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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삶과 죽음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은주는 거진 열 시나 되어서 집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2
그는 여상스럽게 저녁을 먹었다. 평일보담도 오히려 더 먹어 보려 하였다.
 
3
마지막 저녁밥! 이걸로 길이 하직하는 이 세상의 음식이어니 하고 억지로라도 많이 먹어 보려 하였건만 국 맛은 소태였다. 밥 날은 모래알 같았다.
 
4
늦은 저녁이 끝나고 서름질이 끝나고 아랫두리 사람들이 제각기 제 방을 찾아들기를 인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었다.
 
5
미닫이 틈을 여러 번 벌리고 밖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았다. 밤은 짙어온다. 뒤뜰에 한 겹 검은 그림자가 진해 갈수록 안마당에 발자최 소리도 드물었다.
 
6
봄밤은 짧건마는 은주에겐 길었다. 왼 집안이 괴괴해지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은 뒷걸음질을 치는 듯하였다.
 
7
집안이 죽은 듯이 고요해지자 은주는 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미닫이를 닫히려 다 말고, 문설주를 짚고 서서, 제 숨길과 체온과 가지가지 지난 일의 생활 조각이 서리고 엉킨 제 방안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제 팔꿈치의 자욱이 난 책상과 제 손때 묻은 책꽂이와 제 얼굴을 비춰 주던 경대들은, '어데를 가요? 어데를 가요? 우리를 버리고 어데를 가요? 가지 말아요.
 
8
가지 말아요. 다시 들어와요!' 손짓을 하며 부르는 듯하다.
 
9
은주의 눈엔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10
그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뒤안을 빠져 나왔다. 휘 넓은 마당에 발소리를 죽이느라고, 그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뛰고 굴리고 놀던 이 마당을 이렇게 쭈뼛쭈뼛하며 지나갈 줄이야.
 
11
그의 눈엔 새로운 눈물 방울이 번쩍였다.
 
12
솟을대문을 지나 골목을 나와 한길로 꾸부러질 때, 그는 언뜻 한 번 돌아 보았다.
 
13
드높은 안채의 기왓장과 으리으리한 사랑의 양관이 침침한 어둠 속에 옛 얘기의 궁궐과 같이 꿈결같이 떠 보이었다.
 
14
"잘 있거라!"
 
15
은주는 들릴 듯 말 듯 혼자 속살거리었다.
 
16
그는 분명히 구두를 신었건만 또박또박 하는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슬리퍼를 낀 듯 펄석펄석 하고 질질 끌리었다. 무거우나 힘없는 걸음! 비슬비슬 누가 손가락 끝만 대어도 곧 쓰러질 듯하였다.
 
17
길 한복판을 의연히 걷지를 못하고 가가의 추녀 끝에 몸을 감추는 듯하며, S동을 지나 K동 입새를 돌아 네거리로 꺾이려 할 임물이었다.
 
18
"아가씨, 어델 가셔요?"
 
19
누가 코앞에서 부르짖었다. 은주는 깜틀하며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핑핑 내어 둘리는 시선에 싱글벙글 웃는 어멈의 얼굴이 보이었다.
 
20
"제 자식이 앓는다 해서 지금 갔다 오는 길예요."
 
21
어멈은 제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변명부터 먼저 한다.
 
22
"아가씨는 어델 가셔요? 이 밤중에."
 
23
은주는 이런 길에 집안 식구와 마주친 것이 아찔이었다.
 
24
"저 저."
 
25
머뭇머뭇하고 무에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26
"벌써 열 시는 넘었을걸입슈."
 
27
하고 어멈은 수상하다는 드키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28
"동무를 잠깐 찾아보려구……."
 
29
은주는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렸다.
 
30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31
"아니, 아니."
 
32
은주는 당황히 거절하였다.
 
33
"전차를 타고 갔다가 곧 올 테니."
 
34
하고, 은주는 왜 내가 거짓말을 않을 수 없는가 하매, 다시금 슬픈 생각이 복받쳐 올랐다.
 
35
"그럼 다녀옵슈."
 
36
하고 어멈은 돌아서 가기는 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고 또 보았다.
 
37
암만해도 수상쩍다는 듯이.
 
38
은주는 어멈과 마주친 뒤로는 거의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재바르게 걸었다.
 
39
급한 마음 같아서는 자동차라도 불러 타고 싶었지만 자동차부에 들어가기가 싫거니와, 혼자 타는 것이 도리어 수상쩍을 듯도 하였다.
 
