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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운몽 (九雲夢) ◈
◇ 구운몽 하 ◇
카탈로그   목차 (총 : 2권)     이전 2권 ▶마지막
구운몽(완판 105장본)
1
구운몽 하
 
 
2
천자가 환자(宦者)를 보내어 상서를 부르자, 환자가 정사도의 집에 가 물으니 상서가 오지 않았다. 환자가 급히 찾으니 상서가 바야흐로 정십삼을 데리고 장안 술집에 가 술에 흠뻑 취하였다. 환자가 급히 명패(名牌)로 부르니 상서가 취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창기(娼妓)에게 붙들려 조복(朝服)을 입고 겨우 들어가 입조(入朝)하자,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자리를 주시고 이어 백대 제와의 치란흥망(治亂興亡)과 만고의 문장명필을 의논할 때, 상서가 고금의 제왕을 역력히 의논하고 문장을 차례로 헤아리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3
「내 이태백을 보지 못하여 한이었는데 경을 얻었으니 어찌 이태백을 부러워하겠는가? 짐이 글하는 궁녀 여남은 명을 가려 여중서(女中書)를 봉하였으니, 경이 그 궁녀들에게 각각 글을 지어주면 그 재주를 보고자 한다.」
 
4
하고, 즉시 궁녀를 명하여 백옥으로 된 책상과 유리 벼루와 금으로 만든 두꺼비 모양의 연적을 앞에 놓게 하였다. 모든 궁녀들이 차례로 늘어서 혹 좋은 화선지와 비단 수건이며 그림 그린 부채를 들고 다투어 글을 빌자, 상서가 취흥이 일어나 좋은 붓을 한번 휘두르니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며 용과 뱀이 뒤트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궁녀에게 다 지어 주니 궁녀들이 그 글을 가지고 차례로 황제께 드리자, 황제가 다 보시고 극히 아름답게 여겨 궁녀를 명하여 어주(御酒)를 주라 하였다. 궁녀가 다투어 각각 술을 드리니 상서가 받는 듯, 주는 듯 삼십여 잔을 마신 후에 몹시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5
황제가 말하였다.
 
6
「이 글 한 구절의 값을 논하면 천금과 같다. 옛글에 ‘모과(木果)를 던지거든 구슬로 보답하라.’ 하였으니, 너희는 무엇으로 문장을 써 준 대가를 치르겠느냐?」
 
7
모든 궁녀가 봉황을 새긴 금비녀도 빼고, 흰 옥과 금으로 된 노리개도 끄르며, 옥가락지도 벗어 서로 다투어 상서께 던지니 잠깐만에 산같이 쌓였다.
 
8
황제가 웃으며 말하였다.
 
9
「짐은 무엇으로 상을 내리면 좋겠는가?」
 
10
하고, 환자를 시켜 쓰던 필먹과 벼루와 연적과 궁녀들이 드린 보화를 거두어 상서의 집에 드리라 하자, 상서가 머리를 조아려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일어나 화원에 가니, 춘운이 내달아 옷을 벗기고 물어 말하였다.
 
11
「누구의 집에 가셔서 이리 취하셨습니까?」
 
12
말을 맺지 못하여 종이, 필먹, 벼루, 연적과 봉황을 새긴 비녀, 가락지, 금 노리개를 무수히 보여 주었다.
 
13
상서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14
「이 보화는 천자께서 춘랑에게 상사(賞賜)하신 바라.」
 
15
춘운이 다시 듣고자 하였으나, 상서는 벌써 잠이 들었다.
 
16
다음날 상서가 일어나 세수하는데 문 지키는 사람이 급히 고하였다.
 
17
「월왕께서 오셨습니다.」
 
18
상서가 크게 놀라 신을 벗고 내달아 맞아 윗자리를 내어주고 물어 말하였다.
 
19
「전하께서 무슨 일로 누추한 곳에 행차하셨습니까?」
 
20
월왕이 말하였다.
 
21
「과인이 황제의 명을 받아 왔소. 난양공주가 나이 자랐지만 부마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황제께서 상사의 재덕을 사랑하시어 혼인을 정코자 하십니다.」
 
22
상서가 크게 놀라 말하였다.
 
23
「소신이 무슨 재덕이 있습니까? 황제 폐하의 은혜가 이렇듯 하오니 아뢸 말씀이 없지만 정사도 여자와 혼인을 정하여 납폐를 한 지 삼 년이니, 원컨대 대왕은 이 뜻을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24
월왕이 말하였다.
 
25
「내 돌아가 아뢰겠지만 슬픕니다. 상서를 사랑하던 일이 허사가 되었군요.」
 
26
상서가 말하였다.
 
27
「혼인은 인륜대사이니 소신이 들어가 죄를 받겠습니다.」
 
28
월왕이 즉시 하직하고 갔다.
 
29
상서가 들어가 사도를 보고 월왕의 말을 전하니 온 집안이 다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30
처음에 황태후가 상서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31
「이는 하늘이 정해 준 난양의 배필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32
천자가 상서의 글과 글씨를 잊지 못하여 다시 보고자 하여 태감(太監)에게 명하여 ‘즉시 거두어 들이라.’ 하였다. 궁녀들이 이미 그 글을 깊이 간수하였는데 한 궁녀는 상서가 글 쓴 부채를 들고 제 침실에 들어가 슬피 울었다. 이 궁녀의 성명은 진채봉이니 화음 당 진어사의 딸이다. 진어사가 죽은 후에 궁의 노비가 되었는데 천자가 보고 사랑하여 후궁을 봉하려 하자, 황후가 그 재덕을 보고 자기 권리를 휘두를까 염려하여 말하였다.
 
33
「진낭자의 재주와 행실이 족히 후궁을 봉함직 하지만 제 아비를 죽이고 그 딸을 가까이 함이 가치 아니한 듯 합니다.」
 
34
천자가 말하였다.
 
35
「옳다」
 
36
하고, 채봉을 불러 말하였다.
 
37
「너를 황태후 궁궁에 보내어 난양공주를 모셔 힘써 하게 한다.」
 
38
하고 보내자, 공주도 그 재주와 용모를 보시고 사랑하여 잠시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39
하루는 황태후를 모시고 봉래전에 가 양상서의 글을 얻으니 상서는 진씨를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진씨는 알아보고 자연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눈물을 머금고 남이 알까 두려워 부채만 들고 물러가 상서를 피하여 한번 글을 읊으니 눈물이 일천 줄이었다. 진랑(秦娘)이 옛일을 생각하여 상서의 글에 화답하여 그 부채에 썼는데, 갑자기 태감이 급히 와 양상서의 글을 다 들이라 하신다. 하자, 진씨가 크게 놀라 말하였다.
 
40
「과연 다시 찾을 줄을 알지 못하고 그 글에 화답하여 그 부채에 썼는데 황상께서 보시면 반드시 죄가 중할 것이니 차라리 자결하겠습니다.」
 
41
하자 태감이 말하였다.
 
42
「황상이 인후하시니 반드시 죄하지 아니하실 것이요, 내 또 힘써 구완할 터이니 염려 말고 갑시다.」
 
43
진씨가 마지 못하여 태감을 따라갔다.
 
44
태감이 모든 궁녀의 글을 차례로 드리자 황제가 글마다 보시다가 진씨의 부채에 쓴 글을 보시고 괴이히 여겨 물어 말하였다.
 
45
「양상서의 글에 누가 화답하였느냐?」
 
46
태감이 말하였다.
 
47
「진씨의 말을 들어보니 ‘황상이 다시 찾으실 줄을 모르고 외람되게 화답하여 썼습니다.’ 하고 죽으려 하기에 소신이 못 죽게 하여 데려왔습니다.」
 
48
황제가 다시 진씨의 글을 보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49
비단 부채 둥긋하여 달 같으니,
50
누각 위에서 부끄러워하던 만남이 생각나누나.
51
처음 지척에서도 서로 알지 못할 바
52
문득 그대로 하여금 자세히 보게나 할 걸.
 
 
53
황제가 보고 말하였다.
 
54
「진씨에게 반드시 사정이 있다. 어떤 사람을 보았기에 이 글이 이러한가? 그러나 재주가 아까우니 살려는 주겠다.」
 
55
하고, 태감을 명하여 진씨를 부르자 진씨가 들어가 섬돌 아래에 내려 머리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56
「소첩이 죽을 죄를 지었사오니, 원컨대 빨리 죽여 주십시오.」
 
57
상이 말하였다.
 
58
「네 속이지 말고 바로 아뢰라. 어떤 사람과 사정이 있느냐?」
 
59
진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60
「황상께서 하문(下問)하시니 어찌 속이겠습니까? 첩의 집이 망하지 아니하였을 때, 양상서가 과거를 보러 가다가 첩을 보고 <양류사(楊柳詞)>로 서로 화답하고 결친(結親)하기를 언약하였는데, 이전에 봉래전에서 글을 지을 때 첩은 상서를 알아보았지만 상서는 첩을 알지 못해서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우연히 화답하였으니, 첩의 죄는 백 번 죽어 마땅합니다.」
 
61
상이 말하였다.
 
62
「네가 <양류사>를 기억하겠느냐?」
 
63
진씨 즉시 <양류사>를 써서 드리니, 상이 보고 말하였다.
 
64
「너의 죄가 중하나 네 재주가 기특하니 용서한다. 돌아가 난양을 정성으로 섬겨라.」
 
65
하고, 부채를 주었다.
 
66
이날 상이 황태후를 모셔 잔치를 하는데, 월왕이 양상서의 집에서 돌아와 정사도의 집에 납폐한 말을 고하니 황태후가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67
「양상서가 조정 체모를 알 텐데 어찌 나라의 영을 거역하는가?」
 
68
다음날 상이 양소유를 불러 보고 말하였다.
 
69
「짐이 한 누이동생이 있는데 경이 아니면 가히 배필 될 사람이 없어 월왕으로 하여금 경의 집에 보냈는데 경이 정사도의 집 말로써 사양한다 하니 생각지 못한 바이다. 옛부터 부마를 정하면 얻은 아내라도 소박하거늘 상서는 정가(鄭家) 여자에게 행례(行禮) 한 일이 없으니 정가 여자는 자연히 갈 곳이 있을 것인데 무슨 해가 되겠는가?」
 
70
상서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하였다.
 
71
「소신은 먼 지방 사람으로 경성에 와 몸을 맡길 곳이 없어 정사도의 관대함을 입어 묶을 곳을 정하고 납례(納禮)를 하여 장인과 사위의 의리를 맺고 부부의 뜻을 정하였지만, 이제까지 혼례를 행치 못한 것은 국가의 맡은 일이 많아 모친을 모셔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소신을 부마를 정하시면 여자는 죽기로 수절할 것이니 어찌 국정(國政)에 해롭지 아니하겠습니까?」
 
72
상이 말하였다.
 
73
「경의 딱하고 가엾은 형편은 그러하나 혼례를 행치 아니하였으니 정가 여자가 무슨 수절을 하며, 또 황태후가 경의 재덕을 사랑하여 부마를 정코자 하시니 경은 과히 사양치 말라. 혼인은 대사이니 어찌 소소한 사정을 생각하겠는가. 짐과 바둑이나 두자.」
 
74
하고, 종일토록 바둑을 두다가 나오니 정사도가 상서를 보고 눈물을 한삼에 흘리며 말하였다.
 
75
「오늘 황태후께서 전교(傳敎)하시어 ‘양상서의 납채(納采)를 빨리 내어주라. 아니면 큰 벌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시기에 납채를 화원에 내어 보냈으니 우리 집 앞 일이 걱정이다. 나는 겨우 부지하겠지만 늙은 처는 병이 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이런 사정이 있는가?」
 
76
상서가 실색(失色)하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말하였다.
 
77
「제가 상소하여 다투면 조정에 공론(公論)이 없겠습니까?」
 
78
사도가 말하였다.
 
79
「상서가 이제 상소하면 반드시 무거운 죄를 얻으려니와 천자의 명령을 받은 후에 화원에 있기 미안하니 아무리 떠나기 서운하나 다른 데 거처를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80
상서가 대답하지 아니하고 화원으로 나가니 춘운이 눈물을 흘리며 납채를 붙들고 말하였다.
 
81
「소저의 명으로 와 상서를 모신 지 오래인데 호사다마(好事多魔)하여 일이 이리되어 소저의 혼사는 다시 바랄 것이 없으니 첩도 아주 이별하렵니다.」
 
82
상서가 말하였다.
 
83
「내가 상소하여 힘써 다투겠지만 설사 허락하지 아니하신데도 춘랑은 이미 내게 몸을 맡겼으니 어찌 나를 버리는가.」
 
84
춘운이 말하였다.
 
85
「첩이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여필종부의 뜻을 어이 모르겠습니까마는, 첩이 어려서 소저와 죽고 살며 남고 모자란 것을 함께 하자고 맹세하였으니, 오늘날 상서를 모시는 것도 소저의 명입니다. 소저가 평생토록 수절하면 첩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86
상서가 말하였다.
 
87
「소저는 동서남북의 뜻대로 가겠지만 춘랑이 소저를 좇아 다른 사람을 섬기면 여자의 정절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88
춘운이 말하였다.
 
89
「상공은 우리 소저를 알지 못합니다. 소저가 정한 일이 있습니다. 부모 슬하에 있다가 백 년이 지난 후에 터럭을 끊고 몸을 맑게 닦아 산문(山門)에 몸을 맡겨 일생을 지키고자 하시니 첩이 홀로 어디로 가겠습니까? 상서께서 춘운을 보고자 하시거든 납채를 소저의 방으로 보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면 죽어 후세에서나 다시 뵙겠습니다. 바라건대 상공은 오랫동안 편안히 계십시오.」
 
90
하고, 문득 뜰에 나려 재배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서가 마음이 적막하여 길게 탄식만 하였다.
 
