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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체(主體)의 재건(再建)과 문학(文學)의 세계(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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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
임화
작가를 올바른 세계관으로 인도하는 상징적 기제로서의 리얼리즘이 제시
1
主體[주체]의 再建[재건]과 文學[문학]의 世界[세계]
 
 
2
‘창작 방법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문학하는 태도부터를 결정해라!’
 
3
재삼 들어온 이 한마디 속에는 분명히 우리의 머리 위에 중압이 되어 누르는바 그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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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문학을 하느냐? 무엇때문에 문학이 필요하냐? 정히 문학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생사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창작하는 방법을 논의함은 자명한 饒舌[요설]이다. 그러나 문학하는 태도가 작가에게 있어서 어째서 사느냐는 근원적인 생활 이유의 극히 집중된 尖端[첨단]이 아닐까?
 
5
일찌기 나폴레옹의 長劍[장검]에다 자기의 예술을 비유한 대 발자크의 一言[일언]은 일개 시인적 放言[방언]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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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하는 것처럼 문학을 하는 작가의 태도야말로 위대한 작품창조의 기초였을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나 진지한 작가에게 있어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는 것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생활과 문학과의 合一[합일]은 반드시 위대한 예술의 모태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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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활에 있어서 無爲[무위]한 것과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無爲[무위]한 어떤 작가의 입장을 상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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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위한 문학이란 정히 생활과 예술이 소극적으로 合一[합일]한 전형적 입장이 아닌가? 그러므로 문학하는 태도에 대한 반성은 작가가 여하히 하여 생활 현실로부터 초연히 자립할까 하는 문학주의적 洞穴[동혈]에의 통로와는 엄격히 구별되는 것이다.
 
9
위대한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영광 있는 길이 문학세계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찾아내려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문학하는 태도를 自問[자문]하는 根本大義[근본대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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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창작 방법은 此等一切[차등일체]의 生死[생사]를 睹[도]한 문제를 떠나 詩句[시구]에 사용될 一個[일개]의 어휘나 소설에 삽입될 一片[일편]의 場景[장경]을 탐구하는 工匠[공장]의 영역인가 하면 이런 해석은 창작방법에 대한 무한히 유치한 無理解[무이해]나 악의에서 나온 비방의 경지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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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방법이란 본시 문학이 어떤 세계관과 合一[합일]될 때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고 그것이 體現[체현]할 문학적 경향과 특색을 해명할 뿐더러, 작가가 과학적 세계관을 획득하는 고유한 과정을 지시하는 실천적 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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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문학이전의 문제를 창작 방법 문제보다 선결하라는 부르짖음엔 과학적 文藝理論[문예이론]에 대한 一部人[일부인]의 명백한 악의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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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것은 급박하고 있는 작가들의 사상적 붕괴가 이 要望[요망]의 근저가 되고 그것을 지지하고 있는 침통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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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빠져 있는 사상적, 문학적 深淵[심연]으로부터 재생할 구체적 혈로를 비쳐 주지 못하는 이론에 대하여 지지의 손을 들어야 할 작가의 대의명분이란 과연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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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文藝理論[문예이론]은 작가들 속에 병균처럼 만연하고 있는 이론에의 불신을 自業[자업]에 대한 高價[고가]의 覿物[적물]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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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창작 방법이란 작가에게 창작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생활하는 방법까지를 암시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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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文藝理論[문예이론]의 지도적 임무란 것이 발휘된다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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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오늘날 작가들이 이론에 제출하는 기본 요구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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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방금 작가들이 해결해야 할 焦眉[초미]의 급무는 결코 일개 文學上[문학상] 과제가 아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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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보다도 한 인간으로 현실의 波浪[파랑]을 횡단할 길은 무엇이냐는 완전히 엄숙한 世界觀上[세계관상]의 大問題[대문제]다. 무엇이 한 사람의 白面作家[백면작가]를 절박한 世界觀上[세계관상]의 결정적 국면하에 直立[직립]시키는가? 실로 오늘날 이곳 현실이 갖는바 凜烈[늠렬]한 성격이 여기에 있다.
 
