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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거진 열 시나 되어서 집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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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상스럽게 저녁을 먹었다. 평일보담도 오히려 더 먹어 보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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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저녁밥! 이걸로 길이 하직하는 이 세상의 음식이어니 하고 억지로라도 많이 먹어 보려 하였건만 국 맛은 소태였다. 밥 날은 모래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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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이 끝나고 서름질이 끝나고 아랫두리 사람들이 제각기 제 방을 찾아들기를 인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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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닫이 틈을 여러 번 벌리고 밖을 내다보고 또 내다보았다. 밤은 짙어온다. 뒤뜰에 한 겹 검은 그림자가 진해 갈수록 안마당에 발자최 소리도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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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은 짧건마는 은주에겐 길었다. 왼 집안이 괴괴해지기를 기다리는데, 시간은 뒷걸음질을 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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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죽은 듯이 고요해지자 은주는 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미닫이를 닫히려 다 말고, 문설주를 짚고 서서, 제 숨길과 체온과 가지가지 지난 일의 생활 조각이 서리고 엉킨 제 방안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제 팔꿈치의 자욱이 난 책상과 제 손때 묻은 책꽂이와 제 얼굴을 비춰 주던 경대들은, '어데를 가요? 어데를 가요? 우리를 버리고 어데를 가요? 가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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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아요. 다시 들어와요!' 손짓을 하며 부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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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눈엔 또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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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뒤도 아니 돌아보고 뒤안을 빠져 나왔다. 휘 넓은 마당에 발소리를 죽이느라고, 그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뛰고 굴리고 놀던 이 마당을 이렇게 쭈뼛쭈뼛하며 지나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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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엔 새로운 눈물 방울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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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대문을 지나 골목을 나와 한길로 꾸부러질 때, 그는 언뜻 한 번 돌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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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은 안채의 기왓장과 으리으리한 사랑의 양관이 침침한 어둠 속에 옛 얘기의 궁궐과 같이 꿈결같이 떠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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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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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들릴 듯 말 듯 혼자 속살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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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히 구두를 신었건만 또박또박 하는 소리가 나지를 않았다. 슬리퍼를 낀 듯 펄석펄석 하고 질질 끌리었다. 무거우나 힘없는 걸음! 비슬비슬 누가 손가락 끝만 대어도 곧 쓰러질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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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복판을 의연히 걷지를 못하고 가가의 추녀 끝에 몸을 감추는 듯하며, S동을 지나 K동 입새를 돌아 네거리로 꺾이려 할 임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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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어델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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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코앞에서 부르짖었다. 은주는 깜틀하며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핑핑 내어 둘리는 시선에 싱글벙글 웃는 어멈의 얼굴이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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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식이 앓는다 해서 지금 갔다 오는 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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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멈은 제가 밤늦게 돌아다니는 변명부터 먼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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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는 어델 가셔요? 이 밤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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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이런 길에 집안 식구와 마주친 것이 아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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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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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머뭇하고 무에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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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열 시는 넘었을걸입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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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멈은 수상하다는 드키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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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를 잠깐 찾아보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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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모기 소리같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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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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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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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당황히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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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타고 갔다가 곧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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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은주는 왜 내가 거짓말을 않을 수 없는가 하매, 다시금 슬픈 생각이 복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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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녀옵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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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멈은 돌아서 가기는 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고 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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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해도 수상쩍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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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어멈과 마주친 뒤로는 거의 달음박질을 하다시피 재바르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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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마음 같아서는 자동차라도 불러 타고 싶었지만 자동차부에 들어가기가 싫거니와, 혼자 타는 것이 도리어 수상쩍을 듯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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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만만한 전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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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한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쩔쩔 끓는 뺨을 유리창에 대었다. 전차는 그리 붐비지 않았으되 동승객들의 시선을 피하여 얼굴을 숨기는 듯하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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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출렁 물결 치는 듯한 수없는 전등빛에 눈익은 건물들이 어른어른하며 지나친다 밤눈에도 . 퍼렇게 물오른 길나무(街路樹)들이 푸수수하게 가지를 풀어 헤치고 뾰족족 잎사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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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들과 이 나무들도 다시는 못 보겠고나.'은 주는 여러 번 속으로 뇌이고 이별을 아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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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귀에 익은 땡땡 소리를 연송 내며 종로 네거리를 지나고 조선은행 앞을 지나고 경성역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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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화신상회에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진고개도 한 바퀴 휘 돌아보고 싶었다. 작년 가을 수학여행 가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나며 정거장에도 마지막으로 둘러 나왔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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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정을 지나고 용산역을 지나자 차 안의 승객들은 하나씩 둘씩 사라졌다. 