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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이 결혼한 것은 1927, 8년경으로 그의 나이가 그때 서른을 썩 넘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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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峴(아현)에 新居(신거)를 장만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와 이웃하여 이은상이 살고 있어서 이은상을 통하여 염상섭의 신혼생활의 이면상이 끊임없이 세상에 전파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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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는 상섭이 제 새 안해를 때린다는 둥 싸움이 잦다는 둥 별의별 뉴우스가 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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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상경하여 안서와 함께 그 신혼 댁을 찾은 일이 있었다. 그때는 나는 안해를 잃고 독신생활을 하던 때로서 서른이 지내서 안해맞이를 하고 살림을 하는 상섭의 살림 모양이 그저 아늑하고 부럽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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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을 통하여 전파되는 모든 신혼생활의 잡음도 30이 지나서 결혼한 사람의 당연한 의처증이려니 이렇듯 간단히 보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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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번째 결혼을 한 뒤 무거운 불면증에 걸려서 그것을 치료하려 상경하였다. 그때는 안서는 樂園洞(낙원동) 어느 여관에 살고 있는 때였다. 안서는 고깃데상의 즐거운 시절도 며칠을 못 지내서 끝장을 막고 서울에 두 채 장만했던 집도 다 없애 버리고, 실의의 외로운 몸을 낙원도 어떤 여관에 의탁하고 에스페란토 강습의 약간한 수입으로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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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서가 내게 대해서 매우 흥분된 태도로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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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안서는 지난날 고깃데상 시절에 염상섭 등을 술잔이나 먹였으니까 안서의 단순한 해석으로 자기는 상섭 등이 마땅히 그것을 신세로 알아야 할 것 인데도 불구하고 상섭은 그 신세를 원수로 갚아서 안서를 주인공으로 한 무슨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분하여 못 견디겠으니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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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마침 동아일보에 신년 현상소설에 고선의 책임을 지고 책상머리에는 원고 뭉텅이가 산적되어 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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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응응 해 두었더니 안서는 무슨 잡지를 내게다가 제공하며 상섭의 문제의 소설이 있으니 읽어 보고 대책을 강구해 달라는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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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 동아일보의 현상 모집은 그 금액에 있어서 단연 고액이었던 관계로서 응모자가 놀랍게 많았다. 400편이 넘는 그 많은 응모 작품을 고선하다가 그것을 그냥 소하물로 부치고 나는 뒤따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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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서는 정거장까지 따라 나와서 꼭 복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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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집으로 돌아오니 지난봄 결혼한 내 안해는 곧 그의 첫딸을 낳으려고 신음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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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 방에 자리하고 누웠으나 强度(강도)의 불면증의 사람이 아무리 하룻밤을 기차에 시달렸다 하나 졸음이 올 까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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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나는 원고지를 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발가락이 닮았다」는 이리하여 씌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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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안서의 부탁으로 씌어진 것인지는 나는 모른다. 더구나 염상섭을 모델로 한 것인지는 모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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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염상섭이 그것을 읽고 이는 자기를 모델로 자기를 욕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크게 노염을 내어, 그 소설에 대한 기다란 반박문을 써서 《東光 (동광)》에 기고하였다. 그런데 《동광》 잡지의 주간인 주요한이 그 글을 그냥 보류하여 버려서 삭아버리고 말았지만 그 문제는 그때 문단의 화젯거리가 되어서 그 뒤 한동안 조선일보 지상에서도 논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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