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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어떤 연애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가야 되겠구려."
 
2
종소리를 듣고 여해는 하던 이야기를 끊어 버렸다.
 
3
"안 간다고 설마 예까지 와서 끌어 낼라고요."
 
4
명화는 이야기에 잠차져서 모든 것을 잊은 듯하였다.
 
5
"늦으면 통행문을 잠궈 버린다는데……."
 
6
"잠궈 버리면 대수예요? 나 여기 자고 갈걸요."
 
7
하고 명화는 빈 침대 위에 눈을 주었다. 누울 자리를 보자 그는 갑자기 피로를 느끼었다.
 
8
"어째 등살이 꼿꼿하군. 나도 저 침대에 누울 테니 얘기를 더 들려 주셔요."
 
9
명화는 상반신을 한 번 틀고 어깨 죽지를 몇 번 툭툭 치고 몸을 일으켜 빈 침대에 가서 누웠다.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고 나서 곧 여해쪽을 향해 옆으로 누우며 손으로 고개를 받쳐들었다.
 
10
"얘기가 어데서 중두머리가 됐더라? 오 옳지, 협박장이 어쩌고 어쩌고 하다가 말았지?"
 
11
" 그 잘난 얘기는 왜 또 끄집어내시오. 인제 다른 얘기나 합시다."
 
12
여해는 쓰라린 제 내력을 늘어놓기에 지친 듯하였다. 그는 화제를 돌려 버리려 하였다.
 
13
"그래, 그 협박장인가를 보셨습니까?"
 
14
"글쎄, 그 얘기는 고만둬요."
 
15
"그래, 끝끝내 영애 씨 말씀을 않으시고 배기셨어요?"
 
16
"그야 물론이지요."
 
17
"참 갸륵한 사랑이시군! 시쳇말짝으로 신성한 연애라 할까?"
 
18
명화는 어데까지 여해의 말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19
"신성한 연애! 흥."
 
20
여해는 코웃음을 쳤다.
 
21
"왜 웃으셔요? 그러면 두 분의 사이가 신성치 않았단 말씀예요?"
 
22
"신성치 않기는. 너무나 신성하여요. 그게 지금 생각하면 우습구려. 신성한 연애! 좀 싱거운 수작이오? 그러나 그때 소설 나부랭이나 읽고 하던 나는 이 신성한 연애란 말에 무한 매력을 느끼었소. 이 신성한 연애만 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하였소."
 
23
"맙시사! 그래 영애 씨와 신성한 연애를 하셨으니 징역도 꿀맛이란 말씀예요?"
 
24
"그 때 나는 소설의 주인공이 되려고 애를 썼소. 소설에 나타나는 연애는 모두 달이나 별과 같이 허공에 달린 것이고, 결코 손아귀에 쥐어지는 건 아니었소. 그리고 처음엔 마음이 오마조마하게 얼려 들어가다가는 끝판에 언제든지 슬프게 되는구려. 나는 「베르테르의 번민」을 읽고 「춘희」를 읽고 「장한몽」을 읽고 울었소. 그런데 우리의 연애는 허공에 매달리지 않았구려. 내 품에 참따랗게 안기었구려. 이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왼 세계에 오직 나 하나뿐인 듯하였소. 이 너무나 큰 행복! 그렇소, 그것은 너무 엄청난 행복이었소. 나는 이 행복에 눌리어 질식을 할 것 같았소. 암만해도 이 행복을 끝끝내 누리기는 너무 복에 과한 듯하였소. 곧 불행이 뒷덜미를 짚을 듯한 예감에 나는 까닭도 없이 마음을 졸이었소. 흉한에게 잡혀가는 그를 구해내다가 왼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넘어지는 꿈을 여러 번 꾸었소. 그를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드는 광경도 눈앞에 여러 번 그려 보았소. 그를 멀리멀리 그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내 자신을 환상하고, 여러 번 울어도 보았소. 과연 불길한 예감대로 불행은 닥치었소……."
 
25
하고 물밀 듯 밀려나오던 여해의 말은 잠깐 끊이었다.
 
26
"무슨 불행예요?"
 
27
명화는 그 동안은 궁금하다는 듯이 채쳤다.
 
28
"영애는 시집을 가게 되었소."
 
29
여해의 이 말에 명화는 귀를 쫑긋하였다.
 
