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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이마의 흉터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T동 꼭대기를 거지반 다 올라와서 두 길이 넘을 듯한 벽돌담이 머리에 비쭉비쭉한 유리 조각을 꽂고 철옹성같이 둘러쌌는데, 이 철옹성이 앞으로 나래를 아모린 어름에 솟을대문이 덩그렇게 솟았다. 큼직한 사기 문패에 뚜렷이 박병일(朴炳日)이라고 쓰인 세 글자가 위협하는 듯이 나려다본다. 여해는 노리는 듯이 그 문패를 쳐다본다.
 
2
그는 영애에게 꺼들리어 허턱대놓고 자동차를 탔으되 설마 여기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자기로부터 사랑을 뺏은 원수, 자기의 서리 같은 칼날에 첫날밤의 기쁨과 행복이 부서질 뻔한 피해자! 그의 집에 올 줄 이야, 감옥을 나오는 첫걸음으로 이 집에 올 줄이야. 세상에 기괴한 인연도 있고는 볼 일이다.
 
3
자동차가 몇 번 뿌웅뿌웅 소리를 내매, 마치 감옥 문 모양으로 닫히었던 솟을대문은 좌우로 훨씬 열린다. 자동차는 흥청하며 한번 춤을 추는 듯하더니 문턱을 넘어 쑥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들쭉나무로 울을 지은 조약돌을 깐 길을 미는 듯이 올라와 중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가장 힘드는 고역이나 치른 것같이 털털 쇄쇄하며 가쁜 숨을 내어쉰다.
 
4
자동차 양옆에 웅긋쭝긋 늘어선 사랑 사람들에게 눈으로 인사를 받으며 영애가 먼저 나렸다. 머뭇머뭇하는 여해를 갸웃이 들여다보고,
 
5
"나리셔요."
 
6
하며 인사치레하듯 쌍끗 웃어 보인다.
 
7
여해는 지금 와서 망설일 형편이 아닌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검은 눈썹을 한 번 찡긋하고 다리에 힘을 주며 나려선다. 홑몸으로 적진에 들어서는 기사 모양으로 그는 안간힘을 쓰는 듯하였다.
 
8
중문은 둘이었다. 왼편 손 중문 위로는 사기 벽돌로 지은 소쇄한 양관이 내다보인다. 영애는 오른편 중문을 열고 들어선다.
 
9
중문 들어서는 입새에는 푸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듯한 전나무가 열을 지었다. 그 새새에 끼인 개나리는 벌써 옹기종기 붙은 노란 방울을 터뜨린다.
 
10
이 자그마한 숲을 지나면 안마당이 훤하게 열린다. 넓은 마당을 반을 따서 윗마당은 길을 비켜놓고 동서로 갈리어 화단을 꾸몄다. 잔디로 W자를 그리고 그 굴곡마다 난쟁이 황양목으로 선을 둘렀다. 아랫마당은 네모난 시멘트판으로 다졌다 평지보담 . 한 자 가량 높게, 석자 가량 넓이로 역시 시멘트를 다져 길을 내었다. 대뜰까지 뻗은 그 길은 마당에 서투른 사람을 위하여 마치 갈 곳을 지시하는 듯하였다.
 
11
안 중문에 들어서자, 안 구종들이 너댓 나와 맞으며 영애를 호위하듯 뒤를 따라선다.
 
12
윗마당을 거진 지나오자 영애는 잠깐 걸음을 멈추는 듯하더니 바싹 등뒤에 대어선 한 사십 남짓한 어멈을 돌아보며 넌지시 묻는다.
 
13
"그 방은 치워두었지?"
 
14
"네, 말갛게 치고 보료도 깔아뒀어유."
 
15
주인의 말이라면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행하는 제 공을 자랑하는 듯하다. 그 투덕투덕 살찐 검붉은 얼굴에 신들민들한 웃음까지 흘린다.
 
16
"그런뎁슈, 아씨이!"
 
17
그는 외양과는 딴판으로 달라붙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아씨'의 '씨'자를 길게 뺐다.
 
18
"그런뎁슈, 아씨이, 그 방이 워낙 어구차서 도모지 덥지를 않아유."
 
19
영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20
"왜 일찌감치 불을 지피라고 기껏 일렀는데……. 덥지 않으면 어쩌나 ……? 그러면 안방……."
 
21
하다가 난처해하는 눈치다.
 
22
어멈은 고개를 기우뚱기우뚱하더니 좋은 생각이 금시로 떠올른 것처럼 얼굴을 번쩍 쳐든다.
 
23
"그러면입슈, 아씨이, 저 아가씨 방이 더운뎁슈."
 
24
영애의 귀밑까지 바싹 입을 들여대고 무슨 긴한 일을 귀띔이나 해 주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눈을 껌벅껌벅하며 주인의 낯빛을 살핀다.
 
