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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년 (15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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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기록에 없음

 
 

2. 계사년 2월 (1593년 2월)

3
계사년 2월은 대길하다.
 
4
2월 초1일 (병술)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3월 3일]
5
발포만호(황정록) ∙ 여도권관(김인영) ∙ 순천부사(권준)이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崔已)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률로써 처벌했다.
 
6
2월 초2일 (정해)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4일]
7
녹도가장 ∙ 사도첨사(김완) ∙ 흥양현감(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8
2월 초3일 (무자) 맑다. [양력 3월 5일]
9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이 미쳐 오지 못했다. 동쪽 상방으로 나가 앉아 순천부사 ∙ 낙안군수 ∙ 광양현 감과 한참 동안 의논했다.
 
10
이 날 경상도에서 옮겨온 공문에
 
11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김호걸과 나장 김수남(金水男) 등이 명부에 올린 수군 여든 여 명이 도망 가버렸다"
 
12
고 하며,
 
13
"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오지 않았다"
 
14
고 하므로, 군관 이봉수(李鳳壽) ∙ 정사립(鄭思立) 등을 몰래 파견하여 일흔 여 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누어 주고, 김호걸(金浩乞) ∙ 김수남(金水男) 등을 그날로 처형했다.
 
15
오후 여덟 시쯤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16
2월 초4일 (기축)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6일]
17
성 동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18
객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19
오후 여셧 시쯤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바람조차 몹시 사납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였다.
 
20
2월 초5일 (경인)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양력 3월 7일]
21
경칩날이라 둑제(대장기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22
아침밥을 먹은 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23
보성군수(김득광)는 이슥한 밤에 육지를 거쳐 달려 왔다.
 
24
뜰 아래에 붙잡아 놓고 기일을 어긴 죄를 문초하며 그 대장(代將)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순찰사 등이 명나라 군사에게 음식을 이바지하는 차사원으로서 강진 ∙ 해남 등지의 고을로 왔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역시 공무이므로 그 대장과 도훈도 및 아전들을 처벌했다.
 
25
저녁에 이언형이 작별을 고하였다.
 
26
2월 초6일 (신묘)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야 개었다. [양력 3월 8일]
27
밤 세시에 첫나발을 불고 동틀 무렵에 둘째나발과 세째나발을 불었다. 배를 풀고 돛을 올렸으나, 정오 때에 맞바람(샛바람)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머물렀다.
 
28
2월 7일 (임진) 맑다. [양력 3월 9일]
29
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이미 먼저 와있었다. 그와 함께 서로 이야기했다.
 
30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보고, 이영남(李英男) ∙ 이여염(李汝恬)도 왔다.
 
31
2월 초8일 (계사) 맑다. [양력 3월 10일]
32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자고 했다. 나는 애써 말려
 
33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
 
34
고 언약을 하였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와서 모이니, 바라보는 사람마 다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으며 기뻐 날뛰었다. 온 것을 보니 거느리고 온 것이 마흔 척 미만이었다.
 
35
바로 그날 오후 네시쯤에 출항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36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37
2월 초9일 (갑오) [양력 3월 11일]
38
첫나발을 불고 둘째나발을 불고 나서 다시 날씨를 보니 비가 많이 내릴 것 같았다. 그래서 출항하지 않았다.
 
39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그대로 머물러 출항하지 않았다.
 
40
2월 초10일 (을미)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양력 3월 12일]
41
오전 여섯 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했는데,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 내어 나올 듯하다가도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하였다. 참으로 분하다.
 
42
밤 열 시쯤에 도로 영등포뒤의 소진포(장목면 송진포)에 이르러 배를 대고서 밤을 지냈다.
 
43
이에 병신일(11일) 아침에 순천탐후선이 돌아왔다.
 
44
본영에 편지를 보냈다.
 
45
2월 11일 (병신) 흐렸다. [양력 3월 13일]
46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47
2월 12일 (정유) 아침엔 흐리다가 저녁나절에는 개었다. [양력 3월 14일]
48
삼도의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 ∙ 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다. 나아갔다 물러갔다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았다. 두 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하니, 어찌할꼬! 너무도 분하다.
 
49
이 날 저녁에 도사가 우후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것은 명나라 장수에게 줄 군용 물품을 배정한 것이라고 했다.
 
50
저녁에 칠천도에 이르자,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51
2월 13일 (무술) 비가 창대 같이 내렸다. [양력 3월 15일]
52
오후 8시쯤에야 비가 그쳤다.
 
53
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부사(권준) ∙ 광양현감(어영담) ∙ 방답첨사를 불러 이야기하였다.
 
54
정담수(鄭聃壽)가 와서 봤다.
 
55
활장이와 화살장이 대방(大邦) ∙ 옥지(玉只) 등이 돌아갔다.
 
56
2월 14일 (기해) 맑다. [양력 3월 16일]
57
증조부의 제삿날이다.
 
58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왔다.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삼도의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수사(원균)는 병으로 모이지 않고, 전라좌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하는데, 다만 우후가 술에 취하여 마구 지껄이며 떠드니, 그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포만호(정담수) ∙ 남도포만호 강응표(姜應彪)도 역시 그러하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이는 자리에 술이나 만취되어 이렇게까지 되니, 그 인물됨이야 더욱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59
저녁에 헤어져서 진 친 곳으로 왔다.
 
60
가덕첨사 전응린(田應 )이 와서 봤다.
 
61
2월 15일 (경자)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가 내렸다. [양력 3월 17일]
62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잤다.
 
63
과녁을 걸고 활을 쏘다.
 
64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사량만호 ∙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도 같이 왔다.
 
65
이 날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66
또 순찰사 영의 아전이 보낸 고목에는 명나라 군사가 2월 초1일에 에 들어가 왜적들이 모두 섬멸되었다고 하였다.
 
67
해질 녁에 원균(元均)이 와서 봤다.
 
68
2월 16일 (신축) 맑다. [양력 3월 18일]
69
늦은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70
소문에 영의정 정철이 사은사가 되어 북경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노비단자를 정원명에게로 부치면서 그것을 가져다가 행차하는 일행에게 전하라고 일러 보냈다.
 
71
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보고 함께 밥을 먹고서 갔다. 순천부사 ∙ 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72
밤 열 시쯤에 신환(愼環) 과 김대복(金大福)이 교서 두 장과 부찰사의 공문을 가져 왔는데 보니,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松都)를 치고, 이 달 초6 일에는 마땅히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몰시키겠다고 하였다.
 
73
2월 17일 (임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3월 19일]
74
종일 샛바람이 불었다.
 
75
새벽에 일제히 이영남(李英男) ∙ 허정은(許廷誾) ∙ 정담수(鄭聃壽) ∙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76
오후에 우수사(이억기)에게 가서 봤다.
 
77
새로 온 진도군수 성언길(成彦吉)을 봤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우수사(원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임금님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 저물어 돌아 갈 즈음에 길에서 선전관이 왔다는 말을 듣고, 노를 바삐 저어 진으로 돌아올 때에 선전 표신(表信)을 만났으므로 배위로 맞아 들여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보니,
 
78
"급히 적의 퇴로를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
 
79
는 것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답서를 써 부치고 나니, 밤이 벌써 두 시가 넘었다.
 
80
2월 18일 (계묘) 맑다. [양력 3월 20일]
81
이른 아침에 행군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하다.
 
82
사도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 ∙ 녹도가장 ∙ 좌우 별도장 ∙ 좌우돌격장 ∙ 광양이선 ∙ 흥양대장 ∙ 방답이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진해시 웅천2동)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열 여 척이 뒤따라 나왔다.
 
83
경상도 복병선 다섯 척이 재빨리 나가 쫓을 때, 나머지 복병선들이 일제히 적선들을 에워싸고 여러 무기들을 쏘아대니, 왜적의 죽은 자의 수효를 알 수 없었다.
 
84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어져 다시는 나와서 항거하지 않는다.
 
85
날이 저물어서 사화랑(진해시 웅천2동)으로 돌아왔다.
 
86
2월 19일 (갑진) 맑다. [양력 3월 21일]
87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무르고 출항하지 않았다.
 
88
남해현령에게 붓과 먹을 보냈다.
 
89
저녁에 남해현령이 와서 봤다.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와서 봤다. 그대로 사화랑에 있었다.
 
90
2월 20일 (을사) 맑다. [양력 3월 22일]
91
새벽에 출항하자 샛바람이 약간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배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어질 지경이다. 거의 배를 감당할 수 조차 없다. 곧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지휘기)를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양의 한 척, 방답의 한 척, 순천의 한 척, 본영의 한 척이 서로 들이 받아 깨졌다.
 
92
날이 저물기 전에 소진포로 돌아와 물을 긷고 밤을 지냈다.
 
93
이 날 사슴 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권준)가 노루 한 마리를 잡아 보냈다.
 
94
2월 21일 (병오)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3일]
95
이영남(李英男) ∙ 이여염(李汝恬)이 와서 봤다.
 
96
우수사 원균(元均)과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와서 봤다.
 
97
저녁에 비가 내리더니 자정이 되서야 그쳤다.
 
98
2월 22일 (정미)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4일]
99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100
이윽고 바람이 멎는 듯하므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응지(成應祉)를 제포(진해시 웅천2동)로 보내어 곧 상륙을 하는 체 하게 하고,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은 변변찮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이들도 상륙하는 체 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하였다.
 
101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무찔렀더니, 적들은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였는데, 발포의 두 배와 가리포의 두 배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돌입하다가 그만 얕은 곳에 얹혀(좌초), 적에게 습격받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정말로 찢어질 것 같다.
 
102
조금 있으니, 진도의 지휘선 한 척도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하게 되지 못하게 될 즈음에 우후가 곧장 달려가 구해내었다.
 
103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104
참으로 통분하다. 이것을 경상도 우수사에게 파 물었다. 한심스럽다.
 
105
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사(원균)의 탓이다.
 
106
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107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에 왔고, 어머니 편지도 왔다.
 
108
2월 23일 (무신) 흐렸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3월 25일]
109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봤다.
 
110
식사를 한 뒤에 원균(元均) 수사가 오고, 천부사 ∙ 광양현감 ∙ 가덕첨사 ∙ 방답첨사도 왔다.
 
111
이른 아침에는 소비포권관 ∙ 영등포만호 ∙ 와량첨사 등이 와서 봤다.
 
112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하는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113
최천보가 양화진(고흥군 영남면 양화리)에서 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또 조도어사의 편지와 공문을 전했다.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
 
114
2월 24일 (기유) 맑다. [양력 3월 26일]
115
새벽에 아산 ∙ 온양 편지와 집안 편지를 아울러 써서 보냈다.
 
116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몹시 퍼부어 곧장 다다를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117
비가 그치자,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영감 ∙ 순천부사 ∙ 가리포첨사 ∙ 진도군수 성언길(成彦吉)과, 노는 계집을 빼놓고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118
초저녁에 배 만드는 기구를 들여 보내는 일로 패자(牌字: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보내는 글)와 흥양에 갈 공문을 써 보냈다. 양식에 쓸 쌀 아흔 되를 자염과 바꾸어 보냈다.
 
119
2월 25일 (경술) 맑다. [양력 3월 27일]
120
풍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칠천량에 머물렀다.
 
121
2월 26일 (신해)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8일]
122
종일 머물렀다.
 
123
2월 27일 (임자)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3월 29일]
124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125
2월 28일 (계축) 맑으며 바람조차 없다. [양력 3월 30일]
126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127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이목(禿沙伊項: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 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 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128
두 배를 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했다.
 
129
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130
초저녁에 아들 염(苒)이 왔다.
 
131
사화랑에서 잤다.
 
132
2월 29일 (갑인) 흐리다. [양력 3월 31일]
133
바람이 몹시 불까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134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와서 봤다.
 
135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왔다.
 
136
경상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137
2월 30일 (을묘)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1일]
138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3. 계사년 3월 (1593년 3월)

140
3월 초1일 (병진) 잠간 맑다가 저녁에 비왔다. [양력 4월 2일]
141
방답첨사(이순신)가 왔다. 순천부사(권준)는 병으로 오지 못했다.
 
142
3월 초2일 (정사) 온 종일 비왔다. [양력 4월 3일]
143
배의 봉창 아래에 웅크리고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가슴에 치밀어 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144
이응화(李應華)를 불러다가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순천의 배로 보내어 병세를 살펴 보게 했다고 한다.
 
145
이영남(李英男) ∙ 이여염이 와서 원균 영감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영남이 왜놈의 작은 칼을 두고 갔다. 그 때 이영남에게서 들었는데, 강진의 두 사람이 살아 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가 문초를 받고 왔다고 했다.
 
146
3월 초3일 (무오) 아침에 비왔다. [양력 4월 4일]
147
오늘은 답청(삼짇날 돋아나는 싹을 밟음)하는 날인데, 흉악한 적들이 물러가지 않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 있으며, 또 명나라 군사들이 서울에 들어 왔는지 아닌지 조차 듣지 못하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148
종일 비가 내렸다.
 
149
3월 4일 (기미) 맑아졌다. [양력 4월 5일]
150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영감이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151
원균(元均) 영감도 왔다. 순천부사가 병이 몹시 아프다고 한다.
 
152
소문에 들으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汝松)이 북로(함경도) 쪽으로 간 왜적들이 설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송도까지 왔다가 서관(평안도)으로 되돌아갔다는 기별이 왔다.
 
153
통분함을 이길 길 없다.
 
154
3월 5일 (경신) 맑다. [양력 4월 6일]
155
바람기가 매우 사납다.
 
156
순천부사(권준)가 병으로 도로 돌아간다기에 아침에 몸소 배웅하여 보냈다.
 