40
그는 만만한 전차에 올랐다.
 
41
전차 한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쩔쩔 끓는 뺨을 유리창에 대었다. 전차는 그리 붐비지 않았으되 동승객들의 시선을 피하여 얼굴을 숨기는 듯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42
출렁출렁 물결 치는 듯한 수없는 전등빛에 눈익은 건물들이 어른어른하며 지나친다 밤눈에도 . 퍼렇게 물오른 길나무(街路樹)들이 푸수수하게 가지를 풀어 헤치고 뾰족족 잎사귀를 내밀었다.
 
43
'이 집들과 이 나무들도 다시는 못 보겠고나.'은 주는 여러 번 속으로 뇌이고 이별을 아끼었다.
 
44
전차는 귀에 익은 땡땡 소리를 연송 내며 종로 네거리를 지나고 조선은행 앞을 지나고 경성역을 지났다.
 
45
마지막으로 화신상회에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진고개도 한 바퀴 휘 돌아보고 싶었다. 작년 가을 수학여행 가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나며 정거장에도 마지막으로 둘러 나왔으면 싶었다.
 
46
삼각정을 지나고 용산역을 지나자 차 안의 승객들은 하나씩 둘씩 사라졌다. 차 안의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어지매, 창 밖의 전등불도 차츰차츰 줄어 들었다.
 
47
어웅하고 컴컴한 밤빛이 심술 사나운 제 운명 모양으로 은주의 눈물 어린 눈에 대질렀다.
 
48
은주는 창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차 속은 어느 결엔지 텅 비었다. 승객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남지를 않았다.
 
49
은주는 문득 호젓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쨍쨍한 전등불도 어쩐지 흉물스러웠다. 찌렁찌렁 쇠를 끊는 듯한 전차의 커브 도는 소리와 잉잉하는 바퀴의 울음이 유난히 또렷또렷하게 들리었다.
 
50
은주는 치운 듯이 몸을 한 번 흠칫하였다.
 
51
유리창엔 바람이 부딪는다. 전차는 바람에 날릴듯 비틀거렸다.
 
52
봄밤은 싸늘하게 식었다. 축축한 냉기와 바람이 어우러져서 은주의 무릎 속으로 기어든다.
 
53
은주는 한기가 드는 듯 위아랫니가 마주치었다.
 
54
'내가 지금 어데로 가누……?'은 주는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55
'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죽을 곳을 찾아 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속으로 스스로 타일러 보았다.
 
56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 치운 밤에, 이 바람 부는 밤에.' 이 의문엔 선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설움만 괴어 올랐다. 코끝이 맹맹해지며 눈물은 비 오듯 흘렀다.
 
57
은주는 전차가 선 줄도 몰랐다.
 
58
"다 왔소. 나리우!"
 
59
차장은 흔들흔들 피로한 몸을 흔들며 차 안으로 들어와 부르짖었다.
 
60
은주는 아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61
늙은 버드나무 가지가 흐트러진 머리칼같이 늘어진 가운데 전차는 딱 서 있었다.
 
62
와 하고 모래와 몬지를 ! 끼얹으며 세찬 강바람은 은주의 잠바 자락을 날리었다. 양말 하나만 치켜 신은 정강이와 종아리가 선뜩선뜩하게 쓰리었다.
 
63
은주는 날리는 잠바 자락을 얼음 같은 손으로 여미며, 조그마한 새처럼 올올 떨었다.
 
64
은주는 바람과 싸우며 뒤로 불려가려는 몸을 억지로 버티고 한 걸음 두 걸음 내어디디었다. 바람은 온통 눈 속으로만 들어오는 듯하여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65
철교는 곧 나타났다. 밤눈에 거무스름한 난간이 이승과 저승을 막은 한 겹벽과 같이 흉물스러웠다.
 
66
은주는 비실비실 곱드러지려는 몸을 기대는 듯이 난간에 붙이고 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67
그는 어찔어찔하는 눈으로 다리 아래를 나려다보았다. 밑에는 아직 물이 보이지 않았다.
 
68
손으로 난간을 쓸며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69
치운 봄밤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송판 위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유난히 분명한 제 발자최 소리와 이따금 우 하고 간 속까지 불어 들어가는 듯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70
얼마를 걸어가니 손에 잡았던 난간이 끝이 났다.
 
71
'철교를 지내왔다.' 하고 은주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는 홍살문 같은 붉은 쇠둘레가 활개를 벌렸다. 그제야 지금 제가 지나온 것은 정작 인도교가 아니요 소한강교 인 줄 알았다.
 
