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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어여쁜 희생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은주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은 너무 오래간만에 그의 얼굴 비치기를 놀래기나 한 듯이 울렁울렁 떨리는 것 같았었다. 눈물 어린 시선이 핑핑 내어둘리는 탓이리라.
 
2
그는 거울을 보고 또 보았다. 아모리 보아도 제 얼굴이 낯이 설었다. 아늘 아늘 터질 것 같은 빰은 탄력을 잃고 새들새들 늘어진 듯하였다. 몽실몽실 하던 턱도 까부러졌다. 양양이뼈 언저리에 도톰하게 솟았던 야들한 살은 누가 오려간 듯. 어쩌면 눈두덩이 이렇게 부어 올랐을까. 눈엔 무슨 티가 들어간 모양으로 개이고 어훙하다.
 
3
그는 화장 제구를 있는 대로 삼면 경대 위에 늘어놓았다. 있는 대로 늘어 놓는대야, 구라브 크림통, 물분병, 분청강 등 너댓 가지밖에 되지 않았다.
 
4
꾸미는 여학생 같으면 은주 같은 처지에 이런 제구가 수십 종이 넘으련만, 은주에게 이런 것이나마 있는 것이 오히려 변이었다. 이 빈약한 화장 제구일망정 그는 별로 손을 대어본 적이 드물었다. 찬찬치 못하고 곰살궂지 못한 그는 제 몸치장에도 등한하였던 것이다. 몸꼴을 내기엔 키만 엄부렁하였지, 마음은 아직 어리었던 것이다.
 
5
그는 분첩으로 두 뺨의 눈물 얼루기를 지웠다. 그러나 전 것을 메워 놓으 면, 새 것이 다시금 분가루를 제치고 실개천을 그리며 구을러 떨어졌다.
 
6
그는 분첩을 놓고 그대로 쓰러져 울었다. 전 같으면 그는 엉엉 소리를 내고 발버둥질을 치며 울었을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그는 숨을 죽이고 소리 없이 운다. 종용종용하게 누가 들을까 꺼리는 것처럼.
 
7
그는 이 한달지간에 정말 노성하고 말았다. 어리광 피우던 말괄량이로부터 대번에 눈물 잦은 계집이 되고 말았다.
 
8
그는 물론 금이야 옥이야 길러났다. 응석과 귀염으로 길러났다. 바람도 모르고 치위도 모르고, 무르녹은 봄바람에 무줄래같이 자라났다. 인생의 첫 아침은 그에게 미소만 던지는 듯하였다.
 
9
청천의 벽력! 그의 몸에 꿈에도 생각지 못할 괴변이 일어났다. 따스한 오 월에 쏟아진 된서리! 그는 아모런 견딜경도 없었다. 저항력도 없었다. 온실에서 고이고이 피어난 꽃은 이 모진 서리에 그대로 이울었다.
 
10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는 이것이 한바탕 악몽으로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흐트러진 머리칼과 수세미가 된 옷은 무서운 사실을 역력히 말하고 있지 않느냐.
 
11
그는 그 일 생긴 며칠 밤은 뜬눈으로 새웠다. 잠 안 오는 밤! 난생 처음으로 불면증이란 것을 알았다.
 
12
갖은 생각이 물 끓는 듯하면서도 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멍하게 얼이 뜬 것 같으면서도 왼몸이 찢어지는 듯이 쑤시고 아팠다.
 
13
얼마 만에야 첫째로 떠오른 생각은 자기가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사람 대하기가 가장 싫었다. 누운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사라졌으면 싶었다.
 
14
그는 햇빛도 겁이 났다. 그 밝은 광선이 한 번 제 몸에 닿기만 하면 피 묻은 상처가 그대로 환하게 드러날 것만 같았었다. 누가 밖에서 제 행동을 엿보는 듯하여 몇 번을 미닫이를 다시 닫았다. 조금만 문틈이 벌룸하여도 그는 맘을 놓지 못하였던 것이다. 나종엔 덧문까지 닫아 걸었다.
 
15
은주는 덧문까지 닫아 걸었건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이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몸으로 똘똘 감고,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도록 얼굴을 꽁꽁 싸매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16
"이 이불도 그 이불이 아닌가!"
 