21
일찌기 醉[취]할 듯한 정열을 가지고 문학을 사회적 투쟁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 갔던 그 장면을 회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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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학 가운데는 이럴 골수에 徹[철]한 대립은 자취를 감추고 한줄기 카오스와 같은 탁류가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周知[주지]와 같이 이 사실은 현실로부터 갈등이 소멸한 표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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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보다 거대하고 결정적인 사회적 스트러글이 推移[추이]하는 시대의 중압이 되어 문학세계를 우뢰와 같이 엄습한 결과였다. 피차를 얽어 맺던 조직적 축대는 끊어지고 의지할 최후의 지주로서 양심을 가슴에 안은 채 외로운 사슴처럼 작가들은 방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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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폭풍은 자지 않었을 뿐더러 빗발은 한층 격렬히 퍼부어 양심이란 한장 옷자락이 잡아 찢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야만인 같은 벌건 육체가 드러날 것은 목전에 절박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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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두려운 광란 속에 최후의 일선으로 依據[의거]하려던 것이 예의 지성의 옹호였다. 그러나 비참한 일은 지성이란 양심적인 市民作家[시민작가]가 이미 상실 당하기 시작한 취약한 陣地[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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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옹호를 위하여 소집된 문화인의 국제적 회합은 이러한 정세가 낳은 현대의 아름다운 에피소드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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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파리의 창공에 다었던 우리의 기대와 우정은 실로 현실의 가혹과 자신의 무능에 대한 항의와 일편의 자긍이 어우러진 눈물 겨운 심정의 발로였었다. 그러나 문화는 역시 지성의 옹호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평화란 국제연맹 결의로 유지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문화는 특정의 생활 실천과 空然[공연]히 결합됨으로 자기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낡은 命題[명제]가 새삼스럽게 확인됨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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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컨대 유리창 너머에‘빵’을 둔 채 굶주리게 된 것이다. 한장의 유리창을 뛰어넘기 위하여 과연 이렇게 고민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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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행동주의, 낭만주의, 휴머니즘, 우리는 손에 잡히는 일체의 鐵片[철편]을 들어 통로를 穿鑿[천착]하였으나 손끝은 용이하게‘빵’위에 도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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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행동 · 낭만 · 인간 등 일련의 개념은‘누구의’‘어떠한’이란 구체성을 띄우지 않는 한 아직 날이 없는 칼에 불과하여 新時代 文學[신시대 문학]의 확고한 기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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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하면 우리는 철봉을 칼로 오인하는 어리석은 희극을 일장 되풀이 하는데 불과할 것이고, 비극은 역시 진리를 눈앞에 두고 휘어잡지 못하는 부끄러운 무능으로 환원된 것이다. 우리는 여하한 惡天候[악천후]에도 위협되지 않는 확고한 자기 주체를 재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주체의 재건이란 어떤 世界觀[세계관]을 다시 한번 이론적으로 재인식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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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이론적으로 파악되었던 世界觀[세계관]이 실천의 마당에서 山[산]새와 같이 우리를 두고 떠나간 쓰라린 경험에 아직도 血痕[혈흔]이 생생하지 않은가? 패배의 황야에서 우리는 정신과 육체가 승려와 같이 분열된 추한 시체로서의 자기를 폭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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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론이란 것이 대뇌의 일부에만 아니라 나의 육체, 나의 모세관의 세부까지를 충만시킬 한 사람의 순화된 思想人[사상인]으로서의 자기를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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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처음 우리는 정서의 志向[지향]이 모순되고 사상이 周衣[주의] 속에 감춘 몽둥이처럼 붉어지는 공식의 문학이 아니라, 혼연한 사상으로서의 문학을 창조할 眞摯[진지]한 母胎[모태]로서의 자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일직선으로 그곳에 접근하는 강행적 방법이 있다. 