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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갸륵한 일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명월관 본점에서 열린 ××고무 주식회사 임시 주주총회가 파하기는 밤 열시 조금 지나서였다. 인플레 경기의 물결을 타서, 최신식 기계의 설치와 그에 따라 모든 설비를 일신하고자, 다시 십만 원 증자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오늘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한 것이었다. 주주라야 가위 전부가 박병일의 액내이고, 삼사 주 혹은 십여 주 가진 주주들은 태반이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2
말썽꾼이 몇 명 없는 것이 아니로되 주 수가 워낙 태부족인 까닭에 만사는 결국 병일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3
큰 연회가 끝나면 으레 하는 버릇으로 병일은 홋홋한 제이차 회를 차리었다 처음에는 병일에게 . 긴한 손님이 오륙 명 있었으나 열두 시 전후로 하나씩 둘씩 슬슬 꽁무니를 빼어 버리고, 마지막으로는 병일과 고무회사 전부 취체역 원석호(元錫鎬)와 단둘이 붙어 앉게 되었다.
 
4
석호는 병일과 일본에서 조도전 대학의 동창이요 절친한 친구다. 병일의 경영하는 사업치고 그가 관계를 않는 것이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가간사에까지 참례를 한다. 말하자면 병일의 집안의 총지배인 격이다.
 
5
호리호리한 몸피에 손바닥만한 얼굴, 풍신이라고는 보잘 것이 없으되, 까막 까막하는 조그만한 눈엔 영채가 돌고 슬기와 꾀가 넘치는 듯하였다. 무엇이 제 비위와 틀려서 못마땅할 때에는 얼굴과는 딴판으로 큼직한 입을 꽉 다물고 새매처럼 쌔근쌔근한다. 그 쌀쌀한 품이 어줍지는 않을망정 넘보지는 못하게 생겼다. 그의 머리는 통이 작은 대로 빈 구석이란 바늘 한 개 넣을 틈이 없어 꼭꼭 들어찼을 뿐만 아니라, 또 잘게 잘게 그물처럼 가닥이 뻗은 듯하여 아모리 자딸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도 그 그물에서 빠져나가지를 못하는 듯하였다.
 
6
연회에는 엄벙뗑하노라고 술을 설치었다가 단둘이 남으매 술맛이 새로운 듯하였다. 더구나 석호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결코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와 보통 교제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이면 그는 술이란 적 구도 못하는 위인인 줄 알기 쉽다. 그러나 실상 그는 무서운 주량을 가졌다. 먹게 되어 먹으면 얼마를 먹어도 끄떡이 없다. 큰 입을 떡 벌리고 너털웃음을 웃고 취한 척도 하지마는 그의 머리는 언제든지 맹숭맹숭하였다.
 
7
기생도 허드레 기생은 뿌리뿌리 가버리고 병일의 연회의 대령 기생이라 할 명화와 초월이만 남았다.
 
8
석호의 옆엔 명화가 앉았고 병일의 옆에는 초월이가 붙었다. 초월은 석호와 까닭 붙은 기생이건만, 남 보는 데는 병일을 따르고, 그 대신 명화는 석호에게 더 긴한 척을 한다.
 
9
초월은 제가 붓는 대로 비워 내놓는 병일의 술잔을 보고 또 도꾸리(술병)를 들다가 술병이 너무 뜨거워서,
 
10
"에그머니!"
 
11
가볍게 부르짖고 쥐었던 병을 탕 놓고 말았다. 술은 톡 튀는 듯이 몇 방울 넘쳐 떨어졌다. 초월은 돈짝만한 손을 짤레짤레 흔들며,
 
12
"온 변이야! 오늘밤엔 왜 제잡담하고 술들만 잡수시어."
 
13
손을 입에다 대고 호호 불면서 제 옆의 병일을 건너뛰어 석호를 향해 실낱 같은 눈썹을 찡그려 보인다.
 
14
병일은 젓가락 끝에서 뱅뱅 미끌어지기만 하는 생선복회를 집으려고 애를 쓰다가 말고,
 
15
"왜, 데었니?"
 
16
하고 초월을 본다.
 
17
"데구 말구. 손바닥 꺼풀이 홀랑 벗겨졌는걸요."
 
18
"어데 좀 보자."
 
19
병일은 오그리고 있는 초월의 손가락을 폈다. 발그스름한 손바닥엔 땀만 촉촉히 났을 뿐이다.
 