72
'인제 내 죽을 자리에 들어서는고나.'은 주는 정말 인도교로 옮아서며 생각하였다 힘과 혼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또 아까 모양으로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눈은 거의 감고 비칠비칠 걸었다.
 
73
출렁출렁하는 물결 소리에 제 디딘 것이 단단한 널조각이 아니요, 굽이치는 물결을 그대로 밟고 나선 것처럼 어지러웠다.
 
74
은주는 주춤 발길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사면은 괴괴하다.
 
75
하늘은 별로 슬쩍 가리운 듯이 어슴푸레하나마 구름 한 점도 없었다. 별이 총총 났다. 그들은 장차 일어나려는 인생의 비극을 구경하려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76
강 건너 언덕 위엔 포플러 숲이 한 덩이 구름같이 피어난 가지를 떠 보이었다 쓸쓸한 불빛이 . 한 점 두 점 새어 흐르는 곳은 손님 없는 음식점들이리라.
 
77
은주의 눈은 강 위로 떨어졌다.
 
78
강물은 멀어갈수록 좁아들었다. 저 멀리 일렁일렁 흰 돛이 조는 듯한 낚싯배를 지나매, 물결은 곧 하늘 자락 속으로 움추러들었다.
 
79
'내 시체가 제까지나 흘러갈까?' 문득 은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제 발 아래를 나려다보았다. 이 때까지 그는 먼 눈만 살피고, 차마 던질 자리를 나려다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80
울긋불긋하게 휘장을 두른 놀잇배들은 빈 상여와 같았다. 물 가장자리에 늘어놓인 뽀트들은 해골을 엎어놓은 듯하다.
 
81
검푸른 물결은 소용돌이를 친다. 그 엎치락덮치락 하는 물결은 마치 사나운 짐승의 뼈가 어마어마한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제 희생을 기다리는 듯하다.
 
82
은주는 처음 죽음을 작정할 때 독약도 생각해 보았다. 목 매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독약은 너무 끔찍스럽고 목 매는 것도 남볼상 사나왔다. 더구나 철도 자살은 지긋지긋하였다.
 
83
푸른 물결에 풍덩실 몸을 던지는 것은 다같이 죽는 일이로되, 로맨틱한 공상까지 자아내었던 것이다. 바그르 괴어 오르는 꽃잎 같은 거품, 수멸수멸구슬 같은 잔무늬를 그리는 물속에 고요고요히 잦아지고 싶었던 것이다. 번뜩이는 달 그림자를 안고 끝없이 흘러 가리라 하였었다. 맑고 시원한 물에 더럽힌 몸이 씻기고 밀리며 은하수 끝까지라도 흘러 가리라 하였다.
 
84
현실은 언제든지 아름다운 꿈을 깨뜨린다. 은은한 달빛도 없다. 맑고 고요하고 벽옥 같은 줄 알았던 물결이 이렇게 우중충하고 감때사나웁고, 무시무시할 줄이야!
 
85
죽으려는 은주의 오직 하나 슬픈 공상조차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86
강바람은 우르르 무엇을 무너뜨리는 듯한 우렁찬 음향을 내며 불어닥치었다. 휑뎅그렁하게 비인 철교 위를 거칠 것 없이 호통을 치며 재조를 넘으며, 쇠둘레를 쩌렁쩌렁 울리었다.
 
87
조그마한 소녀의 애처로운 운명쯤은 버들잎보담도 더 가볍게 하잘것없이 날려버릴 듯하다.
 
88
물결은 길길이 뛰었다. 바람의 거센 발길과 손길에 채이고 쥐어 질리는 듯이 펄펄 몸을 솟구치다가 좌르르 쏴르르 게거품을 흘리고 부서진다.
 
89
용솟음을 하며 어둠 속에 허옇게 춤추는 물꽃은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이빨과 같았다 그 흰 이빨은 . 제 희생이 떨어지는 대로 한 입에 집어 삼키려고 넘실거리는 듯하다. 이 날까지 애닯게 잦아진 무수한 영혼들은 근두박질을 하며 비명을 질르며 새로운 제 동무를 향해 사나운 손짓을 할 듯하다.
 
90
은주는 아찔하였다. 쇠난간을 짚은 가냘픈 팔이 휘청하고 넘어갔다. 와 하고 왼통 은주에게 몰려든 바람은 그 불쌍한 희생의 갈 길을 재촉하는 듯이 떠다넘길 듯하다.
 
91
삶과 죽음의 일순간!
 