그러나 불행히 그것은 작가의 길이 아니고 정치가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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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작가가 아니라 劒[검]을 든 인간이었다면 우리는 죽어 기념비위에 성명을 남겼을망정 過日[과일]의 비극은 경험치 않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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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飛翔[비상]하고 질주할 힘만 아니라 실로 直立[직립]할 기력조차 상실하고 있다. 역시 우리는 卑近[비근]하고 가능한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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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限界[한계] 안에서만도 실로 우리는 하지 않으면 안될 너무나 많은 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만이 우리를 일층 참혹한 瓦解[와해]로부터 구출하고 한걸음씩 높은 계단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大言壯語[대언장어]는 걷지도 못하는 幼兒[유아]에게 질주를 가르치는 때문이며 문학자에겐 문학자다운 자기 재건의 길이 고유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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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적더라도 善[선]한 것을!’우리는 일순일지라도 멸시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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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미미하여 그것은 사태를 근본적으로 改變[개변]하는 정도에서 아직요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를 재건하고 다시 문학을 사회적 실천에로 접근시킴으로서 우리는 서서히 또는 간접으로일지라도 일반적 사업에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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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란 한개의 공허한 언어나 희망에 대한 하염없는 사모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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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우리가 휴머니즘과 논쟁하였을 때 尹圭渉氏[윤규섭씨]가 發[발]한 비난과 야유는 분명히 유감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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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정신과 양심이 미묘할지라도 현실의 정확한 파악 가운데 표시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이론적, 예술적 파악을 저해하는 유해한 심리로 逸脫[일탈]해 갈때 藝術學上[예술학상]의 諸問題[제문제]를 발전시킴이 무엇때문에 심장이 강한 痴行[치행]이냐? 고민하는 성실이란 감상 가운데 일체의 이성을 매장하는 열광은 아니다. 작가가 불안과 회의 속에 신음할 때 모든 문자를 감상의 述懷[술회]로 채우는 것이 비평가의 임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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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런 태도만이 시대적이고 현실적이라면 우리는 희지도 않고 붉지도 않은 제3의 입장을 찾아 휴머니스트같이 분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국 실천성을 잃은 이론인으로서의 비참이 이론까지도 잃어버리는 최악의 참경으로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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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이윤을 거두는 인간은 대체 누구일까? 韓雪野[한설야], 林和[임화]등에 대한 비판이 白鐵氏[백철씨] 등을 원조한 것이 아니라는 보장을 尹氏[윤씨]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는 입으로 大善[대선]을 외치면서 손으로 小善[소선]을 밀쳐 버리는 허위가 자기를 파멸로 인도하는 마수임을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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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재 입으론 어떤 사상을 이론적으로 긍정하고 그럴 듯하게 실천상의 遊離[유리]를 비탄하면서, 행동에선 그 이론의 최후의 일편까지를 미련없이 포기하는 일부 인텔리겐차의 비열한 심리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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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小善[소선]에의 경멸은 실천적 無爲[무위]와 이론적 離反[이반]의 최악의 구실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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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과학적 예술학은 작가의 세계관이 결정적으론 작가의 사회 실천에서 확립되고 실천의 장구한 과정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血肉化[혈육화] 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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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命題[명제]는 어느 때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동시에 현재 우리 작가들이 생활 실천을 통하여 자기 주체를 재건한다는 사업이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절망적이란 것도 전술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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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한가닥 작가적 실천의 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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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가에 있어 예술적 실천이 전생활의 집중된 첨단이란 중요한 사태를 再起[재기]할 필요가 있다.
 
