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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보석 반지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병일은 명화를 데리고 고월(皐月)이란 일본 요릿집에서 애저녁부터 단둘이 노닥거리고 있었다.
 
2
고월의 주인은 예기 퇴물로 육십을 바라보는 노파였다. 그 집동 같은 몸집에는, 장삼같이 너불너불한 그 옷도 좁았다. 늙은이답지 않게 피둥피둥한 살은 옷을 찢고 나오려고 몸부림이나 치는 듯하다. 그는 분때 밀린 주름을 펴고 눈을 껌적껌적하고 웃으며 언제든지 손님을 정이 뚝뚝 듣도록 맞았다.
 
3
이 눈껌적이 속에는 이루 헤일 수 없는 의미가 품겼다. 요릿집이라고 간판은 내어 걸었지만, 이 눈껌적이 속에는 이루 헤일 수 없는 의미가 품겼다.
 
4
요릿집이라고 간판은 내어 걸었지만, 이 눈껌적이 한 번이면 조용한 밤에 지리멘 이불을 깔고 곧잘 잘 자리도 차려주었다. 남의 눈을 꺼리는 사랑의 짝에 오작교를 건너 주기를 그는 결코 꺼리지 않았다.
 
5
남산 약수터에서 얼마 나려오지 않은 그 위치부터 그럴 듯하였다. 남산 잠두를 엇비슷하게 짊어지고 숲 속에 들어앉아 어른어른하는 나무사이로 게딱지를 엎어 놓은 듯한 만호 장안을 굽어보는 것이 미상불 시원도 하거니와 은근도 하였다. 이런 자리에서 정결하고 후미진 방에 단둘이 붙어 앉아 사랑을 속살거리는 맛이란! 청춘 남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넉넉하리라.
 
6
그러나 정작 청춘 남녀들은 이곳을 이용하기 어려웠다. 음식값도 호되고 방값도 호된 까닭이다. 재산가가 아니면 월급쟁이라도 과장급 이상이라야 이 집 재미를 볼 수 있었다. 이 집에서 주고받는 사랑은 마치 주인 노파의 몸집과 같이 늙고 흐무러진 것이었다. 원체 널리 알려진 집도 아니다. 단골 손님이라야 헤일 수 있었다. 더구나 조선 손님은 열 손가락이 넘지 못하였다.
 
7
병일은 자기네들의 비밀 회합에 가끔 이 집을 이용했지만 명화를 안 뒤로는 이 집에선 빼어놓지 못할 단골손님이 되고 말았다. 명월관이나 식도원에서 늦게 연회를 파할 때 흔히 명화를 끌고 이 집엘 달겨들었다. 명화 집으로 가자니 기생집에 자주 자는 것이 체모에도 안 되었고, 더구나 취체나 당할까 보아 오마조마하였다. 마음놓기로야 자기 집 사랑이 제일이로되 그도 하인 소시에 볼상이 사나웠던 것이다. 전번 사흘씩 나흘씩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에도 그는 노박이로 이 집에서 먹고 자고 은행 회사에 출근까지 하였던 것이다.
 
8
작난감같이 가느다란 난간 앞에 두 남녀는 술상을 끌고 나앉았다.
 
9
어느덧 문을 닫고 들어 앉았기엔 갑갑할 만큼 봄은 겨웠다. 땅 위에 깔린 무수한 별처럼 반짝거리는 전등불도 어째 물을 머금은 듯 촉촉해 보인다.
 
10
밤하늘에 기름기름하게 뻗은 포플러 나무들은 그 동여 놓은 듯하던 가지들이 실실이 풀려 파름파름하게 피어오르는 것 같다.
 
11
병일은 입에 짝짝 붙는 듯한 정종이 벌써 얼근하게 취해 오른다. 껍데기채 볶은 소라 고동과 배차 절임이 봄맛을 자아내는 듯하였다.
 
12
"봄날에 덴뿌라는?"
 
13
병일은 명화가 어우적어우적 새우 덴뿌라를 씹는 것을 보고 핀잔을 주었다.
 
14
"자, 술이나 한 잔 먹으라구."
 
15
하고 찔끔 쏟는 듯이 병일은 명화에게 술 한 잔을 부어 주었다. 명화는 덴뿌라 기름이 번지르하게 발리어 유난히 붉은 입술을 맛난 듯이 쪽쪽 빨아당기다가,
 
16
"전 인제 그만해요. 술이 이렇게 오르는데."
 
