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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사람들 ◈
◇ 젊은 사람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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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이무영
1
젊은 사람들
 
2
7
 
 
3
그러면 이날의 폭동을 진숙이네는 어떻게 겪었던가?
 
4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재덕이가 납치되었던 그뒤 이야기를 하는것이 순서일 것 같다.
 
5
그날 ─ 놈들이 통고한 사형 집행 시간인 자정보다 네 시간 전인 열시까지에 경찰과 청년단이 입수한 정보는 이러했다.
 
6
부단장 구창수 씨의 고향인 S면 탑동에서 지난 이월의 폭동사건 이후 행방을 감춘 청년은 모두가 셋인데, 그중 하나는 지금 공주에서 복역중이요, 나머지 둘은 이월에 집을 나간 뒤로 통 소식이 없다.
 
7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전혀 여자 관계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사람 들이었고, 더욱이 부단장 구창수와 여자 일로써 감정을 상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8
그래서 경찰대는 다시 구창수 씨의 대대 묘막이 있고 저수지가 있어서 낚시질 차로 자주 가던 동면 방우리라는 동리로 파견이 되어 갔었다.
 
9
구씨의 땅 백여 석지기를 관리하는 사음의 아들 박봉길에게 일단 의심의 화살이 쏘아졌다.
 
10
이제 박봉길에게 대한 김 부장의 보고를 들으면 다음과 같다.
 
11
"박봉길은 금년 만 삼십세로 농업학교를 졸업한 자로, 그의 처 분식이와 지 주인 구창수와의 사이를 의심하여 처를 수차 구타한 사실이 있었음.
 
12
그런데 동 박봉길의 처 분식은 평시부터 남편인 박봉길을 좋아하지 않는 말투 였고, 구창수 씨가 낚시질로 며칠씩 묵어간 일도 있었음.
 
13
급기야 분식은 남편을 버리고, 해방이 되자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었음, 그래서 박봉길은 구창수 씨더러 처를 찾아내라고 힐문한 사실도 있었음."
 
14
"부단장 부인이 밖에 와 있나?"
 
15
하고 수사주임은 부하를 시켜 구씨 부인을 청해다가 이 사실에 대한 진상을 물어보았다.
 
16
"있습니다."
 
17
부인은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서 이것을 시인했던 것이다.
 
18
"전후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하루는 봉길이가 찾아와서 집양반보구 제 처를 어디다 감추어두었느냐고 힐난하는 것을 본 일은 있습니다."
 
19
"부단장이 그 집에 자주 간 것은 사실인가요?"
 
20
"자주랄 것은 없지만 봄으로부터 가을까지에 매해 두세 번씩은 갔을 겝니다."
 
21
"한번 가서 대개 며칠씩이나?"
 
22
"길어서 사오 일, 그렇지 않으면 하루 이틀이었을 겝니다."
 
23
"좋습니다. 나가십시오."
 
24
수사주임은 박봉길의 집에서 압수해온 필적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ㅁ과 ㅂ 이 정확치 않은 것이 그의 필적의 특징이었다.
 
25
이 특징은 만들어 쓴 글씨에도 역연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26
필적의 주인공은 박봉길임에 틀림이 없었다. 범인이 박봉길이라는 것도 비로소 확인된 셈이다.
 
27
그러나 그때는 이미 자정까지에 불과 세 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28
이와 동시에 또 한 가지 유력한 단서가 드러났다. 수십년 동안 금광 덕대로 굴러먹은 노인이 이 근방에서는 조대흙이 섞인 황토흙이 나는 토굴은 비봉 산 중턱에 단 한 군데밖에 없다는 것을 단연했다는 것이다.
 
29
대기하고 있던 무장대에 즉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30
특별수사대 오십여 명을 떠나 보낸 후, 그들이 돌아오기까지의 여섯 시간을 진숙이와 경애는 꼬바기 경찰서 추녀 밑에 서서 있었다. 어디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그들의 귀는 토끼처럼 쫑긋해지는 것이다.
 
31
"안심하고 돌아가시지요. 부인께서 여기 계시다고 안 될 일이 잘 되겠십니까?"
 
32
하고 어디 말씨인지 보초 순경이 몇 번이나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진숙은,
 
33
"괜찮습니다. 집에 간대도 잠이 올 것두 아니구요."
 
34
하고 길래 버티었다.
 
35
단장과 부단장 집에서는 삼모자가 다 나와서 같이 밤을 새웠다.
 
