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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아귀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아이, 언니가 내 방엘 오셨네."
 
2
곱고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미닫이는 잡아 제치는 듯이 열렸다. 남세루 잠바를 입은 여학생이다. 영애의 시누이 박은주(朴恩珠)가 학교에서 돌아온 것이다.
 
3
은주는 문지방 밖에서 허리를 굽혀 늘 하는 버릇으로 책보를 제 책상에 홱 집어던지려다가 말고 힐끈 아랫목에 앉은 여해를 보더니,
 
4
"오라버님이 나오셨구료."
 
5
하고 영애에게 고개를 돌리며 '좀 기쁘냐'하는 듯이 웃어 보인다. 영애는 제령 위반으로 징역을 살던 제 사촌 오빠가 오늘 출옥한다고 미리 은주에게 내통해 둔 것이다.
 
6
영애는 명희를 안은 채로 마주 나가며,
 
7
"그 방이 덥지를 않아서 아가씨 방엘 왔지."
 
8
변명부터 먼저 한다.
 
9
"그럼 어때요?"
 
10
하다가 영애의 어룽진 눈 가장자리를 바라보며,
 
11
"아이, 언니가 우셨네, 너무 기뻐서!"
 
12
하고 또 한 번 웃어 보인다.
 
13
영애는 손등으로 눈을 씻으며,
 
14
"지금 막 그 방으로 옮기려 했어요."
 
15
아직도 미안해 한다.
 
16
"왜? 천천히 옮기시면 어때요? 난 동무 집엘 놀러나 갈걸."
 
17
하고 고개만 방안으로 들여밀고 책보를 간신히 책상 위에 올려 놓고 여해를 보더니 꾸뻑 고개절을 한 번 한다.
 
18
영애는 유모를 불러 명희를 맡기고,
 
19
"놀러는, 왜요? 들어오지."
 
20
하고 시누이를 끌었다. 그는 여해와 단둘이 다시 앉았기가 어쩐지 무서웠다. 그는 쾌활한 시누이를 끌어들여 따분한 방안의 공기를 헤쳐 보려는 것 같았다.
 
21
"그건 왜? 싫어요."
 
22
은주는 다시 뜰로 나려서려 한다.
 
23
"들어가자니까."
 
24
영애는 은주의 팔을 당긴다. 시누이는 올케가 이렇게 힘이 센 줄은 처음 알았다. 물에 빠지는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듯이 영애는 은주를 잡아 끄은 것이다.
 
25
"아유, 아파……."
 
26
엄살을 하고 올케가 쥐었던 자리를 만지며 시누이는 마지못해 방안으로 들어온다. 설멍한 두 다리가 성큼 문지방을 넘어서더니, 여해에게 또 한 번 꾸벅 절을 하고 그대로 꿇어 앉는다. 목단화 숭이같이 부글부글한 그 얼굴에 방안이 환하다.
 
27
작난꾸러기가 어른 앞에 나앉은 것처럼, 차리기는 차리면서도 작난하던 것을 생각하고 제 동무를 눈짓하며 웃듯이 그는 영애와 눈짓을 하며 싱글싱글 웃는다. 그는 까닭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와 견딜 수 없었다. 여해가 엉거주춤하고 똑바로 자기만 보는 양도 우습고, 영애의 시침을 뚝 따고 도사린 폼도 우습고, 더구나 제가 차리고 있는 꼴이 우스웠다. 그는 이 실없는 웃음을 풍기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어본다. 입을 다물면 다물수록 웃음은 삐죽삐죽 입술을 떠들시고 나가려고 몸부림을 한다. 그는 웃음을 참노라고 옆댕이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뻗정나무를 휘어놓은 듯이 어설프게 꿇어진 제 종아리가 눈에 띄었다. 막았던 물이 터지듯 기어이 참았던 웃음이 쏟아지고 말았다. 웃음에 구을 듯하는 몸을 억지로 지탱을 하노라니, 간까지 자지러지는 듯하다. 그는 겨우 웃음을 물어 멈추면서 저린 발목을 꼬집어 보았다.
 
28
접힌 발이 마치 토끼 귀 모양으로 너붓이 방바닥에 눌린 것이 또 눈에 띄고 말았다.
 
29
웃음은 또 터졌다. 그는 발끝에 손가락을 디밀어 넣어보고 올케를 눈짓하며 웃는다. 그 눈짓은, '이걸 좀 봐요, 이걸 보고도 아니 웃고 배기겠는가?' 하는 듯하였다.
 
30
그 신선한 웃음, 아모 까닭 없고 죄 없는 웃음! 문도 웃는다, 벽도 웃는다.
 
31
영애도 손으로 입을 가리었다.
 
32
웃음 빛에 방안의 공기는 춤을 추는 듯하다.
 
33
여해만 웃을 줄을 몰랐다. 그의 눈은 은주에게 매어놓은 듯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 눈길은 홀린 듯하다. 그러나 어여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황홀히 넋을 잃은 눈길은 아니다. 야릇한 갈증과 식욕에 타는 듯한 눈길이다.
 