17
하고 두 손으로 호끈호끈 다는 제 뺨을 자근자근 누르는 듯이 만져 본다.
 
18
"이것 좀 봐요, 이렇게 호끈거리는데."
 
19
"그까짓 걸 먹고 뭘 엄살이야!"
 
20
병일은 거의 꾸짖는 듯하고 그래도 손을 들어 명화의 뺨을 만져 본다.
 
21
"요런 거짓부리. 호끈거리기는커녕 싸늘하게 얼음장 같으이, 허허……."
 
22
"누가 거짓부리예요? 이게 호끈거리지 않아요, 참."
 
23
명화는 대들어 병일의 손을 집어다가 다시 제 뺨에 댄다.
 
24
"어데 더운가? 얼음 같기 네 마음 같구나."
 
25
하고 병일은 손을 떼었다.
 
26
"왜 또 비꼬아요? 제 마음이 얼음 같으면, 선생님 마음은, 선생님 마음은 뭐라고 할까?"
 
27
"얼음보담 더 찬 게 있나, 어데 좀 찾아보게나, 허허……."
 
28
병일은 개가를 부르듯 웃었다.
 
29
뭐랄까 선생님 " …… 마음은 ……선생님 마음은 싸늘하기 칼날 같애요."
 
30
"칼날? 칼날이 얼음보담 다 찰까?"
 
31
"차갑기야 얼음보담 못하지만 얼음은 더운 데 대면 녹기라도 하지요. 칼이야 어데 녹아요? 참 선생님 마음이야말로 칼날이야요. 무딘 칼날이야요."
 
32
"어째 또 무딘 칼날이람?"
 
33
"그러기에 남의 마음을 그렇게 몰라 주시지."
 
34
"야, 이건 굉장한 비유로구나. 그래, 너는 얼음이 되어서 여해에게 녹았단 말이냐?"
 
35
"여해라께?"
 
36
명화는 얼른 못 알아듣는 척을 하고 눈을 커닿게 떠서 병일을 본다.
 
37
"대관절 여해란 이가 누구예요? 알기나 합시다."
 
38
생판으로 시침을 딴다.
 
39
"왜 또 능청을 부리는 게야?"
 
40
"제가 능청을 부려요? 선생님이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가지고 한번 넘겨 짚으시지."
 
41
"잘도 모르겠다. 그래, 모르는 사람의 병실에 조석 대령을 해여?"
 
42
"병실에 조석 대령? 무슨 말씀일까?……"
 
43
명화는 고개를 제싯하고 무엇을 이윽고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44
"오 옳거니. 마님의 옛 애인 말씀이시군. 저 의전 병원에 계시는. 그렇지요?"
 
45
"농간은 잘도 붙인다."
 
46
"농간? 갈수록 못 하실 말씀이 없네. 그이에게 제가 왜 조석 대령을 한답디까?"
 
47
"얼음이 되어 녹은 탓이겠지."
 
48
"그이에게 제가 왜 녹아요? 저마다 녹는 곬이가 다 다른 거예요. 어데 제가 녹는다구 남도 녹을 줄 아나베. 흥."
 
49
명화는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뾰로통하게 성을 낸다.
 
50
"말을 지어내도 터무니가 있어야지. 아모리 노는년이라구 얕잡아 본들 그렇게 음해를 한단 말예요? 젊으신 부인이 망녕이 나셨나베. 알뜰한 애인이 감옥에서 나오셔서 또 중병을 치르게 되니 망녕도 나실 만하게 일이 되었지만, 흥."
 
51
병일은 영애로부터 병원의 사단을 대강 들어 알았다. 영애는 아모리 남편의 앞이라도 제가 당한 모욕을 샅샅이 일러바칠 수는 없었다. 제일 분하기는 명화가 여해와 한 편이 되어 가지고 못할 소리가 없이 나대더란 말과, 여해가 돈을 안 받더란 말만 대두리판 따서 하고, 병일이가 봉투를 이용해 여해를 얽어 넣었다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였다.
 
52
명화는 여자에게 특유한 무서운 통찰력으로 영애가 병일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못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였다. 자기가 병일로부터 떨어지느냐 영애를 꺼꾸러뜨리느냐, 대두리판에 들어선 것을 그는 느끼었다.
 
53
"내가 그 날 일수가 사나워서, 무슨 정성이 뻗쳐서 동무 문병은 갔던 구!"
 