51
다시 말하면 작가의 세계관을 좌우하는 것은 다른 사회 성원과 같이 생활적 실천이나 작가에게 있어선 대부분 예술적 실천이 그것을 매개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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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일상적 外的[외적] 실천이 작가의 세계관의 형성과 改變[개변]을 자극하고 촉진하나, 예술적 실천이 그것을 체계화 하고 확인하지 않는 한, 그 사상은 작가의 기본 실천인 예술 창작까지를 지배할 만큼 강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때 작가의 예술은 세계관과 모순하게 되고 때로는 세계관 그것을 개혁할 수까지 있는 것이다.
 
53
이 모순은 생활 실천에 대한 예술적 실천의 승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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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수다한 大作家[대작가]에 있어 이 모순은 빛나는 예술상의 공적을 남긴 일도 있다. 그러나 모든 생활 실천이 예술적 실천에 떨어지고 어떤 예술이든지간에 작가의 세계관을 좋은 방면으로 改變[개변] 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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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知[주지]와 같이 階級社會[계급사회]의 文學史上[문학사상]에서만 보는 고유한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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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진보적인 生活 群團[생활 군단]의 실천자이었을 때 예술은 생활 실천에서 거대한 好影響[호영향]을 받으며 반대로 작가가 비진보적 생활군단의 일원이었을 때 예술은 자기 발전상 크나큰 제한을 그곳에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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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술적 실천이 진보적 생활 실천과 모순하지 않고 또한 비진보적 생활 실천에 제한하지 않고 그 비진보적 생활 실천의 제한을 벗어나 승리하려면 작가가 리얼리스트일 때만 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진보적 생활 실천자임에도 불구하고 예술 경향상, 반리얼리스트이였다면 예술 창작 그것뿐만 아니라 생활 실천, 그곳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할 것이요, 작가가 비진보적임에 불구하고 예술 경향상 리얼리스트이었다면 예술을 비진보적 생활 실천이 파급하는 악영향에서 최대한으로 방어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非進渉的[비진보적] 世界觀[세계관] 그것을 改變[개변]시킬 만큼 반작용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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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작가에게 있어서는 예술적 실천이란 것이 매개하는 중심 계기라는데 작가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 특수성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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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엥겔스’의「발자크론」가운데 적용된 분석 방법은 史的[사적]이론의 일반공식이 아니라 예술 실천의 이러한 구체성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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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들이 자기 재건의 노선으로 고를 것은 예술적 실천 일반이 아니라 리얼리즘적 실천 그것이다.
 
61
「발자크론」에 의하면 리얼리스트 작가, 발자크와 王黨派[왕당파] 政治家[정치가] 발자크가 대립하였다고 하였다. 王黨派[왕당파] 政治家[정치가] 발자크의 사상은 물론 불란서 인민으로, 즉 문학 이전의 과정에서 성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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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예술을 통한 현실 인식, 다시 말하면 리얼리즘을 통한 예술 創造上[창조상]의 결과는 과연 하나의 사상이라 볼 수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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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희망으로서는 王黨[왕당], 貴族[귀족]의 승리를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작품을 통하여 표시한 귀족의 몰락과 시민의 승리의 필연성이란 확고한 사상이 아니고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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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승리! 그것은 사상에 대한 예술의 승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사상에 대한 옳은 사상의 승리다. 리얼리즘은 그릇된 생활 실천에 의하여 주체화 된 작가의 사상을 현실의 객관적 파악에 의한 과학적 사상을 가지고 擊衝[격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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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과학적 文藝學[문예학]은 리얼리즘을 現代唯物論[현대유물론]에 의하여 승인되는 유일의 정당한 문학적 방법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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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발자크, 톨스토이 같은 역사상의 대작가를 이해할 진실한 關鍵[관건]을 줄뿐 아니라, 와해된 주체가 문학적으로 재건되는 실천적 노선을 지시함으로써 또한 리얼리즘은 과학에 의하여 확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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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리얼리즘은 생활적 실천을 작가에게 매개하는 예술적 실천의 하나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작가를 좋은 생활 실천으로 인도하는데 높은 사상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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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은 와해된 주체를 객관적인 현실의 洋洋[양양]한 파악으로 끌어가고, 확립된 세계관은 생활적, 예술적, 실천에로 작가를 인도하여, 작가는 실천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관을 혈육으로서 주체화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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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이 작가에게 과학과의 결합을 교시하고 실천과의 접근을 또한 암시하는 것이다.
 
70
그러므로 엥겔스의「발자크론」을 비롯하여 新創作[신창작] 이론은 一他國[일타국] 現實[현실]에만 일치되거나 혹은 문학의 형식적 半面[반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主體[주체] 再建[재건]에 있어 막대한 실천적 의의를 갖는 것이다.
 