34
웃음을 담북 머금은 그 시원한 눈을 맑은 물처럼 한 모금 들이켜고 싶은 것 같다 햇사과같이 아른하게 . 붉은 두 뺨, 털복숭아같이 몽실몽실한 턱을 아삭 베어 물고 싶은 것 같다.
 
35
그는 담배 한 개를 또 붙였다. 정신 놓고 한참 피우다가 재를 떤다. 눈이 은주에게 팔린 탓으로 재를 헛떨어 재는 재떨이를 뛰어넘어 방바닥에 구을렀다. 은주의 진정하려던 웃음은 이 담뱃재를 보고 또 터졌다.
 
36
복받치는 웃음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올케의 등 뒤쪽에 숨으며 어린애 모양으로 버루덩거리며 웃었다.
 
37
"담배 떠는 게 그렇게 우스워?"
 
38
여해도 이번에는 아니 웃을 수 없다는 듯이 입 한옆을 떠들시어 보인다.
 
39
"그럼 우습지 않고……."
 
40
은주는 그대로 여해의 말을 되받다가 제 말이 너무 버릇없이 나온 것이 또 우스웠다. 그는 무안새김으로 올케를 쿡쿡 쥐어질르며 또 한바탕 웃었다.
 
41
영애는 등뒤에 숨은 다 큰 애기를 꺼내는 시늉을 하며 여해를 위해 변명하듯,
 
42
"감옥에서야 어데 담배를 피우? 그러니 모든 것이 서투시지."
 
43
한다. 은주는 간신히 바루 앉았다.
 
44
"감옥에서는 담배도 못 피우나 머."
 
45
"그럼요, 가끔 몰래 피우지만 들키면 큰 벌을 준대요."
 
46
"담배 피는 벌야."
 
47
"그럼 죽도록 맞고 밥 먹을 때도 수갑을 채운대."
 
48
영애는 아까 여해에게 얻어들은 지식을 앵무새 모양으로 되풀이한다.
 
49
"수갑은 또 뭔구?"
 
50
"왜 죄수들이 손에 자물쇠 같은 것을 차지 않아요."
 
51
"손에 자물쇠를 차다니요? 그럼 손을 어떻게 놀려서 숟가락질을 해요?"
 
52
"그러게 경……,"
 
53
아까 여해 말뽄으로 '경이지'. 하려다가 말이 상스러운 것을 고쳐서,
 
54
"그러기에 큰일이지."
 
55
"정말 그럴까?"
 
56
은주는 눈을 호동그렇게 뜨고 묻는 듯이 여해를 바라본다. 여해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으매 은주는 조금 짧은 듯한 윗입술을 남실남실하다가,
 
57
"선생님!"
 
58
하고 불러 버렸다. 그는 여해를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망설인 것이다.
 
59
"선생님! 감옥에서는 정말 담배를 피워도 벌을 줘요?"
 
60
그 물 같은 눈은 여해의 입술에 모였다. 여해는 말이 목구녕에 붙은 듯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영애의 말을 긍정하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인다.
 
61
은주는 잠깐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는 미협한 듯이 영애를 돌아다보며,
 
62
"그래, 정말 담배를 피워도 벌이야?"
 
63
못 믿겠다는 것같이 또 한번 다진다.
 
64
"글쎄, 그렇대요."
 
65
"감옥이란 참 별세상이구먼."
 
66
혼잣말하듯 하다가 여해를 다시 바라보며.
 
67
"감옥 얘기 좀 들려 주어요."
 
68
하고 졸른다.
 
69
"저 방으로 옮기시지."
 
70
하고 올케는 졸르는 시누이를 막는다.
 
71
"아이, 남 얘기도 못 듣게시리……."
 
72
시누이는 금세로 부루퉁해진다.
 
73
"그 방에서 편히 쉬시게 하고 찬찬히 얘기를 듣는 게 좋지 않아요?"
 
74
달래는 듯이 말하고 영애는 몸을 일으킨다. 여해와 은주도 따라 일어섰다.
 
75
그 방은 건넌방 웃머리에 붙었다. 은주의 방에서 그 방으로 가자면 뒤꼍 복도를 돌기만 하면 고만이다. 안방과 건넌방에 들이기는 만만치 않고 그렇다고 뜰 아랫방으로 들이기는 어려운 안손님에게 쓰는 방이다. 말하자면 안으로는 윗사랑 격이다.
 
76
영애는 방바닥을 짚어본다. 오래 폐방을 한 탓에 휑하니 찬바람이 돌았지만 방바닥만은 웃목까지 절절 끓었다. 그는 여해가 앉기를 기다려, 보료 밑을 사붓이 떠들어본다. 거기는 삼팔바지와 모본단 마고자에 조끼와 저고리를 받쳐 낀 옷 한 벌과 부속품이 깔려 있었다. 속 샤쓰, 양말, 허리띠, 대님 등속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챙겨보고 나서 영애는 여해에게,
 
77
"옷을 갈아입으세요."
 
78
하고 다시 나간다. 시방 여해가 입은 것도 출옥할 무렵에 차입한 것이다.
 
