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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의태자 (麻衣太子) ◈
◇ 제9장. 풍운 ◇
카탈로그   목차 (총 : 17권)     이전 9권 다음
1926년
이광수(李光洙)
1
소허가 없어진 뒤에 신종의 마음에는 큰 괴로움이 생겼다.
 
2
『고놈이 마침내 녹록한 놈이 아니로구나.』
 
3
하고 선종은 소허가 도리어 자기보다 뜻이 큰 듯함을 깨달았다.
 
4
나는 이대로 산중에서 늙어 버릴 것인가. 어머니의 원수를 갚자던 맹세는 다 어디로 갔을까? 자기의 원수라 할 헌강왕과 정강왕도 죽었다. 그리고 원수로는 오직 하나만 남은 만공주가 왕이 되었다. 만일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 하면 이때 밖에 없지 아니한가.
 
5
『내 나이 벌써 삼십이다,』
 
6
하고 선종은 두 주먹을 부근 쥐었다.
 
7
그러나 선종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적수 공권으로 세상에 뛰어 나가면 무엇을 하나? 첫째 먹고 입을 것인들 어디서 얻나? 오랫 동안 산중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던 선종에게는 어릴 때에 집을 떠나던 기운이 없어졌다. 산중을 떠나 세상에 나가는 것이 마치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가 없는 큰 바다에나 뜨는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에 선종은 어린 아이와 같이 겁이 났다. 소허가 떠난 뒤에 날이 지낼수록 허담 화상은 더욱 몸도 쇠약하여 가고 맘도 약하여 지어서 잠시도 선종을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잠이 들었다가도,
 
8
『선종아.』
 
9
하고 여우니 팔을 내어 들어서 선종이 곁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야 다시 잠이 들었다. 선종도 소허가 없어진 뒤로는 늙은 스님을 사모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자랐다. 워낙 소박한 성질이라 특별히 귀여워하는 빛도 보이지 아니하고 십 오년 생활을 돌아 보면 허담 화상의 은혜와 저 이 선종의 뼈에 사무침을 깨달았다. 이것을 뿌리치고 달아난 소허는 아주 인정 없고 매몰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크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종은 산중을 떠나자고 생각하였다가도 자기에게 매어 달리는 스님의 기운 없는 모양을 볼 때에는 맥이 풀렸다. 「가자」 「못 간다」————선종의 속에서는 두 소리가 다투었다. 어머니의 원수는 지난 일이요, 스님의 정은 지금 일이다. 만일 천하를 다 준다 하여도 차마 늙은 스님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10
선종은 소허가 떠난 뒤에는 소허와 같이 말이 적어지고 소허와 같이 순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효도하는 자식 모양으로 병든 스님을 받들고 계행지키는 중으로 모든 불사(佛事)를 근실히 하였다. 산중 사람들은 선종의 행동이 돌변한 데 놀랐다.
 
11
그러나 선종의 마음속에서는 누를 수 없는 무슨 뭉텅이가 불끈불끈 솟아 올라 왔다 더구나 새로 . 즉위한 여왕이 음탕하여 민심이 이반하고 각처에 영웅 호걸들이 불끈불끈 일어나서 천하를 엿보는 것을 듣고 볼 때에 「나도」하는 생각이 아니 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종에게는 첫째로 어린 아이 같은 겁이 있고, 둘째로는 스님의 정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12
「나는 왕자다.」
 
13
하고 자기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것을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십 오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다가 자기가 왕저라고 나서기로 누가 믿어 줄까?
 
14
세상에서는 도리어 미친 놈이라고 웃을 것이다. 서뿔리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공연히 봉변만 할 것이다.
 
15
그러면 내가 무엇으로 큰일을 하나, 백의 국선은 말하였다. 백성의 마음은 의 있는 사람에게로 돌아 가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사람은 곧 천하를 얻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럴 듯도 하지마는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자기가 언제 무슨 의를 백성에게 보여 백성의 마음이 자기에게로 돌아 오게 할까.
 
16
백의 국선은 또 말하였다. 백성의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하고 백성을 위하여 백 몸이 당할 수 없이 쿤 것이라 하더라도 뛰어 나가 맡으라, 그것이 의인지라, 하늘과 백성이 네 편이 되어 반드시 그 큰 괴로움을 이기게 하리라, 다행히 이긴 때에 백성의 마음이 네게 돌아 올 것이요, 불행하여 네 몸이 죽은 때에 너는 만세 백성이 사모하는 의인이 되리라.
 
17
생각하면 백의 국선의 말은 옳지, 자기가 사중의 여러 약하고 어린 중들에게 사모함을 받는 것은 그들의 괴로움을 맡아 주는 까닭이다. 만일 백성의 괴로움을 맡아 그것을 없이해 준다 하면 백성의 마음은 돌아 올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될까? 나이 삼십이 되도록 우락부락한 한 중놈에 지나지 못하던 내가 세상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까?
 
18
이렇게 생각하면 선종은 스스로 자기의 못난 것이 부끄러웠다.
 
19
선종이 생각하기에 각처에 일어나는 영웅 호걸들은 다 자기보다 몇 갑절 몇 십 갑절 힘있고 재주 있는 이만인 듯하였다. 그러할 때에는 선종은 자기가 어렸을 때 활터에서 열바가지 투구를 쓰고 아이들의 대장이 되었던 일과 수리재에서 돌 팔매로 떡 장수 노파의 귀고리를 맞추고 활로 독수리를 쏘아 맞추어 그 시커멓고 눈 움푹 들어 간 사람의 활과 칼을 빼앗던 생각과 또 단신으로 대궐에 들어 가 야료를 하던 생각이 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자연 빙그레 웃음이 나오고 어깨가 으쓱하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 자기의 눈앞에 보이는 미륵은 지금의 자기와는 딴 사람인 듯하였다. 지금의 자기에게는 그러한 용기가 잇을 것 같지도 아니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슬펐다.
 
20
선종은 그 칼을 내어 본다.
 
21
『중에게 칼이 당하냐?』
 
22
하고 스님께 여러 번 꾸지람을 들어 꼭꼭 싸서 감추었던 것이다. 칼날에는 녹도 아니 나고 여전히 파란 날에 뾰얀 안개가 돈다. 선종은 그 얼음같이 찬 칼날이 번쩍번쩍 보일 때에 알 수 없는 힘이 가슴에서 복받치어 올라옴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번 칼을 들어 내어돌려 보았다. 칼은 번쩍번쩍하여 마치 불길과도 같고 수없는 무지개가 한데 엉킨 것도 같다.
 
23
선종은 칼을 곁에 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선종의 앞에는 엷은 벌판이 보이고 거기는 구름같이 밀려 오는 군사가 보이고 번득거리는 기치와 창검이 보이고 안개같이 일어나는 말 발굽에 일어나는 먼지가 보이고 그중에 자기가 황금 두구에 해 달 그런 갑옷을 입고 한 어깨에 활을 메고 한손에 칼을 두르며 만군중으로 쫓아 들어 갈때에 군사들은 자기의 칼끝에 삼대 쓰러지듯하고 또 광풍 앞에 풀이 눕듯이 자기의 위풍에 눌려 넋을 잃고 달에 왕과 같은 위풍으로 비단 장막이 펄렁거리는 본진(本陣)중으로 돌어 오는 양이 보이고 본진 중에는 달 같고 꽃같은 미인이 있다가 자기를 보고 반겨 내달아 일변 투구와 갑옷 벗기고 일변 자기의 칼에 묻은 피을 씻고… 이러하는 양이 보인다.
 
24
선종은 번쩍 눈을 떴다. 곁방에서,
 
25
『선종아.』
 
26
하고 스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선종은 칼을 지에 꽂아 벽장에 집어 넣고 스님 방으로 들어 갔다.
 
27
스님은 피곤하여 잠이 들었다가 깬 모양이다, 이빨이다 빠지어서 옴쏙 들어 간 입을 오물거리면서,
 
28
『나 냉수.』
 
29
하고 뼈만 남은 소나뭇가지 같은 팔을 내어 두른다.
 
30
선종은 얼른 바가지를 들고 법당 뒤로 뛰어 가 오탁수(鳥琢水)의 찬 냉수를 떠다 드렸다. 스님은 욕심나는 듯이 두어 모금을 마시니 그만 기운이 부치어 베개 위에 쓰러지며 꿍꿍 앓는 소리를 한다. 선종은 꿇어 앉아 스님의 베개를 바로 잡어 드리고 걸레를 갖다가 엎지러진 물을 씻었다. 스님의 허연 수염 끝에는 물방울이 맺히어 번쩍번쩍하였다.
 
