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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문화】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충절은 첫 번째 덕목이었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윤리사상이었다. 조선 건국시 공을 많이 세웠거나 단종복 위의 충절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충의지사들이야말로 충절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7 (+7) | 성삼문
2024.01.18
【인문】 Tip. 독문학과 교수진이 가장 질문과 문제를 내는데 선호하는 시기는 질풍노도의 시기, 낭만주의 시기를 뽑을 수 있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는 괴테의 젊은 시절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격변기이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을 기점으로 독일문학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신고전주의 시대로 넘어간다. 낭만주의는 괴테, 쉴러 등의 대문호들을 낳은 시기이자, 괴테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여행으로부터의 과거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문학에 연동되면서 풍성한 대작의 시기로 넘어감을 보여준다. (Ex: 파우스트)
2025.11.03
【문화】 매죽헌(梅竹軒)의 아들은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에는 아들이 5명으로 되어있고, 회곡공파보(檜谷公派譜) 구보(舊譜)에는 원(元)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금년생(今年生)으로 되어있었으나 동학(東鶴) 숙모전(肅慕殿) 병자원적(丙子寃籍)에는 성맹첨(成孟瞻) 성맹평(成孟平) 성맹종(成孟終) 성헌(成憲) 성택(成澤) 성무명(成無名) 성금년생(成今年生) 7명이 올라있다. 장남(長男) 성원(成元)은 일찍 요사(夭死)하였으므로 병자원적(丙子寃籍)에 오르지 않았다.
10 (+10) | 성삼문
2025.10.15
【문화】 풍류한량(風流閑良)들과 기녀(妓女)들의 화답(和答)의 노래나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기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화류계(花流界)의 여자(女子)' 내지는 '몸을 파는 여인(女人)' 들의 이미지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참조】다음 카페 (漢字이야기)
21 (+1) | 기녀문학, 기생
2025.10.15
【문화】 풍류한량(風流閑良)들과 기녀(妓女)들의 화답(和答)의 노래나 그녀들의 이야기에 나타난 것을 보면, 기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화류계(花流界)의 여자(女子)' 내지는 '몸을 파는 여인(女人)' 들의 이미지와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참조】다음 카페 (漢字이야기)
21 (+1) | 기녀문학, 기생
2025.08.29
【문화】 관광객들이 강화도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전등사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4세기 후반, 즉 지금으로부터 약 1700여 년 전에 세워졌다. 전등사에서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대웅전 추녀 밑에 보이는 이상한 모습의 나무 조각상이다.
2025.09.01
【문화】 조선 왕조의 세종대왕은 학문에 열중한 탓에 눈병을 앓아 온천물로 목욕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온천이 없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2025.08.29
【문화】 예로부터 강화도에는 목장이 많았다. 전쟁 때 쓰기 위한 말을 그곳에서 길렀다. 그 중에서도 양도면 진강산의 목장은 명마(名馬)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진강산의 말은 용맹스럽고 영리한 데다 달리는 것이 바람과 같았고 온 몸은 흰색인데 비해 갈기와 꼬리는 푸르스름한 색깔을 띤 모습이었다.
2025.09.01
【문화】 지금의 부개동은 옛 지명이 마분리(馬賁里)였다. 아마도 큰 말무덤이 있어서 그렇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부평동 일대는 대정리(大井里)였는데 그 뜻으로 보면 큰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25.08.29
【문화】 강화읍에는 용흥궁(龍興宮)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기와집이 한 채 있다. 원래는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집에 살던 원범이라는 열 아홉 살 나무꾼이 왕이 되면서, 초가집은 기와집으로 고쳐졌다. 그리고 집 이름도 용흥궁이라 지어졌다.
2025.09.01
【문화】 원적산은 깊고 숲이 우거져서 호랑이가 살았다. 그리고 맛좋은 산나물이 지천으로 많아서 음력 삼월부터 석 달 동안 여인네들이 쑥부쟁이와 두릅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루하루 날이 지남에 따라 원추리, 취나물, 고비, 홑잎나물 등을 뜯었다.
