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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대사 (元曉大師) ◈
◇ 용신당 수련 ◇
카탈로그   목차 (총 : 8권)   서문     이전 5권 다음
1942
이광수
 

1. 용신당 수련

 
2
원효는 사사마 소년에게서 가상아당 말을 듣고 자기도 거 기 들어가서 그 시련을 한번 겪어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3
개천을 끼고 올라가는 동안의 경치가 대단히 좋았다. 올라 갈수록 동구는 좁아지고 물소리는 더욱 커졌다. 바위도 좋 았다. 그러나 원효는 알뜰하게 이 경치를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사람 없는 시골길에 들어와 물소리 바람 소 리만 들을수록 모든 사려가 일시에 일어났다.
 
4
요석공주는 어찌 되었을까. 원효는 요석궁에서 요석공주와 자리를 같이하는 동안에 마음이 그다지 어지러워졌다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어떠한 순간에도 저를 잃어버린 일은 없었고 요석궁을 떠날 때에도 문 밖에만 나서면 지었던 짐 을 벗어 버린 것같이 아무것도 마음에 남겨나 묻은 것이 없 다고 믿었었다.
 
5
그러나 혼자 조용히 있을 때면 요석공주의 모양이 보였다.
 
6
당연한 일이라 하면서 그렇게 그립게는 생각하지 아니하였 다. 다만 요석공주는 언제 보아도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여 자라고 생각하였다. 원효가 여자를 못잊어 한대서야 되랴 하는 생각이 앞섰다.
 
7
그런데 가상아골에 들어서자 몹시 요석공주가 눈에 밟혔 다.
 
8
"어떻게 되었나, 아기를 배었나?"
 
9
원효는 요석공주의 뱃속에 들었을는지 모를 아기를 생각하 였다. 구원겁래(久遠劫來)의 깊은 인연으로 원효를 따라오는 생명이다. 그 인연의 힘이 원효를 몰고 몰아서 요석공주에 게로 가게 한 것이다. 원효는 마침내 그 인연의 힘에 진 것 이다. 원효의 도력은 이 줄을 끊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10
원효는 이것을 생각할 때에 한껏,
 
11
"졌구나."
 
12
하는 한탄을 발하는 동시에 전생다생에 자기와 요석과 또 낳을 아기와의 수없이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또 헤어 진 관계를 회상해 보았다. 원효의 눈에는 한없는 허공에 한 없이 긴 줄이 제 몸에 매어 있는 것이 보인다.
 
13
"이 줄을 끊어 버려라, 하신 것이 석가여래의 가르치심이 다."
 
14
원효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원효의 몸에는 수없는 인 연의 줄이 얽히어서 그것이 수없는 중생에게 연하고 또 그 것이 무궁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닿은 것 같았다. 그중에, 이 순간에는 요석공주와 자기와의 몸에 매인 줄이 가장 팽 팽하게 켕기어 있었다.
 
15
'내가 지금 가상아당에 올라가는 것도 또 다른 무슨 인연의 힘에 끌리는 것이 아닌가.'
 
16
하고 원효는 우뚝 섰다. 갑자기 물소리가 더욱 커졌다.
 
17
'가자, 가자, 가는 대로 가서 되는 대로 되어 보자.'
 
18
원효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 길에서 원효는 몇 사람 수도하는 사람을 만났다. 바랑이도 있고, 사 당이도 무당이도 있고, 젊은 어여쁜 가상이도 있었다. 그들 은 모두 노란 베옷을 입고 고깔을 썼다. 모두 마음에 무슨 소원을 품고 각각 신을 섬기며 도를 닦는 것이다. '보아라' '보아'하고 서로 인사하였다.
 
19
그들의 눈은 날카롭고 행동은 여물었다. 어디서 머리카락 하나만 움직여도 그 소리를 놓치지 아니할 것 같았다. 백일 성공(백일기도)에 강아밥(죽)을 먹은 몸이라 푸른 빛이 나도 록 수척하였으나 어느 한구석도 비인 곳이 없었다. 불교의 중과 다른 점은 눈에 자비로운 빛 대신에 살기가 있는 것이 었다. 그들의 눈에서는 날카로운 찬 빛이 흘렀다. 불교의 수 련이 모든 욕심을 따 끊어 버리는 데 있는 대신에, 방아의 수련은 모든 욕심을 한 욕심만으로 모으는 때문이라고 원효 는 생각하였다. 만일 저 눈으로 한번 미운 사람을 노려본다 면 그 사람은 당장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들이 지나가 는 길에 잠시 힐끗 보아도 몸에 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매 서웠다.
 
20
원효는 이런 사람들을 보내면서 깊이깊이 골짜기를 추어올 랐다.
 
21
원효가 강아당에 다다른 것은 해가 낮이 되어서였다. 가무 는 유월 볕이 불을 담아 붓는 듯하였다. 비록 물소리 나는 산골이라 하여도 전신에서 구슬땀이 흘렀다.
 
22
원효는 사오 명 남자가 벌거벗고 개천가 바위에 앉았는 것 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바(해)신의 힘인 방아라(바가라라고 도 발음하게 된다. 빛이라는 말이다)에 몸을 쬐어서 몸을 깡 마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강아비라고 하고 궁이, 궁니라 고도 한다. 일광 속에 몸을 잠그고 나서 가만히 지난 일과 만난 일과 오는 일을 생각하여서 일변 옛 허물을 살라 버리 고 일변 우주의 진리를 궁리하는 것이다. '강아바'라는 것은 '가', 즉 해의 아들 강아를 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머리로 생 각하는 것은 우리 머리 속에 강아, 즉 해가 있는 때문이라 는 것이다.
 
23
세상 잡념을 버리고 몸을 가리운 옷을 벗고 발가숭이로 일 광, 즉 강아 속에 단정히 앉아서 마음을 일광과 같이 맑게 밝게 하는 것이 이 강아, 또는 거시기 수련의 목적이다.
 
24
원효는 개천물에 몸을 깨끗이 씻어 머시기하고 강아당에 들어가서 강아라 불을 피웠다. 관솔에 불을 피우는 것이다.
 
25
강아당에는 정면에 강아마(강아바라고도 한다)를 두발 달린 상 위에 놓았다. 이것이 신주였다. 강아마는 여덟 모 난 구 리판을 번쩍하게 갈아 놓은 것이었다.
 
26
강아라불이 강아마에 비치어서 불길이 이럭이럭하였다.
 
27
원효는 네 번 절하고 네 번 '가사바'를 불러서 박장하고 손 을 비볐다. 가나라사(그늘) 네 분 일신(日神)이 깨시와서 내 '바라과라'(발괄─白活, 祈願)를 들으소서 하는 뜻이다.
 
28
'가'는 해요, 나라사는 해의 세 분 아드님이시니, 나는 빛이 요 더위다. 모든 곡식을 익히고 모든 생물을 익히시는 신이 시다. 밝음의 나라의 주재시다.
 
29
'라', 즉 '아라'는 어두움이요, 구름이요, 용(龍)이시다. 어두 움의 나라의 주재시다. 이 신을 아랑아라고 부른다.
 
30
'사'는 물이요, 생명이다. 상아신은 물을 주시고 생명을 주 시는 신이시어니와 낭아, 아랑아 두 분이 아니고는 상아의 힘이 아니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 한 분의 힘이 나, 라, 사 세 가지로 작용되어서 천하를 가나라시니(거느리시 니) 이것이 다 가신, 즉 일신의 하시는 일이요, 은혀시다. 강 아라당은 원효에게 일신의 연유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31
원효는 강아라사(바라라고도 한다. 지금 말로 꽹과리)를 들 어서 네 번 울렸다.
 
32
원효는 우선 강아마행을 하여야 한다. 며칠이고 몸을 씻고 는 볕을 쬐이고 생각하는 행이다. 비린 것을 먹어서는 아니 되고 잠을 자서는 아니 되고 음란한 생각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먹는 것은 하루 두 번에 강아밥(죽) 네 보시기뿐이다.
 
33
이러한 설명을 듣고 원효는 반드시 그대로 지킬 것을 다짐 두었다. 다짐이라 함은 손에 먹을 묻혀서 백지에다가 눌러 서 손 모양을 박는 것이었다. 다짐이란 다다마가 줄어든 말 이다.
 