20
"요런 거짓부리."
 
21
하고 병일은 힘 안 들이고 초월의 벌린 손바닥을 따리었다.
 
22
"에구 아파요!"
 
23
하고 손을 옴츠러들이고 또 석호를 향해 똥그란 눈을 흘겨보인다. 손바닥을 데었을 때 기껏 눈썹까지 찡겨 보였는데, 왜 못 본 척을 하느냐고 원망하는 눈치다.
 
24
신선로 국물에 만 국수를 한 입에 문 채로, 석호는 초월을 치떠보며,
 
25
"종로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기야. 왜 나를 흘겨봐!"
 
26
하고 그 조그마한 눈을 샐룩거린다.
 
27
"그럼 머……, 그럼 머……."
 
28
초월은 어리광 피듯 얼버무리고 아랫입술을 삐죽이 내어 민다.
 
29
"그럼 뭘로 영감이란 말예요?"
 
30
명화가 거들어 초월의 말 뜻을 설명해 준다.
 
31
"괘 ─ 니 언니는……."
 
32
하고 초월은 명화를 또 흘겨본다.
 
33
"사랑 싸움에 티 든단 말이냐! 얘 잘못했구나."
 
34
하고 명화는 꽃잎 같은 입술을 방싯거리며 웃는다. 살짝 드러난 덧니가 예쁘다.
 
35
"괘 ─ 니 사람을 들까부셔, 사랑이니 뭐니……."
 
36
초월은 고개를 씻둑한다.
 
37
"왜, 네 사랑은 남만 못해서 걱정이냐?"
 
38
석호도 명화의 말을 탄하는 듯이 돌아보며,
 
39
"에그머니, 부부가 덤벼듭시네, 혼자 사는 사람은 어데 서러워서 살겠나!"
 
40
하고, 명화는 응원을 청하듯 병일을 향해 바시시 웃어보인다.
 
41
"어규 어규, 참 혼자지 혼자야, 시침을 따도 작작 따요."
 
42
초월이가 입을 배시며 무는 듯이 되받는다.
 
43
"그럼, 내 몸이 하나지 둘이람?"
 
44
하고 명화는 면구한 듯이 고개를 외우친다.
 
45
"왜 너는 백년랑군을 팔뚝에 걸고 다닌다며!"
 
46
석호가 기어이 백년랑군 문제를 끄집어내고 말았다.
 
47
"어규, 또 그 말을 끄집어내서, 무슨 방패예요?"
 
48
명화는 비쭉해지며 톡 쏘아붙인다.
 
49
"방패는 네 방패지 내 방패냐? 그래 백년랑군을 팔뚝에 붙이고 다니니 든든하던?"
 
50
"사내가 뭐 종이쪽인가 붙이고 다니게."
 
51
"누가 아니래? 붙이려면 붙이고 때려면 떼고, 백년랑군도 신세가 말씀 아냐!"
 
52
"아이 속상해 죽겠네."
 
53
딱새처럼 부르짖고 명화는 석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54
"아야야!"
 
55
석호는 고개를 뒤로 벌러둥 넘기며 엄살을 한다.
 
56
"또 그런 말씀을 하실 테요? 응 이래도 또 하실 테요? 다시는 안 그러시지?"
 
57
명화는 항복을 재촉한다. 석호는 엄살을 하다가 말고 재바르게 명화의 팔목을 잡아 비틀었다. 이번에는 명화가 고개를 들며,
 
58
"아야야!"
 
59
비명을 친다.
 
60
"쌈 등살에 어데 술이나 먹겠나."
 
61
하고 병일은 초월에게 술잔을 내어민다.
 
62
"참, 우리 선생님은 점잖으시지."
 
63
하고 초월은 도꾸리를 들며 웃는다.
 
64
"내 안 점잖은 것 어서 봤니?"
 
65
하고 병일은 버럭 성을 내며 티를 뜯는다.
 
66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죽을 죄라도 빌면 고만 아녜요?"
 
67
초월은 손바닥을 싹싹 부빈다. 병일은 성이 안 풀린다는 듯이, 눈을 딱 부릅떠서 초월을 노린다.
 
68
"원 선생님!"
 
69
초월은 요리상 건너 석호를 가쁘게 부른다.
 