차 안의 사람의 그림자가 드물어지매, 창 밖의 전등불도 차츰차츰 줄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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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웅하고 컴컴한 밤빛이 심술 사나운 제 운명 모양으로 은주의 눈물 어린 눈에 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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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창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차 속은 어느 결엔지 텅 비었다. 승객이라고는 저 하나밖에 남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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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문득 호젓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었다. 쨍쨍한 전등불도 어쩐지 흉물스러웠다. 찌렁찌렁 쇠를 끊는 듯한 전차의 커브 도는 소리와 잉잉하는 바퀴의 울음이 유난히 또렷또렷하게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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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치운 듯이 몸을 한 번 흠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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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엔 바람이 부딪는다. 전차는 바람에 날릴듯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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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은 싸늘하게 식었다. 축축한 냉기와 바람이 어우러져서 은주의 무릎 속으로 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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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한기가 드는 듯 위아랫니가 마주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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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어데로 가누……?'은 주는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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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죽을 곳을 찾아 한강으로 가는 길이다.' 속으로 스스로 타일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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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 치운 밤에, 이 바람 부는 밤에.' 이 의문엔 선뜩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설움만 괴어 올랐다. 코끝이 맹맹해지며 눈물은 비 오듯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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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전차가 선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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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소. 나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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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은 흔들흔들 피로한 몸을 흔들며 차 안으로 들어와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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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아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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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버드나무 가지가 흐트러진 머리칼같이 늘어진 가운데 전차는 딱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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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하고 모래와 몬지를 ! 끼얹으며 세찬 강바람은 은주의 잠바 자락을 날리었다. 양말 하나만 치켜 신은 정강이와 종아리가 선뜩선뜩하게 쓰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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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날리는 잠바 자락을 얼음 같은 손으로 여미며, 조그마한 새처럼 올올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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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바람과 싸우며 뒤로 불려가려는 몸을 억지로 버티고 한 걸음 두 걸음 내어디디었다. 바람은 온통 눈 속으로만 들어오는 듯하여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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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는 곧 나타났다. 밤눈에 거무스름한 난간이 이승과 저승을 막은 한 겹벽과 같이 흉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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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비실비실 곱드러지려는 몸을 기대는 듯이 난간에 붙이고 한 손으로 부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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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찔어찔하는 눈으로 다리 아래를 나려다보았다. 밑에는 아직 물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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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난간을 쓸며 무의식적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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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운 봄밤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송판 위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유난히 분명한 제 발자최 소리와 이따금 우 하고 간 속까지 불어 들어가는 듯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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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걸어가니 손에 잡았던 난간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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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를 지내왔다.' 하고 은주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는 홍살문 같은 붉은 쇠둘레가 활개를 벌렸다. 그제야 지금 제가 지나온 것은 정작 인도교가 아니요 소한강교 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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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내 죽을 자리에 들어서는고나.'은 주는 정말 인도교로 옮아서며 생각하였다 힘과 혼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듯하였다. 또 아까 모양으로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눈은 거의 감고 비칠비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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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출렁하는 물결 소리에 제 디딘 것이 단단한 널조각이 아니요, 굽이치는 물결을 그대로 밟고 나선 것처럼 어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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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주춤 발길을 멈추고, 눈을 들었다. 사면은 괴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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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별로 슬쩍 가리운 듯이 어슴푸레하나마 구름 한 점도 없었다. 별이 총총 났다. 그들은 장차 일어나려는 인생의 비극을 구경하려는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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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언덕 위엔 포플러 숲이 한 덩이 구름같이 피어난 가지를 떠 보이었다 쓸쓸한 불빛이 . 한 점 두 점 새어 흐르는 곳은 손님 없는 음식점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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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눈은 강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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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멀어갈수록 좁아들었다. 저 멀리 일렁일렁 흰 돛이 조는 듯한 낚싯배를 지나매, 물결은 곧 하늘 자락 속으로 움추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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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체가 제까지나 흘러갈까?' 문득 은주는 이런 생각을 하고 제 발 아래를 나려다보았다. 이 때까지 그는 먼 눈만 살피고, 차마 던질 자리를 나려다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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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긋불긋하게 휘장을 두른 놀잇배들은 빈 상여와 같았다. 물 가장자리에 늘어놓인 뽀트들은 해골을 엎어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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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물결은 소용돌이를 친다. 그 엎치락덮치락 하는 물결은 마치 사나운 짐승의 뼈가 어마어마한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제 희생을 기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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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처음 죽음을 작정할 때 독약도 생각해 보았다. 목 매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독약은 너무 끔찍스럽고 목 매는 것도 남볼상 사나왔다. 더구나 철도 자살은 지긋지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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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에 풍덩실 몸을 던지는 것은 다같이 죽는 일이로되, 로맨틱한 공상까지 자아내었던 것이다. 바그르 괴어 오르는 꽃잎 같은 거품, 수멸수멸구슬 같은 잔무늬를 그리는 물속에 고요고요히 잦아지고 싶었던 것이다. 번뜩이는 달 그림자를 안고 끝없이 흘러 가리라 하였었다. 맑고 시원한 물에 더럽힌 몸이 씻기고 밀리며 은하수 끝까지라도 흘러 가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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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언제든지 아름다운 꿈을 깨뜨린다. 은은한 달빛도 없다. 맑고 고요하고 벽옥 같은 줄 알았던 물결이 이렇게 우중충하고 감때사나웁고, 무시무시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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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는 은주의 오직 하나 슬픈 공상조차 여지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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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바람은 우르르 무엇을 무너뜨리는 듯한 우렁찬 음향을 내며 불어닥치었다. 휑뎅그렁하게 비인 철교 위를 거칠 것 없이 호통을 치며 재조를 넘으며, 쇠둘레를 쩌렁쩌렁 울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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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소녀의 애처로운 운명쯤은 버들잎보담도 더 가볍게 하잘것없이 날려버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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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은 길길이 뛰었다. 