30
"그야말로 이만 저만한 불행이 아니시군. 왜 별안간에 애인님께서 변심을 하셨나요?"
 
31
"변심을 했다느니보담 영애의 집안 사정이 어쩔 수 없게 되었소."
 
32
"두 분의 사랑에 집안 사정이 무슨 계관예요? 우리 기생년들같이 팔려 다니는 몸이 아닌 담에야."
 
33
영애도 말하자면 불행한 " 여자였소.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고 오라비가 둘인데 작은 오라비는 찰난봉이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집안을 맡은 큰 오라비란 자가 여간 허욕꾸러기가 아니구려. 미두를 해서 여러 백석하던 살림을 일조에 깝살리고 말았소. 집행이 나오느니 경매를 당하느니 난 가가 되었소. 큰 오라비 미두 빚도 빚이지만, 작은 오라비의 난봉 빚도 터져 나온 것이오. 그 때 내 하숙이 바루 그 집 옆집이었는데 대문간에 고물상들이 모여 서고 안에서 울음판이 벌어진 것을 여러 번 보았소. 이 때 구세주같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박병일이었소. 영애의 큰 오라비하고 병일은 은행 거래 관계로 잘 아는 터수이고 마츰 병일이가 상처를 한 무렵이었는데, 그 자는 영애를 한 번 보고 고만 넋을 잃었던 모양이오. 그는 천 원이나 하는 보석 반지를 영애에게다 사다 주었소."
 
34
"그러니 영애 씨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가 바루 그 때 그 반지로구먼. 그래 반지 한 개에 고만 마음이 돌아 앉았나요? 천연 심순애 같구먼."
 
35
"아니오, 그렇지 않았소. 그 반지를 내 앞에서 동댕이를 치며 울기까지 하였소."
 
36
"동댕이를 치고 울기까지 할 것이면, 왜 받기를 받아요? 참 아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37
"제가 받은 게 아니라오. 제 큰 오라비가 받아 가지고 왔더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값진 것인 줄도 몰랐고, 제 오라비가 사 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오. 한동안은 좋아라고 끼고 다녔소. 나한테 자랑까지 하고. 나종에야 제 오라비가 뚱겨 주었소."
 
38
"그래, 그 반지 하나로 혼인이 곧 된 모양입니다그려."
 
39
"그 반지보담 더 중대한 문제는 은행에 진 빚 삼만 원 문제요. 영애의 집 전 재산은 가위 전부가 병일의 은행에 들어가 있었소."
 
40
"혼인을 하면 그 빚을 탕감을 해 주게 되었나요?"
 
41
"병일이가 직접 그런 말은 안 했겠지만 세 든 사람이 그런 소리까지 비친 모양이오. 그야 혼인만 된다면야 탕감은 몰라도 빠득빠득 졸르기야 하겠소?
 
42
아모튼지 영애의 집 운명은 이 혼인이 되고 안 되는 데 달렸구려."
 
43
"삼 만원! 돈은 꽤 많군요, 그래 삼 만원에 꾸벅꾸벅 팔려 갔나요?"
 
44
하고 명화는 입을 비쭉하였다.
 
45
"영애는 죽어도 시집은 가기 싫다 하였소. 정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였소. 둘이 멀리 달아날까, 정사를 할까, 처음에는 이 두 길이 번차례로 머리에 떠올랐소. 그러다가 나는 돌려 생각해 보았소. 나 때문에 그를 불행하게 맨들 수는 없었소. 희생시킬 수는 절대로 없었소. 더구나 그의 집안을 망칠 수는 없었소 나 하나만 . 불행하면 고만이 아닌가. 쓰디쓴 실연에 울면 고만이 아닌가. 이렇게 결심을 하였소. 이 결심은 물론 슬펐소. 그러나 사랑을 잃고 운다는 것이 어쩐지 감격하였소. 나는 무슨 시인이나 된 듯이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서 인생을 생각하고 운명을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하였소. 나는 사랑의 행복을 맛본 만큼 실연의 비애를 질근질근 씹어 보려 하였소. 나는 졸랐소, 시집을 가라고."
 
46
"맙시사. 그래 영애 씨는 애인의 영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집을 가셨나요?"
 
47
하고 명화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48
"아모리 시집을 가라고 졸라도 영애는 듣지 않는구려. 고만 죽어 버리자고 몇 번을 내 무릎에 울고 쓰러졌소."
 
