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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가가 본 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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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1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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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가가 본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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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대한 측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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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년 성인출현(辰巳聖人出) ⎯ 내년 세계 대전설(明年世界大戰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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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鄭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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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 소유가 없다. 소유가 있다면 오직 고통 그것뿐이다. 고통의 인생도 죽기 전에는 이제나 나을까 저제나 나을까 하는 미망(微望)이 있으므로 미신이란 동무가 따라 다닌다. 나도 고통의 인생이다. 그래서 미신을 동무하였다. 남이야 나더러 완고라든지 비과학적이라 하든지 나는 이 동무를 버릴 수 없다. 이 동무가 왕왕 고통을 위안하여 주는 까닭이다. 그런데 신년이 왔다. 무진(戊辰)(1928년)이라 이름하는 신년이 왔다. 무엇으로 신년을 맞이할까. 나에게는 떡국도 없다. 딱총도 없다. 무엇으로 신년을 맞이할까? 미신의 동무야! 입 벌려라, 비결가(秘訣家)의 예언으로나 신년 무진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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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사(己巳)(1929년) 양년은 역래 조선의 비결가가 조선의 신운명을 개척하는 길년(吉年)이라 하여 비상히 진시(珍視)하던 해다. 이는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이란 5자의 비구(秘句)가 고대부터 유전하여 온 까닭이다. ‘진사성인출’의 ‘진사’는 다른 갑자의 진사가 아니요, 오직 무진·기사로 인정하여 온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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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왕검의 조선 건국이 무진·기사에 비롯하였다는 태고적 전설에 원인함인지? 혹 삼국 동북국 이래 조선 민족에 기념될만한 사실이 매양 무진·진사이었음에 원인함인지? ‘진사성인출’이란 비구가 전하여 온 원인은 고사가 잔결(殘缺)하여 말할 수 없으나, 대개 신라 말엽에 이르러서는 ‘진사성인출’이란 5자가 일반 민중이 미래를 점험(占驗)하던 유일한 성경(聖經)이 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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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무진에 기병(起兵)하여서 철원에 정도하여 후고구려를 건국(고려사에 따름)하고 발해를 구축(驅逐)하여 패서 십삼진(浿西十三鎭)을 정하고, 신라와 후백제를 격파하여 남방 각지를 개척하고 진사 성인의 위령(威靈)을 피웠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본래 궁예의 신으로 궁예가 기병하던 해에 ⎯ 무진에 ⎯ 송악 태수(訟嶽太守)가 되었음으로 또한 진사 성인으로 자처하고, 왕창근 경문(鏡文)의 ‘辰巳年中二龍見[진사년중이용견] 一則現形黑金東[일칙현형흑금동] 一則藏身靑木中[일칙장신청목중]’에 의하여 흑금 곧 철원에 정도한 궁예는 가짜 진사성인(僞辰巳聖人)이요, 청목(靑木) 곧 송악에 주수(駐守)한 왕건 곧 자기가 진짜 진사성인(眞辰巳聖人)이라 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를 대(代)하여 진짜 진사성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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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엽에 몽고제국 ⎯ 원조의 압박에 국위가 땅에 떨어지고 내란과 흉재가 그칠 날이 없어 인민이 도탄에 들어, 다시 진사 성인을 바라는 노래가 사방에서 일매, 요승 신돈이 자기가 무진에 출산(出山)함으로 진사성인으로 자처하여 역을 모(謀)하다가 주사(誅死)하고, 그 뒤에 이태조가 우왕(禑王)의 명을 받아 북벌군의 좌도통이 되어 위화도에 출둔(出屯)할새, 그 해가 또한 무진이므로 이태조가 드디어 ‘辰巳聖人出[진사성인출]’, ‘木子得國[목자득국]’, ‘眞人出於海島之中[진인출어해도지중]’ 등 모든 비구(秘句)를 참작하여 드디어 회군의 거사를 단행하여 왕씨를 벌하고 진짜 진사성인이 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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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50백 년간에는 유교 윤리가 홍포(弘布)된 까닭에 또 사회 문약이 극도에 달한 까닭에, 진사성인의 야심을 가지었던 자가 오직 선조 당년에 주사한 당시 유명한 박학자로서 또한 ‘충신불사이군’의 전제논리를 반대한 정여립뿐이요, 그 후에는 초췌하여 진사성인이 굴기할 만한 무진년이 없지 않았지마는, 한갓 삼재팔난(三災八難)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일갑자 이갑자를 지내고 금년 무진까지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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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이란 믿을 만한 것인가. 