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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밟히는 지폐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0권  11권  12권  13권 14권  15권  16권  17권  18권  19권  20권  21권  22권  1934
현진건
1
영애는 내켜지지 않는 걸음으로 병원에를 왔다.
 
2
그는 기뻐해야 옳을 일이 아닌가. 여해의 장래를 아름답게 훌륭하게 꾸며 주려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은주보담 더 좋은 신부감을 구해낼 수 있었을까. 한다하는 명사, 한다하는 재산가의 외누이요 미인이고 재원인 당자! 왼 조선을 뒤져도 이런 색시를 찾아내기 어려웠으리라. 여해의 앞길은 양양한 봄 바다와 같이 열릴 것이 아니냐, 옛 애인을 위하던 자기의 공상이 쩍 말없이 찬란하게 실현될 것이 아니냐, 이 걸음이야말로 어깨춤이 절로 날 걸음이 아니냐.
 
3
이래도 그는 부족하였던가, 미협하였던가?
 
4
영애의 가슴속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얽히어 영애 자신도 웬 셈인지를 몰랐다.
 
5
'여해 씨와 아가씨와 결혼?' 아모리 뇌어 보아도 머리에 선뜻 들어오지를 않았다.
 
6
'그럴 수가…….' 하고 영애는 웬일인지 제 가슴이 텅 비어지는 듯한 무엇을 에이는 듯한 이상한 감정을 느끼었다 . 이 야릇한 감정은 여해가 은주 방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볼 때에도 그의 사시나무 떨듯 하는 몸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7
은주는 여해의 안해 되기에 너무 귀하였다, 너무 어여뻤다.
 
8
그는 여해의 출옥 임물에, 여해를 위해 갖은 공상으로 밤새움을 할 때 볼꽃처럼 돋았다가 스러지고 스러졌다가 돋는 생각 가운데는 미상불 여해의 장래 안해도 아니었다. 어떤 인물이라고 구체적 상상은 해 본 것이 아니나, 그러나! 은주와 같이 귀하고 미인은 아니었다. 자기와 대등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9
그는 그 일이 생긴 뒤로 은주 보기가 면구스럽기도 하였지마는 보기도 싫었다. 어쩌다가 마주뜨리면 까닭 없이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10
여해에 대한 감정은 이를 악물고 물리쳤다. 어떻다고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한바탕 악몽으로 돌려버리려 하였다.
 
11
그가 여해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러나 누구의 영이라고 그일 수 있는가. 그가 제 마음을 제가 두려워하였다. 밉광스럽고 무섭고 징그러운 생각이 솟아오르는 것을!
 
12
그는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였다.
 
13
그는 내켜지지 않는 손으로 병실 문을 뚜드렸다. 여러 번 뚜드렸다. 아모 기척이 없다. 그는 서먹서먹하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제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란! 그는 하도 무참해서 문을 탁 닫고 도루 나와 버렸다.
 
14
여해와 명화는 방문 앞에 사람 얼굴이 얼씬하다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15
여해는 감았던 팔을 풀었다. 명화는 눈이 호동그래지며,
 
16
"누구일까……?"
 
17
하고 고개를 제싯하였다.
 
18
"글쎄……."
 
19
하고 여해도 무엇을 엿들으려는 것처럼 귀를 쭝긋 하였다. 명화는 몸을 털고 일어나 슬리퍼를 짤짤 끌며 종종걸음을 쳐서 문 밖까지 쫓아왔다.
 
20
거기는 뜻밖에 영애가 서 있지 않는가. 명화는 일 찰나 어리둥절하다가 짐짓 아모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21
"난 누구시라구."
 
22
잠깐 말을 끊었다가,
 
23
"아이구 아씨님, 오셔겝쇼."
 
24
하고 나붓이 절이라도 할 듯하다.
 
25
영애는 살이 떨리도록 얄밉다 분한 생각이 났다. 도끼눈을 뜬 눈엔 실낱 같은 불길이 이는 듯하였다.
 
26
"여기에 왜 이러고 계셔요? 어서 들어가셔요."
 
27
명화는 깍듯이 손목이라도 잡아 끄을 듯하다.
 
