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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면 생각나는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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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4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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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생각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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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에 걸쳐 많은 눈이 내렸다. 벌써 입춘까지 지났으니 지금을 겨울이랄 수는 없고 봄을 위하여 글쓰기고 이번이 두 번 차이니 지금은 영락없는 봄이요 나의 마음도 벌써 봄을 안은 지 오래다. 그러므로 밖에는 흰 눈이 퍼붓고 있건만 책상에 마주앉아 ‘봄이면 생각나는 곳 혹은 사람’을 기록하고 있는 데 아무런 감정의 저어(齟齬)도 느끼지 않는다. 더구나 창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확실히 훈기를 품었고. 지금도 내리고 있는 무거운 눈은 겨울의 것이라기보다는 봄의 꽃이라는 게 실감이다. 지하실에 처박아 둔 화분을 무심결에 보았더니 그 중의 성급한 것은 벌써 신 멀건 움을 비죽이 내밀고 있다. 봄은 왔다. 봄은 대기 속에 가득 차 있다. 나는 그것을 육체적으로 느낀다. 봄을 느끼며 봄을 품으며 나는 지금 봄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과 잊히지 않는 사람을 홀로 회상하여 한나절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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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생각나는 곳―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3, 4처(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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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의 산과 물과 들. 비류강(沸流江)의 얼음이 꺼져서 한 간 방큼씩 한 얼음조각이 2, 3일을 연거퍼 흘러가버린 뒤 물은 다시 맑아져서 잉어떼가 배 위에서 잡힐 듯이 내려다뵈인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던 하루 하루에 12봉의 수풀이 각각으로 푸르러간다. 물감을 한 번 칠하고 그 위에 다시 칠하드키 나무는 점점 초록색으로 변한다. 그리고는 보리가 퍼렇게 자란 곳에서 종달새가 뜨고 하오개가 금산에 진달래가 필 무렵엔 모우봉(暮雨峰)과 자지봉(紫芝峰)을 비단필 같은 라일락이 둘러감는다. 푸렇게 깔린 잔디 위에 누워서 나는 방선문 쪽에서 벌판을 줄 긋고 달아 오는 버스와 트럭을 가물가물하게 안타까이 바라보며 졸림에 붙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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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나를 아늑한 고향은 산천 속에 가져다준다.―평양은 대동강과 보통(普通)벌. 동경은 옥천(玉川) 전차를 타고 구역(駒驛)에서 내려서 구릉이 비스듬히 펼쳐 있는 꽃프링크의 앞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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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물 살까지 이 세 곳의 봄 풍경에 안겨 자라났다. 그것은 나의 정서로 되었고 나의 살과 피로 되어버렸다. 봄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볼 때 그것은 마치 봄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감성화된 개념으로 되어 나의 가슴 속에 설레인다. 그것이 머리에 떠올라서 상념의 세계가 되어 나의 눈 앞에 펼쳐지는 동안 나는 마약에 취한 사람인양 한참동안 몸둘 곳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이 나의 눈앞을 스쳐서 필름과 같이 흘러버린 뒤 나는 이 ‘봄’이라는 어감과 함께 그 곳에 남아버리는 잊을 수 없고 또 잊혀지지 않는 두 사람을 발견한다. 그것은 또렷하게 새겨 쓴 커다란 자막과 같이 나의 망막을 쏘아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 중의 첫 사람은 내 죽은 선처(先妻)요, 또 한 사람은 오랫동안 불행한 한 방에서 나와 같이 살다가 폐를 앓어 세상을 떠한 T라는 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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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더불어 오는 이 두 사람에의 추억은 나에게 있어 태반 숙명적이란 느낌을 준다. 내 친한 벗 중에 죽은 이 또 많고 불행한 중에 소식을 끊은 이도 많건만 그리고 그 대부분이 특별한 회상의 순간에만 가끔 나의 가슴을 두드려 한나절을 우수에 잠기게 할 뿐이건만 이 두 사람의 환영은 거의 결정적인 압력 같은 것으로 되어 봄이면 나를 깊은 추억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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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때로 이들의 환영에서 괴로운 채찍을 머리와 등에 느낀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나의 머리를 구하려고 나는 이들의 환영을 부숴버리려고 안타까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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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들이 땅속에 묻힌 지 4, 5년을 지낸다. 그들은 그러나 봄과 함께 항상 나의 옆에 그리고 나의 마음에 퍼렇게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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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처에 관한 기록은 이 곳에 적는 것은 쑥스러울 뿐 아니라 또한 그 기회도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나의 생활의 반려이었고 청년기의 상반을 점령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 때문에 회상은 단편적으로 또렷하게 나타나서 원고지 십여 매에 대상이 되기보다는 광범하고 포착할 수 없어 오히려 지난날의 생활기록으로서만 재현(再現)할 수 있을 성질에 속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떠한 한 폭의 사건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한 시절의 광활하고 막막한 분위기와 함께 나의 속에 우러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특수한 정황과 표정과 행동을 수반하고 나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난다기보다는 안개와 같이 자욱하게 나의 전신을 둘러싸서 시작보다도 오히려 촉각을 번거롭게 압박하는 느낌을 준다. 자막이 봄과 함께 고요히 나타나서 눈이 펄깍 부시도록 누구라고 똑똑히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이 지난 뒤 영상은 결코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눈과 귓등에 뱅뱅 돌면서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뿌리치기도 힘들다. 