71
 
72
동시에 우리는 예술적 완성에의 가장 적확한 길을 이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는 또 한개의 사실 앞에 관심을 傾注[경주]해야 한다.
 
73
모든 작가에게 있어서 예술적 완성이란 사실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74
솔직이 말하면 예술적 완성 없는 진보적인 작가는 무의미한 일이다. 고민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심리에서나 순화된 사상인이고 싶다는 冀望[기망]에서만 주체의 재건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체의 확립은 위대한 문학의 전제인 때문이며, 예술적 완성을 가지고서만 작가는 사회생활에 공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리얼리즘이 우리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路順[노순]은 어떤 것인가?
 
75
우선 우리는 좋은 사상이 곧 훌륭한 예술이 아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공식적 문학이란, 좋은 사상이 예술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한개의 대명사다. 그러면 사상이 예술로 번역되는 관문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현실이다.
 
76
그러나 사회학과 예술의 차이는 결코 형식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학에는 고유한 구조와 자기의 법칙이 있는 독립한 세계다. 따라서 현실을 매개로 사상을 문학의 문자로 번역한다는 것은 일단 비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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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문학이란 사상(그것을 철학이라 가정하고)과 같이 독자의 방법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한 관념 형태 즉 광의의 사상의 一形態[일형태]다.
 
78
이만하면 벌써 문학 가운데 한개 예비된 선입견을 가지고 들어가는게 얼마나 부당한가를 알 수가 있다. 문학적 형상이란 것을 예로 든다 해도 그것이 황당한 주관의 피조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한 인간을 보편화 하였을 때 비로소 독자가 공감하는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은가?
 
79
요컨대 예술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大文學[대문학]이 전부 작가의 상상을 통한 주관의 피조물임에 불구하고 예술이 된 것은 작가가 실존한 인간생활에서 출발하여 雜然[잡연]한 세부를 정리하고 중요하고 중요치 않은 것을 나누어 실제 있는 것보다 일층 정교한 전형으로 재현시켰기 때문에 예술이 된 것이다.
 
80
그런 때문에 예술가의 임무란 한사람의 인간이 평생동안 경험해서도 다 알지 못할 인간생활을 몇시간의 독서에서 알 수 있도록 정제하여 시나 소설로 써내는데 있는 것이다.
 
81
과학과 문학은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며 또한 훌륭한 문학이란 아무의 손에서나 함부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투철한 몇사람의 인간만이 文學史上[문학사상]의 大作家[대작가]로 남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사실은 현실이란 말하기는 쉬우나 알아내기 얼마나 至難[지난]한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82
觀照主義[관조주의] ── 寫眞機的[사진기적] 리얼리즘 ── 란 현실의 雜然[잡연]한 표면을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요, 주관주의란 그것의 표면적 평가자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표면이란 水泡[수포]와 같이 현실의 한 面容[면용]에 불과한 것이다. 혼탁한 水面下[수면하]에 청정한 조류가 흐르는 바다처럼 현실의 深部[심부]란 표면과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문학을 毒[독]하고 있는 두 경향은 붕괴한 주체의 직접 소산이었다.
 
83
왜냐하면 표면적 수용이나 표면적 평가나 현실의 奧處[오처]를 투시 못하긴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만일 암담한 현실의 强射[강사]로 다른 것을 볼 시력을 잃었다면 후자는 黯然[암연]한 색조에 안구가 착색되어 온 세계가 暗黑一色[암흑일색]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84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 현실의 문학적 반영이었고 또한 주체의 붕괴가 문학상에 지불한 침통한 희생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金南天氏[김남천씨]의 「告發[고발]의 文學[문학]」론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본다면 深長[심장]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85
「告發[고발]의 文學[문학]」론은 명백히 우리 문학을 觀照主義[관조주의]와 主觀主義[주관주의]의 미몽에서 각성케 하는 최초의 경종이었다. 더우기 장구한 창작 방법 논쟁의 宿弊[숙폐]인 추상성을 刺衝[자충]하고 조선적 현실의 궤도 위로 이끌어 온 공적은 특기에 족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은 불행히 두 경향을 철저히 극복치 못했고 신창작 이론을 구체화 하려는 高價[고가]한 의도에 불구하고 결과는 의도에 일치하지 못하였다.
 