157
탐후선이 왔다. 내일로 적을 치자고 약속하였다.
 
158
3월 6일 (신유) 맑다. [양력 4월 7일]
159
새벽에 출항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도들은 바쁘게 뭍으로 도망쳐 산중턱에 진을 쳤으므로, 관군(官軍)이 철환과 편전을 비 오듯 마구 쏘니, 죽는 자가 무척 많았다.
 
160
포로되었던 사천에 사는 여인 한 명을 빼앗아 왔다.
 
161
칠천량에서 잤다.
 
162
3월 7일 (임술) 맑다. [양력 4월 8일]
163
우수사(이억기)와 이야기했다.
 
164
초저녁에 출항하여 걸망포(통영시 산양면 신전리 신전포)에 이르니, 날은 이미 새었다.
 
165
3월 8일 (계해) 맑다. [양력 4월 9일]
166
한산도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나니, 광양현감(어영담) ∙ 낙안군수 ∙ 방답첨사(이순신)가 왔다.
 
167
방답첨사와 광양현감은 술과 안주를 많이 준비해 오고, 우수사(이억기)도 오고, 어란만호(정담수)도 소고기로 만든 음식 몇 가지를 보내 왔다.
 
168
저녁에 비가 왔다.
 
169
3월 9일 (갑자) 궂은 비가 종일 내렸다. [양력 4월 10일]
170
원식(元埴)이 와서 봤다.
 
171
3월 10일 (을축) 맑다. [양력 4월 11일]
172
사량으로 가는 낙안 사람이 행재소(임금이 피란가 계신 곳)에서 와서 전하는 말하기를,
 
173
"명나라 군사들이 진작 송도까지 왔지만, 연일 비가 와서 길이 질므로, 행군하기가 어려워 날이 개기를 기다려서 서울로 들어 가기로 약속했다"
 
174
고 한다. 이 말을 듣고는 그 기쁨을 이길 길 없다.
 
175
첨사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176
3월 11일 (병인) 맑다. [양력 4월 12일]
177
아침밥을 먹은 뒤에 원균(元均) 수사와 이억기(李億祺) 수사도 왔다. 같이 이야기 하고 술도 마셨다.
 
178
원균 수사는 몹시 취하여 동헌으로 돌아갔다.
 
179
본영의 탐후선이 왔다. 돼지 세 마리를 잡아 왔다.
 
180
3월 12일 (정묘) 맑다. [양력 4월 13일]
181
아침에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본영의 병방 이응춘(李應春)이 공문을 마감하고 갔다.
 
182
아들 염(苒)과 나대용(羅大用) ∙ 덕민(德敏) ∙ 김인문(金仁問)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83
식사한 뒤에 우수사(이억기)의 사첫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184
광양현감이 술을 가져왔다.
 
185
한밤에 비가 왔다.
 
186
3월 13일 (무진) 비가 많이 오다가 늦은 아침에야 개었다. [양력 4월 14일]
187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첨사 이홍명(李弘明)이 바둑을 두었다.
 
188
3월 14일 (기사) 맑다. [양력 4월 15일]
189
각 배를 출항시켜 배 만들 재목을 싣고 나서 왔다.
 
190
3월 15일 (경오) 맑다. [양력 4월 16일]
191
우수사가 이곳에 왔다.
 
192
여러 장수들이 관덕정에서 활을 쏘는데, 우리 편의 장수들이 이긴 것이 66푼이다. 그래서 우수사가 떡과 술을 장만하여 왔다.
 
193
저물 무렵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퍼부었다.
 
194
3월 16일 (신미) 저녁나절에야 맑다. [양력 4월 17일]
195
여러 장수들이 또 활을 쏘았다. 우리 편 여러 장수들이 서른 푼 남짓이 이겼다.
 
196
원균(元均) 영감도 왔다. 많이 취하여서 돌아갔다.
 
197
낙안은 아침에 왔기에 고부로 가는 편지를 주어 보냈다.
 
198
3월 17일 (임신) 맑으며 종일 센 바람이 불엇다. [양력 4월 18일]
199
우수사와 함께 활을 쏘았다. 모양이 형편 없으니 우습다.
 
200
신경황(申景潢)이 와서 전하기를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선전관(채진 ∙ 안세걸)이 본영에 왔다고 했다. 곧 도로 돌려 보냈다.
 
201
3월 18일 (계유) 맑다. [양력 4월 19일]
202
바람이 세게 불어 사람이 출입조차 하지 못했다.
 
203
소비포권관과 아침밥을 먹었다.
 
204
우수사와 같이 장기를 두었는데 이겼다.
 
205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도 왔다.
 
206
저녁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아 왔다.
 
207
밤 열시에 비가 왔다.
 
208
3월 19일 (갑술) 비가 내렸다. [양력 4월 20일]
209
우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210
3월 20일 (을해) 맑다. [양력 4월 21일]
211
우수사와 같이 이야기했다.
 
212
오후에 소문을 들으니, 선전관이 임금의 분부(有旨)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213
3월 21일 (병자) 맑다. [양력 4월 22일]
 
214
3월 22일 (정축) 맑다. [양력 4월 23일]
 
215
(** 날짜는 알 수 없지만, 계사년 3월 22일 이후 별도의 장부터 적혀 있다.)
216
예하에 내릴 공문.
217
이제 섬오랑캐의 변고(變故)는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고, 역사에도 전해진 것이 없습니다. 영남의 바다와 여러 성은 그 위세를 보기만 하고서도 달아나 무너졌으며, 각 진(鎭)의 크고 작은 장수들은 한결같이 움츠리고 물러서 산골에 쥐죽은 듯이 숨어 버렸습니다. 임금은 서쪽으로 피난가 버리어 연이어 삼경(三京)을 함락하였습니다. 종사(宗社) 약속하는 일. 오랜 옛적부터 아직 들은 바 없는 흉변이 우리 동방예의의 나라에 차례로 미치었습니다. 가까운 경계구역까지 오면 다하여 도와 주었다. 영남 바다의 여러 성에는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고는 달아나 무너지니, 석권할 힘을 주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옮겨 가고, 백성은 고기밥이 되고, 연이어 삼경이 함락되니, 종사는 버려지고 오직 나는 삼도수군은 있는 힘과 의리를 다 내고 죽음을 바치려 하지 않은 이 없을지라도, 기회가 마땅치 않고, 아직 뜻을 펴지 못하여 지금은 다행히 명나라 조정이 천하 대장군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파견하여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왜적을 멀리 쫓아내어 삼도(三都)를 회복하였다고 하는 바, 신하된 자는 기뻐 날뛰고 너무 기뻐서 말할 바를 모르고, 또 죽을 곳도 알지 못했습니다. 위에서는 연이어 선전관을 파견하여 죽여라고 임금이 명령했으니, 숨은 도적들을 한 척도 돌려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정녕 하교(下敎)하신지 5일이 되었다고 하거늘 정정 당당하게 충성을 다하고 몸을 잊어서라도 어제 적을 만나 지휘할 때 교묘히 피하여 머무는 사람이 많이 있어 너무도 통분하였습니다. 곧 마땅히 규율에 따라 전에도 많이 있었지만, 또 삼군에 내린 명령이 있을 뿐 아니라, 다시 효력이 있도록 지시하고, 또 군사의 일이라 한들 그 죄를 용서해 주고 적발하지 않거든 속사정을 들어 낱낱이 시키는대로 받들어 행하였습니다.
 
218
9월 초1일 밤 2시에 출항하여 몰운대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먼저 그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와, 다대포 앞바다로 돌아가 대었습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더불어 서로 약속하고서 절영도 남쪽 바다에 이르러 부산을 바라보니, 좌우 산기스락에 적선이 무수하게 줄지어 대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의 산중턱과 성안에 초가를 지어 흙을 쌓고 담 쌓는 것이 가득 하거늘 저는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선봉이 되어 본도(전라도)로 달려 들어 왔더니, 우수사는 본도 우수사와 경상우수사와 더불어 말하기를, '신의 뒤를 이어서 서로 어긋남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천자 ∙ 지자 각 총통을 연방 쏘아대어 왜적선 50여 척을 깨뜨렸는데, 날이 또 막 어두워졌습니다.
 
219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이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낮이나 밤이나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가뭄이 더욱 심하고,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우고 힘을 더해주니, 신령과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습니다. 의분을 품어도 할 말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것인데도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220
더위가 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걱정되어 우려하고 염려하지만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으로 그리운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을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이제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사정은 더욱 무너져 다시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혹 의병을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적을 물리치는 일. 이전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지고 온 임금의 분부와 편지를 받고,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거느린 전선 3척과 더불어 옥포 등지로 거느리고 가서 적선 40여 척을 분멸한 것을 보고하였습니다.
 
221
지난 5월 27일에 도착한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공문에, 적도들이 수륙으로 침범하여 우도의 여러 읍에는 적들이 그득하고, 곤양 ∙ 사천도 함몰하여 패하였다고 하거늘, 저는 소속 수군 장수들을 한편으로는 불러 모으고, 한편으로는 본도 우수사에게 공문을 보내어 우도는 수로가 멀고 바람의 순역(順逆)을 예측하기 어려우니, 넉넉잡아 6월 초3일 까지 신이 있는 본영(여수) 앞바다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기일 안에 적과 싸우도록 하였는데, 이미 다시□□하면 기다렸다가 본도(전라)우수사가 기한대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222
사세가 느리고 더디어질까봐 5월 29일 새벽머리에 저는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곤양 ∙ 남해 땅 노량에 이르렀는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신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전선 3척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패군한 뒤로 군사없는 장수이니, 별로 지휘할 것이 없거니와, 그날 정오 쯤에 적선 1척이 곤양땅 중간의 태포(太浦)에서 작난치며 천가호(千家戶)를 분탕하는 것을 찾아 내려다가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 달아나려 하는데 여러 배가 일시에 몰아냈습니다.
 
223
일찍 안부 편지를 받았으나, 적탄을 맞은 자리의 아픔 때문에 곧 알려 드리지 못한 것은 평생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살펴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군의 사정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원망스러워 군사를 징발하는 명령을 내린다 해도 모두 달아날 꾀만 생각하니, 이와 같으니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가를 얻는다면 민심은 반드시 이렇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정예한 수군을 얻고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이들로 하여금 힘을 길러도 휴가를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224
8월 초에 거느리고서 이 지방에서 나아가도록 지휘를 이어받아 죽음으로써 결전하니, 군량과 군기가 거의 경상도에서 다 썼으니, 다시 나가 싸우고 또 옮길 걱정만 난감합니다. 이 도로 하여금 미리 헤아려 보수를 주니 우러러 봅니다. 이 도로 하여금 전쟁에 임하여서 부끄러움을 녹이려 합니다. 이와같이 마음이 급급하여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힘을 다하려 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인정이 이러하니 어찌하랴! 그러나 대장의 명령이라 오히려 신중하여 감히 가벼이 할 수 없고, 일이 비록 다하고서 급속하면, 인정과 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처지입니다.
 
225
문안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잘 계신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 고기부레를 내리주십시오. 변고가 일어난 뒤로 여러 고을에 정하여 일체 바치지 않으니, 단지 장수가 마음속으로 10장을 올려 보내라고 했으니 부끄럽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이 이제는 어떠하 십니까. 두번이나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적탄을 맞은 자리가 아물지 않아서 곧 알려 드리지 못하여 답장을 보내지 못했으니,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만 민심이 무너져 흩어진 것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은 어떠하십니까. 가뭄과 더위가 이렇게 심합니다. 강 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와주어 그 독한 성미를 부려 적이 이동하여 침범하니, 만약 촛불 옮겨 붙듯 빨리 침범하니 하느님의 신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으니, 의분을 품어도 할 말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아 곧 뵈오려 하였으나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아직도 낫지 않고, 마음이 억세어 그저 분주하다보니, 흔데가 너무 헐어서 이렇게 되버렸으니, 죄스러울 뿐입니다. 또 민심은 이미 무너져 세력을 모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비록 혹 응징하려는 사람이 있다손해도 혼자서는 싸울 수 없습니다. 분함도 부끄러움도 참을 수 없고, 얻거나 잃음도, 이루거나 실패함도 서로 이 같이 멀기만 한데 가히 경계할 수 없구나.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함이 이제는 너무도 바쁘기만 한데 오히여 더 신중해야 하며 감히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싸울 수 없도다. 형세를 살펴보니 근심하고 괴로우며 원망스러움이 독하기만 하다.
 
226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제가 엎드려 안부를 묻고 싶었습니다만, 지난번 접전할 적에 분투하였어도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적의 탄환을 맞은 자리가 심하였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뼈까지 깊이 다쳐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일이 생각뿐이고 몸은 이렇게 병이 들어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탄식하면서 오직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 날 꾀만 품고 있으며, 혹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 가며 싸우러 깊이 들어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또 경상도에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한다면 이 도는 왜적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방어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처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민심이 이러하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순천부사가 죄인을 잡아올 사람을 보내어 힘을 다하여 잡아 왔으나 와야 할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한을 넉넉히 잡아 의리 때 문에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이를 잡아 왔습니다. 아랫쪽 삼도(경상 ∙ 전라 ∙ 충청)에는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가 대충 그렇고,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어집니다. 낮이나 밤이나 울다 지쳐 목이 메입니다. 더욱 더 이 도가 잃게 되어 잘못하지 않게 하도록 회복할 꾀를 오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사(宗社)를 도로 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백(李白) 두 장수의 (충성된) 죽음은 모두 스스로 저지른 것입니다. 요행히 만일에 사실이 아니라해도 병가(兵家)에서는 오랜 계산에서 나온 것입 니다.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지금 의병을 많이 모아 올려 보낸다는 말을 들으니, 저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모르겠습니다. 저는 비록 아직 스스로 적을 죽일 능력이 없어 지시한대로 거느리기만 하면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말(戰馬)이 한 필도 없고 군관들도 한 필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까요. 전쟁 도구를 다스리지 않으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병기는 일찌기 경상도 싸움에서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나머지는 매우 엉성하여 이제 곧 조치하여 준비하기만 하면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화약이 매우 어려우니 민망합니다.
 