34
원효는 강아라마지를 끝내고 옷을 벗고 개천에 나아가 바 위 하나를 골랐다. 그러고는 바위 위에 강아앉음으로 앉았 다. 두 무릎을 세우고 몸을 앞으로 약간 숙여서 두 팔을 짚 어서 버티고 등에 볕을 받는 것이다. 개가 앉는 자세로 앉 는 것이니 이 경우에 등이 강알, 즉 거울이 되는 것이다.
 
35
등은 지지는 듯 뜨겁고, 땀은 구슬같이 전신에 흘렀다. 원 효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설사 등이 데어 벗어지더라도 꼼 짝 아니하자는 것이다. 다만 앞에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 돌아가는 것을 보아서 몸의 방향을 바꾸어서 해가 정면으로 등에 비추이도록 할 뿐이었다.
 
36
감독하는 강아당이는 때때로 회초리를 들고 돌아다니면서 자세가 바르지 아니한 사람의 볼기짝을 후려갈겼다. 원효는 조금도 자세를 건들지 아니하였건마는 두 번이나 후려갈김 을 받았다. 딱 소리와 함께 눈물이 쏟아지도록 아팠다. 아플 때마다 정신이 쇠락하였다.
 
37
가끔 물에 들어가기를 허하였다. 맑은 물에 몸을 잠그고는 모래로 몸을 닦는 것이다. 이것도 머시기라고 한다.
 
38
해가 서산에 걸리면 강아리 쇠가 울고 바가(북)가 운다. 그 제야 수련하는 강아들은 배와 사타구니만을 가리우는 짧은 배두렁이를 입는다. 이것을 반다라라고도 하고 반다시라고 하여 '必'자를 쓴다. 그 입은 모양이 '必'자와 같단 말이다.
 
39
그러고는 당과 마당과 개천어염을 말끔하게 쓸고 닦고, 그 리고 나서는 강아밥이라는 것을 먹는다. 이것은 쌀과 개암 이나 도토리를 넣고 함께 끓인 죽이다. 개암이란 강아밤 또 는 바사밤이라고 한다. 바사는 해라는 신라말로 개암의 모 양이 해와 같기 때문에 이것을 강아신께 사나바(새나밤, 풋 밤─천신)로 바치는 것이다.
 
40
죽바다(버치)에 죽을 담는 것은 먼저 강아신 앞에 놓았다가 여럿이 해 모양으로 둥글게 돌아앉아서 보시기에 받아서 머 리 위에 이었다가 먹는 것이다. 먹는 젓가락은 바사라고 하 여 보삽나무 가지로 만든 것이다. 보삽나무는 잎이 둥글한 나무이니 싸리도 바사라라고 한다.
 
41
술가라(술그릇─숟가락)는 물이나 국물을 먹는 것이다.
 
42
강아신, 즉 방아신, 방상아신께 바치는 음식은 바사나무를 때어서 끓인다. 사바, 즉 섶으로도 대용하고 바사라, 즉 싸 리로도 대용한다. 싸리의 싸자는 된시옷이 아니라 된비읍이 다.
 
43
죽을 다 먹고 물을 마신다. 이 경우에는 물을 술이라고 한 다. 그리고도 보시기와 바사라와 숟가락을 깨끗이 부시어서 제가끔 제자리에 간수한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가나라사(거 닐어서)를 한다. 가나라는 것은 당을 싸고 빙빙 도는 것이 다. 돌면서 입으로 '가나라사'를 부른다.
 
44
"가나라사 가나라사."
 
45
하고 외우며 당을 싸고 도는 것이다. 대개는 백 번을 돈다.
 
46
신관(神官)이 앞을 선다. 앞을 서는 것을 가사라(구실)라고 한다. 신관이 '가나라(하나라)'하고 먹이면 일동은 '가나라사' 하고 부르며 뒤를 따르는 것이다. 해가 넘어가고 어두움이 오니 해를 부르는 것이다. 가나라사는 해다. 어서 해가 떠올 라 오시라는 뜻이요, 어서 세상을 밝히라는 뜻이다.
 
47
"이어라사."
 
48
하고 구실이 부르는 것은 열 번째 돌아온 때다. 그러면 일 동도,
 
49
"이어라사."
 
50
하고 받는다. 이어라사라는 것은 아아라사로 나고 나라, 즉 생생(生生)이란 뜻이다. 아는 응아로 난단 말이요, 대(代)란 말이다. 이어라사는 끊임없이 나고 나라는 축수다.
 
51
"사마라."
 
52
하고 구실이 먹이는 것은 스무째 도는 때다. 이때에는 소 리를 내지 아니하고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아니한다. 입을 다 물고 숨으라는 뜻이다. 어두움의 신을 피하는 뜻이다.
 
53
"사랑아."
 
54
이것은 서른이다. 여기서 둘씩 짝을 지어서 춤을 춘다.
 
55
"마가라."
 
56
마흔이다. 일동은 팔을 벌리고 달음질을 한다. 떠오르시는 해를 마중하라는 뜻이다. 해의 밝음을 사모함이 더욱 간절 함을 표함이다.
 
57
"사아나."
 
58
쉰이요, 쉬란 말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주저앉는다. 사는 서라, 아나는 낮추라는 뜻이니 사아나는 앉아다. 가는 사람 들이 쉰다는 뜻도 되지마는 해가 어디로 다른 세상으로 가 지 말고 언제까지 이 세상에 계시라는 뜻도 된다.
 
59
"아아사나."
 
60
예순이다. 아아는 언제까지라는 말이요, 사나는 상쾌하단 말이다. 사나사나는 아름답고 생기있고 힘있단 말이다.
 
61
"나라가나(일흔)."
 
62
"아아다나(여다니)."
 
63
"아가나라(아흔)."
 
64
가 지나가고 점점 걸음이 빠르고 소리가 빠르다가 구실이,
 
65
"마마라."
 
66
하고 소리를 지르면 일동도,
 
67
"마마라."
 
68
하고 화하는 것이다. 머물라는 뜻이요, 백이라는 뜻이다.
 
69
원효도 숨이 차고 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아뜩아뜩할이만 큼 기운이 진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휴식이 있는 것이 아 니다.
 
70
사람들은 개천에 내려가서 몸을 물에 담그고,
 
71
"아하바라바다라, 아하바라바다라."
 
72
하고 소리를 지른다. 몸이 바래와지라 함이다. 바래운다 함 은 더러운 것을 다 씻어 깨끗하게 희게 한다는 말이다. 그 리고 물에서 올라오면 당마당에 큰 강아라불을 피워 놓고, 그것을 등을 지고 둘러앉는다. 앉는 모양은 아까 해를 등지 고 앉은 모양과 같다.
 
73
"강아라, 강아라, 강강 상아라."
 
74
"방아라, 방아라. 방방 방아라."
 
75
를 목청껏 부른다. 가와 바는 다같이 해란 말이다. 가는 옛 날 말이요, 바는 신라말이었다.
 
76
"개어라, 개어라. 개어개어 새어라."
 
77
"바가라, 바가라. 바가바가 바가라."
 
78
라는 것으로 다 해가 나라는 뜻이다.
 
79
개인다는 것이나 새인다는 것이나 다 해뜨라는 뜻이요, 바 가라는 오늘날 말로 밟아라다.
 
80
사람들은 소시를 지르는 동안에 졸리게 된다. 구실은 연해 몽둥이를 들고 돌면서 볼기를 때리고, 그러다가는 또 물에 들어가고 또 불을 쬐고 또 망아마(맴)를 돌고 이것을 한없이 반복하는 동안에 달이 지고 별이 숨고 바나가사(해 뜨는 곳 이라는 뜻)가 불그레하게 된다.
 
81
새벽 바람은 산산하다.
 
82
"강아라 방아라."
 
83
를 백번 천번 부를 때매다 구실이,
 
84
"마마라."
 
85
"다다라."
 
86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구실이 다시 '가나라사'하고 시작할 때까지 잠깐 쉬어서 천지가 고요하여진다.
 
87
이렇게 잠잠할 때면 산에 우는 새와 짐승의 소리도 들리고 여흘여흘 흘러가는 물소리도 들린다. 또 여기서 조금 떨어 져서 개천 상류에 진을 친 여자들이 가나라사를 부르는 소 리가 청승스럽게 들려 온다.
 