79
말짱하지마는 감옥에 한 번 다녀 나온 것이 꺼림칙해서 다시 옷 한 벌을 준비한 것이었다. 은주는 원하는 얘기를 또 못 듣고, 따라나오게 된 것이 매우 불만하였다. 그의 뺨은 더욱 부어 올랐다.
 
80
그 날 저녁상을 물린 뒤에야 은주는 소원대로 감옥 얘기를 듣게 되었다.
 
81
다식판으로 찍어낸 듯한 콩밥, 그나마 등급이 있다는 것, 한옆엔 밥을 먹는데 한옆엔 뒤를 본다는 것, 의무실(醫務室)에서 알코올을 훔쳐다가 술을 맨들어 먹는 얘기, 벽을 뚜들겨서 말을 주고받는 얘기, 무덤 속같이 쓸쓸하고 호젓한 독방, 무서운 형벌 등…….
 
82
제 사는 세상하고는 아주 다른 딴 세상의 지긋지긋한 사실에 은주는 한 마디도 흘려듣지 않으려고 숨소리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그는 아까 실없이 웃을 때와는 딴 사람이 되었다. 그 맑은 눈에는 호기심과 동정이 가득히 찼다. 이따금 '저런! 저런!'하고 놀래듯이 가볍게 부르짖는다. 방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83
여해의 무거운 말낱만 뚜벅뚜벅 벽을 울리었다.
 
84
독방에 가두어둔 사형수가 벽에다 대고 어떻게 몸을 비비고 용을 썼던지 널조각에 몸 자국이 뚜렷이 났더라는 말을 들을 때 은주는 몸서리를 쳤다.
 
85
"여북 애를 썼기에……."
 
86
하고 그 호동그랗게 뜬 눈에는 눈물 방울이 맺히었다.
 
87
"무슨 죄를 졌기에요?"
 
88
하고 묻는 소리도 떤다.
 
89
"시골 농사꾼인데 노름을 하다가 순사를 죽였다는 범인이오."
 
90
"농사꾼이 어쩌면 순사를 죽일까?"
 
91
"저는 안 죽였다고 끝까지 잡아 떼었소. 그러나 증거가 역력한 데야 할 수 있소. 제 집에서 피 묻은 옷이 발견되고 순사를 쳐 죽인 목침이 노름하던 방고래 밑에서 나오고……."
 
92
"그래도 안 죽였다고 그래요?"
 
93
"그 옷도 제 옷이 아니고 그 목침도 저는 모른다고 잡아 떼었소. 제 집 뒷산에 있는 늙은 배나무를 베었더니 그 배나무 귀신의 장난이라고 끝까지 변명을 하였지만 재판소에서 어데 귀신을 믿어야지."
 
94
"정말 배나무 귀신의 작난일까요?"
 
95
"그건 모르지, 그런데 그자가 교수대에 올라갈 때에 무엇이 먹고 싶으냐 물으니까……."
 
96
하고 여해는 말을 뚝 끊는다. 그의 눈은 이상하게 번쩍인다. 그 핏발이 선 눈자위에 불을 뿜는 듯하다. 그 뜨거운 시선은 은주의 얼굴과 목과 둥그스름한 어깨판과 젖가슴 언저리와 허벅지를 핥는 듯이 훑어나려 오다가 무릎 위에 놓인 은어 같은 흰 손목 위에 타는 듯이 박히고 움직이지 않는다. 은주도 이상한 듯이 제 손목을 나려다본다.
 
97
"그자는 여자의 흰……."
 
98
여해는 숨길은 가쁘다.
 
99
"흰 손목을 아삭아삭 깨물어 먹고……."
 
100
말끝도 맺기 전에 은주는,
 
101
"에그머니!"
 
102
외마디 소리를 질르고 제 무릎 위에 놓인 제 손목을 얼른 치웠다…….
 
103
"벌써 열 시가 넘었네. 고단하실 텐데……."
 
104
영애는 팔목시계를 보더니 이런 말을 하고 손수 금침을 펴고 은주와 함께 일어난다.
 
105
"아니오, 괜찮아, 괜찮아."
 
106
하고 여해는 그들을 잡는다.
 
107
"안녕히 주무세요."
 
108
두 여자는 잡는 여해의 말을 흘려듣고 제 인사들만 하더니 고만 쌍창을 열고 나가 버린다.
 
109
여해는 그들이 사라진 미닫이를 뚫어져라고 바라본다. 그 한 군데를 노리며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는 갈수록 무섭게 빛난다. 벽에 기대인 채로 꼼짝을 않는 몸에도 안간힘을 준다. 아까 그가 얘기한, 그 감방 벽에 자욱을 내었다는 사형수도 이러하였으리라. 십분! 이십 분! 그는 그대로 화석(化石)이나 된 듯하였다.
 
110
이윽고 그는 벽에 뒤통수를 탁하고 부딪쳤다. 긴 한숨 ─ 황소의 숨길같이 길고 우렁찬 한숨을 휘 내어 쉬고 그대로 이불 위에 쓰러진다. 두 팔로 머리를 안고 코를 바닥에 박고 한동안 씩씩 하다가 다시 머리를 번쩍 들더니 이번에는 팔을 접쳐 비고 뒤로 발랑 자빠졌다. 딱 부릅뜬 눈은 역시 허공을 노린다.
 