36
이 초조한 여섯 시간 동안에도 진숙은 피뜩피뜩 머리에 떠오르는 종 호의 기억에 자기 자신이 싫증이 났었다. 잊자 잊자 해도 혜영이가 하던 말이 머리에서 사라지지가 않는 것이다. 까닭은 없으나마 진숙은 지금 종호가 죽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37
'그이가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 하고 진숙은 불을 들고 화약에 접근하는 심정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38
'그것이 사실이란다면, 혜영이 남편이 들었다는 이야기대로 종호 씨가 이번 사건에 관련이 없으란 법도 없지 않을까? 마음으로 딛고 순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면서도 내게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종호 씨가 아닌가. 이북이 생지옥이라고 한대도 자기에게 대한 나의 애정이 변하지는 않을것 임을 잘 알면서도 나를 속인 종호 씨가 아닌가?’
 
39
이렇게 생각할수록에 혜영이 남편이 들었다는 이야기는 점점 실감을 가지고 그에게 육박하는 것이다.
 
40
더욱이 그렇게 믿는 오빠이면서도 이때껏 말하지 못한 무서운 비밀을 진숙은 갖고 있기도 한 것이다. 종호는 이 읍내에서 경찰서장과 군수보다도 청년 단장과 부단장을 더 미워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41
"그 두 놈의 새낀 그저 빵 ─ 해야 하는데!"
 
42
종호는 웃음엣말처럼이었지만 이런 소리를 여러 번 했었다.
 
43
"내가 여기를 뜰려고 하는 이유의 하나는 ─"
 
44
종호는 이렇게도 말했었다.
 
45
"그 두 새끼가 보기 싫은 것도 이유의 하나야. 만일에 재덕 군이 청년 단에만 관계해 있지 않았다면… 설사 그렇다 해도 내가 재덕 군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지만 않았대도 그 자식들은 벌써 없어졌지. 날랐을 겝니다."
 
46
"아이, 선생님두. 왜 같은 동포끼리 그렇게 남을 미워하셔요?"
 
47
"동포? 동포라구요? 천만에! 내게 처단할 권리를 준다면 경찰서장 열 하구두 안 바꾸지요."
 
48
그때는 무심히 듣고 넘긴 이런 이야기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꾸 진 숙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이다.
 
49
"가야지. 내가 여기 더 있다간 재덕 군한테도 화가 미칠지두 몰라."
 
50
서울로 가기 바로 이삼 일 전에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고 언제던가 한번은 아주 농담처럼,
 
51
"또 누가 압니까. 이 다음 내가 여기 반동분자를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 올지? 진숙 씨두 괜히 뭐니뭐니하고 날뛰지 말아요."
 
52
"선생님 손에 심판을 받으면 더 좋지 뭘 그러세요."
 
53
진숙은 정말 농담인 줄만 알고 이렇게 웃었던 것이었다.
 
54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그때는 단순한 농담으로만 여겼던 이런 말들이 모두 가시가 돋친 말이었던가도 싶었다.
 
55
진숙은 그만 몸서리가 쳐졌다.
 
56
"무서운 사람! 무서운 인간!"
 
57
진숙이가 이렇게 부르짖으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데,
 
58
"오는군!"
 
59
하고 단장 부인이 뛰어가는 것이다.
 
60
그들도 얼결에 단장 부인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61
그러나 아무리 뛰어가도 그럼직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진숙은 발을 멈추었다. 역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62
몇 홰째인지 닭 우는 소리가 나서 시계를 보니 아직 시계 바늘이 보일 만큼 밝지는 않았다.
 
63
뒤미처 쫓아온 부단장 부인이,
 
64
"와요! 와요! 저기 와요 "
 
65
하고 팔을 내저으며 가리키는 앞쪽을 바라보니 정말 신작로가 빡빡하니 몰려들 오고 있다.
 
66
─ 그러나 그들이 맞은 것은 오직 두 개의 시체뿐이었다.
 
67
한 시신은 사람으로서는 이 이상 더 참혹하게 죽일 수는 없을 정도로 처참한 것이었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었다. 몸에는 헝겊 오라기 한 오리 걸쳐져 있지 않은 알몸뚱이다. 전신이 그대로 옴두꺼비처럼 부푼 것은 곤봉 같은 것으로 무수히 구타한 자리였고, 시커멓게 탄 채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자리는 쇠 같은 것으로 단근질을 한 자국일시 분명했다. ─ 부단장 구창수의 시체다.
 
68
또 한 시신은 별로 상한 자리는 없었으나, 두골이 세 조각으로 나누어져있다. 도끼와 같은 그 무슨 흉기로 대매에 머리를 쳐서 즉사케 한 모양 이었다.
 