70
"원 선생님! 언니의 손을 놓아 주셔요. 원 선생님이 언니를 시달리신다고 박 선생님이 저한테 화풀이를 하신답니다요."
 
71
"이거 참, 저기도 백년랑군 한 분이 또 계시군."
 
72
하고 석호는 명화의 손목을 놓고 큰 입을 벌려 허허 헛웃음을 웃는다. 병일의 부릅뜬 눈도 웃음에 풀리었다.
 
73
"아이, 팔목이 시어라."
 
74
명화는 비틀리었던 팔목을 주무르며 슬며시 몸을 일으킨다.
 
75
"오 옳거니! 핑계핑계로 백년랑군 곁으로 갈 양으로."
 
76
석호는 명화의 치마 뒷폭을 잡으려다가 명화가 날쌔게 몸을 빼치는 바람에 허탕을 쳤다.
 
77
"그럼요. 웬 강 건너 강짜세요?"
 
78
명화는 병일의 곁에 와 앉으며 용용 죽겠지 하는 듯이 석호를 향해 고개를 갸닥갸닥해 보인다.
 
79
"그럼, 내가 가 드려야지."
 
80
초월이가 바시시 일어나 석호에게로 온다.
 
81
"그럼, 백년랑군이 두 패가 되는군, 허."
 
82
하고 석호는 웃는다.
 
83
"백년랑군 말이 났으니 우리 집에도 백년랑군이 또 하나 있다네."
 
84
병일은 무심코 섭적 이런 말을 하였다.
 
85
"백년랑군이 자네 댁에도 있어?"
 
86
병일은 섭적 한 말이나 지나쳐 들을 석호가 아니다. 의아한 듯이 한 마디 묻고 나서, 무엇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의 버릇으로, 눈을 깜빡깜빡하며 손톱을 물어뜯는다. 병일의 일이라면 자기가 모를 것이 없겠거늘, 이번 수수께끼만은 얼른 풀기가 어려운 듯하였다.
 
87
"백년랑군이 댁에도 있어요? 아이 야릇해라."
 
88
초월은 혼잣말같이 종알거리고 이상하다는 드키 말끄러미 쳐다본다. 명화도 고개를 돌려 갸웃이 병일을 보며 어서 말 뒤끝을 이으라고, 눈으로 재촉한다.
 
89
병일은 무심코 한 말이 지나치게 방안의 주의를 끄는 것을 깨닫고, 멈칫하는 모양이었다.
 
90
"아냐, 아냐. 너희들은 알 일 아냐."
 
91
어름어름해서 넘기고 손뼉을 쳐서 뽀이를 불렀다. 병일은 백마 위스키를 명하였다. 술은 곧 들어왔다.
 
92
"에그, 왜 또 위스키는? 또 술이 취하시겠네."
 
93
하고 명화는 눈썹을 찡그린다.
 
94
"아이, 언니도. 자그만치 위해요."
 
95
하고 초월이가 턱을 들며 입을 빼쭉한다.
 
96
"그럼 옜다. 네 영감께는 병채로 권해라."
 
97
명화는 병일의 곱보에 가득히 따르고 난 술병을 초월에게로 밀어 준다.
 
98
"그건 왜?"
 
99
초월은 반 곱보도 채 못 되게 따르고 만다.
 
100
"조런, 저러고도 누구더러 누구를 위한대!"
 
101
"그럼, 누구는 누구만 못하나, 뭐!"
 
102
"반 잔을 덜 잡수셔서 정신이 총알 같으시겠다!"
 
103
"웬 걱정이야. 반 잔을 더 잡수셔 혹 뼈살이 불거지시겠네."
 
104
"에그 고거……."
 
105
명화는 주먹을 들어 얼르는 시늉을 한다.
 
106
병일은 금세로 잔을 비우고 또 명화에게 내밀며,
 
107
"얘, 잔말 말고 술이나 따라!"
 
108
명화도 이번에는 반 잔을 따르고 말려 하였다.
 
109
"예, 한 잔 술에 눈물 나겠다."
 
110
하고 병일은 붙든다.
 
111
"아이, 오늘밤에 또 야단 났구먼."
 
112
하고 명화는 마지못해 잔을 채운다.
 
113
병일은 또 목구녕에 탁 털어붓고 석호를 바라보며,
 
114
"왜 자네는 안 드나, 아낙 군수가 되었나?"
 
