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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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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2019.11.21. 19:07) 
◈ 충정공 민영환
서울 조계사 옆에는 휴관 중인 우정총국((郵征總局)과 시민광장 구석에 자그마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 45세) 동상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27살에 호조판서가 된 충정공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45세에 자결하였고 피가 떨어진 땅에서 대나무(혈죽)가 자랐다는 기록(고려대 박물관)이 있는 분입니다.
서울 조계사 옆에는 휴관 중인 우정총국((郵征總局)과 시민광장 구석에 자그마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1905, 45세) 동상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27살에 호조판서가 된 충정공은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45세에 자결하였고 피가 떨어진 땅에서 대나무(혈죽)가 자랐다는 기록(고려대 박물관)이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을 추모하고 기리자고 만든 이 동상은 벌써 3번 옮겨졌지만(안국동 로터리→ 창덕궁 앞→ 현재) 아직도 일부자료에는 창덕궁 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동상은 나무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고 주변은 노숙자가 있으며 냄새도 나고 쓰레기도 있어 지저분합니다. 깨끗이 관리하면 좋을 텐데....
 
\na-;▼우정총국과 민영환 동상 배치도
 
 
\na-;▼문화재 시설 보완 및 정비로 휴관중인 우정총국 건물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1.46㎡(30.69평)이다.
 
 
▶우정총국(사적 제213호)
 
 
 
☞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개화당)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해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을 말한다. 청군의 개입과 추진세력이 미약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3일 만에 끝나 "3일 천하"라고 하며 그 결과 일본과 한성조약 체결하였다.
 
 
 
\na-;▼우정총국이란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 글씨
 
 
\na-;▼우표마당 문양은 1884년 발행된 우표에서 따왔다.
 
▼우정총국 사진들 -문화재청 실측보고서 사진-
 
▣ 구한말 주요사건
 
 
 
 
민영환(閔泳煥, 1861∼1905, 45세)
 
 
 
시종부 무관장(侍從府武官長)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이 새로운 한일 조약(韓日條約)에 분개하여 칼로 자살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이 중신은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바르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다.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 받던 사람인데, 이 어려운 때에 괴로운 심정이 절절하여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강개하고 격렬해져 마침내 자결하였으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은 해와 별을 꿰뚫을 만하다. 짐의 마음의 비통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na-;▼새겨져 있는 "동포에게 고함"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死而不死 )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嗚呼國恥民辱乃至於
此我人民將且殄滅生
存競爭之中矣夫要生
者必死期死者得生諸
公豈不諒只泳煥徒以
一死仰報
皇恩以謝我二千萬同
胞兄弟泳煥死而不死
 
 
 
期助諸君於九泉之下
幸我同胞兄弟千萬益
加奮勵堅乃志氣勉其
學問結心戮力復我自
主獨立則死者當喜笑
於冥冥之中矣嗚呼勿
少失望訣告我
大韓帝國二千萬同胞
 
 
 
 
 
 
 
\na-;▼민영환의 묘
선생의 묘는 순국 후 선향인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 토월마을에 평장되어 있다가 1942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으로 이장되었고 1959년에 묘소일대를 재정비하였다.
 
묘는 높은 둔덕 위에 담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의 묘지에는 좌우로 문인석 한쌍이 있고 우측으로는 묘비가 서 있다. 묘지의 입구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에 세운비)가 있다. 이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898년 정부전복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투옥되었는데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만에 석방된 것에 대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민영환 자결터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국민, 외교사절,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순국후 피묻은 옷과 칼을 상청(喪廳)마루방에 걸어두었는데 이듬해 5월 상청의 문을 열어보니 대나무 네 줄기가 마루바닥과 피묻은 옷을 뚫고 올라왔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충정이 혈죽(血竹)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 나무를 절죽(節竹)이라 하였다.
 
선생의 집은 견지동 27-2 현 조계사 경내에 있었지만 전동(典洞: 공평동 2번지)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자결했기에 공평빌딩부근에 자결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종로구청에서 퍼옴-
 
유품
 
혈죽 사진
 
 
 
혈죽 말린 사진
 
 
\na-;▼우정총국 시민광장의 민영환동상 위치
 
\na-;출처: 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지식백과, 두산백과. 네이버캐스트,고려대박물관,위키백과,연합뉴스,유투브,종로구청,네이버지도,문화재청2003년 실측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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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閔泳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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