88
해가 올라오면 일제히 해를 향하여서 절을 한다. 절하는 법은 두 무릎을 세우고 무릎 사이를 벌리고, 두 주먹으로 땅을 짚고 네 번 몸을 숙이는 것이다.
 
89
이러고 나면 또 쓸고 닦고 강아라불을 치우고는 강아밥을 먹고 그리고는 또 거닐고, 또 볕을 쬐고 이것을 쉬임 없이 하는 것이다.
 
90
그 모양으로 나나, 즉 넷넷, 즉 일곱 날 계속하는 것이다.
 
91
그 동안을 못 참는 자는 내어쫓는 것이다. 한 이레를 무사 히 치르면 나흘을 쉬는 것이다. 그동안은 날마다 해가 져서 부터 해가 뜰 때까지 자는 것이다. 원효는 무론 한 이레를 잘 견디었다. 그러나 몽둥이로 볼기를 맞은 자리가 굳은 살 이 박일 만하였다.
 
92
쉰 지 넷째 날 저녁에 수련하는 사람들은 머리 정수리를 동그랗게 밀고 주홍칠을 한다. 이것을 방아 또는 바고라고 한다. 해를 인다는 뜻이다.
 
93
거기서 오리나 되는 가상아당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는다.
 
94
강아당 수련이 끝나고 배코를 친 남자들은 이마에 곤지(가 나다)를 찍은 여자 수행자와 함께 섞일 자격을 얻는다. 여자 들은 배코를 치는 대신 에 곤지를 찍는다. 남자가 '가나라사 '를 부르는 대신에 여자는 '가나다'를 부른다. 고니란 가나다 란 말이요, 가나다는 해가 있는 데란 말이요, 또 하늘에 있 는 달이란 말이다. 여자가 곧 해이기 때문에 여자는 달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말로는 여자나 어머니를 '바' 또는 '바바'라고 하고 남자나 아버지를 '다' 또는 '다다'라고 한다. 달(月)이란 말이다.
 
95
원효는 이레 수련에 살이 쭉 빠진 것과 같이 모든 잡념이 소멸된 것 같았다.
 
96
석양 길을 남녀 이십여 명이 어우려져서 걸어가건마는 아 무도 이성이 옆에 있다는 감각을 가지는 것 같지 아니하였 다. 다들 길만 보고 걸었다. 이레 동안은 벙어리 생활을 하 였으므로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마치 말을 온통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마는 앞에 뒤에 함께 가는 남녀들이 다같 이 정다왔다. 모두 형제와 같았다.
 
97
가상아당은 강아당보다 작으나 더 깊숙하고 엄숙하였다.
 
98
둥근 지추, 둥근 기둥에 모두 둥근 재목을 썼다. 해의 둥글 음을 보인 것이다. 당아 앞에는 홍살문이 있었다. 두 기둥을 높이 세우고 긴 도리[月]를 얹고 그 위에 궁형(弓形)의 널쪽 을 붙이고, 그 널쪽에서 방사상(放射狀)으로 여덟 개 살을 뻗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통틀어 붉은 칠을 하였다. 뜨는 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달이 해를 인 것이다.
 
99
궁형으로 된 것을 바(해)라고 하고 바에서 뻗친 살을'바가 라'라고도 하고, '사가라'라고도 한다. 사가라는 상아라로서 광선이란 뜻이다. 집을 지을 때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거 는 것도 이것이다. 이것은 일월신을 함께 상징한 것이어서 달이 해를 인 것을 표한 것이었다.
 
100
원효의 일생을 거느리고 온 강아당 가사라(구실)는 일행을 다랑아(홍살문) 밖에 머무르게 하고 자기만 손과 발과 입을 씻고 당아 안으로 들어갔다. 이 사람들의 명부를 바치고 문 에 들어갈 허락을 청함이었다.
 
101
그동안에 원효의 일행은 홍살문 앞에 강아앉음으로 앉아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해가 산을 넘어서 골짜기에 는 안개가 돌고 산머리에만 자주빛 노을이 섰다.
 
102
이윽고 자주 방아라에 누런 방아마를 입고 상아머리한 가 상아 둘이 나와,
 
103
"아라."
 
104
하고 고운 소리로 부른다. 오르라는 말이다. 다 열 칠팔세 의 어여쁜 가상아다.
 
105
방아마라는 것은 신라 사람의 아랫도리 옷으로 치마다. 여 자는 자주나 다홍을 쓰고 남자는 누렁이나 퍼렁을 쓴다. 마 란 옷이란 말이요, 방아는 해의 자손이란 말이다.
 
106
백제에서는 당아마 당오리라고 한다. 이것이 됴마, 됴고리, 즉 치마 저고리의 어원이다.
 
107
상아머리는 일광이 흐르는 것 모양으로 착착 빗어 내린 머 리다. 머리를 해로 보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광선으로 보 는 것이다.
 
108
가사아당에는 스승을 제하고는 모든 것을 가상아라는 여자 들이 하고 있었다.
 
109
원효 일행은 두 가상아의 인도로 당아에 들어갔다. 마당에 는 황토와 자갈을 깔았다. 자갈은 해도 되고 달도 되는 것 이다. 해로 볼 때에 공아(공기)가 되고 달로 볼 때에 둉아 (조아)가 되는 것이다. 황토는 햇빛이다.
 
110
원효 일행은 신전에서 처음 들어온 의식을 행하고 마아마 를 먹었다. 이것은 멀건 미역 국물에 끓인 아바미음이었다.
 
111
바는 벼요 아바는 조다. 조는 백제말이니 다음에 온 것이다.
 
112
미음을 먹는 잡들이는 죽을 먹는 잡들이와 다름이 없었다.
 
113
식후에 거니는 것도 같았다. 가상아당을 싸고 백번 도는 것이나 '강강 상아라'를 천번씩 부르고 천번이 열이 되면 '자 라'라 하고 '자라'가 열이 되면 '가라'라 하고 '가라'가 열이 되면 '아아'라고 하여 한 나흘에 억번을 부르기를 목표로 하 는 것이다.
 
114
여기서 강아당과 다른 것은 남녀가 다 눈을 봉하는 것이 다. 이것을 상아강아라고 한다. 남녀 다 눈을 봉하고 가상아 들의 음악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원 효도 눈을 감고 그것을 촛밀로 봉하였다. 이 소경의 무리를 인도하는 것은 가상아들의 손이었다. 무론 말은 없었다. 오 직 손을 잡아서 끄는 것이었다. 잠시도 쉬는 동안은 없었다.
 
115
졸기도 허하지 아니하였다.
 
116
원효의 손을 끄는 손은 언제나 같은 손인 것 같았다. 그 손은 싸늘하였으나 무척 작고 부드러웠다. 원효는 상아사사 마의 누이 아사가가 아닌가 하였다.
 
117
첫 나흘이 지나는 새벽에 일동은 더욱 기운을 내어서 거닐 고 소리하고 춤을 추었다. 바라, 바가(북), 방알(방울) 소리 가 온산을 흔들었다. 원효는 정신이 황홀함을 깨달았다. 여 기가 어딘지 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을 지경이었 다.
 
118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었다. 이때에 눈이 열린다 는 것이다.
 
119
"아아사가."
 
120
하는 소리가 나자 일동은,
 
121
"아아사가."
 
122
하고 힘껏 소리를 지르고 머물렀다. 억이 찬 것이었다. 억 년 창성하라는 축원도 된다. 아아는 이야도 되고 이요도 된 다. 사가는 '서서가'라는 뜻으로 흥왕하라는 말이다. 성하다 는 뜻이다.
 
123
일동은 눈을 봉한 밀을 떼고 개천에 들어가서 미역을 감았 다. 미역을 감고 올라와서 옷을 입고 아침 해가 오르기를 기다렸다.
 
124
동천에 붉은 해가 솟았다. 일동은 강아앉음을 앉아서 네 번 절하였다. 나흘 만에 뜬 눈으로 바라보는 해는 마치 평 생에 처음 보는 것인 듯하였다. 그렇게도 크고 그렇게도 선 명하고 그렇게도 고마웠다. 과연 모든 생명의 원천인 것 같 았다. 이 날 아침에 비로소 스승이 여러 사람을 보았다. 스 승은 백발 노인이었다. 낯은 불그레하고 눈이 빛나고 눈썹 과 귀털이 길게 뻗었다. 어느 모로 보나 정기 있는 사람이 었다.
 