92
은주는 아뜩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몸은 아직도 난간 이쪽에 곱드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93
그는 한 발자욱을 떼었다. 암만해도 저 섰던 그 자리는 제 죽을 곳이 못된다는 듯이.
 
94
그는 또 아까 모양으로 난간을 부여잡고 한 걸음 걷고 쉬고, 두 걸음 걷고 쉬었다. 쉬는 곳마다 밑을 나려다보았건만 제 몸 떨굴 만한 자리를 찾지 못 하였다.
 
95
손 밑에서 싸늘한 쇠난간이 끝났다. 그는 인도교를 건너온 것이다. 은주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돌쳐서서 다시금 쇠난간을 쓸며 급한 듯이 오던 길을 도루 걸었다.
 
96
새로운 결심과 용기가 그를 채쪽질하는 듯하였다.
 
97
저 멀리 문안이 꿈결같이 떠올랐다. 푸른 남산 등성이엔 길다란 전등불 줄이 서리를 친 듯하다.
 
98
'저 속에는 우리 학교도 있고나, 우리 집도 있고나.'은주는 안개 자욱한 속을 시름없이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99
번들번들한 자기 집 벽돌담과 새 쭉지같이 구부정하게 활개를 벌린 학교 지붕이 선하게 보이는 듯.
 
100
왼몸의 맥이 일시에 풀리었다.
 
101
'집에도 다시 못 가 보고, 학교도 다시 못 보고.' 눈물에 흐린 눈 아래 굽이치는 물결도 구름장과 같이 멍울멍울하다.
 
102
구실 같은 눈물은 밑도 없고 끝도 없는 어훙한 낭떠러지로 연거푸 구을러 떨어졌다.
 
103
제가 써 두고 나온 유서가 마음에 키이었다.
 
104
─ 오빠!
 
105
혼인은 아모 데도 정하지 말아요, 여해는 징글징글하고, 석호는 얄미워요 하필 . 원수에게로 시집 가라시는 오빠가 야속합니다.
 
106
저는 죽어요.
 
107
지금 한강으로 나가는 길이야요.
 
108
부디 안녕히 계셔요. ─ 말은 비록 간단하나마 제 마음에 품긴 원한과 슬픔과 분노를 고대로 쏟아 놓은 것이었다.
 
109
'유언까지 써 놓고 안 죽으면!'은 주는 다시 생각하였다. 그것은 죽음보담 더한 치욕이었다, 고통이었다.
 
110
눈을 꽉 감았다. 두 손으로 잔뜩 난간을 부여잡고 몸을 넘기려는 순간 멀지 않은 앞길에서 뿡뿡 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었다.
 
111
'나를 잡으러 오는구나.'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꿈속 같은 머리속에 번쩍하자 은주의 몸은 팔랑개비 모양으로 난간을 휘어 넘었다. 그 서슬에 난간을 잡았던 두 손도 떨어졌다.
 
112
은주가 몸을 던지는 찰나, 저를 잡으러 오는 줄 알았던 자동차는 과연 병일과 석호를 태운 자동차였다.
 
113
그들은 명화의 지시대로, 한 자동차를 타고 스피드를 낼 수 있는 대로 내 어 순식간에 병일의 집에 들어닥치었다.
 
114
병일을 선두로 석호는 서슴지 않고 안에 들어섰다. 제 꿈과 행복과 기쁨을 한 몸에 짊어진, 제 장래 안해가 죽고 사는 한 고비가 아니냐. 어느 겨를에 체면과 예절을 돌아보랴.
 
115
그들은 대뜸 은주의 방으로 뛰어갔다. 주인 잃은 방은 말짱하게 치워져서 티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116
영애가 마주 내달으며 제 남편에게 떨리는 손으로 종이 쪽지를 하나 전하였다. 그것은 은주의 유서였다.
 
117
황황히 보는 병일의 어깨 너머로 석호도 동그란 눈을 나리쏘았다.
 
118
─ 여해는 징글징글하고, 석호는 얄미워요. ― 석호는 무참하여 눈을 떼었다.
 
119
"응으, 응으."
 
120
솔잎 수염을 뜯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121
발끈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허둥허둥하는 병일을 따라 다시 자동차를 몰아 한강으로 달리었던 것이다.
 
122
소한강교를 다다랐을 때 , 병일은 그래도 동기의 정이라 엉거주춤하고 반쯤 일어서서 뚫어지라고 앞을 내다보았다.
 
