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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영웅 제주마, 레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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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六二五戰爭) # 장철부
【문화】
(2024.02.05. 10:23) 
◈ 27. 학도병 중 탈출 잡혀 사형 선고...황포군관 기병과 졸업 후 육본 독립기간연대 창설
한국전쟁 영웅(Korean War Hero) 장철부 중령-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삼팔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병력이 96,140명인데 반해 북한군은 두 배인 191,680명이었다. 북한의 군사력은 무척 막강하여 국군은 탱크가 1대도 없는데, 북한은 242대를 보유했다.
한국전쟁 영웅(Korean War Hero) 장철부 중령-1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삼팔선을 넘어 남침을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병력이 96,140명인데 반해 북한군은 두 배인 191,680명이었다. 북한의 군사력은 무척 막강하여 국군은 탱크가 1대도 없는데, 북한은 242대를 보유했다. 장갑차, 야포, 대전차포, 박격포는 무려 3~4배로 비교가 안 됐다. 북한 공군은 170대의 전투기를 보유했다. 삼팔선을 남침한 지 불과 3일 만에 북한 인민군은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대한민국의 용감한 국군 병사들은 북한군 탱크를 저지하려고 탱크에 몸을 던져 방어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면서 UN 및 자유 진영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북한군이 한강에 폭파되지 않은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계속 남하했다. 유엔군은 1950년 6월 29일부터 폭격기를 출격하여 한강철교 다리 폭파에 나섰고 7월 16일 성공했다. 강력한 군사 무기를 보유한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한 지 1개월 만에 국군을 계속 후퇴시켜 전선은 경상도 지역과 낙동강으로 좁혀졌다.
 
 
▲ 미군 B-26 폭격기 한강철교 폭격(1950년 6월 29일~7월 16일) (사진: 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한국전쟁 영웅 장철부의 본명은 김병원(金秉元)으로 1921년 3월 10일 평북 용천군 법흥동에서 태어나 정주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의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과 입학했다. 1944년 1월 일본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중일전쟁 최전선에 투입되었으나 탈출하다 걸려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일본군은 학병에 대한 고려로 면죄하여 충실한 황군이 되기를 바랐으나, 김병원은 중국 장쑤성 쉬저우(徐州)에서 다시 탈영하여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했다.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면서 조선의 남은 가족을 염려하여 이름을 장철부로 개명하였다.
 
 
▲ 장철부(張哲夫, 1921~1950) 기병대대장(사진:위키백과)
 
 
1945년 3월 김구 선생님의 소개로 강흥모, 이건국, 김중진과 함께 중화민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에 20기로 입학하여 1947년 2월 졸업하고 귀국하여 1947년 10월 23일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육사 5기로 입교하여, 1948년 4월 6일 임관하였다. 제1보병연대 중대장과 전술학 교관을 거쳐 1948년 12월 10일 수색단이 육본 직할 독립기갑연대로 창설되었다.
 
당시 기갑연대에는 1945년 9월 7일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하여 서울에 입성했던 미군이 사용하고 국군에 넘겨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8대와 말 350마리가 전부였다. 초대 독립기갑연대장은 이용문(李龍文, 1916~1953) 소령, 제2 기병대대장 장철부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사진:방위사업청)
 
 
장철부 소령의 기록은 짧은 기간 군대에 근무하여 많은 자료는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은 동생 김병형이 쓴 359p의 《끝없이 가는 길》과 미 육군 군사연구소에서 1961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에 남아있다. 장철부 소령 이야기는 1966년 10월~11월 문화방송에서 〈끝없이 가는 길〉이라는 연속극을 방영하였고, 1968년 KBS TV에서 8월부터 12월까지 드라마를 방영하였다.
 
1978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 전쟁사》 개정판을 편집하면서 청송 전투에서 생명을 초개처럼 던져 산화한 장철부를 왜곡 날조하여 장철부 가족을 비롯한 육사, 광복군 생존자 후배들이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 심하게 항의하였다. 현재 《끝없이 가는 길》은 시중 서점에 절판되어 국회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
 
 
▲ 미 군사 고문단(KMAG)의 검열을 받는 육군 기병대대(사진:위키피디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장군에게 제24보병사단을 즉각 한국으로 이동하라고 1950년 6월 30일 문서로 하달했다.
 
독립기갑연대는 7월 2일부터 4일에 경기도 과천에 머물며 조선인민군 선견대(先遣隊)를 공격해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켰다. 충남 공주에서 정찰 경계 임무를 맡아, 조선인민군 제6사단 1개 대대와 우연히 만나 기습 돌격으로 섬멸하고 북한군 대대장 차를 노획했다.
 
1950년 7월 14일 금강 방어선전투(공주-대평리 전투)에서 미군 제63 포병대대 B포대 미군 병사 400명이 북한군에 포위당해 전멸 위기에 봉착했다. 이때 장철부 소령이 지휘하는 제2 기병대대는 북한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포병대대 병사들의 탈출을 도왔다.
 