111
얼마 만에야 저린 팔을 빼더니 벌떡 일어나 앉는다.
 
112
불덩이같이 치밀리는 생각을 쫓아버리려는 듯이, 몇 번 머리를 사납게 흔들고 나서, 이불 자락을 걷어 치더니 그제야 벼개를 비고 정당히 눕는다.
 
113
푹신푹신한 요 바닥에 몸은 잠으러지는 듯하다. 두 다리를 쭉 펴서 애들 모양으로 쭉쭉이를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마지막엔 이불을 푹 뒤집어 쓴다. '인제 잔다'하는 듯하였다.
 
114
한참도 못 되어 이불은 물결을 친다. 다리를 따라 이리 접치고 저리 밀린다. 감방 널조각으로 다지어진 몸에 비단 이부자리가 지나치게 부드러움인가 근질근질하다는 듯이 자반뒤집기를 한다.
 
115
필경엔 이불을 떠들고 얼굴을 내어놓았다. 방이 절절 끓는 탓인가, 그 얼굴은 한증막을 하고 나온 사람 모양으로 시뻘겋게 익었다. 코에도 단내가 나는 듯 들숨 날숨에 입 언저리를 가리운 이불 자락이 펄렁펄렁한다…….
 
116
그는 화닥닥 일어나고야 만다. 옷을 활활 벗어 되는 대로 동댕이를 치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또 뒤집어썼다.
 
117
조금 있다가 상반신을 또 일으켰다. 자리끼 대접을 당기어 단숨에 한 대접을 다 들이켠다. 가슴에 불을 끄려 하는 듯하였다. 이번에 눕더니 꽤 오랫동안은 잠잠하다.
 
118
어데선지 쾌종이 운다. 열 두 시다.
 
119
잠이 든 듯하던 그는 또 일어난다.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꺼 버린다.
 
120
방안은 캄캄해졌다.
 
121
바깥도 괴괴하다. 땡 하고 새로 한 시를 친다.
 
122
여해의 이불은 또 꿈지럭거린다.
 
123
이불을 걷어차는 기척이 나더니 그는 다시 전등을 켠다. 어둠 속에 숨었던 그 얼굴찌는 짧은 그 사이에 무섭게 흉업게 변하였다. 찡그려 붙인 이마에는 주름살마다 기름땀이 번지르 흐른다. 비뚤어지게 다문 입은 이를 가는 듯, 홉뜬 눈은 눈 알맹이가 금세로 퉁겨 나올 듯하다. 지글지글 끓는 지옥의 가마 속에서 뛰어나온 아귀의 형상도 이러하리라.
 
124
그는 주섬주섬 옷을 대강 주워 입는다.
 
125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말고 다시 돌쳐서서 전등을 끈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어둠 속에 묻어 버리려는 것 같았다.
 
126
그는 아까 영애와 은주가 열고 나간 미닫이를 열고 나섰다. 어른어른 달빛이 비최인 뒤꼍 복도에 그 검은 그림자는 비틀비틀 움직이었다.
 
127
=애인과 남편
 
128
영애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뒤틀리고 까맣게 높은 곳에서 천야만야한 낭떠러지를 굽혀 볼 때처럼 골머리가 힝힝 내어 둘리는 듯하였다. 여해의 장래를 맡는다는 것이 제 힘에 너무 벅차고 부치는 듯하였다.
 
129
그를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 암만해도 엄청난 어려운 일을 저질러 놓은 듯 하였다. 깊고 넓은 개울을 어림 없이 건너뛰려고 이( ) 발을 허공에 솟구친애 모양으로 그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었다.
 
130
눈만 감으면 여해의 모양이 가위를 눌리는 듯이 대어든다. 돌같이 표정 없는 그 얼굴, 핏발 선 그 눈자위, 검푸르게 찌그러 붙은 그 흉터! 그는 제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꾸짖어 보았건만 어쩐지 여해가 무섭고 지겨웠다.
 
131
영애는 진저리를 치고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저를 구해줄 사람이나 찾는 듯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132
삼간 방은 휑덩그렁하게 비었다. 웃목에 놓인 의자의 자개들이 전등 불빛에 호젓하게 파란 눈을 반짝반짝할 뿐이다. 명희도 유모의 방에서 잔다.
 
133
그는 이런 밤에도 남편이 늦게 돌아오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134
H은행 전무 취체역, 토목협회 회장, 직조회사 사장, 그리고 또 무엇무엇, 이루 다 헤일 수 없는 직함을 띤 자기 남편. 청년 실업가로 사업가로 조선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는 자기 남편. 그는 자기 남편이 얼마나 바쁜 몸인 줄을 잘 안다. 밤마다 얼굴만이라도 내어놓아야 할 연회가 한 군데도 아니요, 세 군데 네 군데씩 벌어지는 것도 잘 이해한다. 그래도 어쩌면 밤마다 늦을까? 번연히 알면서도 언제든지 이 의문은 떠오른다. 더구나 작년부터는 술이 과해지는 듯하였다. 아모리 친구의 권김이라 하더래도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애닯고 딱하였다.
 