31
『선종아.』
 
32
하고 스님은 눈도 아니 뜨고 부른다.
 
33
『네.』
 
34
스님은 입만 우물거리고 대답이 없다.
 
35
선종은 스님의 수염 끝에 물방울을 씻고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36
세상은 점점 떠들어 세달사 젊은 중들도 경 공부와 염불에 뜻이 없고 모여 앉으면 어디는 누가 몇 백명 군사를 가지고 웅거해 있고, 어디는 누구와 누구와 싸와서 누가 이기어 한 골을 차지하고, 어디 누구는 본디 중으로서 몇 천명 군사의 두령이 되어 술과 고기와 젊은 계집 속에 묻히어 있고, 또 서울서는 대궐 안에 호랑이가 들어 와 관등을 하고, 대가리 셋 가진 아이가 나고, 또 군사를 모집하는데 사뭇 녹(祿)이 많고……이러한 소리를 늘 하게 되고 가끔 중에 한두 명씩 사중(寺中)에 있는 재물을 훔치어 가지고 달아나는 중도 있고 부처님의 이마빼기에 박힌 구슬을 빼다가 벌을 받아서 소경이 되었다는 중도 있었다. 늙은 중들은 여러 가지 엄한 훈계와 무서운 말로 젊은 중들을 위협하였으나 젊은 중들은 글은 체도 아니하고 팔매치기, 담 뛰어 넘기, 몽둥이 두르기, 달음질 하기로 일을 삼고, 마음들이 이렇게 됨을 따라 어디서 들어 오는지 모르나 술과 고기도 가끔 절에 들어 와 얼굴이 벌겋고 비틀 걸음 치는 중이 가끔 보이게 되었다.
 
37
『댓골(竹州) 기헌(箕萱)의 군사가 세달사를 치러 온다.』
 
38
하는 소문도 한두 번이 아니어서 중들은 바람에 나뭇잎만 부시럭거려도 깊은 꿈을 깨어 징 북을 울리며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39
기헌이라면 이 근방에서는 어린애들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어디서는 물 길러 가는 젊은 아낙네가 기헌의 푸른 수건을 동인 군사에게 붙들려 가고, 어느 골 태수(太守)가 기헌과 싸와 죽고……이러한 소리며 기헌은 힘의 장사요 세실 담을 넘어 뛰고 활을 잘 쏘고 칼을 두르면 몸이 공중에 솟아 올라 삼아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잘 때에도 한 눈을 감으면 한 눈을 뜨고 그 눈을 감으면 다른 눈을 뜨고 몸에는 비늘이 돋고, 집에는 열 두 첩을 두고 날마다 새 처녀를 갈아대고……이러한 여러 가지 말이 들렸다.
 
40
젊은 중들은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재미 절반 무서움 절반으로 한손으로 턱을 괴고 침을 꿀떡꿀떡 삼켰다. 마을에 재 올리러 갔다 올 때마다 새 이야기가 하나씩 둘씩 늘었다.
 
41
『선종 시님 안 가 보오?』
 
42
하고 시종을 빈정대는 중도 있었다.
 
43
그렇지 아니하여도 선종의 마음은 누를 수 없이 움직였다. 선종은 하루에도 몇 번 씩 칼을 빼어 보고 활 줄을 켕기어 보았다. 활 줄을 한번 튀겨 통! 하고 울 때에 선종의 피는 끓는 듯하였다.
 
44
그러나 선종은 괴로왔다. 어려서 자기를 길러 준「어머니」를 버리고 또 십 육년 동안 길러 준 은인인 늙고 병든 허담 스님을 버리고 떠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45
『아아, 나는 전생에 죄 많은 놈이다.』
 
46
하고 선종은 손길을 비틀고 한탄하였다.
 
47
『그러나 큰일을 하는 자는 일에 얽매일 수가 없다. 이때야말로 어머니의 원통한 원수를 갚고 도탄에 든 창생을 건지어 한번 대장부의 뜻을 필 때가 아니냐? 가거라 선종아! 목탁을 집어 던지고 칼을 들고 나가거라.』
 
48
하고, 밤중에 일어나 선종은 혼자 말하고 활과 칼을 내어 메고 차고, 병으로 곤하게 자는 스님의 방 앞에 꿇어 엎드려 합창하고,
 
49
『스님! 스님!』
 
50
하고 속으로 두어 번 부를 때에 눈물이 떨어지었다. 선종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스님의 종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스님의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이윽히 듣다가,
 
51
『스님 나는 가요. 부디 왕생 극락(往生極樂)하시어. 나무 아미타불.』
 
52
하고 한번 더 합창하고 다시금 뒤를 보며 암자문을 나섰다.
 
53
크나큰 세달사 즐비한 가람(伽藍)은 으스름한 달빛속에 조는데 법당에 장명등만 반짝반짝 영구한 세상의 어둠을 비친다. 선종은 법당을 향하여 한번 절하고 합창하고 스님의 복을 빌고 절 문을 나왔다. 바람에 몰리는 구름이 달을 향하고 끊임 없이 달아난다.
 
54
선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물가에 나와 거닐었다. 자갯돌 위로 흘러 가는 물은 늦은 가을 빛을 받아 금빛으로 번쩍거리며 여울 여울 소리를 낸다. 달은 바로 댓재(竹嶺)에 걸려 강 건너편에는 산 그림자가 먹빛과 같은데 댓재 중턱에는 양길(梁吉)의 군사가 밤 파수로 피우는 불이 반딧불 모양으로 여기 저기 반짝거린다.
 
55
이따금 돌아 가는 기러기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휘 지나가며 강 언덕에 허옇게 마른 멧갈 포기를 흔들어 우수수 소리를 낸다. 선종의 거니는 발이 지나갈 때마다 벌레 소리가 뚝 끊지고 저편 기헌(箕萱)의 군막(軍幕)에서 늦도록 질탕하게 노니는 풍악 소리가 들린다. 강가로 길게 늘어 선 군사들의 장막에서는 아무 빛도 아무 소리도 아니 나고 이따금 잠 옷 이루어 나와 거니는 군사의 그림자가 어른어른 보일 뿐이다.
 
56
「벌써 여기 온 지 일년이 되었다」
 
57
하고 선종은 기러기 소리에 끌려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하늘에는 잘 자리를 찾지 못한 기러기 한때가 들입 자로 진을 지어 남으로 피곤한 날개를 친다. 달은 더욱 더욱 하늘에 닿은 듯한 댓재 마루터기에 허덕거리며 올라 간다. 이때에 뒤에서,
 
58
『궁예(弓裔)인가?』
 
59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선종은 선종이라는 중의 이름을 버리고 기헌의 휘하에 온 때부터 궁예라는 이름으로 행세를 하였다.
 
60
『아, 자네들인가 ——— 웬일로 아직도 자지 않고 나와 다니나.』
 
61
하고 궁예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들었다. 그 두 사람은 원회(元會)와 신훤(申煊)이다. 원회와 신훤은 지난 봄 상벌 싸움에 궁예가 큰 고을 새운 때부터 궁예를 사모하였다. 더구나 궁예가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의 공을 남에게로 돌리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더욱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 중에는 궁예를 따르려 하는 이가 많고 기헌의 인망이 떨어질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62
『아무리 하여도 큰일은 다 틀렸으니 무슨 끝장을 내어야 아니하겠나?』
 
63
하고 원회가 궁예의 소매를 끌어 사람을 꺼리는 듯이 늙은 버드나무 그늘로 간다.
 
64
『끝장을 어떻게 내나?』
 
65
하고 궁예는 원회와 신훤의 버쩍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원회는 지혜가 많고 신훤은 용맹이 있었다. 두사람은 산중에서 공부도 같이 하였고 이태 전 기헌의 휘하에 올때에도 같이 왔고 주고 살기를 같이 하기로 피를 마시고 서로 맹약힌 사람이다.
 