115
석호는 그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여전히 눈만 깜박깜박한다.
 
116
병일은 연신 위스키 곱보를 비운다.
 
117
번열이 치오르는지 양복 웃저고리를 벗고 넥타이까지 끌렀다.
 
118
석호는 그예 그 수수께끼를 풀어낸 모양이다. 그는 얼굴빛을 바루 엄숙하게 바룬다.
 
119
"여보게 아까 한 얘기 말일세, 그건 오 년 전 얘기가 아닌가?"
 
120
하고 '그렇지!' 하는 듯이 병일을 똑바로 본다.
 
121
"오 년 전 얘기?"
 
122
병일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릎을 탁 친다.
 
123
"그러네. 그래, 자네는 술 안 먹고 입때 그걸 생각했네그려."
 
124
"그러면 궐자가 출옥을 했나?"
 
125
"그러이, 한 일주일 되었을까……."
 
126
"그래, 궐이 자네 집에 묵고 있단 말인가? 그게 될 말인가?"
 
127
"아닐세, 출옥하던 길로 우리 집에 왔으나……."
 
128
석호는 병일의 말을 막았다.
 
129
"뭐, 출옥하던 길로 자네 댁엘 와? 뻔뻔한 자식도 같으니, 원 첫날밤에 칼부림을 한 녀석이 쭈적쭈적 자네 댁에 찾아가다니?"
 
130
석호는 몹시 분개해 한다.
 
131
"아닐세, 일부러 데리고 왔네."
 
132
"뭐? 그건 또 무슨 바람인가? 그래, 자네가 감옥까지 마중을 나갔더란 말인가?"
 
133
"아닐세, 내가 간 것은 아니고 내 안해가……."
 
134
"부인께서? 원 별일일세, 별일이어! 그래 지금도 자네 댁에 있단 말인가?"
 
135
"아닐세, 입원을 했네."
 
136
두 손님 사이에 이 수수께끼 같은 문답이 오고 갈 때에 두 기생은 맥을 놓고 귀를 기울이었다. 더구나 명화의 눈엔 열기가 돌았다. 두 사람의 얼굴을 번차례로 바라보며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새겨듣는 듯하였다. 그는 제 숨소리까지 죽이는 듯하였다.
 
137
"입원이라니?"
 
138
석호는 더욱 마뜩치 않은 듯이 채친다.
 
139
"오던 그 이튿날로 병이 났어."
 
140
"오던 맡에 또 병이야? 원, 참, 그래. 병은 또 무슨 병이드람?"
 
141
"뭐 급성맹장염이라든가?"
 
142
"맹장염! 잘한다. 병도 중증일세그려, 주리던 판에 제 창자를 생각지 않고 너무 처먹은 겔세그려, 대관절 왜 자네 댁으로 데리고 왔단 말인가?"
 
143
석호가 분개해서 서두는 바람에 병일은 미처 대답할 나위도 없었다.
 
144
"원, 참, 별일이여, 별일이어. 부인께서는 왜 또 그런 놈을 집안에 발그림자를 시키신단 말인가? 참 별일이어!"
 
145
석호는 되우 못마땅하다는 것같이 타구에 침을 튀 밭는다.
 
146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시킨 걸세."
 
147
"원, 자네도 망녕이 났더란 말인가?"
 
148
"불쌍하니 거두어 주자는 것이지."
 
149
"거두어 주어? 그까짓 놈을 거두어 주어?"
 
150
"말하자면 우리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거든. 그러니깐 말야 거두어 주어야 될 것이 아닌가?"
 
151
석호가 펄펄 뛰는 바람에 병일은 사정하듯 말하였다.
 
152
그건 어서 " 생긴 이론(理論)인가? 누가 궐자를 옭아 넣었나? 제가 살인 강도질을 하려다가 붙들렸지."
 
153
"그야 그렇지만, 자네는 세상일을 너무 냉혹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느니. 아모튼지 일은 우리 때문에 생긴 게 아니냐 말야. 젊은 놈이 오 년 동안을 감옥에서 썩다니, 그 고통이 여북했겠느냐 말야. 서울에는 일가 친척도 없는 몸이 출옥을 한대도 어딜 가겠나? 십중팔구는 또 못된 짓을 저질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을 거란 말야……."
 
154
병일은 위스키 한 잔을 또 들이키고, 말을 연설조를 띠어 한다.
 