28
이 천도깨비 같은 년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29
영애는 대꾸도 않고 새근새근 어깨로 숨을 쉬었다.
 
30
영애는 일껏 왔다가 그양 돌아설 수도 없었다. 쇠꼬챙이같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명화를 따라 들어왔다.
 
31
"T동 아씨님 오셨어요."
 
32
명화는 병실에 들어서며 전갈 사령 모양으로 부르짖었다.
 
33
여해는 그대로 앉았기도 무얼하였던지 어느 결에 누워 있었다. 영애는 병상 가까이 왔다.
 
34
"좀 어떠세요?"
 
35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었다. 그는 환자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바시다는 듯이 눈을 떨어뜨리었다.
 
36
"네 많이 나았습니다. 염려하신 덕택으로."
 
37
여해는 소리를 버럭 지르다시피 쾌활한 목청을 내었다. 그 말 속에 거슬거슬한 뼈가 섞인 것은 장님이라도 만져볼 수 있었다.
 
38
영애는 귀청이 잉하고 울리는 듯하였다.
 
39
'자기는 무얼 잘했다고 퉁명인구?' 무두무미하게 이런 생각이 지나간다.
 
40
"참 많이 나으셨어요. 그 때 입원을 안 했더면 큰일 날걸. 다시 살아나신 거나 진배없지요."
 
41
명화는 거들어 치하하듯 말하였다. 입술이 빗슥해지는 것을 참노라고 입을 오무려 붙이었다.
 
42
영애는 두 남녀의 입을 모은 총공격에 뒤로 넘겨 박힐 듯한 것을 억지로 버티었다. 그도 응전할 준비로 첫째 명화를 향해 곱지 않는 눈살을 쏘았다.
 
43
그 눈살은 이년아, 너는 입을 담치고 있어 하는 듯하였다.
 
44
"어휴, 무서워라 왜 남을 그렇게 흘겨보십쇼? 전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자 이리 앉기나 하십쇼. 두 분이 오래간만에도 만났으니."
 
45
곱지 않은 눈살쯤으로 거꾸러질 명화가 아니었다. 그는 적을 어린애 다루듯 하였다. 동근 의자를 적의 궁덩이 밑으로 떠다박지르듯 밀어 넣으며 고분고분하게 권한다.
 
46
영애는 가뜩이나 허전허전하는 정강이가 의자에 밀려 힘없이 접치었다. 그는 무너지는 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47
오 옳지 그렇게 앉으시고 " , , 두 분이 무슨 정담이라도 하십쇼. 쇤네는 물러갑니다."
 
48
하고 명화는 슬쩍 몸을 돌려 나가려 한다, 영애는 또 한번 명화를 노려보았다. 별안간 한기가 드는지 이가 딱딱 마주치었다.
 
49
"왜 그럽시오? 나가지 말란 말씀예요?. 있으라면 있읍지요. 난 또 두 분께 방해가 될까 봐서, 호호."
 
50
명화는 깔깔 웃었다.
 
51
'이년이 모든 것을 아는고나!' 불현듯 이런 생각이 비수와 같이 영애의 가슴을 에이며 떠올랐다. 야속과 미움에 타는 눈초리를 이번에는 여해에게로 돌리었다.
 
52
"귀하신 몸으로 그 바람을 쏘이시고 오시느라구 얼마나 수고를 하셨습니까?"
 
53
여해는 명화가 자기를 찾아온 첫밗에 하던 말이 불쑥 입을 뚫고 나와 버렸다.
 
54
'내 말이 너무 심하고나.' 여해는 진작 후회하였으나 벌써 말은 나온 뒤였다.
 
55
"그렇구 말구요. 그 귀하신 몸에 그 높으신 몸에 병환이 나면 어쩌자고 그 모진 바람을 쏘이시고……. 이번에도 자동차는 타고 오셨겠지요?"
 
56
명화는 한 술 더 뜨고 생글생글 웃었다.
 
57
여해는 명화를 향해 눈을 껌뻑하고 손을 저어 보이었다. 그런 소리를 마구 말라는 뜻이리라.
 
58
영애는 자기에게 대한 모욕의 언사보담도 이 눈껌쩍이만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그는 곧 자리를 차고 일어서려 하였으나 문득 제가 온 사명을 생각하였다.
 