49
여해는 잠깐 말을 끊었다.
 
50
"왜 아니 그렇겠어요? 시집을 가자니 사랑을 버려야겠고, 아니 가자니 집안이 망할 테고.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어렵고. 그 때 영애 씨의 처지는 참으로 난처했겠구먼!"
 
51
"졸르다가 못해 나는 훌쩍 봉천으로 달아나 버렸소."
 
52
"혼자서요?"
 
53
"물론 혼자요. 암만해도 내가 가까이 있고는 영애의 마음이 돌아앉지를 않을 것 같아서 비상 수단을 취한 것이오. 유언 비슷한 만지장서를 남기고 나는 몰래 경성을 떠났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내 마음은 슬펐소. 기차가 고동을 틀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어른어른 뒷걸음을 치며 물러가는 플랫폼과 수많은 전송꾼을 보고 나는 울었소. 모든 것이 하직이다 싶어서 눈물이 비 오듯 하는구려. 애인을 두고 나는 간다, 애인을 위해서 애인을 버리고 나는 간다……."
 
54
여해는 그 때 일이 선연하게 눈앞에 나타나는 모양으로 눈을 섬벅섬벅하며 목소리가 메어진다.
 
55
"아이 가엾어라. 참말 정거장 이별이란 못할 게예요."
 
56
하고 명화도 울멍울멍한다.
 
57
"어디 정거장 이별이오? 정거장에 누구 하나도 없는데, 괜히 차창에 고개를 내어 밀고 사람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구려."
 
58
"그러니 더 슬프지 않아요? 봉천 가신 새, 혼인은 되었구먼요?"
 
59
"나는 봉천에 몇 달 있지도 못하였소. 처음에는 큰맘을 먹고 떠나갔지만, 암만해도 견딜 수가 없구려. 애인을 멀리 그리며 눈물만 흘린다는 것은 소설로 볼 때엔 그럴듯도 하였지만 정말 겪어보니 못 견딜 노릇이었소. 나는 되돌아오고 말았소."
 
60
"한시바삐 영애 씨를 만나시려고."
 
61
"만나자는 생각은 없었소. 결심한 바도 있고, 또 떠날 때 편지도 남겼거니와 봉천 있는 동안에도 시집 가란 권고 편지를 여러 번 한 체면도 있으니 그를 만날 생각을 하랴 할 수가 없게 되었소."
 
62
"그러면 왜 돌아오셨나요?"
 
63
"만나지는 않더래도 한 걸음이라도 그가 있는 곳과 가까운 데 있으면 한결 나을 것 같았소. 서울과 봉천의 사이는 너무 멀었소. 그가 사는 한 나라 한 고을에나마 같이 있고 싶었소. 그가 밟는 같은 땅이라도 밟아 보고 싶었소. 그가 마시는 같은 공기라도 마시고 싶었소. 지금 생각하면 쑥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만, 그 때는 그렇게 생각이 든 것을 어떡하오?"
 
64
"가까이 있으면 안 만나고 더 배기시기 어려운 줄 모르시고……."
 
65
명화는 탄식하였다.
 
66
"과연 배기기는 더 어려웠소. 그러나 나는 참았소, 이를 악물고 참았소."
 
67
"참자니 오죽하셨을까!"
 
68
"그래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보담은 참을 수 있었소.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수가 있다, 이 생각이 정말로 당장 안 만나고 참을 수 있게 하였소. 지금 당장이라도! 하는 사이에 날은 가고 밤은 새었소."
 
69
"참 그렇기도 하시겠군! 손에 잡힐 물건을 일부러 두고 보는 격으로…….
 
70
그렇게도 사랑이 도저하셨는데 왜 첫날밤에 칼을 들고 들어가셨나요? 그건 정말 모를 일 아녜요?"
 
71
하고 명화는 침대에서 일어 앉았다.
 
