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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서 시작한 낚시질은 가을도 마가을까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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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이에서 자고 마상이에서 깨고 마상이에서 밥지어 먹고 아주 마상이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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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쌀이 필요하다든가 담배며 성냥이며가 필요하든가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생기든가 하는 때어만 집에 들어갔다. 그러면 안해는 내 취미, 내 성격에 맞을만한 장그런 물품을 준비해 두었다가는 제공하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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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마상이라는 배는 대동강에서 낚시질을 위하여 만들어지고 발달한 배다. 크기는 한 조각 편주에 지나지 못하지만 노를 젓는 손짓에 따라서 앞뒤와 동서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어서, 가령 큰 고기가 낚시에 걸리어 달아날 때는 고기를 따라 동서남북으로 자유자재로 쫓아다닐 수 있고, 비올 때나 잠잘 때 위에 덮은 ‘뚬’이 있고, 닻을 달고는 여울도 올라갈 수 있고, 낚시질의 온 도구를 배에 장비하게 된 경첩한 배다. 그리고 평양 사람 으로는 마상이를 조종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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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뽐내며 마상이 타러 가자기에 함께 갔더니, 안서는 마상이의 노를 들고 일어서서 뒤로 향하여 돌아서되 머리를 더풀거리며 숨이 차서 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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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이란 대체 그 전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며 왼손만으로 가볍게 젓는 것이 원칙이다(오른손은 아주 쉰다). 안서처럼 힘들이고 애써서 젓는 것이 아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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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상이에서 낚시질로 천하만사는 잊고 그날그날을 혹은 萬景臺(만경대)로 내려가며 혹은 酒岩(주암)으로 올라가며 고기잡이에 취에 온갖 세상을 모르고 지내는 동안, 가을도 깊어 첫겨울에 가까왔다. 곱게 자란 선비의 손이 마가을 찬바람에 폭로되어 손등이 모두 터져 주먹을 쥐면 피가 흐를 지경이지만, 불안한 심경을 잊기 위해서는 뭍에 오르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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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차서 마상이에서 밤을 지내고 나면 밤새 입김〔口氣〕(구기) 쏘인 데는 허옇게 성애가 돋쳐 있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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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어떤날 집에 옷을 바꾸어 입으러 돌아왔더니 안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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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딸애를 데리고 서울 잠깐 놀러간다고 떠났다 한다. 부자집 딸로 부자집 안해로 갖은 호강을 다하다가 재정적 파국에 직면하니 기도 막히리라, 가슴도 답답하리라. 그 화풀이로 며칠 놀러 간 것이라 무심히 생각하고 옷을 바꾸어 입고 다시 강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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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주일 더 지내서 또 집으로 돌아오니 안해는 여전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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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산보용 모자에 무슨 종이가 있기에 펴보니 안해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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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가서 몇 해 공부를 해서 파산한 가정을 부활시키러 떠나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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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25, 6세에 공부는 무엇이며 공부하러 떠나는데 딸아이를 데리고 간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짐작했다. 내가 이 편지를 보면 곧 따라와서 자기를 도로 데려오리라는 생각으로 이 일을 감행했다고. 공부에는 방해되는 어린 아이(내가 몹시 사랑하던 애다)를 데리고 떠나고 내가 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모자를 골라서 거기 편지를 넣고 간 점으로 미루어 내 짐작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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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행 나는 낚시질에서 한 번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서 이 그의 편지를 발견한 것은 그가 편지를 넣고 떠난 지 진실로 반 달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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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곧 상경하였다. 딸을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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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다시 일본 동경으로 이리하여 동경 바닥에서 내 어린 딸을 찾아 가지고 다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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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난 안해가 남기고 간 두 아이를 길러야 할 커다란 의무를 뒤맡지 않을 수 없는 나는 과거의 모든 호화롭던 놀이를 잊고 집에 박혀 있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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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28 이태 동안을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평양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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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안서의 행보는 재미있다. 《창조》 없어지고 《폐허》 없어진 뒤에 안서는 시골 내려가서 자기의 논밭을 모두 팔아다가 서울에 집 두어 채를 사서 한 채는 월세를 놓고 한 채는 자기가 쓰고 나머지 돈은 은행에 예금하고 은행에 예금한 것은 소절수를 찢어서 술값을 치르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여 여급들에게 ‘고깃데(小切手(소절수)―수표)상’이라는 명예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에 안서를 따라다니던 친구로는 변영로, 염상섭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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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깃데상’이라 부르면 안서는 득의연하여 아낌없이 소절수를 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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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서의 쥐꼬리만한 재산으로는 고깃데상 노릇도 얼마를 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소절수의 신세를 진 일이 한 번인가밖에는 없지만 안서와의 사이는 이 소절수 시절을 전후하여 매우 가까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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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가 무슨 일로 평양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평양에 나를 찾았고 내가 서울 무슨 볼 일이 있으면 반드시 안서의 집을 숙소로 하였다. 그 때는 안서는 오랜 하숙 생활을 걷어치우고 禮智洞(예지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가족들을 불러올려 살림을 하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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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에 원고료라는 것의 고마움을 비로소 알았다. 글을 돈으로 팔랴 하던 주장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돈도 안 받고야 글을 어떻게 쓰랴 하는 새 주장이 생겨 났다. 그때 《新小說(신소설)》 잡지가 생기고 《大潮(대조)》라는 잡지가 생겼는데 거기 글을 보내고 약소한 원고료가 들어온 것이 진실로 반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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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나는 돈으로 글을 팔아서 살아가는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더우기 그 돈이란 것이 무슨 군것질 용처가 아니요, 그 날 없으면 그 날은 굶지 않을 수 없는 절실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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