91
이날 상서가 상소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92
한림학사 겸 예부상서 양소유는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대개 인륜은 왕정(王政)의 근본이요, 혼인은 인륜의 대사여서 왕정을 잃으면 나라가 그릇되고 혼인을 삼가지 아니하면 가도(家道)가 망하니, 어찌 혼인을 삼가 왕정을 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소신(小臣)이 바야흐로 정가 여자와 혼인을 정하여 납채하였는데 천만 뜻밖에 부마로 봉코자 하시어 황태후의 명으로 이미 받은 납채를 내어 주라 하시니 이는 예로부터 듣지 못하던 바입니다. 원컨대 폐하는 왕정과 인륜을 살펴 정가와의 혼인을 하락하여 주십시오.
 
 
93
상이 보시고 태후께 아뢰니, 태후가 크게 화를 내어 ‘양상서를 감옥에 가두라.’ 하자, 조정 백관이 다 다투어 간(諫)하였지만 듣지 아니하였다.
 
94
이때 토번(吐蕃)이 바야흐로 중국을 얕보아 3만 병을 거느리고 와 변경 지방에 있는 군현(郡縣)을 노략하여 선봉(先鋒)이 이미 위교(渭橋)에 왔다. 상이 조정 대신을 불러 의논할 때, 다 아뢰어 말하였다.
 
95
「양상서가 전일에도 군병을 죄하지 아니하고 삼 진(陳)을 정벌(征伐)하였으니 지금도 양상서가 아니면 당할 사람이 없을까 합니다.」
 
96
상이 말하였다.
 
97
「옳다.」
 
98
하시고, 즉시 들어가 태후께 여쭈었다.
 
99
「조정에는 양소유가 아니면 도적을 당할 사람이 없다 하오니, 비록 죄가 있으나 국사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100
태후가 허락하자, 즉시 사자(使者)를 보내어 양상서를 불러 보고 물어 말하였다.
 
101
「도적이 급하여 경이 아니면 제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은가?」
 
102
상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103
「신이 비록 재주가 없으나 수천 군사를 얻어 이 도적을 파하여 죽을 목숨을 구완하신 은덕을 만분지일이나 갚을까 합니다.」
 
104
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대사마(大司馬) 대원수를 봉하고 3만 군을 주었다.
 
105
상서가 이날 황상께 하직하고 군병을 거느려 위교로 나가자, 선봉장이 달려들어 좌현왕(左賢王)을 사로잡으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꺽여 다 도망하거늘 쫓아가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머리 3만과 좋은 말 8천을 얻고 승첩(勝捷)을 천자께 보고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여 칭찬해 마지 않았다.
 
106
상서가 또 군중에서 상소하였다.
 
107
「도적을 비록 파하였으나 저들의 땅에 들어가 멸하고 돌아오겠습니다.」
 
108
상이 상소를 보시고 장히 여겨 병부상서 대원수 벼슬을 내리고 통천어대(通天御帶), 참마검(斬馬劍), 백모황월(白毛黃鉞)을 주고 하북(河北), 농서(隴西) 지방의 병마(兵馬)를 다 조발(調發)하여 양상서를 도우라 하였다.
 
109
상서가 택일하여 길을 떠날 때, 붉은 빛의 갓끈이 엄숙하고 위의가 씩씩하였다. 수일 사이에 오십여 성(城)을 항복 받고 적절산 아래에 군사를 머물게 하였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일어나며 까치가 진 안에 들어와 울고 가기에 상서가 말 위에서 점을 치니 훙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뒤이어 좋은 일이 발생할 괘(卦)였다. 상서가 촛불을 밝히고 병서를 보는데 삼경(三更)쯤 되어 촛불이 꺼지며 냉기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문득 한 여자가 공중에서 내려와 상서의 앞에 서거늘, 보니 손에 팔 척의 비수를 들고 있는데 얼굴이 눈빛 같았다. 상서가 자객인 줄 알고 안색을 바꾸지 않은 채 물어 말하였다.
 
110
「여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밤에 군중(軍中)에 들어왔느냐?」
 
111
대답하여 말하였다.
 
112
「저는 토번국 찬보(贊普)의 명으로 상서의 머리를 베러 왔습니다.」
 
113
상서가 웃으며 말하였다.
 
114
「대장부가 어찌 죽기를 두려워 하겠는가.」
 
115
안색이 편안하자, 그 여자가 칼을 땅에 던지고 머리를 들어 말하였다.
 
116
「상서는 염려치 마십시오.」
 
117
상서가 붙들어 일으키고 물어 말하였다.
 
118
「그대가 나를 해치지 아니함은 어찌된 일인가?」
 
119
여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120
「첩은 본디 양주(楊洲) 사람입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한 도사를 따라 검술을 배웠는데, 첩의 성명은 심요연입니다. 진해월이와 김채홍이와 함께 배운지 삼 년 만에 바람을 타고 번개를 좇아 천리를 가게 되었습니다. 선생이 혹 원수를 갚거나 사나운 사람을 죽이고자 하면 항상 해월과 채홍을 보내고 첩은 보내지 아니하여 첩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선생이 말하였습니다. ‘어찌 네 재주가 부족하겠는가. 너는 인간 세상의 귀한 사람이다. 대당국(大唐國) 양상서의 배필이 될 것이니 어찌 사람을 살해하겠는가?’ 첩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검술을 배워 무엇하겠습니까?’ 선생이 말하였습니다. ‘양상서를 백만 군중에서 만나 연분을 맺을 것이다. 또 토번이 천하 자객을 모아 들여 양상서를 죽이려하니 네 어서 나가 자객을 물리쳐 양상서를 구완하라.’ 하거늘, 첩이 토번국에 와 모든 자객을 물리치고 왔으니 어찌 상공을 해하겠습니까?」
 
121
상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122
「낭자가 죽어가는 목숨을 구완하고 또 몸을 허락하니 이 은혜를 어찌 갚겠는가. 낭자와 함께 백년 해로 하겠다.」
 
123
하고, 옥장(玉帳)에 들어가 동침하니 복파영중(伏波營中)에 월색이 뜰에 가득하고 옥문관(玉門關) 밖에 춘광이 향기로왔다. 기분 좋은 흥취를 어이 헤아리겠는가.
 
124
요연이 문득 하직하며 말하였다.
 
125
「군중(軍中)은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니 돌아가겠습니다.」
 
126
상서가 말하였다.
 
127
「낭자는 세상 사람이 아니다. 기특한 꾀를 가르쳐 도적을 파케 할 것이거늘, 어찌 나를 버리고 급히 가느냐?」
 
128
요연이 말하였다.
 
129
「상공의 용맹으로 패한 도적 치기는 손에 침 뱉기 같으니 무슨 염려하시겠습니까. 첩이 돌아가 선생을 모시고 있다가 상서께서 회군(回軍)하신 후에 가 모시겠습니다.」
 
130
상서가 말하였다.
 
131
「한 말이나 가르치고 가라.」
 
132
요연이 말하였다.
 
133
「반사곡(盤蛇谷)에 가서 물이 없거든 샘을 파 군사를 먹이고 돌아가십시오.」
 
134
또 무슨 말을 묻고자 했는데 문득 공중으로 올라 간 데 없었다. 상서가 여러 장수를 불러 요연의 말을 하니 다 말하였다.
 
135
「장군께서 몹시 신통하시기에 천신이 와 도우신 것입니다.」
 
136
상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올 때, 한 곳에 이르니 길이 좁아 군대가 지나기 어려웠다. 겨우 수백 리를 기어 나와 한 들을 만나 군대를 머물게하니 군사가 다 목이 말라 급하였다. 마침 못의 물을 보고 먹으니 일시에 몸이 푸르게 되고 말을 통치 못하여 죽어갔다. 상서가 크게 놀라서 문득 심요연이 전해 준 반사곡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즉시 샘을 팠지만 물이 나오지 않으니, 상서가 염려하여 진을 옮기고자 하는데, 갑자기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산천이 다 응하니, 이는 적병이 험한 길을 막아 습격코자 한 것이었다.
 
137
여러 장수가 군사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심하여 적병을 당할 뜻이 없으니 상서가 크게 민망하여 옥장(玉帳)에 앉아 묘책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잠이 들어 한 꿈을 꾸니 푸른 옷을 입은 여동(女童)이 앞에 와 섰는데, 보니 단정한 얼굴이 범인(凡人)이 아니었다.
 
138
상서께 고하여 말하였다.
 
139
「우리 낭자가 한 말씀을 상서께 아뢰고자 하오니, 원컨대 상서는 잠깐 행차 하십시오.」
 
140
상서가 말하였다.
 
141
「너의 낭자는 어떤 사람이냐?」
 
142
대답하여 말하였다.
 
143
「우리 낭자는 동정용왕의 작은 딸이신데, 잠깐 화를 피하여 여기에 와 있습니다.」
 
144
상서가 말하였다.
 
145
「용녀(龍女)는 수부(水府)에 있고 나는 세상 사람인데 어찌 가겠는가?」
 
146
여동이 말하였다.
 
147
「말을 진문(陣門) 밖에 매어 두었으니 그 말을 타시면 자연 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148
상서가 여동을 따라 한참 들어가니 궁궐이며 위의(威儀)가 찬란하였다. 여동 여러 사람이 나와 상서를 맞아 백옥으로 꾸민 의자에 앉히거늘, 상서가 사양치 못하여 앉았더니 시녀 수십 사람이 한 낭자를 모시고 나오는데, ???[원본에 없음]은 태도와 씩씩한 거동은 두루 측량치 못???[원본에 없음].
 
149
시녀가 상서께 고하였다.
 
150
「우리 낭자가 상서께 예로써 알현(謁見)합니다.」
 
151
상서가 놀라 피하고자 하나 좌우 시녀가 붙잡으니 어쩔 수 없었다. 용녀가 예를 갖추어 절을 한 후에 상서가 시녀를 명하여,
 
152
「전상(殿上)에 모셔라.」
 
153
하나, 용녀가 사양하고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자 상서가 말하였다.
 
154
「양소유는 인간 천하 사람이요, 낭자는 용궁 선녀인데 어이 이토록 과히 하십니까? 」
 
155
용녀가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였다.
 
156
「첩은 동정 용왕의 딸입니다. 부왕(父王)이 옥황상제께 조회(朝會)할 때, 장진인(張眞人)을 만나 첩의 팔자를 물어보니 진인이 말하였습니다. ‘이 아기는 천상 선녀입니다. 죄를 짓고 용왕의 딸이 되었으나 인간 양상서의 첩이 돼 영화를 얻어 백년해로하다가 다시 불가(佛家)에 돌아가 극락세계에서 천만 년을 지낼 것입니다.’ 부왕이 이 말을 듣고 첩을 각별히 사랑하셨는데, 천만 뜻밖에 남해 용왕의 태자가 첩의 자색을 듣고 구혼하니 우리 동정은 남해 소속이라 부왕이 거역하지 못하여 몸소 가 장진인의 말로 변명하셨지만, 남해 왕이 요망타 하고 구혼을 더욱 급히 하였습니다. 그래 첩이 생각다 못해 피하여 이 물에 와 살고 있는데, 이 물의 이름은 백룡담(白龍潭)입니다. 물빛과 맛을 변하게 하여 사람과 물상을 통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서를 청하여 이 더러운 땅에 오시게 하여 신세를 부탁하니 상서의 근심은 첩의 근심이라 어찌 구완치 아니하겠습니까? 그 물 맛을 다시 달게 할 것이니 군사가 먹으면 자연 병이 나을 것입니다.」
 
157
상서가 말하였다.
 
158
「낭자의 말을 들으니 하늘이 정한 연분입니다. 낭자와 동침함이 어떠합니까?」
 
159
용녀가 말하였다.
 
160
「첩의 몸을 이미 상서께 허락하였으나 부모께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불가하고, 또 남해 태자가 수만 군을 거느리고 첩을 얻고자 하니 그 우환이 상서께 미칠 것이요, 첩이 몸의 비늘을 벗지 못하였으니 귀인의 몸을 더럽힘이 불가합니다.」
 
161
상서가 말하였다.
 
162
「낭자의 말씀이 아름다우나 낭자의 부왕이 나를 기다리니 고하지 아니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몸에 비늘이 있으나 신선의 연분을 정하였으면 관계치 아니하며, 내 백만 군병을 거느렸으니 남해의 태자를 어찌 두려워 하겠소.」
 
163
하고, 용녀를 이끌고 취침하니 그 즐거움은 꿈도 아니요, 인간보다 백배나 더하였다.
 
164
날이 새지 않았는데 북소리가 급히 들리거늘, 용녀가 잠을 깨어 일어나 앉으니 궁녀가 들어와 급히 고하였다.
 
165
「지금 남해 태자가 무수한 군병을 거느리고 와 산 아래에 진을 치고 양상서와 사생을 다투고자 합니다.」
 
166
상서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167
「미친 아이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168
하고, 일어나 보니 남해 군병이 백룡담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함성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169
남해 태자가 외치며 말하였다.
 