227
지난번 임금의 분부에 따라 이 도의 공문에, 좌우의 병세로 하여금 적이 돌아갈 길을 끊어 막는다면 적을 멸하는데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 경상수사 본도(전라)우수사와 소속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이미 기일을 정한대로 이 명령을 내리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15일로 잡았으며, 이제는 이 도로 하여금 약속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니 물려서 27일로 정하였습니다. 대개 물길을 따라 가니 이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요, 다만 짐배를 정하여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매우 합리적일 것 같으니 짐작하여 처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28
살피지 못했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두번이나 글을 받고 진작 뵈옵고 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을 건의코자 했습니다만, 접전할 적에 조심하지 않아 적탄을 맞았으나 죽음에 이를 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연일 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다친 구멍이 넓게 헐어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밤낮을 잊고서 혹 뽕나무 잿물로 혹 바닷물로 씻어 보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니 민망합니다. 군사를 출발하는 날이 정해진 것이 언제입니까. 소속 변방의 장수 중에서 녹도만호 ∙ 방답첨사가 있고, 수령 중에서는 흥양현감 ∙ 순천부사 ∙ 낙안군수가 있으나 비단 이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고 있고, 우도의 각 고을과 포구도 혹 스스로 무너질 곳이 있으니, 아직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아진 것이 이와 같습니다.
 
229
가뭄과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밤낮으로 못내 걱정합니다만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나아가 알현하고자 했으나, 몸을 돌보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어깨의 큰 뼈까지 깊이 다쳐 구멍 궂은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로 연일 씻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습니다. 장마가 걷히자 가뭄이 들고 더위가 혹심한데,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우러러 사모합니다. 전에 아팠던 이질은 이제 어떠하십니까. 삼가 사모하는 마음 그지 없습니다. 제 생각이 아무 소용이 없겠습니다만, 두번이나 주신 글을 받았음에도 곧 나아가려했으나, 접전할 적에 몸을 돌보지 않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분투하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매우 무겁게 되었고, 비록 죽을만큼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연일 갑옷을 입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구멍이 헐어서 궂은물이 줄줄 흘러 나와,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씻어도 아직 별로 차도가 없으며 치료하러 다니고 있으나 아직 아픈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있어 민망합니다.
 
230
군사를 출발시킬 날이 언제로 정해졌습니까. 단지 이 지방의 민심이 무너져 흩어졌으며 징병한다는 소식만 듣고도 바삐 달아나 피하려고만 한다니 통분함을 이길 길 없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어깨뼈을 깊이 다쳐 아직도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버린 몸이 되었습니다. 팔을 쓸 수가 없고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고 민망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에는 생각만 바쁘며, 몸의 병이 예까지 이르렀으니, 북쪽을 바라 보며 길이 탄식할 따름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한번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날 꾀만 품고 있으며, 연해의 사람 들도 거의 이미 무너져 흩어졌고 또 하는 말이 물길을 따라 가서 평안도 지방으로 옮겨 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바닷가 땅에서는 방어할 사람도 없고, 앞으로는 적의 소굴이 될 것이며, 부모처자 다시 서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민심이 헤어짐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231
왜적을 분멸하고 곧 바로 사천선창에 이르렀더니 왜적들이 무려 350여 명이 산봉우리에 진을 치고 있고, 산아래에 줄지은 배들은 대선 7척 ∙ 중선 5척 (계 12척)이 깃발들을 많이 꽂아 두고서 날뛰고 있거늘, 거북함으로 하여금 돌진케 하고, 천자 ∙ 지자 총통을 연 이어 쏘아대며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진격하여 화살을 쏘고 탄환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처럼 어지러우니, 왜적들은 물러가 숨어버 리고, 화살을 맞아 물에 빠지는 자와, 혹 끌어 안고 산으로 올라가는 자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왜놈의 머리도 많이 베고 또 왜장의 머리를 베었으며, 배는 남김없이 다 분멸하였습니다.
 
232
이튿날 6월 초1일 고성땅 모사랑포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습니다. 6월 초2일 이른새벽에 출항하여 경쾌선으로 하여금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찾아내게 하였더니, 그 회신 보고에, 당포에 왜대선 12척, 소선 20척 (계 32척)이 머물러 대어 있는데, 천천히 육지에 내려 당포 고 을의 집들을 분탕하고 있었습니다. 더러는 배 위에 있다고 보고하므로, 다시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한꺼번에 따라가서 소선 2척을 유인하였는데, 층루가 있는 대선과 여러 배들은 노를 저어 따라 나오는지라, 소리지르며 나발을 불게 하여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둘러 쌌습니다.
 
233
먼저 거북배로 하여금 곧장 쳐들어가 연이어 천자 ∙ 지자 총통을 쏘아 그 층루가 있는 대선을 깨뜨렸습니다. 왜적들은 스스로 그 힘으로는 우리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도로 당포선창으로 들어가 육지로 내려가는데, 철환과 화살을 쏘는 것이 바람과 비 처럼 나가니, 거의 다 맞아 다치거나 죽은 자도 많았으며, 먼저 왜장과 그를 따르는 왜놈의 목 7급을 베었으며, 나머지 배들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234
또 망보는 군사가 보고하기를, 왜 대선 20척 소선 10척 (계 30척)이 접때와 같다고 하거늘,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가 찾아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습니다. 왜적 들은 우리 수군을 바라 보고서는 물러나 숨으려고 견내량으로 향하였습니다. 날도 벌써 저물어서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냈습니다.
 
235
이튿날 초3일에는 우리 수군을 정비하여 협공하고 찾아서 토별하려다가 전혀 흔적이 없었으므로, 먼저 작은 경쾌선으로 하여금 적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찾으려고 그대로 머물게 하여 우수사를 기다렸습니다. 초4일 정오쯤에 우수사가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대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견내량에서 약속하고 착포(鑿梁)에서 밤을 지내고서 출항하였습니다.
 
236
고성 20리쯤 못미쳐서 섬 하나가 있는데, 한 사람이 나를 불러 말하기를, 왜적선 대중소 아울러 30여 척이 지금 고성땅 당항포에 들어와서 분주히 드나들고 있다고 하거늘, 그 당항포로(이 뒤에는 글이 없다.)
 
237
살피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이토록 우러러 생각하여도 제 정성이야 아무 소용이 없겠지요. 일찍 건강이 편치 않으시단 말을 듣고도 먼 바다를 지키고 있어 아직도 안부를 살피기 어려워 민망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곳의 적의 형세는 요즘 다른 흔적은 없고, 날마다 정탐해보니, 굶주린 빛이 많이 있어, 그 뜻이 반드시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방비는 곳곳이 허술하고 도무지 방어하며 지키는 꼴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놈들 중에 기이하게 여기는 것은 수군인데 수군으로써 싸움에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고, 관찰사에게 공문을 보내어도 얼추 감독할 뜻을 가지지 않으며, 군량조차 의뢰할 길이 없어, 온갖 생각을 해봐도 조처할 도리가 없으니, 수군의 일은 어쩔 수 없이 파하게 되겠습니다. 저같은 한 몸이야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겠지만, 나라 일을 어찌 하오리까.
 
238
전라도에 새로온 관찰사와 원수(元帥)조차 바닷가 수군의 양식을 군관을 보내어 곳간째 털어서 싣고 가니, 저는 다른 도의 먼 바다에 나와 있으니, 어떻게 조치할 길이 없어서 사세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어찌 하오리까. 만약 특별히 수군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수군에 관한 일을 통털어 검사하게 한 다면 바로잡을 도리가 있을 것입니다.
 
239
그래서 장계를 올렸으나, 아직 조정의 처분을 알 수가 없습니다. 종사관 정경달이 둔전을 감독 하는 일에 무척 애썼는데, 전 관찰사의 공문에는, 관찰사 이외에는 둔전을 계속 경작할 수 없고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하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정경달도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그 감독하던 일도 앞으론 허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민망합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도 그대로 눌러 둘 수는 없겠습니까.
 
 

4. 4월 기록에 없음

 
 

5. 계사년 5월 (1593년 5월)

242
5월 초1일 (갑인) 맑다. [양력 5월 30일]
243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244
5월 초2일 (을묘) 맑다. [양력 5월 31일]
245
선전관 이춘영(李春榮)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246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
 
247
는 것이었다.
 
248
이 날 보성군수(김득광) ∙ 발포만호(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나머지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못하였다.
 
249
5월 초3일 (병진) 맑다. [양력 6월 1일]
250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수군들이 많이 뒤떨어져 한탄스럽다.
 
251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李純一)도 왔다.
 
252
5월 초4일 (정사) 맑다. [양력 6월 2일]
253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이런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254
우수사 및 군관들과 함께 진해루에서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도 모여서 약속하였다.
 
255
5월 초5일 (무오) 맑다. [양력 6월 3일]
256
선전관 이순일(李純一)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아침밥을 대접하였다.
 
257
명나라에서 내게 은청금자광록대부(명나라의 직품)를 주었다고 한다. 아마 잘못 들은 것이리라.
 
258
저녁나절에 우수사 ∙ 순천 ∙ 광양 ∙ 낙안의 영감들과 함께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259
또 군관들을 편을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260
5월 초6일 (기미) (흐린 뒤에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4일]
261
아침에 친척 신정(愼定)과 조카 봉이 게바우개(蟹浦)에서 왔다.
 
262
저녁나절에 퍼붓 듯 내리는 비가 온 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물이 넘쳐 흘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263
저녁 내내 친척 신씨와 같이 이야기했다.
 
264
5월 초7일 (경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5일]
265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진해루로 옮겨 앉아 공무를 돈 뒤에 배를 타고 떠나려는데, 발포의 도망간 수군을 처형했다.
 
266
순천의 이방(吏房)에게는 입대에 관한 일을 태만히 한 죄를 처형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267
미조항에 이르자,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고 잤다.
 
268
5월 초8일 (신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6일]
269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가운데에 이르니, 만호(이여염)가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쳐 배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270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했다.
 
271
잤다.
 
272
5월 초9일 (임술) 흐리다. [양력 6월 7일]
273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巨乙望浦)에 이르니, 바람이 불순했다.
 
274
수사(이억기) ∙ 가리포첨사(구사직)과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며 의논했다.
 
275
저녁에 수사 원균(元均)이 배 두 척을 거느리고 왔다.
 
276
5월 초10일 (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6월 8일]
277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저녁나절에 작은 마루위로 올라가 앉았다.
 
278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기약한 날짜를 어긴 여러 장수들의 죄를 처벌하였다.
 
279
우수사 ∙ 가리포첨사도 모이어 같이 이야기했다.
 
280
조금 뒤에 선전관 고세충(高世忠)이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는데 보니,
 
281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
 
282
는 것이었다. 부찰사의 군관 민종의(閔宗義)가 공문을 가지고 왔다.
 
283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李義得) ∙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284
봉사 윤제현(尹齊賢)이 본영에 이르렀다는 편지가 왔다. 곧 답장을 보냈다. 그것은 본영에서 좀 기다리라는 내용이다.
 
285
거제도 견내량 진중에는 전라우대장(全羅左右大將) ∙ 경상중위장(慶尙中衛將) 김승룡(金勝龍) ∙ 경상우대장 전위장(慶尙右大將 前衛將) 기효근(奇孝謹) ∙ 좌중위장(左中衛將) 권준(權俊) ∙ 우중위장(右中衛將) 구사직(具思稷) ∙ 좌좌부장(左左部將) 신호(申浩) ∙ 전부장(前部將) 이순신(李純信) ∙ 중부장(中部將) 어영담(魚泳潭) ∙ 척후장(斥候將) 김완(金浣) ∙ 김인영(金仁英) ∙ 유군장(遊軍將) 황정록(黃廷祿) ∙ 우부장(右部將) 김득광(金得光) ∙ 후부장(後部將) 가안책(賈安策) ∙ 대장(代將) 송여종(宋汝悰) ∙ 참퇴장(斬退將) 이응화(李應華)
 
286
5월 11일 (갑자) 맑다. [양력 6월 9일]
287
선전관이 돌아갔다.
 
288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진중으로 갔더니, 이홍명(李弘明)과 가리포첨사도 와었다. 바둑을 두기도 했다. 순천부사가 또 오고, 광양현감이 이어서 왔다. 가리포첨사가 술과 고기를 내었다.
 
289
조금 있다가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여 말하기를,
 
290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
 
291
고 했다. 선전관이 돌아갈 때임금의 분부를 집행하는데 관해서 도원수 ∙ 체찰사에게 삼도의 공문을 한 서류로 만들어, 그걸 가지고 가는 사람도 함께 떠나 보냈다.
 
292
이 날 남해현감도 와서 봤다.
 
293
5월 12일 (을축) 맑다. [양력 6월 10일]
294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그 편에 순찰사의 공문과 시랑 송응창(宋應昌)이 패문을 가지고 왔다. 사복시(司僕寺)의 말 다섯 필을 중국에 보낼려고 올려 보내라는 공문도 왔다. 그래서 병방 진무를 띄워 보냈다.
 