155
"그러고 보면 궐자의 일생은 아주 버릴 게거든. 말하자면 어린애가 우물 둑으로 기어가는 것을 어찌 차마 보고 있단 말인가? 인생이 불쌍치 않은가?
 
156
좋은 인연이든 나쁜 인연이든, 궐자와 연분 있던 사람이 구해 줘야 될 것 아닌가? 건져내야 될 것 아닌가……?"
 
157
병일은 잠깐 말을 끊고 또 술을 들어부었다. 석호는 장황한 병일의 연설에 한 풀이 꺾인 듯이 잠자코 있다가,
 
158
"그는 그럴상 하네, 첫째, 궐자가 함부로 구을러 다니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날이면 자네 부부의 얼굴이 깎일 걸세."
 
159
그 말은 마치 독한 화살과 같이 병일의 흉장을 들어가 질른 듯하였다. 병 일은 집었던 곱보를 탕 놓고 발연 변색한다.
 
160
"아니,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래, 내가 내 얼굴 깎일까 봐 궐자를 두호해 주는 거란 말인가? 그게 될 말인가? 궐자가 어데로 구을러 다닌들 내게 상관이 뭐란 말인가? 내 얼굴 깎일 일이 뭐란 말인가?"
 
161
병일은 입에 게거품을 흘리며 노발대발한다. 석호는 박박 제 머리를 긁었다. 그는 자기의 말이 이렇게 병일을 노엽게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제 말이 떨어지자 병일의 얼굴빛을 보고 벌써 안 할 말을 한 것을 뉘우치었다. 말이란 수박 겉 핥기로 거죽 위만 슬슬 지나가야지 남의 폐부를 꿰뚫어 맞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새삼스럽게 자기의 처세 철학을 생각하고 후회막급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야 아까 말의 실패를 벌충할까, 그는 속으로 발버둥을 치며 눈만 깜박깜박하였다.
 
162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163
병일은 제 말에 힘을 주며 굳세게 부인한다.
 
164
"그런 게 아니야, 결코 결코 나는 내 면만 보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165
단지 궐자의 처지에 동정을 했을 뿐이란 말이야. 순수한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거란 말야! 물에 빠지는 청년을 하나 구해 보자는 것이 그런 불순한 동기에서 나왔다고 해석을 하니 허 기가 막혀!"
 
166
"원수를 사랑해라!"
 
167
잠자코 있던 석호는 혼잣말같이 한 마디 하고 진국으로 얼굴에 엄숙한 빛을 보이며,
 
168
"어려운 일이어!"
 
169
하고 무엇을 개탄하는 것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170
"원수를 사랑해라, 암 어려운 일이지."
 
171
병일은 석호의 말을 뒤받는다.
 
172
"그러나, 여보게, 생각해 보게, 예수 나신지가 언젠가? 이 천년이나 가차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 우리 인류는 이 천 년 동안에 조금도 진보 발달이 없었단 말인가? 이 천 년 전 그 때 시설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의 문명은 얼마나 끔찍스러운가, 놀라운 것인가? 그 때 인류도 상상이나 했겠느냐 말야.
 
173
그러하면 그 때 인류의 가졌던 감정과 사상도 변해야 될 것 아닌가? 그래, 물질 문명만은 소양지판으로 발달이 되고 도덕 관념과 윤리 관념은 개미 쳇바퀴 돌듯이 천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조그만치도 진보 발달이 못 되고, 늘 그 자리에서 답보만 하고 있단 말인가. 안 될 말일세, 안 될 말이어. 나는 윤리와 도덕도 지지하나마 진보가 되었다고 믿네. '원수를 사랑해라!' 쯤은 오늘날 와서는 일종 상식일세. 그까짓 것쯤 실행하기가 뭐 그리 어렵단 말인가?"
 
174
연설자는 신이 나서 팔을 한 번 휘 내어젓고 주먹으로 요리상을 쳤다. 위스키 곱보는 춤을 추며 넘어진다.
 
175
석호는 이번 자기 말은 빗맞지 않은 것을 보고 안심하였다. 알코올의 천리마를 비껴 타고 기고만장한 돈 키호테를 살살 곁눈질하며, 그는 또 이 기사 (騎士)의 비위에 들어맞을 말을 찾아보았다.
 