170
「네 어떤 것이기에 남의 혼사를 방해하느냐? 너와 사생을 결단하겠다.」
 
171
하거늘, 상서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172
「동정 용녀는 나와 부부의 인연이 있어 하늘과 귀신이 다 아는 일인데, 너 같은 버러지가 감히 천명(天命)을 거스르느냐?」
 
173
하고, 깃발로 지휘하여 백만 군병을 몰아 싸우자 천만 수족(水族)이 다 패하였다. 원참군(參軍) 별주부와 잉어제독을 한 칼에 베고 남해 태자를 사로잡아 죄를 묻고 놓아주었다.
 
174
이때 용녀가 음식을 장만하여 군대를 축하하고 천 석 술과 천 필 소로 군사를 먹이며 양원수가 용녀와 함께 앉았는데, 한참 후에 동남쪽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공중에서 내려와 상서께 고하여 말하였다.
 
175
「동정 용왕이 상서의 공덕을 치하코자 하였지만, 맡은 일을 떠나지 못하여 지금 응벽전(凝壁殿)에서 잔치를 베풀고 상서를 청하십니다.」
 
176
상서가 용녀와 수레 위에 오르니 바람이 수레를 몰아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한참 후에 동정호(洞庭湖) 용궁에 이르자 용왕이 멀리 나와 맞아 들어가 장인과 사위의 예를 베풀고 잔치할 때, 용왕이 잔을 잡고 상서께 사례하며 말하였다.
 
177
「과인이 덕이 없어 한 딸을 두고 남에게 곤란한 일이 많았는데, 양원수의 위엄과 덕망으로 근심을 없애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소.」
 
178
상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179
「다 대왕의 신령하심인데 무슨 사례를 하십니까?」
 
180
상서가 술에 취하매 하직하여 말하였다.
 
181
「궁중에 일이 많으니 오래 머물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낭자와 훗날 기약을 잊지 마십시오.」
 
182
하고, 용왕과 함께 궁문 밖에 나오니, 문득 한 산이 있으되 다섯 봉우리가 높이 구름 속에 둘렀는데 붉은 안개가 사변에 둘러있고 층암절벽이 하늘에 연하였거늘, 상서가 물어 말하였다.
 
183
「저 산은 무슨 산입니까?」
 
184
용왕이 말하였다.
 
185
「저 산의 이름은 남악산이라 하거니와 산천이 아름답고 경개가 거룩합니다.」
 
186
상서가 말하였다.
 
187
「어찌해야 전 산에 올라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188
용왕이 말하였다.
 
189
「날이 저물지 아니하였으니 올라 구경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190
상서가 즉시 수레를 타니 벌서 연황봉에 이르렀다. 죽장을 짚고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차례로 구경하여 말하였다.
 
191
「슬프다.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버리고 전쟁의 북새통에 골몰하니 언제야 공을 이루고 물러가 이런 산천을 찾을까?」
 
192
하더니, 갑자기 경쇠 소리가 들리거늘 상서가 찾아 올라가니 한 절이 있는데 법당이 아주 맑고 깨끗하고 중이 다 신선 같았다. 한 노승이 있는데 눈썹이 길고 골격은 푸르고 정신이 맑으니 그 나이는 헤아리지 못하였다. 문득 상서를 보고 모든 제자를 거느리고 당에 내려와 예를 표하고 말하였다.
 
193
「깊은 산중에 있는 중이 귀먹어 대원수의 행차를 알지 못하여 산문 밖에 나가 대령치 못하였으니, 청컨대 상공은 허물하지 마십시오. 또 이번은 대 원수가 아주 오신 길이 아니오니 어서 법당에 올라 예불하고 가십시오.」
 
194
상서가 즉시 불전에 가 향을 피우고 두 번 절하고 계단에 내려올 때 발을 헛딛어 잠을 깨니 몸이 옥장(玉帳)속에 앉아 있었다. 동방이 점점 새거늘, 상서가 여러 장수를 불러 말하였다.
 
195
「공들도 꿈을 꾸었는가?」
 
196
여러 장수가 말하였다.
 
197
「소인들도 다 꿈을 꾸었습니다. 장군을 모시고 신병귀졸(神兵鬼卒)과 크게 싸워 장수를 사로잡아 뵈오니 이는 길조(吉兆)인가 합니다.」
 
198
상서도 꿈의 일을 역력히 말하고 여러 장수를 모시고 물가에 가보니 부서진 비늘이 땅에 깔리고 피가 흘러 물이 붉었다. 상서가 그 물을 맛보니 과연 달거늘 군사와 말을 먹이니 병에 즉시 효험이 있었다. 적병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즉시 항복하거늘, 상서가 명령하여 승전한 첩서(捷書)를 올리자 천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199
하루는 천자가 황태후께 아뢰어 말하였다.
 
200
「양상서의 공은 만고의 으뜸이니 환군(還軍)한 후에 즉시 승상을 봉하겠지만, 난양의 혼사를 양상서가 마음을 바꾸어 허락하면 좋거니와 만일 고집하면 공신(功臣)을 죄 주지 못할 것이요, 혼인을 우격다짐 못할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매우 민망합니다.」
 
201
태후가 말하였다.
 
202
「양상서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정사도의 여자에게 다른 혼인을 급히 하게 하면 어떠한가?」
 
203
상이 대답지 아니하고 나가니 난양공주가 이 말씀을 듣고 태후께 고하여 말하였다.
 
204
「낭랑은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가의 혼사는 제 집 일인데 어찌 조정에서 권하겠습니까?」
 
205
태후가 말하였다.
 
206
「내가 벌써 너와 의논코자 하였다. 양상서는 풍채와 문장이 세상에 으뜸일 뿐 아니라, 퉁소 한 곡조로 네 연분을 정하였으니 어찌 이 사람을 버리고 다른 데서 구하겠느냐. 양상서가 돌아오면 먼저 네 혼사를 지내고 정사도 여자로 첩을 삼게 하면, 양상서가 사양할 바가 없을 텐데 네 뜻을 알지 못하여 염려스럽구나.」
 
207
공주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208
「소저가 일생 투기(妬忌)를 알지 못하니 어찌 정가 여자를 꺼리겠습니까? 다만 양상서가 처음에 납폐하였다가 다시 첩을 삼으면 예가 아니요, 또 정사도는 여러 대에 걸친 재상의 집입니다. 그 여자로 남의 첩이 되게 함이 어찌 원통치 아니하겠습니까?」
 
209
태후가 말하였다.
 
210
「네 뜻이 그러하면 어찌 하면 좋겠느냐?」
 
211
공주가 말하였다.
 
212
「들으니 제후에게는 세 부인이 가하다 합니다. 양상서가 성공하고 돌아오면 후왕(侯王)을 봉항 것이니, 두 부인 취함이 어찌 마땅치 아니하겠습니까?」
 
213
태후가 말하였다.
 
214
「안된다. 사람이 귀천이 없다면 관계치 아니하겠지마는 너는 선왕(先王)의 귀한 딸이요, 지금 임금의 사랑하는 누이다. 어찌 여염집 천한 사람과 함께 섬기겠느냐?」
 
215
공주가 말하였다.
 
216
「선비가 어질면 만승천자(萬乘天子)도 벗한다 하니 관계치 아니하며, 또 정가 여자는 자색과 덕행이 옛 사람이라도 미치기 어렵다 하오니 그러하면 소녀에게는 다행입니다. 아무튼 그 여자를 친히 보아 듣던 말과 같으면 몸을 굽혀 섞임이 가하고, 그렇치 아니하면 첩을 삼거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217
태후가 말하였다.
 
218
「여자의 투기는 예부터 있는데 너는 어찌 이토록 인후(仁厚)하냐? 내 명일에 정가 여자를 부르겠다.」
 
219
공주가 말하였다.
 
220
「아무리 낭랑의 명이 있어도 아프다고 핑계하면 부질없고, 더구나 재상가의 여자를 어찌 불러 들이겠습니까? 소녀가 직접 가 보겠습니다.」
 
221
이때 정소저가 부모를 위하여 태연한 체 하지만 형용은 자연 초췌하였다.
 
222
하루는 한 여동이 비단 족자를 팔러 왔거늘 춘운이 보니 꽃밭 속에 공작이 수놓여 있었다. 춘운이 족자를 가지고 들어가 소저께 고하여 말하였다.
 
223
「이족자는 어떠합니까?」
 
224
소저가 보고 놀라 말하였다.
 
225
「어떤 사람이 이런 재주가 있는가? 인간 사람이 아니다.」
 
226
하고, 춘운을 명하여,
 
227
「이 족자는 어디서 났으며,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228
여동이 말하였다.
 
229
「우리 소저의 재주인데, 우리 소저가 객중에 계셔 급히 쓸 곳이 있어 팔러 왔으니 값의 많고 적음을 보지 아니합니다.」
 
230
춘운이 말하였다.
 
231
「너의 소저는 뉘집 낭자이며, 무슨 일로 객중에 머무느냐?」
 
232
여동이 말하였다.
 
233
「우리 소저는 이통판(李通判)의 누이입니다. 이통판이 절동(浙東) 땅에 벼슬 갈 때, 부인과 소저를 모시고 가는데 소저가 병이 들어 가지 못하여 연지촌 사삼낭(謝三娘)의 집에 처소를 정하여 계십니다.」
 
234
정소저가 그 족자를 많은 값을 주고 사 중당에 걸어두고 춘운에게 말하였다.
 
235
「이 족자의 임자를 시비를 보내어 얼굴이나 보고 싶구나.」
 
236
하고, 즉시 시비를 보냈다.
 
237
시비가 돌아와 고하였다.
 
238
「억만 장안을 다 보았지만 우리 소저 같은 사람은 없었는데, 과연 이소저는 우리 소저와 같았습니다.」
 
239
춘운이 말하였다.
 
240
「그 족자를 보니 재주는 아름다우나 어찌 우리 소저 같은 사람이 있겠는냐? 네가 잘못 보았다.」
 
241
하루는 사삼낭이 와 부인과 정소저께 고하였다.
 
242
「소인의 집에 이통판댁 낭자가 거처하고 있는데, 소저의 재덕을 듣고 한번 뵙고자 청합니다.」
 
243
부인이 말하였다.
 
244
「내 그 낭자를 보고자 하였지만 청하기 미안하여 못 하였는데, 그대 말을 들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245
다음날 이소저가 흰 옥으로 꾸민 가마를 타고 시비를 데리고 왔다. 정소저가 나와 맞아 침실에 들어가 서로 대하여 앉으니, 월궁(月宮)의 선녀가 요지연(瑤池宴)에 참예한 듯 그 광채가 비할 데 없었다.
 
246
정소저가 말하였다.
 
247
「마침 시비에게 들으니 저저(姐姐)가 가까이 와 계시다 하나, 나는 팔자가 기박하여 인사를 사절하였기 때문에 가 뵈옵지 못하였는데, 저저가 이런 더러운 곳에 오시니 매우 감사합니다.」
 
248
이소저가 말하였다.
 
249
「나는 본디 초야에 묻힌 사람입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의지하여 배운 일이 없어 마침 소저의 아름다운 행실을 듣고 한번 모시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더러운 몸을 버리지 아니하시니 평생 소원을 푼 듯합니다. 또 들으니 댁에 춘운이 있다 하오니 볼 수 있겠습니까?」
 
250
정소저가 즉시 시비를 명하여 춘운을 부르니 춘운이 들어와 예로써 알현하자 이소저가 일어나 맞아 앉았다.
 
251
이소저가 춘운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252
‘듣던 말과 같구나, 정소저가 저러하고 춘운이 또 이러하니 양상서가 어찌 부마를 구하겠는가?’
 
253
이소저가 일어나 부인과 소저께 하직하며 말하였다.
 
254
「날이 저물었으니 물러가지만 거처한 곳이 멀지 아니하니 다시 뵐 날이 있겠습니까?」
 
255
정소저가 계단 아래로 내려와 사례하여 말하였다.
 
256
「나는 얼굴을 들어 출입하지 못하기에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오니 허물치 마십시오.」
 
257
하고, 서로 이별하였다.
 
258
정소저가 춘운에게 말하였다.
 
259
「보검은 땅에 묻혔어도 기운이 두우간(斗牛間)에 쏘이고, 큰 조개는 물 속에 있어도 빛이 수루(戍樓)를 비추니, 이소저가 같은 땅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하였으니 괴이하다.」
 
260
춘운이 말하였다.
 
261
「첩은 의심컨대 화음 진어사의 딸이 상서와 <양류사>를 화답하여 혼인을 언약하였다가 그 집이 환란을 만난 후에 진씨가 아무 데도 간 줄을 모른다 하는데, 반드시 성명을 바꾸고 소저를 쫓아 연분을 잇고자 함인가 합니다.」
 
262
소저가 말하였다.
 
263
「나도 진씨 말을 들었지만 그 집이 환란을 만난 후에 진씨는 궁비정속(宮婢定屬)하였다 하니 어찌 오겠는가? 나는 의심컨대 난양공주가 덕행과 재색이 만고에 으뜸이라 하니 그러한가 한다.」
 
264
다음날 또 시비를 보내어 이소저를 청하여 춘운이 함께 앉아 종일토록 문장을 의논하였다.
 
265
하루는 이소자가 와서 부인과 소저께 하직하며 말하였다.
 
266
「내 병이 잠깐 나아 내일은 절동(浙東)을 가려 하니 하직합니다.」
 
267
정소저가 말하였다.
 
268
「더러운 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자주 부르시니 즐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버리고 돌아가시니 떠나는 정회를 어이 헤아리겠습니까.」
 
269
이소저가 말하였다.
 