59
'환심을 못 사 둔다손 치더라도 이 돈을 전하고 가야.' ─ 세상에 이럴 수도 있는가. 이렇게 남의 본정을 모를 수도 있는가. 어쩌면! 어쩌면! 두 사이의 비밀을 기생년 따위에게, 저 천도깨비 같은 명화 년 따위에게 까바치고 그년과 한편이 되어 가지고 눈껌쩍이를 해 가며 나를 모욕할까?
 
60
영애는 야속해 하기엔 너무 분하였다. 그의 입술은 파랗게 질리며 실룩실룩 떨리었다. 눈물 한 방울이 빠작빠작 타는 듯한 눈에서 기름같이 떨어졌다.
 
61
'내가 왜 천착스럽게 눈물을 흘리고?' 영애는 제 눈물을 보고 질색을 하였다.
 
62
'수인사나 치루고 돈이나 주고 선선히 일어서면 고만이 아닌가.' 영애는 마음을 도사리었다.
 
63
"인젠 많이 나으시대요?"
 
64
"낫지를 못해 걱정이오."
 
65
"잡숫기는 뭘 잡수셔요? 진지를 좀 잡수셔요?"
 
66
"죽도 먹고 밥도 먹고!"
 
67
여해의 엇먹는 대꾸에 부애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노라고 영애는 무진 애를 썼다. 저편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들은 척을 말아야 한다. 기계적으로 내 물을 말이나 물으면 고만이 아닌가.
 
68
"의사가 언제쯤 퇴원을 하셔도 좋겠답디까?"
 
69
"좋을 때가 따루 있겠소? 오늘이라도 나가면 나가는 게지."
 
70
"좀 오래 조리를 하셔야지."
 
71
"흥! 조리? 무슨 놈의 팔자로."
 
72
"수술한 자리는 어때요?"
 
73
"어떻기는 그저 그렇지."
 
74
"지금도 심을 박나요?"
 
75
"심을 박는지 뭘 박는지."
 
76
"인젠 고약이나 붙여 두잖을까요?"
 
77
"글쎄 뭘 붙이던가!"
 
78
문답은 건성으로 오고갔다.
 
79
"두 분이 무슨 신파 연극을 하셔요? 듣자니 우스워 죽겠네. 호호!"
 
80
명화가 옆에서 말을 넣었다.
 
81
영애는 급하였다. 이 바늘방석 같은 자리에서 일초 바삐 떠나고 싶었다.
 
82
그는 낌새를 볼 여유도 없었다. 핸드백을 열고 불쑥 돈을 꺼내었다.
 
83
"이거 약소하나마 병비에 보태 쓰시라고 애 아버지가 보내십디다. 백 원 이야요."
 
84
하고 환자의 벼개 옆에 놓았다.
 
85
여해는 고개를 들어 영애의 돈 놓은 것을 얼른 보고 더러운 것을 본 듯이 곧 눈길을 돌리었다. 그 눈에는 불이 번쩍 나는 듯하였다.
 
86
"병비에 보태 쓰라고, 흥. 가련한 전과자에 대한 천만장자의 동정은 감사합니다만, 병비는 치렀으니 이 돈을 도루 집어 넣으시오."
 
87
"무슨 돈으로?"
 
88
영애는 저도 모르고 불쑥 이런 말이 나와 버렸다.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분이 이 한 마디에 뭉친 듯하였다. 무슨 입찬 소리냐, 무슨 주리를 할 청관이냐 하는 듯이,
 
89
"흥, 무슨 돈으로?"
 
90
여해는 곱새겼다.
 
91
"흥, 무슨 돈으로?"
 
92
명화도 메아리처럼 되받는다.
 
93
"흥, 무슨 돈으로! 엊그제 감옥에서 나온 놈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 그럴 일이오."
 
94
여해는 벌떡 일어났다. 그의 전신은 떤다.
 