295
저녁나절에 영남에서 온 선전관 성문개(成文漑)가 와서 봤다.
 
296
피란 중에 계신 임금의 사정을 자세히 전하였다. 통곡 통곡함을 가누지 못했다.
 
297
새로 만든 정철총통(正鐵銃筒)을 비변사로 보내면서 흑각궁 ∙ 과녁 ∙ 화살을 넉넉하게 보냈다. 앞의 성이라는 사람(성문개)은 순변사 이일(李鎰)의 사위이라고 한 때문이다.
 
298
저녁에 이영남(李英男) ∙ 윤동구(尹東耈)가 와서 봤다. 고성현령 조응도(趙應道)도 와서 봤다.
 
299
이 날 새벽에 좌 ∙ 우도 체탐인을 정하여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300
5월 13일 (병인) 맑다. [양력 6월 11일]
301
식사를 하고나서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쳐 메달아 놓고,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방답첨사 ∙ 사도첨사 및 우후 ∙ 발포만호가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302
밤에 소문에 영남우수사에게 선전관 도언량(都彦良)이 와 있다고 한다.
 
303
이 날 저녁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홀로 앉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니 온갗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304
자려해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닭이 울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305
5월 14일 (정묘) 맑다. [양력 6월 12일]
306
선전관 박진종(朴振宗)이 왔다.
 
307
같은 시각에 선전관 영산령(寧山令) 예윤(禮胤)이 또 임금의 분부(宥旨)를 받들고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308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배 돌리자,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이 나타나서 술을 함부로 마시고 못할 말이 없으니, 배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영산 영감이 취하여 엎어져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우습다.
 
309
이 날 저녁에 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310
5월 15일 (무진) 맑다. [양력 6월 13일]
311
아침에 낙안군수(신호)가 와서 봤다. 조금 뒤에 윤동구(尹東耈)가 그의 대장이 장계한 초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312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313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蔚)이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함께 왔다.
 
314
마침 정오에 활쏘는 곳에 이르러 순천 ∙ 광양 ∙ 사도 ∙ 방답 등과 자웅을 겨루는데, 나도 쏘았다.
 
315
저녁에 배로 돌아와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자세히 이야기했다.
 
316
5월 16일 (기사) 맑다. [양력 6월 14일]
317
아침에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 ∙ 감목관 이효가(李孝可) ∙ 이응화(李應華) ∙ 강응표(姜應彪) 등이 와서 봤다.
 
318
각 고을에 공문과 솟장(所志)을 써 보냈다.
 
319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돌아갔다.
 
320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321
점심을 먹을 때 윤동구(尹東耈)에게서 서울 관동(館洞: 서울)의 숙모가 양주의 천천(楊州 泉川: 양주군 회천읍 회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세상사가 이토록 가혹한가! 장사 지내는 일은 누가 맡아서 지내는지! 대진(大進)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애통하다.
 
322
5월 17일 (경오) 맑다. [양력 6월 15일]
323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324
아침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보성군수 ∙ 발포만호 및 이응화(李應華)가 와서 봤다.
 
325
변존서(卞存緖)가 병으로 돌아갔다.
 
326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327
보았더니,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지금 충주에 있다 하고,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으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328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329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330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수(秋露水: 약술이름)와 소고기 요리한 꼬치와 꿀통을 가져 왔다고 한다.
 
331
복중(服中)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그렇다해서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 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에게 주었다.
 
332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333
5월 18일 (신미) 맑다. [양력 6월 16일]
334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우수사와 가리포첨사가 와서 봤다.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335
종 목년(木年)이 게바우개(蟹浦: 아산시 염치읍 해암리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336
이 날 접반사에게 적세에 관한 공문을 삼도에 한 서류로 만들어 보냈다.
 
337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338
방답첨사가 와서 봤다.
 
339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어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340
새로 협선 두 척을 만드는데 못이 없다고 한다.
 
341
5월 19일 (임신) 맑다. [양력 6월 17일]
342
아침밥을 봉사 윤제현(尹濟賢)과 같이 먹는데, 여러 장수들이 몹시 권하고, 몸이 불편해도 억지로 입맛을 내게 하니 더욱 더 비통하다.
 
343
순찰사의 공문에는 명나라 장수(劉員外)의 패문에 의하여 부산바다 어귀는 벌써 끊어 막았다고 한다.
 
344
곧 공문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써 보내고 또 공무에 관한 보고를 써서 보성 사람이 지니고 가게 했다.
 
345
순천부사가 소고기 등 일곱 가지를 보내 왔다.
 
346
방답첨사 및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기숙흠(奇叔欽)도 와서 봤다.
 
347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했다.
 
348
5월 20일 (계유) 맑다. [양력 6월 18일]
349
새벽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역시 영등포의 척후병과 같았다.
 
350
저녁나절에 순천부사가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
 
351
오후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왜선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본영군관 등에게 왜놈의 물건을 실어올 일에 관한 편지를 썼다. 흥양 사람이 지니고 가게 일러서 보냈다.
 
352
5월 21일 (갑술) [양력 6월 19일]
353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통영시 한산면 유자도. 한산도와 서좌도 사이)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한다.
 
354
우수사와 같이 저녁내내 이야기했다.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355
오후 두시쯤에 비가 왔다. 농민이 바라던 것을 조금이나마 생기가 돌게 했다.
 
356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357
수사 원균(元均)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케 했다.
 
358
군중에서 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측함을 말할 수 없다.
 
359
마침내 밤에 미친듯이 비바람이 일었다. 먼동틀 무렵 거제도 선창(船滄)에 배를 대니 곧 22일이다.
 
360
5월 22일 (을해)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0일]
361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아주 흡족하게 왔다.
 
362
늦은 아침에 나대용(羅大用)이 본영에서 명나라 시랑(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는데, 파견원과 본도 도사행(낮은 직책으로 높은 품계를 맡은 것) 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이 먼저 기별을 가지고 왔다. 그건 송시랑이 파견한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러 온다고 했다. 곧 우후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내보내고,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대었다.
 
363
나대용(羅大用)으로 하여금 문안하는 일로 내어 보냈다.
 
364
저녁에 방답이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할 일을 말했다.
 
365
영남우수사의 군관 김준계가 와서 저희 장수의 뜻을 전했다.
 
366
비가 종일 그치지 않는다.
 
367
흥양군관 이호(李琥)가 죽었다고 들었다.
 
368
5월 23일 (병자) 새벽에 흐리고 비는 오지 않더니, 저 녁나절에 비가 오락가락하다. [양력 6월 21일]
369
우수사가 오고 이홍명(李弘明)도 왔다. 영남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했다.
 
370
본도(전라도)의 병마사(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이 왔는데,
 
371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
 
372
고 한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373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떠나온다"
 
374
고 전했다.
 
375
어두울 무렵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376
5월 24일 (정축) 비가 오락가락했다. [양력 6월 22일]
377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378
나대용(羅大用)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379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表憲)과 선전관 목광흠(睦光欽)이 함께 온다."
 
380
고 했다.
 
381
오후 두 시쯤에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진문에 이르므로, 우별도위 이설(李渫)을 배웅하고 마중하게 하여 배로 안내하여 오니,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382
우리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였다.
 
383
그는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이 장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384
예물 명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 하며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385
선전관이 표신을 평상에 놓은 뒤에 조용히 이야기했다.
 
386
아들 회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387
5월 25일 (무인) 맑다. [양력 6월 23일]
388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숙취로 술이 깨지 않았다.
 
389
아침에 통역 표헌(表憲)을 다시 청하여 맞아들여 명나라 장수가 하는 일을 물었더니니,
 
390
"명나라 장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할 따름이다."
 
391
고만 하였다. 또 말하기를,
 
392
"송시랑이 수군이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탐정(夜不守) 양보(楊甫)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
 
393
고 했다. 늦게야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증명서를 준것도 있다.
 
394
오정에 거제현 앞 유자도 앞 바다가운데에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하였다.
 
395
광양현감이 오고, 최천보(崔天寶) ∙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396
저녁에 조붕(趙鵬)이 와서 보고 이야기하고 보냈다.
 
397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도관찰사의 영리(營吏) 한 사람과, 접반사 군관 한 사람이 진문(陣門)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아니 하였다.
 
398
5월 26일 (기묘)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4일]
399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王敬得) 인데, 문자는 좀 안다.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400
순천부사가 집에다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광양현감도 왔다. 우수사 영감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가리포는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401
비가 저녁내 그치지 않고 밤새도록 퍼부었다.
 
402
밤 열 시쯤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하고, 내 군관 송한련(宋漢連)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다쳤다고 한다.
 
403
늦은 아침에 영남우수사(원균)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404
순변사 이빈(李濱)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405
5월 27일 (경진) [양력 6월 25일]
406
비바람에 부딪친 까닭에 진을 유자도(柚子島)로 옮겼다.
 
407
협선 세 척이 간 곳이 없더니, 저녁나절이 되자 돌아왔다.
 
408
순천부사와 광양현감이 와서 노루고기를 차려 놓았다.
 
409
영남병마사(최경회)의 답장이 오고, 그걸 보니 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를 내었다. 우습고도 우습다.
 
410
전라병마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는데,
 
411
"창원의 적들은 오늘 토벌하려 했다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아직 나가 치지 못했다"
 
412
고 했다.
 
413
5월 28일 (신사)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6일]
414
순천부사와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이야기했다.
 
415
광양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416
독운어사 임발영(任發英)을 위에서도 몹시 좋지 않게 여겨 아울러 조사하여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수군으로 한 가족을 징발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에 내린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
 
417
비변사에서 공문이 왔다. 광양현감은 그대로 유임시킨다는 것이었다.
 
418
승정원의 관보를 가져왔기에 이를 대강 보았더니 얼마나 통분한지 알수가 없다.
 
419
의병 용호장(龍虎將) 성응지(成應祉)에게 그 배를 바꿔 달 수 있도록 명령서를 써서 본영으로 내 보냈다.
 
420
5월 29일 (임오) 비가 내렸다. [양력 6월 26일]
421
방답첨사와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이 와서 봤다. 공문을 만들어 접반사(김수) ∙ 도원수(김명원) ∙ 순변사(이빈) ∙ 순찰사(권율) ∙ 병마사(선거이) ∙ 방어사(이복남) 등에게 보냈다.
 
422
밤 열 시에 변유헌(卞有憲)과 이수(李銖) 등이 왔다.
 
423
5월 30일 (계미) 종일 비가 내렸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양력 6월 28일]
424
아침에 봉사 윤제현(尹濟賢) ∙ 변유헌(卞有憲)에게 왜적에 관한 일을 물었다.
 
425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봤다.
 
426
수사 원균(元均)은 경략 송응창(宋應昌)이 보낸 화전을 혼자만 쓰려고 꾀하다가 병사의 공문에 나누어 보내라는고 하니까, 그는 공문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였다고 한다. 우습다.
 
427
명나라의 고관이 보낸 화공(火攻)무기인 화전 천오백서른 개를 나누어 보내지 않고 독차지하여 쓰려고 한다니 그 꾀부리는 꼴을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428
저녁에 조붕(趙鵬)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429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이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계집을 태우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430
가소롭다. 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431
그러나, 그 대장 원균(元均)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봉사 윤제현(尹濟賢)이 일이 있어 본영으로 돌아갔다.
 
432
군량미 열넉 섬을 실어 왔다.
 
 

6. 계사년 6월 (1593년 6월)

434
6월 초1일 (갑신) [양력 6월 29일]
435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436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가 한꺼번에 왔다.
 
437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왜놈의 물건을 보고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왜놈의 말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438
순천부사 ∙ 광양 현감이 와서 봤다. 탐후선이 왜놈의 물건을 가져 왔다.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이 왔다. 나대용(羅大用) ∙ 김인문(金仁問) ∙ 방응원(方應元)과 조카 봉도 왔다. 그 편에 어머니가 평안하심을 알았다. 다행다행이다.
 
439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함께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저녁밥을 대접했는데, 그 편에 들으니, 황정욱(黃廷彧) ∙ 이영(李瑛)이 강가로 나가서 같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한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440
이 날은 맑았다.
 
441
6월 초2일 (을유) 맑다. [양력 6월 30일]
442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적어 보냈다.
 
443
온양의 강용수(姜龍壽)가 진에 와서 명함을 드리고 나서 와 보고서 먼저 경상도 본영으로 갔다. 판옥선과 군관 송두남(松斗男) ∙ 이경조(李景祚) ∙ 정사립(鄭思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444
아침을 먹고나서 순찰사 군관이 공문을 가지고 왔다. 적의 정세를 알아서 돌아가는데 우수사와 상의하여 답하여 보냈다.
 
445
강용수(姜龍壽)도 왔다. 양식 다섯 말을 주어 보냈다. 원훈(元塤)이 같이 왔다고 한다.
 
446
정 영감도 배에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447
가리포첨사 우경(虞卿: 具思稷)과 같이 한 시간이나 이야기하였다.
 
448
저녁에 송아지를 잡아서 나누어 먹었다.
 
449
6월 초3일 (병술) 새벽에 맑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많이 왔다. [양력 7월 1일]
450
지휘선에 연기를 그을리려고 좌별선에 옮겨 탔다. 막 활쏘기를 하려는데, 비가 많이 왔다. 온 배에 비가 새지 않는 곳이 없어 앉을 만한 마른 곳이 없다. 한심스럽다.
 
451
평산포만호 ∙ 소비포권관 ∙ 방답첨사가 함께 와서 봤다.
 
452
저물 무렵에 순찰사(권율) ∙ 순변사(이빈) ∙ 병사(선거이) ∙ 방어사(이복남) 등의 답장이 왔는데, 딱한 사정이 많았다.
 