2025.08.29
【문화】 남한에는 단군과 관련된 유적이 두 곳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곳이 모두 강화도에 있다. 단군께서 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참성단(전국체육대회의 성화를 이곳 참성단에서 밝히는 이유도 단군과 관련된 이유에서다.)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이 그것이다.
2025.09.01
【문화】 부평구 산곡동과 서구 석남동 사이에 뻗어 내린 계양산의 지맥이 봉우리로 우뚝 솟은 것이 원적산이다. 조선 시대에 경인 운하를 파는 공사를 할 때, 이 산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 하여 원통함을 쌓았다는 뜻으로 원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뒤에 한자 표기가 ‘원(元)’자로 바뀌었다는 말이 있다.
2025.08.30
【문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왜군이 우리 나라로 쳐들어왔다. 이를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우리 나라는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2025.09.01
【문화】 안하지 고개는 부평구 청천동과 서구 가정동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럴 듯한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기러기가 날아드는 모습이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청천동 동쪽에서 바라보면 서구 가정동 앞바다에서 기러기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2025.08.29
【문화】 강화군에는 교동이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는 양갑리라는 마을과 매바지라는 마을이 있고 두 마을 사이에는 별로 크지 않은 산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이 산의 모습이 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말산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산의 머리는 양갑리 쪽으로 향해 있었고 꼬리는 매바지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2025.09.01
【문화】 부평 지역의 중요한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굴포천과 원통현은 옛날부터 여러 차례 시도했던 경인운하 사업과 관련된 이름이다.
2025.08.29
【문화】 1636년 12월 어느 날 밤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둠을 깨뜨렸다. “상감마마, 북쪽의 오랑캐 1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 벌써 평양이 함락되고 지금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엇이 ? 청나라가 또 쳐들어왔단 말이냐?”
2025.09.01
【문화】 기미년 3월, 한반도는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도 3월 6일 인천상업중학과 인천공립보통학교가 시위를 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으며, 같은 날 강화에서도 1천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2025.08.29
【문화】 1849년 6월, 조선의 헌종 임금이 돌아가셨다. 대를 이을 아들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실에서는 서둘러 강화도의 나무꾼인 원범이를 철종으로 세웠다.
2025.09.01
【문화】 계양동의 다남동 마을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다랑리라고도 불리웠다. 역시‘다남’처럼 남자가 많다는 뜻이었다. 이 마을 에서는 옛날부터 남자 아기가 많이 태어났다.
2025.08.29
【문화】 강화 여성들을 이야기 할 때, ‘넉살 좋은 강화(江華)년’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은『국어대사전』(민중서관)에까지 올라 있다. 사전은‘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2025.09.01
【문화】 계양동의 오류동 마을은 부평 땅의 고려 때 지명인 수주(樹州)의 소재지였다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효자의 마을로 명성이 높았다. 임진왜란 직후 부평 부사를 지낸 윤명선이라는 사람이 자리잡아 파평 윤씨 가문이 대대로 살아 왔는데 일가 모두가 효성이 깊었다.
2025.08.31
【문화】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는데 워낙 힘이 센 장사인 데다가 담력도 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2025.09.01
【문화】 옛날 부평 고을에 신관 사또가 부임해 왔다. 관아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을 먹으려 할 때였다. 고을의 방범 경찰 업무를 맡은 병방이 헐레벌떡 달려 들어와 보고하는 것이었다. “나리, 징맹이 고개에서 도둑 떼가 행인의 짐을 털었습니다요.”
2025.08.30
【문화】 영종도 옆에 신도(信島)라는 조그만 섬마을에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효성 지극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 둘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총명했을 뿐 아니라 심성이 유난히 곱고 착하며 어머니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했다.
2025.09.01
【문화】 계양산 남록에 장사굴이라고 불리는 작은 굴이 있었다. 입구가 땅바닥에 붙어 있는 데다가 앞에 소나무와 관목들이 무성해서 여간해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입구가 좁아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바람이 없이 아늑하고 빛도 적당히 들어오고 예닐곱 명이 앉을 수 있었다.