66
원회는 한번 사방을 돌아 보아 인적이 없음을 살핀 뒤에,
 
67
『자, 이 사람이 아무리 해도 큰일은 못할 사람이 아닌가. 지금도 우리들이 한참이나 이 사람과 다투었지만 그만 주색에 빠지어서 헤어날 줄을 모르네그려. 내일은 양길과 대접전을 할 텐데 밤새도록 저 모양이요, 군사들에게는 소 한 마리 술 한동이 이렇다는 말이 없으니 군사들이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지금군사들 중에는 수군거리는 자도 있는 모양이니 만일 이때에 일을 바로 잡지 아니하면 우리들까지도 이 사람 한가지로 군사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일을 하려면 이 기회에 무슨 끝장을 내어야 한단 말일쎄. 그런데…….』
 
68
하고 운회가 더 말하려는 것을 신훤이 참지 못하는 듯이 가로 막고,
 
69
『여러 말할 것 있나, 그 녀석을 해내고 자네가 우리 두목이 되란 말일쎄. 그 녀석 해내는 것은 내 담당함세. 또 삼천명 군사도 자네라면 다 따를 것이요 또 우리들의 , 말이라면 안 들을 이가 없네. 첫째 그녀석을 두고야 백서의 원망에 견딜 수가 있나. 오늘도 남의 청혼해 놓은 처녀를 빼앗어다가 지금 저 지랄이니 자 어찔 텐가 단마디로 끝장을 내소!』
 
70
하고 궁예의 곁에 바싹 대든다.
 
71
원회·신훤 두 사람이 궁예를 보고 이런 말을 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궁예는 고개를 흔들고,
 
72
『그것은 물의일쎄. 우리가 우리 윗사람에게 불의를 하면 우리 아랫 사람이 우리에게 또 물의를 할 것일쎄. 하니까 우리 힘껏 간하여서 하회를 보세.』
 
73
하고 눌러 왔었다. 그리고 원회와 신훤 두 사람은 틈 있을 때마다 기헌을 간하였다. 그러나 기헌의 하는 일은 점점 더 악하여질 뿐이요, 조금도 고칠 줄을 몰랐다.
 
74
『이 천하에 나를 당할 놈이 있느냐? 있거든 나오너라. 내가 하려면 사흘 안에 서울을 내 손안에 넣을 것이다. 하하.』
 
75
이 모양으로 뽐내기만 하였다. 그러는 동안 한참 오천명이라고 일컫던 군사 중에서 이천명이나 더러는 싸와 죽고 더러는 달아나고 인제는 군사라고 삼천명 밖에 아니 남았다. 양길이 대리고 온 군사 중에는 기헌의 군사이었던 군사가 반이나 되고 그 군사들은 대개 기헌을 원망하는, 무슨 원통한 것을 품은 사람들이다.
 
76
지난 일년 동안에 사오차나 큰 싸움이 있었다. 그때마다 궁예는 목숨을 내놓고 싸와서 큰 공을 세웠다.
 
77
『궁예가 아니더면 이번 싸움에는 함몰을 당할 뻔하였다.』
 
78
하고 모든 군사들도 다 말하였다. 그러나 기헌은 싸움에 이긴 것이 다 자기의 모략과 용기라고만 말하고 궁예와 다른 장졸들에게는 위로하는 말한 마디도 하는 일이 없었다 본래는 그렇지 안히더니 점점 교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별히 궁예에게 대하여서는 일종의 미움을 가지었다.
 
79
그것은 처음에는 몰랐다가 차차 궁예가 활을 잘 쏘고 칼을 잘 쓰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십 육년간 전 수리재 위에서 자기의 활과 칼을 빼앗던 애꾸놈인 것을 알게 된 때문이다. 그는 하루는 조용히 궁예을 불러,
 
80
『자네를 나를 모르나?』
 
81
하고 물었다. 궁예도 그제야 기헌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그 모습이 낯익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윽히 있다가,
 
82
『어렴풋이 생각납니다. 저 수리재서……』
 
83
하고 말을 끊었다. 그때부터 기헌은 궁예를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84
그리고 싸움이 나면 궁예를 항상 선봉으로 내어 보냈다. 첫째는 궁예가 어서 죽기를 바란 것이요, 둘째는 궁예가 싸움에 이기기를 바란 것이다.
 
85
그러나 궁예는 충성으로 기헌을 섬겼다. 궁예는 백의 국선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다.
 
86
『윗사람에게는 수종하라, 아랫 사람을 아끼라. 이것이 병가(兵家)의 첫째가는 요결이니라.』
 
87
하고 백의 국선은 여러 번 선종과 소허를 가르치었다.
 
88
『한번 누구에게 몸을 허하였거든 죽기까지 그에게 충성되라. 오직 만민(萬民)이 도탄(塗炭)에 든 때에만 대의(大義)의 칼을 들지니, 이것은 탕(湯)·무(武)의 일이어니와 저마다 할 바 아니니라.』
 
89
이러한 말도 여러 번 백의 국선에게 들었다. 궁예는 이말도 그대로 실행하려 하였다. 진실로 궁예는 이름만 고친 것이 아니요, ㅁ맘도 고치어지어 선종으로 잇을 때와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선종은 큰 뜻을 품게 된 것이요, 큰 뜻을 이루는데는 백의 국선의 가르침대로 하여야 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선종이 기헌 아래 온 지 일년동안에 사오차나 큰 싸움을 치르고 나서는 자기의 힘이 켤코 남에게 뒤지지 안함을 깨달았고 또 삼전 군사와 댓골 인민의 맘이 자기에게 돌아 온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이 산속 조그마한 골은 궁예에게는 너무 작은 것이었다. 다만 여기서 좀 더 힘을 기르고 자기의 이름을 높여 더 큰일을 도모하려 하였던 것이다.
 
90
이러할 때에 원회와 신훤은 기헌을 없이하고 자기더러 두령이 되라고 조른 것이다.
 
91
셋 함은 여전히 늙은 버드나무 그늘에 걸터 앉았다. 달이 점점 산머리로 기어 내려 올수록 파란 빛이 세 사라마의 검은 갑옷 가슴을 비치고 볕에 그을은 얼굴을 비친다. 발에 흐르는 강물을 더욱 빛을 내고 더욱 소리를 높이는 듯하였다.
 
92
원회와 신훤이 아무리 권하여도 궁예는 오직 인된다는 뜻으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 뿐이었다. 그러나 달빛을 받어 번쩍번쩍하는 궁예의 눈에는 이상하게 강한 광채가 난다.
 
93
이때에 푸르륵하는 소리가 나며 난데 없는 화살한 대가 달빛에 번뜩이며 강을 건너 와 세 사람은 놀라서 고개를 들어 화살이 온 곳을 바라보았다.
 
94
산 그늘에 어두운 강 건너편에서는 마치,
 
95
『내가 쏘았다.』
 
96
하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빨간 등불이 서너 번 흔들리고는 꺼진다.
 
97
원회는 일어나 모래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그것은 칠한 대에 장끼 깃으로 꼬리를 사고 은같이 반짝거리는 날카로운 장끼 깃으로 꼬리를 삼고 은같이 반짝거리는 날카로운 살촉을 일부러 끝을 종이로 싸서 박은 것인데 꼬리에는 편지 한 장이 달렸다. 원회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이 보기를 꺼려 두 사람이 서 있는 버드나무 그늘로 들어 왔다.
 
98
세 사람은 고개를 모으고 달빛에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 피봉에는,
 
99
『弓裔將軍幕下』
 
100
라고 쓰고 속에는,
 
101
『弓裔元會申煊三位將軍鑑』
 
102
이라는 허두로,
 
103
『高白隱聲華隱聞白矣』
 
104
하는 이두체로,
 
105
『높으신 성화는 익히 들었사오되 뵈온 일 없사옴을 한 하오며, 비인(鄙人)이 감히 군사를 일으킴은 기울어진 나라를 안태케 하옵고 도탄에 든 창생을 건지오려 하옵기 밖에는 다른 뜻이 없사온지라. 이제 기헌이 이름을 보국 안민(輔國安民)에 빌어 민생을 학(虐)함이 그칠 바를 알지 못하오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같이 노하는 배라 이에 비인이 천의와 민심을 받아 응징(膺懲)의 군사를 거느려 이곳에 이르렀사옵거니와, 그윽히 생각하옵건대 세 분 장군은 의리가 하늘에 닿고 용맹이 천하를 덮으신지라 한 가지로 큰일을 같이 하기를 바랄지언정 서로 시석지간(矢石之間)에 뵈옵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원컨대 세 분 장군은 비인의 미충(微衷)을 헤아리옵소서. 회음(回音)을 기대(企待)하오며 밝는 날에 존가(尊駕)를 진문(陣門)에서 봉요(奉邀)하올까 하나이다.
 