72
여해는 무엇을 노리는 것처럼 이윽히 천정을 쳐다보다가,
 
73
"누가 아니라오? 예수교인 같으면 마귀가 붙었다고나 할까? 혼인날을 딱 당하고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만나려면 만날 수 있다는 마지막 기회까지 놓치고 말았구려. 여태껏 만나려면 만나려니 하고 미룩미룩 참아 나려오다가 최후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 날이 닥치고 말았구려. 그 날이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쉽사리 닥칠 줄은 참으로 몰랐구려. 인제는 마지막이다, 인제는 고만이다, 인제는 만나려도 만날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내 마음은 어떠하였겠소? 왜 만나지 않았던고. 시시로 만나고 싶던 그 허구많은 시간 가운데 왜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지 않았던고! 아주 남의 사람이 되기 전에 얼굴이나마 한 번 가까이 보아둘 것 아닌가. 나는, 나는 정말 미쳐날 것 같았소. 하숙을 뛰어나왔소. 지향없는 발길이 진고개를 올라갔소. 철물전 앞에서 번쩍번쩍하는 단도가 눈에 띄었소. 나는 덮어놓고 그것을 하나 샀구려. 처음에는 그 칼을 갖고 어쩌자는 생각도 없었소. 교복 저고리 안주머니에 꽂고 나왔는데 내 발길은 저절로 혼인식장으로 향해지는구려."
 
74
"그렇게 사랑하던 여자를 남에게 내어주다니 말이 돼요? 치미는 불덩이를 그야 누르랴 누르랴 눌러낼 장사가 없겠지요. 그래, 오 년 징역을 사시면서도 늘 영애 씨를 그리워하셨겠군요. 남의 사내의 품에 참따랗게 안긴 애인을……."
 
75
"아닌게 아니라 첨에는 그리워도 하였소. 감방 쇠창살에 그의 흰 얼굴이 어른어른하는 듯하였소. 물론 그를 조금치라도 원망치 않았소. 나 때문에 내가 저지른 죄 때문에 되려 그에게 누가 안 될까 걱정하였소. 나는 그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었던 것이요. 내가 그를 위해 이 고생을 한다 하니 감격한 생각이 들었소. 내 몸의 고통이 곧 그의 행복이로구나 하매, 고생을 해도 고생을 하는 보람이 있는 듯하였소."
 
76
"맙시사! 사랑도 분수가 없으시군."
 
77
"그런데 이태 삼 년 지나갈수록 이런 감격이 줄어지는구려. 여러 죄수들과 접촉을 하는 사이에 어린 나는 차차 정말 인생의 꼴을 보았소. 내가 생각하던 바와 아주 다른 인생의 꼴을 보았소. 악착스럽고 참혹한 인생의 현실이 아름답던 내 꿈을 사정 없이 깨치고 만 것이오. 여기는 소위 신성한 연애도 없었소. 사랑을 위하는 희생도 없었소. 듣기만 해도 불쾌한 그저 치정 관계란 한 마디로 돌려버리는구려. 그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노릇을 한 듯하던 내 행동이 부질없는 짓만 같구려. 젖내 나는 어린애 작난만 같구려. 작난으로 징역을 살 노릇이오? 이 생각이 한번 들자 나는 살이 떨리었소.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연놈은 재미가 쏟아지렷다, 잘도 흥청거리렷다, 하매 이가 갈리었소. 연놈을! 연놈을 하고 내 가슴을 쳤소. 내 머리를 쥐어뜯었소. 연놈이 앞에만 있으면 한 주먹으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소."
 
78
여해는 그 이야기만 해도 몹시 흥분해진다. 얼굴이 더욱 상기가 되고 숨소리까지 시근벌떡거린다.
 
79
"에그머니나! 변하기는 잘도 하시는군요, 그 끔찍하던 사랑이 어쩌면 일조에 변해요?"
 
80
"안 겪어 보고는 그 속을 모를 거요. 그야 일조 일석에 변한 건 아니오.
 
81
여러 달을 두고, 여러 해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변한 게 나종에는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오. 마음이 변하고 보니 징역살이가 더욱 고통이구려. 울화가 치받쳐서 그대로 펄펄 뛰다가 죽고 싶었소."
 
82
"그야말로 사랑이 원수로 변하셨습니다그려."
 
83
그렇소 원수요 원수구 " . , 말구. 아까운 청춘을 철창 앞에서 썩히게 한 연놈이 원수가 아니고 무에요?"
 
84
"그러면 왜 출옥하던 길로 영애 씨의 뒤를 줄줄 따라 박병일 씨 댁으로 가셨나요? 원수의 집엘 뭐 하러 가요?"
 
85
"왜 영애를 따라갔느냐?"
 