270
「한 말씀을 소저께 아뢰고자 하나 좇지 아니하실까 염려됩니다.」
 
271
정소저가 말하였다.
 
272
「무슨 말씀이십니까?」
 
273
이소저가 말하였다.
 
274
「늙은 어미를 위하여 남해 관음보살의 얼굴과 모습을 그린 그림을 수 놓았는데 문장 명필을 얻어 제목을 쓰고자 하니, 원컨대 소저는 찬문(贊文)을 지어 제목을 써주시면 한편으로는 위친(爲親)하는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서로 잊지 못할 정표나 해주십시오. 소저가 허락하지 아니하실까 염려하여 족자를 가져 오지 않았으나 거처하는 곳이 멀지 아니하니 잠깐 생각해 주십시오.」
 
275
정소저가 말하였다.
 
276
「비록 문필은 없으나 위친하시는 일을 어이 좇지 아니하겠습니까?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가셨으면 합니다.」
 
277
이소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고 말하였다.
 
278
「날이 저물면 글 쓰기가 어려울 것이니 내가 타고 온 가마가 비록 더러우나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279
정소저가 허락하니 이소저가 일어나 부인께 하직하고 춘운의 손을 잡고 이별한 후에 정소저와 함께 흰 옥으로 꾸민 가마를 타고 갈 때, 정소저의 시녀 여러 사람이 따라갔다.
 
280
정소저가 이소저의 침실에 들어가니 보패와 음식이 다 보통과 달리 이상하였다. 이소저가 족자도 내놓지 아니하고 문필도 청하지 아니하자 정소자가 민망하여 말하였다.
 
281
「날이 저물어 가는데 관음화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절하여 뵙고자 합니다.」
 
282
이 말을 미처 마치지 못하여 군마(軍馬) 소리가 진동하며 기치창검(旗幟槍劍)이 사면을 애워쌌다. 정소저가 크게 놀라 피하려 하자 이소저가 말하였다.
 
283
「소저는 놀라지 마십시오. 나는 난양공주로 이름은 소화입니다. 태후 낭랑의 명으로 소저를 모셔 가려합니다.」
 
284
정소저가 이 말을 듣고 땅에 내려 재배하여 말하였다.
 
285
「여염집 천한 사람이 지식이 없어 귀한 공주를 알아 뵙지 못하고 예의 없이 하였으니 죽어도 아깝지 아니합니다.」
 
286
난양공주가 말하였다.
 
287
「그런 말씀은 차차 하겠지만 태후 낭랑께서 지금 난간에 의지해 기다리시니, 원컨대 소저는 함께 가십시다.」
 
288
정소저가 말하였다.
 
289
「귀한 공주께서 먼저 들어가시면 첩이 돌아가 부모께 고하고 이후에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290
공주가 말하였다.
 
291
「태후가 소저를 보시고자 하여 어명을 내리신 것이니 사양치 마십시오.」
 
292
정소저가 말하였다.
 
293
「첩은 본디 천한 사람입니다. 어찌 귀한 공주와 가마를 함께 타겠습니까?」
 
294
공주가 말하였다.
 
295
「여상(呂尙)은 어부였지만 문왕(文王)이 한 수레에 탔고, 후영(候嬴)은 문지기였지만 신능군(信陵君)의 고삐를 잡았습니다. 더구나 소저는 재상가 처녀인데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296
하고, 손을 이끌어 가마를 타고 갔다.
 
297
난양공주가 소저를 궐 문 밖에 세우고 궁녀에게 명하여 호위케 한 후, 공주가 들어가 태후께 입조(入朝)하고 정소저의 자색과 덕행을 아뢰었다.
 
298
태후가 감탄하여 말하였다.
 
299
「그러하다면 양상서가 부마를 어찌 사양치 아니하겠는가?」
 
300
하고, 궁녀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301
「정소저는 대신의 딸이요, 양상서의 납채를 받았으니 일품조복(一品朝服)을 입고 입조하라.」
 
302
궁녀가 의복함을 가져와 정소저께 고하자 소저가 말하였다.
 
303
「첩은 천녀(賤女)의 몸이니 어찌 조복(朝服)하겠습니까.」
 
304
태후가 듣고 더욱 기특히 여겨 불러 들어가니 궁중 사람이 다 감탄하여 말하였다.
 
305
「천하 일색이 우리 공주님뿐인가 하였는데 또 이 소저가 있는 줄을 어이 알았겠는가?」
 
306
소저가 예를 마치자 태후가 명하여 자리를 주고 말하였다.
 
307
「양상서는 일대 호걸이요, 만고 영웅이다. 부마를 정하려고 하였는데 너의 집이 납채를 먼저 받았다기에 억지로 빼앗지 못하여 난양의 지휘(指揮)로 너를 데려 왔거니와, 내 일찍이 두 딸이 있다가 한 딸이 죽은 후에 난양만 두고 외롭게 여겼는데, 네 자색과 덕행이 족히 난양과 형제 될 만 하구나. 너를 양녀로 정하여 난양이 너를 잊지 못하는 정을 표하고자 한다.」
 
308
소저가 말하였다.
 
309
「첩이 여염집 천인으로 어찌 난양공주님과 형제가 되겠습니까? 복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310
태후가 말하였다.
 
311
「내가 이미 정하였으니 무슨 사양하느냐? 또 네 글 재주가 용타하니 글 한 구를 지어 나를 위로하라. 옛날 조자건(曹子健)은 <칠보시(七步詩)>를 지었으니 너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재주를 보고자 한다.」
 
312
소저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313
「소저가 글은 잘 못하지만 낭랑의 명을 어찌 거스르겠습니까?」
 
314
난양이 말하였다.
 
315
「정씨를 혼자 시키기 미안하니 소녀가 함께 짓겠습니다.」
 
316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필먹을 갖추고 궁녀를 명해 앞에 세우고 글의 제목을 낼 때, 이때는 춘삼월이다. 벽도화(碧桃花)가 많이 핀 속에 까치가 짖자, 그것으로 글제를 내니 각각 붓을 잡고 써 드렸는데, 궁녀가 겨우 다섯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317
태후가 다 보시고 칭찬하여 말하였다.
 
318
「내 두 딸은 이태백과 조자건이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319
이때 천자가 태후께 입조하자 태후가 말하였다.
 
320
「내 난양의 혼사를 위하여 정소저를 데려다가 내 양녀를 삼아 함께 양상서를 섬기고자 하니 어떠하오?」
 
321
상이 말하였다.
 
322
「낭랑의 훌륭한 덕은 고금에 없습니다.」
 
323
태후가 정소저를 불러,
 
324
「황상께 입조하라.」
 
325
하자, 정소저가 즉시 들어와 뵈니 상이 여중서(女中書) 진씨 채봉을 명하여 비단과 필먹을 가져오라 하여, 친필로 ‘정씨를 영양공주로 봉한다.’하고 차례를 형으로 하니 영양공주가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326
「첩은 본디 미천한 사람인데 어찌 난양의 형이 되겠습니까?」
 
327
난양이 말하였다.
 
328
「영양은 재덕(才德)이 내 위이니 어찌 사양하십니까?」
 
329
황상이 태후께 여쭈었다.
 
330
「두 누이의 혼사를 이미 결단 하셨으니 여중서 진채봉을 생각하십시오. 진채봉은 본디 조관(朝官)의 자식입니다. 그의 집이 비록 망하였으나 그 재주와 심덕이 기특하고 또 양상서와 언약이 있었다하니, 공주 혼사에 잉첩(媵妾)을 삼았으면 합니다.」
 
331
태후가 즉시 채봉을 불러 말하였다.
 
332
「너를 양상서의 첩으로 정하니 두 공주의 희작시(喜鵲詩)를 차운(次韻)하라.」
 
333
진씨가 즉시 글을 지어 드리니 의사(意思)와 필법이 신묘하여 태후와 황상이 칭찬해 마지 않았다.
 
334
하루는 영양공주가 태후께 아뢰어 말하였다.
 
335
「소녀가 들어올 때에 부모가 놀라 염려하였으니 돌아가 부모를 보고 이런 훌륭한 덕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336
태후가 말하였다.
 
337
「아직 사사로이 출입을 할 수 없다. 내 의논할 말도 있으니 최부인을 청하겠다.」
 
338
하고, 즉시 조서(調書)하였다.
 
339
최씨가 들어가 태후께 입조하자 태후가 말하였다.
 
340
「내 부인의 딸을 데려와 양녀를 삼았으니 부인은 염려 마시오.」
 
341
최씨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342
「첩이 아들이 없고 딸 하나만 있어 금옥같이 사랑하였는데 낭랑의 훌륭한 덕이 이렇듯 하니 시든 나무에 꽃이 핀 것과 같습니다. 이 은덕을 죽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343
영양과 난양이 부인을 보고 서로 반겨함은 헤아리지 못할 바였다.
 
344
태후가 말하였다.
 
345
「부인의 집에 가춘운이 있다 하더니 왔소이까?」
 
346
부인이 춘운을 불러 즉시 입조케 하자 태후가 말하였다.
 
347
「진실로 절대가인(絶代佳人) 이구나.」
 
348
하고, 두 공주와 진씨가 지은 글을 말한 후,
 
349
「차운하라」
 
350
하자, 춘운이 사양치 못하여 즉시 지어 드리니 태후가 보고 길게 탄복하였다.
 
351
춘운이 물러가 두 공주께 뵈고 앉으니 공주가 진씨를 가리켜 말하였다.
 
352
「이는 화음(華陰) 진가(秦家) 여자다. 그대와 백 년을 함께 할 사람이다.」
 
353
춘운이 말하였다.
 
354
「<양류사>를 지은 진씨십니까?」
 
355
진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356
「<양류사>를 어찌 아십니까?」
 
357
춘운이 말하였다.
 
358
「상서가 매일 <양류사>를 읊으며 낭자를 생각하시기에 들었습니다.」
 
359
진씨가 말하였다.
 
360
「상서가 옛일을 잊지 아니하시는구나.」
 
361
하고, 더욱 슬퍼하였다.
 
362
태후가 최부인에게 말하였다.
 
363
「양상서를 속일 묘책이 있으니 부인도 나가서 소저가 죽었다고 하시오.」
 
364
두 공주가 부인을 문 밖에 전송(餞送)하고 춘운에게 말하였다.
 
365
「네가 죽었다하고 상서를 속여라.」
 
366
춘운이 말하였다.
 
367
「전에 속인 일도 죄가 큰데 다시 속이고 무슨 면목으로 상서를 섬기겠습니까?」
 
368
공주가 말하였다.
 
369
「태후께서 명하신 일이니 마지는 못할 것이다.」
 
370
춘운이 듣고 갔다.
 
 
371
각설이라.
 
372
양상서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경성에 들어오자, 천자가 친히 위교에 나와 상서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373
「만리 밖에 가 역적들을 깨끗이 쓸어버린 공을 어찌 갚겠는가?」
 
374
하시고, 바로 그날 대승상(大丞相) 위국공(魏國公)을 봉하고, 삼만 호를 끊어 주고, 화상(畵像)을 기린각(麒麟閣)에 그려놓게 하였다.
 
375
승상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물러나와 정사도 집에 가자 정사도 일가가 다 외당에 모여 승상을 위로할 때, 양승상이 사도 부처의 안부를 물으니 정십삼이 말하였다.
 
376
「누이의 상사(喪事)를 만난 후에 항상 눈물로 지내시기에 나와서 승상을 맞이하지 못하니 승상은 들어가 뵙되 아프게 하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377
승상이 이 말을 듣고 질색하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후에 말하였다.
 
378
「소저가 죽었단 말이오?」
 
379
하고, 눈물을 흘리거늘 정생이 말하였다.
 
380
「승상과 혼인을 정하였다가 불행하여 이렇게 되니 어찌 우리 집 가문의 운수가 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승상은 슬퍼 마십시오.」
 
381
승상이 눈물을 씻고 정생을 데리고 들어가 사도 부처께 뵈니 사도 부처가 별로 서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382
승상이 말하였다.
 
383
「저는 나라의 명으로 만리 타국에 가 성공하고 돌아와 전생연분을 맺을까 하였는데, 하늘이 그르게 여기시어 소저가 인간 세상을 이별하였다 하오니 소자의 불행입니다.」
 
384
사도가 말하였다.
 
385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하겠나? 오늘은 승상의 즐길 날이니 어찌 슬퍼하는가?」
 
386
정생이 승상에게 눈짓을 해 일어나 화원에 들어가니 춘운이 반겨 내달아 뵈자, 승상이 춘운을 보고 소저를 생각하여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387
춘운이 위로하여 말하였다.
 
388
「승상께서는 과히 슬퍼 마시고 첩의 말을 들으십시오. 소저는 본디 천상에서 귀양왔는데 하늘에 올라 갈 때, 첩에게 이르되 ‘양상서가 납채를 도로 내어 주었으니 부당한 사람이다. 혹 내 무덤이나 내 제사를 지내는 대청에 들어와 조문(弔問)하면 나를 욕하는 일이니 아무리 죽은 혼령인들 어찌 노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389
승상이 말하였다.
 
390
「또 무슨 말을 하던가?」
 
391
춘운이 말하였다.
 
392
「또 한 말이 있지만 차마 내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393
승상이 말하였다.
 
394
「무슨 말이었느냐?」
 
395
춘운이 말하였다.
 
396
「상서께서 춘운을 사랑하시라고 전하였습니다.」
 
397
승상이 말하였다.
 
398
「소저가 이르지 아니한들 어찌 너를 버리겠는가.」
 
399
하루는 천자가 승상을 이끌어 보시고 말하였다.
 