453
각도의 군마가 많아야 오천 마리를 넘지 못한다 고 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했다.
 
454
왜적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 이 때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초저녁에 상선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455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456
6월 4일 (정해) 종일 비가 내리니 긴 밤이었다. [양력 7월 2일]
457
아침밥을 먹기 전에 순천부사(권준)가 왔다. 식사한 뒤에는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과 이홍명(李弘明) ∙ 광양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 군사에 관한 이야기하였다.
 
458
6월 5일 (무자) 종일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3일]
459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사람들이 감히 배 밖으로 머리를 내밀기가 어려웠다.
 
460
오후에 우수사가 왔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461
저물 무렵 바람이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므로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462
이홍명(李弘明)이 왔다. 저녁에 밥을 먹은 뒤에 돌아갔다.
 
463
경상수사가 웅천의 적도들이 혹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음흉한 꾀가 가소롭다.
 
464
6월 6일 (기축)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양력 7월 4일]
465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보성군수(김득광)은 갈려가고, 김의검(金義儉)이 되었다고 한다.
 
466
충청수사가 배에 와서 이야기했다.
 
467
이홍명(李弘明)이 오고 방답첨사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468
저녁에 본영 탐후인이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469
또 소문에 흥양현감의 말이 낙안에 이르러 죽었다고 한다. 몹시 놀랬을 따름이다.
 
470
6월 7일 (경인)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7월 5일]
471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우수사 ∙ 충청수사도 왔다. 이승명(李勝明)도 와서 종일 서로 이야기했다.
 
472
저녁에 본도(전라도)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와서 봤다. 서울안의 소식을 낱낱이 전한다. 몹시 가증스럽고 한탄스러움이 그지없다.
 
473
6월 8일 (신묘) 잠깐 맑다가 바람이 불고 온화하지 않다. [양력 7월 6일]
474
아침에 영남수사의 우후가 군관을 보내어 산 전복을 선사했다. 그래서 구슬 서른 개를 대신 보냈다.
 
475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병으로 본영에 돌아갔다. 병선 진무 유충서(柳忠恕)도 병으로 사임하고 육지로 갔다.
 
476
광양현감이 오고 소비포권관도 왔다.광양현감은 소고기를 내어 같이 먹었다.
 
477
탐후선이 들어왔다.
 
478
각 고을의 색리 열한 명을 처벌했다. 옥과의 향소(鄕所)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에 많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결원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는 데도 매양 속이어 허위보고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목을 높이 메달아 보였다.
 
479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마음이 괴롭고 어지러웠다.
 
480
6월 9일 (임진) 맑다. [양력 7월 7일]
481
수십 일이나 괴롭히던 비가 비로소 개이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482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집노루 고기를 차려 놓았다.
 
483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배에 누웠었다.
 
484
접반관의 공문이 왔는데,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충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485
지방의 의병인 성응지(成應祉)가 돌아올 때 본영의 군량미 쉰 섬을 실어 왔다.
 
486
6월 10일 (계사) 맑다. [양력 7월 8일]
487
우수사(이억기)와 가리포첨사가 이곳에 와서 작전계획을 세부적으로 의논하였다. 순천부사도 왔다.
 
488
뜸 스무 닢을 짰다.
 
489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에,
 
490
"웅천의 적선 네 척이 본토(일본)로 돌아갔고, 또 김해 어귀에 적선 백쉰 여 척이 나타났는데, 열아홉 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갔다."
 
491
고 했다. 새벽 두 시쯤에 온 수사 원균(元均)의 편지에,
 
492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
 
493
고 한다. 그 하는 흉계와 시기(猜忌)하는 꼴을 말로서는 못하겠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네 고을의 군량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494
6월 11일 (갑오) 잠깐 비가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9일]
495
아침에 적을 쳐부수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우수사 원균(元均)에게 보냈더니,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더라고 한다.
 
496
이를 핑게삼아 대답이 없었다.
 
497
정오에 충청수사의 배에 갔더니, 충청수사는 내 배에 와서 앉아 있었다. 잠깐 이야기하다가 헤어졌다.
 
498
그 길로 우수사의 배에 갔더니, 가리포첨사 ∙ 진도군수 ∙ 해남현감 등이 우수사와 같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나도 몇 잔 마시고서 돌아왔다.
 
499
탐후인이 와서 고목을 바치고 갔다.
 
500
6월 12일 (을미) 잠깐 비가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0일]
501
아침에 흰 머리카락 여남은 올을 뽑았다. 그런데 흰 머리칼인들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502
종일 홀로 앉아 있는데, 사량만호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503
밤 열 시 쯤에 변존서(卞存緖)와 김양간이 들어왔다.
 
504
행궁(전주의 광해군 숙소)의 기별을 들으니, 동궁(東宮:光海君)께서 평안하지 않다고 하니, 그지없이 걱정이 된다.
 
505
정승 유성룡(柳成龍)의 편지와 지사 윤우신(尹又新)의 편지도 왔다. 소문에 종 갓동( 同) ∙ 종 철매(哲每) 등이 병으로 죽었다 하니 불쌍하다.
 
506
중 해당(海棠)도 왔다.
 
507
밤에 명나라 군인 다섯 명이 들어 왔다고 수사 원균(元均)의 군관이 와서 전하고 갔다.
 
508
6월 13일 (병신) 맑다. 저녁나절에 잠깐 비오다가 그쳤다. [양력 7월 11일]
509
명나라 사람 왕경(王敬)과 이요(李堯)가 와서 수군의 상황을 살폈다.
 
510
소문에 들으니,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나가 치지 않아서 명나라 조정에서 문책을 했다고 한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게 많았다.
 
511
저녁에 진을 거제도 세포(거제시 사등면 성포리)로 옮겨 머물렀다.
 
512
6월 14일 (정유) 비가 잠깐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2일]
513
아침밥을 먹은 뒤에 낙안이 와서 봤다. 가리포첨사를 청해다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514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광양현감은 노루고기를 차려냈다.
 
515
전운사(轉運使) 박충간(朴忠侃)의 공문과 편지가 왔다. 경상좌수사의 공문과 그 도우수사의 공문이 왔다.
 
516
저물녘에 비바람이 세게 치더니 곧 그쳤다.
 
517
6월 15일 (무술) 비가 잠깐 오다 개었다. [양력 7월 13일]
518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정걸) ∙ 순천부사(권준) ∙ 낙안군수(신호) ∙ 방답첨사(이순신)가 불러와서 철맞이 음식을 먹으며 놀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519
6월 16일 (기해) 잠깐 비왔다. [양력 7월 14일]
520
저녁나절에 낙안군수를 통하여 진해의 고목(告目)을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 도의 대장들이, `왜놈들이 황산동(黃山洞)으로 나가 진을 쳤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물러나, 진양과 의령을 지킨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521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왔다.
 
522
초저녁 쯤에 영등포의 척후병이 와서 보고한 내용에,
 
523
"김해 ∙ 부산에 있던 적선 무려 오백 여 척이 안골포 ∙ 제포 등지로 들어왔다."
 
524
고 한다.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적도들이 세력을 모아서 옮겨 다니며 침범할 계획도 없지 않을 것이다.
 
525
그래서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 정걸(丁傑)에게 공문을 보냈다.
 
526
밤 열 시쯤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것에도 마찬가지여서, 송희립(宋希立)을 경상우수사(원균)에게 가서 의논케 하니,
 
527
"내일 새벽에 군사를 거느리고 오겠다."
 
528
는 것이다. 적의 꾀란 무척 헤아리기 어렵다.
 
529
6월 17일 (경자)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양력 7월 15일]
530
이른 아침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충청수사 정걸(丁傑) 등이 와서 의논했는데, `함안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었다.
 
531
식사를 한 뒤에 경수(景受) 이억기(李億祺) 영감의 배에 가서 앉을 자리를 고치게 하여 우수사의 배에서 종일 이야기했다.
 
532
조붕(趙鵬)이 창원에서 와서 `적세가 엄청나게 대단하다'고 했다.
 
533
6월 18일 (신축)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양력 7월 16일]
534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닷새만에 여기 이르렀다. 아주 옳지 않다. 그래서 곤장을 쳐서 보냈다.
 
535
오후에 경상우수사(원균)의 배로 가서 같이 앉아 군사일을 의논하고 왔다.
 
536
연거푸 한잔 한잔 마신 것이 몹시 취하여 돌아왔다.
 
537
부안 ∙ 용인이 와서 그 어머니가 갇혔다가 도로 풀려 나왔다고 했다.
 
538
6월 19일 (임인) 비가 오다가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17일]
539
바람이 세차게 불며 그치지 않다. 진을 오양역(烏揚驛: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앞으로 옮겼으나, 바람에 배를 고정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고성 역포(亦浦: 통영시 용남면)로 옮기다.
 
540
봉과 변유헌(卞有憲) 두 조카들을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서 오게 했다.
 
541
왜놈의 물건과 명나라 장수의 선물 및 기름 등을 아울러 본영으로 보냈다. 각 도에 공문을 보냈다.
 
542
6월 20일 (계묘)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7월 18일]
543
제삿날이라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544
저녁에 방답 ∙ 순천부사 ∙ 광 양현감이 와서봤다.
 
545
조붕(趙鵬)이 그의 조카 조응도(趙應道)와 함께 와서 봤다.
 
546
이날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해 오는 일로 그대로 역포에서 잤다.
 
547
밤이 되니 바람이 잤다.
 
548
6월 21일 (갑진) 맑다. [양력 7월 19일]
549
새벽에 진을 한산도 망항포(閑山島 望何應浦)로 옮겼다.
 
550
점심을 먹을 때 원연이 왔다. 우수사도 청해서 같이 앉아 술을 몇잔 마시고 헤어졌다.
 
551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그 편에 어머니 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552
6월 22일 (을사) 맑다. [양력 7월 20일]
553
전선(戰船)에 자귀질을 시작했는데, 자귀장이 이백열네 명이다. 물건나르는 사람은 본영에서 일흔두명, 방답에서 서른다섯 명, 사도에서 스무다섯 명, 녹도에서 열다섯 명, 발포에서 열두 명, 여도에서 열다섯 명, 순천에서 열 명, 낙안에서 다섯 명, 흥양 ∙ 보 성에서 각 열 명이었다.
 
554
방답에서는 처음에 열다섯 명을 보냈기에 군관과 아전을 처벌하였는데, 그 정상이 몹시 간교하였다.
 
555
제2호 지휘선의 급수군 손걸(孫乞)을 본영으로 돌려보냈던 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다가 갇혔다기에 붙잡아 오라고 하였더니, 이미 들어와서 현신하였으므로, 제 맘대로 드나든 죄를 다스리고, 아울러 우후의 군관 유경남(柳景男)도 처벌하였다.
 
556
오후에 가리포첨사가 왔다. 적량의 고여우(高汝友)와 이효가(李孝可)도 왔다.
 
557
저녁에 소비포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봤다.
 
558
초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별다른 소식은 없지만 적선 두 척이 온천(칠천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했다.
 
559
6월 23일 (병오) 맑다. [양력 7월 21일]
560
이른 아침에 자귀장이들을 점호하였더니 한 명도 결근이 없었다고 했다.
 
561
새 배에 쓸 밑판을 만드는 것을 마쳤다.
 
562
6월 24일 (정미) 비가 내렸다. [양력 7월 22일]
563
식사를 한 뒤에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세게 불더니 저녁까지 그치지 않았다.
 
564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였다.
 
565
"적선 오백 여 척이 23일 밤중에 소진포(거제시 장목면 송진포)로 모여 들어갔는데, 그 선봉대는 칠천량에 이르렀다."
 
566
는 것이다. 초저녁에 또 대금산 정찰군과 영등포 정찰군이 와서 보고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567
6월 25일 (무신) 종일 비가 많이 왔다. [양력 7월 23일]
568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같이 앉아서 적을 칠 일을 의논하는데, 가리포첨사도 왔다. 경상우수사(원균)도 와서 함께 상의했다. 소문에
 
569
"진양에는 성이 포위되었는 데도 감히 아무도 나가 싸우지 못한다"
 
570
고 한다. 연일 비가 내려서 적도들이 물에 막혀 날뛰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잘 돕고 있는 것이다. 다행다행이다.
 
571
낙안에 군량 백서른섬 아홉 말을 나누어 주고, 또 순천부사(권준)가 군량 이백 섬을 가져 와서 바치고서 벼를 찧어 쌀을 만들었다고 했다.
 
572
6월 26일 (기유) 비가 많이 오고 마파람이 세게 불었다. [양력 7월 24일]
573
복병선이 와서 변고를 보고하여 말하기를,
 
574
왜적의 중선 ∙ 소선 각 한 척이 오양역(烏揚驛) 앞까지 이르렀다.
 
575
했다. 호각을 불어 닻을 올리고 모두 적도(통영시 화도)로 가서 진을 쳤다.
 
576
순천이 군량 일백 오십 섬 아홉 말을 받아들여 의능의 배에 실었다.
 
577
저녁에 김붕만(金鵬萬)이 진양의 적정을 살피고 오서 보고하기를,
 
578
"적도들이 동문 밖에서 무수히 진을 합쳤는데, 연일 비가 많이 와서 물에 막혀 있고, 독하게 날뛰며 싸우고 있으나 큰물이 적의 진을 침몰시키려 한다면 군량을 대주고 구원병을 이어 줄 길 도 없으니, 대군을 합쳐 쳐들어 가기만 한다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다."
 