95
"박 사장께 똑똑히 전해 주시오. 박 사장 살해 미수범 김여해는 감옥에서 나온 덕택에 돈이 있더라구. 쇠창살 속에서 썩으며 번 돈 사십 팔 원 오십 전이 있었더라구. 이것도 박 사장께서 징역을 살리시지 않았더면 없을 돈이니 사장님께서 주신 거나 다름이 없다구. 그 은혜는 백골난망이라구. 애인을 팔아 징역을 살고 돈벌이를 한 놈에게 입원비까지 주셨으니 그만하면 김여해 애인 사신 값은 치르고도 남은 게라구……."
 
96
"조섭이나 잘 하셔요."
 
97
영애는 귀를 막고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98
"이걸 가지고 가시오."
 
99
여해는 침대 위에 놓인 지폐장을 들어 영애의 뒤꼭지를 후려갈기듯 던지었다.
 
100
십 원 짜리 지폐 열 장은 영애의 머리 위에서 쫙 헤어져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제 주인을 옹위하듯 앞뒤로 떨어졌다.
 
101
"이게 무슨 짓이야요?"
 
102
돌아서던 영애는 멈춰 섰다.
 
103
여해는 돌쳐서는 영애를 바라보고 부들부들 떨다가 픽 코웃음을 웃어 버렸다.
 
104
"이게 무슨 짓이냐? 흥 그럴 일이오. 잘못 되었구려. 황금과 결혼합신 귀부인께 돈을 던져서 대단 죄송합니다. 맞으셔도 지폐 뭉치에 맞으셨으니 과도히 노여우실 건 없으실 텐데……."
 
105
파랗게 질리었던 영애의 얼굴은 대번에 피를 뿜는 듯이 새빨개졌다. 그는 한 걸음 다가들어 왔다.
 
106
"무슨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하셔요? 이러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렇게 저를 모욕하시다니……."
 
107
영애는 여해에 대한 원정과 야속과 분함이 일시에 복받쳐 올랐다.
 
108
저는 여해 씨를 위해 " 무슨 노릇이라도 하려 했습니다. 제 집안 사정 탓으로 사랑의 맹서를 어긴 것이 죄밑이 되어서 무슨 수로든지 그 죄의 만분지 일이라도 삭쳐 보려 했답니다. 출옥하실 무렵에는 정말 밤잠도 달게 자지 안 했답니다. 어떻게 하면 장래를 보장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그 몹쓸 고역을 치르신 대신으로 즐겁게 기쁘게 해 드릴까 하고."
 
109
"거룩하시군. 바루 전지전능의 신이구려. 병도 주고 약도 주고. 황금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니까, 재산가의 안해가 되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줄 알았구려, 흥."
 
110
"황금과 결혼! 재산가의 안해! 말말이 꼬집으셔도 저는 달게 듣겠습니다.
 
111
그러나 그 때 제가 결혼을 한 게 어데 제 혼자 자의로 한 노릇입니까? 저를 버리고 달아나기까지 않으셨습니까? 집안을 위해 일신을 희생하자고, 우리의 사랑을 희생하자고, 그 깨끗하던 마음, 그 높으시던 뜻은 어데다가 내어 버렸습니까?"
 
112
"감옥에다 내어 버렸소. 오 년 동안 청춘의 피가 썩을 때 마음도 썩고 혼도 썩어 버렸소, 허."
 
113
여해는 서글픈 웃음을 웃었다.
 
114
"아모리 하기로서니 그렇게 변하실까요? 우리의 사랑이 좀 깨끗하였습니까? 저는 우리의 사랑이야말로 불에 넣어도 타지 않을 줄 믿었습니다. 아모리 서로 갈리고 경우가 변하더래도 우리 사랑의 구실은 깨어지지 않을 줄 믿었습니다."
 
115
영애는 흑흑 느낀다.
 
116
"그것은 꿈이오. 우리 어릴 적 꿈이오. 입으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마는 정말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소? 가슴에 손을 대고 물어 보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오."
 
117
"꿈이야 꿈이지요. 이렇게 되고 보니 꿈이라도 어림없는 꿈이지요. 그래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본래부터 정신적인 우리 사랑이 아니예요? 그러니 여해 씨, 그 때 말씀마따나 하필 부부가 되잖아도 좋지 않아요, 남매의 의를 다시 맺고, 정말 친동기같이 지나면 그만 아니예요.
 
118
그런데……."
 