106
북원 대장군 양길 국궁(北原大將軍梁吉鞠躬) 이라 하였다.
 
107
다 보고 나서 원회와 신훤은 궁예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와서 원회의 손에 들린 양길의 편지는 펄렁 거렸다.
 
108
건너편 어둠 속에서는 또 등불이 서너 번 번쩍거렸다. 그것이 마치 회답 보내는 활을 그리로 향하고 쏘라는 듯 하였다.
 
109
원회는 궁예의 팔을 끌며,
 
110
『자, 어찌할 텐가?』
 
111
하고 대답을 졸랐다.
 
112
『자, 어찌할 텐가? 이 편지를 도로 쏘아 보낼 텐가, 백지 답장을 보낼 텐가?』
 
113
하고 신훤도 곁에서 졸랐다.
 
114
아직도 기헌의 진막에서는 이따금 북소리가 둥둥 울려 온다. 강가에 늘어선 장막들은 비낀 달빛에 비치어 내일 싸움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군사들은 양길과 싸와 이기지 못할 줄을 알므로 싸움 형편을 보아 얼른 항복하여 버리든지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 동료 중에 양길의 군사가 된 군사들은 가끔 행인 편에 기별을 보내어 기헌을 버리고 양길군 앞으로 오라고 권하였다. 내일 싸움은 같지 아니할 것을 군사들도 잘 알므로 도리어 걱정 없이 잠들을 잤다. 궁예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일년 동안 섬기던 기헌을 버리고 양길의 앞으로 달아가는 것이 맘에 심히 괴로왔다.
 
115
『어찌할까?』
 
116
원회와 신훤은 당정에 기헌을 죽이고 삼천 군사를 거느려 양길의 앞으로 가기를 권하였다. 양길은 기헌보다 다섯 갑절이나 되는 땅과 군사를 가지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며 인재를 존중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궁예도 그것을 안다. 그러나 궁예는 여전히 안된다는 뜻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117
『그러면 어찌할 텐가?』
 
118
하고 원회는 성난 듯이 벌떡 일어난다. 신훤도 일어난다. 두 사람의 투구에 은 장식이 번쩍하고 빛을 발한다.
 
119
궁예는 원회의 손에 들었던 양길의 편지를 빼앗아 돌돌 말았다. 원회와 신훤은 이 사람이 어찌하려는고 하고 가만히 보고 있다.
 
120
궁예는,
 
121
『나도 내일 싸움에는 이길 기약이 없는 줄을 아네, 또 기헌이 오래 같이 일 못할 사람인 줄도 아네, 그렇지마는 적장(敵將)의 이간(離間)하는 글발을 보고 제 임금을 버리고 몰래 직장을 따르는 것은 나는 못할 일일쎄.』
 
122
하고 화살 한대를 쑥 떼어 그 끝에 양길의 꼬기꼬기한 편지를 달아 잔뜩 활을 밟아 강 건너 등불 이른거리는곳을 향하여 탕하고 쏘아 버렸다. 살은 푸륵 소리도 내는 듯 마는 듯 달빛에 잠깐 번쩍하고는 어 둠 속애 사라지고 말았다. 궁예가 살 간 곳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 과연 또 등불이 두 번번쩍하고는 하고는 다시 아무 기척이 없었다.
 
123
원회와 신훤은 일변 무안하고 일변 분하여 궁예를 버리고 버들 그늘에서 나섰다. 궁예는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 가는 등을 바라보며,
 
124
『만일 자네가 이 강을 건너 양길에게 간다 하면 나는 이 활로 자네들은 등을 쏠 것일쎄. 자네네가 만일 내친구여든 밝는 아침에 같이 싸워 죽어 의로운 귀신이 되세.』
 
125
하고 껄껄 웃었다.
 
126
두 사람은 멈칫 서서 고개를 한번 돌리고는 가버리고 말았다.
 
127
이튿날 평명에 기헌의 진중에서는 싸움을 재촉하는 뜽 나팔 소리와 징 북 소리가 울었다 아직 만데 . 사람이 자세히 보이지 아니하고 하늘에는 숨다 남은 별이 여기 저기 반짝반짝할 때에 군사들은 일어나 밥을 먹고 창을 들고 활을 메고 열을 지어 나섰다.
 
128
기헌은 찬란한 도독(都督)의 복색에 황금으로 집에 쌍룡을 아로새긴 긴 칼을 차고 은 굴레 백달마에 높이 앉아 반열 지어 늘어선 삼천 군사를 한번 돌아 보고,
 
129
『오늘 싸움에 이기면 북원(北原)은 우리 것이요, 북원의 금 은 보배는 다 너희 것이다.』
 
130
하고 군사들을 장려하였다. 기헌이 말 위에 앉은 풍채는 과연 당당하여 영웅 호걸의 풍채가 있어서 기헌의 말이 앞으로 지나갈 때에는 군사들의 고개가 자연 숙였다.
 
131
그러나 오늘 싸움에 좌익장(左翼將)이 될 원회와 우익장(右翼將)이 될 신훤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두루 찾아도 나오지 아니하며 기헌은 크게 노하여,
 
132
『누구나 원회·신훤 두 놈을 잡는 자면 양길을 잡는 자와 같이 크게 상을 주리라.』
 
133
하고 영을 내렸다.
 
134
군사들은 원회와 신훤이 없어진 것을 보고 기운이 떨어지었다. 그러나 궁예의 말 탄 모양이 보일 때에 풀렸던 다리에 힘이 오르는 듯하였다.
 
135
궁예의 맘은 괴로왔다. 일생에 큰 뜻이 오늘 하루 싸움에 물거품같이 스러지는 듯하여 슬펐다. 그러나 나가 싸우자, 싸와서 양길을 잡거니 못하거든 죽자 하고 궁예의 뜻은 굳게 정하였다. 원회와 신훤을 잡으라는 영을 내린 기헌은 자못 낙담이 되었다. 삼천 군사가 다 자기를 배반하더라도 원회·신훤은 자기와 사생을 같이 하기로 믿었던 것이다.
 
136
그랬더니 도리어 자기가 믿지 않고 미워하던 궁예는 끝까지 남아 있고 믿던 두 사람이 달아 나는 것을 볼 때에 기헌은 감개 무량하였다. 기헌은 앞이 아뜩아뜩함을 깨달았다.
 
137
『궁예 자네만 믿네.』
 
138
하는 기헌의 목소리는 떨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139
궁예는 눈을 들어 기원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어제까지 보이던 교만 무례한 빛도 다 없어지고 그 패기 있던 눈에는 궁예의 맘을 깊이 감동시켰다.
 
140
이때에 강 건너 편에는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오고 아침 안개가 바람결에 잠깐 걷힐 때마다 잎 떨어진 나무 숲 사이로 거뭇거뭇 사람들이 뛰아 내려 오는 모양이 보인다. 이편에서도 북을 울리고 군사를 몰아 물을 건너게 하였다. 살이 한 대 두 대 이 편에 와 떨어지어 말이 놀래어 앞발을 들고, 이편 살도 푸륵푸륵 저편을 향하고 날아 갔다. 싸움은 열린 것이다.
 
141
군사들은 기운차게 허리까지나 오라 오는 물을 절벅절벅 건너고 말들도 고개를 번쩍 들고 물바래를 쳤다. 군사들이 물을 건너는 동안에도 저편 화살이 푸륵푸륵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지나가고 물에도 떨어졌다. 찬물에 아랫도리가 젖고 화살 소리가 푸륵거리는 것이 들리매, 군사들의 맘에는 싸우고 싶은 기운이 발하였다.
 
142
양길은 천명쯤 되는 군사를 데리고 본진에 머물러 있어서 높게 지어 놓은 망대 위에서 바라본다. 저편에서는 망대를 향하고 활을 쏘는 모양이나 아직 살은 거기까지 미치지 아니하였다. 커단 북을 가죽이 터져라 하고 두드리니 새벽 안개 끼인 산천이 덜덜 떨려 운다. 기헌의 군사가 불을 거의 다 건넌 때에 매부리라는 봉우리에는 아침 해의 붉은 빛이 피를 묻힌 듯이 비치이고 골짜기에 끼인 안개가 뭉글뭉글 용솟음치기 시작하였다.
 