123
어둑한 인도교 위에 어릿거리는 은주인 듯한 흰 점을 알아보았다.
 
124
"저기 있군, 저기 있군, 어서 어서!"
 
125
운전수를 재촉하였다. 운전수도 급한 듯이 연해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를 외쳤다.
 
126
난간에 붙어선 은주와 자동차의 거리가 세 간 통도 남지 않았을 일순간 은주의 몸은 나비처럼 날아 난간을 넘으며 바람에 불리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어둠 속에 번뜩하자 사라졌다.
 
127
"앗!"
 
128
병일의 외마디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자동차는 은주의 섰던 자리에 닿았다.
 
129
"풍!"
 
130
물 밑에서 울려 올라오는 흉칙한 음향!
 
131
오빠와 정혼 남편은 자동차 문을 박차고 나려섰다.
 
132
그들은 부산하게 떨어진 이가 기대었던 난간으로 몰렸다. 잠바의 뒤폭이나 잡으려는 듯이.
 
133
그들은 넋을 잃은 듯이 이윽히 침침한 물결만 나려다보다가 서로 돌아다보았다.
 
134
하나는 강 이편을 향해, 하나는 강 저편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135
"여보! 여보!"
 
136
그들은 허공과 어둠을 향해 부르짖었다.
 
137
쏴 하고 불어대는 강바람이, 그들의 얼빠진 소리를 지워버린 듯하였다.
 
138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달음박질을 쳐서 가던 길을 도루 오며,
 
139
"여보! 여보!"
 
140
돼지 목 따는 소리를 외쳤다.
 
141
그들은 마주쳤다. 쩔쩔매었다. 허둥지둥하였다.
 
142
병일의 발부리에 무엇이 툭하고 채이었다.
 
143
"윽!"
 
144
하고 그는 곱드러질 듯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제 몸이 강속으로 떨어지기나 한 듯이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주의 벗어 놓은 구두이었다.
 
145
"구두는 여기 있는데……."
 
146
석호를 향해 바루 눈물 어린 소리를 떨며, 무슨 보물이나 얻은 것처럼, 구두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147
"응! 신이 거기 있어?"
 
148
석호도 제 친구가 움켜쥐고 있는 구두를 진기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들여다보며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149
그들은 자기들이 이러고 지체를 하는 사이에 구할 사람을 구해내지 못하였다고 책망하는 이가 있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으리라.
 
150
"어떡하오, 무가내하 아니오?"
 
151
싸늘한 봄바람은 스프링 코트를 벗기에도 치웠다. 입을 옷을 다 입고 있어도 덜덜 떨리었다. 발을 빼고 물에 뛰어들기는 생각도 못할 노릇이었다. 옷 입은 채 물펑덩이를 하는 것도 무모한 짓이었다.
 
152
동생이 죽는다니, 친구의 누이가 죽는다니, 자동차로 예까지 달려왔으면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인사치레를 마친 것이었다.
 
153
뒤미처 난데없는 자동차 소리가 철교를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 자동차는 사나운 경적을 울리며 번개같이 달려온다.
 
154
그 자동차는 인도교를 올라서며 곧 걸음을 멈추었다.
 
155
그 안으로부터 동저고리 바람의 청년이 까치집 같은 머리를 날리며 떨어지 듯 나려선다.
 
156
그는 김여해이었다.
 
157
명화로부터 은주가 자살의 길을 찾아 한강으로 나간 듯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리옷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선 것이었다.
 
158
금방 명화에게 쏟으려던 뜨거운 정열도 간 곳이 없었다.
 
159
금세로 눈길이 뒤집혔다. 두루막도 잊었다. 양말도 잊었다. 맨발로 뛰어 나섰다.
 
160
"어데를 가셔요?"
 
161
명화는 돌변한 여해의 태도에 놀래었다.
 
162
"한강에!"
 
163
여해는 벌써 중문을 빼개고 나서며 대답하였다.
 
164
"그렇게 급하셔요? 옷이나 입으셔야지."
 
165
명화는 뒤따라 나오며 부르짖었다.
 
166
"아니오, 아니오."
 
167
여해는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느덧 대문을 열고 나섰다.
 
168
"그럼 제가 타고 온 자동차를 그대로 타고 가셔요."
 
169
"네? 자동차!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170
뒤도 돌아보지 않으나마, 자동차란 말이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171
"웬일일까?"
 
172
명화는 의아한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173
여해는 자동차에 올르며, 숨찬 소리로 연송 부르짖었다.
 
174
"한강에, 한강에!"
 