2025.08.29
【문화】 강화도에 딸린 또 하나의 섬 교동도는 원래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었다.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 3개가 그 섬의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고려 때 강화도가 임시 수도가 되면서(1232~1270) 식량확보를 위한 간척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와서도 계속되었고 많은 갯벌과 섬들이 그때 메워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교동도가 되었다.
2025.09.01
【문화】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대왕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에 왔다. 그가 대왕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대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거기는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였다.
2025.08.29
【문화】 개똥이란 이름이 있다. 조선 후기 고종(高宗) 임금도 어릴 때 집에서 그렇게 불렀다. 그의 원래 이름은 명복이었다. 그러나 아이 때 나쁜 이름으로 불러 주면 뒷날 좋은 일이 생긴다며 그의 아버지 이하응(뒷날의 흥선대원군)이 개똥이라 불렀다. 그래서 왕이 되었을까?
2025.09.01
【문화】 고려 충렬왕은 태자 시절을 몽고에서 보내면서 원나라 세조의 딸 홀도로계리미실 공주와 결혼했으며 부왕이 죽자 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고려에서는 몽고 공주 출신의 왕비를 제국대장공주라고 불렀다. 또는 줄여서 제국공주라고도 했다.
2025.09.01
【문화】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아버지 원종대왕의 능을 옮기려고 묏자리를 잘 보는 지관 한 사람만 데리고 계양산 근처에 왔다. 그가 대왕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조대왕과 지관은 산기슭에 관을 놓고 묏자리를 파고 있는 가난한 사람을 목격했다. 그런데 거기는 수맥이 흐르는 험한 묏자리였다.
2025.09.01
【문화】 계양산은 해발 395미터로 인천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수주악, 안남산, 아남산, 노적봉, 환여금, 용장자산 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규보가 지은 『망해지』에는 산정에 올라가 보면 삼면이 모두 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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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문화】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2025.09.01
【문화】 서곶과 검단의 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게 갯벌이 드러났다. 주로 부녀자들이 이 시간에 갯벌로 나가 낙지, 게, 소라, 조개, 맛조개 따위를 잡았다.
2025.08.30
【문화】 덕적도에는 들에 나가서 밥 먹기 전에 밥을 한 술 떠서 버리는 풍습이 있는데 이 풍습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 섬에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도 착하고 일도 열심히 하여 동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곤 했다.
2025.09.01
【문화】 백석동의 한들방죽은 거지방죽이라고도 부른다. 서곶과 검단의 해안 쪽이 거의 다 그러하지만 이곳도 지난날 바닷물이 드나드는 드넓은 갯벌이었다. 한들 마을 앞의 갯벌은 경사도가 낮아 썰물 때면 어머어마하게 넓게 드러났다.
2025.08.30
【문화】 영종도(永宗島)에 아들은 죽지만 그 세 손자가 정승[三政丞]을 지낸다는 뜻의 무자 유손(無子有孫)이란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양반집의 주인이 죽었지만 마땅한 산소 자리를 잡지 못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름 모를 지관이 한 곳을 가리키며 이상한 소리를 했다.
2025.09.01
【문화】 검단 사거리의 옛 이름은 원현(院峴)이다. 그곳은 역참이 있었고 지난날 지방 관장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반드시 하루를 묵어갔다.어느 해 새로 부임해 오는 신관 사또가 이곳 원현에서 묵었다.