119
"애인도 되었다가, 남매도 되었다가, 인생이 어데 떡가루 반죽 같은 줄 아시우?"
 
120
여해는 두꺼운 유리 곱보에 침을 튀 하고 배앝았다.
 
121
"마음대로 휘저어서 송편도 만들고 경단도 만들고. 흥 그런 말로야 무슨 걱정. 아스세요."
 
122
잠자코 있던 명화가 말참견을 하며 입을 비쓱하였다.
 
123
영애는 힐끗 명화를 흘겨보고 다시 여해를 보며 애닯은 목소리를 떨었다.
 
124
"저는 정말 여해 씨를 믿었습니다. 저는 여해 씨가 그러실 줄은 참말 몰랐습니다. 그런 우리 사이를, 그런 우리의 비밀을 되지 않은 기생년 따위에게 다 말씀을 하시고."
 
125
영애는 어깨를 부들부들 떤다.
 
126
명화는 남의 싸움을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난데없는 총알이 제 살을 뚫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다가 나종엔 독사같이 골이 올랐다.
 
127
명화의 입술에는 찬바람이 훌훌 나는 듯하였다.
 
128
"아니, 아씨님 망녕이 나셨어요? 왜 기생은 걸고 드십니까? 기생년은 워낙 신성하여서 그런 사랑 얘기는 못 듣는단 말씀예요? 그런 염려는 놓으세요. 기생년들도 귀부인만은 못하지만 더러 그런 사랑도 겪어 본답니다. 말씀 좀 하신들 하상 대사예요? 어서 그 진저리 먼저리 나는 사랑 타령이나 늘어놓으세요. 그런 객쩍은 염려는 마시죠."
 
129
영애는 홉뜬 눈으로 명화를 바라보며 입술이 벌벌 떨리기만 하고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130
"어규 아씨님, 왜 이러십쇼? 왜 도끼눈을 뜨시구 상없게. 아스세요. 어서 하실 말씀이나 하세요. 아씨님께서야 사랑을 하든 안방을 하든 내게 무슨 상관이 있다구 그러십쇼? 걸고나 들지 맙쇼."
 
131
명화는 냉랭하게 웃었다.
 
132
영애는 명화를 쏘던 눈살을 여해에게로 돌리었다. 모든 것이 네 탓이다 하는 듯이.
 
133
"이게, 이게 무슨 모욕이에요? 어쩌면! 어쩌면! 저를 이렇게도 모욕을 주십니까? 저는 정말 제 힘껏 제 정성껏 여해 씨를 위한다고 했답니다. 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애 아버지를 졸랐답니다. 그이도 선선히 승낙을 해 주었답니다. 어데까지 여해 씨의 장래를 보장해 주마고, 취직도 시켜 드리고, 장가도 들여 드리고 집도 사 드리고."
 
134
여해는 끙 하고 황소의 울음 같은 신음성을 내었다. 침대가 쩌렁하고 울었다,
 
135
"오 년 징역을 살리고 제 할 것을 다 하고 나서 취직을 시킨다 장가를 들인다…… 천만장자란 못할 일이 없군!"
 
136
"어데 징역이야 그이가 살렸어요? 제 탓이라면 제 탓인지는 몰라도……."
 
137
"영애 씨는 입때 그렇게만 생각하시우?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만 생각하였소. 그게 틀린 생각이었소. 그 놀라운 어른이 황금만으로 올가미를 삼아 가지고 나를 얽어 넣었소. 당신의 그 알뜰한 남편이."
 
138
"그건, 그건 억설이시지. 그럴 리야."
 
139
"그럴 리야 없다? 그러하겠소. 그러나 사실로 얽어 넣고 징역 살고 나온 내가 여기 이렇게 눈이 등잔같이 살아 있는 다음에야 어떡하겠소?"
 
140
"어데 그야……."
 
141
"어데 그야, 내가 칼을 들고 들어간 탓이지, 그 어른의 탓이 아니란 말이오? 그럴 거요. 대관절 내가 무슨 증거로 군자금 모집원의 혐의를 받은 줄 알기나 하우. 댁의 벽장에서 뒤져 나온 협박장의 필적과 내 필적이 같은 까닭이었소."
 
142
"그야 우연히 같을 수도 있을 것 아녜요?"
 