25
"아가씨는 학교에 가셨지?"
 
26
"네, 가시구 안 계셔유. 오늘이 반공일이랩슈, 일찍이 오신다고 해서 아침 군불까지 지펴서 쩔쩔 끓는뎁슈."
 
27
하고 부리나케 앞장을 서서 간다. 그는 벌써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듯하다.
 
28
손님이 들어가기 전에 그 방을 치워둘 작정이리라.
 
29
네 벌 장대 위에 몸채는 날아갈 듯이 앉았다. 옛날 관청 모양으로 돌계단이 있고 돌계단을 올라서면 폭넓은 화강석 신방돌(信防石)이 앞을 막는다.
 
30
발갛게 기름 먹인 분합문을 열매, 마루에는 양탄자를 깔아놓았다. 두 주가 놓일 자리에 윤 흐르는 피아노 한 대가 엄전스럽게 놓였고, 그 위에는 한 간통이 넘을 듯한 체경이 걸렸다. 책상 대신으로 양탁자가 섰는데 가지각색 사기와 유리 그릇이 차곡차곡이 쌓이어 제각기 제 독특한 무늬와 색채를 발 한다 한복판을 차지한 . 둥근 테이블은 우단보에 제 몸을 가리웠고 그 주위엔 소파들이 사람이 앉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넓적넓적한 잎사귀가 치마폭 같이 너울거리는 파초 화분, 묵은 등걸에 흰 꽃을 발라 놓은 듯한 매화 화분들, 여섯 칸이 넘는 마루가 빈 구석 없이 제 구격을 맞추었다.
 
31
모든 것이 세련된 취미와 황금에 번쩍인다.
 
32
황금으로 지은 으리으리한 사랑의 궁전!
 
33
여해는 적진을 둘러보는 기사 격으로 모든 것에 불 같은 눈동자를 붓는 듯 하였다.
 
34
대청을 거쳐 다시 뒤 복도로 나왔다.
 
35
뒤꼍에도 상당한 지면이 있고 거기도 안마당보담은 규모는 작으나마 귀밀조밀한 화단을 꾸며 놓았다. 더구나 어린 싹 위에 붉은 실 푸른 실로 사리를 엮어 조그마한 고깔들을 해 씌운 것이 눈에 뜨이었다. 그 옆에 너저분하게 신문지 봉지가 떨어진 것은 밤내 찬서리에서 그들을 보호해 준 이불이리라. 청실 홍실로 사리를 엮은 것은 가냘픈 여자의 손이 분명하다.
 
36
"이 어린 싹을 누가 밟으면 어떡해요, 다치면 어떡해요?"
 
37
그 예쁜 고깔들은 저를 만들어준 주인 대신으로 이런 말을 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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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가 인도된 곳은 결국 안방의 머릿방이었다.
 
39
아까 먼저 간 그 어멈은 걸레질을 치기, 아랫목에 보료를 갖다 깔기, 부산하게 바빠해 한다.
 
40
여해는 그 방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 방의 임자가 여자임을 곧 알았으리라. 쌍창 가까이 자그마한 책상이 놓이고, 그 위에 여자 고보 교과서가 책꽂이에 나란히 꽂힌 것이며, 꽃을 물린 문진이며, 저편 벽 밑에 조안화를 수놓다가 그대로 둔 자수틀이 비스듬히 기댄 것이며……그 방의 임자가 여자임을 당장 알 수 있는 일이로되, 그 모든 것보담도, 오랜 감방살이에 그리던 이성의 향기가 물씬하고 그의 코를 엄습하였다. 메스꺼울 만큼 강렬한 향기를 따라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아른아른하게 움직이듯 하였다. 보들보들한 살덩이가 그윽한 숨길을 내어쉬는 듯하였다.
 
41
영애의 권하는 대로, 여해는 미끄럽고 부드러운 모본단 보료에 자리를 잡았다. 영애도 목도리를 끄르고 앉으려다가, 방을 다 치우고 나가는 어멈을 보고,
 
42
"그리고 그 방에 불을 좀더 때고, 요를 좀 많이 깔고……그리고 저……."
 
43
하다가 어멈의 뒤를 따라나가더니 무엇을 속살속살 입안말로 이른다.
 
44
그러면입슈 옷은 " , 그 방에 깔아두고 진지상은 이 방으로 가져오럅슈?"
 
45
"그래요, 치우실 텐데……. 어서."
 
46
분부를 끝내고 들어온 영애는 여해 앞에 앉았다. 단둘이 앉았다.
 
47
한동안 답답한 침묵!
 
48
종용한 자리에 앉으면, 겹겹이 쌓인 말이 샘솟듯 할 것 같더니, 정작 단둘이 마주앉고 보니 영애는 가슴만 가득하다.
 