이 내용은 독립기갑연대 기병중대 조철돈 소위가 증언하여 1961년 발간된 미 육군 군사연구소 전사(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에 제2 기병대대 전투로 수록되어 있다. 미국의 T.R. 페렌바크가 저술한 《This kind of War》에도 기술되어 있다.
 
 
▲ T.R. 페렌바크의 《This kind of War》(사진:위키백과)
 
 
당시 한국전쟁 전황은 아주 위태하여 1950년 7월 13일 미 극동군사령부는 워커 중장을 한국으로 파견하였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작전 지휘권을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넘겼다. 장철부 소령이 지휘하는 제2 기병대대는 7월 15일 미 24사단 제34연대 제3대대가 북한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정보를 듣고 심야에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적의 후방을 기습하여 미군을 구출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조금이라도 저지하려고, 충북 영동에서 대구로 이동 중인 독립기갑연대를 제3사단에 배속시켜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동시켰다. 강원경찰 제5대대를 독립기갑연대에 배속시켰다.
 
 
▲ 66척의 함정이 도착한 포항 영일만(사진:라이프지)
 
 
도쿄만을 출발한 포항 상륙부대는 7월 18일 새벽 5시 포항해역에 도착하였다. 도일 해군 제독은 오전 5시 58분 상륙 개시를 명령하여 18일~19일 양일간 제1기병사단의 중장비 2,000대의 차량류를 양륙(揚陸)하고, 군수물자를 하역(荷役)하였다. 상륙하는 병력은 오전 7시 15분부터 상륙단정(LCM)으로 해안에 집결했다.
 
7월 19일 미 제1기병사단 허버트 R. 게이(Hobart R. Gay, 1894~1983) 소장은 일부 병력을 해안 방어작전에 투입하였다. 당시 태풍 그레이스(Grace)가 북진하여 후속 함정 66척은 7월 23일까지 계속 포항 영일만에 무혈입성했다.
 
 
▲ 포항상륙작전(사진:라이프지)
 
 
당시 해군 제임스 핸리 도일(James H. Doyle, 1897~1981) 제독은 “포항상륙작전이 성공을 못 했으면, 북한군은 부산 주변 지역을 쉽게 점령할 수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필리핀 근해에서 발생한 태풍이 올라오는 가운데 하늘이 도운 상륙작전이었다.
 
 
▲ 해병대 1사단장 올리버 P. 스미스 소장과 제임스 H. 도일 소장(사진:미 국립기록물 보관소)
 
 
경북 영덕군 장사상륙작전(1950.9.14.~15)은 인천상륙작전을 위장하기 위한 교란작전으로 139명의 학도병의 희생이 있었다. 미 제1 기병사단 허버트 R. 게이 소장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고 대구 다부동 전투(1950.8.1.~9.24)에서 승리하며 평양까지 진격했다.
 
미국 대통령은 1950년 7월 8일부터 1951년 2월 15일까지 주한 미 제1 기병사단장으로 세운 탁월한 공훈과 공로를 인정하여 육군 공훈장 2등 상을 대신하여 청동 오크 잎 클러스터를 수여했다.
 
 
▲ 미 제1 기병사단 허버트 R. 게이(Hobart R. Gay) 소장(사진:위키피디아)
 
 
7월 25일 독립기갑연대는 진보초등학교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하고 국군 제3사단과 연결하여 좌익 무장 유격대를 진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50년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북한군과 국군은 청송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7월 25일 국군 8사단이 북한군 8사단, 12사단과 전투를 벌였고, 영덕에서는 국군 3사단과 북한군 5사단이 전투를 벌였다. 이 때문에 전선에 공백이 생겨 북한군은 유격부대 제766부대를 주왕산으로 침투시켜 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때 장철부 소령의 제2 기병대대는 청송, 경주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의 공격에 맞서 싸우라는 군사 명령을 받았다.
 
기병대대는 전면전으로는 승산이 없어 말을 이용하여 야간 매복 전투를 하여 매일 밤 북한군에 심한 타격을 입혀 성과를 보고했다.
 
7월 28일 독립기갑연대는 작전을 개시하여 제3사단과 연락을 시도하면서 진보면(현 석보면) 화내리에 주둔하던 조선인민군 12사단 766여단장 오진우의 본부를 기습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배속된 강원경찰 제5대대는 주왕산면 주산지리에서 주왕사에서 하산하던 좌익 무장 유격대를 공격하였다. 이 전투로 조선인민군은 막대한 인명 살상을 당해 기병대대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상급 부대에서는 기마병을 소홀하게 생각하고, 기병대대 병사들을 모두 보병으로 전환하라고 명령을 하달했다. 장철부 소령은 군마(軍馬) 200여 필을 대구 대봉동 양목장으로 인계했다.
 
7월 29일 북한군 2개 대대가 339고지와 영양과 진보를 연결하는 국도 31호선을 일제히 공격하여 강원경찰 2개 중대가 저지에 나섰으나 병력과 화력이 딸려 철수하여, 273고지와 진보면 월전삼거리에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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