175
그에게는 자동차의 속력이 너무도 느리었다, 지지하였다.
 
176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펄펄 뛰었던 것이었다.
 
177
여해는 바람결같이 뛰어서 병일의 털썩 주저앉은 앞으로 왔다.
 
178
그는 병일을 보았다. 석호를 보았다. 병일의 손에 움켜 쥐인 은주의 구두를 보았다.
 
179
여해는 억센 손으로 병일의 멱살을 추켜잡듯 하고 뒤흔들었다.
 
180
"어찌 되었소?"
 
181
병일은 웬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멀뚱멀뚱하다가,
 
182
"지금 막 떠 떨어져서……."
 
183
라고 더듬거렸다.
 
184
"응!"
 
185
여해는 맹수의 휘파람 같은 신음성을 발하였다.
 
186
잡았던 병일의 멱살을 놓고 일순간 팔짱을 끼었다가 여해는 눈을 부릅떴다.
 
187
그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188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나는 새와 같이 난간 위에 올라설 겨를도 없이 두 팔을 꼿꼿이 세우며 그대로 푸른 물속을 향해 거꾸로 떨어졌다.
 
189
"아!"
 
190
병일과 석호는 일시에 부르짖고, 그제야 새로운 정신과 용기가 난 것처럼 달음박질로 강을 건너 배 매어 놓은 데로 뛰어나려왔다. 그들은 고래고래 뜻도 모를 소리를 외쳤다.
 
191
술집에서 사공들도 뛰어나왔다. 곤드레만드레 곤죽이 다 된 술꾼들도 몰려 들었다.
 
192
어둑어둑하고 쓸쓸하던 강가는 시끌시끌해졌다.
 
193
찌극 삐극 출렁, 배 세 개는 닻줄을 풀었다.
 
194
어둡고 물결치는 강 위에서 배들은 길을 잃은 듯이 비틀거리고 헤매었다.
 
195
제 희생을 도루 뺏아 가려는 데 심술을 낸 것처럼 물결은 더욱 높이 뛰며 와그르 버그르 뱃전에 발버둥을 친다.
 
196
여해는 물속 깊이깊이 떨어졌다.
 
197
그 찰나 삶과 죽음의 관념이 무서운 속력으로 주마등과 같이 얼른하다가 사라졌다.
 
198
그에게는 삶도 없었다 , 죽음도 없었다. 삶보담 죽음보담 다 강렬한 의식이 그를 지배하였던 것이다.
 
199
'은주를 구하자!' 육체적 정신적 찢어질 듯한 긴장이 왼통 이 한 가지 생각에 몰리고 뭉치었다.
 
200
은주가 유서를 써 놓고 한강에 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 이론적으로 이 갈피 저 갈피를 따져서 안 노릇이 아니요, 상상으로 이렁저렁 경우를 추측해서 짐작한 것도 아니다.
 
201
그는 왼몸과 마음으로 은주의 행동의 원인을 느끼었다, 깨달았다.
 
202
누가 이 어린 여학생으로 하여금 죽음의 길에 나아가게 하였는가. 누가 방싯 웃으려는 인생의 꽃봉오리에 끝없는 슬픔을 안고, 푸른 물결에 몸을 던지게 하였는가. 그 쾌활하고 명랑하고 어여쁜 처녀로 하여금 번민과 오뇌와 원한에 조그마한 염통을 갈기갈기 찢게 하였는가. 기쁨과 행복의 절정에서 종달새같이 뛰노는 철없는 아가씨로 하여금 제 목숨을 끊으려는 막다른 곳에 뛰어들게 하였는가. 이 악착한 비극의 절대 책임자는 갈데없는 자기였다. 짐승과 같은 제 정열 때문이었다. 악마와 같은 제 성욕 때문이었다.
 
203
이 너무도 어여쁘고 너무도 참혹한 제 희생을 구해내지 않고는, 살려내지 않고는, 여해는 살랴 살 수 없었다. 죽으랴 죽을 수 없었다. 여해는 물속 깊이깊이 떨어졌다.
 
204
미끈하고도 부실부실한 물 밑바닥이 슬쩍 얼굴에 닿을 둥 말 등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제 몸을 한번 번뒤치는 바람에 일렁 하고 고개가 앞으로 내어 밀려지며 몸은 풍선보담 더 가볍게 술렁술렁 떠올랐다.
 