49
여해의 모양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자기로 말미암아, 일어난 비극이 얼마나 끔찍스럽고 참혹했던 것이 새삼스럽게 돌아다 보인다.
 
50
빡빡 깎은 머리는 비리 먹은 개털 모양으로, 군데군데 허여스름한 부스럼 자리를 남겼다. 우벼파 놓은 듯한 두 뺨, 탄력을 잃은 시들시들한 살결, 우뚝한 콧잔등에 밀리는 잔주름, 내어 민 광대뼈 위에 건포도 껍질같이 붙은 검버섯, 아래 눈부리가 부은 듯하고 그 속에서 실룩실룩하는 힘줄들! 어쩌면 저대도록 변하였는가. 꽃봉오리같이 피어 오르던 스물 안팎 청년은 어데로 갔는가.
 
51
질질 흐르는 듯하던 윤기는 없어졌으나마, 그래도 옛 형상을 남긴 것은 그 진한 눈썹뿐이다. 그 밑에서 영롱하게 번쩍이던 그 눈도 무섭게 변하였다.
 
52
그 눈자위에는 핏발이 섰다. 살기를 띠고 번들번들하는 그 눈초리! 자기를 보아도 예사로 아니 본다. 쏘는 듯 노리는 듯 흉물스럽고 불길한 광채를 발 한다.
 
53
그 눈길이 몸에 닿이면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영애의 등골은 으쓱해진다.
 
54
어젯밤까지도 자기를 즐겁게 하던 여해를 위한 모든 계획이 이 눈길 앞에 조각조각 깨어지는 듯하였다. 높고 아름답고 영절스럽던 그 계획이 너무나 천착스럽고 좀스러운 듯하였다. 더군다나 그 계획을 입밖에 내어 그를 위로해 보리라고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55
그는 여해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였는가. 여해를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는가.
 
56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남편의 속까지 떠보지 않았는가. 그의 남편은 ─ 숭고한 인격을 가진 그의 남편은 털끝만한 질투도 느끼지 않았다. 저야 잘 했든 잘못했든 하여간 우리 때문에 생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으니 전 책임을 지고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겠다 하였다. 자기가 관계하는 은행에나 회사에 발천을 시켜 주고 특별한 대우를 해 주마 하였다. 옥문 밖을 나서면 갈 곳도 없을 테니, 집에 데려다 두고 몸이 소복되도록 극진히 두호해 주라 하였다. 내 나이 많고 그의 나이 적으니 내 동생을 삼으리라, 내 동생이라고 내세워 어여쁜 처녀에게 장가를 들여 주리라 하고, 남편은 허허 웃었다.
 
57
얌전한 집도 사 주고 꿀 같은 가정을 꾸며 주자 하였다.
 
58
남편은 제 속에 있는 말까지 선선히 다 해 주었다. 그는 너무도 감격하여 남편의 손을 꼭 쥐고,
 
59
"형제랑은 되지 말아 주어요, 내가 남매가 될 터예요. 그럼 당신께는 처남이 되지 않아요?"
 
60
"아냐, 그래도 내 동생을 삼아야 해."
 
61
"아녜요, 제 오빠를 맨들어 주어요."
 
62
하고, 부부끼리 승강까지 안 했던가.
 
63
"전날 애인을 그렇게 호락호락 오라비를 맨들어?"
 
64
하고 남편이 너털웃음을 내어놓을 때 가슴이 뜨끔하였으되, 활달한 남편의 태도가 어떻게 기쁜지 몰랐었다, 고마운지 몰랐었다. 그 높고 거룩한 마음이 우러러 보이었다.
 
65
이렇듯이 고귀한 남편의 정신을 여해가 출옥하던 맡에 알려 주리라 하였었다. 이 좋은 조건으로 그를 위로하리라 하였었다, 기쁘게 하리라 하였었다, 행복되게 하리라 하였었다. 그를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가려운데 손이 닿도록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가지가지 광경을 눈앞에 역력히 그리면서, 영애는 혼자 소리를 내어 웃지 않았던가?
 
66
그리하였거늘, 무서운 고통으로 무섭게 변한 여해의 형용 앞에는, 그 번쩍이던 모든 계획과 조건이 모조리 빛을 잃어버린다. 훌륭하고 거룩하던 정신과 마음씨도 차디찬 설한풍에 지질러지는 어린 싹과 같다.
 
67
영애에게는 자동차 속에서 '오빠'라고 부르던 용기조차 사라졌다. 이 숨 막힐 듯한 침묵을 깨뜨릴 말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68
뜻밖에 여해가 이 침묵을 깨뜨렸다. 턱 갈라진 목소리로,
 
69
"담배 한 개 주시오."
 
70
한다.
 