17
문득 이런 생각이 났다. 그 무서운 밤에 덮던 그 이불이 아닌가. 그 지긋지긋한 일을 겪는 통에 밀리고 꾸기던 그 이불이 아닌가. 그 더러운 손길은 분명히 이 이불에도 닿았다. 그 무지한 발길은 분명히 이 이불을 밟았다!
 
18
은주는 제 코와 입을 뒤덮은 이불 자락에 척척하게 사내의 숨길이 서린 듯 하였다.
 
19
그는 이불을 활딱 벗어 던졌다. 가위눌린 듯한 눈으로 사면을 둘러보았다.
 
20
따스한 봄볕은 유난히 밝게 미닫이에 깃들었다.
 
21
조그마한 책상은 전대로 제 자욱에 앉았다. 책꽂이에는 나란히 교과서가 꽂히었다. 제 입던 교복은 여전히 마구리에 걸렸다. 자수판도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벽에 고개를 처박고 비스듬히 누웠다.
 
22
아모 것도 변한 것이 없건만 은주에겐 모든 것이 변한 듯하였다. 생전 처음 대하듯 서름서름하고 서툴렀다. 마음에 쌓이지 않고 정이 떨어졌다. 제정이 붙고 제 손때가 묻은 이 물건들은 하롯밤 사이에 남이나 된 듯하였다.
 
23
'그게 무슨 짓이냐, 그게 무슨 짓이냐.' 그들은 빙글빙글 비웃는 듯하다. 그놈을 가만 둔단 말이냐. 그 몹쓸 짓을 꼬박이 당한단 말이냐.
 
24
'그래, 그놈을 못 이겼단 말이냐. 예끼, 못생긴 년, 미친년, 더러운 년!' 그들은 대어들고 욕설을 하고 꾸짖는 듯하다.
 
25
그들은 이 일의 목도자였다, 증인이었다. 은주를 놀리고 휘박았다. 가지각색의 형틀과 같이 은주를 깎고 저미었다.
 
26
방안의 공기조차 변한 듯하다. 퀴퀴한 사내 냄새가 떠도는 것 같다. 구역이 날 듯한 비리비리한 냄새! 은주는 이 방에서 일 분 일 초를 배기기가 어려웠다. 그는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데를 가랴. 누구를 대하랴.
 
27
낮은 그래도 나았다. 미닫이의 광선이 사라지고 어슬렁어슬렁 밤의 그림자가 짙어올 제면 그의 마음은 오그라붙기 시작하였다. 그의 몸서리나는 밤이 또 닥친 것이다.
 
28
밤이 고요해 갈수록 이슥해 갈수록 그의 피는 한 방울 두 방울 말라 들어가는 것 같았다 찢어지게 . 긴장한 신경엔 털끝만한 소리도 인종(人鍾) 같이 울리었다. 바시락 소리만 나도 가슴은 덜컥덜컥 나려앉았다.
 
29
뒷마룻장이 가만가만히 울린다. 분명히 '찌극' 소리가 났다. 그 발자최는 갈데없이 이리로 향해 가까워진다. 악마는 다시금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 들어 오는 것이다!
 
30
은주는 왼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몸을 도사리었다. 방 한편 구석에 붙어섰다. 미닫이만 열리면 그는 악 소리를 지르고 곧 몸을 빼쳐 달아날 작정이었다.
 
31
인제나 저제나! 아모리 기다려도 미닫이는 열리지 않았다. 그는 참다못해 적의 동정을 살피려고 제 손으로 문을 빠금히 열어 보았다. 덧문이 철통같이 닫혀 있지 않으냐.
 
32
그래도 그는 미심다웠다. 덧 문살을 뚫고 구녕을 내어 밖을 내다보았다.
 
33
밖에는 물론 인기척도 없었다.
 
34
악마는 제가 내다보는 줄로만 알고 어데로 숨었구나!
 
35
그는 대담하게 덧문을 확 열어 젖히고 내다보았다. 아모도 없다.
 
36
달빛 어린 마룻장에 산들바람이 보금자리를 치며 굴렀다.
 
37
부끄럼과 공포의 뒤에 찾아오는 것은 절망이었다.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처녀'의 구실! 여자의 한평생에 가장 귀하고 중한 이 구실을 이렇게 헛부게 무참하게 아일 줄이야. 아름답고 깨끗한 '처녀'는 그 순간에 죽었다. 방싯방싯 피어나려던 생명의 꽃봉오리는 그 찰나에 떨어졌다.
 