143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소. 그리고 공교로운 내 운명으로 돌려버리었소.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어림없는 생각이었더란 말이오. 세상일이란 공교로 우려면 무척 공교롭게 되는 수도 있지마는 어디 그렇게 공교로울 수야 있소? 여러 해 동안 의심해 나려오던 것이 인제야 바루 풀리었소."
 
144
"그럼 그 협박장을 애 아버지가 일부러 꾸며내기나."
 
145
"그렇소. 꾸며내었소, 꾸며낸 거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소."
 
146
"어떻게 그렇게……."
 
147
"어떻게 그렇게? 흥, 그 협박장을 꾸미는 데는 영애 씨도 한 몫을 착실히 본 것이오."
 
148
"제가 그런 벼락을 맞을……."
 
149
"벼락은 두었다가 맞고, 말이나 들어 보시오. 내 필적과 댁에 온 여러 협박장 가운데 같은 것이 있다기로, 나는 하도 이상해서 보여 달라고 졸랐소.
 
150
그러나 경찰에서는 세상 보여주지를 않았소. 나종 검사국에서야 그 협박장을 얼른 보았소."
 
151
"그래, 그게 꾸민 협박장이란 말씀예요?"
 
152
"아니오. 그건 협박장이 아니었소. 편지 봉투이었소. 편지 봉투라도 겉장에 편지 받을 사람의 주소 성명을 쓴 것은 뜯어내었고 뒷장에 부친 사람의 주소 성명만 적은 것이었소. 그것도 연 월 일과 봉천 서탑(奉天西塔)이란 네 글자만 남은 것이었소. 그것은 갈데없는 내 글씨였소. 나는 기가 막히었소. 운명의 작난에 한탄만 하였을 뿐이오. 더구나 그 때는 영애 씨 말은 입 밖에도 아니 내고, 무슨 죄목으로든지 징역만 살 작정이었으니까. 그 수상한 편지 봉투를 따져볼 생각도 아니하였소. 더구나 누가 나를 얽어 넣으랴고 악마와 같은 수단을 부릴 줄이야 꿈에도 하지 않았었소. 그게, 그게."
 
153
영애와 명화의 눈은 다같이 호동그래졌다.
 
154
"그게, 그게, 인제 생각하니 바루 내 글씨구려. 내 필적이니 같을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155
"그게 웬일일까? 그럴 리가……."
 
156
영애는 놀라면서 그래도 못 믿어한다.
 
157
"그만하면 그게 무슨 편지의 겉봉인 줄 알겠구려."
 
158
하고 여해는 영애를 노려본다. 먹장 같은 눈썹 하나 하나가 꼿꼿이 일어섰다. 왼 몸의 뼈가 으적으적 소리를 내었다.
 
159
"그럴 리가, 그럴 리가……."
 
160
영애는 간신히 모기 같은 소리를 떨었다. 그는 너무 엄청나고 무서운 사실을 믿으랴 믿을 수 없었다.
 
161
"그럴 리가? 그럴 리가? 그렇소. 그럴 리가 없어야 당연한 일이오. 제 사랑의 편지를 이용해서 제 애인을 얽어 넣을 리야 만무한 일이오. 엊그제까지 죽네 사네 하던 사내의 편지를 제 남편을 주어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가장 음흉한 수단으로 변작을 해 가지고 청년 하나를 감옥에 썩히다니! 사람의 가죽을 쓰고야 차마 못할 일이거든. 하물며 한다하는 명사, 한다하는 귀부인의 하실 짓이겠소? 그러나 사실인 걸 어떡하오? 엄연한 사실인 걸 어떡하오?"
 
162
"그건 오해십니다. 암만해도 그건 오해십니다. 그럼 제가 봉천에서 주신 편지를 애 아버지를 드렸단 말씀예요? 어디 그런……그런……."
 
163
"그럼, 그 편지가 지금도 영애 씨한테 있소?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고대로 남아 있소? 나는 지금도 역력히 기억하오. 어느 날 어떤 사연의 편지를 한 것까지 외우자면 외우겠소. 헤이라면 헤이겠소. 그 편지를 나를 갖다 주시겠소? 봉투를 맞추어서 나를 찾아다 주시겠소? 그렇다면 내가 오해를 풀겠소. 내 살과 내 혼을 지옥의 가마솥처럼 지글지글 끓이는 이 의심을 풀겠소"
 
164
"……."
 