71
여해의 담배 달란 말에 영애는 깜짝 놀라며 솟구쳤다. 무덤같이 덤덤하던 여해의 입이 이렇게 무망중에 떨어지리라고는 정말 생각 밖이었다. 돌부처가 별안간에 말을 한 것처럼, 머리끝까지 쭈뼛하였다. 놀람이 지나가고 말뜻을 알아듣자, '애그 정신머리도…….' 하고 영애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감옥에서 나오는 사람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담배라 함은 누구에게 들었는지 잘 아는 노릇이다. 여해가 거처할 방에는 미리 준비까지 해 둔 것이다. 이를 잊을 줄이야, 쓸데없는 생각에만 정신을 놓치고 정작 그에게 줄 자그마한 위안이나마 까맣게 잊을 줄이야. 안방으로 건너와서 자개 놓인 까만 함에 해태를 풀어 참하게 담아 가지고 재떨이와 성냥을 허둥지둥 주워 들고 여해에게로 오는 영애는 어떻게 무안한 지 몰랐다. 그의 얼굴은 빨개졌다.
 
72
'가려운 데 손이 닿는 뒤치다꺼리!' 누가 빈정대는 것 같다.
 
73
'어쩌면 그렇게 둔하담? 어쩌면 그렇게 찬찬치 못하담?' 그 소리는 빈정대며 꾸짖는 것 같다.
 
74
담배합을 놓기가 무섭게 여해는 한 개를 집어 든다. 뻑뻑한 손가락은 잘 굴곡이 되지 않아. 무명지와 장지 사이에 어설프게 끼인 담배는 가는 몸을 뻗히려 한다. 엄지로 그 끄트머리를 누르매 빠져 나가려던 놈이 이번에는 곤두선다. 다시 엄지로 밑을 떠받치어 겨우 안정을 시켜 가지고 입에 갖다 대었으나 담배는 제 물리던 자리를 잊어버린 듯하다. 요리조리 빼끗빼끗하다가 왼편 입몸에 간신히 자리를 파고 앉는다. 행여 놓칠까 보아 두 입술을 입안으로 빨아 오무리고 합죽하게 물고서 성냥을 그어대었다. 귀찮은 일이나 하는 것처럼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한 모금 빨더니 후하고 내어 뿜는다.
 
75
연기는 온통 눈으로 기어올라 껌벅껌벅하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76
그 하는 양을 보고 있노라니, 영애의 빨개졌던 뺨에 웃음의 그림자가 얼씬 하려다가,
 
77
"담배 피는 것도 잊었구나."
 
78
하매 웃을 터수가 아니었다.
 
79
여해는 물을 움키듯이 두 손으로 잔뜩 담배를 움켜쥐고 몇 모금을 빨고 뿜고 하다가 갑자기 재떨이에 꺼버리고 어지러운 것을 진정하는 듯이 반듯이 쳐들어 본다.
 
80
"어지러우셔요?"
 
81
영애는 그제야 말문이 열렸다.
 
82
"아니오."
 
83
하고 여해는 웃는 시늉을 한다. 그렇다! 그것은 웃는 '시늉'이다. 윗입술이 조금 걷어 올라가는 듯하고 움푹 들어간 뺨에 밀린 근육이 실룩실룩할 뿐이다.
 
84
"오 년 동안에 담배도 도모지 못 피우셨구먼……."
 
85
하고 영애의 목소리는 또다시 탄식조로 흘렀다. 여해의 대답은 의외이었다.
 
86
"왜 못 피우긴, 이따금씩 얻어 피는데……."
 
87
"어떻게요?"
 
88
"죄수도 여럿이니 별 재조를 가진 사람이 다 많을 것 아뇨? 남의 주머니에 든 담배도 일쑤 빼내고……."
 
89
"간수의 담배를 빼내다가 들키면 어떡해요?"
 
90
하고 영애는 눈이 호둥그래진다.
 
91
"들키면 경이지, 죽도록 맞고 수갑을 질리우고……."
 
92
"그런 위험한 짓을 왜들 해요? 담배가 뭐기에……."
 
93
"담배가 뭐기에?"
 
94
여해는 영애의 말을 고대로 반문하는 듯이 재우치고 기막힌 듯이 웃는다.
 
95
이번에는 제법 크게 웃는 모양이다. 이마에 힘줄이 일어서고 광대뼈 마루 밑까지 근육이 주름을 잡으며 떤다. 그에게는 우는 것보담 웃는 것이 더 고통인 듯하였다.
 
96
영애의 가슴은 한 그믐밤 빛같이 캄캄해지는 듯하였다.
 
97
아츰상이 들어왔다.
 
98
그야말로 만반진수다. 잔 접시만 죽이 넘었다. 게다가 고음국 대접과 갈비찜과 왼 마리로 구운 도미를 담은 화기 등 큼직한 그릇이 들어앉아 놓으니 교자상만한 큰상도 철철 넘치었다.
 