135
그는 남편의 술이 과해지고 밤마다 늦는 것은 명화 년의 탓이거니 한다.
 
136
그는 남편을 믿었었다. 아모리 늦더래도 밖에서 왼 밤을 새우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연회엔 의례히 기생이 있고 기생도 자주 만나면 친해지기는 하겠으되 그의 남편은 절대로 건드리는 법은 없었다. 자기의 사업도 사업이고 명예도 명예려니와 아교 같은 자기네 부부의 사랑이 벌 틈이 없었다.
 
137
그런데 그 명화 년이 나타난 뒤로는 그리 흔치는 않을망정, 가끔 왼 밤을 밝힌다. 재작년 여름 석왕사에선가 처음 보았다는 그 기생, 자기 남편에게 마음을 바친다는 표적으로, 제 팔뚝에 먹실을 넣은 예전 사내의 성명까지 도려내었다는 그 기생은, 이 집에까지 ─ 이 사랑의 궁전에까지 그 더러운 발길을 들여놓게 되었다.
 
138
작년 가을 사랑을 양관으로 새로 짓고 달포 동안은 밤마다 집에서 연회가 열리었다. 그 때부터 그 기생은 드나들기 시작하였다. 그년은 이 집 사람이다 된 듯이 안출입까지 하며 방정을 떨었다. 밥을 달라, 멸치 깍두기를 달라, 숭늉을 달라, 넉살 좋게 아니 청하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자기를 보고 한껏 위해 올리는 세음인지 빈정대는 수작인지 '아씨님! 아씨님!'하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139
그리고 그년 때문에 남편의 나쁜 버릇이 또 하나 늘었다. 자정이 넘어 들어오는 것이나마, 그년이 좇아와서 이따금씩 사랑에서 자고 만다. 몇 번 사랑에서 자 버릇을 하더니, 인제는 밤이 늦으면 그년이 있거나 없거나 곧잘 사랑에 쓰러진다. 이불도 안 덮고 일쑤 새우잠을 자 버린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까지 쫓아나가 보지는 않는다. 명화와 마주치면 그런 창피가 어데 있느냐 오늘밤에도 . 남편이 사랑에 와서 쓰러졌는지 모르리라!
 
140
영애는 어수선한 생각을 쫓는 듯이 머리를 한 번 흔들고 이불을 푹 뒤집어 썼다. 잠이 막 어릿어릿하게 들려 할 제, 여해가 그 때 첫날밤 모양으로 서리 같은 칼을 번뜩이고 선연히 머리맡에 들어선다. 영애는 소스라치며 잠을 깨었다.
 
141
은주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142
깊은 밤, 고요한 공기! 실낱만한 소리도 제 자최를 감추지 못한다.
 
143
잠이 어릿어릿한 귓결이니 헛소리를 들었는지 모르리라. 영애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귀는 전화를 통할 때처럼 찡하고 운다.
 
144
무엇이 탁탁 하고 부딪는 소리, 덧들인 아이가 악을 쓸 때 하듯 버둥버둥 하는 소리…….
 
145
처음에는 명희가 제 고모 방에 와서 자는가 하였다. 은주도 명희를 끔찍이 귀애하거니와 명희도 제 고모를 누구보담도 따라 일쑤 그 방에서 자기도 한다. 선잠을 깨어 잠투정으로 찜부러기를 하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우는 소리가 없다. 저만큼 버둥길 적이면 왼 집안이 떠나가도록 울어제칠 터인데 하고, 그 이상한 소리가 제 딸이 내는 것이 아닌 줄은 곧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은주가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흔히 하는 버릇으로 책을 동댕이를 치고 인제야 자리에 눕는 게로고나 하였다. 종용치 못하게 몸부림을 치는 게로고나 하였다.
 
146
영애는 다시 잠을 들어보려 하였다.
 
147
그 인기척은 암만해도 수상하다.
 
148
파드득파드득 자반뒤집기를 하고, 우는 애의 입을 틀어막는 듯 윽윽 하는 숨찬 비명이 들린다.
 
149
영애는 몇 번째 귀를 의심하다가, 암만해도 심상치 않아서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왔다.
 
150
버선을 신고 치마를 입었다. 어쩐지 바깥에 나갈 일이 무시무시하였다. 방문을 열려다가 말고 또다시 망단하였다. 머리는 불길한 조짐을 알리는 듯이 잉잉 하며 펄떡거린다.
 
151
헉헉 하는 굵은 숨길과 그 굵은 숨길에 엎눌리는 듯이 끙 끙, 안간힘을 쓰며 까물쳐 들어가는 숨길이 섞여 들린다.
 
152
숨소리는 분명히 둘이다.
 
153
영애는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고 한 발자욱 마루에 내어 디디었다. 이때 화닥닥하고 머릿방 쌍창을 열어제치는 소리가 났다. 머리끝이 쭈뼛해지며 주춤 걸음이 멈춰진다. 허전거리는 손으로 은주의 방으로 건너가는 대청 뒷합 문을 열 제, 뒤꼍 복도에 우둥우둥 발자최가 울리었다.
 