143
양길의 군사 있는 편에는 안개가 더욱 깊어 보이고 그 안개가 매부리에 비치인 햇빛을 받아 철색이다가 연빛이 다가 은빛이다가 자주빛이다가 금빛으로 변하고 뭉게 뭉게 피어 오르는 안개 봉우리가 어떤 것은 불길이 타오르는 듯이 환하였다. 기헌의 군사들은 그것을 바라보고, 「와!」하고 함성을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144
맨 앞에서 말을 달리는 궁예의 투구와 갑옷 뒷장식에 햇빛이 번득거려 불 같은 빛을 발할 때에 군사들은 또, 「와!」하고 함성을 지르고 궁예의 뒤를 따랐다. 밤 이슬에 젖은 땅에서는 먼지 하나 일이지 아니하고 다만 마른 풀과 늦게 핀 흰 국화 송이들이 말 발굽에 놀래어 고개를 흔들었다.
 
145
궁예는 샛강(아까 건너 온 데보다는 좀 작은 강이다)언덕에 발을 세웠다.
 
146
거기는 굼틀굼틀 물결같이 된 사람의 키 하나만한 긴 언덕이 있었다.
 
147
궁예를 따르는 군사들은 이 언덕에 몸을 감추고 매복하였다.
 
148
양길 편의 불소리가 더욱 가까와지고 화살 푸륵거리는 소리가 더욱 많아진다. 불붙은 안개 속으로서는 점점 화살이 수없이 이편을 향하고 날아 온다. 궁예가 몸을 기울여 피한 살 하나가 바로 궁예 뒤에 섰던 군사의 가슴을 뚫고 꼬리를 떨었다. 그 군사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내어 뿜을 때에 군사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활을 당기었다. 이편에서 쏘는 살은 깃단 꼬리를 떨며 저편 안개 속으로 들어 가 스러졌다. 「툭」하고 활줄 튀기는 소리 푸르륵하고 살 나가는 소리, 살에 놀래어 말 우는 소리가 여울 여울 흘러 가는 강물 소리와 어우러져 처량한 광경을 이룬다.
 
149
붉은 해가 산머리에서 갑자기 뛰어 올랐다. 천지는 갑자기 환하여지고 댓재 골목골목에 뭉글거리던 안개들도 점점 스러지기를 시작하여 숨었던 작은 봉우리도 고개를 내어 놓고 잎 떨린 나무들도 우뚝 나서게 되었다.
 
150
이따금 안개가 휘 지나가면 불그레한 땅에 까만 군사들이 미리로 향하고 움직이는 양이 보였다. 그러할 때에는 일제히 그리로 향하고 화살을 몰아 넣었다. 그러나 그담에 안개가 터진 때에는 그 곳에는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군사들은 활에 살을 메어 든 채로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건너편에 안개가 터지어 사람들의 모양이 번쩍 보이기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번뜻 보일 때에는 「툭」「씨르륵」하고 이천 활이; 일제히 운다.
 
151
해는 높이 올라 와서 군사들은 이마에는 구슬 땀이 맺히었다. 공중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지나가건마는 땅위에는 아직도 더운 김이 남은 듯하였다.
 
152
양길과 궁예는 여러 가지 진형을 바꾸었다. 그러할 때마다 군사들은 물결과 같은 혹은 오른편으로 혹은 왼편으로 우르르 밀렸다. 그리고 나서는 또 한바탕 화살 소리가 쏟아지고 많은 군사들은 혹은 가슴에서 혹은 이마에서 핏줄기를 뿜고 넘어졌다. 넘어진 지 오랜 군사의 송장에는 벌써 개미가 까맣게 붙었다.
 
153
그러나 살아 있는 군사들은 그것을 돌아 볼 새가 없고 오직 저편에 번득거리는 적군의 가슴을 겨누기에만 바빴다.
 
154
궁예는 이 모양만으로 싸움 끝나기 어려운 줄을 깨달았다. 애초에 궁예의 생각에는 양길의 군사가 밀어 들어 오도록 유인하여 샛강과 큰강 새 벌판에 몰아 넣고 싸우려는 계책였으나 양길은 군사들은 나무 사이에 숨겨 놓고 용이하게 움직이지 아니하여 도리어 성급한 궁예를 산 밑으로 끌어 들인 뒤에 좌우 복병으로 일시에 엄살하려는 계책이었었다. 더구나 궁예의 군략을 잘 아는 원희와 신훤은 결코 군사를 벌판으로 내몰지 말기를 양길에게 말하였다.
 
155
『군사가 벌판에만 나가면 궁예 혼잣손에 다 죽어 버리오.』
 
156
원희는 이렇게 양길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양길은 군사를 몇 십 걸음 앞으로 내몰았다가는 다시 징을 치어 뒤로 물리고 이리하여 궁예의 분통을 간지렸다. 궁예는 맟ㅁ내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손에 빼었던 칼이 피에 목마른 듯하고 탄 말은 앞발을 들고 길게 울었다. 궁예는 작의 칼이 족히 양길의 군사를 대적하여 소리개가 병아리 떼를 쫓듯이 대번에 대재로 넘겨 쫓고 그 바람으로 뒷벌(北原)깢 무인지경 같이 들이칠 것 같았다. 궁예의 눈앞에는 자기의 칼 바람에 쫓기는 병아리 떼 같은 양길의 군사들이 발이 땅에 붙지 못하고 달아나는 양이 보인다.
 
157
다른 군사들도 양길의 군사가 고양이 무서워하는 쥐 모양으로 들락날락하기만 하고 기운차게 대들지 못하는 것을 볼 때에 애초에 집어 먹었던 겁도 다 없어지고 도리어 자기 하나가 저편 열을 당할 듯싶었다.
 
158
『뒷벌에 있는 금은 보화는 다 너희들의 것이다!』
 
159
하던 기헌 장군의 말을 생각하고 그들도 궁예와 같은 맘을 가진다.
 
160
이때에 양길의 진중에서는 소와 돼지를 잡는 소리가 들려 오고, 또 낮밥을 짓는 연기가 나무 사이로 한가롭게 올라 간다. 군사들의 눈앞에는 김나는 밥과 냄새 좋은 고깃국과 등이 동이 넘치는 술이 번뜻 보이고 입에 침이 돈다. 저편의 밥 짓는 연기는 더욱 많이 뭉게 뭉게 올라 간다.
 
161
양길의 군사는 길다란 줄을 지어 이편을 향하고 고함을 치며 달려 들어 온다. 이편에서는 일제히 그 군사를 향하고 활을 쏘았다. 저편을 향하고 날아가는 화살의 떼는 마치 수없는 귀뚜라미 떼와 같이 햇빛을 가리었다.
 
162
그때에 저편에서는 다시 큰 고함 소리가 나고는 뽀얀 안개를 일으키고 군사들은 도로 물러 들어 갔다.
 
163
궁예는 칼을 머리 위에 높이 들었다. 칼날에는 햇빛이 비치어 서너 줄기 무지개 날 때에 나아가라는 영기(令旗)가 여기저기서 풀렁거리고 백여 개 큰북이 일시에 쾅쾅 울었다. 궁예의 말이 물바래를 치고 샛강을 건너 갈 때 울었다. 궁예의 말이 물바래를 치고 샛강을 건너 갈 때에 군사들도 절벅절벅하고 물에 들어 섰다.
 
164
궁예의 군사들도 연기 나는 양길의 진중을 향하여 달려 간다. 세 걸음에 한번씩 네 걸음에 한번씩 활을 쏘며 물결같이 몰려 들어 간다. 창검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군사가 지나간 뒤에는 먼지 구름이 높이 피어 롤라 마치 회리바람 지나가는 자취와 같다.
 
165
양길 편의 화살은 소나기 모양으로 쏟아졌다. 군사들은 붉은 피를 뿜고 번뜻 번뜻 나자빠지나 그것을 돌아 볼새도 없어서 군사들이 저 앞에 까맣게 나아간 뒤에 빈 발판에 쓰러진 군사들이 팔다라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마지막 괴로움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두둥둥 북소리가 나고는, 「와 으아!」하는 무서운 소리가 난다. 군사들의 눈에는 사도 없고, 들도 없는 듯하였고 오직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과 밥과 동이 동이 철철 넘는 술과 이기는 기쁨이 보일 뿐이었다.
 