나는 이를 기록할 수는 없다. 무엇이라고 글자를 희롱하여 이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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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T에 대한 회상은 이것과는 다르다. 이를 생각하는 순간, 한 초도 뒤늦지 않고 화면과 같이 사건이 눈앞에 벌어진다. 아니 사건 속에 T가 회상되고 동시에 한 폭의 정황이 이를 둘러싸고 일시에 내 눈에 재현되다. 그리하여 생생한 체취를 가지고 그는 나의 옆에 있고 동시에 나는 그와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이는 회상이 아니고 활화(活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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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가 내가 있는 방에 처음으로 온 것은 아직도 겨울이 겨우 한 고비를 넘어서 추위는 영하 15도를 상하(上下)하던 때이었다. 그는 관북 명천 태생이었으나 오랫동안 국경에 살았고 또 이 곳에 오기까지는 원산 부두에서 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푸른 옷에 맨발을 벗은 채 그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그 전날 밤 다른 방에 왔다가 같은 고향 사람이 있어 전방이 된 것이라 한다. 달포를 해를 못 보았다는데 아직도 오래인 동안 해에 끄실리고 노동에 단련된 몸은 철색으로 와락부락해 보였고 몸을 닦을 때 보면 가슴과 엉덩이에 구릉 같은 살이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침착하고 가장 정확하게 세상을 볼 수 있을 32, 3세의 장년. 그는 번호 관계로 나의 옆에 앉았다. 그가 와서부터는 나는 새로운 지식을 얻기에 바빴다. 주로 파쟁(派爭)에 관한 역사. 나는 그것을 직접 몸을 가지고 경험한 그로부터 몇 달을 두고 세세히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의 화인(禍因)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자기네들이 무엇이라고 조금만 끄적거리면 그것이 최대의 경계와 조심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옛날의 추잡한 역사의 되풀이가 되기 쉽다는 것. 이리하여 당분간은 이러한 의생이 끊이지 아니하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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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동안에 겨울은 점점 봄으로 접어들었다. 높은 창에 드는 해가 앞바람벽에서 점점 뒤로 이동이 되다가 얼음이 완전히 풀어진 창문에 흰 광선이 함뿍 들이쏘일 때 우리는 푸 한숨을 짚고 멍하니 좁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다. 해는 유난히 길어지고 밤마다 누운 몸이 노곤하게 피로해질 때 그리고 인왕산 위에 오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날이 불어갈 때 기척 없이 찾아오는 고양이 같이 봄은 이 방 안을 소리 없이 방문하는 것이다. 해가 창에서 벗어져 떨어지면 잔한(殘寒)이 뼈에 사무치듯이 잔등이 오실오실해 오고 밖이 따스하면 따스할수록 방안은 아직도 싸늘한 일말의 냉기가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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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우리는 봄비로 말미암아 사흘 동안이나 바깥 구경을 못하였다가 맑게 개인 하늘에 희고 가벼운 구름이 두서너 뭉치 뭉게뭉게 피어나는 오후, 해는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때 운동을 하려고 나가는 안뜰엘 나갔다. 둥그렇게 뛰어돌게 만들어 놓은 정원에는 무궁화 다서 포기와 벚꽃나무 큰 것이 하나 서 있다. 잡초와 일년초는 겨우 싹이나 돋아날 때이다. 삿갓을 쓰고 긴 복도를 걸으며 우리는 사흘 동안 내린 비에 벚꽃의 망울이 얼마나 커졌을까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정작 강렬한 태양에 눈이 부시어서 아찔한 머리를 겨우 가누고 쳐다보는 나무에는 분홍색을 흠뻑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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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본 우리는 오랫동안의 훈련으로 입 밖에 내맺히는 감탄사를 겨우 입 속으로 거두어넣기는 하였으나 가슴을 두드리는 고동은 어떻게 진정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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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는 오는 듯 마는 듯 남모르게 찾아오던 봄이 비로소 굳게 닫힌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것과 같은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굶주리었던 욕망이 분류(奔流)와 같이 용솟음칠 때처럼 우리는 젊음 가슴을 이 아름다운 꽃 밑에서 안타깝게 애태웠다. 때때로 꽃은 성적 매력까지를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간이 단 3분. 우리는 하루종일 강렬한 자극 속에서 정열을 향락한 뒤인양, 가눌 수 없이 피곤한 몸을 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제자리에 앉아서도 아무도 말이 없다. 한두 마디로 표현하고 읊조리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인 거나 같이 아무게도 꽃이나 봄에 대하여 말하는 이가 없다. 나는 다시 책을 끌어다가 무릎 위에 펼쳐 놓았다. 그러는 순간 헌뜻 옆에 앉아 있는 T를 보니 그는 가만히 가슴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어 손 위에 숨기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두 번이나 몸조사를 하고 또 그렇게 감시가 엄한 가운데서 그는 손을 뻗쳐 꽃 한 송이를 따왔던 것이다. 나도 아무 말 안 하고 손 위에 놓인 한 송이의 꽃과 T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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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은 이튿날 새겨 T는 변기통 위에 타구를 올려놓고 붉은 피를 무럭무럭 쏟고 있었다. 일주일만에 그는 병감으로 갔다. 나는 그 곳에 있는 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고 내가 보석이 된 뒤 그들의 예심이 종결되었을 때 신문에 난 그의 이름 밑에서 나는 사망이란 두 자를 발견하였다. (무인〔戊寅〕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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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8년 4월호, ‘도시와 농촌의 춘정제태’ 특집)
【원문】봄이면 생각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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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조광(朝光) [출처]
 
  1938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 참조
  봄(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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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