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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엿새 잡고서 간 사람이 달포나 되어서야 돌아왔다는 것이니, 응당 그렇게나 늦게 된 까닭부터 물었어야 할 것인데 진숙은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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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고 나서야 아뿔싸 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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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혼자지, 제 오라비가 동부인하고 서울 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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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비의 신상에보다도 종호 소식에 더 마음이 팔린 딸을 편잔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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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숙이는 어머니가 그러한 딸의 심정을 얄밉게까지는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어머니의 핀잔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랑 하는 딸이 대견히 여기는 사위를 두둔한다고 핀잔을 주는 친정어머니의 모 지지 않은 핀잔처럼 부드럽게 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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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이는 군인처럼 경례를 하고서, 냉큼 화제를 돌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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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두 안 오신 줄 알았어. 삼일상회서두 모른다잖아? 그래두 또 미심다워서 버스 회사에두 들러봤었지. 그랬더니 거기서두 못 봤다구 그러는군. 그래 꼭 안 오실 줄만 알구 어찌두 맥이 풀리는지. 오늘은 꼭 오시려니 했다가 안 오셨다니까 몇 개 안 되는 과일 봉지가 갑자기 천 근이나 되는것 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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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그러니까 들이닥치는 대루 오빤 혼자 왔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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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어머니두! 사과했는데 뭘 그러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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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진숙은 면구스러우니까 제라서 까르르 웃어 붙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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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연못가엔 꼭 둘이 가야 맛이라던? 혼자 조용하니 앉았어야 연 꽃잎 피는 소리두 들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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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억지로 웃음을 참는데 옆에서 달 순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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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라우, 언니. 서울 아저씨하구 같이 나갔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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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진숙은 덧없이 한숨을 후유 돌렸다. 말도 못하고 그런 내색도 할 수는 없었으나, 정말 오빠 재덕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몇 곱절 더 반가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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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오빠의 생명보다도 내게 더 귀중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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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이런 질문에 진숙은 터진 물 막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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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빤 늦더래두 올 사람, 종호 씬 영원히 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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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휘갑을 치고서 자기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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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들어와 보니 할 일은 없었다. 그대로 연못으로 뛰어가고 싶은것을 언니와 어머니한테 낯이 간지러워서 방으로 들어왔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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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서는 처녀는 언제나 수줍기만 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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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이는 아침에 꺼내놓은 진솔 깨끼저고리에 역시 흰 조세트 긴 치마를 갈아입으면서도, 몇 번이나 종호가 돌아와 준 것을 고맙게 여기었다. 자기 본위만이 아니었다. 오빠 재덕이도 친구요 동지였던 종호를 잃은 뒤로는,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만큼 풀이 죽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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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은 지금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종호가 옆에만 있다면 안아 주기라도 하고 싶은 아니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게 흥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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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찬 발에다 손(좁은) 버선을 신느라고 애가 쓰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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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너 뭣하냐? 어서 나가서 오라비 저녁 먹으라구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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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진숙이가 경대 앞에 앉지 않은 것은 아니다. 머리에도 손질을 했고 상기된 얼굴에는 분기도 가벼이 뿌리었다. 무섭게 잽싼, 그리고 무섭게 세련된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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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은 마침 촉촉히 젖은 젖빚 황혼이 내리고 있다. 열나흘 달이 벌써 떴는지 동쪽 하늘에는 자줏빛이 돈다. 진숙은 늙은 수양버들 가지가 터널처럼 추 욱추욱 늘어진 정원을 지나서 연못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연못가에 갔다면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연못 아랫둑 한복판에 할아버지가 십년 공을 들였다는 반송이 있고, 그 밑에 생자작나무를 찍어다만 들어놓은 걸상 한 틀이 있었다. 오빠와 종호라면 반드시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인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람 그림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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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에 오르면 한강 상류가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는 봉이 있다. 그들 뿐 만이 아니라, 근방 사람들이 다 비로봉이라고 부르는 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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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로봉까지는 한참 초간한 길이다. 연못둑을 한바퀴 돌아서 약물터 골짜기로 돌아오려니까, 또닥또닥 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조심 가까이 가보니 약물을 등지고 둘이 나란히 앉아서 어둡는 줄도 모르고 무슨 깊은 생각에들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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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뚜드리는 것은 오빠 재덕이었다. 오빠의 손에서는 가끔 신경이 짜릿거리는 파아란 불똥이 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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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오빠와 사랑하는 사람을 시야에다 넣은 처녀의 마음은 푸근한 안도와 흐뭇한 만족에 장난치고 싶은 생각까지 들어서 '오빠!’ 하고 목 고개를 거의 다 넘어온 소리를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조심조심 그들의 등뒤에까지 가서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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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뱉으면서 재덕이의 어깨를 탁 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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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누이한테는 속는 것도 즐거운 법이다. 오라비뿐이 아니다. 누이도 역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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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숙은 피가 싹 걷히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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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리킨 사람은 뜻밖에도 종호가 아니다. 어둡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아 그랬던지 뒷모습도 종호 같던 그 청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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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은 얼결에 이렇게 사과를 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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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은 눈물이 핑 솟았다. 무안했을 때도 눈물이 난다는 것을 진숙은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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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숙녀가 사과를 하건 다소곳이 받아줄 것이지 왜 이리 빗나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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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정말. 자네두 아까 보잖았던가. 나 약 먹던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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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아, 놀라서 체증이 떨어졌단 말이로군. 그두 그래. 건 치할 할 만두 하구 받을 만두 하네나그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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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이는 일부러처럼 버레기 깨는 소리로 웃어 붙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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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진숙아, 받을 만하다. 받아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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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이는 눈물을 닦고서 정식으로 사과를 다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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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천만에요. 정말 내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아침에 한술 떠먹은 것 이 진종일 징커니 내리지 않아서, 재덕 군두 봤지만 아까두 활명술 사먹구 온 길이 랍니 다. 덕택에 후련하니 내려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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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뚝 떼고 하는 이야기에 진숙이도 그만 웃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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