205
그는 중학생 시절 한강에서 뽀트를 타고, 헤엄질 치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수영 선수의 차례에는 들지 못하였다. 개헤엄에서 발거리로 한두 간통을 왕복하는 데 지나지 않았었다. 철창 생활오년 동안에 그는 물론 물 구경도 못하였거니와, 더구나 그렇게 높은 데서 떨어져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죽음의 위험에 그는 제 몸을 내던진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206
한껏 긴장한 정신과 육체는 이따금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곱다랗게 물위에 떠오를 수 있었다.
 
207
푸우! 숨과 물을 한꺼번에 뿜으며 칼등 같은 물결 위에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자질하듯 한 팔로 물을 헤치며 발로 물고비를 돌리며 위로 위로 몸을 밀었다.
 
208
땀과 물방울에 무겁게 감기었던 눈시울을 찢어지라고 뜨고, 불 같은 동자를 물 위로 굴리었다.
 
209
어둠침침한 물결은 경련을 일으킨 듯이 수멀수멀 떨다가, 발작적으로 길길이 뛰엄질을 하며, 두 자 높이나 대강이를 쳐든 용솟음이 와그르 하고 여해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여해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물등성이를 넘고 또 넘었다.
 
210
은주의 모양은 찾으랴 찾을 수 없었다.
 
211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고나!' 여해는 아뜩 정신을 차리었다. 그는 물결을 따라 나려가지 않고 죽을 힘을 다 써 가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한 가운데 어쩐지 은주가 상류로 흘러간 듯이 착각을 한 것이었다.
 
212
물결에 반항하는 잠재의식이 여해로 하여금 위로 위로 치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던 것이다.
 
213
그러나 죽음을 결단하고 물에 던진 은주가 헤엄을 치며 치거슬러 올라갈 까닭은 절대로 없었다. 물결 밀리는 대로 밑으로 밑으로 흘러 나려갔음에 틀림이 없었다.
 
214
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여해는 입때껏 헛노력을 한 것이었다.
 
215
방향을 바꾸려고 돌릴 겨를도 없이 세찬 물결은 그의 등을 밀어 미끄러질 듯이 몸은 흘러 나려갔다.
 
216
순식간에 인도교 밑을 지나고 어느덧 기차 지나가는 철교 가까이 나려왔다.
 
217
물결은 더욱 사나워졌다. 와그르 버그르 하는 우렁찬 울림이 소리소리 지르며 물에 젖은 고막을 따리었다.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윗덩이가 일어섰다.
 
218
주저앉았다 하며 여해의 몸을 바람개비보담 더 가볍게 흔들고 놀리었다.
 
219
철교 밑에는 물결이 돈다. 헤엄 치는 이나 뽀트 타는 이에게 가장 위험한 관문! 여해는 약간 피로해지려는 몸에 새로운 힘을 주며 이 난관을 얼른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몸은 조리를 돌리는 것처럼 빙그르 돌았다. 물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이 몸이 잦아지는 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돌다리 가까이 휘몰아 박힌 몸이 간신히 떠올랐다.
 
220
회호리바람 속에 든 듯한 의식 가운데 제 발길에 무엇이 걸리는 것 같았다.
 
221
그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재바르게 발을 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버르둥거리는 제 손길에 무엇이 물씬하고 만치었다.
 
222
'송장이다.'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자 왼몸에 소름이 쭉 끼치었다.
 
223
그 다음 순간!
 
224
'은주다!' 하는 생각이 돌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늦었다. 엉겁결에 그의 손에 잡히었던 은주의 팔인 듯한 무엇을 놓은 뒤였다.
 
225
그는 놓친 것을 다시 부여잡으려고 팔을 내저었다. 손끝에 닿일 듯하던 그 무엇은 뱅뱅 돌며 멀어지려 한다.
 
226
여해는 몸을 솟구치며 뛰엄을 뛰다시피 그 무엇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 서슬에 제 의사와는 정반대로 몸은 사나웁게 까불리는 듯하더니, 그 소용돌이의 테 밖을 벗어나 한간 통이나 밀려 나려왔다.
 
227
여해는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제 이맛전을 갈기며 역류하는 물결과 같이 왼몸의 피도 거꾸로 흐른 듯하였다.
 
228
물방울에 감겨지려는 눈을 찢어지라고 부릅뜨고 으적! 하며 입술을 깨물며 또 한번 몸을 솟구쳐서 그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229
버르적거리는 여해의 손가락 끝에 기적적으로 은주의 머리칼이 잡히었다.
 
230
은주는 지푸라기보담 더 가볍게 물얼굴에 딸려 올라왔다.
 