579
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양식이 끊어졌고, 우리 군사는 편히 앉아서 고달픈 적을 맞이 하는 것이니, 그 형세가 마땅히 백승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또한 도와주고 있으니, 비록 수로에 있는 적이 오 ∙ 륙백 척을 합하여 오더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580
6월 27일 (경술)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25일]
581
오정 때에 적선 두 척이 견내량에 나타났다고 했다. 그래서, 온 진이 출항하여 나가 보니,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그래서 불을도(통영시 적도 ∙ 화도) 바깥 바다에 진을 쳤다.
 
582
아침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을 불러 와서 군사 문제를 토의했다.
 
583
충청수사가 그 군관을 시켜 흥양 군량이 떨어졌으니 석 섬을 꾸어 달라고 하기에 꾸어 주었을 따름이다.
 
584
강진의 배가 적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585
6월 28일 (신해)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했다. [양력 7월 26일]
586
어제 저녁에 강진의 척후선이 왜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온 수군이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왜적들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 놀라 황급히 달아났다.
 
587
역풍과 역조류를 받아 들어올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내고 새벽 두 시쯤에 불을도에 도착했다.
 
588
이 날이 곧 명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589
종 봉손(奉孫) ∙ 애수(愛守) 등이 들어와 분산(墳山:무덤이 있는 선산)소식을 자세히 물어서 알게 되니, 참으로 다행이다.
 
590
원 수사와 우수사와 같이 와서 군사일을 의논했다.
 
591
6월 29일 (임자) 맑다. [양력 7월 27일]
592
하늬바람이 잠깐 불더니 청명하게 개였다.
 
593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어란만호(정담수) ∙ 소비포권관(이영남)등도 와서 봤다.
 
594
종 봉손(奉孫) 등이 아산으로 가는데 홍(洪) ∙ 이(李) 두 선비와 윤선각(尹先覺) 명문(明聞)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595
진양이 함락되었다. 황명보(黃明甫) ∙ 최경회(崔慶會) ∙ 서례원(徐禮元) ∙ 김천일(金千鎰) ∙ 이종인(李宗仁) ∙ 김준민(金俊民)이 전사했다고 한다.
 
 

7. 계사년 7월 (1593년 7월)

597
7월 초1일 (계축) 맑다. [양력 7월 28일]
598
인종(仁宗)의 제삿날이다.
 
599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600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봉 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601
선전관이 내려 왔다고 들었는데, 초저녁에 임금의 분부(宥旨)를 가지고 왔다.
 
602
7월 초2일 (갑인) 맑다. [양력 7월 29일]
603
날이 늦어서야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배를 타고 선전관(류형)을 함께 대접하였다. 점심을 먹고나서 헤어져 돌아갔다.
 
604
해질 무렵에 김득룡(金得龍)이 와서 진양이 불리하다고 전했다. 놀라고 염려됨을 이길 길 없다. 그러나 그럴리 만무하다. 이건 반드시 어떤 미친 놈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605
초저녁에 원연 ∙ 원식(元埴)이 와서 군사에 관한 극단적인 말을 하니, 참으로 우습다.
 
606
7월 3일 (을묘) 맑다. [양력 7월 30일]
607
적선 몇 척이 견내량을 넘어오고, 한편으론 뭍으로도 나오고 있으니 통분하다.
 
608
우리 배들이 바다로 나가 이들을 쫓으니, (적들은) 도망쳐 버려 도로 물러나와 잤다.
 
609
7월 4일 (병진) 맑다. [양력 7월 31일]
610
흉악한 적 수만여 명이 죽 벌여 서서 기세를 올리니 참으로 통분하다.
 
611
저녁에 걸망포(巨乙望浦)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잤다.
 
612
7월 5일 (정사) 맑다. [양력 8월 1일]
613
새벽에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내용에,
 
614
"적선 열 여 척이 견내량을 넘어온다"
 
615
고 했다. 그래서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출항 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616
거제땅 적도(赤島)에는 말만 있고 사람은 없으므로 싣고 왔다.
 
617
저녁나절에 변존서(卞存緖)가 본영으로 갔다. 또 진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광양에서 왔다. 두치(豆恥)의 복병한 곳에서 성응지(成應祉)와 이승서(李承緖)가 보낸 것이다.
 
618
저녁에 도로 걸망포(巨乙望浦)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619
7월 6일 (무오) 맑다. [양력 8월 2일]
620
아침에 방답첨사(李純信)이 와서 보고, 소비포권관(李英男)도 와서 봤다.
 
621
한산도에서 배를 끌고 오는 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나갔다.
 
622
공방(工房) 곽언수(郭彦壽)가 행재소에서 들어 왔는데, 도승지 심희수(沈喜壽)와 지사 윤자신(尹自新)과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답장도 왔고, 윤기헌(尹耆憲)도 안부를 보내어 왔고, 승정원 소식도 아울러 왔다. 이들을 보니, 탄식할 일들만 많다.
 
623
흥양현감이 군량을 싣고 왔다.
 
624
7월 7일 (기미) 맑다. [양력 8월 3일]
625
순천부사 ∙ 가리포첨사 ∙ 광양현감이 와서 보고는 군사일을 의논했다.
 
626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열다섯 척을 뽑아 견내량 등지로 가서 탐색하러 위장(衛將)이 거느리고 나갔더니, 왜적의 종적이 없다고 했다.
 
627
거제에서 사로잡혔던 한 사람을 얻어 와서 왜적의 소행을 꼼꼼히 물으니,
 
628
"흉적들이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달아나려고 하였다"
 
629
고 하고, 또
 
630
"진양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전라도까지 넘어 것이다"
 
631
라고 했다. 이 말은 속인 것이다.
 
632
우수사(이억기)가 내 배로 왔기에 같이 이야기하였다.
 
633
7월 8일 (경신) 맑다. [양력 8월 4일]
634
남해로 왕래하는 사람 조붕(趙鵬)에게서 듣건대,
 
635
"적이 광양을 친다하여, 광양 사람들이 벌써 고을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
 
636
고 한다. 해괴함을 이길 길 없다.
 
637
순천부사(권준) ∙ 광양현감(어영담)을 곧 보내려고 하다가, 길가다가 들은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사도군관 김붕만(金鵬萬)을 알아 오도록 보냈다.
 
638
7월 9일 (신유) 맑다. [양력 8월 5일]
639
남해현령이 또 와서 전하기를,
 
640
"광양 ∙ 순천이 이미 다 타버렸다"
 
641
고 했다. 그래서 광양현감(어영담) ∙ 순천부사(권준)와 송희립(宋希立) ∙ 김득룡(金得龍) ∙ 정사립(鄭思立) 등을 떠나 보내 놓고, 이설(李渫)은 어제 먼저 보냈다. 듣자하니, 뼈속까지 아파 와 말을 못하겠다.
 
642
우수사(이억기) 및 경상우수사(원균)과 함께 일을 논의했다.
 
 
643
이 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644
잔 물결하나 일지 않네.
645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646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구나.
647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648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649
밤 한시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정을 알리는데,
 
650
"실은 왜적 들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들이 왜놈옷으로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서 여염집을 불질렀다"
 
651
고 했다. 그러니 이건 기쁘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양이 함락되었다는 것도 헛소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진양의 일만은 이럴리 만무하다. 닭이 벌써 운다.
 
652
7월 10일 (임술) 맑다. [양력 8월 6일]
653
김붕만(金鵬萬)이 두치(豆恥)에서 와서 하는 말이,
 
654
"광양의 왜적들은 사실이다고 했다. 다만, 왜적 백 여 명이 도탄(陶灘)에서 건너와 이미 광양을 침범하였다고 했다. 놈들의 한 짓을 보면 총통도 한발 쏜 일이 없다"
 
655
고 했다. 왜놈이 포를 한 발도 쏘지 않을리가 전혀 없다.
 
656
경상우수사와 본도 우수사가 왔다. 원연(元 )도 왔다.
 
657
저녁에 오수(吳水)가 거제의 가삼도(가조도)에서 와서 하는 말이,
 
658
"적선이 안팎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659
고 했다. 또 말하기를,
 
660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적도들이 무수히 창원 등지로 가더라"
 
661
고 했다. 그러나 남들이 하는 말이라 믿을 것이 못된다.
 
662
초저녁에 한산도 끝에 있는 세포(細浦)로 진을 옮겼다.
 
663
7월 11일 (계해) 맑다. [양력 8월 7일]
664
아침에 이상록(李詳祿)은 명령을 어긴 일로 먼저 나가고, 여러 장수들은 전령내릴 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보고하여 말하기를,
 
665
"적선 열 여 척이 견내량에서 내려온다"
 
666
고 하므로,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대여섯 척이 벌써 진 앞에 이르기에, 그대로 추격하니 달아나 재빨리 도로 넘어가버렸다.
 
667
오후 네 시쯤에 걸망포(巨乙望浦)로 돌아와서 물을 길었다.
 
668
사도첨사(김완)가 되돌아 와서 하는 말이,
 
669
"두치(豆恥) 나루의 적의 일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놈옷으로 갈아 입고 저희들끼리 서로 장난한 짓이다"
 
670
고 하니, 순천과 낙안은 벌써 결딴 다났다고 했다. 이토록 통분함을 이길길 없다.
 
671
어두울 무렵 오수성(吳壽成)이 광양에서 와서 보고하는데,
 
672
"광양의 적변은 모두 진주와 그 고을 사람들이 흉계를 짜낸 것이었다. 고을의 곳간은 쓸쓸하고 마을은 텅 비어 종일 돌아 다녀봐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다고 한다. 순천이 가장 심하고, 낙안이 그 다음 간다"
 
673
고 했다. 새벽에 우수사의 배로 갔더니 수사 원균(元均)과 직장(直長) 원연(元 ) 등이 벌써 먼저 와 있었다. 군사 일을 의논하다가 헤어졌다.
 
674
7월 12일 (갑자) 맑다. [양력 8월 8일]
675
식사하기도 전에 울(蔚)과 송두남(宋斗男)과 오수성(吳壽成)이 돌아갔다.
 
676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 ∙ 낙안을 청해 와서 일을 의논하고 같이 점심을 먹고나서 돌아 갔다.
 
677
가리포의 군량 진무가 와서 전하는 말이,
 
678
"사량 앞바다에 와서 묵을 때, 왜적들이 우리나라 옷으로 변장하고, 우리 나라의 작은 배를 타고 마구 들어와 포를 쏘며, 약탈해 가고자 한다."
 
679
고 했다. 그래서 곧장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세 척을 합하여 아홉 척을 보내어 달려가 잡아 오도록 단단히 명령하여 보냈다. 또 각각 배 세 척씩을 정하여 착량으로 보내어 요새를 방어하고 오라고 했다.
 
680
고목이 왔다. 또 광양 일은 헛소문이라고 했다.
 
681
7월 13일 (을축) 맑다. [양력 8월 9일]
682
저녁나절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683
"광양 ∙ 두치 등에는 적의 꼬라지가 없다"
 
684
고 했다. 흥양현감이 들어오고 우수사 영감도 들어왔다.
 
685
순천 거북함의 격군으로서 경상도 사람인 종 태수(太守)가 달아나다가 잡혀 사형에 처했다.
 
686
저녁나절에 가리포첨사가 와서 보고 흥양현감(배흥립)이 들어 와서, 두치의 잘못된 거짓 보고와 장흥부사 류희선(柳希先)의 겁내던 일을 전했다. 또말하기를,
 
687
"그 고을(고흥군 남양면) 창고의 곡식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고, 게포(蟹浦)에 흰콩과 중간콩을 아울러 마흔(되)을 보냈다"
 
688
고 한다. 또 행주대첩을 전했다.
 
689
초저녁에 우수사가 청하기에 그의 배로 가 봤더니, 가리포 영감이 몇 가지 먹음직한 음식물을 차려 놓았다. 밤 세시나 되어서야 헤어 졌다.
 
690
7월 14일 (병인) 맑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조금 내렸다. [양력 8월 10일]
691
진을 한산도 둘포(豆乙浦: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개미목)로 옮겼다. 비는 땅의 먼지를 적실 뿐이다.
 
692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693
순천부사(권준)가 들어와서 본부의 일을 말로 나타내지를 못하였다. 같이 점심을 먹고 그대로 머물렀다.
 
694
진을 한산도 둘포(豆乙浦)로 옮겼다.
 
695
7월 15일 (정미) 맑게 개었다. [양력 8월 11일]
696
저녁나절에 사량의 수색선 ∙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 ∙ 순천의 김대복(金大福)이 들어왔다.
 
697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698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고.
699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700
마음이 몹시도 번거롭네.
701
달이 뱃전을 비치니,
702
정신이 맑아져 잠 못이루는데,
703
어느 덧 닭이 우는구나.
 
704
7월 16일 (무진) 아침에 맑다가 저녁나절에 구름이 끼었다. [양력 8월 12일]
705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706
7월 17일 (기사) 비가 내렸다. [양력 8월 13일]
707
몸이 대단히 불편하다.
 
708
광양현감(어영담)이 왔다.
 
709
7월 18일 (경오) 맑다. [양력 8월 14일]
710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711
정사립(鄭思立)이 돌아왔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712
신경황(申景潢)이 두치에서 와서 적의 헛소문임을 전하였다.
 
713
7월 19일 (신미) 맑다. [양력 8월 15일]
714
이경복(李景福)이 병마사에게 갈 편지를 가지고 나갔다.
 
715
순천부사와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716
"진주 ∙ 하동 ∙ 사천 ∙ 고성 등지의 적 들이 이미 도망해 버리고 없다"
 
717
고 전했다.
 
718
저녁에 진주에서 피 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광양현감(어영담)이,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비참하고 통탄함을 이길 길이 없다.
 