38
탄력 있는 애젊은 육체는 하롯밤 사이에 송장이 되고 말았다.
 
39
공작의 꼬리처럼 찬란하던 꿈도 깨어졌다. 봄풀처럼 싹 돋던 희망도 쓰러졌다.
 
40
그는 졸업하기가 바빴었다. 졸업식만 치르면 그 날 밤차로 동경을 향하리라 하였었다. 가기만 가면 소원대로 동경 음악학교에 입학이 되리라 하였었다.
 
41
그는 제 성대에 자신이 있었다. 깎아질르는 듯한 소프라노를 내는 데에는 아모도 그를 따를 아이가 없었었다. 옥을 바수어내는 듯한 제 목소리를 제가 들어도, 어쩌면 내 목에서 이런 목청이 나올까 하고 스스로 경탄하였던 것이다, 홀리었던 것이다.
 
42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악단의 꽃으로 피는 자기! 화려한 음악회! 황홀한 청중! 사나운 박수 소리의 물결……. 앙코르! 또 앙코르! 빗발치는 듯한 꽃다발! 그는 적막한 조선 악단에, 더구나 여류 악단에 명성으로 번쩍이리라 하였었다, 여왕으로 군림하리라 하였었다.
 
43
이 더러워진 몸으로 어떻게 학교에를 들 것이냐, 남의 앞에 설 것이냐. 그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44
절망! 절망! 먹장 같은 절망이 그의 가슴을 어둡게 할 뿐이다.
 
45
혼을 잃어버린 빈 껍데기, 목숨만 붙어있는 산송장! 이 몸을 어데다가 두랴. 오직 한 길밖에 남지 않은 듯하였다. 죽음!
 
46
은주는 가장 자연스럽게 죽음을 생각하였다. 무서움과 부끄러움과 슬픔밖에 남지 않은 이 목숨을 끊어버리는 외에 아모런 다른 도리가 없을 듯하였다. 그는 쥐 잡는 약을 생각하고, 단도를 생각하고, 기차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같이 목숨을 끊는 것이라 하여도 어쩐지 징글징글하고 무시무시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강을 생각하였다. 그 푸른 물결에 풍덩실 몸을 던지는 것이 얼마쯤 시적이었다.
 
47
한번 죽음을 작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시들하였다. 사 년 동안 바라고 기다리던 졸업 날이 닥치어도 예사로 지날 수 있었다. 원하던 음악학교에를 못 가는 것도 그리 원통치 않았다. 애닯음과 안타까움도 얼마쯤 완화가 되었다. 죽으면 고만이 아닌가! 슬픔도 기쁨도 물거품과 같이 사라질 것이 아닌가.
 
48
그 후부터는 조석도 여전스럽게 먹을 수 있었다. 뒤안에 거닐 수도 있었다. 제가 가꾸어 놓은 화초의 싹이 파름파름하게 내어 솟는 것을 시름없이 들여다 볼 수도 있었다.
 
49
몇 날이 지나갔다. 하로는 오래간만에 그는 오라비의 소리를 들었다. 이 세상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동기! 며칠이 못 되어 그의 곁을 길이 떠나겠고 나 하매 다시금 슬픔이 사무쳤다. 눈물은 진정을 하려 할수록 더욱 쏟아졌다. 우는 낯으로야 오빠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그는 아모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오래간만에 제 오빠를 만나 보려 하였다.
 
50
제 마음속으로나마 작별을 하여 두려던 것이다.
 
51
문득 병일의 고래고래 소리질르는 것이 들리었다.
 
52
"그놈을! 그놈을!"
 
53
"난 곧 경찰서로 갈 터야, 경찰서로. 그놈을, 그놈을 고발, 고발할 터야."
 
54
그놈이라 함은 어느 놈을 가리키는 것을 은주는 직각적으로 깨달았다.
 
55
"오빠가 아셨고나!"
 
56
은주는 오라버니의 분개가 당연하다 하였다.
 