99
영애는 상머리에 도사리고 앉으며,
 
100
"아모 것도 없습니다마는 치우신데 어서 잡수셔요."
 
101
라고 식사 비슷하게 한 마디 한다.
 
102
여해는 제 앞에 벌어진 어마어마한 음식의 사태에 어리둥절한 듯하더니,
 
103
"이게 아모 것도 없단 말이오? 이걸 내 혼자 다 먹으란 말이오?"
 
104
라고 진국으로 거의 시비조로 영애의 말을 뒤받는다.
 
105
"그러먼요, 다 잡수셔야지. 호호."
 
106
영애는 만족한 웃음을 띠었다.
 
107
여해는 어룰한 손으로 은숟가락을 들어 보얀 젖빛 나는 국을 한 술 떴다.
 
108
기름 같은 국물은 미끈하고 입 안 거칠 새 없이 목구녕으로 사라진 듯하다. 눈덩이 같은 이팝을 한 술 푹 떠놓고 젓가락을 들었으나 얼른 보낼 곳을 모르는 듯하다. 이 마르고 진 반찬의 수풀에서 젓가락은 망설이며 헤맨다. 편육을 초장도 안 찍고 한입 집어 넣고 숟가락으로 다시 간장을 떠 넣더니 젓가락질보담 숟가락질이 만만한 모양으로 깍두기도 떠 넣고 김치도 떠 넣고 갈비랑 건더기도 떠 넣는다. 흐물흐물한 고기만 홀랑 벗겨지고 하얀 뼈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 재미날 듯이 순식간에 갈비탕을 다 해 낸다.
 
109
살아서 헤엄치는 듯하던 도미도 앙상한 뼈만 가로누인다.
 
110
여해는 무섭게 먹어낸다. 맛나게 씹고 마시는 소리가 방안의 공기를 뒤흔든다.
 
111
그는 이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오 년 동안 콩밥덩이만 쥐어뜯는 것으로 만족했던 듯하였다 목구녕까지 . 푸만해 올라와서 여해가 막 숟가락을 놓으려고 할 때였다.
 
112
"엄마아! 엄마아!"
 
113
악쓰는 애 소리가 나고 미닫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하더니,
 
114
"아씨, 여기 계십쇼?"
 
115
하고 밖에서 묻는다.
 
116
영애는 살짝 눈썹을 찡기고 불현듯 일어나서 미닫이를 열고 그 열린 틈을 몸으로 막아선다.
 
117
"왜 여길 데리고 왔어."
 
118
영애는 나직하나마 못마땅한 듯이 쏘아붙이는 소리를 낸다.
 
119
"세상 보채서 어디 견딜 수 있어유? 젖을 물려 줘도 쥐어뜯기만 하고, 엄마께만 가자는 걸입슈. 아침에 나가신 뒤에도 얼마를 울었다구유. 지쳐서 잠이 들었다가 금새 또 깬 걸입슈. 이 눈 가장자리를 좀 봅슈. 퉁퉁 부었는 걸입슈……."
 
120
"데리구 가요. 데리고 가!"
 
121
"에구 가엾어라. 저런, 눈물이 또 걸신걸신하네. 이 주먹으로 눈물 씻는 꼴을 좀 봅슈."
 
122
하고 히히 웃는 소리가 난다.
 
123
"아가, 아가, 우리 저기 갔다 와, 응. 어머니 곧 오실 테니 응, 싫어? 에그머니나 그 도래도래하는 꼴이란. 우리 저기 가, 내ㄱ 과자 사 줄게 응.
 
124
그래도 싫어?"
 
125
"어서 좀 데리고 가요. 글쎄!"
 
126
영애는 발을 동동 구를 듯하다.
 
127
"엄마아! 엄마아!"
 
128
애는 새되게 악을 쓰며 불이 붙는 듯이 운다. 유모가 발길을 돌리는 모양이다.
 
129
"이를 어째, 이를 어째!"
 
130
몸부림을 몹시 치는지 유모도 따라서 우는 소리를 낸다.
 
131
"괜히 나를 보여 가지고!"
 
132
영애는 또 한번 뇌까리고 문을 닫으라고 하였다.
 
133
"그 애 이리로 데리고 오시오."
 
134
문득 등뒤에서 여해가 무뚝뚝한 소리를 친다.
 
135
영애는 몸을 깜틀하고 무서운 것을 보듯이 조심조심 여해를 돌아다본다.
 
136
더운 음식 탓인가 불콰하게 풀린 여해의 얼굴이 영애에게는 의외인 듯하였다.
 
137
"엄마아! 엄마아!"
 
138
부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가더니 나종엔 윽윽 하고 기함을 한다.
 
139
"그 애 이리로 데리고 오시오."
 