400
「승상이 부마를 사양하였지만 이제 정소저가 이미 죽었으니 또 무슨 말로 사양하겠는가?」
 
401
승상이 재배하고 말하였다.
 
402
「정녀가 죽었으니 어찌 항거하겠습니까만 소신의 문벌이 미천하고 재덕이 천하고 비루하오니 당치 못할까 합니다.」
 
403
천자가 크게 기뻐하여 태사(太史)를 불러 좋은 날을 가리니 구월 보름이었다.
 
404
상이 승상에게 말하였다.
 
405
「경의 혼사를 확실히 결정치 못하였기에 미처 이르지 못하였는데, 짐에게 과연 두 누이가 있으니 하나는 영양공주요, 하나는 난양공주이다. 영양 공주는 정부인(正夫人)을 정하고, 난양공주는 둘째 부인을 정하여 한날에 혼사를 행할 것이다.」
 
406
구월 보름을 당하여 혼례를 궐문 밖에서 행할 때, 승상이 비단으로 만든 도포와 옥으로 된 띠를 하고 두 공주와 예를 이루니 그 위엄 있는 거동은 다 헤아리지 못할 바였다.
 
407
이날 밤은 영양공주와 동침하고, 다음날은 난양공주와 동침하고, 또 다음 날에는 진씨 방으로 갔는데, 진씨가 승상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자 승상이 말하였다.
 
408
「오늘은 즐거운 날인데 낭자는 무슨 일로 눈물을 흘리는가?」
 
409
진씨가 말하였다.
 
410
「승상이 첩을 알아보지 못하시니 반드시 잊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연 슬퍼하는 것입니다.」
 
411
승상이 자세히 보고 나아가 옥수를 잡고 말하였다.
 
412
「낭자가 화음 진씨인 줄을 알겠군. 낭자가 벌써 죽은 줄 알았는데 오늘 궁중에서 볼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낭자의 집이 참화를 본 일은 차마 말하지 못하겠군. 객점에서 난리를 만나 이별한 후에 어느 날인들 생각지 아니하였겠는가.」
 
413
하며, <양류사>를 서로 대하여 읊으니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슬펐다.
 
414
승상이 말하였다.
 
415
「내 처음에 베필을 기약하였다가 오늘날 첩을 삼으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겠는가.」
 
416
진씨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417
「처음에 유모를 보낼 때 첩되기를 원하였으니 무슨 원통함이 있겠습니까?」
 
418
하고, 서로 즐기는 정이 두 날 밤보다 백 배나 더하였다.
 
419
그 다음날 두 공주가 승상께 술을 권하다가 영양공주가 시비를 불러 진씨를 청하니 승사이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자연 감동하여 갑자기 생각하였다.
 
420
‘내 일찍이 정소저와 거문고 한 곡조를 의논할 때, 그 소리와 얼굴을 익히 듣고 보았는데 오늘 영양공주를 보니 얼굴과 말소리가 매우 같구나. 나는 두 공주와 함께 즐겨하는데 슬프다, 정소저의 외로운 혼은 어디에 가 의탁하였을까?’
 
421
영양공주를 거듭 보고 눈물을 머금고 말하지 아니하자 영양공주가 잔을 놓고 물어 말하였다.
 
422
「승상이 무슨 일로 마음을 슬퍼하십니까?」
 
423
승상이 말하였다.
 
424
「내 일찍이 정사도 여자를 보았는데 공주의 얼굴과 소리가 매우 같아 자연 감동하여 그러합니다.」
 
425
영양공주가 말을 듣고 낯빛이 변하고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자 승상이 부끄럽고 열적어 난양공주께 고하였다
 
426
「영양은 내 말을 그릇되다 여깁니까?」
 
427
난양이 말하였다.
 
428
「영양공주는 태후의 딸이요, 천자의 누이입니다. 뜻이 교만하고 건방져 한번 그릇되게 여기면 마음을 좇지 아니하니 정가 여자가 비록 아름다우나 여염 처녀요, 또 ??[원본에 없음]어 백골이 다 진토되었는데 어찌 그런 데 비하십니까? 」
 
429
승상이 즉시 진씨를 불러 영양공주께 사죄하여 말하였다.
 
430
「마침 술을 과히 먹고 망발을 하였으니, 원컨대 공주는 허물치 마십시오.」
 
431
진씨가 즉시 돌아와 승상께 고하였다.
 
432
「공주가 하시는 말씀이 있었지만 첩이 차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433
승상이 말하였다.
 
434
「공주의 말씀이 비록 과하나 진씨의 죄가 아니니 전해보라.」
 
435
진씨가 말하였다.
 
436
「공주가 막 화를 내시며 이르시되, ‘나는 황태후의 딸이요, 정녀는 여염집 천인입니다. 제 얼굴만 자랑하고 평생 보지 못하던 상공과 반나절을 함께 거문고를 의논하고 수작하니 행실이 아름답지 못하고, 또 혼인이 시기를 놓쳐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에 심술이 나서 청춘에 죽었으니 복도 좋지 못한 사람입니다. 옛날 추호(秋胡)라는 사람이 뽕 따는 계집과 희롱할 때 그 아내가 듣고 말하기를, ’내 아무리 어질지 못하나 나를 생각한다면 어찌 상중(桑中) 유녀(遊女)와 희롱하겠는가.‘ 하고 물에 빠져 죽었으니 내들 무슨 면목으로 상공을 대면하겠습니까. 나를 죽은 정씨에게 비하고 행실 없는 사람을 생각 하니 내 그런 사람 섬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난양은 성질이 양순하고 인정이 많으니 승상을 모셔 백년 해로하십시오.’ 하였습니다.」
 
437
승상이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어 말하였다.
 
438
「천하의 형세만 믿고 가장을 업수이 여기기는 영양공주 같은 사람이 없다. 옛부터 부마 되기를 싫어한 것은 이렇기 때문이다.」
 
439
하고, 난양공주에게 말하였다.
 
440
「과연 정소저를 만나본 것에 곡절이 있습니다. 영양이 행실 없는 사람으로 책망하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겠습니까?」
 
441
난양이 말하였다.
 
442
「첩이 청컨대 들어가 알아듣도록 잘 타이르겠습니다.」
 
443
하고, 즉시 돌아가 날이 저물도록 나오지 아니하고 시비를 시켜 승상께 전갈하여 말하였다.
 
444
「백 번 알아듣도록 잘 타일렀지만 도무지 듣지 아니합니다. 첩은 영양과 사생고락(死生苦樂)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영양이 깊은 방에서 혼자 늙기를 결단하니 첩도 상공을 모시지 못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진씨와 함께 백년을 해로하십시오.」
 
445
승상이 이 말을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빈방에 촛불만 대하고 앉았는데, 진씨가 금으로 만든 화로에 향을 피우고 승상께 고하여 말하였다.
 
446
「첩은 군자를 곁에서 모시지 못하기에 첩도 들어가니 승상은 평안히 쉬십시오.」
 
447
하고, 나가자 승상이 더욱 분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하되,
 
448
‘저희가 작당하고 가장을 이토록 조롱하니 세상에 이런 고약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정사도 집 화원에서 낮이면 정십삼과 술이나 먹고, 밤이면 춘운과 희롱함만 같지 못하다. 부마된 삼일 만에 이토록 곤핍하니 어찌 분하지 아니한가?’
 
449
하고, 사창(紗窓)을 여니, 이때 달빛은 뜰에 가득하고 은하수가 비껴 있었다. 잠깐 얼어나 신을 신고 배회하는데, 문득 바라보니 영양공주의 방에 등촉이 휘황하고 웃음 소리가 자자하기에 승상이 생각하되,
 
450
「밤이 깊었는데 어떤 궁인이 이제까지 아니 자는가? 영양이 나에게 화가 나서 들어가더니 침실에 있는가?」
 
451
하여, 가만히 들어가 창 밖에서 엿들으니 두 공주가 쌍륙(雙六) 치는 소리가 역력히 들리거늘, 승상이 창틀로 보니 진씨가 한 여자와 함께 두 공주 앞에서 쌍륙을 치는데 자세히 보니 춘운이었다.
 
452
대개 춘운이 공주를 위하여 관광(觀光)하고 궁중에 머물렀지만, 종적을 감추어 보이지 않은 까닭에 승상이 알지 못하였다. 승상이 춘운을 보자 마음에 이상히 여겨 ‘어찌 왔을까?’ 하는데, 문득 진씨가 쌍륙을 다시 벌이고 말하였다.
 
453
「춘랑과 내키코자 하오.」
 
454
춘운이 말하였다.
 
455
「첩은 본디 가난하여 내기하면 술 한 잔뿐이거니와, 진숙인(秦淑人)은 귀한 공주를 모셔 명주 비단을 흔한 삼베 같이 여기고 팔진미를 변변치 못한 음식처럼 여기니 무엇을 내기코자 하십니까?」
 
456
진씨가 말하였다.
 
457
「내가 지면 보패(寶貝)를 끌러 춘랑을 주고 춘랑이 지면 내가 청하는 일을 하거라.」
 
458
춘운이 말하였다.
 
459
「무슨 일을 청하십니까?」
 
460
진씨가 말하였다.
 
461
「내 잠깐 말씀을 들으니 춘랑이 ‘신선도 되고 귀신도 된다.’ 하니, 그 말을 자세히 듣고자 하오.」
 
462
춘운이 쌍륙판을 밀치고 영양공주를 향하여 말하였다.
 
463
「소저가 평소 저를 사랑하시면서 어찌 이런 말씀을 공주께 하십니까? 진숙인이 들었으니 궁중에 귀 있는 사람이 누가 아니 들었겠습니까?」
 
464
진씨가 말하였다.
 
465
「춘랑이 어찌 우리 공주께 소저라 하는가? 공주는 대승상 위국공 부인이시오. 비록 나이는 어리나 작위가 이미 높으신데 어찌 춘랑자의 소저이겠는가?」
 
466
춘운이 웃으며 말하였다.
 
467
「십 년 넘게 부르던 입을 고치기 어렵습니다. 꽃을 다투어 희롱하던 일이 어제인 듯해서 그러했습니다.」
 
468
하고, 서로 웃음 소리가 낭랑하였다.
 
469
「춘랑의 말을 다 듣지 못하였지만 승상이 과연 춘랑에게 그토록 속았습니까?」
 
470
영양이 말하였다.
 
471
「승상이 겁내는 거동을 보고자 하였는데 승상이 사리에 어둡고 완고하여 귀신을 꺼릴 줄 알지 못하니, 옛부터 색(色)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을 색중아귀(色中餓鬼)라더니 과연 승상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472
하고, 모두 크게 웃었다.
 
473
승상이 비로소 영양공주가 정소저인 줄을 알고 한편으로 반가워 문을 열고 급히 보고자 하다가, 갑자기 생각하되 ‘제가 나를 속이니 나도 또한 속이리라.’ 하고 가만히 진씨의 방으로 돌아와 누웠는데 하늘이 이미 새었다.
 
474
진씨가 나와 시녀에게 물어 말하였다.
 
475
「승상께서 일어나셨느냐?」
 
476
시녀가 말하였다.
 
477
「아직 일어나지 아니하셧습니다.」
 
478
진씨가 창 밖에 서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데, 승상이 신음하는 소리가 때때로 들리거늘 진씨가 들어가 물어 말하였다.
 
479
「승상께서 기체 평안치 않으십니까?」
 
480
승상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눈을 바로 떠 보며 헛소리를 무수히 하자 진씨가 물어 말하였다.
 
481
「승상은 무슨 헛소리를 이리 하십니까?」
 
482
승상이 두 손을 내어 두르며 말하였다.
 
483
「너는 어떤 사람이냐?」
 
484
진씨가 말하였다.
 
485
「첩을 알지 못하십니까? 첩은 진숙인입니다.」
 
486
승상이 말하였다.
 
487
「진숙인이 어떤 사람이냐?」
 
488
진씨가 놀래어 나아가 머리를 만져보니 심히 더웠다.
 
489
진씨가 말하였다.
 
490
「승상 병환이 하룻밤 사이에 어찌 이토록 중하십니까?」
 
491
승상이 말하였다.
 
492
「내 꿈에 정씨와 함께 밤새도록 말했더니 내 기운이 이러하다.」
 
493
진씨가 다시 물으나 승상이 대답지 아니하고 몸을 돌이켜 눕자, 진씨가 민망하여 시녀를 명하여 두 공주께 보고하였다.
 
494
「승상의 병환이 중하니 빨리 나와 보십시오.」
 
495
영양이 말하였다.
 
496
「어제 술을 먹은 사람이 무슨 병이겠는가. 우리를 나오게 함일 뿐이다.」
 
497
진씨가 바삐 들어가 태후께 고하였다.
 
498
「승상의 병환이 중하니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니 황상께 아뢰어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십시오.」
 
499
태후가 이 말을 듣고 두 공주를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500
「너희는 부질없이 승상을 과히 희롱했구나. 병이 중타하면 어찌 빨리 나가 보지 아니하느냐? 급히 나가 병이 중하거든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라.」
 
501
두 공주가 마지 못하여 승상의 침소에 나와 영양은 밖에 서고 난양과 진씨가 먼저 들어가니, 승상이 난양을 보고 두 손을 내어 두르며 눈을 굴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목 안으로 소리쳐 말하엿다.
 
502
「내 명이 다하여 영양과 영결하고자 하는데 영양은 어디에 가고 아니 오는가?」
 
503
난양이 말하였다.
 