57
내 핏줄이 땡길 제, 오빠의 핏줄도 땡기리라 하였다. 내 살이 떨릴 제 오빠의 살도 떨리리라 하였다 . 오빠가 아시고야 그 악마를 가만히 두랴. 경찰에 고소를 하고 징역을 살리고 시원스럽게 분풀이를 하시고야 말리라 하였다.
 
58
이 세상에 외로이 호젓하게 단 혼자 남은 듯하던 은주는 자기와 같이 분해하고 같이 슬퍼하는 동기가 있는 줄 알고 마음이 얼마쯤 든든해졌다.
 
59
나 때문에 오빠가 괴로워하시는고나 걱정을 하시는고나 하매 은주는 더욱 슬펐다.
 
60
나종에 영애의 붙잡는 소리도 듣고,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하는 것이 재미 없다는 말도 들었다.
 
61
올케의 심정도 그러려니 하였다. 떠들지 말고 쉬쉬 감추려는 그의 마음도 고마웠다. 자기가 시킨 노릇은 아니지만, 자기 때문에 그 악마가 들어오게 되고 그런 몹쓸 짓을 저질러 놓았으니 올케의 가슴인들 여북하랴 하였다.
 
62
은주는 더욱 슬펐다. 이래도 슬프고 저래도 슬픈 일이었다. 이렇게 알뜰하게 자기를 위하는 오빠 부부를 아주 떠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절로 쏟아졌다. 그들의 정이 아모리 깊고 중하다 한들 이 마지막 길이야 아니 갈 수가 있느냐. 이왕 죽는 바에야 분풀이를 하면 무엇하랴, 원수를 갚으면 무엇하랴. 고소를 하면 무엇하고, 징역을 살리면 무엇하랴. 올케 말마따나 왁자지껄하게 만 될 뿐 아닌가. 내 한 몸만 죽으면 그만이 될 것을.
 
63
은주는 제 죽은 뒤에 자기로 말미암아 청년 하나가 징역을 살고 있다는 것이 고통이었다. 이승의 지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청춘의 피를 썩히는 것이 애처로웠다.
 
64
죽음을 작정한 은주는 악마에게도 동정이 갔다. 그도 징역을 살고 나온 지가 며칠이 못 되지 않았느냐. 그 지긋지긋한 쇠사실에 다시 얽히게 되면 아모리 제 지은 죄의 탓이라 하더래도 너무 악착하지 않으냐.
 
65
은주는 그를 구해 주고 죽고 싶었다. 그는 제 오빠를 말려 보려 하였다.
 
66
병일이가 사랑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기척을 듣고, 은주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울면서, 분노에 떠는 제 오빠를 말리려고 결심하였던 것이다.
 
67
제발 고소는 말아 달라고.
 
68
'무슨 낯으로 오빠를 대하랴.'은주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제 방을 나왔다. 안방 문까지 왔다. 선득 문을 열지 못하고 주뼛주뼛하는 사이에 그의 귀에는 꿈에도 생각 못할 말낱이 띄엄띄엄 들리었다.
 
69
'헌 계집'이니 '더럽힌 몸'이니 '돼지에게 밟힌 진주는 돼지에게 던져 줄밖에' 없으니, 무사타첩하자면 '여해와 은주를 결혼'을 시켜야 하느니.
 
70
은주는 어릴 때 몇 번 보아 석호를 잘 안다. 그 체신머리없는 얼굴과 몸피! 그 조그마한 눈에 띠우는 간드러진 웃음. 저를 무척 귀애하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얄미운 생각이 들고 정이 붙지 않았었다. 제 사단으로 그런 자와 의론을 할 줄이야!
 
71
더구나 기가 막히는 것은 듣기만 하여도 더러운 그 깜찍스러운 의견에 제 오빠가 그럴싸하게 여기는 말투이었다. 그 악마가 입원한 데 가 보라고 올케를 조른다. 병비를 주라고 돈까지 주고, 어서 가 보라고 성화같이 졸른다.
 
72
"환심을 사 두란 말이야."
 
73
하고 웃는 제 오빠의 웃음소리는 어쩐지 지옥에서 울려나오듯이 징글징글하고 흉물스러웠다.
 
74
은주는 앞으로 고꾸라질 듯하는 몸을 간신히 가누었다.
 
75
영애가 병원에를 간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은주는 기계적으로 몸을 피하여 제 방에 돌아와 쓰러졌던 것이다.
 