바람의 거센 발길과 손길에 채이고 쥐어 질리는 듯이 펄펄 몸을 솟구치다가 좌르르 쏴르르 게거품을 흘리고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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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솟음을 하며 어둠 속에 허옇게 춤추는 물꽃은 마치 어마어마하게 큰 이빨과 같았다 그 흰 이빨은 . 제 희생이 떨어지는 대로 한 입에 집어 삼키려고 넘실거리는 듯하다. 이 날까지 애닯게 잦아진 무수한 영혼들은 근두박질을 하며 비명을 질르며 새로운 제 동무를 향해 사나운 손짓을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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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아찔하였다. 쇠난간을 짚은 가냘픈 팔이 휘청하고 넘어갔다. 와 하고 왼통 은주에게 몰려든 바람은 그 불쌍한 희생의 갈 길을 재촉하는 듯이 떠다넘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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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일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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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아뜩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몸은 아직도 난간 이쪽에 곱드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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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발자욱을 떼었다. 암만해도 저 섰던 그 자리는 제 죽을 곳이 못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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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아까 모양으로 난간을 부여잡고 한 걸음 걷고 쉬고, 두 걸음 걷고 쉬었다. 쉬는 곳마다 밑을 나려다보았건만 제 몸 떨굴 만한 자리를 찾지 못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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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밑에서 싸늘한 쇠난간이 끝났다. 그는 인도교를 건너온 것이다. 은주는 깜짝 놀라는 듯이 몸을 돌쳐서서 다시금 쇠난간을 쓸며 급한 듯이 오던 길을 도루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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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결심과 용기가 그를 채쪽질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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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문안이 꿈결같이 떠올랐다. 푸른 남산 등성이엔 길다란 전등불 줄이 서리를 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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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속에는 우리 학교도 있고나, 우리 집도 있고나.'은주는 안개 자욱한 속을 시름없이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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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들번들한 자기 집 벽돌담과 새 쭉지같이 구부정하게 활개를 벌린 학교 지붕이 선하게 보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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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몸의 맥이 일시에 풀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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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도 다시 못 가 보고, 학교도 다시 못 보고.' 눈물에 흐린 눈 아래 굽이치는 물결도 구름장과 같이 멍울멍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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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실 같은 눈물은 밑도 없고 끝도 없는 어훙한 낭떠러지로 연거푸 구을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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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써 두고 나온 유서가 마음에 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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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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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아모 데도 정하지 말아요, 여해는 징글징글하고, 석호는 얄미워요 하필 . 원수에게로 시집 가라시는 오빠가 야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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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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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강으로 나가는 길이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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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안녕히 계셔요. ─ 말은 비록 간단하나마 제 마음에 품긴 원한과 슬픔과 분노를 고대로 쏟아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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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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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까지 써 놓고 안 죽으면!'은 주는 다시 생각하였다. 그것은 죽음보담 더한 치욕이었다,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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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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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꽉 감았다. 두 손으로 잔뜩 난간을 부여잡고 몸을 넘기려는 순간 멀지 않은 앞길에서 뿡뿡 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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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잡으러 오는구나.'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꿈속 같은 머리속에 번쩍하자 은주의 몸은 팔랑개비 모양으로 난간을 휘어 넘었다. 그 서슬에 난간을 잡았던 두 손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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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가 몸을 던지는 찰나, 저를 잡으러 오는 줄 알았던 자동차는 과연 병일과 석호를 태운 자동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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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명화의 지시대로, 한 자동차를 타고 스피드를 낼 수 있는 대로 내 어 순식간에 병일의 집에 들어닥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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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을 선두로 석호는 서슴지 않고 안에 들어섰다. 제 꿈과 행복과 기쁨을 한 몸에 짊어진, 제 장래 안해가 죽고 사는 한 고비가 아니냐. 어느 겨를에 체면과 예절을 돌아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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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대뜸 은주의 방으로 뛰어갔다. 주인 잃은 방은 말짱하게 치워져서 티끌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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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가 마주 내달으며 제 남편에게 떨리는 손으로 종이 쪽지를 하나 전하였다. 그것은 은주의 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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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황히 보는 병일의 어깨 너머로 석호도 동그란 눈을 나리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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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해는 징글징글하고, 석호는 얄미워요. ― 석호는 무참하여 눈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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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으, 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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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잎 수염을 뜯으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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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끈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고, 허둥허둥하는 병일을 따라 다시 자동차를 몰아 한강으로 달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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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강교를 다다랐을 때 , 병일은 그래도 동기의 정이라 엉거주춤하고 반쯤 일어서서 뚫어지라고 앞을 내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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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한 인도교 위에 어릿거리는 은주인 듯한 흰 점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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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있군, 저기 있군, 어서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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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수를 재촉하였다. 운전수도 급한 듯이 연해 찢어질 듯한 사이렌 소리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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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에 붙어선 은주와 자동차의 거리가 세 간 통도 남지 않았을 일순간 은주의 몸은 나비처럼 날아 난간을 넘으며 바람에 불리는 한 송이 꽃과 같이 어둠 속에 번뜩하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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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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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의 외마디 소리가 채 끝나기 전에 자동차는 은주의 섰던 자리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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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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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밑에서 울려 올라오는 흉칙한 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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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와 정혼 남편은 자동차 문을 박차고 나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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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부산하게 떨어진 이가 기대었던 난간으로 몰렸다. 