69
─ 이것은 단장 이배근의 시체다.
 
70
"선전부장은 어떻게 됐을꼬?"
 
71
시체를 우선 경찰서 무도장에다 옮겨놓고 사람들은 둘러선 채 서로들 맞 쳐다본다.
 
72
그러나 본 사람이 없으니 대답이 있을 리 없다.
 
73
간밤 자정이니 어쩌니 한 것도 빨간 거짓말이요, 단장과 부단장은 납치 되어 가던 날로 피살이 된 모양이었다. 수사대가 갔을 때는 놈들은 한 녀석 그림자도 없고 오직 현장에는 피에 젖은 종이쪽지 한 장만이 떨어져 있었 더라는 것이다.
 
74
"신재덕 놈의 장례식은 더 며칠간 보류하라!"
 
75
"박봉길이란 놈에 틀림이 없다!"
 
76
박 형사가 부르짖었다.
 
77
"그놈이 아니면 장례식이니 보류니 하는 말을 쓸 놈이 없다!"
 
78
필적을 감정한 결과 박봉길의 집에서 압수해온 필적과 이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황급히 썼던 모양이다.
 
79
"선전부장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데려간 게 아닐까?"
 
80
이렇게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81
"이용 가치는 무슨 이용가치! 어디 다른 데로 끌고 가서 해쳤겠지."
 
82
"허지만, 해친다면 같은 자리서 해쳤겠지, 누가 무서워서 다른 곳으로 해치러 갔겠나."
 
83
그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84
"어쨌든 그놈을 잡아야지! 그놈 나두 얼굴은 알아. 그놈이 중학교 때 축구를 했느니. 되잖게 늘 겨드랑에 책을 끼고 다니면서, 읍내 누굴 찾아다니는지 가끔 나오던데. 삿갓만한 밀짚모자를 쓰구선, 왜 걸음새도 별나게 으쓱 대지, 어깨를 이렇게 추썩이면서 ─"그때다. 누가 소리를 꽥 지르며 진숙이한테 달려들었다.
 
85
그러나 진숙이는 나무토막처럼 허리도 굽히지 않고 빳빳하니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86
진숙이를 붙잡으려던 사람도 몸의 중심을 잃고는 그대로 진숙이 몸 위에 엎 드러지고 말았다.
 
87
"딱하지! 며칠 밤을 새운데다가 저런 꼴을 보았으니, 약한 여자 마음에 기절을 않구 견디겠나."
 
88
"자칫하다간 신씨네 두 초상 나잖겠는가."
 
89
진숙이가 여섯 사람이 손을 맞잡아 만든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뒷공론들을 했다.
 
90
"내 그렇잖아두 용한 여자두 있다구 탄복을 하던 길일세. 글쎄, 며칠을 통 먹지두 않더래. 그러구서 용히 버티었지. 기운이 없는데다가 저런 꼴을 보니… "
 
91
모두들 그렇게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92
그리고 사실 또 그렇기도 했다.
 
93
그러나 진숙이가 기절을 한 것은 이러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청년 단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진숙이도 그 박봉길인가 하는 사람을 두세 번 본 기억이 있는 듯이 생각되었던 것이라, 겨드랑이에다 노상 책을 끼고 다닌다는 말에, '책? 겨드랑이에 책?’ 하고 어딘선가 자기도 그런 사람을 보았거니 생각하던 끝에, 삿갓만한 밀짚모자를 썼다는 소리에 기억이 선명해졌다. 보통 것보다도 전이 갑절은 되는 밀짚모자에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명동 거리에서 곧잘 보는 불량학생이나 '어깨’ 패들처럼 으쓱대며 걷던 사나이 ─
 
94
진숙이도 그 젊은 사나이를 본 일이 있었다. 아니, 진숙이와도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중국집에서 어깨를 맞대다시피 하고서 나오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날도 겨드랑이에 무슨 책인지 책을 끼고 있었다.
 
95
"똑똑한 청년입니다. 책도 많이 읽고 ─"
 
96
청하지도 않는데 그 잘 아는 사람은 진숙이한테 그 청년을 소개했었다.
 
97
진숙이는 그저 남한테 소개할 때 흔히 쓰는 말이겠거니 가벼이 들었고, 그 뒤로는 길에서 한두 번 엇지난 일은 있었지만, 인사를 한 것도 아니요 별 흥미도 없었던지라, 그대로 지나친 채 잊어버리고 말았었다.
 