76
그의 앞에는 하늘이 무너졌다. 믿고 바랐던 제 오빠! 왼 세상 사람이 다 저를 손가락질을 하고 비웃고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저를 귀애하고 위해 줄줄 알았던 제 오빠! 앞뒤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제 분풀이를 해 주고, 제 원수를 갚아줄 줄 알았던 제 오빠! 저와 같이 피를 끓이고 살을 저며낼 줄 알았던 제 오빠! 제 불행을 저보담도 더 슬퍼할 줄 알았던 제 오빠! 체면이고 명예고 다 벗어 던지고 그 악마를 이승의 지옥에 집어 넣으려던 제 오빠가 아니었던가! 그것을 말리려고 떼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 자기가 아니었던가.
 
77
그러하였거늘! 단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오빠의 마음이 이렇게 정반대로 변할 줄이야! 그 작은 악마 석호가 속살거리는 대로 '헌계집' '더럽힌 몸'이란 말에 솔깃하고 말았다. 듣기만 해도 얼마나 치가 떨리느냐. 그 지긋지긋한 악마에게 누이를 서슴지 않고 내어 줄 작정을 하고 말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78
아까운 진주가 돼지 발에 밟혔으면, 곧 뺏어내고 씻어주는 것이 인정이 아닌가. 돼지 발에 어째 잘못되어 밟힌 것도 애닯고 원통하려든 도리어 돼지에게 던져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 차마 못할 소리가 아닌가.
 
79
자기의 경우는 돼지에게 진주가 밟혔다느니보담, 차라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에 물렸다는 것이 맞을는지 모르리라. 부드러운 살은 찢어지고 붉은 피는 쏟아진다. 이것을 보고도 그대로 범연히 지낼 것인가?
 
80
사나운 이빨이 아름다운 육체와 넋을 뜯어먹는 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81
여해와 결혼시킨다는 것은 이보담도 더 심한 말이었다. 이 처녀는 이미 짐승에게 물렸으니, 짐승의 잇자국이 난 계집이니 '헌계집'이니 '더럽힌 몸'이라 하여 엇매어다가 그 몹쓸 짐승에게 갖다 주자! 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82
'사람으로 어째 그런 생각이 날까?'은주는 며칠을 두고 생각하다가 혼자 중얼거리었다.
 
83
암만해도 모를 것은 제 오빠의 마음이었다. 언제는 징역을 다시 살린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르고, 그 말이 침도 마르기 전에 그 원수와 혼인할 작정을 하니, 수수께끼라면 이보담도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어데 있으랴!
 
84
원수가 되고 매부가 되는 것이 종이 한 겹도 가지지 않은 듯하였다. 은주에게 이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85
그는 얼마 만에야 이 기적의 정체를 풀어낼 수 있었다.
 
86
풀고 보니 그 까닭은 자못 간단하였다. 그것은 명예와 체면을 위하여는 제 누이야 어찌되든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87
은주는 누구보담도, 석호보담도, 여해보담도, 제 오빠가 원망스러웠다. 야속하였다.
 
88
은주는 한동안 울다가 다시 일어나 거울을 보고 다시금 눈물 얼룩이를 지웠다. 그는 교복을 떼어 입었다. 그는 깨끗한 학생으로 죽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늘, 내일 하면서 이 날까지 마지막 길을 내어 디디기를 미룩 미룩 하여 온 것이 분하였다. 끊어야 할 목숨을 진작 끊지 않고 멀거니 그날 그날을 보내다가 오늘 아침에 또다시 귀에 못 담을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분하였다. 이왕 죽을 것을, 좀 더 종용하게 좀 더 깨끗하게 좀 더 가라앉은 마음으로 죽으려고 한 것이, 도리어 갈수록 비위를 뒤집는 일만 생기게 되었다.
 
89
은주는 오늘 아침에 사랑으로 불려 나왔던 것이다.
 
90
병일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앉았다가, 은주가 그림자같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제 앞 가까이 앉으라 하였다. 퉁퉁 부은 눈과, 멀쩡하게 양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어젯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어데서 밤새움을 하고 아침결에 야 집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91
은주는 제 오빠의 얼굴을 보매 원망과 설움이 일시에 복받쳐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몸이 꼿꼿해지는 듯하여 앉을 수도 없었다.
 