54
명화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다가,
 
55
"제 동무 하나가 병이 들었어요. 시골서 올라온 지 며칠이 못 됐으니 아마 선생님은 모르시리다. 김추월이라구, 그 애가 늑막염을 앓아서 의전병원에 입원을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 그 날 제가 문병을 갔었지요. 문병을 하고 나오는 길에 부인께서 거기 계시더군요. 그래 저를 보시고 반색을 하시며 마츰 잘 되었다, 내가 지금 누구 문병을 왔는데, 사내 어른이 되어서 혼자 들어가기가 무얼 하던 차에 자네를 만났으니 잘 되었다, 같이 들어가 보자구 하시길래 큰아씨의 영을 어데 그일 수 있어요? 그래 따라 들어가 봤더니 그 말이 이렇게 뒤집힐 줄이야 정말 꿈에나 생각했을까. 정말 그래, 여해란 이에게 녹아서 병원에를 조석 대령을 한다구 부인께서 그러십디까?"
 
56
명화는 엉뚱한 거짓말을 순식간에 지어서 늘어놓고 새매같이 쌕쌕거리며 덤벼들었다.
 
57
병일은 얼떨떨해졌다. 명화의 말이 그럴 상도 싶었던 것이다. 사내란 옆에 앉은 계집의 말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기가 십상팔구다. 하물며 명화의 거짓말은 빈틈 없이 째였음에랴. 명화는 재바르게 병일의 기색을 살피었다. 이런 짬을 놓칠 명화가 아니다.
 
58
"뭘 얻어먹자구, 고 비렁뱅이 전과자한테 반했답디까? 감옥에서 벌어 나온 사십 원 오십 전을 얻어먹겠답디까? 맙시사."
 
59
명화는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60
"아모리 돈에 노랑때가 오른 기생년이라구 설마 그러지야 않을 거구. 그럼 반한 게 뭣인고? 오 옳지, 얼굴이 하도 잘났으니까. 머리란 개 파먹은 밥통 같구, 눈썹은 숯꺼멍 같구, 그 흰 죽사발같이 헐건 눈을 보구, 맙시사."
 
61
명화는 또 한번 웃었다. 여해의 용모를 나리깎는 것이 만족하였던지 병일도 빙그레 웃었다.
 
62
그런 사내에게도 옛날엔 " 애인이 있었으니 참 세상이란 우습고도 가소롭지. 정에는 눈도 먼다더니 그래 두구 하는 말이야, 흥."
 
63
명화는 또 한번 웃었다.
 
64
"그런 작자에게 꽃 같은 여학생이 죽네 사네 하다가 시집을 가게 되었으 니, 어째 첫날밤에 칼을 들고 안 올거요? 오 년 징역을 살아도 그야말로 깨소금이지, 맙시사."
 
65
명화는 또 한번 웃는다.
 
66
"왜 남을 헐뜯는 거야? 너하구 정분이 났으면 어떠냐? 얼음이 녹으면 물 밖에 더 되겠니? 허허."
 
67
병일은 무슨 재담이나 한 듯이 소리를 높여 웃어 버렸다. 그는 명화의 변명을 듣고 있노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지없이 그려내는 여해의 모양새 하며, 그런 위인이 그런 애인을 두었으니, 그 동티로 오 년 징역살이도 깨소금이란 말이 더욱 그의 비위에 들어맞았다. 그는 함함하고 옹글졌다.
 
68
"에구 척척해라, 콧잔등부터 녹아나리나베. 호호호……."
 
69
명화는 콧등에 고였던 땀을 씻고 구슬을 구을리듯 웃었다. 주기와 흥분과 긴장이 일시에 홱 풀어지며 왼몸의 땀이 끈끈하게 솟았다. 그는 병일이 주는 술잔을 받아 단숨에 홀짝 소리를 내고 마셔 버렸다.
 
70
"그런데 선생님과 그 여해란 이와는 무슨 원수예요? 부인께서는 선생님 전에 그이를 사랑하셨고 전 선생님 뒤에 또 그이와 정분이 났으니 온 별일이야. 그도 무슨 전생업원인 게야, 호호."
 
71
"글쎄 말이지. 그자허구 나허구 참 적지 않은 연분인 게야."
 
72
"그 꼴을 해 가지고 그래도 호기가 당당하던걸. 부인을 개 꾸짖듯 하고, 선생님을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흥."
 