140
여해는 또 한번 재우친다. 영애는 못 들은 척하고 제 자리에 가 앉는다.
 
141
그 귀밑은 주홍을 올린 듯이 새빨개졌다.
 
142
멀어 가던 울음소리는 가까워 온다. 인젠 제법 '응아' 소리도 못 지르고 흑흑 느끼기만 하다가 이따금 악악 하고 모질음만 쓴다.
 
143
"아씨 아씨, 이걸 좀 봅슈."
 
144
짜증낸 유모의 소리가 쌍창 앞에서 다시 났다.
 
145
"남의 머리를 죄 쥐어뜯고 어떻게 찜부러기를 하는지 옷이 죄 흘러나리고…… 이 버둥질하는 걸 좀 봅슈. 에그머니 까무러치네!"
 
146
하고 유모는 참다참다 못 참는 듯이 미닫이를 펄쩍 열고 우는 애를 들여 디민다.
 
147
삼십 남짓한 유모는 까치집같이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고, 반쯤 흘러 나려간 치마를 치켜 입고 홍당무같이 된 얼굴에 진땀을 씻는다.
 
148
"참, 첨 봤어"
 
149
하고 혼자 혀를 차고 돌아서서 얼얼한 팔을 주무른다. 방에 들여민 애는 팔랑머리에 포플린 위아래 마기를 입은 세 살 가량 된 계집애다. 애는 눈물 괴인 눈으로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더니 새록새록이 설움이 복받쳐 오르는 것처럼 흑흑 느끼고 입이 삐죽삐죽하다가, 필경엔 '응아'하고 마음 놓고 큰 소리로 울어본다. 어머니가 얼른 와서 달래주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러나 제 기대와 틀리매 문득 울음을 뚝 끊고 주적주적 걸어서 어머니의 품을 파고든다.
 
150
어린 폭군은 떠다미는 어머니의 손도 밀어내고 대뜸 저고리 자락을 헤치고 젖꼭지를 내어문다. 우유가 엉켜붙은 듯한 뽀얀 살은, 애 뺨 너머로 웃웃이 내다본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다시는 안 놓치려는 것같이 젖꼭지 언저리를 잔뜩 부둥켜쥐고 흥껏 빨다가 이윽고 안심한 듯이 왼편 손을 뗀다. 조그마한 손자욱이 발그스럼하게 배긴 유방은 부끄러운 듯이 떤다. 이 반달같이 드러난 젖통을 대견하다는 듯이 애는 손을 들어 투덕투덕 뚜드린다.
 
151
영애의 얼굴은 단근질을 하는 것처럼 화끈화끈하였다.
 
152
한참 만에야 젖꼭지를 뺀다. 젖과 침이 지르르 흐르는 젖꼭지는 꿀을 발라 놓은 딸기송이 같다. 바깥 공기가 차갑다는 듯이 저고리 자락 속으로 움추려 들려 할 제 애는 다시 끄집어내어, 몇 번 질근질근 씹는 듯이 빨아 보다가 쭉 빼고는 어머니 무릎 위에 얼굴을 번듯이 놓고 울어서 부은 눈을 섬벅 섬벅 하다가 어머니를 쳐다보며 어글어글하게 웃는다. 고개를 푹 숙인 어머니의 얼굴을 저를 귀애해서 나려다보는 것인 줄 안 모양이다.
 
153
"그만 나려앉아요."
 
154
모기만큼 가느나마 모기같이 우는 소리를 하고 어머니는 애를 밀어 나린다. 애는 미끄럼 지치듯 어머니의 무릎을 타고 나려와서 방바닥에 의젓이 앉았다가 다시 쭈적쭈적 걸어서 여해의 상머리로 대어든다.
 
155
"애가 또 어딜 가?"
 
156
하고 영애는 애를 잡아당기려다가 여해의 숟가락 놓은 것을 보고,
 
157
"왜 고만 잡수셔요? 애 등살에……."
 
158
하고 눈썹을 찡그린다. 두 뺨에 타는 돈짝만한 홍훈은 피를 발라놓은 듯하다.
 
159
여해의 얼굴도 몹시 붉다. 관자놀이에 퍼렇게 일어선 힘줄이 뛴다. 숨결까지 씨근씨근 차 오르는 듯함은 식곤증 탓만이 아니리라.
 
160
애는 어머니의 막는 손도 뿌리치고 어느 결에 숟가락을 집어들었다. 밥도 쿡쿡 쑤시고 국도 되음박질을 한다. 여해는 밥상을 애에게 맡기고 내다 앉았다.
 
161
애는 국물을 흰 천바지에 질금질금 흘리다가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숟가락으로 밥을 뭉개기 시작한다.
 
162
영애는 애를 비켜 세우고 어멈을 불러 상을 맞들어 물린다. 애는 제 놀잇감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 펄썩 방바닥에 주저앉으며 다시금 떼를 쓰려 한다.
 