504
「승상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505
승상이 말하였다.
 
506
「오늘밤 정씨가 와 나에게 이로되, ‘상공은 어찌 약속을 저버리십니까?’ 하며 술을 주어 먹었더니 말을 못하겠고 눈을 감으면 내 품에 눕고 눈을 뜨면 내 앞에 서니, 정씨가 나를 원망함이 깊은 모양인데 내 어찌 살 수 있겠는가?」
 
507
하고, 벽을 향하여 헛소리를 무수히 하고 기절하는 듯하자, 난양이 병을 보고 크게 겁내어 나와서 영양에게 말하였다.
 
508
「승상이 저저(姐姐)를 보고자 하여 병이 되었으니 저저가 아니면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저는 급히 들어가 보십시오.」
 
509
영양이 오히려 의심하였지만, 난양이 영양의 손을 잡아 함께 들어가니 승상이 헛소리를 하는데 모두 정씨에 대한 말이었다.
 
510
난양이 크게 소리하여 말하였다.
 
511
「영양이 왔으니 눈을 들어 보십시오」
 
512
승상이 잠깐 머리를 들어 손을 내어 일어나고자 하자, 진씨가 나아가 몸을 붙들어 일으켜 앉히니 승상이 두 공주에게 말하였다.
 
513
「내 두 공주와 백년해로하려 하였는데 지금 나를 잡아가려 하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 같습니다.」
 
514
영양이 말하였다.
 
515
「상공은 어떤 재상이시기에 저런 허황된 말씀을 하십니까? 정씨가 비록 남은 혼이 있다한들 궁중이 깊숙하고 그윽하며 천만 귀신이 지키고 보호하는데 어찌 감히 들어오겠습니까.」
 
516
승상이 말하였다.
 
517
「정씨가 지금 내 앞에 앉았는데 어찌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십니까?」
 
518
난양이 말하였다.
 
519
「옛 사람이 술잔의 활 그림자를 보고 병이 들어 죽었다더니 승상이 또 그러하십니다.」
 
520
승상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두 손만 내어 두르자, 영양이 병세가 흄함을 보고 다시 속이지 못하여 나아가 앉아 말하였다.
 
521
「승상이 죽은 정씨를 이렇듯 생각하니 산 정씨를 보면 어떠하시겠습니까? 첩이 과연 정씨입니다.」
 
522
승상이 말하였다.
 
523
「부인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씨의 혼이 지금 내 앞에 앉아 나를 황천에 데려가 전생의 연분을 맺자 하고 잠시도 머물지 못하게 하니 산 정씨가 어디에 있겠소, 불과 내 병을 위로코자 하여 산 정씨라 하지만 진실로 허망합니다.」
 
524
난양이 나가 앉아 말하였다.
 
525
「승상은 의심치 마십시오. 과연 태후 낭랑이 정씨를 양녀로 삼아 영양공주를 봉하여 첩과 함께 상서를 섬기게 하였으니, 오늘의 영양공주는 전일 거문고 희롱하던 정소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얼굴과 말소리가 심히 같겠습니까?」
 
526
승상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소리내어 말하였다.
 
527
「내가 정가(鄭家)에 있을 때 정소저에게 시비 춘운이 있었는데, 한 말을 묻고자 합니다.」
 
528
난양이 말하였다.
 
529
「춘운이 영양을 뵈러 궁중에 왔다가 승상의 기후(氣候)가 평안치 아니 하심을 보고 밖에 대령하였습니다.」
 
530
하고, 즉시 춘운을 부르니 춘운이 들어와 앉으며 말하였다.
 
531
「승상께서는 기체 어떠하십니까?」
 
532
승상이 말하였다.
 
533
「춘운 혼자만 있고 다른 사람은 다 나가시오.」
 
534
두 공주와 진숙인이 나와 난간에 나와 앉았는데, 승상이 즉시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해 춘운으로 하여금 ‘데려오라.’ 하니 춘운이 웃음을 머금고 또 나와 전하자 다 들어갔다. 승상이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궁금포(宮錦袍)를 입고, 백옥선(白玉扇)을 들고, 안석(案席)에 비스듬히 앉았으니 기상이 봄바람 같이 호탕하고 정신이 가을달 같이 맑아 병들었던 것 같지 아니하였다.
 
535
「가까이 앉으시오.」
 
536
영양이 들어온 줄을 알고 웃음을 머금고 머리를 숙이고 앉았다.
 
537
난양이 말하였다.
 
538
「상공께서 기체 지금 어떠하십니까?」
 
539
승상이 정색하고 말하였다.
 
540
「요새는 풍속이 좋지 못하여 부인이 작당하고 가장을 조롱하니, 내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대신의 위치에 있어 문란해진 풍속을 바로잡을 일을 생각하여 병이 들었는데 이제는 나았으니 염려마십시오.」
 
541
영양이 말하였다.
 
542
「그 일은 첩들이 알지 못하거니와 승상의 병환이 쾌치 못하면 태후께 여쭈어 명의를 불러 치병(治病)코자 합니다.」
 
543
승상이 아무리 웃음을 참고자 하였지만, 실상 ‘정소저가 죽었는가?’ 하였는데, 이날 밤에 소저가 살아 있는 줄을 알고 비록 속였으나 그리워하던 심사를 참지 못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크게 웃어 말하였다.
 
544
「이제 부인을 지하에 가 상봉할까 하였더니 오늘 일은 진실로 꿈 속입니다.」
 
545
하며, 옥수를 잡고 희롱하니 원앙새가 초목 사이의 푸른 물을 만난 듯, 나비가 붉은 꽃을 본 듯 그 사랑함을 이루 헤아리지 못할 바였다.
 
546
영양이 일어나 재배하고 말하였다.
 
547
「이는 태후께서 어지시기 때문이며 황상 폐하의 성덕과 난양공주의 인후(仁厚) 하신 덕이오니 그 은덕은 백골이 진토되어도 갚지 못할까 합니다. 입으로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548
하고, 전후의 사연을 다 베푸니 만고에 듣지 못한 일이었다.
 
549
난양이 웃으며 말하였다.
 
550
「영양은 심덕(心德)이 아름다워서 하늘이 감동하신 것이니 첩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551
이때 태후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552
「내가 또한 속였다.」
 
553
하고, 즉시 불러 보시니, 두 공주가 태후를 모셔 있었다.
 
554
태후가 물어 말하였다.
 
555
「승상이 죽은 정씨와 함께 끊어진 연분을 다시 맺으니 어떠하신가?」
 
556
승상이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557
「성은이 망극한데 만분지일이나 다 갚지 못하올까 합니다.」
 
558
태후가 말하였다.
 
559
「나의 희롱함이 무슨 은혜라 하겠는가?」
 
560
이날 상이 군신 조회를 받을 때, 군신이 아뢰어 말하였다.
 
561
「요사이 경성(景星)이 나오고, 황하수도 맑아졌으며, 풍년이 들었고, 토번이 살던 땅이 다 항복하니 진실로 태평성대인가 합니다.」
 
562
상이 겸양하였다.
 
563
하루는 승상이 대부인을 모시고자 하여 상소를 할 때, 말씀이 지극하고 간절하여 상이 보고,
 
564
「양소유는 극진한 효자이다.」
 
565
하고, 황금 일천 근과, 비단 팔백 필과, 백옥으로 꾸민 가마를 주며 말하였다.
 
566
「즉시 가 대부인을 위하여 잔치하고 모셔오라.」
 
567
승상이 황태후께 하질할 때, 태후가 비단으로 장식된 신을 주었다. 승상이 물러나와 두 공주와 진씨, 춘랑을 이별하고 발행하여 낙양에 다다르니, 계섬월과 적경홍이 벌써 객관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568
승상이 웃으며 말하였다.
 
569
「내 이 길은 황명이 아니요, 사사로운 용무로 가는데 두 낭자는 어찌 알고 왔는가?」
 
570
대답하여 말하였다.
 
571
「대승상 위국공이자 부마도위(駙馬都尉)의 행차를 깊은 산골이라도 다 아는데, 첩들이 아무리 산림에 숨었은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또한 승상의 부귀는 천하의 의뜸이라 첩들도 즐겁거니와 소문에 두 공주를 부인 삼으셨다 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첩들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572
승상이 말하였다.
 
573
「한 분은 황상 폐하의 누이요, 또 한 분은 정사도의 소저이다. 황태후가 양녀를 삼아 영양공주를 봉하였으니 계랑이 정한 바이다. 무슨 투기(妬忌)가 있겠는가. 두 공주가 다 유한(幽閑)한 덕이 있으니 두 낭자의 복이다.」
 
574
섬월과 경홍이 크게 기뻐하였다.
 
575
승상이 발행하여 고향에 갔다.
 
 
576
각설이라.
 
577
승상이 십육세에 모친께 이별하고 과거에 갔다가 다시 사 년 사이에 대승상 위국공이 된 위의를 갖추고 대부인께 돌아가 뵈니, 부인 유씨가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578
「네가 진실로 내 아들 양소유냐? 근근히 너를 기를 때 이리 될 줄 어찌 알았겠느냐?」
 
579
하고, 반가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손을 잡고서 눈물을 흘렸다.
 
580
승상이 조상의 무덤을 깨끗이 한 후 제사지내고 임금께 받은 금과 비단으로 대부인을 위하여 친구와 일가 친척을 다 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대부인을 모셔 경성으로 올라 갈 때, 각도(各道)의 수령이며 여러 고을의 태수(太守)들이 뉘 아니 모셔 따라오지 않았겠는가?
 
581
황성에 이르러 대부인을 모셔 승상부에 모시고 들어가 황제와 태후께 입조하니 황제가 불러 만나보고 금과 비단을 많이 상사(賞賜)하거늘, 택일하여 임금께서 내려준 새 집에 모시고 두 공주와 진숙인, 가유인을 다 예로써 알현(謁見)하고 만조 백관을 청하여 삼 일을 잔치할 때, 궁실 거처의 휘황함과 풍악 음식의 찬란함은 세상에 비할 데 없었다.
 
582
한참 후에 문지기가 고하였다.
 
583
「문 밖에서 두 여자가 승상과 대부인 뵙기를 청합니다.」
 
584
승상이 말하였다.
 
585
「분명 계섬월과 적경홍이다.」
 
586
하고, 대부인께 고하고 부르자, 섬월과 경홍이 머리를 숙여 계단 아래에 서 뵈니 진실로 절대 가인이어서 모든 손님들이 다 칭찬해 마지 않았다. 진숙인이 섬월과 옛정이 있기에 서로 만나 슬픔과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587
영양공주가 섬월을 불러 술 한 잔을 주어 말하였다.
 
588
「이것으로 나를 천거한 공을 사례한다.」
 
589
대부인이 말했다.
 
590
「너희는 섬월에게만 사례하고 두련사의 공은 생각지 아니하느냐?」
 
591
승상이 말하였다.
 
592
「오늘날 이렇게 즐기는 것은 다 두련사의 덕이다.」
 
593
하고, 즉시 사람을 자청관(紫淸觀)에 보내어 청하니 두련사는 촉나라에 들어가고 없었다.
 
594
이로부터 승상부 창기(娼妓) 팔백인을 동부와 서부를 만들어, 동부 사백은 섬월이 가르치고 서부 사백 인은 경홍이 가르치니 가무가 날로 새로워, 비록 이원(梨園)의 배우들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595
하루는 공주와 여러 낭자가 대부인을 모셔 앉았는데, 승상이 한 편지를 들고 들어와 난양을 주어 말하였다.
 
596
「이는 월왕의 편지니 보십시오.」
 
597
난양이 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598
「지난번 국가에 일이 많아 낙유원(樂遊原)에 말을 머물게 하는 좋은 기회와 곤명지(昆明池)에서 배 타고 노는 즐거운 일을 이제껏 못하였는데, 지금 황상의 넓으신 덕과 승상의 공명을 힘입어 천하태평하였으니, 원컨대 승상과 함께 봄빛을 구경코자 합니다.」
 
599
난양이 승상께 말하였다.
 
600
「월왕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601
승상이 말하였다.
 
602
「봄빛을 희롱코자 하는 것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603
난양이 말하였다.
 
604
「월왕의 뜻이 본디 풍류를 좋아하여 무창(武昌)의 명기(名妓) 만옥연을 얻어두고, 승상 궁중에서 보았던 미인들과 한번 다투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605
승상이 웃으며 말하였다.
 
606
「과연 그렇소이다.」
 
607
영양공주가 말하였다.
 
608
「그렇다면 아무리 노는 일이라도 어찌 남에게 질 수야 있겠습니까.」
 
609
하고, 계섬월과 적경홍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610
「군병을 십 년 가르치기는 한번 싸움의 승패를 위한 것이니, 이날 승부는 다 두 낭자에게 있다. 부디 힘써 하라.」
 
611
섬월이 말하였다.
 
612
「월궁의 풍류는 일국의 으뜸이요, 만옥연은 천하의 절색입니다. 첩의 얼굴과 음율이 다 부족하니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렵습니다.」
 
613
경홍이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614
「섬랑, 우리 두 사람이 관동 칠십 여 주를 돌아다녔지만 당할 사람이 없었는데 만옥연 한 사람을 두려워 하는가?」
 
615
섬월이 말하였다.
 
616
「홍랑은 어찌 이처럼 자신하는가?」
 
617
하고, 승상께 고하였다.
 
618
「‘교만한 사람과 하는 일은 반드시 잘못된다.’고 하는데, 홍랑의 말이 과하니 패배할 것 같습니다. 또 홍랑의 얼굴이 아리따우면 승상이 어찌 남자로 속으셨겠습니까?」
 
619
영양이 말하였다.
 