73
"그놈이 되려 날 죽일 놈 살릴 놈 해, 응?"
 
74
병일은 갑자기 용수철에 튕기듯 몸을 솟구친다.
 
75
"그뿐예요? 정말 입에 못 담을 욕을 다 하던데."
 
76
"무슨 까닭으로? 그래 내 여편네는 그 소리를 그대로 듣고 있었단 말이야."
 
77
"그대로 듣고만 있어요. 울며불며 비두발괄을 하던데요. 사랑의 맹서를 어기고 선생님께 시집을 온 건 죽을 때라 잘못되었다고, 지금 와서는 후회 막급이라구."
 
78
"뭐 후회막급이라구?"
 
79
병일은 무릎을 일으켜 세운다.
 
80
"그 말뿐일 줄 아셔요? 정말 괴란쩍어서 이루 옮길 수도 없어요. 정이 더럽다는 건 그래 두고 하는 말이야."
 
81
"들은 대로 말을 좀 해 봐, 응."
 
82
병일은 숨이 찬다.
 
83
명화는 말없이 고개만 살랑살랑 흔들어 보인다.
 
84
"말을 좀 해, 후회막급이고, 또……."
 
85
"그런 말을 함부로 옮겼다가 괜히 큰일 나게요. 미리 방패막이를 하노라고 그이와 저와 정분났다는 말까지 지어내는데……. 사정은 과연 딱하더군.
 
86
옛정을 다시 이어 보자니 벌써 남의 안해 된 몸이고……. 흥, 그런 데 들어서는 우리네고 귀부인이고 일반인 모양이더군."
 
87
"그래 또 뭐라던가?"
 
88
병일은 갑갑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채쳤다.
 
89
"몰라요, 왜 저 보고 오복조림을 하셔요. 부인보고 물어보시면 좀 말을 잘 해 드릴라구."
 
90
"그러지 말구, 응? 그래 또 뭐라고 하던?"
 
91
병일은 애원하다시피 하였다.
 
92
"그까짓 상없는 소리를 옮겨 들으시면 뭘 해요? 그런 말이란 안 듣는 게 제일이야요."
 
93
"그러지 말고, 응. 그 말만 하면 네 소원은 뭐든지 들어 주마."
 
94
"절 어린앤 줄 아셔요? 사탕발림을 시키시게."
 
95
"너 원하던 그 반지를 사 줄게."
 
96
"정말?"
 
97
"그럼!"
 
98
"부인 끼신 거와 꼭 같은 거라야 해요."
 
99
"그보담 나은 거라도 사 주지."
 
100
"정말이예요?"
 
101
"그렇다니까."
 
102
"오늘밤으로 사야 돼요. 쇠뿔도 단결에 빼랬다구."
 
103
"그럼, 오늘밤도 좋아."
 
104
"꼭이오."
 
105
명화는 또 한번 다지었다.
 
106
"그래, 글쎄."
 
107
병일은 증을 내었다.
 
108
"후회막급이라고 하고, 그리고 또 뭐라든가?"
 
109
명화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때 들은 말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110
보석 반지를 못 " 끼었으면 못 끼었지, 암만해도 그 말을 못하겠군요."
 
111
이윽고 명화는 난처해 한다.
 
112
"그 얘길랑은 구만두고, 술이나 잡수십시다요."
 
113
명화는 술병을 들어 부으려다가,
 
114
"쓸데도 없는 얘기하는 새 술이 식었네."
 
115
하고 손뼉을 친다.
 
116
"술은 구만두고 어서 그 얘기나 하라니까."
 
117
"참 땀을 낼 노릇이군. 전 다 아시는 줄 알고 그 말을 했다가 생판으로 까바치라시니…… 이를 어떡하나……? 제가 어떻게 그 말을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잔뜩 미움을 받치고 있는데 저 때문에 두 분 새라도 티각태각 하신다면 제가 무슨 낯으로 부인을 또 뵈요?"
 
118
"왜 하라는 얘기는 않고 요리 뺏긋 조리 뺏긋 하는 게야?"
 
119
병일은 참을성이 터지고 말았다. 버럭 짜증을 내었다.
 
120
"아주 안 뵈올 어른 아니고, 부인께서 제가 그런 말을 한 줄 아셔 봐요.
 
121
좀 치를 떠시겠어요? 큰일 나지."
 
122
"알기는 어떻게 안단 말이야. 여기서 단둘이 한 얘기를."
 