잠바의 뒤폭이나 잡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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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넋을 잃은 듯이 이윽히 침침한 물결만 나려다보다가 서로 돌아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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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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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강 이편을 향해, 하나는 강 저편을 향해 달음박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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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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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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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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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허공과 어둠을 향해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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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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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 하고 불어대는 강바람이, 그들의 얼빠진 소리를 지워버린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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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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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달음박질을 쳐서 가던 길을 도루 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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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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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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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목 따는 소리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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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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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주쳤다. 쩔쩔매었다. 허둥지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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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의 발부리에 무엇이 툭하고 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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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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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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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그는 곱드러질 듯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는 제 몸이 강속으로 떨어지기나 한 듯이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주의 벗어 놓은 구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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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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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는 여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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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를 향해 바루 눈물 어린 소리를 떨며, 무슨 보물이나 얻은 것처럼, 구두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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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신이 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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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도 제 친구가 움켜쥐고 있는 구두를 진기한 물건이나 되는 듯이 들여다보며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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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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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들이 이러고 지체를 하는 사이에 구할 사람을 구해내지 못하였다고 책망하는 이가 있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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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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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오, 무가내하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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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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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한 봄바람은 스프링 코트를 벗기에도 치웠다. 입을 옷을 다 입고 있어도 덜덜 떨리었다. 발을 빼고 물에 뛰어들기는 생각도 못할 노릇이었다. 옷 입은 채 물펑덩이를 하는 것도 무모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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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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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죽는다니, 친구의 누이가 죽는다니, 자동차로 예까지 달려왔으면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인사치레를 마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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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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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미처 난데없는 자동차 소리가 철교를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 자동차는 사나운 경적을 울리며 번개같이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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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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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동차는 인도교를 올라서며 곧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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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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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으로부터 동저고리 바람의 청년이 까치집 같은 머리를 날리며 떨어지 듯 나려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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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김여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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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부터 은주가 자살의 길을 찾아 한강으로 나간 듯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리옷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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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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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명화에게 쏟으려던 뜨거운 정열도 간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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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로 눈길이 뒤집혔다. 두루막도 잊었다. 양말도 잊었다. 맨발로 뛰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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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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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데를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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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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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돌변한 여해의 태도에 놀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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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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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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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벌써 중문을 빼개고 나서며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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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급하셔요? 옷이나 입으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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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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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뒤따라 나오며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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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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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허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어느덧 대문을 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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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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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가 타고 온 자동차를 그대로 타고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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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동차!