2025.08.29
【문화】 옛날 강화도의 혈구산(穴口山) 밑에 강씨 성을 가진 한 양반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도 잘 생겼을 뿐 아니라 총명하여 다섯 살 때 이미 천자문을 다 외웠다. 그 집안에서는 이 아이가 자라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집안을 일으킬 것이라며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2025.09.01
【문화】 경서동에는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좋은 흙이 있어 삼국 시대부터 가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녹청자 도요지(사적 제211호)가 있다. 그리고 경서동 해안에서 서곶로 국도까지 이어진 길 좌우에는 30년 전까지만 해도 옹기를 굽는 가마가 십여 개 있었
2025.08.29
【문화】 지루한 장마가 끝나자 강화도 하점면에 사는 한 노파가 밀린 빨래를 들고 집을 나섰다. 노파가 집 가까운 연못에서 빨래를 시작하려고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연못 한가운데로 오색 무지개 빛이 비치고 이어 연못의 물이 솟구치면서 옥(玉)으로 만든 함이 하나 올라왔다.
2025.09.01
【문화】 검암동 앞산을 허암봉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조선 전기의 강직한 관리이자 도학자이며 차(茶)와 술에 심취해 많은 일화를 남긴 정희량의 호에서 유래한다. 지금도 산의 북쪽 중턱에는 그가 찾아와 조용히 숨어 살았던 암자 흔적이 남아 있다.
2025.08.29
【문화】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2025.09.01
【문화】 조선 세종 때 일이었다. 현재의 경서동 범머리산에 갑자기 말을 탄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베로 만든 건을 쓴 사람들도 있었고 언젠가 이 마을에 나타난 적이 있는 부평 관아의 이방도 있었다.
2025.08.29
【문화】 강화도는 우리 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육지와도 꽤 가까운 편이다. 그래서 옛날 강화도에 나무가 울창했을 때에는 육지에 사는 짐승들이 쉽게 이곳으로 건너와 살았다.
2025.09.01
【문화】 시천동은 고려 때 장모루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남부 지방에서 고려의 왕도인 개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 갔다. 마을에 여러 개의 여관이 있어서 나그네들에게 침식을 제공했다.
2025.08.31
【문화】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이었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산 아래 마을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었다.
2025.08.31
【문화】 장사래말이라 불리던 숭의동은 오늘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이 변했지만, 1920년대 이전 낙섬 일대에 염전을 축조하며 긴 방죽을 쌓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1903년 장천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에 사행천(蛇行川)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개천이 있어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2025.08.31
【문화】 연수구 청학동에 흔들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어디가 어딘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변해 버렸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청학동에 많이 살던 최씨 문중과 관련이 있었던 연못이 아닌가 싶다.
2025.08.31
【문화】 삼호현이라고 불리는 고개는 지난 날 인천 읍내 쪽에서 송도 해안으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다. 이 길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선 이 고갯길의 이름만도 삼호현, 삼해주현, 사모현 등이 있다. 더불어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2025.08.31
【문화】 예전에 사모지 고개에서 동춘동 쪽 방향으로 저금 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바위 석함에 갑옷을 넣어 두었다 하여 갑옷바위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자 바위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025.08.31
【문화】 철마산의 원래 이름은 천마산이었다. 옛날 이 산 속에는 양 어깨에 날개가 달린 천마가 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가깝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산 아래 마을에는 전설이 생겨났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근처에 영웅이 태어나고, 그 말을 타고 출정할 것이라는 신령스러운 전설이었다.
2025.08.30
【문화】 조선 16대 인조 14년(1636)에 청나라 태종이 우리 나라를 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의주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용맹성과 뛰어난 전술을 청나라 태종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는 의주를 피해 돌아서 다른 길로 서울을 공격했다.
2025.08.31
【문화】 연수구 청학동에 흔들못이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어 어디가 어딘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변해 버렸지만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청학동에 많이 살던 최씨 문중과 관련이 있었던 연못이 아닌가 싶다.
2025.08.30
【문화】 조선 시대에는 서해의 군사 요지인 영종도에 영종진을 설치했다. 영종진의 군인인 한호군이 윗사람의 명령으로 용유도의 군진시설을 맡아보게 되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용유도에서 군진 시설을 돌아보고 진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갯벌을 지나는데 한 여인이 조개잡이를 하고 있었다.