166
궁예의 군사가 양길의 진에 가까이 오매, 양길의 군사도 활을 버리고 칼과 창만 가지고 달려 나왔다. 이 나무 숲에서 한떼, 저 나무숲에서 한떼, 왼편으로 한떼, 오른편으로 한떼, 미처 눈코를 뜰 새가 없이 벌떼같이 달려 나왔다. 양진의 북은 일제히 울고 깃발을 일제히 흔들었다. 두 편 군사는 서로 찌르고 찔리고 결코 틀고 무서운 단병 접전을 하였다. 경각간에 죽은 사, 상한 자가 너저분히 마른 풀 위에 깔렸다.
 
167
양길의 군사는 궁예를 피하여 궁예 없는 데로만 도망해 다니며 싸왔다.
 
168
그러나 동으로 궁예를 피하면 동에 궁예가 있고, 서로 궁예를 피하면 서에 궁예가 있었다. 흰 무지개 푸른 무지개 번뜻거리는 곳에는 모두 궁예가 있다. 칼을 들어 궁예를 치려고 하면 벌써 궁예는 없어지고 흰 무지개 푸른 무지개와 같은 궁예가 두르는 칼빛 뿐이었다. 두르는 칼빛이 궁예의 몸을 싸서 실촉 하나 들어 가 박힐 곳이 없는 듯하였다.
 
169
양길은 숲속에서 가만히 양편 군사가 싸우는 양과 궁예의 재주를 엿보고 있다. 곁에 섰는 사람들을 보고,
 
170
『과연 명장이다!』
 
171
하고 수없이 칭찬하였다.
 
172
궁예가 이리로 치고 저리로 달리고 하는 바람에 양길의 군사는 소리개에게 쫓긴 병아리 떼 모양으로 이리로 몰리고 저리로 몰리어 조그마한 몸뚱이 하나 감출 곳을 못 찾는 듯하였다.
 
173
마침내 양길의 군사는 쫓기기를 시작하였다. 창을 던지고 칼을 던지고 나무 뿌리 돌 뿌리 거더채여 엎더지며 자빠지며 도망을 하고, 궁예의 군사는 더욱 기를 내어 소리를 지르고 따라 간다. 쫓겨 가던 양길의 군사가 나무 틈에 숨어서 쏘는 살이 가끔 궁예의 군중에 떨어지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그것도 없어지고 양길의 군사는 숲속과 골짜기 속으로 들어 가 없어지고 말았다.
 
174
궁예는 더 따라 가는 것이 옳지 못한 줄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군사를 거두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벌써 양길의 진 쳤던 자리에 지어 놓은 국과 밥을 먹기에 겨를이 없고 동이와 독에 담긴 술을 냉수 마시듯 굴떡굴떡 마시고 있었다.
 
175
숲속으로서 가끔 양길의 군사의 쏘는 살이 날아 오건마는 먹고 마시기에 바쁜 군사들은 몸을 비틀비틀하고 살을 피할 뿐이요, 활을 들어 마주 쏠 생각도 아니하였다. 어떤 군사는 입에 밥과 고기를 한입 잔뜩 물고 씹으면서 살에 맞아 죽고, 어떤 군사는 사발에 듬뿍 담은 술을 반쯤 마시다가 거꾸러졌다.
 
176
궁예는 하릴없이 병아리 떼를 지키는 큰닭 모양으로 먼 발치에 말을 세우고 양길의 군사가 도로 스치어 내려을 것을 조심하였다. 그러나 양길의 군사가 도로 몰아 오는 형적은 없고 잠깐 싸움이 끝난 틈을 타서 놀라서 피난하였던 새들이 하나씩 둘씩 나뭇 가지로 돌아 오고 풀속에서도 잠자코 숨어 있던 벌레들이 조심조심 울기를 시작한다.
 
177
어떤 군사는 한손에 밥 바가지를 들고 한손에 술 뚝배기를 들고 비틀 걸음으로 창 맞어 칼 맞아 넘어진 군사들 틈으로 돌아 다니며 아직 목숨이 불어 있는 친구를 찾아,
 
178
『먹어라 먹어!』
 
179
하고 밥과 술을 권한다. 한두 모금을 마시는 이도 있고, 먹고 싶은 듯이 고개만 들먹들먹하다가 도로 쓰러지는 이도 있다. 죽노라고 끙끙하는 소리도 승전과 주식의 기쁨에 떠드는 소리에 들릴락말락한다.
 
180
그러나 군사들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숲속에서는, 「와!」하는 소리가 나고 수없는 북을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 가지에 앉았던 새들은 다시 놀라서 갈 곳을 몰라 헤매고 벌레들도 소리를 그치었다.
 
181
궁예는 군사를 시켜 기를 두르고 북을 울렸다. 취해 놀던 군사들도 칼과 활을 들고 일어났으나 비틀비틀 몸을 거두지 모하였다.
 
182
순식간에 무서운 다병 접전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즐겁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던 자리는 벌겋게 피로 젖었다. 밥가마·국솥·술동이를 들어 적군을 향하고 내어 던지면 그것이 혹은 칼 끝에 혹은 창 끝에 맞아 요란한 소리를 내고 땅에 떨어지어 깨어지고 그중에 어떤 군사는 끓는 국을 뒤집어 쓰고 거꾸러졌다.
 
183
창보다도 칼보다도 궁예의 군사를 이롭게 한 것은 돌팔매다. 여기저기 붉은 점 박힌 도낏날 같은 차돌은 날아 오는 대로 군사의 골을 바수고 양미간을 뚫고 코를 떼었다.
 
184
찌르고 찍고 엎더지고 자빠지고 무서운 소리를 지르고 서로 붙들고 결코 틀고 사오던 술 취한 궁예의 군사는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지고 두르는 칼과 창이 모두 헛손질 되기가 쉬웠다.
 
185
마침내 궁예 편 군사는 뛰기를 시작하였다. 열병 앓는 사람 모양으로 겅둥겅둥 몇 십 걸음은 뛰다가는 따라 가는 양길의 군사에게 붙들려 소리도 없이 픽픽 쓰러지었다. 넓은 벌판에는 창을 끌고 칼을 뒤로 두르며 달아나는 궁예의 군사로 뒤덮인 듯하였다. 구름 같은 먼지 속에 가끔 불길 모양으로 번쩍번쩍하는 것은 양길의 군사의 두르는 칼과 그 칼에 맞아 내뿜는 기헌의 군사의 피다.
 
186
오직 궁예만이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피흐르는 칼 하나로 사방으로 에워 싸는 수백 명 군사를 대적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사방에 보이는 것이 오직 양길의 군사 뿐이요, 자기의 군사는 그림자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187
『항복할까, 도망할까, 죽을까?』
 
188
하고 궁예는 잠깐 주저하였다.
 
189
『응, 싸워서 죽자.』
 
190
하고 손에는 다시 칼을 들어 소나기같이 쏟아지는 살을 막으며 양길의 군사 속으로 스치어 들어 갔다.
 
191
그러나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던 양길의 화살에 궁예의 말은 가슴을 맞아 한번 높이 뛰고 땅에 거꾸러졌다. 궁예는 곧 땅에서 뛰어 일어나 칼을 바로 잡았으나 왼편다리가 삐어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하여 얼마를 싸우다가 궁예는 그만 땅에 거꾸러지어 일어나지 못하고 오직 눈만 부릅떠 양길의 군사들을 노려 보았다. 양길의 군사들은 땅에 엎더진 궁예가 무서워 감히 가까이 들어 오지를 못하였다. 곁에 거꾸러진 궁예의 말은 괴로운 듯이 입으로 땅을 파고 기운 없이 발을 버둥거리더니 그 고개를 번쩍 들어 불 같은 눈으로 궁예를 한번 바라보고는 머리로 한번 땅을 치고는 죽어 버린다.
 
192
궁예는 죽는 말을 보고 손에 든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보고 그러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궁예의 가슴 속에는 패전의 부끄러움과 일생의 큰 뜻이 물거품이 된 슬픔과 분함이 불길같이 타올랐다. 궁예는 자기 손에 든 칼로 자기의 목을 베려고 몸을 움직거렸다.
 
193
그러나 지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왼편 다리가 분지러지는 듯하고 전신이 아뜩하여 칼 든 찰을 바로 끌어 올 수가 없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양길의 군사 중에 기운차게 생긴 놈 하나가 달려들어 손에 들었던 쇠방망이로 궁예의 머리를 때렸다. 딱하는 소리와 아울러 궁예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194
이때에 기헌(箕萱)은 망대에 올라 서 자기는 군사가 양길 편 군사를 따라 들어 가는 양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술을 부으라 하여 마시고, 이번에는 궁예가 승전을 하면 궁예로 장군을 삼는다고 말하고 원희와 신훤의 목을 잘라 오거든 높이 달아 모든 군사로 징계한다 하여 큰말뚝 두 개를 높은 위에 세우게 하였다.
 