비결은 선지자의 예언을 적은 글월이라 하니, 먼저 선지술(先知術)의 가능 여부를 결정한 뒤에야 비결의 가신여부(可信與否)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는 자연계나 인사의 미래를 선지할 수 없으나, 상대적으로는 경험한 바에 의하여 미래의 일을 추지(推知)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의진(蟻陳)’, ‘구토(拘吐)’, ‘풍세(風勢)의 방향’ 등의 경험으로 미래의 우청(雨晴)을 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면상’, ‘수장(手掌)’, ‘음성’ 등의 경험으로 개인 장래의 수천 길흉을 선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성상(星相)’, ‘지리’, ‘음양’ 등의 경험으로 인하여 일국이나 일민족이나 혹 전세계의 길흉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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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성상에 관한 아견(我見)을 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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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령 모 갑성이 비치는 분야에 모 사건이 발생하던 것을 5회나 혹 10회를 경험하였다면, 이에 모 갑성은 모 사건에 관계되는 별로 가정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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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행(星行)의 도를 추산(推算)하여 모 갑성이 300년이나 혹 500년 후에 모국 분야에 비칠 것을 단정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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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고는 곧 추산한 바 모 년에 모 사건이 모국 분야에서 발생하리라 예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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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의 수(壽)가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이같이 구원(久遠)한 경험을 가질 수 있으랴? 하지만 고대에는 동서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천문학과 성상이 혼잡하여 가지고 일가가 세세 전문하여 변란이 발생되는 때의 성상을 구구(口口) 상전하여 왔던 까닭에 성상에 의거하여 미래를 추정한 비결들을 아주 허무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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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의 인류들이 구구발달(區區發達)한 과학을 가지고 자연계를 정복하였노라고 날뛰지만, 기실 인류는 어디까지 대자연의 노예이다. 왜 세계를 16억만 인이 일출하면 동작하고 일몰하면 혼수(昏睡)하느냐! 성상의 변동도 직접으로 기후 혹 풍토에 관계되고 간접으로 인심에 영향도 주리니, 아직 과학적의 설명을 가할 수 없다고 고인의 경험설을 전부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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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성인출은 궁예·왕건·이태조 등 기험(旣驗)한 사실로 보면, 《한자옥편》에 말한 바 같은 성인이 무진·기사 년간에 투태(投胎) 혹 탄생한다는 말이 아니라, 곧 신운명을 개척하는 중심사업이 무진·기사로써 된단 말이니, 이 말이 반드시 고성상가(古星相家)의 누대 경험에서 나온 말인즉 나는 얼마큼 이 말을 신인(信認)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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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갑오년(1894년)에 공주행을 하였다가 해지(孩地) 권씨 노인이 고비결중 ‘聖歲秋八月時可知黃槐滿庭之月白楊無芧之日[성세추팔월시가지황괴만정지월백양무서지일]’의 문구를 가지고, ‘공자가 경술생인 고로 경술을 성세(聖歲)라 한 것이니, 본조가 경술생인 고로 경술을 성세라 한 것이니, 이조가 경술년에 망하리라’고 해석함을 보았더니, 그때에 경술(1910년) 합병을 목격하였고, 갑인년(1914년)에 북경에서 우인 변영만군(下營晩君)에게 ‘프랑스(波蘭)가 1914년에 독립을 회복하리라는 해국(該國) 비결이 있더니, 금년 1914년에 세계대전이 발생되니 아마 비결이란 것이 조금씩은 맞는가 보다’라는 말을 들었더니, 그때 세계대전의 결과로 프랑스가 독립한 보도를 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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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양 건의 이야기를 김규식(金奎植) 군에게 고한즉, 군은 또 나에게 이하와 같은 이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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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영자신문에서 본즉 ‘독일(德國)에는 1888년에 독일제국이 망한다’ 하는 비결이 있었다. 