렁뱅이가 되어 고생하는 꼴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애연할 것이 없으되, 다른 사내의 품속에 안긴 꼴은 생각만 해도 살이 떨리었다. 더구나 제가 내버리면 제 사랑의 원수 여해에게로 갈 것 아니냐. 그 놈과 참따랗게 살 것 아니냐.
 
127
부부 사이가 이쯤 되었으니, 병일은 영애가 전화 걸었던 말을 듣고 화를 버럭 낸 것이었다.
 
128
"급하신 일이라시는뎁쇼."
 
129
하는 뽀이의 말에도 병일은,
 
130
"급한 일? 급한 일은 다 뭐냐? 그양 끊어라. 끊어 버려!"
 
131
하고 소리를 질렀다.
 
132
"급한 일이라는데 받아 보셔야지."
 
133
명화가 옆에서 권하였다.
 
134
"무슨 얼어 죽을 급한 일이야, 구만둬."
 
135
병일은 여전히 역정을 낸다.
 
136
"그럼 제가 받아볼까요? 그렇게 받기 싫으시면."
 
137
명화는 바시시 일어났다.
 
138
"누구세요?"
 
139
명화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물었다.
 
140
"누구예요?"
 
141
저편에서도 묻는다.
 
142
"아씨님이세요? 전 명화예요."
 
143
전화 받는 이가 뜻밖이란 듯이 저편의 말이 뚝 끊긴다. 저편의 마음의 파동을 전하는 것처럼 전화선은 쇄 하고 떨었다.
 
144
"전 명화예요. 무슨 말씀예요?"
 
145
망설이는 저편을 재촉하는 듯이 명화는 채쳤다.
 
146
"박 선생님 안 계셔?"
 
147
분명히 볼멘 소리가 들려온다. 왜 네가 가루맡아서 전화를 받느냐고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한다.
 
148
"박 선생님 찾으시는 줄 누가 몰라요? 계시기는 계시지만 전화는 안 받으신답니다. 그양 끊어버리라 하시는 걸 급하신 일이라시기에 제가 받아 드리는 거예요. 그럼 전화를 끊을까요?"
 
149
명화는 골딱지를 내었다.
 
150
"선생님을 못 대 주겠어? 큰일 났는데……."
 
151
저 편에서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모양이다.
 
152
뭐 제가 들어서 대구 " 떼구 하는 줄 아세요. 안 받으신다니 그렇지. 그럼 전화를 끊을 테예요."
 
153
명화는 더욱 골을 내었다.
 
154
"급하시다기에 제가 대신이라도 전화를 받아 드린 게지. 저에게 말하시기 어려운 일이면 전화를 끊어 버릴 테예요."
 
155
하고 명화는 홧김에 정말 전화를 끊으려 하였다.
 
156
병일이가 덮어놓고 끊으라는 것을, 그래도 그렇지 않아서, 받아주었으면 고마워해야 옳겠거늘, 도리어 볼멘 소리를 하고, 제가 병일을 전화도 못 받도록 뀌어차고나 앉은 듯이 퉁명을 부리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157
명화의 내던지는 듯한 이 말은 분명히 저편을 위협한 듯하였다.
 
158
"아 아 아니……."
 
159
당황해 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떤다.
 
160
"왜 그러셔요? 그럼 말씀을 하셔요. 속시원하게……."
 
161
"저 저……."
 
162
섭적 말하기를 저편에서는 그래도 꺼려 하는 눈치였다.
 
163
"무슨 말씀이셔요? 어서 말씀을 해요. 제가 전해 드리기는 할 테니."
 
164
"저 저, 은주 아가씨가 집을 나갔다고 여쭈어 주우."
 
165
"은주 아가씨가 집을 나가요? 어델 갔어요?"
 
166
명화는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래었다.
 
167
"유서를 보면 한강으로 나간 듯하우."
 
168
"네! 유서? 한강?"
 
169
명화는 엉겁결에 수화기를 탁 놓고 근두박질을 하다시피 제 놀던 방으로 뛰어왔다.
 
170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171
명화는 힘에 버거운 장짓문을 메다붙이는 듯하고 외우쳤다.
 
172
술이 얼쩍지근하게 된 병일은 개개풀리는 눈을 치뜨며,
 
173
"웬 방정이야? 무슨 큰일?"
 
174
하고 유사태평이다.
 
175
"댁에 큰일 났어요, 큰일. 은주 아가씨가 댁을 나갔대요."
 
176
"은주가?"
 
177
그제야 병일의 눈은 뚱그래졌다. 석호도 톡 튀는 듯이 몸이 솟구치며, 그 조그마한 눈을 찢어지도록 호동그랗게 뜬다.
 
178
"유서를 보면 한강에를 나간 듯하대요."
 
179
"응?"
 
180
두 손님은 일시에 기함하는 소리를 내고 벌떡 일어선다. 일어섰으되,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다가, 눈은 다시금 명화의 입술로 물리었다.
 
181
"자동차를 부를까요? 얼른 댁에를 가 보셔야지."
 
182
명화는 그들의 취할 행동을 지시하였다.
 
183
"그래, 그래. 자동차를 불러!"
 
184
병일은 허둥지둥하며 모자를 떼어 쓰고 스프링 코트의 소매를 뀌는 둥 마는 둥 하고 방 밖엘 나섰다.
 
185
"응, 응."
 
186
석호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모자와 외투를 되는 대로 걸치고 나섰다.
 
187
명화는 뽀이를 부르러 제비같이 날아갔다.
 