92
병일은 얼굴빛을 펴고,
 
93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라."
 
94
라고 또 한번 재우쳤다.
 
95
은주는 마지못해 앉기는 앉았으나, 멀찌감치 앉았다.
 
96
"이리 좀 가까이 오너라."
 
97
병일은 또 한번 재우치다가, 은주가 움직이는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제가 방석을 당겨 다가앉았다. 말하기 거북한 듯이 한참 웅얼웅얼하다가,
 
98
"어 어, 너도 인제 시집을 가 봐야지. 허허."
 
99
말은 나직이 하고 웃음소리는 크게 내었다.
 
100
은주의 귀엔 그 웃음소리가 능청스러웠다.
 
101
제 오빠의 얼굴이 다시금 쳐다보이었다.
 
102
'필경 그 말씀을 하시려나 부다. 그 여해란 자와 결혼을 하라구.'은주는 속으로 생각하고 몸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제 오빠의 말은 뜻밖이었다.
 
103
"너 원석호 씨 알겠지?"
 
104
'왜 석호의 말을 끄집어낼까?'은 주는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안다는 듯을 보이었다.
 
105
"어……그 사람이 말야. 사람이 얌전도 하고 착실도 하거든. 이번에 상처를 하고 아직 속현을 못했는데……. 어, 그 사람이 사람도 재미가 있구. 해뚝해뚝한 젊은 애들보담 늙수구레한 사람이 외려 낫단 말야. 안해 사랑할 줄도 알구……. 그래 네 혼인은 그리로 정해 두었다. 응, 그래, 네 마음에는 어떠냐?"
 
106
하고 병일은 면난하도록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107
"별수 있니? 혼인이란 다 그런 거니라."
 
108
라고 혼잣말같이 뒤를 붙이었다.
 
109
병일은 어젯밤에 석호와 단둘이 밤새도록 술을 먹었었다. 명화까지 물리치고. 병일은 아모리 생각해 보아도 제 사랑하는 누이를 여해 같은 놈에게 내 어 줄 수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110
"그럼 어떡하나?"
 
111
하고 석호는 한 걱정을 하였다.
 
112
"그런 사정을 알아서 아는 듯 모르는 듯 맡아줄 사람도 구하기 어렵고……."
 
113
이윽고 석호는 무슨 단단한 결심이나 한 듯이 꽉 다물었던 입을 열며,
 
114
"자네 댁 불행이면 곧 내 집의 불행이 아닌가. 그런 일이란 왁자지껄하게 맨들 수도 없는 일이구…… 별수 없네. 그러면 자네 매씨의 평생은 내가 맡음세. 나이 사십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일이 이렇게 된 다음에야 어떡하겠나 남의 부인이 되고 . 보면 이러니 저러니 하는 뜬소문도 날래야 날 수도 없고 또 난다 한들 결국 헛소문이 되고 말 테니까……."
 
115
하고 석호는 바루 순진한 청년과 같이 그 조그마한 얼굴을 게딱지처럼 붉히었던 것이다. 석호는 처음엔 슬슬 눈치만 보이어 병일로 하여금 저에게 청혼을 하도록 맨들어보려 하였지마는, 둔한 병일이가 게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고, 초조증을 견디다가 못하여 필경 바른 대로 쏘아본 것이었다. 자식이 늘은 듯하고 사십이 넘은 자가 제 어린 누이에게 청혼을 하리라고는, 병일도 과연 상상도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왕 여해와 결혼을 못 시키는 바에야 석호에게 보내는 것이 든든하고,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116
"자네가 맡아 준다면 그런 고마울 데가 없겠네."
 
117
하고 대번에 승낙을 해 버렸다. 승낙을 한 다음에야 질질 끄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불이야불이야 서둘러서 일주일 이내에라도 곧 성례를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집에 돌아오는 길로 곧 은주를 불러내어 그 의향을 물어본 다느니보담 미리 통고를 해 버린 것이다.
 
118
'그 애도 지금 어쩔 줄을 모르렷다. 제 혼처가 작정된 줄을 알아야 안심이 되렷다.' 병일은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119
은주는 저와 석호와 정혼하였다는 말을 듣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120
"좋은 자리가 따루 있느냐. 집안 사람 같구, 믿음성 있구, 든든하고 그만 하면 네 일평생을 맡겨도 내 생각엔 괜찮을 것 같다. 더구나 그런 저런 속사정도 알구……."
 