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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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도 돌아보지 않으나마, 자동차란 말이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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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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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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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의아한 듯이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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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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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자동차에 올르며, 숨찬 소리로 연송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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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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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에, 한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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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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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자동차의 속력이 너무도 느리었다,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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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펄펄 뛰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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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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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바람결같이 뛰어서 병일의 털썩 주저앉은 앞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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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병일을 보았다. 석호를 보았다. 병일의 손에 움켜 쥐인 은주의 구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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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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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억센 손으로 병일의 멱살을 추켜잡듯 하고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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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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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은 웬 영문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멀뚱멀뚱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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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떠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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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더듬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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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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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맹수의 휘파람 같은 신음성을 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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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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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던 병일의 멱살을 놓고 일순간 팔짱을 끼었다가 여해는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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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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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에서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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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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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나는 새와 같이 난간 위에 올라설 겨를도 없이 두 팔을 꼿꼿이 세우며 그대로 푸른 물속을 향해 거꾸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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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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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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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과 석호는 일시에 부르짖고, 그제야 새로운 정신과 용기가 난 것처럼 달음박질로 강을 건너 배 매어 놓은 데로 뛰어나려왔다. 그들은 고래고래 뜻도 모를 소리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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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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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 사공들도 뛰어나왔다. 곤드레만드레 곤죽이 다 된 술꾼들도 몰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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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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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하고 쓸쓸하던 강가는 시끌시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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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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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극 삐극 출렁, 배 세 개는 닻줄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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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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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물결치는 강 위에서 배들은 길을 잃은 듯이 비틀거리고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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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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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희생을 도루 뺏아 가려는 데 심술을 낸 것처럼 물결은 더욱 높이 뛰며 와그르 버그르 뱃전에 발버둥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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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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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물속 깊이깊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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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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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찰나 삶과 죽음의 관념이 무서운 속력으로 주마등과 같이 얼른하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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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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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삶도 없었다 , 죽음도 없었다. 삶보담 죽음보담 다 강렬한 의식이 그를 지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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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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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를 구하자!' 육체적 정신적 찢어질 듯한 긴장이 왼통 이 한 가지 생각에 몰리고 뭉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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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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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가 유서를 써 놓고 한강에 나갔다는 말을 들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알았다. 이론적으로 이 갈피 저 갈피를 따져서 안 노릇이 아니요, 상상으로 이렁저렁 경우를 추측해서 짐작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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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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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왼몸과 마음으로 은주의 행동의 원인을 느끼었다,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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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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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어린 여학생으로 하여금 죽음의 길에 나아가게 하였는가. 누가 방싯 웃으려는 인생의 꽃봉오리에 끝없는 슬픔을 안고, 푸른 물결에 몸을 던지게 하였는가. 그 쾌활하고 명랑하고 어여쁜 처녀로 하여금 번민과 오뇌와 원한에 조그마한 염통을 갈기갈기 찢게 하였는가. 기쁨과 행복의 절정에서 종달새같이 뛰노는 철없는 아가씨로 하여금 제 목숨을 끊으려는 막다른 곳에 뛰어들게 하였는가. 이 악착한 비극의 절대 책임자는 갈데없는 자기였다. 짐승과 같은 제 정열 때문이었다. 악마와 같은 제 성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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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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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너무도 어여쁘고 너무도 참혹한 제 희생을 구해내지 않고는, 살려내지 않고는, 여해는 살랴 살 수 없었다. 죽으랴 죽을 수 없었다. 