195
그리고는 한 손을 들어 벌을 가리고 서쪽만 바라보며 이제나 저제나 승전하였다는 기별을 가진 군사가 쌍쌍이 말을 달려 오기만 기다렸다.
 
196
그러나 기별 가진 군사는 오지 아니하고 흉물스러운 까마귀 떼만 망대 곁에 있는 느릅나무 가지에서 까옥까옥하였다.
 
197
『에그머니 까마귀가 왜 울어.』
 
198
하고 기헌이 가장 사랑하는 첩 돌넷집이 양미간을 찡기었다.
 
199
기헌도 그 까마귀 소리가 심히 듣기 싫었다. 마치 그 소리가 가슴 속에까지 울려 들어 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기헌은 돌넷집을 보고 웃으며,
 
200
『응 원희놈의 모가지를 뜯어 먹으려고 그리는 게지.』
 
201
하였다.
 
202
돌넷집은 기헌이 웃는 빛을 보고 자기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돌넷집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203
까마귀는 더욱 까옥거린다. 서편에는 무서운 단병 접전이 일어나는 듯하여 먼지 구름이 떠오르고 재우치는 북소리가 멀리 둥둥 울려 온다.
 
204
군사들은 모두 높은 데 올라 고개를 늘여서 바라보았다.
 
205
『다시 싸움이 일었는데.』
 
206
『저 먼지가 로 가까와지지 않나?』
 
207
하고 군사들은 손길을 이마에 대어 별을 가리고 숨소리도 없이 노랗게 일어나는 먼지 구름을 바라보았다. 가끔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일 때에 그것은 칼빛 창빛인 듯하였다.
 
208
백성들은 몰래 부녀들과 아이들을 성 밖으로 피난시키고 가끔 와서 동정만 살폈다.
 
209
만일 이편이 쫓겨 오는 눈치만 보이면 들고 뛰자는 것이다. 기헌은 군사를 시켜 골목 골목 파수를 보게 하고 피난 가거나 도망 가는 백성은 죽인다고 위협을 하였다.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고 젖을 먹이면서 밖에서 바싹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랐다. 그럴 때마다 젖먹이가 놀래이 울면 어머니는 손이나 젖으로 우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성내는 조용하다.
 
210
『아이 저놈의 까마귀가.』
 
211
하고 돌넷집은 한번 더 까마귀들이 모여 앉은 느릅나무 가지를 쳐다보았다.
 
212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있지를 못하고 공연히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흉한 소리를 내면 까마귀들이 운다.
 
213
기헌은 마침내 활을 당기어 퉁하고 까마귀 앉은 자리를 향하고 쏘았다.
 
214
그 화살에 까마귀 하나가 맞아 너풀너풀하고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것을 볼 때에 기헌은 얼굴을 찌푸리고 돌넷집은 진저리를 쳤다. 다른 까마귀들은 놀래어 다 달아나 버렸다.
 
215
『암만해도 저 먼지가 가까와지는 걸.』
 
216
하고 바라보던 군사들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헌도 점점 몸을 이리저리로 움직이고 여러 번 손으로 눈을 비비었다. 역시 먼지 구름은 점점 이쪽으로 가까이 들리는 듯하였다. 기헌은 낯빛이 자주 변하는 것을 보고 돌넷집은 해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었다.
 
217
기헌은 마침내 발로 망대 마루를 한번 구르고 기를 들어 남아 있던 군사들에게 싸움 준비를 명하였다. 북소리와 똥나팔 소리가 울리며 백성들은 서로 마주 보고 말이 없었다. 군사들은 말과 창검을 들고 나섰다.
 
218
서쪽에 보이던 먼지 구름은 점점 가까와져서 저기 수없는 무지갯발이 보이지 것은 분명 군사들이 샛강을 건너는 표다.
 
219
기헌은 칼끈을 한번 졸라 매고 말을 대령하라 하였다. 돌넷집은 망대에 사내려 가려는 기헌의 손에 매어 달려서 울었다.
 
220
『왜 울어!』
 
221
하고 기헌은 돌넷집을 뿌리쳤다. 돌넷집은 마룻 바닥에 쓰러지었다가 다시 무르팍 절음으로 기헌의 갑옷 자락에 매어 달려,
 
222
『나는 어찌하오? 나가지 마오!』
 
223
하고 끌었다.
 
224
기헌은 잠깐 달아 보고 멈칫하더니 허리에 찼던 칼을 빼어 울고 매어달린 돌넷집의 하얗고 가느란 목을 찍어 버렸다. 돌넷집의 목에서 내뿜는 피는 기헌의 온 몸을 적시고 기헌의 갑옷 자락을 잡았던 돌넷집의 손은 기운 없이 스르르 풀리었다.
 
225
기헌은 군사더러 강을 건너 마주 나가 싸우라는 영을 내리고 자기의 군막(軍幕)에 들어 갔다. 그 속에 십여 명 젊고 아름다운 처첩과 젖먹이 어린애 사오인이 입술이 파랗게 떨고 있다가 피묻은 기헌이 뛰어 들어오는 양을 보고 모두 정신을 잃고 일어섰다.
 
226
기헌은 여러 처첩들과 어린것들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227
『너희들은 다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잘 살아라.』
 
228
하고 피묻은 칼을 던지고 덥적덥적 기는 어린 아이를 한팔에 하나씩 안고 이윽히 물끄러미 들여다 본 뒤에 아이들은 다시 내려 놓고 땅바닥에 버렸던 칼을 집어 들고 뛰어 나왔다.
 
229
군사들은 강가에 늘어 섰다. 그러나 아무도 물을 건느려는 생각은 없었다. 기헌은 평생에 사랑하는 백달마에 높이 앉아 「나를 따르라」하고 칼을 비껴 들고 말을 몰아 물을 건넜다. 기헌의 뒤를 따라 몇 백명 군사도 물에 들어 갔으나 다른 군사들이 따라 오지 않는 것을 보고 물 속에서 머뭇머뭇하였다.
 
230
기헌은 몇 걸음 달려 나가다가 뒤에 아무도 따름이 없는 것을 보고 말머리를 돌려 다시 강 언덕으로 달려 다시 강 너덕으로 달려 왔다.
 
231
군사들은 기헌이 달려 오는 것을 보고 뒤물러가 버린다. 기헌은 강 언덕에 말을 세우고 몇 마디 외치는 모양이었으나 사람과 말이 물 속에서 절벅거리는 소리에 잘들리지도 아니하였다. 그러하는 동안에 「아!」하고 고함 소리와 함께 화살이 소나기같이 기헌을 싸고 떨어지고 더러는 도망해 달아나는 기헌의 군사의 등에 꽂히었다.
 
232
기헌은 다시 말머리를 돌려 구름같이 밀려 오는 양길의 군사 속으로 달려갔다. 기헌의 백달마는 네 굽을 높이 솟아 소리를 치고 달려 갈 때에 네 구름 기둥을 일으키고 공중으로 솟아 오르는 듯하였다. 이 서슬에 몰려오던 기헌의 군사들은 다시 돌아 서서 양길의 군사 편을 향하고 싸왔다. 그러나 반남아 죽고 반남아 상하고 반남아 술취한 패군지졸은 저마다 제 몸 하나도 잘 거두지 못하고 얼빠진 사람들 모양으로 비틀거리고 껑둥거릴 뿐이었다.
 
233
기헌은 쾌하여 쫓겨 오는 자기의 군사의 꼴을 볼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그래도 옛정을 못 잊어 자기를 보고 발꿈치를 돌려 다시 싸와주는 것만이 눈물이 나도록 가상하였다.
 
234
『궁예, 궁예, 궁예!』
 
235
하고 기헌은 불렀다.
 
236
『죽었소.』
 
237
하고 어떤 군사가 대답하였다.
 
238
『궁예가 죽었어?』
 
239
하고 기헌은 앞이 캄캄하여지는 듯하였다.
 
240
기헌은 양길의 군사 아파에 말을 세우고,
 
241
『나는 죽주 장군(竹州將軍) 기헌이다. 너희 두목(頭目) 양길과 자웅을 결단할 터이니 양길이 나오너라!』
 
242
하고 소리를 질렀다.
 