2025.08.31
【문화】 연수구 청학동의 삼호현을 달리 삼해주현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그 고개에 술이 나오는 바위가 있었다는 전설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삼해주 전설과 술이 나오는 술 바위 전설과는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2025.08.29
【문화】 강화대교를 넘자마자 오른편에‘만남의 광장’이라 하여 관광객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곳에서 제일 눈에 먼저 띄는 것이 인삼이 그려진 간판이다. 그리고 강화읍에도 인삼 센터가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강화도의 특산물로 인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2025.08.31
【문화】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도곡 부락을 흔히 삼정승 고을이니 큰 대신, 작은 대신 동리니 하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아버지가 영의정을 추증 받고 큰아들이 우의정, 작은아들이 좌의정을 지냈다는 삼부자 이야기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다.
2025.08.29
【문화】 함허대사(涵虛, 1376~1433)는 무학대사의 제자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큰스님이다. 함허대사가 스님이 되었을 당시는 나라에서 불교를 멀리하던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불교에 대한 오해와 무지를 없애고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많은 공부와 노력을 했다.
2025.08.31
【문화】 연수동 원인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화사거리가 있다. 이 사거리 주변 문학산 남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동네가 부수지(浮水地)마을이라고 불리는데 이 일대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세라고 해서 예로부터 불리어 온 이름이다.
2025.08.29
【문화】 황형(黃衡, 1459~1520)은 일찍이 과거 무과에 급제하여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했을 때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2025.08.31
【문화】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되었다. 그 과정에서 비록 몇 차례의 배교를 했다고 해도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
2025.08.29
【문화】 강화도 석모도에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세웠다고 하는 보문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다.
2025.08.31
【문화】 남동구에 위치한 소래산 서쪽에 세간에서 부르기를 담뱅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다. 조선조 말기인 고종 때 이 담뱅이 마을에 사는 전주 이씨 가문에 아기가 태어났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벌써 기골이 장대한 것이 누구든지 한눈에 아기가 장사임을 알 수 있었다.
2025.08.29
【문화】 강화읍에는 견자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다. 이곳에는 충혼탑이 있고, 매년 현충일 6월 6일이면 많은 뜻 있는 분들과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분들의 고귀한 뜻을 기린다.
2025.08.31
【문화】 지금의 남동구 간석동에 박창보라는 장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포수였는데 워낙 힘이 센 장사인 데다가 담력도 크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2025.08.29
【문화】 1232년, 몽골군대가 이 땅을 침략하였을 때 고려 고종 임금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부를 강화도로 옮겨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장맛비를 맞으며 강화도로 들어온 고종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2025.08.31
【문화】 남동구 구월동에 ‘오달기(또는 오닭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막거리가 있었다. 이곳은 인천부 청사가 있는 관교동 쪽에서 서울로 가거나 수원 쪽 방향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길가에 자연스럽게 주막이 생겨났다.
2025.08.29
【문화】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숭상되는 바람에 불교는 상대적으로 많은 피해와 푸대접을 받았다.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을 때 스님들이 동원되기도 했고, 심지어 임금이 살고 있는 서울에 스님들의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사찰로 하여금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나라에 바치도록 했다.
2025.08.31
【문화】 수채골은 옛 문학초등학교 교장 사택 뒷산 작은 골짜기를 말하는데 이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이 우물을 사람들은 ‘산신(産神) 우물’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이 우물가에서 치성을 다해 백일 기도를 드리면 태기가 없던 사람도 아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2024.09.25
【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성삼문(成三問) 선생은 본군관하 법원읍 금곡리 파평산 남맥 관모봉하에서 태종 18년(1418)에 출생 할아버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계묵(溪墨) 산골짜기 현불당제터에서 자습을 하면서 글씨를 얼마나 썼던지 이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늘 많이 내려와 묵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2025.08.31
【문화】 남구 학익동은 예로부터 제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 그것은 조선 숙종 때 교육자로서, 또 효행자로서 높이 칭송을 받는 이세주가 이곳 학익동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호가 제운이었기 때문이다. 이세주는 부평 이씨지만 그의 명성이 너무 유명해서 아호가 곧 본관처럼 쓰일 정도였다.