176
"더구나 내가 궐자를 동정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아모 것도 아니란 말야. 전정 있는 청년이 일시 잘못으로, 그렇지, 잠깐 생각이 그릇들었지 ─ 평생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가엾은 일이거든. 하여튼 내게 관계됐던 사람으로 불행에 떨어진다는 것은 정말 불유쾌하거든. 꾸벅꾸벅 내 품 안으로 기어드는 새를 차마 두호 않을 수 없단 말야. 응, 인제 내 말 알아 듣겠나?"
 
177
병일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람이냐, 하는 듯이 어깨를 뒤로 제치며, 석호를 바라본다. 석호는 그 뜻을 그대로 받았다.
 
178
"참말 자네는 높으이."
 
179
"그래, 내가 그런 애들하고 교제를 할 것 같은가? 지낸 일을 마음에 새겨 두겠느냐 말야. 털끝만치라도 감정을 두겠느냐 말야. 없지 없어!"
 
180
하고 연설자는 또 한 번 상을 쳤다.
 
181
넘어진 곱보가 튀는 듯이 구은다.
 
182
"그래, 그렇다 뿐인가. 좋은 말일세."
 
183
겉으로는 지당하다는 듯이 속으로는 낯이 간지럽다는 듯이 석호는 고개를 탁 숙인다.
 
184
명화는 구으는 곱보를 바루 잡아놓으며,
 
185
"어쩌면, 참, 자기한테 칼부림까지 하던 사람을 용서하셔."
 
186
말은 초월에게 하고, 눈은 병일에게 돌렸다.
 
187
"그러게 말야. 더군다나 첫날밤에……. 참 갸륵한 일이야."
 
188
초월의 말이 끝나기 전에 병일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189
"요년들, 너희 알 일이 아니란데 뭘 안다고 씩둑깍둑해?"
 
190
소리는 크나마 눈 가장자리가 풀린 것을 보면 기생들의 칭찬도 그리 비위에 거슬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191
"왜 저희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걸 모르게……. 참 놀라운 일이시어!"
 
192
하고 초월은 명화를 향해 눈을 껌벅한다. 더 치살려올리라는 뜻이리라 명화는 병일에게로 바싹 다가들어 갸웃이 쳐다보며,
 
193
"참 갸륵하신 일야. 그런데 선생님, 그 사람이 왜 칼을 가지고 왔을까요?"
 
194
"왜 칼을 가지고 왔느냐고?"
 
195
병일은 어이없다는 듯이 명화를 나려다본다.
 
196
"무슨 원수가 졌기로 첫날밤에 칼을 들고 와요?"
 
197
"원수가 지다께?"
 
198
병일은 분명히 대답을 않고 얼렁뚱땅해서 넘기려 한다.
 
199
"돈을 줍시사고, 온 거지 뭐야."
 
200
초월이가 말을 납작 받아 버렸다.
 
201
"그 때 궐자가 들어와서 자네를 보고 뭐라고 하고 덤비던가?"
 
202
석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203
"말이 무슨 말야, 그양 덤벼들었지."
 
204
하고 병일은 그때 광경을 생각하는 것처럼 개이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뜬다.
 
205
"그 때 자네가 몹시 다치지나 안 했나?"
 
206
"무얼, 팔죽지를 좀 다쳤지."
 
207
"자네 부인께서도 무사하셨나?"
 
208
"내 와이프 말인가?"
 
209
하고 병일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210
"내 와이프에게서야 덤빌 새가 있나?"
 
211
"궐자가 어디로 들어왔던고?"
 
212
"그건 나도 모르지. 손님들도 다 헤어지고 막 자려고 내 안해는 먼저 침대 위에 올라가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구두끈을 풀고 있을 판이었네.
 
213
웬 자가 유리창을 가리운 커튼을 헤치고 툭 튀어나오데그려. 웬 놈이냐, 소리를 질르니까 궐자의 손에서 뭣이 번쩍하며 다짜고짜로 내 앞으로 달겨들데……."
 
214
"에그머니!"
 
215
두 기생은 일시에 외마디 소리를 쳤다.
 
216
"누가 너희들을 죽인다니? 방정맞게 놀래기는 허허."
 
217
병일은 유쾌한 듯이 웃는다.
 
218
"에그 무서워라!"
 