163
영애는 상을 물리노라고 미처 애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여해가 팔을 내밀며,
 
164
"이리 온!"
 
165
하고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애는 입을 삐죽삐죽하다가 말고 말끄러미 여해를 쳐다보더니 엉금엉금 기어서 숫기 좋게 손님의 무릎에 올라앉는다.
 
166
영애는 제 딸이 넙적 여해에게 안긴 것을 보고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벌에게나 쏘인 듯이 얼굴은 따끈따끈 쓰라리다.
 
167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떳떳한 부부가 되었지마는 ─ 다 아는 노릇일망정 ─ 그래도 한끝 가는 사실을 숨기려면 숨길 수 있다. 뻔뻔스럽게 잡아떼려면 잡아뗄 수 있다. 적어도 드러내놓을 이치는 없다. 버르집어 낼 까닭은 없다 부부생활의 . 붉은 비밀에 연분홍 휘장을 쳐둔들 누가 떠들시고 볼 것이냐.
 
168
그러나 이 결정체, 이 산 증거 ─ 자식은 면구스럽게도 모든 비밀을 말한다. 부부생활의 이불 자락을 걷어치고 벌거숭이 알몸을 내밀며 예 보라! 하는 것 같다.
 
169
조금만 서투른 사람 앞이라도 젊은 어머니의 얼굴은 저절로 붉어지는 법이 어든, 하물며 까닭 붙은 남자의 앞이랴.
 
170
영애는 도적질한 물건이 제 임자 앞에 나둥그러진 것같이 무색하였다.
 
171
술 취한 사람 모양으로 벌겋게 상기는 되었으나마 여해는 이렇다는 내색을 내지 않는다. 제 무릎에 올라앉은 애를 귀애한다는 것보담 차라리 탐스러운 듯이 어를 뿐이다.
 
172
"이름이 뭐?"
 
173
"이름? 응 이름이가……."
 
174
애는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더니,
 
175
"모라."
 
176
하고 어머니를 닮아 귀염성 있는 입모습을 둥글게 열어 히히 하고 웃는다.
 
177
"이름이 뭐?"
 
178
손님은 어머니를 바라본다. 말은 애에게 물으면서 대답은 어른에게 재촉하는 듯하다. 젊은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들릴 듯 말 듯하게 입 안 말로 속살거렸다.
 
179
"명희예요."
 
180
"뭐, 명희?"
 
181
손님은 애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메다붙일 듯이 번쩍 들었다가 사납게 갸 둥갸둥질을 쳐 준다.
 
182
"이름은 명희고, 나이는 몇 살?"
 
183
무뚝뚝하던 손님이 꽤 간드러진 목소리를 낼 줄 안다. 명희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하나 둘 꼽아보고,
 
184
"세!"
 
185
한다.
 
186
"셋이야, 셋?"
 
187
하고 여해는 신통한 듯이 기뻐해 하며 껄껄 웃는다. 허전허전 빈 구석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제법 우렁찬 웃음소리다. 영애에겐 그 웃음소리가 어쩐지 띵하니 머리를 울리고 폐부를 뚫고 들어오는 듯하였다.
 
188
애는 금세로 손님과 친해졌다. 무릎을 뻗디디고 일어서서 제가 어른뽄으로 묻는다. 손가락으로 입을 지지르며,
 
189
"이거 뭐야?"
 
190
"입."
 
191
"이거 뭐야?"
 
192
"코."
 
193
애의 손은 눈까지 올라왔다. 손가락 끝에 눈자위가 빙빙 도는 것이 신기한 듯이 몇 번 쿡쿡 쑤시어 본다.
 
194
"이거 뭐야?"
 
195
"눈."
 
196
조갑지만한 손은 이마를 비빈다.
 
197
"이거 뭐야?"
 
198
"이마."
 
199
"이거 뭐야?"
 
200
"그거……."
 
201
하고 어른의 대답은 막히었다. 명희의 손 밑에는 큰 손톱으로 잉크를 꾹 찍어 놓은 듯한 푸르게 찌그러진 흉터가 숨바꼭질을 한다. 그 흉터는 머리와 이마의 어름에 있어 머리 그늘과 주름살에 숨긴 탓으로 얼른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거나 만져보면 그 밋밋하게 들어간 자리가 거의 밤낱만한 어란을 잡은 것이다. 연한 손가락 끝에서 미끈하게 허방을 짓고 몬틀몬틀 도드라진 것이 이상하였는지, 명희는 또 한 번 비벼보고 어른의 대답을 재촉하는 듯이,
 
202
"이거 뭐야?"
 
203
하고 흉터에 닿은 손을 움직이지 않는다.
 
204
"그거, 흉터!"
 