188
명화는 자동차 두 대를 불렀다. 손님만큼 그도 급하였다. 집에 들러 옷이나 바꿔 입고 정거장엘 나가자면 그도 시간이 바빴던 것이다.
 
189
무슨 탈을 하고 빠져 나갈까, 궁리 궁리하던 명화에겐, 이 뜻밖의 사건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190
자동차는 곧 왔다. 병일과 석호는 한 자동차를 타고 갔다.
 
191
명화도 뒤미처 자동차를 탔다. 그는 아모리 급하더라도 이 은주의 사단을 여해에게 알리리라 하였다.
 
192
여해는 얼마 전에 퇴원을 해 가지고 있을 데가 만만치 않아서 우선 명화의 집에 묵고 있다.
 
193
명화는 집에 들어 닥치는 길로 여해의 방문을 펄쩍 열었다.
 
194
여해는 혼곤히 잠이 들었다. 아직도 병기가 가시어지지 않은 핼쓱한 얼굴엔 눈썹만 유난히 검다. 움쑥 들어간 관자놀이엔 식은땀이 촉촉하게 맺히었는데 이불을 차 던지고 방바닥에 구을며 잔다.
 
195
명화는 곤히 든 잠을 깨우기가 애처로워서 방문을 도루 닫고 나오려 하였다. 문 닫는 서슬에 여해는 돌아누우며 눈을 번쩍 떴다.
 
196
"명화 씨! 명화 씨!"
 
197
돌아서는 명화의 등뒤에서 잠깬 이는 부르짖었다.
 
198
명화는 다시 몸을 돌쳐설 겨를도 없었다. 어느 틈에 일어난 여해의 쇠깍지 같은 팔뚝은 등과 앞가슴을 으스러지라고 껴안는다. 불 같은 사내의 숨결은 계집의 귀밑에 서리었다.
 
199
"명화 씨! 명화 씨! 왜 들어왔다가 도루 나간단 말이오? 잠이 들었으면 왜 깨우지를 못하구 도루 나간단 말이오? 난 지금도 명화 씨의 꿈을 꾸었소. 꿈도 하두 뒤숭숭해서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마는 맨 마지막엔 내가 개천에 떨어졌는데 명화 씨가 위에서 나려다보고만 있구려. 그래, 나는 몸부림을 치며 우는 무렵이었소. 내 곁에 명화 씨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헛애만 썼구려. 명화 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몰랐소. 정말 몰랐소.
 
200
나는 병원에 있을 적보다 여기 와서 되려 명화 씨가 그리웠소. 나는 어제도 생각해 보고 오늘도 생각해 보았소. 나는 알았소. 명화 씨를 잃고는 살 수 없는 것을. 그러나 그게 될 말이오? 여러 해 그리고 그리던 애인이 온다는데 그게 될 말이오? 나는 이를 악물고 단념을 해 버렸소. 그런데 명화 씨가 내 방에 올 줄은 정말로 몰랐소."
 
201
사내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떤다. 솟아나는 감사와 정열을 주체를 못하는 것처럼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떤다.
 
202
'에그머니나.' 싶었다. 은주의 사단을 알리려고 들어온 것을 무슨 다른 뜻이 있어 들어온 것으로 오해를 하였구나 하였다. 하도 어림없는 오해에 기가 막히었다.
 
203
명화는 포옹의 중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첫째로 몸을 빼려고 버둥거려 보았다. 그럴수록 쇠깍지는 더욱 조아들었다.
 
204
"사람을 좀 놓으셔요. 왜 이리 하셔요? 좀 놓구는 말씀을 못하셔요?"
 
205
명화는 여해의 행동이 너무 뱅충맞고 불쾌하고 또 한옆으로 우습기도 하였다.
 
206
"아니오. 놓을 수 없소. 명화 씨의 마음을 안 다음에야……."
 
207
"아녜요. 놓으시고 내 말을 들어 보셔요. 이 팔을 풀어요. 네? 사람 갑갑해 죽겠네."
 
208
명화는 한증막 속에 든 것처럼 땀방울을 떨구며 부르짖었다.
 
209
쇠깍지는 한순간 더욱 좁혀 들었다. 정열의 불덩이가 명화의 왼몸을 태우는 듯하였다. 그러자 문득 두 팔은 풀어졌다.
 
210
명화는 휘 하고 가쁜 숨길을 내쉬었다. 옷매무새를 잠깐 고치고 바루 막질러 말하기 어려운 듯이 잠깐 망설이다가,
 
211
"그건 선생님이 순전히 오해십니다. 내가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이 방엘 들어온 건 정말 아녜요. 아예 그런 생각은 마셔요 그건 단념해 주셔요. 박병일 씨 댁에 괴상한 일이 생겨서 그걸 알려 드리려고 잠깐 들어온 거예요."
 
212
여해는 빙그레 웃고만 섰다. 그것은 제가 오해한 것을 무안해하는 것이 아니요, 명화가 무안해서 거짓말을 꾸며대는 줄로 또다시 오해한 모양이었다.
 
213
"아녜요, 그건 오해예요, 선생님 오해예요. 난 지금 정거장엘 나갈 길예요. 왜 그이가 오지를 않아요? 선생님도 아시지?"
 
214
명화는 또 한번 다지고 은주가 유서를 써 놓고 나갔단 말을 알리었다.
백과사전 연결하기
▣ 인용 디렉터리
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기본 정보
◈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 다빈치!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한글  수정

◈ 적도 (赤道) ◈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