86
우선 기본적인 과오는 論者[논자]가 창작 과정에의 선입견의 삽입을 극도로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論者[논자] 자신이 벌써 한개 선입견에서 출발한데 있었다. 그것은‘告發文學[고발문학]’론이 작가에게 현실에의 심오한 침잠을 지시하는 대신 미리 준비된 한개 現實[현실] 評價[평가] ── 더우기 그릇된 평가 ── 를 투여한 점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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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날의 현실은 우리들에 의하여 고발되어야 할 내용으로 충만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현실은 긍정될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汚穢[오예]의 세계로 그치는 것일까. 그러나 현실이란 암흑 가운데 광명이, 광명 가운데 암흑이, 明滅消長[명멸소장]하는 모순하는 과정이며 운동 발전하는 것의 대명사가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사실의 현상과 본질은 일치할 것이다.
 
88
만일 현상과 본질이 동일하다면‘先哲[선철]’의 말과 같이 과학도 예술도 소용이 없는 것이며, 우리는 세계관을 고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암담한 현실 속에 광명이 들었다는 것은 명백한 허위니까……. 우리들에겐 절망밖엔 길이 없는 것이며 고발한 필요도 소멸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고발하려는 의도만이라도 가진 것은 아직도 암실 뒤에 숨은 커다란 태양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닌가?
 
89
명백히‘告發[고발]의文學[문학]’론은 현실의 부정적 방면의 평가에서 출발한 것이다. 더우기 잘못된 것은 그 黑眠鏡[흑면경]을 모든 작가에게 권한점이다.
 
90
 
91
만일 우리가 일제히 흑안경을 썼다면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현실은 언제나 모두가 암흑 일색으로 투영되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러면 조선 리얼리즘 문학이란 부정적 리얼리즘의 ─ 一分派[일분파]에 불과할 것이 아닌가?
 
92
사실 ‘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이란 작가가 현실의 객관적 자태를 투시하는 육안 위에 가로 걸린 한개의 흑안경임을 면치 못하였다.
 
93
이 속엔 아직 현실 가운데서 찬양할 누구도 발견치 못한 실천에서 유리된 양심적 지식인의 암담한 기분과 그 기분을 釀出[양출]한 觀照的[관조적] 現實觀[현실관]이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
 
94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이 觀照主義[관조주의]와 主觀主義[주관주의]를 철저히 비판치 못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告發文學[고발문학]’론이 우리에게 느끼게 한 매력은 결코 그 문자의 신선미에 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이론보다도 한걸음 더 현실에 육박한 점에 있었다.
 
95
主觀主義[주관주의]와 같이 꿈꾸거나 감상하고, 觀照主義[관조주의]와 같이 安閑[안한]히 匍匐[포복]하는 대신‘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은 현실과 격투하러 나섰고 우리는 그곳에서 논자의 격렬한 비타협의 정신을 보았다.
 
96
그러나 고임돌이 없이 시대가 그어 놓은 무자비한 일선을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告發文學[고발문학]’론은 실로 우리가 사력을 다하며 초극하려 하다가 초극치 못한 날카로운 절벽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은 절벽 밑에 넘어져서 우리로 하여금 절벽을 초극하기 용이케 하는 뜻 깊은 一石[일석]이 되지 않었는가 한다.
 
97
‘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암담한 현실에 처하여 분명히 작가를 현실의 大海[대해]로 유도하는 유력한 동력이 된다.
 
98
그러나 ‘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은 현실 중에 침잠하여 오직 현실 그것의 본질을 추구하는 정열로 변화해야 한다. 그때는 이미 흑색 안경은 무용의 장물이다.
 