2024.09.24
【문화】 【파주옛이야기(파주문화원)】조리면 봉일천에서 서북쪽으로 샛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 들어가면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도깨비 촌으로 탑삭골이라고 불리어왔다. 옛날 이 탑삭골 능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던 젊은이가 있었다. 공릉 장터에서 산 물건을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걷다보니 귀가시간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2025.08.31
【문화】 금은 완전히 도시화 한 연수구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 옛날에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이 산을 청량산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풍경이 맑고 아름답고 시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서적에도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빼어나다’라는 설명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025.08.30
【문화】 영종도에 가난하게 살아가는 아들과 어머니가 있었다. 남편이 없어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연명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 하루는 아이가 엉엉 울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이유를 물으니, 밖에서 놀 때면 아이들이 자꾸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린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었다.
2025.08.31
【문화】 능허대는 백제가 한강 하류까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추진하던 시절, 두 나라 사이의 바닷길을 연결해 사신들이 오고가던 전초 기지 같은 곳이다. 오늘날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 옥련동의 능허대 일대가 바로 당시 백제 사신들이 중국으로 떠나던 곳이다.
2025.08.29
【문화】 강화도의 또 다른 섬, 교동도는 화개산을 중심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옛날 화개산 남쪽에 두 개의 샘이 있었다. 동쪽의 것은 문정(文井), 서쪽의 것은 무정(武井)이라고 불렸다. 두 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흘렀다.
2025.08.31
【문화】 예전에 사모지 고개에서 동춘동 쪽 방향으로 저금 가다 보면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바위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름이 바위 석함에 갑옷을 넣어 두었다 하여 갑옷바위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자 바위로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2025.08.29
【문화】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 이승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결혼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몇 달 전에 이미 사돈이 될 집안이 정해졌으나 주위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친구 한 사람이 찾아왔다.
2025.08.31
【문화】 남동구 간석3동 중심지에 솟아있는 높이 187.1미터의 만월산은 원래 이름이 주안산이다. 인천의 대표적 땅이름 가운데 하나인 주안(朱安)이 바로 이 산 이름에서 나온 것으로, 그 원래 위치도 지금의 주안이 아닌 이곳 간석동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주안산이 바로 지금의 만월산인 것이다.
2025.08.29
【문화】 고구려 장수왕 4년(416)의 어느 날이었다. 인도에서 온 스님 천축조사와 왕이 마주 앉았다. 왕이 먼저 말했다.
2025.08.31
【문화】 남동구 장수동에 장자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장자리라고도 부르던 장자골은 다른 지역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지명인데 대개는 ‘부자가 살았던 마을’이 아니면‘맏아들들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마을이다. 장자골은 또‘장사골’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 동네에 살았다는 여덟 장사의 전설 때문이다.
2025.08.29
【문화】 강화도에는 강도삼기(江都三奇)라 하여 세 가지 기이한 것이 있다. 효종 임금을 울린 말 벌대총, 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문사의 석불, 그리고 강화도에서 출생한 연개소문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2025.08.31
【문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석천 사거리는 인천시청 후문 언덕길에서 간석동 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나온다. 이 지점이 구월동과 간석동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건너편 모서리에 석천초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2025.08.29
【문화】 7백여 년 전, 몽골 군대의 침략에 맞선 고려 정부가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옮긴다. 이때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인근섬으로 들어가 적군과 싸울 것을 당부했다. 그리하여 왕족과 군인들뿐만 아니라 개경과 인근 경기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2025.08.31
【문화】 남동구 논현동 서남쪽에 있는 호구포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입처럼 생긴 포구라는 뜻이다. 호구포 뒷산인 오봉산 기슭에 마치 호랑이가 어흥 소리를 내며 입을 한껏 벌린 듯한 형상의 검고 커다란 바위가 있어 사람들이 호구암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포구 이름도 범아가리 또는 호구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025.08.29
【문화】 1636년, 청나라의 군대가 조선을 침략했다. 인조 임금은 왕비와 왕자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난 보낸 후, 자신은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청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고 곧이어 인조 임금도 청나라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2025.08.31
【문화】 매년 11월 무렵 김장철이 되면 서울에서까지 새우젓 등 젓갈과 해물을 사려는 주부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는 신선한 어물로 유명한 도시 안의 포구로서 인기 있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이제는 사라진 협궤열차 때문에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2024.10.06
【문화】 감악산 동북맥 준령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에 옛날 이씨들이 정착 수십 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수백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인심이 후둑하여 늘 손객이 끊일 날이 없자 손님 치닥거리에 너무나 지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안오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 늘 고심하던 중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그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2025.08.31
【문화】 해안 매립으로 생긴 남구 용현5동, 지금은 철거된 개항 100주년 탑 부근에 작은 무인도 낙섬이 있었다. 이십여 년 전 바다를 매립하면서 섬 전체를 까뭉개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일제 때 염전을 조성하기 위해 쌓은 긴 제방 끝에 낙섬이 있었다. 몇몇 문헌에는 이 낙섬을 ‘잔나비(원숭이) 섬’이라는 뜻의 ‘원도(猿島)’라고 기록하고 있다.