여해는 물속 깊이깊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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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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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끈하고도 부실부실한 물 밑바닥이 슬쩍 얼굴에 닿을 둥 말 등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제 몸을 한번 번뒤치는 바람에 일렁 하고 고개가 앞으로 내어 밀려지며 몸은 풍선보담 더 가볍게 술렁술렁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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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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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중학생 시절 한강에서 뽀트를 타고, 헤엄질 치는 것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수영 선수의 차례에는 들지 못하였다. 개헤엄에서 발거리로 한두 간통을 왕복하는 데 지나지 않았었다. 철창 생활오년 동안에 그는 물론 물 구경도 못하였거니와, 더구나 그렇게 높은 데서 떨어져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죽음의 위험에 그는 제 몸을 내던진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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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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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긴장한 정신과 육체는 이따금 기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곱다랗게 물위에 떠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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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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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 숨과 물을 한꺼번에 뿜으며 칼등 같은 물결 위에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자질하듯 한 팔로 물을 헤치며 발로 물고비를 돌리며 위로 위로 몸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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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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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물방울에 무겁게 감기었던 눈시울을 찢어지라고 뜨고, 불 같은 동자를 물 위로 굴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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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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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침침한 물결은 경련을 일으킨 듯이 수멀수멀 떨다가, 발작적으로 길길이 뛰엄질을 하며, 두 자 높이나 대강이를 쳐든 용솟음이 와그르 하고 여해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여해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물등성이를 넘고 또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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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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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모양은 찾으랴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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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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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고나!' 여해는 아뜩 정신을 차리었다. 그는 물결을 따라 나려가지 않고 죽을 힘을 다 써 가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한 가운데 어쩐지 은주가 상류로 흘러간 듯이 착각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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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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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에 반항하는 잠재의식이 여해로 하여금 위로 위로 치거슬러 올라가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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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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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음을 결단하고 물에 던진 은주가 헤엄을 치며 치거슬러 올라갈 까닭은 절대로 없었다. 물결 밀리는 대로 밑으로 밑으로 흘러 나려갔음에 틀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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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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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여해는 입때껏 헛노력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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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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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바꾸려고 돌릴 겨를도 없이 세찬 물결은 그의 등을 밀어 미끄러질 듯이 몸은 흘러 나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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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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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인도교 밑을 지나고 어느덧 기차 지나가는 철교 가까이 나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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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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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은 더욱 사나워졌다. 와그르 버그르 하는 우렁찬 울림이 소리소리 지르며 물에 젖은 고막을 따리었다.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윗덩이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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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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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았다 하며 여해의 몸을 바람개비보담 더 가볍게 흔들고 놀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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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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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교 밑에는 물결이 돈다. 헤엄 치는 이나 뽀트 타는 이에게 가장 위험한 관문! 여해는 약간 피로해지려는 몸에 새로운 힘을 주며 이 난관을 얼른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나 몸은 조리를 돌리는 것처럼 빙그르 돌았다. 물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이 몸이 잦아지는 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며 돌다리 가까이 휘몰아 박힌 몸이 간신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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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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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호리바람 속에 든 듯한 의식 가운데 제 발길에 무엇이 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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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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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재바르게 발을 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버르둥거리는 제 손길에 무엇이 물씬하고 만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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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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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이다.'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번쩍하자 왼몸에 소름이 쭉 끼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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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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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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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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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다!' 하는 생각이 돌았다. 그러나 그 때는 벌써 늦었다. 엉겁결에 그의 손에 잡히었던 은주의 팔인 듯한 무엇을 놓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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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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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놓친 것을 다시 부여잡으려고 팔을 내저었다. 손끝에 닿일 듯하던 그 무엇은 뱅뱅 돌며 멀어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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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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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몸을 솟구치며 뛰엄을 뛰다시피 그 무엇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 서슬에 제 의사와는 정반대로 몸은 사나웁게 까불리는 듯하더니, 그 소용돌이의 테 밖을 벗어나 한간 통이나 밀려 나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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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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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물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제 이맛전을 갈기며 역류하는 물결과 같이 왼몸의 피도 거꾸로 흐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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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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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에 감겨지려는 눈을 찢어지라고 부릅뜨고 으적! 