243
기헌의 위풍에 양길의 군사들도 멈칫하였다. 저 뒤에 따라 오던 양길은 좌우가 만류하는 것도 아니 듣고,
 
244
『아무리 대적이기로 장군을 대하는 예의가 그렇지 아니하다. 내 몸소 나아가 기헌과 자웅을 결단할 터이니 너희는 보고만 있으되 내가 싸와 죽기 전에는 아무도 나를 돕지 말라.』
 
245
고 분부하고 쇠를 쳐서 군사들을 수십 보 뒤로 물린 뒤에 양길은 검은 말 위에 높이 앉아 단기(單騎)로 기헌을 향하고 나와,
 
246
『내가 북원 장군(北原將軍) 양길이다. 나라이 어지러우매 너 같은 좀도둑이 험한 것을 믿고 이곳에 웅거하여 백성을 도탄에 들게 하니 네 죄를 네가 알 것이라. 내 싸울 일을 즐겨 아니하고 또 너 같은 좀도독과 겨루기를 부끄러워하거니와 , 창생을 위하여 너를 잡으러 온 것이니 네 만일 네 죄를 뉘우치고 곧 말을 내려 항복하면 네 목숨을 보전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거든 곧 나와 내 칼을 받으라. 나의 칼이 불의에게는 용서함이 없나니라.』
 
247
하였다.
 
248
양길의 말에 기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을 채쳐 양길을 향하고 달려 돌며,
 
249
『요놈 좀도독놈이 어른을 몰라 보고……간계를 써서 원희와 신훤을 꾀어 가고…… 요놈 좀도둑놈아! 내 이미 네 모가지를 높이 달아 후세를 징계할 양으로 높은 말뚝까지 박아 놓는다. 어서 목을 늘여 내 칼을 받아라.』
 
250
하고 칼을 들어 양길을 엄습하였다.
 
251
이리하여 기헌과 양길은 어우러져 싸왔다. 양길의 군사도 가만히 서서 보고 기헌의 군사도 겨우 숨을 태우고 정신을 수습하여 기헌은 항상 양길을 엄습하고 양길은 항상 기헌을 피하였다. 가끔 비호같이 달려드는 기헌의 칼날이 양길의 몸에 닿는 듯 닿은 듯하였으나 양길은 날래게 그것을 피하였다. 마치 양길은,
 
252
『어디 네 칼이 몸에 닿나 보자, 그래야 너만 골을 껄.』
 
253
하는 듯하였다.
 
254
이 모양으로 양길이 기헌의 칼 밑으로 쏙쏙 빠져 달아날 때마다 기헌은 더욱 화를 내어 빠르게 양길을 엄습하였다. 그러나 기헌이 아무리 빠르게 엄습을 하여도 양길은 그만큼 빠르게 몸을 피하였다. 두 말은 두 장수를 등에 실고 가로 세로 쫓으락 쫓기락 네 굽을 모아 뛰었다. 보고 있는 양편 군사들이 두 주먹에 찬 땀을 한줌씩 쥐고 숨소리도 없이 서 있다.
 
255
어젯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오늘 슬픈 일을 많이 당한 기헌은 점점 피곤함을 깨달았다. 기헌이 쓰는 칼이 점점 방향을 그르치게 될 때에 기헌은 스스로 놀라서 정신을 차리려 하였다. 이 눈치를 본 양길은 더욱 말을 멀리로 달려 기헌을 괴롭게만 하였다.
 
256
『요놈 이번에도!』
 
257
하고 기헌은 양길의 뒷덜미를 향하고 힘껏 칼을 내리 쳤다. 기헌의 칼이 양길의 목에 내려 닿는 서슬에 양길의 목덜미에서는 두 줄 번개가 번쩍하며 딱 소리와 함께 눈이 부신 불꽃 날았다. 모든 군사들은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양길은 칼이 목덜미에 내려 오는 기헌의 칼을 마주쳐 물리친 것이다. 기헌은 양길의 재주와 힘에 놀라 맘에 겁이 생길 때에 눈앞이 아뜩하였다. 양길은 말을 달려 수십 보를 물러나가서,
 
258
『항복하라!』
 
259
하고 태연히 기헌을 향하고 웃었다.
 
260
「항복하라」하는 말도 분하거니와, 양길의 태연하게 웃는 태도가 더욱 기헌의 분통에 불을 질렀다.
 
261
기헌도 잠시 말을 세우고,
 
262
『요놈! 좀도둑놈! 겁이 나거든 항복하라, 이번에는 바로 네 산멱을 끊으리라.』
 
263
하고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웃을 때에 기헌의 너슬너슬한 수염이 움직이고 움쓱 들어 간 눈에서는 불빛이 났다. 한바탕 웃고 나서 기헌은 새 기운이 남을 깨닫고 이번에야말로 대번에 조마귀만한 양길을 칼끝에 반짝 꿰어 들 듯하였다.
 
264
『내 너를 어여삐 여겨 살 길을 주었는데 고마운 줄을 모르고 대드니 진실로 어리석은 놈이로다. 그렇진댄 네 내 칼의 드는 맛을 보라.』
 
265
하고 이번에는 양길이 먼저 기헌을 엄습하였다.
 
266
이번에는 양길은 기헌의 칼을 피하려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기헌을 엄습하였다. 양길은 마치 몸에 날개가 있어 나는 듯이 기헌을 싸고 돌아 보이는 것이 오직 양길뿐이요, 기헌은 간 곳이 없는 듯하였다. 기헌은 자기가 양길의 칼빛에 싸인 것을 볼 때에 무서움과 분함으로 온 몸에 터럭이 모두 일어났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눈앞에 양길이 그림자가 번뜻 할 틈을 타서 칼을 쳤으나 그 칼날은 오직 바람을 벨 뿐이다.
 
267
「이번에야」하고 이러하기를 몇 번 하였건마는 양길의 몸은 마치 바하고 이러하기를 몇 번 하였건마는 양길의 몸은 마치 바람으로 된 듯하여 기헌의 칼날을 받지 아니하였다.
 
268
기헌은 더욱 맘이 초조하여 함부로 칼을 두르고 좌충우돌하였다. 가끔 딱하고 벼락 치는 리가 난다. 그러할 때마다 두편 군사는 손에 땀을 부쩍부쩍 쥔다.
 
269
마침내 기헌은 자기의 팔과 칼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깨닫고 도망할 틈을 찾았다. 그러나 사방이 모두 양길의 칼빛이요, 몸 하나 빠져 달아날 틈이 없었다. 기헌은 마지막으로 힘과 정신을 모아 눈을 딱 부릅뜨고 양길의 모양이 앞에 번뜻하기를 기다렸다. 첫번은 그대로 놓치고, 둘쨋번도 그대로 놓치고, 세쨋번에 기헌은 머리 위에 눈이 들었던 칼로 눈앞에 번쩍 지나가는 양길을 쳤다. 그러나 칼은 이번에도 바람을 찢고, 양길의 껄껄 웃는 소리와 함께 기헌은 정신이 아뜩하여 말에서 떨어지고 빈말만 제멋대로 몇 바퀴를 뛰어 돌다가 슬슬 저편으로 꼬리를 치고 걸어간다.
 
270
기헌이 땅에 떨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양길도 말에서 내려 기헌의 곁으로 가까이 걸어 갔다. 기헌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더니 앞에 섰는 양길을 보고,
 
271
『양길아, 네 재주가 용하다. 내가 오늘 싸와 네게 졌다.』
 
272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입으로 피을 뽑으며 칼을 내어 던지고 다시 쓰러진다.
 
273
양길도 칼을 도로 꽂고,
 
274
『모두 다 한바탕 꿈일쎄. 자네가 진 것도 꿈이요, 내가 이긴 것도 꿈일세. 이제부터 백년 후면 자네가 내나 모두 한줌 흙이 아닌가. 허허허.』
 
275
하고 웃는다.
 
276
기헌의 맘속에는 돌넷집과 어린것들과 또 자기를 배난하고 달아난 원희·신훤의 모양이 보이어 슬픔과 분함이 복받쳐 올랐으나 양길이 웃는 것을 보고 자기도 덩달아 껄껄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서,
 
277
『양길이 내 목숨을 자네에게 주고 가니 오래 살다 오고. 저승에서 또 만나세.』
 
278
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279
양길은 기헌의 손을 잡아 끌며,
 
280
『여보게 이 사람.』
 
281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원문】제9장. 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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