125
스승은 눈을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눈찌를 보아서 그 들의 마음이 수련된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 안광이 심이 밝고 날카로와서 마주치면 눈이 부시고 무서웠다. 원 효도 과연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126
"사상아."
 
127
하고 한탄하는 것이다. 사상아는 스승이란 말이다.
 
128
스승은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뜻을 물었다.
 
129
"가가바사가."
 
130
하고 스승이 부른 것은 열 여덟살이나 되어 보이는 소년이 었다. 눈초리가 위로 올랐고 코가 우뚝하고 입이 한일자로 꽉 맺히고 얼굴이 검푸렀다.
 
131
"바아."
 
132
하고 그 소년이 일어났다. '바아'라 함은 보입니다로 '예'하 는 뜻이다.
 
133
"고구려를 멸하여 나라와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 하오."
 
134
가가바사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5
"가가마나바."
 
136
스승은 다음 사람을 불렀다. 마나바라는 사람은 삼십여나 되었을 수척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7
"앞일을 내다보고 병 고치는 힘을 얻으려 하오."
 
138
다음은 바가가나가라는 소녀였다. 장히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39
"노래와 거문고 명인이 되려 하오."
 
140
이 모양으로 그들은 스승 앞에서 각각 소원을 말하였다.
 
141
혹은 점을 배우겠다는 사람, 혹은 의술을 배우겠다는 사람, 혹은 제 병을 고쳐서 수명 장수하겠다는 사람, 혹은 아들이 없으니 귀한 아들을 낳고 싶다는 여자, 혹은 큰 부자가 소 원이라는 사람, 혹은 축지술을 배워서 걸음을 잘 걷기를 바 란다는 사람, 혹은 칼을 썩 잘 써서 큰 장수가 되겠다는 사 람, 혹은 구름과 바람을 마음대로 일으키고 싶다는 사람, 혹 은 재주가 둔하니 총명하고 싶다는 사람, 혹은 부모의 원수 를 갚겠다는 사람, 실로 가지각색이었다.
 
142
그중에 한 사람은 나이 사십이나 넘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으로서,
 
143
"이몸은 한 나라를 편안하게는 못 하여도 내 사는 동안 하 나라도 편안하게 할까 하오."
 
144
이러한 대답을 하였다. 이 대답에 스승은 자리에서 일어서 부채를 한 번 들었다.
 
145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매우 준수하 고 점잖은 사람이었다. 이름은 가나사가라라는 사람이었다.
 
146
스승은 매우 만족한 모양으로,
 
147
"너는 장차 나라를 크게 돕는 사람이 되리라. 한 분 밑이 요, 만 사람 위이 되리라."
 
148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위에 둘러선 가상아들은 소리를 길 게 뽑아,
 
149
"여바라 여바라 이야라사 이야라사 디아디아 디아디아 디오다 디오다."
 
150
하고 찬송하였다. 지와자 지와자로 천년 만년 살라는 뜻이 다.
 
151
마침내 원효의 차례에 왔다.
 
152
"사당아앙아[曙幢元曉]."
 
153
스승은 이렇게 원효를 불렀다.
 
154
"바아."
 
155
원효는 대답하고 일어났다.
 
156
"보아하니 사문인가 싶거든 어인 일로 가상아당에를 왔 노?"
 
157
스승은 이렇게 물었다.
 
158
"보시는 바같이 이몸은 사문이거니와 파계하고 죄를 소멸 할까 하고 왔소."
 
159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60
"소원은 성취하였나?"
 
161
스승이 이렇게 묻는 말에 원효는 잠깐 말이 막혔다가,
 
162
"한 이레 더 하려오."
 
163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효의 대답에 대하여는 스승은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지나쳐 버렸다.
 
164
끝으로 불린 이는 상아아사가였다.
 
165
그는 이미 가상아로 있건마는 역시 이번 수련에도 참가한 것이었다.
 
166
"아사가."
 
167
하고 스승이 부르매 아사가는 두 손을 들어 방아라식 합장 을 하고 또렷또렷한 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168
"젓사오대 아사가는 이 앙아(아앙아) 수련을 마치고 급제하 는 남자와 배필이 되어서 우리나라에 기둥이 될 아들을 낳 고 싶소."
 
169
불과 십 육칠세 되는 계집아이가 이런 소리를 하여도 이 좌석에서는 조금도 어색하지 아니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강아당 수련과 가상아당 수련을 마친 그들은 벌써 세상 사 람들은 아니었다. 이제 세상에 내려가면 다시 세상 사람으 로 돌아갈 사람들도 있겠지마는 당장에도 모든 물욕을 잊은 사람들이었다. 옆에 젊은 이성이 있어도 거기 대하여 무슨 욕심이 일어나든가 그런 일은 드물었다. 만일 이러한 거룩 한 자리에서 더러운 마음을 발한다면 큰 버력이 내리는 것 이다. 벌을 주기 위하여서는 범도 있고 뱀도 있고 무서운 귀신도 있다.
 
170
그러나 이러한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여러 날 죽과 미 음을 먹고 또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춘 그들은 벌써 육체를 쓴 사람은 아니요, 일종의 신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과년 한 처녀가 이런 소원을 말하는 것도 극히 자연스러웠다. 부 끄러움이라든가, 미안이라든가, 그런 것은 이 자리에는 합당 치 아니하였다. 신의 앞에 벌거숭이 아들이요, 딸이었다.
 
171
원효도 이때에 비로소 조상 적부터의 수련이 무엇인지를 안 것 같았다.
 
172
이 일이 있은 뒤 한 나흘은 음악의 날이었다. 악기를 타기 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북을 치는 이는 북을 치 고 바라를 치는 자는 바라를 쳤다. 방울을 흔드는 것도 음 악이요 바가지를 긁는 것도 음악이었다. 원효는 크고 작은 뒤웅박을 두드려서 가락을 맞추었다. 합주도 하고 독주도 하였다. 그리고 춤도 추었다. 스승은 때때로 나와서 이것을 들었다. 누구 하나를 불러내어서 시켜 보기도 하였다.
 
173
"마음이 들떴어."
 
174
이러한 책망을 하는 수도 있었다. 그것은 악기 울리는 소 리를 듣고 그 사람의 마음을 책망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들 떴다, 흩어졌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스승의 책망이었다. 스승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175
말이 적으나 한마디라도 하는 날이면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176
"지금 무엇을 듣고 있었느냐."
 
177
하고 스승이 문득 제자들에게 묻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대답이 가지각색이었다. 혹은 바람이 소나무에 우는 소리를 들었노라 하고 혹은 물소리를, 혹은 새소리를 들었노라 하 고 혹은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노라고 대답하였다. 저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스승은 들을 뿐이요, 더 말이 없었다.
 
178
스승은 원효더러 무엇을 들었느냐고 물었다. 원효는,
 
179
"내 숨소리를 들었소."
 
180
하고 대답하였다.
 
181
스승은 잠깐 눈을 크게 떴다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끄덕하 였다. 상아아사가는,
 
182
"내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소."
 
183
하였다.
 
184
스승은 이러한 말로 각 사람의 경계를 알아보는 동시에 각 사람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었다.
 
185
한 나흘이 끝나는 날 스승은 원효와 아사가와 가나사가 세 사람에게 앙아당에 올라갈 것을 허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서 소원대로 하라 하였다.
 
186
강아당에서 열 여섯 사람이던 것이 이제 세 사람만 남은 것이었다.
 
187
원효 일행은 곧 스승께 하직하고 가상아당을 떠났다. 앙아 당은 여기서도 이십 리나 올라가서 바가산 상상봉에 있었 다.
 
188
미음만 먹은 몸이언마는 산을 오르기에 조금도 힘이 들지 아니하였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일행이다. 안내하는 사람 도 없고 짐을 나르는 사람도 없었다. 길이라고 있는 듯 만 듯. 시냇물도 끊어지고 키 작은 향나무들이 땅에 길 뿐이었 다. 새도 없었다. 있는 것은 구름과 바람뿐이었다.
 