154
영애의 핑핑 내어 둘리는 시선에 뛰어가는 사내의 흰 바짓가랑이가 너풀너풀 보이었다.
 
155
영애는 직각적으로 그 사내가 여해인 것을 알아보았다. 어떠한 변고가 생긴 줄도 깨달았다. 제가 디딘 마룻장이 마치 물결처럼 술렁거리며 핑핑 매암을 돈다. 또 우둥우둥 하는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여해의 처소로 정해준 건넌방 쪽에서 난다.
 
156
영애의 등골은 얼음 냉수를 끼얹는 듯하였다.
 
157
그림자는 댓돌 앞에 나타났다.
 
158
'내게로 달려오는고나.' 이런 생각이 현기증 나는 머리를 번개같이 스쳐간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하던 몸이 흠칫해지며 영애는 떨린다. 전신에 바람이 난 것처럼 왈왈 떨린다. 그 백지장같이 핼슥하게 질린 얼굴은 산 사람 같지 않았다. 홉뜬 눈자위에는 생기도 사라졌다. 누가 곁에서 만져 보았다면 그의 수족과 몸이 꼿꼿이 굳어버린 것을 발견하였으리라.
 
159
다행히 그 그림자는 영애에게 달겨들지는 않았다. 신방돌을 더듬어 구두를 집어 신고 쩌벅쩌벅 마당으로 나려선다. 달이 낮 같은 마당에 숨길 수 없는 제 그림자를 옴츠러들일 듯하며 중간문으로 사라진다.
 
160
여해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중문을 열고 나섰다. 그 기름한 그림자는 어둑한 대문 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육중한 대문에 매어 달려 허전거리는 손으로 빗장을 찾았다. 서투른 손길에 빗장고리는 잘 벗겨지지를 않아 한창 실랑을 하는 판이었다. 달아나자! 달아나자 한시바삐 한초바삐 이 범행 현장을 벗어나자! 마음만 초조하게 채쪽질을 한다. 그의 귀에는 대문 밖에 뿡하고 자동차가 대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문 옆 조그만한 통용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두런두런 난 것도 들리지 않았다.
 
161
"누구냐, 누구?"
 
162
누가 뒷덜미에서 소리를 버럭 지른다. 무망중 우레같이 떨어진 이 소리에 도망꾼은 튕기는 것처럼 몸을 꿈틀하였다. 빗장에 대인 손을 얼른 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163
거기는 바루 이 집 주인이 서 있었다. 술이 잔뜩 취해서 잔털외투를 풀어 헤뜨리고 가누지 못하는 몸을 운전수의 어깨에 실린 박병일이었다. 도망꾼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두 번째 호령은 떨어졌다.
 
164
"이놈, 누구냐, 누구야?"
 
165
운전수는 부축하였던 팔을 빼어 암등을 내더니 여해의 얼굴에 들이대었다.
 
166
도망꾼은 호령하는 사람이 누구인 줄을 대번에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167
그 눈에서는 불길이 확 하고 일어날 듯하였다.
 
168
"이놈, 누구냐, 누구?"
 
169
"김여해다!"
 
170
달아나던 이도 같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의외로 큰 소리에 놀랬음인지 취한 이는 비척 한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171
"김여해? 김여해?"
 
172
하고 뇌이며 다시 다가든다. 어깨를 치슬러 올리고 목고개를 앞으로 길게 늘이며 잘 뜨이지 않는 눈을 겨우 치뜬다.
 
173
"김여해? 김여해? 네가 김여해?"
 
174
자꾸 되씹으며 바싹바싹 앞으로 대들어 거의 이망거리를 하게 되었다.
 
175
"그렇다! 그렇다!"
 
176
도망꾼도 지지 않고 맞대꾸를 하며 잡아먹으려면 잡아먹으라는 듯이 얼굴을 쳐들어 보인다.
 
177
취한 이는 낯살이 간질간질하도록 이윽히 달아나던 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별안간 팔을 번쩍 들어 얼싸안는다.
 
178
"네가 김여해냐, 네가 김여해냐?"
 
179
하고 반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뺨을 대고 부빈다.
 
180
"네가 김 여해냐, 네가 김여해냐? 그 몹쓸 고생을 어떻게 견디어냈느냐 말이야?…… 으 으."
 
181
하며 억한 것같이 우는 시늉을 내다가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한번 탈탈 털어보고 코를 핑 풀었다.
 
182
"자네가 김여해야? 허 그런 고생이……."
 
183
취한 이는 뚱뚱한 배를 흔들고 흘러 나려가는 즈봉을 치켜 입고 조금 점잖아진다.
 
184
"자 들어가세, 들어가, 응."
 
185
주정꾼은 도망꾼을 잡아끄은다. 그는 여해가 새벽녘에 무슨 까닭으로 대문간까지 뛰어나왔는지 조금도 수상쩍어 하지 않았다. 알코올에 녹초가 다 된 그는 그런 것을 따질 만한 정신이 없었다.
 
186
운전수는 웬 영문인지 몰라 비켜서서 어리둥절하였다.
 