123
"그래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구."
 
124
"그러면 내가 네가 하더란 말을 할 듯하냐?"
 
125
"두 분 새를 누가 알아요? 저는 노는년이고 그 어른은 부인이신데."
 
126
"없다 없어. 다짐장이라도 써 주마."
 
127
"얘기를 할까 말까. 하는 엄청나서."
 
128
"하는 엄청나다니?"
 
129
"그 여해란 이가 아주 개골이 나서 부인을 보고 '이년, 저년' 하고 내 사랑의 편지를 아귀를 맞춰서 찾아오너라 말아라, 호령호령하겠지요. 그만 저만한 정분이 아니고야 첫날밤에 칼을 들고 들어섰다가 신부를 보고 물러서기도 안 했겠지만 어쩌면 옛날이야 갔던지, 오늘날 남의 부인을 보고 호년을 마구 해요?"
 
130
"제 사랑의 편지를 찾아오라구?"
 
131
"그래요. 그 사랑의 편지를 가지고, 선생님께서 협박장을 위조를 했다나 어쨌다나……."
 
132
"응?"
 
133
병일은 외마디 소리를 쳤다. 명화는 제 화살이 제 적의 심장을 바루 뚫고 나가는 것을 보고 속으로 웃었다.
 
134
"그래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더군요. 뭐 그 사랑의 편지를 선생님께서 알맹이를 뽑아버리고 겉봉도 앞장은 찢어 없애고, 뒷장 몇 글자 남은 것을 경찰에 바쳤다나 어쨌다나, 그래 그게 증거가 되어 가지고, 군자금 모집원의 혐의로 오 년 징역을 살게 되었다고, 아주 야단야단을 합디다. 제가 사람 죽이러 간 것은 생각도 않는지."
 
135
병일은 단박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명화는 그 기색을 보고, '이놈! 멀쩡한 놈!' 속으로 부르짖었다.
 
136
"그래 우리 선생님을 갖다가 백 번을 죽여도 죄가 남느니 천 번을 죽여도 죄가 남느니 뭐니 괴란쩍은 소리를 하더군요."
 
137
병일의 솟구친 두 어깨가 땅으로 기어들 듯이 축 쳐졌다.
 
138
"그 말은 부인께서도 처음 듣는 모양이십디다. 어쩌면 그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꼬박이 듣고만 계셔요. 옆에서 보려니깐 참 딱도 하더군. 더군다나 그만 그이의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겠지요. 내 남편이 그런 위인인 줄 몰랐소. 그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한 줄은 몰랐소. 그런 악마인 줄은 몰랐소.
 
139
하고 울며불며……흥."
 
140
"짐승만도 못한 짓, 악마!"
 
141
병일은 풀기 없이 혼자 뇌였다.
 
142
"그런 인형을 쓰고 개 혼신이 덮인 자에게 내가 왜 시집을 갔던고, 굶어 죽어도 당신과 살 것을, 당신의 사랑 속에 영원히 묻힐 것을, 내가 잘못하였습니다, 죽일 년입니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 일생을 버렸습니다 하고, 엉 엉 우시겠지요. 보다가 보다가 별꼴을 다 보았지, 신파 연극도 어데 그런 신파 연극이 있겠어요?"
 
143
명화는 말과는 딴판으로, 눈에 살기를 띠우고, 제 말의 마디마디가 적에게 주는 영향을 빼지 않고 보살피었다. 완전한 승리였다. 이만큼 되면 죽이든지 살리든지 제 손아귀에 달리게 된 것이다. 명화는 승리의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144
"얘기를 다 들으시니 인제 시원하겠군. 자동차를 부를까요? 반지를 사러 가야지."
 
145
그는 전리품(戰利品)을 찾기에 서슴치 않았다.
 
146
병일은 곰부임부 술을 들이켰다.
 
147
"두 발 가진 짐승이란 참 제도할 수 없고나. 은혜도 모르고 죽일 놈! 허 허……."
 
148
병일은 취한 척을 하고 호걸스럽게 껄껄 웃었다. 어처구니도 없다는 눈치를 보이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다.
 
149
명화는 맞장구를 쳐 주었다.
 