189
산 상봉에 조그마한 돌성이 있었다. 둥그스름하게 둘러쌓 았는데 터진 목은 서로 어긋먹어서 구부러져 들어가면 밖이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만 보이게 되었다. 주위가 이십 보나 될까 이른바 멍에담이다. 어느 성문도 이러한 것이다.
 
190
용의 발톱을 모상한 것이다.
 
191
원효와 아사가와 가나사가와 세 사람은 우선 물 있는 데를 찾았다. 성에서 북쪽으로 이십여 보나 내려가서 바위 밑에 조그마한 샘이 있고 나무 바가지가 있었다.
 
192
원효는 샘물을 떠서 손발을 씻고 양추를 하여서 몸을 가아 말았다. 다른 두 사람도 그러하였다. 그리고는 몸에 지니고 온 바가지에 물을 한 그릇씩 떠 가지고 올라와서 성에 들어 왔다. 이 성을 시로라 하고 시로가 있는 봉을 시로봉이라고 한다. 시로부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시로는 앙아신을 아 라가마하는 곳이기 때문에 앙아시로, 또는 이야시로라고도 부른다.
 
193
세 사람은 제단 위에 물그릇을 올려놓았다. 이 물을 상아 사(정화수)라고도 하고 상아나사라고도 한다.
 
194
앙아신은 허공신이요 창조신이기 때문에 아무 형상이 없 다. 시로 정면에 우뚝 선 동그스름한 바윗돌이 신주다. 이 바위는 사나바위(선바위)라고 한다.
 
195
세 사람은 이 바위 앞에 엉금엉금 기어가서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196
"앙아라, 앙아라."
 
197
하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을 한없이 부르는 동안에 해가 지고 밤이 가고 또 해가 뜬다.
 
198
여기서는 하루 세 번 물 밖에는 먹는 것이 없다. 물 세 모 금으로 사는 것이다.
 
199
밤이 되면 바람이 불어서 모래를 날려다가 성을 때렸다.
 
200
그 소리가 우닥딱 뚝딱 심히 요란하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높은 산의 바람은 추웠다. 새벽이 되면 몸이 떨리고 입이 얼어서 소리가 아니 나올 지경이었다.
 
201
원효와 아사가는 용히 견디었으나 가나사가는 심히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는 이러한 고생이 처음인 모양이었다.
 
202
처음 이틀 동안은 무척 허기가 져서 원효도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가나사가는 사흘째 되는 아침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서 먼저 내려가고 시로에는 원효와 아사가와 두 사람 만 남았다.
 
203
'죽든지 앙아신을 뵈옵든지'하는 것이 이 수련의 목표다.
 
204
세 사람이던 것이 단둘이만 되니 더욱 고요하였다. 캄캄한 밤에 불기운도 없는 데서 부르는 주문 소리가 모깃소리와 같이 가늘었다. 제가 부르는 소리가 제 소리인지 누구의 소 리인지 몰랐다.
 
205
그러나 나흘째 새벽에 원효는 목속에서 새로운 기운이 발 함을 느꼈다. 음성이 커지고 몸이 바로 서고 눈이 밝아짐을 느꼈다. 원효는 소리를 높여서 주문을 외웠다.
 
206
"心身客塵徒北永滅, 便能內發寂靜輕安."
 
207
원효는 원각경(圓覺經)을 생각하였다. 원효는 더 주문을 외 울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가만 히 있고 싶었다. 그러나 곁에 있는 아사가는 심히 고통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지금이 고작으로 허기가 지고 기운이 빠 지는 모양이어서 꼬박꼬박 졸리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 다.
 
208
원효는 아사가를 도와주는 길이 그와 함께 주문을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소리로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 다. 원효의 소리에 아사가는 적이 기운을 얻는 모양이었다.
 
209
마지막 밤이 왔다. 이 밤을 지나면 나흘이 차는 것이었다.
 
210
무사히 나흘을 채우면 어디선지 모르게 앙아신이 나타나서 무슨 글을 주고 밥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앙아신 의 벌을 받으면 당장에 큰일이 난다는 것이다.
 
211
이날 밤에는 뇌성벽력을 하였다. 귀청이 찢어지도록 우레 가 울고는 눈이 부시게 번개가 번쩍거렸다.
 
212
이러기를 한참이나 한 뒤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성 안에 쏟아진 빗물이 미처 빠지지 아니하여서 두 사람의 몸 이 허리까지 잠길 때도 있었다. 그래도 아사가는 까딱도 아 니하였다.
 
213
폭풍우는 지나가고 씻은 듯이 구름이 걷히고 유월 보름달 이 까만 하늘에 뚜렷이 걸렸다.
 
214
어디서 호랑이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점점 가까이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원효는 평생에 처음 느끼는 상쾌함을 맛 보았다. 자기의 마음은 모든 속박과 제한을 벗어나서 자유 자재로 허공에 떠 노니는 것 같았다.
 
215
원효는 옆에서 부덩부덩 애를 쓰는 아사가를 불쌍하게 생 각하였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서 그를 도와주었다.
 
216
새벽이 되었다. 동천에 붉은 기운이 돌던 지새는 달이 빛 을 잃었다.
 
217
이때에 아사가는 비로소 새 힘을 얻는 모양이어서 목소리 가 살아났다. 원효는 기뻤다.
 
218
해가 돋았다. 천지가 훤하여졌다. 상아사 물에도 빛이 들고 아사가의 맑은 얼굴에도 아침볕이 비치었다. 아사가라는 것 은 아침에 난 아이라는 말이어니와 오늘 아침의 아사가야말 로 아침의 아기였다. 그의 눈과 얼굴에서 금빛을 발하고 그 의 젖은 몸에서는 하늘의 향기를 발하는 것 같았다. 이때에,
 
219
"어마다야다(암, 좋다)."
 
220
하는 소리가 나며 센 수염 길게 늘이고, 소매 넓은 흙 베 옷을 입은 노인이 어여쁜 도령 둘에게 무엇을 들리고 시로 로 들어왔다.
 
221
원효와 아사가는 황망히 일어나서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 다.
 
222
"디아라, 디아라."
 
223
하고 동자 둘이 네 번 불렀다.
 
224
스승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225
"아마 장하다. 사십 년 만에 처음이다."
 
226
하고 늙은 스승은 대안과 유신이 앙아당 수련을 마친 뒤에 한 사람도 성공한 이가 없으매, 신라의 국운이 진하고 이 도통(道統)이 끊어질 줄 알았더니, 이제 너희 둘이 이 수련 을 마쳤으니 이에 신라의 국운이 흥황할 것이요, 또 이 도 통이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라 하여 무수히 치사하고 칭찬 하였다.
 
227
"자, 이제는 먹으라."
 
228
하고 동자에게 들리고 온 그릇을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
 
229
그것은 뽀얀 가루를 물에 탄 것이었다.
 
230
원효와 아가사는,
 
231
"고마우셔라, 고마우셔라."
 
232
하고 두 번 절하고 미음 그릇을 들어서 한입을 마셨다.
 
233
"그 맛, 그 맛!"
 
234
나흘을 굶은 끝이요, 또 아마 칡뿌리와 가얌 가루인가 싶 어 달콤하고 향기가 있어 그 맛이 비길 데가 없었다.
 
235
"이제 밥맛을 알았나?"
 
236
하고 스승이 웃었다.
 
237
"비로소 밥맛을 알았소."
 
238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239
"바른 도(道)를 모르고 바른 맛을 알 리가 있나. 세상 사람 은 밥맛을 모르고 물맛을 모르고 모든 맛을 모르고 살아가 는 거야. 이제 두 사람이 새로 났으니 천지가 새로 배판하 는 것이야. 두 사람이 아들딸을 많이 낳으라고. 앞으로 우리 나라에 일이 많으니 사람을 많이 기다려. 이 늙은이는 마음 놓고 가네."
 
240
하고 스승이 일어났다.
 
241
원효는 황망히,
 
242
"무슨 가르침을 나리시겨오."
 
243
하였다.
 
244
"원효대사여든 이 몸이 무엇을 가르치리. 화엄경 팔십 권이 나 팔만대장경이 모두 ' '자 하나에서 나온 것이야."
 
245
하였다. 이때에 아사가가,
 
246
"이몸은 어찌하올지."
 
247
하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매 스승은,
 
248
"지어미는 지아비를 따르는 것이야."
 