620
「홍랑의 얼굴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승상의 눈이 밝지 못한 것이지요.」
 
621
승상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622
「부인도 눈이 있으면 어이 남자인 줄을 모르셨습니까?」
 
623
모든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624
이럭저럭 월왕과 모이는 날이 되자, 승상이 의복과 안장 얹은 말을 각별히 가다듬어 모양을 내고 계섬월과 적경홍 등 팔백 창기를 거느려 좌우에 모시게 하니 진실로 춘삼월 복숭아 꽃 속이었다. 월왕이 또한 풍류를 성대히 갖추고 승상을 맞아 서로 자리를 정한 후에, 승상과 월왕이 말도 자랑하고 활 쏘는 법도 시험하여 서로 칭찬하는데 문득 심부름하는 사람이 고하였다.
 
625
「어린 내시가 어명을 모셔 왔습니다.」
 
626
월왕과 승상이 놀라 일어나 맞이하니, 어린 내시가 임금이 내려준 황봉주(黃封酒)를 부어 권하며 말하였다.
 
627
「글제를 받들어 글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628
월왕과 승상이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각각 사운(四韻) 시를 지어 보냈다.
 
629
이때 여러 빈객은 차례대로 쭉 벌여 앉았고 좋은 술과 맛난 안주를 한꺼번에 올리니, 위의가 찬란하고 음식이 난만하였다. 각각 풍류와 온갖 노래는 서왕모(西王母)의 요지연(瑤池宴)과 한무제(漢武帝)의 백량대(柏粱臺)라도 미치지 못하였다.
 
630
월왕이 승상에게 말하였다.
 
631
「승상께 조그마한 정성을 아뢰고자 하니 소첩 등을 불러 가무(歌舞)하여 승상을 즐겁게 하고자 합니다.」
 
632
승상이 말하였다.
 
633
「제가 감히 대왕의 궁인과 상대하겠습니까? 저 또한 시첩(侍妾)을 시켜 재주를 아뢰어 대왕의 흥을 돕고자 합니다.」
 
634
이에 계섬월과 적경홍과 월궁의 네 미인이 나와 뵈니 승상이 말하였다.
 
635
「옛날 현종(玄宗) 황제 시절에 궁중에 한 미인이 있었는데 이름은 부운이요, 얼굴은 일색이었습니다. 이태백이 그 미인을 보고자 황제께 청하였지만 겨우 말소리만 듣고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저는 대왕의 네 선녀를 보니 천상 선인(仙人)인가 하거니와 저 미인의 이름은 무엇이라 합니까?」
 
636
월왕이 말하였다.
 
637
「저 미인은 금릉(金陵)의 두운선(杜雲仙)이요, 진류(陣留)의 소채아(少蔡兒)요, 무창(武昌)의 만옥연(萬玉燕)이요, 장안(長安)의 호영영(胡英英)입니다.」
 
638
승상이 말하였다.
 
639
「만옥연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과연 소문과 같습니다.」
 
640
월왕이 또 섬월의 성명을 들은 바 있어 물어 말하였다.
 
641
「이 양랑자를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642
승상이 말하였다.
 
643
「제가 과거 보러 오는 날에 마침 낙양 땅에서 섬월은 제 스스로 좇아왔고, 경홍은 연나라를 치러갈 때 한단(邯鄲) 땅에서 스스로 좇아왔습니다.」
 
644
월왕이 손벽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645
「승상이 한림을 띠고 황금인을 차고 도적을 쳐 승전하고 돌아오니 적낭자가 알아보기는 쉬웠겠지만, 계낭자는 승상이 곤궁할 때 부귀할 줄을 알았으니 기특하구나.」
 
646
하고, 술을 가득 부어 섬월에게 상으로 주었다.
 
647
승상과 월왕이 장막 밖의 무사들이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보고 있다가 월왕이 말하였다.
 
648
「미인이 말타는 재주를 봄직 하기에 궁녀 수십 인을 가르쳤는데 승상 부중(府中)에도 또한 있습니까? 원컨대 함께 활 쏴 사냥하며 한 즐거움을 ??[원문에 없음]지이다.」
 
649
승상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수십 인을 뽑아 월궁녀와 승부를 다툴 때, 경홍이 고하여 말하였다.
 
650
「비록 활을 잡아보지는 아니하였으나 남이 활 쏘는 것을 익히 보았으니 잠깐 시험코자 합니다.」
 
651
승상이 기뻐해 즉시 찬 활을 끌러 주었다.
 
652
경홍이 여러 미인에게 말하였다.
 
653
「비록 마치지 못하여도 웃지 말라.」
 
654
하고, 말에 올라 채찍질을 하는데 마침 꿩이 날자 쏴 말 아래 떨어뜨리니, 승상과 월왕이 다 놀라고 월궁 미인이 모두 탄복하며 말하였다.
 
655
「우리는 십 년 헛공부를 하였다.」
 
656
계섬월과 적경홍이, ‘우리 두 사람이 월왕의 미인들에게 첫 자리를 사양 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로워 안타깝구나.’라고 생각하며,
 
657
문득 바라보니 두 미인이 수레를 타고 장막 밖에 와 고하였다.
 
658
「양승상의 소실(小室)입니다.」
 
659
하고, 수레에서 내리거늘 보니 하나는 심요연이요, 또 하나는 완연히 꿈 속에서 보던 동정 용녀였다. 승상께 절하며 알현하니 승상이 월왕을 가리켜 말하였다.
 
660
「이 분은 월왕 전하시다.」
 
661
두 사람이 예로써 알현하였다.
 
662
두 사람이 계섬월, 적경홍과 함께 앉아 있는데 승상이 월왕에게 말하였다.
 
663
「저 두 사람은 내가 토번을 정발할 때 얻었지만 미처 데려오지 못하였는데, 오늘 이 성대한 모임을 듣고 온 듯합니다.」
 
664
왕이 그 두 사람을 보니 자색이 섬월과 같았지만 고고한 태도와 뛰어난 기운은 더하였다. 왕이 기이히 여기고 월궁의 미인들도 다 안색이 바뀌었다.
 
665
왕이 물어 말하였다.
 
666
「두 낭자는 어디 사람이며 성명은 누구냐?」
 
667
하나가 말하였다.
 
668
「첩은 심요연입니다.」
 
669
하고, 또 하나는 말하였다.
 
670
「백능파 입니다.」
 
671
왕이 말하였다.
 
672
「두 낭자에게 무슨 재주가 있느냐?」
 
673
요연이 말하였다.
 
674
「변방 밖 사람이라 사죽(絲竹)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대왕께서 즐기실 바는 없지만 다만 허랑한 검술을 배워 용진(龍陳)은 압니다.」
 
675
월왕이 크게 기뻐하여 승상에게 말하였다.
 
676
「현종조에 공손대랑(公孫大娘)이 검무로 유명하였지만 후세에 전해지지 않아 항상 두보의 글만을 읊고 쾌히 보지 못함을 한탄하였는데, 낭자가 능히 하면 쾌할 일이다.」
 
677
하고, 승상과 각각 찬 칼을 끌러 주었다. 요연이 한 곡조를 추니 자유자재로 변화하여 신통 기이한 법이 많아 왕이 놀라 정신을 잃었다가 한참 후에 말하였다.
 
678
「세상 사람이야 어찌 저럴 수 있겠는가, 낭자는 진실로 신선이구나.」
 
679
하고 또 능파에게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였다.
 
680
「첩은 상강(湘江) 가에 살기에 항상 비파 타는 노래를 때때로 익혔으나 귀한 분께서 들음직은 할 듯합니다.」
 
681
왕이 말하였다.
 
682
「상비(湘妃)의 비파 소리를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통해서나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낭자가 능히 하면 쾌할 일이다. 어서 타라.」
 
683
능파가 한 곡조를 타니 맑은 노래와 신통한 술법(術法)이 사람을 슬프게 하고 조화를 아는 듯하였다.
 
684
왕이 기이히 여겨 말하였다.
 
685
「진실로 인간의 곡조 아니다. 정말로 선녀구나.」
 
686
날이 저물어 잔치를 파하니 가무에 상으로 내린 금과 비단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승상과 월왕이 각각 풍류를 여러 가지로 갖추어 성문에 들어오니 장안 사람이 뉘 아니 구경하며 백 세 노인도 혹 감탄하며 말하였다.
 
687
「현종 황제가 화청궁(華淸宮)에 거동하실 때 위엄이 이와 같았는데 오늘 또 다시 보는구나.」
 
688
이때 두 공주가 진가(秦家)의 두 낭자를 데리고 대부인을 모셔 승상이 돌아오기를 밤낮으로 기다렸다.
 
 
689
각설.
 
690
이때 승상이 당에 오르자 좌우가 다 놀랐다. 심요연과 백능파 두 사람을 대부인과 두 공주께 뵈니 부인이 말하였다.
 
691
「전일 승상이 두 낭자의 공로를 칭찬하여 일찍 보고자 하였는데 어찌 이리 늦었느냐?」
 
692
연파가 말하였다.
 
693
「첩 등은 먼 지방의 천인입니다. 비록 승상의 한번 돌아보신 은혜를 입었으나 두 부인께서 한 자리 땅을 허락하지 않으실까 두려워 감히 오지 못하였습니다. 서울에 들어와 두 공주께서 관저(關雎)와 규목(樛木)의 덕이 있으심을 듣고 이제야 나아와 뵙고자 했는데, 마침 승상께서 성대히 노신다는 것을 듣고 외람되게 참예하고 돌아오니 첩 등의 영광스러운 행운인가 합니다.」
 
694
공주가 웃으며 말하였다.
 
695
「우리 궁중에 춘색(春色)이 난만한 것은 다 우리 형제의 공이니 승상은 아십니까?」
 
696
승상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697
「저 두 사람이 새로 와 공주의 위풍이 두려워 아첨하는 말을 공주는 공을 삼고자 합니까?」
 
698
모두가 크게 웃었다.
 
699
진가의 두 낭자가 섬월에게 물어 말하였다.
 
700
「오늘 승부는 어떠했는가?」
 
701
경홍이 말하였다.
 
702
「섬랑이 내 큰소리를 비웃었는데 내 한마디로 월궁 미인들의 기운을 꺽었으니 섬랑에게 물으시면 아실 것입니다.」
 
703
섬랑이 말하였다.
 
704
「홍랑의 말 타고 활 쏘는 재주는 절묘하다 할 것이지만, 저 월궁 미인의 기운을 꺽은 것은 다 새로 온 두 낭자의 자색과 재주 때문입니다.」
 
705
그 이튿날 승상이 황상께 입조할 때, 태후가 승상과 월왕을 보니 두 공주는 벌써 들어가 모시고 있었다.
 
706
태후가 월왕에게 말하였다.
 
707
「어제 승상과 춘색을 다투었다 하더니 승부는 어떠했는가?」
 
708
월왕이 말하였다.
 
709
「승상의 복은 보통 사람과 같을 바가 아닙니다. 다만 공주에게도 복이 되겠습니까? 원컨대 낭랑은 이 말씀으로 승상을 심문하십시오.」
 
710
승상이 말하였다.
 
711
「월왕이 신에게 졌단 말은 이태백이 최호(崔顥)의 시를 겁내는 것과 같습니다. 공주에게 복이 되고 아니됨은 공주에게 물으십시오.」
 
712
공주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713
「부부는 한몸이니 영욕고락(榮辱苦樂)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714
월왕이 말하였다.
 
715
「누이의 말이 비록 좋으나 자고로 부마 중에 누가 승상같이 방탕하였겠습니까? 청컨대 승상을 벌하십시오.」
 
716
태후가 크게 웃고 술 한 잔으로 벌하였다. 승상이 크게 취하여 돌아올 때, 두 공주도 함께 왔다.
 
717
대부인이 물어 말하였다.
 
718
「전에도 선온(宣醞)의 명이 있었지만 이처럼 취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오늘은 과히 취하였는가?」
 
719
승상이 말하였다.
 
720
「공주의 오라비인 월왕이 태후께 고자질하여 소자의 죄를 지어내었는데 마침 말씀을 잘 드려 한 말 술로 벌을 받았습니다. 소자가 만일 주량이 약했으면 거의 죽을 뻔하였으니, 대개 월왕이야 낙원(樂原)에서 진 일을 설욕하려 한 일이겠지만 난양도 내가 희첩(姬妾)이 많음을 시기하여 그 오라비와 함께 나를 모해하였으니, 모친은 한 잔 술로 난양을 벌하여 소자를 설욕하여 주십시오.」
 
721
유부인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722
「공주가 비록 술을 먹지 못하나 취객을 위하여 마다하지는 못할 것이다.」
 
723
하고, 승상을 속여 설탕물 한 잔으로 벌하였다.
 
724
이때 두 부인이 육낭자와 서로 즐기는 뜻이 고기가 물에서 놀고 새가 구름에서 나는 것 같아서 서로 은정을 잊지 못하니, 비록 두 부인 현덕(賢德)에 감화 받아서였지만 대개 남악산에서 발원(發願)한 때문이었다.
 
725
하루는 두 공주가 서로 의논하여 말하였다.
 