231
그러자 문득 은주는 마지막으로 용을 쓰는지 몸을 번드치는 바람에, 여해의 손에서 머리칼이 빠져나갔다.
 
232
"앗!"
 
233
여해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은주의 몸을 다시 잡으려고 놀랄 만치 기민하게 오른팔을 내어 밀었을 제, 허공을 향해 버둥거리는 듯한 은주의 손이 어깨에 와서 닿았다.
 
234
은주의 두 팔과 몸은 여해의 팔뚝 위에 무겁게 무겁게 매어 달리었다.
 
235
여해는 놓친 은주를 다시 부여잡은 기쁨도 한 순간이었다.
 
236
은주의 몸은 쇳덩이보담 더 무겁게 그의 팔을 밑으로 나꾸치는 듯하였다.
 
237
여해는 몸을 움직일 자유를 잃고 말았다.
 
238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법이다.
 
239
은주에게는 물론 의식은 없었다. 생명의 최후 본능이 그로 하여금 여해의 팔뚝에 매어달리게 한 것이었다.
 
240
'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여해는 은주의 무게에 끄들리어,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241
중병을 치른 끝이라, 아모리 몸과 마음이 건장하였다 하더라도, 몇 십 분 동안 물결과의 싸움은, 자칫하면 여해의 팔과 다리의 힘을 송두리째 뽑아 버릴 것 같았었다 제 홑몸이라도 . 헤어나기가 어려웠으리라. 게다가 은주의 몸이 천 근 무게로 매어 달리었으니 용신을 하랴 할 수 없게 되었다.
 
242
'이렇게 헛부게 죽는가. 내 팔에 매어 달린 은주를 이렇게 죽이는가.' 여해는 애닯았다, 원통하였다. 제 죽는 것은 그리 섧을 것도 없지마는 은주를 찾기까지 해 가지고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절통하였다.
 
243
그는 마지막 용기를 떨치어 푹 솟구쳐 올랐다. 그 찰나 무겁던 오른팔이 거뜬해졌다. 앞으로 닥치는 물결을 잡아당기는 듯이 헤치매 몸은 쉽사리 수면에 떠올랐다. 휘 숨을 내어 쉴 겨를도 없이, '앗! 은주를 놓쳤고나!' 자기가 용을 쓰는 서슬에 은주를 뿌리쳐 떨군 것을 깨달았다.
 
244
두 팔로 물 속을 휘저어 보았건만 파레같이 제 팔뚝에 걸리었던 은주의 손은, 다시 잡을 수 없었다.
 
245
여해의 창자는 찢어지는 듯하였다. 물속에 발버둥을 치며 엉엉 소리를 내 어 울고 싶었다.
 
246
송장 다 된 그의 얼굴은, 비통한 결심에 실룩실룩 떨리었다. 죽을 애를 써서 떠오른 제 몸을 다시 물속 깊이 떨어뜨렸다.
 
247
물속에 얼마 나려가지 않아 그의 팔은 다시 은주의 허리 어름을 부둥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는 물밑이었다. 더구나 한 팔로 은주를 안은 터이었다. 다시 몸을 번디칠 힘도 자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248
코로 입으로, 물은 거칠 게 없는 듯이 들어왔다.
 
249
그는 제 운명을 제 죄책을 제 벌역을 달게 받는 듯이 입을 벌리었다.
 
250
그의 의식은 물속과 같이 거물거물해졌다.
 
251
캄캄해 오는 의식(意識)의 밤 가운데 오직 한 개의 등불이 반짝하였다.
 
252
'나는 은주에게 죽음으로써 용서를 빈다.' 마지막 의식도 사라졌다. 다만 은주를 부여잡은 그의 손아귀만 있는 힘이 모조리 몰리었다. 인제는 다시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253
병일과 석호가 지휘하는 배 세 척이 등불과 횃불을 잡히고 나려왔다.
 
254
난데없는 불빛에 사람을 둘씩 삼킨 물결은 놀랜 듯이 제 희생을 뒤덮는 모양으로 쫘 하고 물 한 두께를 퍼뜨렸다.
 
255
배는 쉽사리 여해가 자므러진 자리에 와서 비척비척하며 돌았다.
 
256
조금 전에 여해가 버르적거리는 것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알아본 까닭이었다.
 
257
익숙한 사공의 손에 두 남녀는 어렵지 않게 건져내이었다.
 
258
배가 닿자, 송장이 될지 환자가 될지 모르는, 여해와 은주는 곧 자동차로 용산 ˟˟병원에 실리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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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04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