249
"이몸은 아직 시집가지 아니하여 지아비가 없소."
 
250
"하늘에서 정한 연분이니 틀릴 줄이 있으리."
 
251
"그대 마음에 먹은 사람."
 
252
스승은 두 사람에게 ' '자를 주필로 쓴 종이 조각 하나씩 과 미음 그릇을 주고 가 버리고 말았다. 미음 그릇은 소나 무 혹을 판 것이었다.
 
253
원효와 아사가는 스승이 가신 곳을 향하여서 무수히 절하 고 시로 안팎을 깨끗이 쓸고 씻고, 샘을 깨끗이 하고 마지 막으로 사나바위 앞에 앉아서 ' '신께 예배를 드렸다.
 
254
예배를 드리고 시로를 나서서 비로소 두 사람은 말을 하였 다.
 
255
"아사가."
 
256
"원효대사."
 
257
이것이 두 사람의 첫말이었다.
 
258
밥이 그렇게 좋던 것 모양으로 원효에게는 여자의 얼굴과 몸과 소리가 이대도록 아름답던가 하고 놀래었다. 아사가도 마찬가지였다. 원효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남자인 것 같았 다. 그렇게 서로 이성이 아름답고 그리웠다.
 
259
원효와 아사가는 바위에 걸터앉아서 마주보고 있었다.
 
260
하늘과 땅이 모두 새로운 것 같고 구름도 바람도 모두 새 로운 것 같았다. 수없는 산봉우리들이 발 아래 있고 먼 산 들은 파란 기운에 싸여 있었다. 여기저기 히뜩히뜩 강굽이 도 보였다. 더구나 어젯밤 비에 산천 초목이 일층 생기를 띠었다.
 
261
멀리 남쪽으로는 지금도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오랜 가뭄 으로 민정이 오오하던 때다. 흠씬 비가 와서 오곡이 소생하 였으면 하고 원효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262
구름 한점 없이 개인 하늘과 같은 마음으로 원효는 산천과 아사가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인제 젖었던 옷도 다 말랐 다. 따가울이만큼 볕이 내리쬐는 것도 유쾌하였다.
 
263
그동안에 더위도 추위도 배고프고 졸리던 것도 다 잊어버 렸다. 먹은 것이 없으니 대소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몸 은 마치 마른 나뭇개비나 바윗돌과 같이 된 것 같았으되 오 직 마음 속에 한 덩어리 불이 밝은 빛과 기운을 발하고 있 었다. 이 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고 또 꺼질 수 없는 불이었 다. 때를 따라서 그 불 기운이 욕심과 번뇌에 가리워 빛을 잃은 일은 있어도 천겁 흑암지옥에 묻어 두어도 꺼질 수는 없는 불이었다.
 
264
이 불은 저 해에서 온 불이요, 저 해와 한불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저 별들이 모두 해와 한불로 알고, 또 모든 생명 이 다 한불이라고 생각하여서 해를 '바'라고 하고, 불도 '바' 라고 하고, 사람의 혼도 '바'라고 하고, 머리도, 눈도 '바'라 고 하고, 곡식과 과일도 '바'라고 하고, 산과 벌도 '바'라고 하고, 생각하는 것도 '바'라고 한다. 모두 같은 불이요 같은 빛이라는 뜻이다. 바자에, 가나다라마바사아 등 소리를 붙여 서 구별하는 것이다. 특별히 어진 사람 귀한 남자를 '바가' 라고 하거니와 곧 빛의 움직임이란 말이니 잡된 것이 섞이 지 아니한 움직임, 즉 밝은 사나이라는 말이다. 어진 여자는 바바라고도 하고 바마라고 하니 밝은 빛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신라에서는 해가 여성이다. 그러므로 여자야말로 빛 이다.
 
265
이제 원효는 바가요 아사가는 바마다. 수련할 수 있는 수 련을 다 겪은 것이다.
 
266
원효는 아사가의 눈을 통하여서 그 속에 있는 불을 볼 수 있었다. 때 아니 묻은 숫처녀의 불이다. 이 세상에 있는 불 중에 가장 맹렬한 세력을 가진 불이다. 이 불은 한 불세계 (佛世界)를 지을 수고 있고, 또 살라 버릴 수도 있는 불인 동시에 또 사랑의 불도 되고 질투의 불도 될 수 있는 것이 다. 이 불 속에서 모든 중생이 탄생한 것이다.
 
267
불과 힘, 이것이 세계다. 태초에 허공이 있고 허공에 불이 있고 불이 움직이매 힘이 생기니, 비로서 남자가 생긴 것이 다. 불과 힘의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천지만물이 생기고 나 고 죽고 또 나는 것이다. 이것이 신라 사람의 우주관, 인생 관이다.
 
268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요, 죽는 것은 싫은 일이다. 사는 것, 나는 것, 있는 것은 다 기쁜 일이요, 아름다운 일이요, 찬송할 일이다. 그러므로 꽃은 찬송할 것이요, 처녀는 찬송 할 것이요, 젊은이는 찬송할 것이다. 혼인은 인생에 가장 찬 송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라 사람은 청년 남녀 의 사랑에 대하여서 극히 관대하다. 사랑은 신이다.
 
269
그들은 생(生)을 찬미하기 때문에 죽는 것을 더욱 미워하고 슬퍼하였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그들은 머리를 풀고 웃 통을 벗고 소리를 높여서,
 
270
"앙아, 앙아(아이고, 아이고)."
 
271
하고 앙아신을 부르는 것이다.
 
272
가져가는 사랑하는 이의 불을 도로 내어놓으라는 것이다.
 
273
그 컴컴한 허공은 만물의 어머니였으나 또한 만물을 도로 삼키는 입이었다. 그들은 앙아신이 낳기만 하고 죽이지 아 니하기를 빌지마는 앙아신은 들어 주지 아니한다. 이리하여 서 그들은 점점 앙아신을 미워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살 려 주시는 '바'신을 그리워한 것이었다. 하늘에 해, 땅에서는 박덩굴, 박덩굴은 어디까지든지 뿌리를 박고 어디까지든지 뻗어올랐다. 그리고 밤마다 꽃이 피어서 어두움을 비추고 주렁주렁 열매를 달았다. 열매는 많고 크고 해와 같이 둥글 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씨가 많았다. 그 열매는 그릇이 되 고 악기가 되고 장식이 되었다. 박은 신라 사람에게는 생명 의 풀이었다.
 
274
박씨를 땅에 심거서 싹이 나서 점점 뻗어서 하늘까지 올려 닿고 같은 씨가 수없이 쏟아진다. 이것이 부부의 소원이요 인생의 소원이다.
 
275
그들은 박뿐 아니라, 넌출지고 열매 많이 달리는 것은 다 사랑하였다. 머루, 다래 이런 것은 다 그들이 사랑하는 바 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는 바, 노, 실을 사랑하고 그 러한 뒤에는 땋은 것 낳은 것(방직)을 사랑하였다. 끊임없이 긴 것을 사랑한 것이다.
 
276
삼을 삼아서 기나긴 실을 만드는 것, 짚을 꼬아서 기나긴 동아줄을 만드는 것은 젊은 남녀의 감정이 가장 맞는 일이 었다. 그리고 술을 먹고 바라를 치며 소리를 하고 춤을 추 는 것은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어서 이 좋은 것은 모두 신께 바쳤다.
 
277
그러나 사람은 죽는다. 모든 생물은 다 죽는다. '망글어진' 것은 다 망가진다. 낳은 것은 다 가고 만다. 그들에게 죽는 다는 말이 없고 잔다고 한다. 죽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사람 죽은 집은 불살라 버렸다. 나중에는 무당이 와서 가심 을 하고 죽은 자의 의복과 물건을 불살라 버렸다. 집을 가 신 것이다.
 
278
사람이 죽어도 자식이 있고, 늙어서 죽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박덩굴이 죽어도 박씨가 수두룩이 남으면 안 죽은 것 과 같다. 자식 없는 사람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 되고 자식을 못 기르는 어미는 큰 죄가 수없는 사람이라고 본다.
 
