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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적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는 한 시간보다도 더 긴 일분 ─ 이 지루한 일분을 예순 번 보내야만 비로소 한 시간이란 공간이 흘러간다. 이런 한 시간을 40시간이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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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이는 정말 이 40시간 동안 굴에서 단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소변도 굴 어귀에서 보았다. 약간의 백설기 부스러기에 물을 두어 모금 먹는 것이 음식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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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호도 그와의 약속을 잘 지켰다. 그도 대부분을 이 같은 굴속에서 뒹굴 면서 단 한 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이 천둥 벌거숭이를 내버려두자 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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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마치 일생을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않고 지내는 두 개의 바위처럼 간섭이 없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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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은 아무 말도 않았다. 누워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잠이 든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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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하고 일어나 나가보세. 지금 각처에서 봉화가 일기 시작 했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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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도 서성대는 품이 봉화를 올리고 있는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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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나긴 사십 시간 동안에 재덕이의 생각은 딱 결정을 보고 있다. 놈들 앞에서 본능적인 비명이나마 아프다는 소리를 치고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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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방법으로든지 자기 자신의 의사로서 죽으리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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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무한히 긴 시간이었던 것도 같았고, 또 무척 짧은 시간 같기도 했다. 재덕은 지금 완전히 시간에 관한 관념을 잃어버리고 있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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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다. 역시 길었는지 짧았던지도 분간키 어려운 시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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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활짝 밝았네. 읍내는 아직도 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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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했다. 역시 하루인지 이틀인지,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이었던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직 굴속이 어둡기 시작했다가 불이 켜지고 불이 꺼졌어도 그대로 밝은 채이고 한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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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이는 요량도 못하고 있지만 그 지루한 일분 일분이 수천 수만이 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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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가 일던 날 밤부터 만 닷새란 세월이 흘러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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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달라진 것은 재덕이도 느끼고 있었다. 어제부터 몹시들 당황 해 한다. 서성대는 품이 다르기도 하다. 송종호도 전처럼 징커니 누워 있지도 못하고 들락날락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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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짐승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을 내면서 벌떡 일어서 나가기도 하고, 금방 또 들어와서 눕는가 하면 또 벌떡 일어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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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에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써 겨우 밤이란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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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님! 빨리 행동을 취해야 하겠습니다! 단양, 충주 다 실패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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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님! 어떻게 될 것입니까? 밖에서들은 모두 야단입니다. 옵니까 안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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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대 말입니다! 우리가 일만 일으키면 붉은 군대가 오기로 되어 있는 게 아닙니까? 모두들 또 속았다구 야단입니다. 인저는 우리네 가족은 다 죽었습니다. 씨도 없이 다 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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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은 송종호의 긴 한숨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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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번의 시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만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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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졌네. 자, 일어나게. 나는 곧 이 자리를 떠나야겠네. 어디 로든지 가야겠어. 자, 일어나주게, 일어나서 패자일망정 나를 좀 전송해주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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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는 재덕이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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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이가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종호는 그의 팔을 잡아 일으키듯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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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어나게. 일어나서 나가세. 여기는 더 지체할 데가 못 되네. 나도 날이 밝기 전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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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은 종호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언제부터 준비를 했는지 륙색에 물병까지 메고 있었다. 이 길로 바로 떠날 모양이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달은 없으나 별이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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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부하들이 몹시 흥분이 됐네. 이리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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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호는 재덕이를 어떤 골짜기로 끌고 들어가더니 큰 바위를 등지고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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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은 지금 눈이 뒤집혔네. 자넬 본다면 그대로 두지 않으려고 들지두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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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저는 대대장의 명령이 서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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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이 손을 드네. 난 졌네. 아니, 나도 속았네. 나는 빨리 산을 타고 가야 하겠어. 자네두 여기 있는 건 위험하니 이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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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어느 경인진 몰라두 밝을 때까진 동리에 내려가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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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더 말하지 말아주게. 말하지 않아도 잘 아네. 나두 같이 내려가잔 말이겠지? 안돼, 안 돼. 난 이 길로 부하들을 데리고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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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해서 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민족을 위해서 내려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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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내 생명을 보호했듯이 나도 자네 생명을 보호함세. 이만하면 자네네 공산주의의 정체도 알았을 것이 아닌가. 그 경험을 살려 나와 같이 일 할 수도 있잖은가? 우리는 민족을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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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자거니 못 간다거니 승강이를 할 때다. 바로 멀지 않은 장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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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들어보게. 빨리, 빨리! 모두들 안부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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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하고 마지막으로 재덕의 손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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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잡아라! 잡아. 그놈만은 끌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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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소리를 치며 다시 한번 재덕이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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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게. 들키지 않게 골을 타고 내려가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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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쪽을 향해서 한 떼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달아났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에, 난 죽어두 집에 간다는 소리에 왁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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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이는 미끄러지듯 골을 타고 내렸다. 그러다가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려니 뭐라고인지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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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산을 내린다는 패와 산으로 들자는 두 패가 어우러져 싸우는 모양 이었다. 그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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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하나의 비극이 벌어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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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은 귀에도 총소리는 그대로 자꾸 볶아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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