하며 입술을 깨물며 또 한번 몸을 솟구쳐서 그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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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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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적거리는 여해의 손가락 끝에 기적적으로 은주의 머리칼이 잡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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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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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지푸라기보담 더 가볍게 물얼굴에 딸려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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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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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문득 은주는 마지막으로 용을 쓰는지 몸을 번드치는 바람에, 여해의 손에서 머리칼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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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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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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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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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외마디 소리를 치고, 은주의 몸을 다시 잡으려고 놀랄 만치 기민하게 오른팔을 내어 밀었을 제, 허공을 향해 버둥거리는 듯한 은주의 손이 어깨에 와서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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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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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두 팔과 몸은 여해의 팔뚝 위에 무겁게 무겁게 매어 달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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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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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놓친 은주를 다시 부여잡은 기쁨도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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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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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의 몸은 쇳덩이보담 더 무겁게 그의 팔을 밑으로 나꾸치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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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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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몸을 움직일 자유를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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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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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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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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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에게는 물론 의식은 없었다. 생명의 최후 본능이 그로 하여금 여해의 팔뚝에 매어달리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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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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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여해는 은주의 무게에 끄들리어, 몸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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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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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병을 치른 끝이라, 아모리 몸과 마음이 건장하였다 하더라도, 몇 십 분 동안 물결과의 싸움은, 자칫하면 여해의 팔과 다리의 힘을 송두리째 뽑아 버릴 것 같았었다 제 홑몸이라도 . 헤어나기가 어려웠으리라. 게다가 은주의 몸이 천 근 무게로 매어 달리었으니 용신을 하랴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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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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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헛부게 죽는가. 내 팔에 매어 달린 은주를 이렇게 죽이는가.' 여해는 애닯았다, 원통하였다. 제 죽는 것은 그리 섧을 것도 없지마는 은주를 찾기까지 해 가지고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절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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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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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마지막 용기를 떨치어 푹 솟구쳐 올랐다. 그 찰나 무겁던 오른팔이 거뜬해졌다. 앞으로 닥치는 물결을 잡아당기는 듯이 헤치매 몸은 쉽사리 수면에 떠올랐다. 휘 숨을 내어 쉴 겨를도 없이, '앗! 은주를 놓쳤고나!' 자기가 용을 쓰는 서슬에 은주를 뿌리쳐 떨군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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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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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로 물 속을 휘저어 보았건만 파레같이 제 팔뚝에 걸리었던 은주의 손은, 다시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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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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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의 창자는 찢어지는 듯하였다. 물속에 발버둥을 치며 엉엉 소리를 내 어 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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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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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장 다 된 그의 얼굴은, 비통한 결심에 실룩실룩 떨리었다. 죽을 애를 써서 떠오른 제 몸을 다시 물속 깊이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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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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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얼마 나려가지 않아 그의 팔은 다시 은주의 허리 어름을 부둥켜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는 물밑이었다. 더구나 한 팔로 은주를 안은 터이었다. 다시 몸을 번디칠 힘도 자유도 그에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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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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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 입으로, 물은 거칠 게 없는 듯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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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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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운명을 제 죄책을 제 벌역을 달게 받는 듯이 입을 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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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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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의식은 물속과 같이 거물거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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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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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해 오는 의식(意識)의 밤 가운데 오직 한 개의 등불이 반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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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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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주에게 죽음으로써 용서를 빈다.' 마지막 의식도 사라졌다. 다만 은주를 부여잡은 그의 손아귀만 있는 힘이 모조리 몰리었다. 인제는 다시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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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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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일과 석호가 지휘하는 배 세 척이 등불과 횃불을 잡히고 나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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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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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불빛에 사람을 둘씩 삼킨 물결은 놀랜 듯이 제 희생을 뒤덮는 모양으로 쫘 하고 물 한 두께를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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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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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쉽사리 여해가 자므러진 자리에 와서 비척비척하며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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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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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여해가 버르적거리는 것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알아본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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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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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사공의 손에 두 남녀는 어렵지 않게 건져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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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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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닿자, 송장이 될지 환자가 될지 모르는, 여해와 은주는 곧 자동차로 용산 ˟˟병원에 실리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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