279
그러므로 여자의 몸을 소중히 여겨서 남자는 여자를 욕하 거나 때리지 못하고, 여자에게는 낮은 말을 아니 쓴다. 여자 는 집에서 신을 제사하는 제관인 동시에 아들딸을 낳아 길 러서 씨를 번식하는 때문이다. 여자는 힘드는 일을 아니 시 키고 때묻은 옷을 입히지 아니한다.
 
280
안방은 거룩한 방이어서 바깥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들어 오지 못하고 여자가 해산을 하면 대문에 금줄을 늘여서 아 무도 출입을 못한다.
 
281
젊은 여자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늙은 여자라도 지극한 존 경을 받는다. 집안에서 마을에 제사를 드리는 이는 할미다.
 
282
할미에게는 무서운 힘이 있는 것으로 안다. 모두가 나고 사 는 것을 중심으로 된 인생관이요, 윤리다.
 
283
원효는 아사가를 앞에 놓고 조상들의 인생관을 생각하였 다.
 
284
"바마사."
 
285
하고 원효가 아사가를 불렀다. 바마사는 아가씨라는 말이 다.
 
286
"바아."
 
287
아사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았소'하는 말이니 '네'다.
 
288
"소원이 무엇이오?"
 
289
원효는 이렇게 물었다. 여러 날 말을 아니하고 지나니 말 이 잘 나오지를 아니할뿐더러, 하려는 말이 다 쓸데없는 말 인 것 같았다. 말에는 혼이 있어서 말 한마디마다 다 하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화가 된다고 한다. 복상스럽고 방정맞 은 것이 모두 말에 있다고 한다. 말이 족히 저와 남을 죽이 고 살릴 힘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마라'라고 한다. 입을 다물라는 말이다. 특별히 사람 죽은 집 같은 데서는 입을 다물라 한다. 무슨 수련에서나 '다마라'가 가장 큰 계(戒)가 되는 것이다.
 
290
원효는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농담도 잘하고 설명 도 잘하였다. 그러나 강아당에 들어온 지 세 이레에 완전한 다마라 생활을 한 원효는 입을 열어서 말 한마디 하기가 무 척 조심스러웠다. '머시기' '거시기' 소리를 말 허두에 먼저 하는 조상들의 심사를 알 수가 있었다. 머시기, 거시기는 목 욕재계다. '목욕재계하고'라는 이 말이니 허물 없으라, 바라 는 뜻이다.
 
291
아사가의 눈은 원효의 눈으로 향하였다. 맑고 아무 거리낌 이 없는 눈이었다.
 
292
"아사가, 소원이 무엇이오?"
 
293
원효는 또 한번 이렇게 물었다.
 
294
"가상아당에서 말한 대로."
 
295
아사가는 분명히 대답하였다.
 
296
"좋은 남편 만나 좋은 아들딸 낳는 것?"
 
297
"그러하오."
 
298
"마음에 둔 사나이가 있소?"
 
299
"있소. 원효사마요."
 
300
아사가의 이 말에 원효는 놀랐다.
 
301
"원효? 나?"
 
302
하고 원효는 놀라는 빛을 보였다.
 
303
"하늘이 정하신 배필이라고 아까 스승님이 말씀하셨소."
 
304
아사가는 의외인 듯한 표정을 짓는다.
 
305
"나는 사문인데."
 
306
원효는 이렇게 말하였다.
 
307
"요석공주 남편이신 줄도 아오."
 
308
아사가의 이 말에 원효는 또 한번 놀랐다.
 
309
"한 번은 파계를 하였지마는 두 번이야 파계를 하겠소?"
 
310
원효는 이렇게 말하였다.
 
311
"원효사마가 무엇이라고 하셔도 이몸이 한번 정한 뜻은 바 꿀 길이 없소. 지어미는 지아비를 따르라 하셨으니 하라시 는 대로 하겠으나 떠나가라고만 말으시오."
 
312
아사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313
"사문의 행색은 뜬구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정처가 없으니 어찌 함께 할 수가 있겠소? 그러니 나를 생각하시는 마음을 고쳐서 달리 좋은 선비(사나바)를 구하여 유자생녀하고 백년 해로하시오."
 
314
원효는 이렇게 끊어서 말하였다.
 
315
아사가는 원효의 말을 듣더니 말없이 빙그레 웃는다.
 
316
"왜 웃으시오?"
 
317
원효는 정색하고 물었다.
 
318
"원효대사만한 이가 눈앞에 있는 아사가의 마음을 모르실 리가 없거늘 시험을 하시는 것이 우스워서 웃소."
 
319
원효는 말이 막혔다. 원효는 승만여왕, 삼모, 요석공주 등 신라에서 으뜸간다는 여자들을 접하였으나 아사가와 같은 여자는 처음 본다 하였다. 이것은 범상한 여자가 아니요, 관 음화신이 아닌가 하였다.
 
320
원효는 얼마 동안인지 모르게 아사가를 바라보았다. 아사 가도 원효의 눈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피할 까닭이 없었다.
 
321
제 마음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까닭이다. 지음이 없는 까 닭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제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놓고 바라보는 심리였다. 속에 사특한 생각이 없는 까닭이었다.
 
322
"한두 사람의 어머니가 되지 말고 한 불세계의 어머니가 되시오."
 
323
원효는 한참이나 있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324
아사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많은 아들딸을 두 라는 말로 알았다. 구태여 파 묻을 필요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세상에서 제 몸을 의탁할 사람은 원효를 두고는 다시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디나 원효가 가는 데를 따라가고 원효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 만이라고 믿어서 큰 배를 탄 듯이 마음이 턱 놓이기 때문이 었다.
 
325
해가 어지간히 높이 올라온 때에 가상아 둘이 원효와 아사 가를 맞으러 올라왔다. 먹을 것과 갈아입을 옷도 가지고 왔 다.
 
326
가상아들은 원효와 아가사에게 공손히 절하였다. 이로부터 는 스승 대접이다.
 
327
원효와 아사가는 두 가상아의 마중을 받아 가상아당에 내 려오니 스승까지도 나와서 맞았다. 두 사람이 중도에 폐지 도 아니하고 호랑이한테 잡혀먹히지도 아니하고 어젯밤 뇌 성력에 벼락을 맞지도 아니하고 또 신인(神人)이 주신 바가 지를 지닌 것은 그들이 앙아 수련을 끝낸 성인(聖人)인 증거 가 되는 것이었다.
 
328
"얼씨고 좋을씨고 지화자 좋을씨고."
 
329
하고 가상아들은 두 사람을 싸고 돌며 신을 찬양하였다.
 
330
원효는 가상아당을 떠났다. 스승은 원효와 아사가를 데리 고 동구밖에 있는 집으로 왔다. 그 집은 원효가 한달 전에 하루 묵어 간 집이다. 사사마 소년이 원효를 접대하던 집이 다.
 
331
이날 밤에 이 집에는 큰 자노자(잔치)가 벌어졌다. 큰 잔치 라야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이 아니나, 신도의 거두와 불교의 거두가 의지가 상합하여서 금후로 신불 양교가 어떻게 조화 하여 갈 것을 의논하는 자리였고 아울러 가상아당 대선생이 원효에게서 화엄의 대설법을 받아서 불문에 귀의하는 자리 였다. 원효의 말에 의하면 고신도느 곧 고불(古佛)의 가르치 심으로 석가세존이 성도하신 것도 고불의 가르치심을 받으 심이니 고불은 곧 우리 조상이시오, 고불의 가르치심은 우 리의 말속에 있다고 하였다.
 
332
"참 옳은 말씀이오. 이제 환하게 알겠소."
 
333
하고 스승은 무릎을 치고 기뻐하였다.
 
334
저녁밥을 먹은 후에 원효와 상아 선생은 도학과 나라 일에 대하여서 여러 가지로 토론하였다.
 
335
도학에 대하여서 상아 선생은 풍류의 도가 점점 쇠하여서 하늘과 조상을 숭배하고 충효신용인의 도를 닦는 자가 줄어 가는 것을 한탄하고 불도를 닦는 자가 세상살이를 귀찮게 여기고 나라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저 한몸의 극락왕생만을 바라는 것을 책망하였다.
 
336
이에 대하여 원효도 동감의 뜻을 표하였다. 그리고 불교가 결코 현세를 무시하고, 저 한몸이 잘 되기를 바라는 교가 아닌 것을 말하였다.
 