719
7월 20일 (임신) 맑다. [양력 8월 16일]
720
탐후선이 본영에서 들어왔는데, 병마사의 편지 및 공문과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다.
 
721
그 통첩의 사연을 보니,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722
명나라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 본들 무엇하랴! 통탄할 일이다.
 
723
충청수사(정걸) ∙ 순천부사(권준) ∙ 방답첨사(이순신) ∙ 광양현감(어영담) ∙ 발포만호(황정록) ∙ 남해현령(기효근) 등이 와서 봤다.
 
724
조카 이해와 윤소인(尹素人)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725
7월 21일 (계유) 맑다. [양력 8월 17일]
726
경상우수사(원균)와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함께 와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는데, 원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칙하고 말할 수 없는 흉계이다.
 
727
이러하고서도 일을 같이 하고 있으니, 뒷걱정이 없을까?
 
728
그의 아우 원연도 뒤따라 와서 군량을 얻어서 갔다.
 
729
저녁에 흥양도 왔다. 땅거미질 때에 돌아왔다.
 
730
초저녁에 오수(吳水) 등이 거제 망보는 곳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731
"영등포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
 
732
고 했다.
 
733
7월 22일 (갑술) 맑다. [양력 8월 18일]
734
오수(吳水)가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온 사람을 싣고 올 일로 나갔다.
 
735
아들 울(蔚)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자세히 말한다. 아들 염(苒)의 병이 차도가 있다.
 
736
7월 23일 (을해) 맑다. [양력 8월 19일]
737
울(蔚)이 돌아갔다.
 
738
충청수사 정걸(丁傑)을 불러 와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739
7월 24일 (병자) 맑다. [양력 8월 20일]
740
순천부사 ∙ 광양현감 ∙ 흥양현감이 왔다.
 
741
저녁에 방답첨사와 이응화(李應華)가 와서 봤다.
 
742
초저녁에 오수(吳水)가 되돌아 와서
 
743
"적이 물러갔다"
 
744
고 했는데,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적들은 여전하다.
 
745
아들녀석 울(蔚)이 본영에 들어갔다고 했다.
 
746
7월 25일 (정축) 맑다. [양력 8월 21일]
747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이야기했다.
 
748
조붕(趙鵬)도 와서 체찰사의 공문이 영남수사(원균)에게 왔는데, 문책하는 말이 많이 있더라고 했다.
 
749
7월 26일 (무인) 맑다. [양력 22일]
750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방답첨사가 왔다.
 
751
우수사도 같이 이야기하고, 가리포첨사도 왔다.
 
752
7월 27일 (기묘) 맑다. [양력 8월 23일]
753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에서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다.
 
754
체찰사에게 갈 편지와 공문을 썼다.
 
755
경상우수사의 영리가 체찰사에게 갈 서류 초안을 가지고 와서 보고 했다.
 
756
7월 28일 (경진) 맑다. [양력 8월 24일]
757
아침에 체찰사에게 가는 편지를 고쳤다.
 
758
경상우수사(원균) 및 충청수사(정걸)과 본도우수사(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759
그러니 수사 원균(元均)의 나쁜 마음과 간악한 속임수는 아주 형편이 없다.
 
760
정여흥(鄭汝興)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 앞으로 갔다.
 
761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762
사도 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보자기 열 명이 왜놈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 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763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
 
764
고 했다. 곤장만 쳐서 놓아 줬다.
 
765
7월 29일 (신사) 맑다. [양력 8월 25일]
766
새벽 꿈에 사내 아이를 얻었다. 사로잡혔던 사내 아이를 얻을 꿈이다.
 
767
순천부사 ∙ 광양현감 ∙ 사도첨사 ∙ 흥양현감 ∙ 방답첨사를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흥양현감은 학질을 앓아서 곧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768
방답첨사는 복병할 일로 돌아 갔다.
 
769
본영 탐후인이 와서 아들 염(苒)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다.
 
770
저녁에 보성군수(김득광) ∙ 소비포권관(이영남) ∙ 낙안군수(신호)가 들어왔다고 했다.
 
 

8. 계사년 8월 (1593년 8월)

772
8월 초1일 (임오) 맑다. [양력 8월 26일]
773
새벽 꿈에 큰 대궐에 이르렀다. 모양이 마치 서울과 같았다. 기이한 일이 많았다. 영의정이 와서 인사를 하기에 나도 답례를 하였다. 임금님의 파천하신 일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종식되었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서로 의논할 때 좌우 사람들이 무수히 구름같이 모여 드는 것이었다.
 
774
아침에 우후가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775
8월 초2일 (계미) 맑다. [양력 8월 27일]
776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음이 답답하여 닻을 올려 포구로 나갔다.
 
777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따라 나오고,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778
저녁에 진쳤던 곳에 되돌아왔다.
 
779
이홍명(李弘明)이 와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780
저물녁에 우수사(이억기)가 배에 와서 하는 말이,
 
781
"방답첨사(이순신)가 부모를 뵈러 가겠다"
 
782
고 간절히 청하나, 여러 장수들이 보낼 수 없다고 하므로 이에 답하였다.
 
783
또 우수사 원균(元均)이 망녕된 말을 하며 나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많이 하더라고 말했는데, 모두가 망녕된 짓이니, 어찌 관계하랴! 아침에 염(苒)의 병도 어떠한지 모르겠고, 또 적을 소탕하는 일이 남아 있어 마음 속을 파먹으니 몸도 괴로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었는데, 탐후선이 들어와서 아들 염(苒)이 아픈 데가 곪아서 종기가 되었는데,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러 나와, 며칠만 늦었더라면 고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784
큰일 날뻔 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하니, 다행이다.
 
785
의사 정종(鄭宗)의 은혜가 매우 크다.
 
786
8월 초3일 (갑신) 맑다. [양력 8월 28일]
787
이경복(李景福) ∙ 양응원(梁應元)과 영리 강기경(姜起敬) 등이 들어왔다.
 
788
염(苒)에게 침으로 종기를 쨌던 일을 전하는데, 무척 놀랬다.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구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789
8월 초4일 (을유) 맑다. [양력 8월 29일]
790
순천부사 ∙ 광양현감이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791
저녁에 도원수의 군관 이완(李緩)이 삼도에 퍼져 있는 적의 형세를 보고하지 않은 군관 ∙ 색리를 잡아다가 심문하려고 진에 이르니, 같잖은 웃음이 나온다.
 
792
8월 초5일 (병술) 맑다. [양력 8월 30일]
793
조붕(趙鵬) ∙ 이홍명(李弘明) ∙ 우수사(이억기) 및 우후가 와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94
소비포권관(이영남)도 밤에 돌아갔다.
 
795
이완(李緩)이 술에 취하여 내 배에서 머물렀다.
 
796
소고기를 얻어다가 각 배에 나누어 보냈다.
 
797
아산에서 이례(李禮)가 밤에 왔다.
 
798
8월 초6일 (정해) 맑다. [양력 8월 31일]
799
아침에 이완(李緩)은 같은 때에 송한련(宋漢連) ∙ 여여충(呂汝忠)과 함께 도원수에게로 갔다.
 
800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보성군수 ∙ 발포만호 ∙ 이응화(李應華) 등이 와서 봤다.
 
801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오고, 우수사 경수 이억기(李億祺) ∙ 충청수사 정걸(丁傑)도 와서 의논을 하고 있는 동안에 우수사 원균이 하는 말은 걸핏하면 모순된 이야기를 하니, 우습고도 우습다.
 
802
저녁에 비가 잠깐 내리더니 그쳤다.
 
803
8월 7일 (무자) 아침에 맑더니 해질녘에 비가 내렸다. [양력 9월 1일]
804
농사에 많이 흡족하겠다.
 
805
가리포첨사가 왔다. 소비포와 이효가(李孝可)도 와서 봤다.
 
806
당포만호(하종해)가 작은 배를 찾아 갈려고 왔으므로 주어 보내라고 사량만호(이여념)에게 일러주었다.
 
807
가리포 영감은 곧 같이 점심을 먹고서 갔다.
 
808
저녁에 경상우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恭)이 와서 전하는데,
 
809
"적선들이 물러갔다"
 
810
고 했다. 그러나 원균(元均) 수사와 그의 군관은 항상 헛소문만 내기를 좋아하니 믿을 수가 없다.
 
811
8월 8일 (기축) 맑다. [양력 9월 2일]
812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 ∙ 방답첨사 ∙ 흥양현감 등을 블러 들여 복병 등에 관한 일을 같이 논의했다.
 
813
충청수사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는데, 한 척은 쓸 수 없다고 하였다.
 
814
김덕인(金德仁)이 그 도(충청도)의 군관으로 왔다.
 
815
본도 순찰사의 아병(군사) 두 명이 공문을 가져 왔다.
 
816
적의 형세를 알려고 우수사가 으슥한 포구로 가서 수사 원균(元均)을 만났다고 하니 우습다.
 
817
8월 9일 (경인) 맑다. [양력 9월 3일]
818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고, 염(苒)은 병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819
점심을 먹고나서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이르니, 충청수사(정걸)도 왔다.
 
820
영남수사(원균)는,
 
821
"복병군을 한꺼번에 보내어 복병시키기로 약속했다 하여 먼저 보냈다"
 
822
고 했다. 해괴한 일이다.
 
823
8월 초10일 (신묘) 맑다. [양력 9월 4일]
824
아침에 방답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임금님의 분부(宥旨)와 비변사의 공문과 감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825
해남현감(위대기)이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과 같이 왔다.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왔다.
 
826
우수사(이억기) 영감이 청하므로 그의 배로 갔더니, 해남현감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간신히 앉아서 이야기 하다가 돌아왔다.
 
827
8월 11일 (임진) [양력 9월 5일]
828
늦게 소나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불더니만, 오후에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앉았다 누웠다 했다.
 
829
여도만호에게 격군을 잡아올 일로 사흘 기한으로 갔다 오라고 일러 보냈다.
 
830
8월 12일 (계사) [양력 9월 6일]
831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원기가 허약하여 땀이 덧없이흘러 옷을 적시는데도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저녁나절에 비가 내리다가 개기도 했다.
 
832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도 왔다.
 
833
종일 장기를 두었다. 몸이 불편했다.
 
834
가리포첨사도 왔다.
 
835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836
8월 13일 (갑오) [양력 9월 7일]
837
본영에서 온 공문에 결재하여 보냈다.
 
838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839
이경복(李景福)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내어 보냈다.
 
840
경(庚)의 어미에게 노자를 문서에 넣어 보냈다.
 
841
송두남(宋斗男)이 군량미 삼백 섬과 콩 삼백 섬을 실어 왔다.
 
842
8월 14일 (을미) 맑다. [양력 9월 8일]
843
방답첨사(이순신)가 제사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정걸)과 순천부사(권준)도 함께 왔다.
 
844
8월 15일 (병신) 맑다. [양력 9월 9일]
845
오늘은 한가위 날이다.
 
846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정걸) 및 순천부사(권준) ∙ 광양현감(어영담) ∙ 낙안군수(신호) ∙ 방답첨사(이순신) ∙ 사도첨사(김완) ∙ 흥양현감(배흥립) ∙ 녹도만호(송여종) ∙ 이응화(李應華) ∙ 이홍명(李弘明) ∙ 좌우도 영감 등이 모두 모여 이야기 했다.
 
847
저녁에 아들 회가 본영으로 갔다.
 
848
8월 16일 (정유) 맑다. [양력 9월 10일]
849
광양현감(어영담)이 제사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정걸) ∙ 순천부사(권준) ∙ 방답첨사(이순신)도 왔다. 가리포첨사(구사직) ∙ 이응화(李應華)가 함께 왔다.
 
850
아침에 들으니, 제만춘(諸萬春)이 일본에서 어제 나왔다고 했다.
 
851
8월 17일 (무술) 맑다. [양력 9월 11일]
852
지휘선을 연기로 그을리고, 좌별도선에 옮겨 탔다.
 
853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배로 가니, 충청수사(정걸)도 왔다.
 
854
제만춘(諸萬春)을 불러서 문초하니, 분하고 분한 사연들이 많이 있다. 종일 의논하고 나서 헤어졌다.
 
855
초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와 지휘선에 탔다.
 
856
이 날밤 달빛은 대낮 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다. 회포를 견디기 어려웠다.
 
857
새로 만든 배로 내려 왔다.
 
858
제만춘(諸萬春)을 공초해보니 분한 사연들이 많이 있었다.
 
859
8월 18일 (기해) 맑다. [양력 9월 12일]
860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충청수사 정걸(丁傑)과 함께 이야기하였다.
 
861
순천부사 ∙ 광양현감도 와서 봤다.
 
862
조붕(趙鵬)이 와서 하는 말이,
 
863
"경상우수사의 군관 박치공(朴致恭)이 장계를 가지고 조정으로 갔다"
 
864
고 했다.
 
865
8월 19일 (경자) 맑다. [양력 9월 13일]
866
아침식사를 한 뒤에 원균(元均) 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내 배에 옮겨 타라고 청하였다.
 
867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 정걸(丁傑)도 왔다. 원연도 함께 이야기했다.
 
868
말하는 가운데서 수사 원균(元均)이 음흉하고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고, 그 하는 짓이 그럴 듯하게 속이니 이루 말할 수 없다.
 
869
원균(元均) 수사의 형제가 옮겨 간 뒤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왔다.
 
870
우수사 ∙ 정 수사와 같이 앉아 자세히 이야기했다.
 
871
8월 20일 (신축) [양력 9월 14일]
872
아침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 ∙ 광양현감 ∙ 흥양현감이 왔다. 이응화(李應華)도 왔다.
 