그래서 비록 과학이 발달된 독일로도 이에 대한 미신적 공포가 없지 못하더니, 동년에 독일제국 윌리암 3세가 즉위하여 ‘국의 흥망은 인사의 선부(善否)에 있는 것이니, 비결을 믿을 것이 아니라’고, 고유(告諭)한 문자를 보았었다. 그 뒤에 독일 황제가 현명하므로 자칭하고 독일의 국세가 날로 강성하매, 그 신문을 보았던 내가 독일의 비결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곧 전 독일의 인민이 그 비결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년 1888년에 즉위한 윌리암 3세가 세계대전의 창수(倡首)가 되어 마침내 독일제국 붕괴의 화를 만들었슨즉, ‘1888년에 독일제국이 망한다’는 비결이 맞았다 함도 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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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년 정묘(1927년) 양력 11월 14일 북경 《순천시보》에 특호 대자로 ‘세계대전 명년개시’라 제하고, 그 차행에 다시 2호 활자로 ‘영국 성상가 추측’이라 주(註)한 기사가 있었다. 나는 안질로 2호자 이하는 자독(自讀)하지 못하나 호기심에 구사(驅使)한 바 되어 재방우인(在傍友人)의 역술을 구한즉 그 말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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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1일 합중전(合衆電) 영국인 스도 ― 트 씨는 유명한 이집트(埃及) 성(星)학자인데, 씨가 목일에 영국 성상협회 년회에서 아래와 같이 연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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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이미 재차 세계대전이 명년 5월 20일에 일어나 1936년 9월 16일에 종식될 터인데, 세계 각국이 장차 8년 동안 병화를 겪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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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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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세계대전의 이전에 자기가 곧 그 대전이 1914년 8월 4일에 일어나리라’하였더니, 과연 그 시기에 이르러 나의 예언이 맞았다. 이 술법은 원래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집트의 금자탑의 구조(構造)한 형세가 성상학의 후설(喉舌)과 같아 세계의 중요한 역사 사실을 그 발생 전에 선출(宣出)할 수 있다. 그 술법은 《성경》 중 선지의 자구를 조조(條條)히 연구하여 금자탑의 현묘한 표시와 대조하면 세계 미래의 역사를 손바닥 같이 들여다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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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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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차 세계대전은 인류의 상호 잔살(殘殺)뿐 아니라 풍재·수재·천붕(天崩)·지진 등의 사(事)가 종지하리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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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이 재기할 줄은 우리 일반이 다 예지할 수 있는 바, 그 시기는 확연치 못하나 대개 10년 혹 20년 후가 되리라 하는 것인데, 이제 저 성상가 스도 ― 트씨는 너무 돌올(突兀)하게 절근(切近)한 금년 5월 20일로 단정하였다. 그 신험여부(神驗與否)는 우리가 최근 미래에 명견(明見)하려니와 대개 인상이나 성상을 물론하고 근세의 것이 고대의 것과 같이 맞는 것이 적음은 무슨 까닭이냐? 혹은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류가 예언을 믿지 않는고로 맞지도 잘 않는다’하니 이것도 일리는 있는 말이나, 그러나 고대인은 이욕에 끌리는 일이 적어서 매양 청허한 마음으로 미래를 추단하지마는 근세에 와서는 경제적 투쟁이 너무 급박하여 저들의 인상·성상의 술사들도, 옷 걱정·밥 걱정·집 걱정 기타 모든 걱정에 돈 돈 ⎯ 하는 심적 악마가 영대(靈臺)를 요란하여 미래의 인세를 정찰하는 영능력(靈能力)을 소실하며, 또 혹 금융가나 세력가에게 이용한 바 되어, 돈벌이만 있으면 그 불험(不驗)을 불구하고 예언을 발하는 고로 근세에도 예언은 있지마는 맞는 예언은 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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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고비결의 ‘진사성인출’은 믿지마는 영국인 성상가의 명년 세계대전 설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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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비결 이야기를 하던 바이니, 근세에 가장 유행되는 《정감록》이나 일론(一論)하고 끝을 막으려 한다. 