2025.09.01
【문화】 서곶과 검단의 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넓게 갯벌이 드러났다. 주로 부녀자들이 이 시간에 갯벌로 나가 낙지, 게, 소라, 조개, 맛조개 따위를 잡았다.
2025.08.31
【문화】 옛날 문학산 봉화대가 있던 자리 밑에는 안관당이라는 사당이 하나 있었다. 이 안관당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할아버지와 할머니 목조상이 모셔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상은 아주 험상한 듯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눈을 부라린 모습이 매우 용맹하게 보였다.
2025.08.31
【문화】 금은 완전히 도시화 한 연수구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청량산. 옛날에는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이 산을 청량산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풍경이 맑고 아름답고 시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옛 서적에도 이 산에 대해 ‘깨끗하다’,‘빼어나다’라는 설명과 함께 청량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025.08.31
【문화】 흔히‘문학산의 이상한 우물’이라고 말하는데 지금은 군사 시설이라 민간인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지만 옛 문학산성 동문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50미터 가량 떨어진 안관당 뒷마당에 돌로 쌓아 올린 우물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몇 해 전까지도 맑은 물이 솟아 넘치던 우물이었다. 해발 180미터의 산에 이런 우물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하지 않은 일이다.
2025.08.31
【문화】 삼호현이라고 불리는 고개는 지난 날 인천 읍내 쪽에서 송도 해안으로 나올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이다. 이 길에는 많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우선 이 고갯길의 이름만도 삼호현, 삼해주현, 사모현 등이 있다. 더불어 발음에 따라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2025.08.31
【문화】 인천을 대표하는 산이라고 한다면 문학산을 꼽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인천에 관한 가장 오랜 역사 기록으로서, 기원전 18년 비류가 문학산 주변을 도읍으로 했던 미추홀 왕국의 설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설화는 몇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이렇다.
2025.08.31
【문화】 장사래말이라 불리던 숭의동은 오늘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이 변했지만, 1920년대 이전 낙섬 일대에 염전을 축조하며 긴 방죽을 쌓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가였다. 1903년 장천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던 것을 보아도 이 지역에 사행천(蛇行川)처럼 길고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개천이 있어서 장사래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2025.08.30
【문화】 황해도 황주 도화동에 살던 심봉사의 외동딸 심청이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중국 남경을 왕래하는 상인들에게 공양미 300석에 팔려 인당수에 제물로 몸을 던졌는데, 그 갸륵한 효성에 감복한 옥황상제가 심청을 아름다운 한 송이 연꽃으로 변하게 하여 이곳 연못에 떠오르게 한 데서 연지(蓮池)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2025.08.30
【문화】 소연평도 월출봉 앞 부채산 밑에 맑은 물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난 골짜기가 있다. 이곳에는 조선조 19대 숙종 때의 문신 서포 김만중(金萬重)부부의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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