337
"대승보살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오. 중생을 위하여서는 제 몸이 지옥이나 축생도에 들어가도 꺼리지 아니하는 것이 대 승보살행이오."
 
338
원효가 이렇게 역설하는 것을 듣고 상아 선생은,
 
339
"좋다."
 
340
하고 무릎을 치며 찬탄하였다.
 
341
"그러면 그렇지."
 
342
하고 상아 선생은 매우 기뻐하며 일어나서 붉은 보에 싼 책을 꺼내었다. 그것은 '가마나 가라나 마다'라는 책으로 '신 지'(神誌)라고도 하고 '신사'(神史)라고도 하는 책이다. 가나 다라마바사아 여덟 권으로 나뉘어 오늘의 한글과 같으나 받 침이 없는 글로 적은 것이다. 이글을 가나다라라고도 하고 가나라고도 하니 가나라 함은 하늘이란 말도 되고 나라라는 뜻도 되는 말이다.
 
343
이 속에 애초에 허공으로부터 천지가 배판하는 말이 적히 고 다음에는 가, 나, 라, 사(해, 밝음, 어두움, 생명) 네 분신 의 말씀이 적히고, 다음에는 마(미리, 용), 바(볏, 봉), 다 (달), 아(허공) 등 신의 말이 적혔다.
 
344
그리고는 사람의 첫 조상이신 이사나미나미고도, 이사나기 나미고도의 사적이 적히고 이러한 신들의 당일 차리는 법 과, 제사하는 법과, 제사할 때에 부르던 축문과 차려놓은 제 물과 또 남녀가 목욕재계하고 수도하는 법과 인생 생활에 필요한 근본원리, 삼백 예순 가지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최 치원이 지은 난랑비(鸞郞碑)에, "國有玄妙之道曰風流……設 敎之源. 備詳神史"라고 한 그 신사다.
 
345
상아 선생은 이 신사를 내어놓고 기운을 내어서 일변 읽으 며 일변 설명하였다.
 
346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어버이를 효도로 봉양하고, 사람 들과 믿음으로 사귀이고, 전장에 나아가서는 물러감이 없고, 살생을 하되 가리어 하라—아무리 불교기로 이밖에 더 나갈 수가 없지 아니하오? 만일 이대로만 하면 사후에 극락이 있 으면 극락에 나고 천당이 있으면 천당에 날 것이 아니오?
 
347
도는 스스로 분명하거늘 사람들이 제가 행하지 아니하고 무 슨 신통한 것을 구하니 어리석지 아니하오?"
 
348
상아 선생은 어성을 높였다.
 
349
"옳은 말씀이오."
 
350
하고 원효는 대답하였다.
 
351
"석가세존의 천언만어가 일언이폐지하면 비일공(空)자 하나 니 공이라는 것은 나를 비이게 한단 말이라, 속에 내가 가 뜩 차고야 충효를 어찌 행하며 신용인은 어찌 행하오. 한번 내가 공이라고 깨친 뒤에는 만행시삼매(萬行是三昧)라, 무엇 을 하나 다 도에 맞아 저절로 충효신용인이 되는 것이니, 내가 보건대 가상아 수련이나 앙아 수련이 무비 나를 비이 게 하는 것인가 하오."
 
352
원효의 이 말에 상아 선생은 부지불각에 일어나서 절하고,
 
353
"대사는 내 스승이시오."
 
354
하고 소리를 질렀다.
 
355
"옳소, 옳소. 좋다, 좋다. '나'라는 욕심을 두고 백년 수련을 하기로니 도가 통할 리가 있겠소. 아 크고 크다. 참 크다.
 
356
참도란 참말 크다."
 
357
상아 선생은 이렇게 찬탄하였다.
 
358
그러고는 손녀 아사가와 손자 사사마를 불러 새로 원효에 게 절하게 하고,
 
359
"너희는 평생에 원효대사를 스승으로 모셔라."
 
360
하고 명하였다.
 
361
아사가와 사사마는 기뻐하였다. 아사가와 사사마는 스승에 대한 예로 원효에게 절하였다.
 
362
원효는 두 남매의 절을 막지 아니하였으나 마음에 심히 괴 로웠다. 그것은 원효가 용신당 수련에서 깊이 저를 반성하 면 반성할수록 자기는 아직 남의 스승이 될 수 없음을 느낀 까닭이었다.
 
363
"내가 무엇이 남보다 나아서 스승이 되겠소?"
 
364
원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들은 겸사로 알았으 나 원효로서는 진정이었다.
 
365
"천만에 말씀이시오. 대사로 말씀하면 이름이 천하에 진동 하셨거든."
 
366
상아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367
"그것이 다 뜬 이름이오."
 
368
"그럴 리가 있소. 당나라에까지 이름이 높으시고, 진덕여왕 께오서도 대사를 스승으로 존경하셨거든, 이 늙은 것이 눈 이 어두워서 누구신지 몰라보았지마는."
 
369
상아 선생은 더욱 원효를 칭송하였다.
 
370
"헛된 이름은 높을수록 부끄러운 것이오. 어떻게 하면 이 헛된 이름을 소멸할까 하고 떠난 길인데 이제 또 손자 손녀 를 맡으라 하시니 진실로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소."
 
371
원효는 얼굴과 음성에 참괴한 빛을 띠었다.
 
372
"겸겸군자(謙謙君子)라, 좋다."
 
373
상아 선생은 또 무릎을 쳤다.
 
374
"아니오."
 
375
하고 원효는 앉음앉음을 고치며,
 
376
"조금도 겸사가 아니오. 스승께 거짓말을 사뢸 리가 있으리 까. 앞으로 몇 해 동안 바람같이 떠다니며 마음을 닦으려 하오. 만일 이몸이 남의 스승이 될 만하게 되거든 따님과 아드님을 부르오리다. 그동안 글 공부나 시키시오."
 
377
하고 원효는 이곳을 떠났다. 언제까지나 따라나오는 두 소 년소녀를 산모퉁이에서,
 
378
"그만 들어가거라."
 
379
하고 명하였다.
 
380
"스승께서 부르실 때까지 저희들은 무엇을 하오리까."
 
381
아사가가 두 손으로 읍하고 이렇게 원효에게 물었다.
 
382
"할아버지 늙으시고 어머니 병드셨으니 지성으로 시봉하여 라."
 
383
"도를 깎는 일은 어찌하오리까."
 
384
사사마가 이렇게 물었다.
 
385
"부모께 효도하는 것이 도니라."
 
386
이것이 원효의 대답이었다.
 
387
"효도의 길은 어떠하나이까."
 
388
아사가가 물었다.
 
389
"그때그때 네 스스로 생각하면 알리라. 마음속에 내가 없고 오직 부모만 있으면 효도니라."
 
390
원효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391
"스승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392
사사마가 물었다.
 
393
"중생이 부르는 데로, 발이 가는 데로."
 
394
원효는 두 제자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395
"언제 저희를 불러 주십니까."
 
396
아사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397
"제비는 봄에 오고 기러기는 가을에 가느니라. 잘들 있거 라. 때가되면 내가 너희를 찾을 수도 있고 너희가 나를 찾 을 수고 있을 것이다."
 
398
하고 원효는 아사가와 사사마의 머리와 등을 만지고는 뒤 도 아니 돌아보고 걸어갔다. 바람결에 원효의 베장삼이 펄 펄 날리는 것을 두 남매는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399
더구나 아사가는 원효가 떠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설었다.
 
400
빈 산속에 단둘이 여러 날을 같이 지낸 것은 비록 젊은 이 성이 아니라도 잊히지 못할 깊은 정이 들 것이다. 하물며 사모하는 이성이랴. 아사가는 그것이 여자로서 남자에게 대 한 사랑만이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여도, 그래도 그것은 아사 가의 남성에 대한 첫정임에 다름이 없었다.
 
401
"누나, 그만 들어가."
 
402
하고 소매를 끄는 사사마에게,
 
403
"나는 언제까지라도 여기 있고 싶다."
 
404
한 아사가의 대답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405
사사마는 놀라는 눈으로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까닥까닥하여서 동정할 수가 있었다.
 
406
"여기 서 있으면 무엇하오?"
 
407
"그도 그렇지."
 
408
두 사람은 원효가 사라진 방향을 향하여서 한번 절하고 집 길로 돌아섰다.
【원문】용신당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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