전설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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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은 원래에 이조 황궁의 비장이러니, 임진난이 나자 인심이 와해하므로 이를 위안하기 위하여 《정감록》을 남대문에 내걸고, 이조 운명이 아직 3백 년이나 남아 있다고 고유(告諭)하였다. 그때에 인민 중의 식자들이 이를 초록(抄錄)하여 전파한 까닭에 자구에 와오(訛誤)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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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이것이 일설이오. 본록 서문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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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으로 이태조의 자 태종에게 피해한 정몽주의 선조 정감(鄭鑑)은, 이태조의 선조 이심(李沁)과 친우였다. 양인의 친우가 양가 자손의 운명과 호상 잔살할 일을 일문 일답으로 예언한 것이 곧 《정감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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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이것이 또한 일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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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조 태종은 비결을 독신하던 태조의 자(子)임을 불구하고, 비결에 이씨 운명을 겨우 5백 년뿐이라 한 것을 통악(痛惡)하여, ‘비결은 믿지 못할 요서(妖書)’라고 그 자손과 제신에게 유고(諭告)하고, 고려 이래 황궁에 비장하였던 《해동비결(海東秘訣)》 이하 모든 비결을 모아 통구대로에서 만인의 이목 앞에서 불태워 버리었는데, 어찌 가장 이씨를 저주한 《정감록》만을 남겨 두었으랴? 하물며 《선원보략(璿源譜略)》에 이심이라 이름한 사람이 없으니, 양 설이다 턱없는 망설인 것이 또한 명백하다. 그러면 《정감록》은 어디서 나왔느냐? 혹자의 말을 거하면 태종 소화(消火) 이후 두문동(杜門洞)의 유신들이 양서를 지어 이조를 주매(呪罵)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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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웅전(趙雄傳)》이니, 전중(傳中)에 만고역적 이두병란 것이 곧 이 태조를 암시한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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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은 《정감록》이니, 녹중(錄中)에 이씨를 망케 할 자가 정씨라 함은 곧 이태조가 정몽주를 죽인 것을 통한하여 가설로 보복한 것이라 하니, 이것이 가장 근리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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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정감록》은 보복적 심리로 조작한 것인 고로 비결될 가치가 적을 뿐더러, 그 중에 중심되는 ‘계룡정도설(鷄龍定都說)’이 《삼국유사》나 《고려사》에 산견한 ‘平壤定都列國來朝[평양정도열국래조]’와 ‘若渡漢江京一席中分成兩國[약도한강경일석중분성양국]’ 등의 조선고비결과 위반되어 신용할 수 없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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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에도 ‘진사성인출’의 한 구가 기재되었으나, 그러나 이 운이 《신지비사(神誌秘詞)》와 맞을 뿐 아니라 또 동일한 5언시이니, 이는 비사의 구를 해록에서 기록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나는 《정감록》은 비결 외로 구축(驅逐)하고, 고비결의 ‘진사성인출’을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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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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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운이 있어도 또한 인물의 노력을 요하나니, 나는 무진년을 조선의 성년으로 믿는 동시에 더욱이 우리 조선 민중의 일반 노력을 빌고 말을 마친다. (북경 서성 객우(客寓)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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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1928. 1. 1).
【원문】예언가가 본 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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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 예언가가 본 무진 [제목]
 
  신채호(申采浩) [저자]
 
  조선 일보(朝鮮日報) [출처]
 
  192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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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