219
초월은 석호의 가슴을 파고 들며 얼굴을 숨긴다. 명화는 초월에게 말 말라고 손을 저어 보이고 병일의 입술을 쳐다본다.
 
220
"그야말로 위기일발일세그려. 그래 어찌되었나?"
 
221
석호가 채쳤다.
 
222
병일은 남의 손을 빌리기에는 너무 갑갑하다는 듯이 제 손으로 위스키를 한 곱보 부어서 꿀꺽 마시었다. 술 방울 묻은 입술을 빨면서,
 
223
"어, 그자가 그래. 어, 그자가 그래."
 
224
병일은 술이 취해 오른다는 듯이 또 그 때 광경이 잘 기억이 안 난다는 듯이 말을 더듬거린다. 석호는 제 친구가 시방 허풍을 떨려고 궁리하는 눈치를 재바르게 보았다.
 
225
"어, 그자가 그래. 다짜고짜로 달겨들데그려. 어, 그 무엇이 선득하고 왼편 팔을 지내갔으나 나는 오른손으로 어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잡았거든. 어 그리고 이놈 어데를, 뉘 앞이라고! 호령을 했더란 말야."
 
226
병일은 그때 호령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 눈을 부릅떠서 여불없이 그때 제가 하던 시늉을 내었다.
 
227
"어, 그자의 멱살을 잡았더란 말야."
 
228
칼 든 손목을 잡은 손은 어느 손이고 다친 팔은 어느 팔이고 또 멱살을 잡은 손은 어느 손이고! 석호는 속으로 웃었다.
 
229
"어, 그자의 멱살을 잡았더란 말야. 응?"
 
230
저도 제 말이 잘 믿어지지 않을 상싶은지 석호를 보고 한번 다진다.
 
231
"그래서?"
 
232
석호는 시침을 따고 궁금한 듯이 재촉을 하였다.
 
233
어 그래서 궐자가 " , 멱살을 잡혀 가지고 벌벌 떨데그려. 이놈 여기를 어디라고 또 한 번 얼러 주었지."
 
234
"그래서?"
 
235
"그래서 궐자는 나를 쳐다보고 울 듯이 살려 달라는 시늉을 하데, 허허."
 
236
"칼은 어쩌고요?"
 
237
초월이가 묻는다.
 
238
"칼? 칼 말이야?"
 
239
병일은 당치도 않은 것을 묻는다는 듯이 초월의 말을 뇌이다가,
 
240
"응, 칼 말이지. 응, 칼은 내가 궐자의 손목을 비트니까 그대로 떨어졌어."
 
241
"칼이 떨어졌으니!"
 
242
초월은 안심의 숨길을 내쉬며 두 손뼉을 마주칠 듯이 기뻐한다.
 
243
"아이, 그 애는……."
 
244
하고 명화는 또 손을 저어 보인다. 얘기에 자꾸 티를 넣느냐고, 짜증을 내는 모양이다.
 
245
"그래서, 어떡했나?"
 
246
석호도 하회를 재촉한다.
 
247
"그래서, 어 그래서, 공부하는 학생이 이런 짓을 않는 법이라고 일러 보냈지!"
 
248
하고 병일은 그 얘기에 땀을 빼었다는 듯이 요리상 보를 쳐들어 이마의 땀을 씻는다.
 
249
"학생 놈이 건방지게."
 
250
초월은 분개해 한다.
 
251
"그래, 그대로 갔어요?"
 
252
명화는 이야기가 미협하다는 듯이 채쳐 묻는다.
 
253
"그러면 그대로 갔지, 밤을 샐 터야?"
 
254
병일은 귀찮다는 듯이 내던지듯 말을 끊었다.
 
255
"부인께서 여북 놀래셨을까? 기절을 하셨겠죠?"
 
256
명화는 그래도 얘기를 끌어내려 한다.
 
257
"기절은 왜? 별로 놀래지도 않데."
 
258
"어쩌면! 굳굳하신 어른이야!"
 
259
초월이가 무조건하고 찬사를 올렸다.
 
260
"그래, 자네 상처는 중하지 않았던가?"
 
261
뭐 그다지 대단치는 " , 않았네. 그자를 보내놓고 보니깐, 와이샤쓰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데. 나는 그대로 두려 하였지만 내 안해가 질색을 하고 뽀이를 부른다, 의사를 부른다, 호텔 안이 발칵 뒤집혔네. 그 길로 곧 입원을 하였네."
 