187
도망꾼은 주인에게 끌리어 다시 들어왔다. 양실 현관을 거쳐 그들은 온돌방으로 들어왔다.
 
188
주인은 나그네를 보료 위에 잡아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189
곤드레만드레하는 머리를 정다운 듯 손님의 어깨에 쓰러뜨리더니 개개풀린 눈을 감아 버린다.
 
190
"물러갑니다."
 
191
운전수는 현관에서 소리를 쳤다. 주인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192
"어 수고했네, 잘 가게."
 
193
한다. 취한 것 보아서는 인사는 또박또박하다.
 
194
"김여해, 김여해."
 
195
잠꼬대같이 중얼거리다가 병일은 손을 깍지를 껴서 여해의 어깨에 얹고 그 위에 제 얼굴을 올려 놓고 꼬박꼬박 잠이 드는 듯하다.
 
196
도망꾼은 귀를 기울여 운전수의 발자최가 사라지자 슬그머니 몸을 빼고 취한 이를 누여 본다. 도망꾼의 두 손바닥에 끼인 머리가 요바닥에 툭 떨어지자, 취한 이는 눈을 또 번쩍 뜬다. 일어선 여해를 보고 눈을 부비며,
 
197
"어딜 가, 어딜 가?"
 
198
하더니 주정뱅이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걸음마를 하는 어린애 모양으로 다리를 비적비적하며 다리보담 앞선 상반신을 기울여 여해를 부여잡는다.
 
199
"이 사람아, 어딜 가, 어딜 가?"
 
200
목을 틀어안고 아까 모양으로 또 뺨을 비비며 다시 잡아 앉힌다.
 
201
여해가 앉은 뒤에는 또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이, 눈을 나려감고 벽에 기대인 머리를 꼬박꼬박 한다.
 
202
밑에서 무엇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고개가 지나치게 떨어지자, 번쩍 쳐들어 한 번 흔들고 눈을 치떠서 여해를 바라본다.
 
203
"우리 술 술, 한 잔 먹을까?"
 
204
간신히 돌아가는 혀끝으로 이런 말을 하고, 또 눈을 스르르 감은 채, 손뼉을 딱딱 치며,
 
205
"여봐라 뽀이, 뽀이야!"
 
206
하고 부른다.
 
207
여해는 하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감은 눈으로 어느 틈에 여해 가 웃는 것을 보았는지.
 
208
"왜 웃어, 왜 웃어, 응 왜 웃어?"
 
209
뇌이고 또 뇌이는 사이에 눈은 제법 크게 떠진다.
 
210
"오 참, 우리 집이지."
 
211
열쩍은 웃음을 띠우고, 몇 번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차차 정신이 나는 모양이다.
 
212
"응, 자네가 김여해 군이지?"
 
213
말도 틀이 잡혀간다.
 
214
"어 언제 나왔나?"
 
215
새삼스럽게 묻고, 정신을 모으는 듯이 여해를 똑바로 본다.
 
216
"오늘 아침에……."
 
217
주정뱅이가 삽시간에 정신을 차리는 것을 무슨 기적이나 구경하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여해는 말끝을 얼버무린다.
 
218
"오늘 아침에?"
 
219
병일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220
"오 옳지 옳아. 오늘 아침이야. 나도 감옥엘 나가려다가 워낙 바빠 놓아서……."
 
221
인제 수인사까지 할 줄 안다. 쭉 뻗치었던 다리를 오그러들여 의연히 평좌를 치고, 잠깐 무료하게 있더니, 별안간,
 
222
"순아!"
 
223
하고 부른다. 순이는 부리는 계집애의 이름이었다. 술상을 차려 내오라고 이를 눈치였다.
 
224
열쩍은 웃음을 띠우고 몇 번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차차 정신이 나는 모양이다.
 
225
"다들 자나?"
 
226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화다닥 일어나 도듬퇴 벽장문을 확 열고 잠깐 더듬더듬 하더니 백마 위스키 한 병을 끄어낸다.
 
227
"다들 자는 모양일세그려, 우리 강술이라도 한 잔 할까?"
 
228
씨근씨근하며 병마개 위에 박인 양철 잔을 들어서 뽑아내어 불쑥 여해에게로 내어민다.
 
229
"자, 한 잔 하게."
 
230
여해는 잔을 받아들었다. 금파 같이 투명한 액체는 퐁퐁 하며 나오기 싫은 듯이 떨어진다. 따르는 이의 허전거리는 손으로 말미암아 술은 양철 곱보에 보담 방바닥에 질금질금 더 많이 쏟히었다.
 
231
여해는 단숨에 들이키고 잔을 도루 주려 하매 병일은 손을 내저으며,
 
232
"후래 삼배거든, 나는 전작이 많아서."
 
233
하고 또 한 잔 붓는다.
 
234
여해는 또 널름 집어삼켰다. 그는 달아날 생각도 잊은 듯하였다.
 
235
되는 대로 되어라, 이런 경우에 술이나 먹어 두자 결심한 듯하였다. 석 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그 강렬한 술기운은 배배 말랐던 창자를 불질을 일으키는지 여해의 시들시들 곯은 얼굴에도 확 붉은 빛이 퍼진다.
 
