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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별궁 터의 역사를 은행나무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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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鍾路區) # 서울공예박물관 # 안동별궁
【문화탐방】
(2023.07.07. 19:27) 
◈ 안동 별궁 터의 역사를 은행나무는 알고 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공예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안동 별궁(安洞別宮)이란 건물에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결혼식을 치룬 장소로 일제 강점기에 건물들이 훼손되고 흩어지고 말았다. 해방 후 풍문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가 이전하여 학교 건물들을 리모델링한 후 현재 공예박물관(무료 관람)이 자리잡고 있다. 터와 함께 이름 없는 과거 공예 장인들의 작업과 조선시대 명품 공예품을 감상하는 곳이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공예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안동 별궁(安洞別宮)이란 건물에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결혼식을 치룬 장소로 일제 강점기에 건물들이 훼손되고 흩어지고 말았다. 해방 후 풍문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가 이전하여 학교 건물들을 리모델링한 후 현재 공예박물관(무료 관람)이 자리잡고 있다. 터와 함께 이름 없는 과거 공예 장인들의 작업과 조선시대 명품 공예품을 감상하는 곳이다.
☞별궁은 왕이 사신을 접대하거나, 비빈(妃嬪)을 맞아들이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궁을 말함
공예박물관이 있는 이곳을 안동별궁 터라 부르는데 조금 더 알아봅니다.
▼안동별궁 외관
일제 강점기에 촬영한 안동 별궁 사진으로 1880년(고종 17)에 지은 별궁으로, 북부 안국방(安國坊) 소안동(小安洞)에 있었기에 안동 별궁이라 불렸다.
 
▣안동별궁 터의 역사
별궁 터는 원래 1450년 세종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을 지어주려고 택한 길지였고, 세종이 말년 머물다 세상을 뜨면서 왕족들이 선망하는 최고 장소가 된다. 그 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살면서 "연경궁"이름이 붙었고,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반정으로 폐위됐던 인목대비를 복권시킨 인조는 맏딸 정명공주(남편 홍주원)에게 이 터를 주고 백칸 넘는 살림집을 지어준다. 공주의 자손들도 융성하면서 별궁터는 확실한 명당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1874년(고종 11)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인 이척(훗날의 순종 황제)이 왕비(명성황후)한테서 태어났다. 헌종·철종이 모두 왕비한테서 낳은 아들이 없던 차에 아들이 생겼으니 왕실과 나라의 드문 경사였다. 기쁨에 넘쳤던 고종은 돌을 맞은 아들을 곧장 세자에 책봉하고, 1880년 역대 왕실 왕족들의 최고 길지로 꼽혔던 안국동 홍주원 옛집을 크게 확장해 별궁을 지었는데 바로 안동별궁이다.
1882년 2월 22일, 당시 도읍 한성 한복판이던 안국동 175번지 안동별궁에서 왕세자 이척과 세자빈 민씨(민태호의 딸. 나중에 순명효황후)의 혼례가 치러졌다. 즉 조선 왕실에서 간택된 왕비(세자빈) 등을 신부집에서 직접 맞아오지 않고 별궁에서 맞아오는 국가의식인 별궁친영(別宮親迎)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혼례복인 면복을 차려입은 세자는 경복궁에서 비를 맞아 종묘사직을 이으라는 부왕 고종의 명령을 받고 별궁으로 갔다. 별궁 마당에는 1881년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배필로 정해진, 여흥 민씨(명성황후) 집안의 중신 민태호의 딸이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순종 황제의 순명효황후가 되는 민씨(1872~1904). 그녀는 부친의 인도를 받으며 왕세자 이척과 호화로운 예식을 치렀다. 그리고 둘은 가마를 타고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이날 예식은 재위 기간 내내 외세의 침탈과 왕실 내분으로 극한의 고뇌를 겪었던 고종에겐 생애 가장 기쁜 순간이었을 것이다.
1882년 열린 안동별궁의 결혼식은 오랜만에 나타난 적통의 혼례란 점에서 왕실은 물론 국가 최고의 역대급 경사였다. 혼례 규모는 조선 왕조사의 역대 궁중 혼례 중 가장 성대했다. 주단 등 주요 혼례 물품을 청나라에서 사들였고, 혼수용 이불만 500채가 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의 뜻깊고 성대한 결혼식은 불과 넛달 뒤 왕실 개화정책과 부패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으로 빛이 바랬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충격을 받은 세자빈은 순종 즉위를 보지 못하고 1904년 세상을 뜨고 만다. 기구하게도 순종 황제(1874~1926)는 황제 자리에 오른 1907년 자신이 25년 전 가례를 치렀던 안동별궁에서 동갑내기인 윤택영의 딸 윤씨(순정효황후.1894~1966)와 다시 혼례를 치르게 된다.
 
한일병탄 뒤 안동별궁은 왕실 행사장 기능을 잃었다. 상궁과 궁중 종사자들이 지내는 처소로 바뀌었고, 천연두 백신 접종 장소로도 쓰였다.
▼1927년 지도에 표시된 안동별궁(정화당, 경연당, 현광루)과 1936년 지도에는 창덕궁 별궁이라 표기
 
1930년대에 명성황후 집안인 민씨 일가와 광산왕 최창학 일가의 소유로 부지가 쪼개지면서 그 자리에 해방 뒤 풍문여고가, 1970년대에 건축가 김중업의 대표작 안국빌딩이 세워지게 된다. 풍문여고 교사를 리모델링해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은 이런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 역사의 증인인 400년 된 은행나무
이 역사를 지켜본 증인은 살아 있다. 이곳 공예박물관 전시동과 교육동 사이에 자리한, 키가 20m 넘고 수령이 400년 넘는 장대한 은행나무 고목이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생장이 시작되어 별궁터에 깃든 역사를 말없이 목격했다. 두차례에 걸친 순종의 기구한 혼인 의식은 물론,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별궁의 전각들이 헐리고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이합 집산하는 것도 모두 지켜봤다.
 
 
창덕궁의 불로문과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다..
 
풍문여고 담장을 허물면서 새로 발견된 옛 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으로 다시 묻히지 않고 드러난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지금 박물관의 모습과 함께 과거의 자취를 전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담장에 막히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옛 안동별궁 터와 이 터에서 바라보는 서울 북촌과 인사동 모습은 그동안 누릴 수 없던 경관들이다. 아울러 식물에 관심이 있다면 공예박물관의 배롱나무 등의 나무와 식물들의 구경과 열린 송현 광장을 둘러보니 좋네요.
▣서울 공예박물관 정보
★ 홈페이지,https://craftmuseum.seoul.go.kr/main
 
출처: 한겨레, 민족문화대백과, 고궁박물관,중앙알보
 

 
※ 원문보기
종로구(鍾路區) # 서울공예박물관 # 안동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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