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대는 병원 응접실이 되고, 그곳에 적당한 교의와 책상 등물이 놓였으며, 대문 문패에는 공소사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시각은 오후 사시(四時) 쯤 되었다. 막이 열리면 하계순은 응접실로 나와서 어질러 놓은 것을 정제히 하고 교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그 아내 공소사가 들어온다.
7
나는 늦었거니마니 당신은 왜 늦었소, 올 제 바로 오지 않고 어디 당겨왔지요.
9
학교 하인이 오늘은 학교에 오지 아니하였기에, 웬일인고 하고 궁금해서 그 하인이 집에 잠깐 다녀왔지.
21
남의 말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니까 귀머거리지.
23
남의 말이 안들리는지 들리는지 어찌 알았소.
25
그것은 앓는 병자의 말이, 안 들린다니까 다시 두말할 것이 있나.
27
그 못생긴 소리 하지 마오. 그 흉증스러운 위인이 일부러 귀먹은 체하고 있는데 명색이 의원이라면서 그만한 것을 분간치 못한단 말이오.
29
(어름어름하면서) 그만 것을 모르는 내가 아닌데.
31
그러면 무엇을 증거 잡고 귀머거리라고 진찰을 하였소.
33
자네는 무엇을 보고서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집증을 하였나.
37
나도, 학리와 경험으로 귀먹어린 줄을 알았지.
39
흥, 그말 좋소. 아무렇지도 아니한 사람을 갖다가 병인이라고 하는, 학리가 어디있소. 그런 학리가 있거든 좀 들읍시다.
43
응, 나도 말하려니와, 당신이 처음에 귀먹어리도 진찰을 하였으니까, 당신말부터 들읍시다. 그사람이 어디가 어때서 귀먹어리오. (하며 덤비니 하계순은 어쩔줄을 모르며)
45
그, 그, 그--- 그것을,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귀에 말소리가 들리지 아니한다니까---
47
글세, 말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아니하는지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야요. 우선 그 대답부터 하오.
49
내게 밀지만 말고 자네부터 먼저 말을 하게나그려.
51
나는 암만해도 당신 말부터 들어야 하겠소 그래도 명색이 의원이라고 형세를 하면서 어떻게 의사를 잡았던지, 믿은 데가 있게시리 귀머거리라고 진찰을 한 것이 아니오. 첫째 그 말을 내가 좀 듣고 싶단 말이오. 지금까지 남의 병에 약을 삐뚜루 써서 남의 목숨을 없애는 것이 얼마요. 이런 돌팔이 의원을 우리 병원에 두었다가는 첫째 우리 병원의 명예가 손상할 터이니까 소위 학리라 하는 것을 내가 자세히 들어야 하겠소. (과격한 언사로 설명하라 재촉하메 하계순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고 앞만 내려다본다.)
55
왜 아무 말을 못해, 고미정기(苦味丁幾) 탈 데다가 간장을 타서 사람을 먹이는 의원이니까 무병한 사람을 병인으로 보았는지는 알 수 없소마는, 만일 그렇게 잘못하였거든 이 져녁에 잘못하였노라고 사과를 할 일이지, 주제넘게 학리라 하는 것은 다 무엇이야. 아이고 아니꼬와서 그 학리는 어떤 책에서 나온 학리요. 대관절 동의보감이요, 방약합편이오. 정말 이런 짓을 가끔 하면 나까지 망신하겠으니까 오늘은 용서할 수 없소. 어디 그 학리를 설명해서 내 속이 시원하게 알아듣도록 하여 주우. (하계순은 눈만 꿈쩍꿈쩍하고 있다.)
57
대답 좀 해야지 가만히만 있으면 제일인가.
61
어쩐 셈이오, 왜 말이 없어, 벙어리가 되었나.
63
어--- .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65
(냉소하며) 응, 벙어리가 별안간에 되었단 말이지. 그것 참 안되었구려. 그러나 우리 병원에서 벙어리 의사는 해서 무엇에 쓰겠소. 그러하니 오늘부터는 문간 심부름이나 하시오. (분연히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하계순은 눈이 휘둥그래서 있고, 이때에 정필수가 문간에 와서 찾는다. 하계순이 나아가보니 정필수다.)
67
어어, 자네 왔나. 어찌해서 찾아왔나. 나는 자네로 해서 아주 혼났네.
71
여보게, 내 앞에서 귀머거리 행세할 것이 있나.
73
아참, 그렇지요. 참 선생님 덕택에 귀머거리로 진찰을 해주셔서 인제는 맛난 음식도 얻어먹고, 날마다 편안히 놀고, 잘 지내리라 하였더니, 웬걸요, 맛난 것은 고사하고 병인은 배가 불러서는 못쓴다고 종일 가야 밥 한 술을 아니 줍니다그려. 정 못 견뎌서 혹시 의사의 말씀대로 좋은 음식을 어찌해서 아니 주느냐고 말을 하면, 귀머거리라면서 그 말은 어찌 들었냐고 들이대지요. 그러니 선생님이 분부하신 말씀과는 아주 딴판이란 말씀이니, 이게 어쩐 곡절인지를 모르겠습니다그려. 첫째 배가 고파서 제일 못견디겠어요. 선생님께서 어려우시더라도 한 번만 말씀을 해주시면 좋을 듯해서 집에 몰래 지금 나온 길이올시다.
75
응, 옳지. 인제 내가 알겠구. 자네 집에서 내가 나온 후에 우리집 마누라가 자네 병을 또 진찰하였지.
77
네, 보아 주셨지요. 당신 말씀과 똑같이 말씀을 하시던데요.
79
응, 그것은 자네 앞에서만 그렇게 말을 하였지. 자네가 부러 귀먹은체 하는 줄은 우리 마누라가 벌써 알고 여편네끼리 말짜듯 짜고서 자네를 아마 고생을 시키려고 그러는 것일세.
81
아, 저것 보았나. 그러니까 아주 꼭 그 꾀에 빠졌습니다그려. 지금 와서는 별안간에 귀머거리 행세를 아니 할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 그래도 당신께서 밥이나 먹이라고 말씀을 해주셔야지요.
83
아이고, 말 말게. 남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지금 오비가 삼 척일세. 내가 자네를 귀머거리로 진찰하였다고 어찌해서 귀머거리냐고 들이 닦아세는데 대답할 말이 있어야지. 허릴없이 나는 지금 벙어리가 갓 되었는데 남의 사정 생각할 여가도 없네. 벙어리라고 의원이 떨어져서, 문간 심부름꾼이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일이 폐일는지 큰일났네.
85
저는 그래도 당신만 잔뜩 믿고 있었으니, 인제는 당신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그려. (이때에 홀연 안으로 쫓아 공소사가 나오며,)
87
그게 누구야. 벙어리가 무엇을 이리 요란히 중얼거리고 있어. (하계순은 급히 입을 막고 정필수는 두 귀를 붙들고 공소사의 얼굴을 흘금흘금 치어다보는 것이 막 닫히는 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