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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해의 《조선문단》을 발판삼아 출발한 학송 최서해는 그 뒤 《중외일보》가 간행되매 《중외일보》 사회부 기자로 들어갔다가 그 뒤 다시 《매일신보》 학예부에 적을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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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평양서 두번째 결혼을 할 때에 일부러 평양까지 내려와서 들러리를 서준 서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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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매일신보》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신문으로서 문사로서는 《매일신보》에 붓을 잡는 사람이 업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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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서해의 부탁에 의지하여 내가 먼저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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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는 이처럼 집필자가 없는 신문이니만치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다 후하였다. 내가 계속하여 《매일신보》에 집필을 하고 원고료가 다른 신문보다 후한 것이 알리어지자 뒤따라 다른 문사들도 집필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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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매 동아일보에서는 ‘매일신보 집필가의 원고는 싣지 않는다’는 일종의 매명적 정책이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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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여하튼간에 최서해는 그때 지명 문인들의 글을 사기에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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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서해에게 대해서 참으로 잘못한 일이 있다. 그것은 전에도 쓴 바이지만, 나도향 세상 떠난 뒤에 최서해가 주동이 되어 고 나도향 비석을 해 세워 주는데, 그때 서해가 나더러 얼마간 찬조하라는 것을 핑계 좋게 거절 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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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해는 끝끝내 나를 지지하고 내 원고를 어떻게든 돈과 바꾸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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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 사회에서 월부로 집을 마련한다는 일은 시작하여 놓고 돈이 못 돌아서 쩔쩔맬 때에 서해가 이 곤경을 구해준 적도 비일비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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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서해가 1932년 여름에 문득 병이 나서 모 병원에 입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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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름 날 《매일신보》로 갔더니 편집국장인 星海(성해) 李益相(이익상)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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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해가 입원해 있는 모 병원으로 달려가 보았다. 서해는 비교적 원기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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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는 자기와 춘원과의 새에 막혀 있던 델리케잇한 감정이며 그런 관계로 그 새껏 춘원을 보지 않았는데, 지금 자기는 병상에서 일지 못할 것이 분명해 졌으므로 일부러 춘원을 오라고 청하여 춘원이 방금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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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춘원은 많은 문인들에게 원혐을 사고 있다. 춘원과 아무 원혐없이 지내는 사람은 문인 가운데는 오직 나 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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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앉아서, 문단의 일원으로 행동하지 않고 순전히 신문인으로 행세한 것이 그 원혐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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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해가 춘원과의 사이에 막혔던 간사리를 터버렸다 하는 데 비교적 마음이 흡족하여 이 짧은 인생에서 서로 옳고 긇고 하면 무얼 하겠느냐, 좌 우간 마음을 굳게 먹고 치료나 잘 하라고 그를 위로하고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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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이틀인가 사흘인가 뒤에 최서해의 별세가 신문에 보도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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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서 이 나 金東仁(김동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끼기 서해만한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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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또한 내가 가장 촉망하던 작가였다. 부두 노동자로까지 전락했던 그의 생활 경력은 책상머리 출신만인 조선문단에서 한 이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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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남긴 작품은 진실로 적다. 어느 신문사의 기자 노릇을 하여 그 여가에 붓을 잡은 그라, 더우기 작가 생활의 기간도 짧았으며 몇 편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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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남긴 ‘최서해’라는 이름은 크다. 그리고 이 이름은 만대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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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장례날, 그의 장례는 서해의 명성에 그다지 부끄럽지 않도록, 다른 것은 모르지만 장례의 뒤를 따르는 자동차의 수효가 4, 50대로서 그 기다란 자동차 행렬은 진실로 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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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다란 葬列(장열)은 최서해라는 사람에게 대한 인사가 아니라 《매일신보》 학예부 책임자에게 대한 인사였다. 최서해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는 20분 의 1의 대접도 아낄 조선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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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가 남긴 고아와 과부는 장차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탁하고 살랴? 그 장례가 호화로움에 반하여 뒤에 남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아 줄 사람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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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위하여 몇 푼 거둔 것이 있었으나 그것도 누구가 먹었는지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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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이태 뒤 나는 연전에 나도향 비석해 세워줄 때 서해에게 진 큰 양심의 짐을 갚기 위하여 서해의 비석을 해 세워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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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백화 양건식이랑 김안서 등과 협력하여 서해란 단 두 글자를 가로 크게 새긴 비석을 하나 만들어 서해의 만 2주깃날 이를 그의 무덤 앞에 세 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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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에 서해가 이것을 알랴마는 나도향 建碑(건비) 때 그렇듯 애쓴 최서해에게 대하여 그때 그렇듯 무심하였던 이 나의 속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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