150
그러게 말예요 " . 인간 구제하면 양분한다고…… 감옥에서 나와서 갈 곳 없는 것을 댁에까지 데려오시고, 앞으로 거둬 주시겠다니 그런 고마울 데가 어데 있겠어요? 병까지 난 것을 입원도 시켜 주시고, 또 돈을 백 원 템이나 보내 주셨으면 감지덕지할 일이지. 붉은 옷 벗은 지가 며칠이나 된다고 바루 제가 젠 체를 하고, 그 귀한 돈을 동댕이를 치고 까치 뱃바닥 같은 소리를 하고…….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하고."
 
151
병일은 손뼉이라도 칠 듯이 좋아라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152
"생각을 하면 내가 부질없는 짓을 하였지. 인생이 불쌍해서 구해 주었더니 되려 엉뚱한 소리를 하니, 기가 막혀, 허."
 
153
"그래, 편지 봉투를 경찰에서 가져가기는 갔나요?"
 
154
명화는 슬쩍 묻고 병일의 기색을 살폈다.
 
155
"그 누 누가 아나? 형사들이 나와서 뒤져간걸 허. 그놈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가택수색을 다 당하고."
 
156
"겉봉 앞장을 뜯었더라니, 그건 정말일까요?"
 
157
병일은 변하려는 제 얼굴빛을 가리우는 것처럼 얼굴을 쓰다듬었다.
 
158
"그 그건들 누가 안다는 거야. 경찰에서 미쳤다고 그런 증거품을 보여줄 거야. 설령 그런 일이 있다손 치더래도. 환한 거짓말이지."
 
159
"앞장은 뜯어 버리고, 뒷장만 남겼더라는데."
 
160
명화는 연거푸 질문의 화살을 쏘았다. 병일의 기색은 좋지 않게 변하였다.
 
161
"그래, 내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냐?"
 
162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속힘이 없었다. 허전허전하다.
 
163
"누가 선생님께 그런 짓을 했답니까? 하두 이상하니 말이죠."
 
164
"그래, 너도 그 말을 믿느냐?"
 
165
"부인께서도 믿으십디다."
 
166
"그래, 너도 따라서 믿는단 말이냐?"
 
167
"어떤 미친년이 그런 종작없는 소리를 믿어요. 인젠 그 얘기는 구만두고 술이나 잡수십시다."
 
168
"그래라, 그래라. 네 말이 옳다. 너도 흥껏 맘껏 먹어야만 한다."
 
169
"그래요. 선생님 화나시는데 저도 덩달아 먹어 드리지. 주정을랑은 받아 주셔요. 호호."
 
170
두 남녀는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술에 취하고 사랑에 겨운 듯하였다. 언제든지 체통을 잃지 않는 병일이건만, 오늘밤은 아주 명화에게 미친 척을 하였다 술잔을 제쳐놓고 . , 그는 명화를 못 견디게 굴었다. 까실까실한 웃수염을 수없이 들이대고 젖가슴을 주무르고…….
 
171
'누구를 구슬리는 셈이냐? 아서라!' 명화는 속으로 웃으며, 사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172
병일은 명화의 무릎을 비고 네 활개를 쭉 뻗고 누웠다가 별안간 화닥닥 일어 앉으며,
 
173
"너 내 마누라 노릇하련?"
 
174
하고 묻는다.
 
175
"큰 마나님이 눈이 등잔 같으신데, 그런 벼락을 맞을."
 
176
"큰 마누라고 뭐고 인젠 하직이다. 그깟 년을 누가 데리고 산담?"
 
177
"취담이라도 그런 말씀 아예 마세요."
 
178
"너도 의엿한 남의 부인이 되면 좋을 것 아니냐?"
 
179
"무슨 복으로?"
 
180
"정말이다. 내가 왜 실없는 소리를 하겠나? 너만 좋다면 내일이라도 결혼식을 하자꼬나."
 
181
"아스세요. 괜히 남의 간에 헷바람만 넣지 말아요."
 
182
"너도 소박이냐? 허허."
 
183
하고 병일은 명화를 부둥켜안았다. 명화는 팔목시계를 보더니,
 
184
"벌써 열 시일세. 자, 진고개를 가셔요. 가가 문 닫기 전에. 부인은 나종에 되더래도 반지부터 낍시다그려."
 
185
"야, 이건 정말 현금이로구나."
 
186
"그럼요. 노는년이 뭘 믿고 사내에게 외상을 놓아요? 호호."
 
187
"그러면 그 반지가 제물에 엔게이지 링이 되겠고나."
 
188
"뭐 되든 부인 끼신 거와 꼭 같은 것만 사 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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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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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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