99
그러나‘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과의 결별과 더불어 작가는 모든 先入見[선입견], 즉 일체의 주관적 활동을 포기해야 하는가?
 
100
이곳에도 역시‘告發[고발]하는 文學[문학]’론의 觀照主義的[관조주의적] 과오가 있었다. 金氏[김씨]는 창작 과정중에 선입견, 주관이 가담하는 일체의 문학을 레볼루셔널 로맨티시즘에 이르기까지‘아이디얼리즘’이라 排棄[배기] 하였다. 그러므로‘告發文學[고발문학]’론은 필연적으로 문학상에서 세계관의 의의를 무시하는 중대한 誤診[오진]에 접근했던 것이다.
 
101
金氏[김씨]가 리얼리즘 가운데 허용한 유일의 주관적인 것이‘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이었고, 소셜리즘적 의식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더우기 論者[논자]는 이것을 객관적 존재의 반영이라 高調[고조]하였다.
 
102
資本制的[자본제적] 현실의 객관적 반영은‘告發[고발]하는 精神[정신]’에 그치는 것일까?
 
103
우리는 리얼리즘을 창작 과정중에서 일체의 주관적 활동을 배제하려는 硬化[경화]한 객관주의로부터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반대로 리얼리즘이야말로 대규모로 과학적 抽象[추상]과 결합하고 작가의 주관이 熾然[치연]히 활동하는 문학인 것이다.
 
104
왜냐하면 리얼리즘은 과학과 모순하지 않고, 과학은 작가의 현실 파악을 지도 원조하고 진보적 의식의 활동은 인식되는 현실을 일층 생생한 예술로 장식하기 때문이다.
 
105
그러므로 작가가 과학을 학습한다는 것은 자기 재건의 길인 동시에 예술적 완성에의 유력한 보장이다.
 
106
이렇게 현실에 침잠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정열은 급기야 현실의 奥處[오처]에 이르러 사회적 대립의 장렬한 본질과 遭遇[조우]할 것이며, 암담한 현실이란 심각한 내적 갈등의 一泡沫[일포말]에 불과함을 최종적으로 인식할 것이다.
 
107
이것이 우리가 현실의 객관성 앞에 자기 해체를 완료하고 과학적 세계관으로 주체를 재건하는 노선이며 우리의 문학이 狹隘[협애]한 현재 수준에서 역사적 지평선상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과정이다.
 
108
마음의 고민이나 希望[희망], 咏嘆[영탄], 또는 貧窮[빈궁]의 記述[기술]이나, 不定面[부정면]의 폭로 등에서 우리의 문학이 해방되면 실로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인간적 형상과 사건 실제의 생활보다도 더한층 다이나믹한 골격을 가진 大文學[대문학]의 길을 향하여 서서히 그러나 정확한 步武[보무]를 옮길 것이다.
 
109
그러나 이 길이 사회적 실천의 그것과 같이 단단한 포장도로가 아님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학적 노선은 무어라 명명 될 것인가? 이 리얼리즘은 과연 ‘소셜리즘적 리얼리즘’이라고 불러 부당할 것인가?
 
110
新創作[신창작] 理論[이론]은 본시 고정화 한 呪文[주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어느 한곳’에 있어 그곳 현실을 반영하고 圈外[권외] 작가를 유도하는데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다른 한곳’에 있어 작가들이 현실을 예술적으로 파악하며 붕괴된 주체를 재건해 가는데 더한층 적절한 구체성을 갖지 않았는가?
 
111
중심을 가진 문학계가 비진보적 작가를 재교육하는 방법이, 중심 없는 문학계에 있어서 양심적 작가가 자기를 재건해 가는 방법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112
그러므로 나는 그 이론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적용되매, 적용되는 근거의 路順[노순]은 조잡하나마 대략 敍上[서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113
따라서 이런 노선이 곧 우리의 특수한 생활적, 예술적 조건 가운데 구체화된 新創作[신창작] 이론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싶다.
 
 
114
(1937.1)
【원문】 주체(主體)의 재건(再建)과 문학(文學)의 세계(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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