262
"입원 후의 경과?"
 
263
"상처는 칼이 그리 깊이 들어가지를 않아서 한두 주일만에 아물어졌네."
 
264
"미인의 안해를 얻자면 그런 변도 보는 거야. 그래, 나는 동경에서 채 나오지를 못했을 때지. 신문을 보고서야 그 끔찍한 소식을 알았네. 그래, 곧 전보를 쳤더니 답전도 없데그려."
 
265
"집안이 난가가 되어서 그런 정신 차릴 사람이 있어야지."
 
266
"그랬을 걸세. 답전은 없어도 신문을 보고 사연만은 자세히 알았네. 그때 참 신문에 굉장히 떠들었어."
 
267
"신문기자 등살에 한참 곡경을 치루었네. 남 입원한 데까지 좇아와서 수선을 피데그려."
 
268
"그러고 그 명색 기사라는 걸 좀 봐요. 거짓말 참말 뒤섞어서. 자네에게 관한 일이라서 그 때 신문들을 오려 두기까지 했네마는."
 
269
"에이 여보게, 그까짓 걸 뭐 다 오려 두나!"
 
270
"어쩌면! 신방도 못 치르고 병원을 가셨겠네. 온 그런 변이 어데 있담."
 
271
초월은 또 재절거린다.
 
272
"그런데 그런 자를 용서를 하신단 말씀요? 어쩌면!"
 
273
"얘는, 또 그 문제를 끄집어 내거든."
 
274
병일이가 퉁을 준다.
 
275
"참 갸륵하신 일야. 여느 사람으론 어려운 노릇이야."
 
276
다라진 초월은 제 할 말을 기어이 하고야 만다.
 
277
"어려운 일이구 말구!"
 
278
명화는 맞방망이를 치다가,
 
279
"그래, 그이가 입원을 했단 말씀이죠? 무슨 병원에요?"
 
280
하고 슬쩍 물어본다.
 
281
"그건 알아서 뭘 해? 의전병원이란다."
 
282
병일이가 알으켜 주었다.
 
283
"그이 이름이 뭐예요?"
 
284
"원, 그 애는 별걸 다 묻네."
 
285
하고 석호가 가로챈다.
 
286
"왜, 그런 끔직한 일을 한 사람이니, 성명이나 알아둬야 될 것 아녜요?"
 
287
"될 것도 많다!"
 
288
"아이, 좀 알으켜 줘요."
 
289
"왜, 찾아가 보련?"
 
290
"성명을 알아야 찾아라도 갈 것 아녜요? 성명을 알으켜 내요. 내 찾아가 볼게, 호호."
 
291
명화는 허튼 수작같이 웃었다.
 
292
"온, 언니도 빈말이라도 그런 소리 말아요. 에이, 징그러워라. 꿈에 뵐까 무서워."
 
293
하고 초월이는 몸서리를 친다.
 
294
"네, 선생님? 그이 이름을 좀 알으켜 줘요. 얘기를 들었으면 당자의 이름을 알아야 될 것 아녜요? 네 선생님."
 
295
명화는 병일을 졸랐다.
 
296
"얘가 왜 등이 달아서 이래?"
 
297
"등이 달아도 좋아요. 이름이 몹시 궁금한데……."
 
298
"원 궁금한 일도 많겠다!"
 
299
"아이, 그러시지 말고 좀 알으켜 줘요 네? 선생님."
 
300
하고 몸부림을 한다.
 
301
"얘가 왜 이래?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302
"아이 흥! 그러시지 말구 응?……좀 알으켜 줘요."
 
303
어린애같이 보챈다.
 
304
"어, 귀찮은 일 또 생겼군. 생전 알으켜 주나 봐라!"
 
305
" 그 잘난 이름 못 알으켜 줄 게 뭐예요? 고만두어요, 몰라도 좋아요."
 
306
하고 명화는 성까지 내었다.
 
307
"안 돼, 그건 안 돼. 암만 졸라도 남의 명예를 위해서 그건 안 될 말이어!
 
308
석호가 가루맡아서 타일렀다.
 
309
"에구, 그렇게 대단한 이름이면 고만둬요. 그 알량한 이름 아시는 게 무슨 큰 유센가 뭐."
 
310
명화는 입을 삐쭉하였다. 그 눈에서는 열기가 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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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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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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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