726
「옛 사람이 자매형제가 혹 남의 아내도 되고 혹 남의 첩도 되었는데, 우리 이처육첩(二妻六妾)은 의가 골육 같고 정이 형제 같으니 어찌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타고난 성이 한 가지가 아니고 지위의 높고 낮음이 같지 않음은 족히 거리낄 일이 아니다. 마땅히 결의형제(結義兄弟)하여 일생을 지내는 것이 어떠한가?」
 
727
육 낭자가 다 겸손히 사양하고 춘운과 섬월이 더욱 응치 아니하자 정부인이 말하였다.
 
728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은 군신 사이였지만 형제의 의가 있었고, 세존의 처와 등가여자(登伽女子)는 높고 낮음이 현격히 차이가 났지만 함께 제자가 되었으니, 당초 미천함이 앞날을 성취하는데 무엇이 관계하겠는가?」
 
729
두 공주가 이에 육 낭자를 데리고 관음화상 앞에 나아가 분향 재배한 후, 형제 맺은 맹세를 하고 글을 지어, ‘각각 자매로 스스로 처신하라.’ 하였지만, 육 낭자가 오히려 명분을 지키어 말이 공순하나 정의(情誼)는 더 각별하였다.
 
730
팔 선녀가 각각 자녀를 두었다. 양부인, 춘운, 섬월, 요연, 경홍은 아들을 낳았고, 채봉, 능파는 딸을 낳았는데, 낳고 기르는데 괴로움이 없었다.
 
731
이때 천하가 아주 태평하여 승상이 나면 현명한 임금을 모셔 후원에서 사냥하고, 들면 대부인을 모셔 북당(北堂)에서 잔치하니 이럭저럭 세월이 물 흐르는 듯 하였다. 승상이 장상(將相)이 되어 권세를 잡은 지 이미 수십 년이었다. 유부인이 천수(天壽)를 다하고 별세하자 승상이 슬퍼 야윔이 과도하였다. 임금과 왕비가 중사(中使)를 보내 위로하고 왕후예(王后禮)로 장사 지내게 하였으며, 정사도 부처가 또 상수(上壽)하니 승상이 서러워 하기를 정부인과 같이 하였다.
 
732
승상에게 육남 이녀가 있었다. 맏아들은 대경(大卿)이니 정부인의 소생으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하고, 둘째는 차경(次卿)이니 적씨의 소생으로 경조윤(京兆尹)을 하고, 셋째는 순경(舜卿)이니 가씨의 소생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을 하고, 넷째는 계경(季卿)이니 난양의 소생으로 병부시랑(兵府侍郞)을 하고, 다섯째는 오경(五卿)이니 계씨의 소생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하고, 여섯째는 치경(致卿)이니 심씨의 소생으로 나이 열 다섯에 용력이 절륜하여 금오상장군(金吾上將軍)이 되었다. 맏딸의 이름은 전단(傳丹)이니 진씨의 소생으로 월왕의 며느리가 되었고, 차녀의 이름은 영락(永樂)이니 백씨의 소생으로 황태자의 첩여(婕妤)가 되었다.
 
733
승상이 일개 서생으로 환란을 평정하고 태평을 이루어 공명 부귀가 곽분양(郭汾陽)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지만, 곽분양은 육십에 상장(上將)이 되였는데 상은 이십에 장상(將相)이 되어 위로 임금의 마음을 얻고 아래로는 인망이 있어 부디 복을 누리기는 천고에 없는 일이었다.
 
734
승상이 나라의 큰 명령 아래에 있기 어렵기에 상소하여 '물너가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지만, 상이 친필로 답장을 써 고집스럽게 만류하였다. 그후 또 상소하여 뜻을 간절히 하자, 상이 친필로 답장을 써 말하였다.
 
735
「경의 높은 절개를 이루어 주고자 하지만, 황태후께서 승하하신 후에 어찌 차마 두 공주를 멀리 떠나보낼 수 있겠는가? 성남 사십 리에 별궁이 있으니 이름은 취미궁(翠微宮)이다. 이 궁이 한적하니 경이 은거함이 마땅하다.」
 
736
하고, 승상을 위국공(魏國公)을 더 봉하고 오천 호를 더 상사하며 아주 승상의 인수(印綬)를 거두었다. 승상이 큰 은혜에 더욱 감격하여 즉시 취미궁으로 가니, 이 궁은 종남산(終南山) 가운데 있어 누대(樓臺)가 장려하며 경치가 아주 빼어나 진실로 봉래(蓬萊) 선경(仙景)이었다.
 
737
승상이 그 정전(正殿)을 비워 나라의 조지(詔旨)와 임금이 지은 시문(詩文)을 받들어 모시고 그 남은 누각과 정자는 두 공주와 여러 양자가 나누어 거처케 하였다.
 
738
승상이 두 부인과 육 낭자를 데리고 물에 다달아 달을 희롱하고 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아, 혹 시도 화답하며 거문고도 타니 만년의 조용한 복을 뉘 아니 칭찬하겠는가? 팔월 보름날은 승상의 생일이어서 모든 자녀들이 다 헌수(獻壽)하여 잔치하니, 그 번화한 모습은 비할 데 없었다.
 
739
이럭저럭 구월이 당하니 국화가 만발하여 구경하기 좋은 때였다. 취미궁 서편에 한 높은 누각이 있으니 올라보면 팔백 리 진천(秦川)이 손바닥 펼 친 모양으로 훤히 보였다. 승상이 부인과 낭자를 데리고 올라가 가을 경치를 희롱하는데, 어느덧 석양은 기울어지고 구름은 나즉히 깔려 가을 빛이 찬란하니 마치 그림 속 같았다.
 
740
승상이 옥퉁소를 내어 한 곡조를 부니 그 소리가 처량하여 형경(荊卿)이 역수(易水)를 건널 때 고점리(高漸離)가 비파를 켜고, 초패왕(楚覇王)이 해하(垓下)에서 삼경에 우미인(虞美人)을 이별하는 노래 같았다. 모든 미인이 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니 두 부인이 물어 말하였다.
 
741
「승상이 일찍이 공명을 이루고 오래 부귀를 누려 오늘날 좋은 풍경을 당하였는데, 퉁소 소리가 처량하여 전일과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742
승상이 옥퉁소를 던지고 난간에 기대어 밝은 달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743
「동쪽을 바라보니 진시황(秦始皇)의 아방궁(阿房宮)이 풀 속에 외롭게 서 있고, 서쪽을 바라보니 한무제(漢武帝)의 무릉(茂陵)이 가을 풀 속에 쓸쓸하며, 북쪽을 바라보니 당명황(唐明皇)의 화청궁(華淸宮)에 빈 달빛뿐이라오. 이 세 임금은 천고의 영웅이어서 사해(四海)로 집을 삼고 억조창생(億兆蒼生)으로 신첩(臣妾)을 삼아 해와 달과 별을 돌이켜 천세를 지내고자 하였지만 이제 어디 있는가? 소유는 하동(河東)의 한 베옷 입은 선비로 다행히 현명하신 임금을 만나 벼슬이 장상(將相)에 이르고 또 여러 낭자와 함께 서로 만나 정이 두텁고 심정이 늙도록 더 긴밀하니, 전생 연분이 아니 면 어찌 그러하겠소? 연분이 있어 모이고 연분이 다하면 흩어지기는 천리 (天理)의 떳떳한 일이오. 우리 한번 돌아가면 높은 누각과 굽은 연못과 노래하던 궁전과 춤추던 정자들이 거친 풀과 쓸쓸한 연기로 적막한 가운데 나무하는 아이와 풀 뜯어 마소 치는 아이들이 손가락질 하여 이르되, '양승 상이 낭자와 함께 놀던 곳이다.' 하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소. 천하에 세 가지 도가 있으니 유도(儒道)·선도(仙道)·불도(彿道)라오. 유도는 윤리와 기강을 밝히고 사업을 귀하게 여겨 이름을 죽은 후에 전할 따름이요, 선도는 허망하니 족히 구할 것 아닌데, 오직 불도는 내 근래에 꿈을 꾸면 항상 부들 방석 위에서 참선하는 것이 불가에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 같소. 내 장차 장자방(張子房)이 적송자(赤松子)를 좇은 것같이 하여 남해를 건너 관음(觀音)께 뵈고, 의대(義臺)에 올라 문수보살(文殊菩薩)에 예불하여, 불생 불멸의 도를 얻고자 하나, 다만 그대들과 함께 반평생을 서로 따르다가 장차 멀리 이별하려 하니 자연 비창한 마음이 퉁소 소리에 나타났던 것이오. 」
 
744
여러 낭자도 다 남악 선녀로서 세속의 인연이 장차 다한 가운데 승상의 말씀을 들으니 어찌 감동치 아니하겠는가?
 
745
다 말하였다.
 
746
「상공이 번화한 중에 이 마음이 있으니 분명 하늘의 뜻입니다. 첩 등 여덟 사람이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예불하여 상공을 기다릴 것이니, 상공은 밝은 스승을 얻어 큰 도를 깨달은 후에 첩 등을 가르치십시오.」
 
747
승상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748
「우리 아홉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맞으니 무슨 근심이 있겠소.」
 
749
여러 낭자가 술을 내어와 작별하려 할 때, 문득 지팡막대 끄는 소리가 난간 밖에서 나 여러 사람이 다 의심하였다. 한참 후에 한 노승이 나타났는데 눈썹은 한 자나 길고 눈은 물결 같아 얼굴과 동정(動靜)이 보통의 중은 아니었다.
 
750
대(臺) 위에 올라 승상과 자리를 맞대고 앉아 말하였다.
 
751
「산야(山野)의 사람이 대승상께 뵙니다.」
 
752
승상이 일어나 답례하여 말하였다.
 
753
「사부(師父)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754
노승이 웃으며 말하였다.
 
755
「승상은 평생 사귀던 오랜 벗을 모르십니까?」
 
756
승상이 한참 보다가 깨닫고 여러 낭자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757
「내 토번을 치러갔을 때 꿈에 동정호에 갔다가 남악산에 올라 늙은 화상이 제자를 데리고 강론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사부가 바로 그분이십니까?」
 
758
노승이 박장대소하며 말하였다.
 
759
「옳소! 옳소! 그러나 승상은 꿈 속에서 한번 본 것만 기억하고, 십 년을 같이 산 일은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760
승상이 멍한 채로 말하였다.
 
761
「십육 세 이전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십육 세 후는 벼슬하여 임금을 섬겨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어느 때 사부를 좇아 십 년을 놀았겠습니까?」
 
762
노승이 웃으며 말하였다.
 
763
「승상이 오히려 꿈을 깨닫지 못하였소.」
 
764
승상이 말하였다.
 
765
「사부께서 저를 깨닫게 하시겠습니까?」
 
766
노승이 말하였다.
 
767
「이 어렵지 않다.」
 
768
하고, 막대기를 들어 난간을 치니, 문득 흰 구름이 일어나 사면에 두루 껴 지척을 분간치 못하였다.
 
769
승상이 크게 불러 말하였다.
 
770
「사부는 바른 도리로 가르치지 아니하시고 어찌 환술(幻術)로 희롱하십니까?」
 
771
말을 마치지 못하여 구름이 걷히며 노승과 두 부인 육 낭자는 간 데 없었다. 승상이 크게 놀라 자세히 보니 누대 궁궐은 간 데 없고, 몸은 홀로 작은 암자 가운데 앉아 있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지니 새로 깎은 흔적이 송송하고 백팔염주가 목에 걸려 있으니 다시는 대승상 위의는 없고 불과 연화 도장의 성진 소화상(小和尙)이었다.
 
772
다시 생각하되,
 
773
'당초 일념 그르침을 사부(師傅)가 경계하려 하여 인간 세상에 나가 부귀 영화와 남녀 정욕을 한번 알게 하신 게구나.'
 
774
하고, 즉시 새암에 가 세수한 후, 장삼(長衫)을 바로 입고 고깔을 뚜렷이 쓰고 방장(房丈)에 들어가니 모든 제자들이 다 모여 있었다.
 
775
대사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776
「성진아, 인간 세상의 재미가 어떠하더냐?」
 
777
성진이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눈물을 흘려 말하였다.
 
778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성진이 함부로 굴어 도심(道心)이 바르지 못하니 마땅히 괴로운 세계에 있어 길이 앙화(殃禍)를 받을 것을 사부께서 한 꿈을 불러 일으켜 성진의 마음을 깨닫게 하시니, 사부의 은덕은 천만 년이라도 갚지 못하겠습니다.」
 
779
대사가 말하였다.
 
780
「네 흥을 띠어 갔다가 흥이 다하여 왔으니 내가 무슨 간섭하겠느냐? 또 네가 세상과 꿈을 다르게 아니, 네 꿈을 오히려 깨지 못하였구나.」
 
781
성진이 두 번 절해 사죄하고, 설법(說法)하여 꿈 깸을 청하였다.
 
782
이때 팔 선녀가 들어와 사례하며 말하였다.
 
783
「제자 등이 위부인을 모셔 배운 것이 없기에 정욕을 금치 못해 중한 책망을 입었는데, 사부께서 구제하심을 입어 한 꿈을 깨었으니, 원컨대 제자되어 길이 같기를 바랍니다.」
 
784
대사가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785
「너히들이 진실로 꿈을 알았으니 다시는 망령된 생각을 하지 말라」
 
786
하고, 즉시 대경법(大經法)을 베풀어 성진과 팔 선녀를 가르치니 인간 세 상의 모든 변화는 다 꿈 밖의 꿈이요, 한 마음으로 불법에 나아가니 극락 세계의 만만세 무궁한 즐거움이었다.
 
 
787
정미(丁未)년 완남(完南) 개간(開刊)
 
788
구운몽 종(終)
【원문】구운몽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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