98
지금 진숙은 책과 전이 넓은 밀짚모자와 으쓱댄다는 걸음새에서 그것이 바로 박봉길이란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99
그날 진숙이한테 그 청년을 소개한 잘 아는 사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송종호 바로 ─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100
진숙은 도립병원 분원에 입원을 하자 아주 영원히 숨을 거둔 듯이 자꾸 자기만 했다. 늦어도 두세 시간 후면 깨어난다고 의사는 아무 걱정 없는 듯이 말 했었으나, 오후 두시가 지나도 깰 줄을 모른다.
 
101
진숙의 머리맡에는 모친과 박건 남매가 언제나언제나 하고 잠이 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02
"얘가 이것이 자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없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아닐까?"
 
103
모친은 어쩐지 이대로 아주 죽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104
그래서 의사를 불러다 보였더니 의사는 그대로 내버려두란다.
 
105
진숙이가 겨우 오랜 잠에서 깬 것은 다섯시가 훨씬 지나서다. 진숙은 말끄러미 어머니와 박건, 경애 ─ 이렇게 둘러보더니 무슨 뜻인지 생그레 ─ 웃고서 다시 눈을 감는다.
 
106
그 길로 다시 두어 시간을 자는 것이었다.
 
107
진숙이가 온전한 제정신으로 돌아간 것은 여덟시가 다 되어서다. 그 제 서야진 숙은,
 
108
"나 퍽 잤지, 어머니?"
 
109
하기도 하고, 지금이 몇시나 됐느냐고 묻기도 한다.
 
110
"진숙아, 너 여기 어딘지 아니?"
 
111
"응."
 
112
"어디야?"
 
113
"병원이지?"
 
114
"그렇다, 그렇다!"
 
115
어머니는 갓난것이 처음 엄마 소리를 했을 때처럼 기뻐했다.
 
116
"여기가 병원이야, 병원!"
 
117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대견해하는 것이다.
 
118
이날이 바로 10월 7일, 그 무서운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119
진숙이가 미음을 마시는 것을 보고 박건 남매는 우선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에는 칠십 노인에 여자와 아이들밖에 없는지라 허전해서 보낸 것이다.
 
120
진숙이가 미음을 마시더니 다시 잠이 들기에 모친도 자리를 잡아 누웠다. 아들 생각이 가슴에 사무쳐 궁성대다가 겨우 어렴풋이 잠이 들 무렵에 갑자기 병원 안이 소란해진다.
 
121
"아이구, 뉘 집에선지 또 걱정이겠다."
 
122
진숙 모친은 급한 환자가 와서 그러거니만 여기고 다시 잠을 청 하려니까, 아무래도 공기가 수상하다. 일어나서 불을 켜보나 안 온다. 그래서 간호 부방을 뚜드렸더니 캄캄한 방에서 간호부들이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기만 한다.
 
123
"왜 이리들 소란하우?"
 
124
책망 비슷이 묻는 말에,
 
125
"왜가 뭐예요, 할머니. 큰일났어요. 이북 빨갱이들이 쳐들어왔답니다!"
 
126
"아이구, 이를 어쩌나!"
 
127
며칠을 두고 놀라기만 한 가슴인지라 금방 눈앞부터가 캄캄해지고 만다.
 
128
간호부들은 서로 부르고 법석이다.
 
129
"아이구, 어떡하니! 진작이나 알았다면 어디루 피하기나 했지. 부원장 놈이 죽일 놈이야. 명색이 사내란 것이 저 혼자만 살짝 달아나?"
 
130
"아니 얘, 그따위 소린 인제 해서 뭣한다니. 어디루든지 가야지."
 
131
"어디루 가?"
 
132
"아무데나 갈 테야, 난."
 
133
금방 뛰어나갈 듯이 하던 간호부는 밖을 내다보고서 어떻게 하느냐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134
전 시가가 그대로 불바다요 죽여라 소리가 거리에 흩어졌다.
 
135
이때 또 한 간호부가 달려와서 지하실로 오라는 것이다.
 
136
"색시들, 우리 딸두 좀 데리구 갑시다."
 
137
그러나 대답도 않고 와 몰려나간다. 하는 수 없이 진숙 어머니는 병실로 와서 곤히 잠을 자는 딸을 일으켜 더듬더듬 지하실을 찾아가 보니, 환자에 간호 부에 이십여 명이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다.
 
138
이 지하실에서 진숙 모녀는 복부 수술을 해서 촌보도 못 움직이는 부인네 하나와 완전히 이틀을 지냈던 것이다. 물론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139
폭동이 진압되던 날 새벽, 이 부인네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었다.
 
140
"극락으로 가시오."
 
141
진숙이 모친은 손수 환자의 눈을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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