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문학 발전에 있어서 《개벽》의 공적은 크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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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잡지 《창조》를 지나서 동인잡지 《폐허》와 동인잡지 《백조》― 이렇듯 신문학의 업은 동인잡지에서 싹터서, 동인잡지니만치 각각 자기네의 성곽처럼 지내다가 1922년의 동면기에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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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면에서 깨날 때 그들의 작품을 받아 소화할 만한 기관은 오직 《개벽》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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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창조》니 《폐허》니 《백조》니 파당적 색채를 떠나서 한 조선의 문학자로서 모두 《개벽》에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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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섭이 두각을 낸 것도 《개벽》이거니와 빙허(현진건), 도향(나빈), 노작 (홍사용) 등 《백조》 잔당이며 朱耀燮(주요섭)(요한의 동생), 素月(소월)(金廷湜(김정식)) 등이 이름을 나타낸 것도 《개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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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섭이 먼저 나왔는지 빙허가 먼저 나왔는지는 지금 기억에 모호하지만, 곧 뒤이어 도향까지 나타나서 조선의 소설단이 찬란한 競艶(경염)을 《개벽》 지상에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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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시도 《개벽》에 나타났다. 노작의 시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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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기 민요시인 소월(김정식)의 출현은 온 문단의 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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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은 본시 안서(김억)의 제자였다. 안서의 문하에서 시도를 닦을 적에는 그 시풍은 물론이요, 원고용지의 모양 형식까지도 스승 안서를 본따므로 우리는 그의 장래성을 아주 무시하였는데, 그가 자기의 길을 민요에서 발견하고 「朔州龜域(삭주균역)」을 노래부르며 문단에 데뷔할 때에 그의 스승 안서를 비롯하여 온 문단은 이 놀라운 천재의 출현에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스승인 안서부터가 지금껏 固持(고지)하던 자기의 시풍과 시도를 버리고 제자인 소월의 개척한 신민요를 개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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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해 보기 10년도 못 하여 소월은 그만 저 세상으로 갔다. 모진 술이 그 의 젊은 생명을 빼앗았다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 민족 생명이 계속되는 동안은 영구히 우리 문학상에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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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안서의 손을 빌어 「素月詩集(소월시집)」이 간행되어 오늘에 이른 점은 시집 한권 못내 본 남궁벽에게 비기어 나은 편이나 소월의 업적에 대해서는 한 개 기념비라도 있을 법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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