165
영애는 고개를 바루 들지도 못하였다. 그에게는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던 까닭이다. 결혼한 지 얼마 만에 제 세간을 챙기다가 그 편지 꾸러미가 튕겨 나와서 병일이가 보고 뺏아 간 것을.
 
166
"이거 정말 보물이구려. 당신의 사랑의 금자탑이구려."
 
167
하고 제 남편은 싱글싱글 웃으며 아모리 달라고 졸라도 영영 주지 않던 것을.
 
168
"왜 대답이 없소? 응 그 편지를 어떻게 했단 말이오?"
 
169
"……."
 
170
"아이, 선생님도 딱하십니다그려. 없어진 편지를 내 놓으시라면 어떡하신단 말씀예요? 죽은 애를 찾아오라는 게지. 부부간에 그런 편지를 보이기도 예사구, 사내란 그런 편지를 보면 어데 뺏구 주나요? 뻔한 노릇이지. 그러기에 비밀이란 지키기 어렵다는 거예요. 선생님도 기생년 따위에게 그런 말씀을 다하시지 않으셨어요. 구만두세요, 인젠 다른 정담이나 하시는 게 좋지 않아요."
 
171
명화는 보고나 온 듯이 가루맡아서 죽 설명을 하였다.
 
172
"그러기에 사람이란 입찬소리를 못하는 게야. 선생님께 비밀을 안 지켰다고 그렇게 울며불며 하시더니만, 그 말이 침도 마르기 전에 아씨님께서 비밀을 안 지킨 것이 또 탄로가 났으니 어차피 피장파장이야. 호호!"
 
173
명화는 재미있다는 듯이 땍때글 웃었다.
 
174
영애는 어마어마한 바위덩이에 엎눌리고 짓바수인 듯하여 갱신을 못할 듯하다가 명화의 웃는 소리를 듣고 왼몸의 피가 거꾸로 흘렀다. 제 앞에 설설 기는 듯하던 기생년이 이렇게 골을 올리고 빈정거리고 조소를 할 줄이야!
 
175
그는 명화를 대매에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뜯어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체모고 무엇이고 다 벗어 던졌다.
 
176
"너 이년, 너 이년!"
 
177
영애의 입술은 금시 금시 쪼글쪼글 말라붙었다. 그만큼 그의 입김은 뜨거웠던 것이다.
 
178
"너 이년! 뉘 앞이라고 함부로 조동아리를 놀려. 아가리를 찢어 놓을 년!"
 
179
명화는 영애의 공격을 예기나 한 듯이 별로 놀라지도 않고,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180
"어규, 아씨님, 말씀을 좀더 낮춰 하실 수 없어요? 뉘 앞은 뉘 앞이에요?
 
181
색시 적에 서방질한 귀부인 앞이지요. 그런 놀라우신 어른 앞에는 입을 꿰매어 두는 걸 어데 기생년 따위가 그런 법을 아나요? 그저 죽여만 줍쇼. 호 호……."
 
182
하고 명화는 능글능글하게 웃다가 별안간 약오른 살무사 모양으로 회회 바람을 낸다.
 
183
"흥, 뭐 이년! 뭐 뉘 앞! 그런 소리가 만만히 나오는 건 무엇 때문인구!"
 
184
혼잣말같이 뇌이다가 너저분하게 떨어진 지폐장을 보고,
 
185
"오 옳지, 이것 때문이군!"
 
186
명화는 지폐장을 벌레나 문질러 죽이는 것처럼 지근지근 밟았다.
 
187
한참 밟다가 제기나 차듯이 지폐장을 영애를 향해 차 던지었다.
 
188
"엿소, 이거나 줏어 가우. 이 아까운 돈, 애인도 헌신짝 같은 이 돈, 귀부인으로 곤댓질을 하는 이 돈, 이년 저년 소리도 나오는 이 돈! 엿소, 어서 줏어 가우. 흥, 잘난 놈도 못난 돈, 못난 놈도 잘난 돈,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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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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