121
병일은 은주가 불만해 한다느니보담 차라리 놀래는 듯한 기색을 알아보고, 변명 비슷하게 연송 석호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속사정도 알구'한 끝엣말에 힘을 주고 뒤끝은 얼버무렸다.
 
122
"그야 나이도 많구, 걸맞다구야 못할 게지마는, 그러나 어떡하니. 여자란 한 번 몸을 그르치면 다시 어찌할 도리가 없단 말이야. 네 운명에 돌리는 게지 어쩔 수 있느냐. 응?"
 
123
병일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은주의 눈을 보고 제법 우애 깊은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124
'오빠 너무 심하십니다. 너무 심하십니다.'은 주는 속으로 부르짖고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는 차마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도망꾼 모양으로 사랑을 빠져 나와 제 방으로 뛰어 들어 왔었다.
 
125
그는 참으로 귀를 씻고 싶었다. 저만한 아들 딸이 있는 석호, 체신머리없이 얄미운 석호, 북어 대강이 같은 얼굴에 깜찍스러운 작은 눈이 깜빡거리는 석호! 그와 저와 정혼을 하였다는 것은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소리였다. 입에 못 담을 소리였다.
 
126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는 석호가 눈앞에 선연히 나타났다. 배암과 같이 나 근나근하게 제 몸에 휘감기는 듯하여 은주는 몸서리를 쳤다. 여해는 사나운 범이라면, 석호는 징글징글한 독사에 틀림이 없었다. 범의 아가리에 물렸던 자기를 그 범에게 도루 던져 주자 하더니, 이번에는 독사에게 내버리려 한다.
 
127
'어쩌면 오빠의 마음이 그럴까? 언제는 그놈을 징역을 살린다고 떠들다가 또다시 혼인을 하려 들고, 인제 와서는 석호와 정혼을 하였다니.'은 주는 생각할수록 오빠가 야속하였다. 하늘같이 믿었던 제 오빠가 이렇게 변덕스럽고 주책이 없고 인정머리가 없을 줄이야. 같은 뼈와 살을 나누었거늘 애연한 생각도 없는가, 가엾은 생각도 없는가.
 
128
제 오빠의 사랑까지 빈 것인 줄이야!
 
129
은주는 너무 쓸쓸하였다, 너무 호젓하였다. 그는 아모 것도 없이 텅 비인 듯한 제 가슴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130
이랬거나 저랬거나 죽으면 고만이었다. 한시바삐 어머니 아버지 계신 곳으로 찾아갈 것을, 구차히 하로 이틀의 목숨이나마 이어두었다가 이런 더러운 소리까지 듣게 된 것이다.
 
131
은주는 제 죽음이 늦은 것을 한하였다.
 
132
그는 속옷도 새 것을 갈아입었다. 양말도 새 것을 갈아 신었다. 교복의 몬지를 몇 번이나 털었다. 그 잔잔한 구김살까지 만적거리며 폈다.
 
133
그는 입을 것을 다 입고 참따랗게 책상머리에 앉았다. 제 손때가 묻은 교과서, 잡기장, 참고서 등속을 이것저것을 빼어보고 또 보았다. 아까운 이별을 아끼는 듯이.
 
134
마지막으로 그는 편지지를 폈다. 그는 아모래도 제 오빠에게 유서 한 장을 아니 남기고 갈 수는 없었다.
 
135
철필 끝은 떨었다. 지렁이 같은 글자가 꾸물꾸물하며 춤을 추었다. 채 마르지도 않은 잉크 위에 눈물 방울이 떨어져서 글자가 피어나고 흐려졌다.
 
136
그는 몇 장을 버리고 몇 장을 다시 썼다. 그리고 빼죽이 내다보이도록 책 틈에 꽂아두었다.
 
137
거울을 몇 번을 다시 보고 눈물 얼루기를 지웠다.
 
138
그는 밤 들기를 기다렸다.
 
139
어찌하면 ' 아모 눈에도 들키지 않구 집을 빠져 나 갈구?'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오직 이 걱정뿐이었다.
 
140
성욕의 제단의 어여쁜 희생은 마지막 길 떠날 준비를 다 차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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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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