873
송희립(宋希立)을 순찰사에게 문안케 했다. 또 제만춘(諸萬春)을 문초한 공문을 가지고 가게 했다.
 
874
방답 첨사와 사도첨사로 하여금, 돌산도 근처에 이사하여 사는 자들로서 작당하여 남의 재물을 약탈한 자들을 좌 ∙ 우 두 패로 나누어 잡아 오라고 내어 보냈다.
 
875
저녁에 적량만호 고여우(高汝友)가 왔다. 밤이 깊어서야 갔다.
 
876
8월 21일 (임인) 맑다. [양력 9월 15일]
 
877
8월 22일 (계묘) 맑다. [양력 9월 16일]
 
878
8월 23일 (갑진) 맑다. [양력 9월 17일]
879
윤간(尹侃)과 조카 뇌 ∙ 해가 와서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시다고 전한다. 울(蔚)은 학질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880
8월 24일 (을사) 맑다. [양력 9월 18일]
881
조카 해가 돌아갔다.
 
882
8월 25일 (병오) 맑다. [양력 9월 19일]
883
꿈에 적의 모양이 있었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884
해질 무렵에 한산도 안쪽 바다로 돌아왔다.
 
885
8월 26일 (정미) 맑다가 비오다 했다. [양력 9월 20일]
886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왔다. 조금 있으니 우수사(이억기) 영감과 충청수사 정걸(丁傑) 영감도 같이 모였다. 순천부사 ∙ 광양현감 ∙ 가리포첨사는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도 왔다.
 
887
제사음식을 대접하는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술을 먹겠다고 하기에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망발하며 음흉하고도 도리에 어긋난 말하는 것이 해괴하기도 했다.
 
888
낙안군수(신호)가 보내 온,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나라 황제에게 상서한 초본과 명나라 사람이 고을에 와서 적은 것들을 보니,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889
8월 27일 (무신) 맑다. [양력 9월 21일]
 
890
8월 28일 (기유) 맑다. [양력 9월 22일]
891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왔다. 음흉하고 간사한 말을 많이 내뱉으니 몹시도 해괴하다.
 
892
8월 29일 (경술) 맑다. [양력 9월 23일]
893
아우 여필(汝弼)과 아들 울(蔚) ∙ 변존서(卞存緖)가 한꺼번에 왔다.
 
894
8월 30일 (신해) 맑다. [양력 9월 24일]
895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영등포로 가자고 독촉하였다. 참으로 음흉스럽다고 할만하다. 그가 거느린 스무다섯 척의 배는 모두 다 내어 보내고, 다만 일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내니, 그 마음 쓰고 행사하는 것이 다 이따위이다.
 
 

9. 계사년 9월 (1593년 9월)

897
9월 초1일 (임자) 맑다. [양력 9월 25일]
898
공문을 만들어 도원수와 순변사에게 보냈다.
 
899
여필(汝弼) ∙ 변존서(卞存緖) ∙ 조카 이뇌 등이 돌아갔다.
 
900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 정걸(丁傑)과 함께 이야기했다.
 
901
9월 초2일 (계축) 맑다. [양력 9월 26일]
902
장계의 초안을 잡아서 내려 줬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 ∙ 이여념(李汝恬) 등이 와서 봤다.
 
903
어두울 녘에 이영남(李英男)이 와서 보고, 또 전하기를, 병마사 선거이(宣居怡)가 곤양에서 공로를 세웠다고 한 것과 남해현령(기효근)이 체찰사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불려 간 것이다고 말했다. 우습다. 기효근(奇孝謹)의 형편없는 짓이야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904
9월 초3일 (갑인) 맑다. [양력 9월 27일]
905
아침에 조카 봉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또 본영의 소식도 들었다.
 
906
장계를 올리려고 초안을 만들었다.
 
907
순찰사(이정암)의 편지가 왔는데,
 
908
"무릇 군사인 일가족 등이 하는 일이라 일체 침해하지 말라"
 
909
고 하였다. 이는 새로 부임하여 사정을 잘못 알고 하는 일이다.
 
910
9월 초4일 (을묘) 맑다. [양력 9월 28일]
911
폐단되는 것을 진술하는 것과 총통을 올려 보내는 것과 제만춘(諸萬春)을 불러서 문초한 사연을 올려 보내는 것 등 세 통의 장계를 봉하여 올리는데, 이경복(李景福)이 지니고 갔다.
 
912
정승 류성룡(柳成龍) ∙ 참판 윤자신(尹自新) ∙ 지사 윤우신(尹又新) ∙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 지사 이일(李鎰) ∙ 안습지(安習之) ∙ 윤기헌(尹耆獻)에게는 편지를 쓰고, 전복을 정표로 보냈다.
 
913
조카 봉과 윤간(尹侃)이 함께 돌아갔다.
 
914
9월 초5일 (병진) 맑다. [양력 9월 29일]
915
식사를 한 뒤에 충청수사 정걸(丁傑)의 배 곁에다 배를 대어 놓고서 종일 이야기했다.
 
916
광양현감 ∙ 흥양현감 및 우후(이몽구)가 와서 보고서 돌아갔다.
 
917
9월 초6일 (정사) 맑다. [양력 9월 30일]
918
새벽에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할 일로 여러 배를 내어 보냈다.
 
919
식사를 한 뒤에 우수사(이억기)의 배로 가서 종일 이야기하고 거기서 원균(元均)의 흉칙스러운 일을 들었다.
 
920
또 정담수(鄭聃壽)가 밑도 끝도 없이 말을 만들어낸다는 말을 들으니, 우습기만 하다. 바둑을 두고나서 물러갔다.
 
921
그만두도록 할 배의 재목을 여러 배로 끌고 왔다.
 
922
9월 초7일 (무오) 맑다. [양력 10월 1일]
923
아침에 재목을 받아 들였다.
 
924
아침에 방답첨사가 와서 봤다.
 
925
순찰사(이정암)에게 폐단을 진술하는 공문과 군대 개편하는 일에 대한 공문을 만들어 보냈다.
 
926
종일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927
저녁때가 되니 탐후선이 오기를 몹시 기다려지는데도 오지 않았다.
 
928
해가 저무니 기분이 언짢고 가슴이 답답하여 창문을 렬고 잤다. 바람을 많이 쐬어 머리가 무겁고 아프니 걱정스럽다.
 
929
9월 초8일 (기미) 맑다. 바람이 어지러이 불었다. [양력 10월 2일]
930
새벽에 송희립(宋希立) 등을 당포 산으로 내 보내어 사슴을 잡아 오게 했다.
 
931
우수사(이억기)가 충청수사(정걸)와 함께 왔다.
 
932
9월 초9일 (경신) 맑다. [양력 10월 3일]
933
식사를 한 뒤에 모여서 산마루에 올라가서 활 세 순을 쏘았다. 우수사(이억기) ∙ 충청수사 정걸(丁傑) 및 여러 장수들이 모였는데, 광양현감은 아프다고 참가하지 않았다.
 
934
저녁때에 비가 내렸다.
 
935
9월 10일 (신유) 맑다. [양력 10월 4일]
936
공문을 적어 탐후선에 보냈다.
 
937
저녁나절에 우수사의 배에 이르러 방답첨사와 함께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938
체찰사의 비밀편지가 왔다. 보성군수(김득광)도 왔다가 갔다.
 
939
9월 11일 (임술) 맑다. [양력 10월 5일]
940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술을 마련하여 와서 봤다. 우수사(이억기)도 오고, 낙안군수 ∙ 방답첨사도 같이 했다.
 
941
흥양현감이 휴가를 받아 갔다. 서몽남(徐夢男)에게도 휴가를 주었다. 함께 나갔다.
 
942
9월 12일 (계해) 맑다. [양력 10월 6일]
943
식사를 한 뒤에 소비포권관(이영남) ∙ 류충신(柳忠信) ∙ 여도만호 김인영(金仁英) 등을 불러 술을 먹였다.
 
944
발포만호(황정록)가 돌아 왔다.
 
945
9월 13일 (갑자) 맑다. [양력 10월 7일]
946
종 한경(漢京) ∙ 돌쇠(乭世) ∙ 해돌이(年石) 및 자모종(自募終)이 돌아왔다.
 
947
저녁에 종 금이(金伊) ∙ 해돌이(年石) 등이 돌아갔다. 양정언(梁廷彦)도 같이 돌아갔다. 그러나 저녁에 비바람이 세게 일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어떻게 갔을런지 모르겠다.
 
948
9월 14일 (을축) 종일 비가 내리고 또 바람도 세게 불었다. [양력 10월 8일]
949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950
순천부사가 돌아왔다.
 
951
9월 15일 (병인) [양력 10월 9일]
 
952
9월 17일 (무진) [양력 10월 11일]
953
큰 포구에는 달리 한 마지기에 석 섬을 내는 것을 133섬 5말을 내었다.
 
954
(의견을 덧붙인 종이) 붓과 벼루에 뜻을 두었지만, 바다의 뭍의 일이 너무 바빠 쉴틈이 없고 내 구역을 내버려 두고 잊은지 오래 되었다. 이를 받들어.
 
955
(** 날짜는 알 수 없으나, 1593년(계사) 9월 15일 다음에 별도의 장부터 시작하여 5장에 걸쳐 적혀 있는 글이 있다.)
956
①㉠ 하나, 오랑캐의 근성은 언행이 경박하고 거칠며, 칼과 창을 잘 쓰고 배에 익숙해 있으므로, 육지에 내려오면, 문득 제 생각에, 칼을 휘드르며 돌진하고, 우리 군사는 아직 정예롭게 훈련되어 있지 않은 무리이므로, 일시에 놀라 무너져 그 능력으로 죽음을 무릅 쓰며 항전할 수 있겠습니까.
957
㉡ 하나, 정철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제야 온갖 연구 끝에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놈의 총통보다도 낫습니다. 명나라 사람들이 와서 진중에서 시험사격을 하고서는 잘 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 안에서는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마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서 알게 하였습니다.
958
㉢ 하나, 지난해 변란이 일어난 뒤로 수군이 전투한 것이 수십번이나 많이 되는데, 그 적들은 꺾여져 무너지지 않는게 없고, 우리는 한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959
②㉠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러운데, 충신으로 나설 이 그 누구인고!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께 달려있나니, 국경이라 산의 달 아래 슬프게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아픈 이 가슴, 신하들아! 오늘을 겪고 나서도, 그래도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임금이 "누가 곽자의나 이광필처럼 되겠느뇨"라고 지은 시이다.
960
㉡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러운데, 충신으로 나설 이 그 누구인고! 서울을 떠난 것은 큰 계획이요, 회복은 그대들께 달려있나니, 국경이라 달 아래 슬프게 울고, 압록강 강바람에 아픈 이 가슴, 신하들 아! 오늘을 겪고 나서도, 그래도 동인 서인 싸우려느냐!
961
③ 약속하는 일. 이제 여러 곳의 적들이 모두 영남의 바다로 모이고, 육지로는 함안 ∙ 창원 ∙ 의령에서 진양에 이르기까지, 물길로는 웅천 ∙ 거제 등지까지 무수히 합세하기에 도리어 서쪽에다 뜻을 두었으나, 이런 흉모를 더하는 것이 무척 통분할 뿐 아니라,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여러 장수들을 쓰는 것이 마음을 다했는지 여부와 시기를 따라 익히 살피면 혹시라도 먼저 돌진하자고 하여도 서로 싸우기만 하는데, 마음에 맺혀 잊지 못하는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고, 혹 욕심이 있어 늙은이에게 이로움이 절실하여 승패(勝敗)를 가늠하지 못하고서 저돌적으로 적의 예봉(銳鋒)에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 몸만 아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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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군사의 예리함의 정도가 바람과 비와 같고, 흉물들의 나머지 넋들이 달아나 숨는데,□□□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 떠는도다. 만번을 죽일지라도 한 목숨 살 꾀 돌보지 않는도다. 분하고 분할 따름이다. 나라와 종사를 안정하게 하려고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이에다 죽고 삶을 두니,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뛰어 분에 넘칩니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하였으며, 입으로는 교서(敎書)를 외우지만, 얼굴에는 군인 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비리고 노린내 나는 놈들에게 함락되어 앞으로 두가지 세력에 미치게 되것이니, 국가를 회복할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정치는 명나라 군사와 수레 및 말들의 소리를 기다리며, 하루가 1년이 되는 것 같으나, 적을 죽여 없애지 않고 화친을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러난 왜적들이 우리 나라에 수년 동안 침범해와 그 욕됨을 아직도 씻지 못했습니다. 하늘에까지 미친 분함과 부끄러움이 더욱 절실한데, 임금의 수레는 서쪽으로 가시고 종사(宗社)는 쓸쓸 하게 변하여, 온 나라 안에 충성스럽고 의리의 기운을 펴지만 스스로 백성들의 희망을 끊어버립니다. 저가 비록 아둔하고 겁이 많지만,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여러 장수들을 위하여 먼저 나가서 몸을 다칠지라도 나라에 은혜를 갚으려는데, 지금 만약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론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끼와 쇠뇌틀을 군문(軍門)에 두고 오랫동안 쓰지 않으면서 파수꾼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설사 □하지 않는다 해도 곧 우리 집을 불태워서라도 왜적의 손안에서 욕먹지 말아야 한다. 바로 위급한 일에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여러번 해전에서 승첩하여 크게 왜적의 콧대를 꺾었으니, 군사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으니, 비록 과중부적(衆寡不敵)일지라도 우리의 위세를 겁내어 감히 버티고 싸우려는자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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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계사년 (15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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