86
하고 여해는 명화의 얼굴이 부신 것처럼 눈을 외우쳤다.
 
87
"글쎄, 이상하지 않아요? 원수라고 그렇게 치를 떨다가 출옥하던 맡에 그 집엘 꾸벅꾸벅 따라가신 것은 암만해도 모를 일인데요."
 
88
"그럴 법도 하오."
 
89
"그럴 법도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요? 설마 대뜸 원수를 갚으러 가신 건 아니겠고."
 
90
"원수를 갚으려니 갚을 차비가 있소? 또 남 우세만 하고 말 것 아니오?"
 
91
"그러니 말예요. 왜 따라가셨나요? 무슨 깊은 곡절이 있었을 듯한데."
 
92
"그 까닭은 말하자면 좀 창피하오. 서울에 친척도 없는 놈이 감옥에서 나서서 어딜 가겠소? 원수라도 같이 가자는 사람을 그양 따라갈 수밖에 더 있겠소?"
 
93
"그도 그러하시겠지만 분명 딴 까닭이 있는 것 같은데요."
 
94
"딴 까닭도 있기는 있었소."
 
95
"그 까닭이 무어예요? 좀 들읍시다그려."
 
96
"그건 말하기가 더 거북하오."
 
97
"기껏 얘기하시다가 그 까닭을 말 못하실 게 뭐예요? 남 궁금해 죽겠는데."
 
98
"그게 그렇게 궁금할 게 뭐요? 옛 애인을 따라간 걸로만 생각해 두구려."
 
99
"딴 까닭이 있다면서 왜 남을 감질만 내놓아요?"
 
100
"명화 씨도 여자니까."
 
101
여해는 의미 있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102
"명화 씨! '씨'자는 뭐구 '여자'는 뭐예요? 놀아먹는 년이 무슨 여자 값에 나 가요? 사내 친구끼리 입에 못 담을 말이라도 기생에게 하는 건 괜찮답니다."
 
103
"글쎄, 그래도……."
 
104
여해는 말하기를 몹시 꺼리는 눈치였다.
 
105
"글쎄 그래도가 다 뭐예요? 괜찮아요, 괜찮대도 그러시네."
 
106
명화는 오복조림을 하다시피 하였다.
 
107
이건 사내끼리도 " 할 얘기가 못 되오. 젊은 죄수들 끼리나 할 얘기요. 징역을 못 살아본 사람은 무슨 소린지를 모를 거요."
 
108
"온 걱정은! 몰라도 좋아요. 들어만 둡시다그려."
 
109
"영애를 따라간 것은 영애가 여자인 때문이오."
 
110
말하기 매우 거북해 하다가 필경 여해는 무슨 선고를 나리듯이 이렇게 말을 끊어 버렸다.
 
111
"그럼, 영애 씨가 여자지 누가 사내래요? 따라가신 이유가 단지 그것뿐예요?"
 
112
명화는 끔찍스러운 까닭을 들으려다가 이 신통치 못한 대답에 적이 실망을 한 듯하였다.
 
113
"그렇소. 영애는 분명 사내가 아니요, 여자인 탓이었소. 여자의 환영이란 젊은 죄수에겐 마치 독사와 같은 것이오. 몸에 칭칭 휘감기고 사뭇 가슴을 물어뜯는 것이오, 옥문 밖에 나서자 나는 여자를 보았소. 내 눈에는 영애가 보이지 않소. 옛날 애인도 오늘날의 원수도 보이지 않았소.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격으로 내 눈에는 계집만이 보이는구려. 환영으로 그리고 그리던 여자가 정작으로 참으로 내 코앞에 있구려. 손만 벌리면 잡힐 자리에 섰구려. 그 물씬한 살내에 나는 금세로 숨이 막힐 것 같았소. 나는 꿈속같이 황홀하고 말았소. 사랑이구 원수이구 다 잊어 버렸소. 이 여자를 버리고 어딜 가겠소? 보송보송 사내들끼리만 있는 지옥을 뛰어나와 이 사바세계에서 처음 만난 여자를 안 따르고 누구를 따라가겠소? 생각을 해 봐요."
 
114
"생각을 해 봐도 과연 잘 모르겠군요. 그럴 상도 싶고 안 그럴 상도 싶고!" 하고 명화는 생글생글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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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참조
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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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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