205
그제야 어른은 애의 묻는 곳을 분명히 알아차린 것같이 막혔던 대답이 터졌다. 영애도 눈을 들었다. 그 흉터다. 적실히 그 흉터다. 그 전엔 머리 밑에 왼통 숨었던 그 흉터가 어찌하면 저렇게 길어 나려왔을까.
 
206
그 흉터! 두 사람의 기억에 잊히어지지 않을 그 흉터!
 
207
찌그러진 푸른 점이, 떠는 듯한 그 흉터! 갈데없는 그 때의 그 흉터! 피 묻은 옛 기억이 역력히 살아온다.
 
208
─ 껑청 뛴 말굽과 번쩍이는 ○○의 무지개가 반공에 솟았다가, 눈 한번 깜박일 겨를도 없이 그들의 행렬 앞에 떨어졌다.
 
209
여학생대 앞장에서 깃발을 든 영애. 여학생대를 옹위하는 남학생대의 앞 장에 선 여해. 그 찰나, 아슬아슬한 그 찰나에 여해는 영애의 앞을 막아섰다.
 
210
여해의 이마에는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진다. 찢어진 눈과 벌어진 입의 소용돌이, 팔과 다리를 풀잎같이 날리는 회호리 바람! 흥분과 혼란의 물결에 밀리면서도 그들은 단둘의 세계를 이루었다. 영애의 손수건은 여해의 상처를 눌렀다. 순식간에 그 흰 수건은 새빨개진다. 영애의 손가락 새로 피는 넘쳐 오른다. 수건을 버리고 치마폭을 땄다. 영애는 한 손으로 상처를 막고 또한 손으로 뒤통수를 안는 듯이 자아서 앞뒤로 지그시 눌러 보았다. 그래도 솟는 피를 멈출 길이 없다. 치마폭까지도 금세로 질척하게 적시어 낸다. 영애의 손은 떤다. 영애의 마음은 떤다. 여해의 붉은 피는 그의 수건을 적시고, 치마를 적시고, 몸을 적시고, 혼을 적신다. 심장 속 깊이 스며든다. 감격에 뛰는 두 가슴에 새빨간 사랑의 꽃봉오리를 맺고야 만다. 기미년 삼월의 봄에 ─.
 
211
명희의 무심한 손길이 닿은 데가 바루 그 흉터다. 그 때의 그 상처다.
 
212
찌그러진 푸른 점이 떠는 듯한 그 흉터! 그 때 둘의 가슴에 빛나던 그 감격도 그 흉터와 같이 찌그러져 붙고 말았다. 새빨갛게 피어나던 사랑의 싹도 두 심장 어느 구석에 손톱 자국만한 푸른 점을 남겼을까 말았을까…….
 
213
영애는 고개를 빠뜨린 채 멍하게 방바닥만 나려다본다. 마치 지난날의 가지가지 광경이 장판을 영사막으로 활동사진처럼 떠오르기나 하는 것 같다.
 
214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진다. 몇 방울 또닥또닥 소리를 내며 기름 먹인 장판 위에 구을다가 한군데로 도드라지며 모인다. 느껴움을 가라앉히려고 숨을 들어 마시던 영애는 고인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저으며 이리저리 그려 본다. 간 날의 기억을 눈물 위에 적어 두려는가. 획과 자양이 변변히 이루기도 전에 너무도 덧없이 속절없이 흐려지는 사랑의 글씨!
 
215
여해도 명희를 슬그머니 무릎에서 나려놓았다. 어룰한 손짓으로 담배 한 개를 또 붙여 문다. 후 후 하고 내어 뿜는 연기의 가는 곳을 멀거니 바라본다. 갑자기 변한 어른들의 태도에 명희의 눈은 똥그래졌다. 어머니와 손님의 얼굴을 몇 번 두리번두리번 번갈아 보다가 다리를 쭉 뻗고 별안간 '응 아!'하고 소리만 내어 운다. 제가 울어도 아모도 알은 체 않는 것이 더욱 수상한 듯이, 감았던 눈을 떠서 힐끈힐끈 어른들을 또 번갈아 보다가, 무서운 증이 와락 난 것같이, '엄마, 엄마!' 부르며 그대로 영애에게 뛰어든다.
 
216
영애는 애를 밀쳐낼 근력도 없는 듯하였다. 두 팔로 방바닥을 짚은 대로 아직도 흑 흑 느낀다. 명희는 팔 사이로 기어들어 먼저 젖통을 부둥켜 쥔다. 제 젖이 무사한 것을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몇 번 쭉쭉 빨아보고, 그제야 안심을 하는 듯하였으나 암만해도 어른들의 태도가 마음에 키이는지 젖을 빨다가 말고 돌아다보고 돌아다보고 한다.
 
217
찌걱찌걱 창 밖에서 구두 소리가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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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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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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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