236
"이번엔 내 차롄가?"
 
237
하고 병일은 술잔을 받아 입술에는 대지도 않고 입을 딱 벌려 목구녕 어름에 탁 털어 넣는 듯이 부어 버린다.
 
238
지난날의 애인과 오늘날의 남편은 서로 화풀이나 할 듯이 무릎을 맞대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239
기름한 술병은 벌써 반 남아 기울었다.
 
240
병일은 깨려던 술이 다시 취해 올랐다. 아래 볼이 축 쳐지고 위아래가 길게 네모난 얼굴은 부석부석 부어오르는 듯하였다. 한 잔을 또 탁 털어 넣고 양철 곱보를 손가락 끝에 꿰어들어 회회 돌린다.
 
241
"나를 왜 죽이려 했어? 이렇게 사람 좋은 나를……."
 
242
병일은 불쑥 이런 말을 하고 여해의 턱 밑까지 대어든다. 통통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눈을 크게 부릅떠서 바로 꾸짖는 듯하다.
 
243
여해의 대답 없는 것을 보고 혼자 허허 웃어 버리더니 덥석 여해의 손을 잡는다.
 
244
"자네는 참 훌륭한 사람이란 말야. 굉장한 사람이란 말야.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 말은 쉬워도 참 어려운 노릇이거든. 이를테면 우리 은인이란 말야, 허……."
 
245
'이란 말야'는 병일의 취할 때 연발하는 말투다.
 
246
"허, 참 놀랍단 말야, 만일 딴 사람같아 보아. 괜히 있는 말, 없는 말을 늘어놓을 게란 말야. 그러면 내 와이프 꼴이 뭐이 된단 말야. 허, 참 놀라운 일이란 말야……."
 
247
또 한동안 술잔을 주고 받았다. 위스키 병은 두 번째 꺼내왔다.
 
248
"이렇게 사람 좋은 나를 죽이려 한 것은 그야 자네 실수지. 그러나 일시 실수야 누구는 없겠느냐 말야. 젊은 혈기에 용혹무괴한 일이거든. 꾹 참고 오 년 징역을 치른 것이 참 갸륵한 일이란 말야. 그야 군자금을 모집했다고 경찰에서 우기는데 부정해도 될 노릇이 아니지. 그래도 군색한 소리 않는 게 사내답단 말야."
 
249
주인은 나그네의 등을 툭툭 치며 어루만진다.
 
250
"나도 사내야, 사내가 사내를 안단 말야."
 
251
병일은 양복 웃저고리를 벗어 부치고 와이샤쓰 단추를 끄르고 팔을 부르 걷는다. 그는 기고만장이다.
 
252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말야. 그까짓 조그만한 계집 하나를 가지고 다투었다고 원수가 되어서야 쓰겠느냐 말야. 그따위 위인은 컴마 이하란 말야.
 
253
응 내 말 알아들어? 그렇지 응? 자네가 내 생명을 빼앗으려 했지만, 난 그걸 개 방귀만치도 알지 않는단 말야."
 
254
하고 연설자는 별안간 청객을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255
내가 자네를 이렇게 " 사랑한단 말야. 원수를 사랑해라, 예수의 말씀도 있지만 내가 참말 자네를 사랑한단 말야."
 
256
하고 연설자는 바로 예수나 된 듯이 목고개를 훨씬 빼어 어깨를 한 번 치수르고, 한층 소리를 더 높인다.
 
257
"내가, 내가 자네를 사랑한단 말야. 내가 있는 다음에야 자네의 전도는 양양대해와 같단 말야. 내가 있는 다음에야 세상에 안 될 일이 무에란 말야. 응……."
 
258
연설자는 곤두세운 가래침을 배앝고 나서,
 
259
"자, 취직도 시켜 줄 터것다. 자, 장가도 들여 줄 터것다."
 
260
하고 손가락을 하나둘 꼽는다.
 
261
여해의 얼굴은 어느 결엔지 붉은 기운이 사라졌고 노오래졌다. 바람모지에 앉은 사람 모양으로 고개를 덜덜 떤다.
 
262
"응 알겠지, 내 말 알아듣겠지? 응."
 
263
"……."
 
264
"왜 대답을 않는 거야, 응? 취직도 싫단 말야? 꽃 같은 여학생도 싫단 말야?"
 
265
"……."
 
266
여해의 입은 무슨 말을 할 듯이 실룩실룩하였다. 그 눈자위는 방 위로 돌아서 치쏠리었다. 어깨는 으스러져 나려앉는 것 같다. 얼굴은 노오란 빛도 걷히고 새파랗게 질렸다.
 
267
앞으로 푹 꼬꾸라지는 바람에 그 무거운 고개는 병일의 무릎 위에 떨어졌다.
 
268
"그러면 그렇지, 내 앞에 고개를 숙여야지, 그래 그래야지."
 
269
취한 병일은 여해가 흥분과 알코올에 왼몸 조직이 파괴되는 줄을 몰랐다.
 
270
제 말에 감격해서 엎어진 줄 지례짐작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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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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