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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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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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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白頭山) 신채호(申采浩) 쑹화강([松花]江) # 고구려산성 # 나통산성 # 매하구시 # 장백산
【역사】
(2020.04.09. 12:44) 
◈ 청조의 조종산인 장백산이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을 향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나통산성 실체를 모르고 무모하게 도전한 초행길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매하구시 가운데를 지나가는 휘발하 강변을 산책했다. 강변에 있는 작은 가계에서 중국공산당의 휴대용 책자를 몇 개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곳 휘발하의 흐르는 강물도 제법 풍부하였고 넓은 강폭이 강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상류에 ‘해룡수고’와 ‘용두수고’라는 저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물의 양이 이와 같이 많다면 상류에서 매하구시까지 휘발하로 유입되는 지류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휘발하는 송화강의 상류의 지류인 셈이다. 그리고 송화강 흐름의 지리정보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 27년 전에 하르빈시에서 보았던 바다 같은 송화강 흐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이 휘발하는 매하구시에서부터 강폭이 대폭 넓어져서 휘남(輝南)현과 매전(梅甸)시 조금 지나서 동쪽의 백두산의 북쪽 면과 서쪽 면에서 흘려 나온 강물을 만나 비로소 ‘송화강’을 이루어 길림시 가기 전에 ‘송화호’에 유입된다. 즉 백두산 천지 북쪽 면에서 흐르는 물은 ‘이도송화강’으로 흐르고, 천지 서쪽 면을 흐르는 물은 무송(撫松)현을 지나서 정우(靖宇)현의 물줄기를 받아 ‘두도송화강’을 이룬다. 이 두 줄기 강물인 이도송화강과 두도송화강이 ‘백산호’로 유입되어 흘려서 매전시를 지나 ‘휘발하’ 물을 만나야 ‘송화강’이 되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송화강(松花江)을 우리 민족의 ‘아리수’라 주장하였다. 송화강은 내몽골, 길림, 흑룡강성의 3개 성에 걸쳐 있으며 유역의 면적은 55.68만㎢, 길이는 남쪽 원류에선 1,027km이며 북쪽 원류에선 2,309km이다. 송화강의 남쪽의 원류가 백두산에서 흐르는 ‘이도송화강’과 ‘두도송화강’이 있으며, 계림합달령에서 흐르는 ‘휘발하’가 있으며, 휘발하의 상류가 ‘토문하’인 셈이다. 북쪽의 원류는 ‘눈강(嫩江)’에서 발원하는데 ‘눈강’은 ‘대흥안령’ 산맥의 지맥인 이륵호리산(伊勒呼里山)에서 발원하나 수문학회에선 송화강의 정식 원류를 남쪽 백두산의 발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송화강은 북류해 송원(松原)시를 지나서 지류인 ‘눈강(嫩江)’을 유입하여 동류하며, 하르빈시를 지나 의란(依蘭)현에서, 돈화의 목단령에서 발원하는 목단(牧丹)강을 유입하여 동북으로 흘려 동강(同江)시에서 러시아에서 내려오는 흑룡강(黑龍江)을 만나서 동해에 유입된다. 따라서 신채호가 송화강을 우리 민족의 최초의 ‘아리수’라 부르는 이유는 민족고토인 내몽골, 길림, 흑룡강성의 대부분을 아우르고 있는 90개에 가까운 지류(支流)들이 송화강에 유입됐다. 이 지역에서 고대의 우리 문화가 최초로 꽃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휘발하의 상류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토문하’가 된다. ‘황여전람분성도’의 ‘성경지도’에는 휘발하 상류가 셋으로 나누어진 물 흐림 아래에 토문하(土門河)로 표시되어 있으며, 옆에는 계림합달(鷄林哈達)이라 표시되어 있다. 일본인이 1894년에 제작했던 ‘일청한삼국지도’에도 성경지도처럼 이 두 지명이 표시돼 있다는 점이다. 이 계림합달(鷄林哈達)은 지금 지도에는 용강(龍崗)산맥으로 표시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계림합달령이 삼백년 전의 강희제가 인식하고 그들의 조상에 치제를 지냈던 세칭 장백산(長白山)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계림합달령은 길림합달령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이 계림합달령에 가장 가까운 고구려산성이 ‘나통산성(羅通山城)이었다. 우리 일행은 8시에 숙소인 매하구빈관을 출발하여 유하로 가기위해 버스를 몰았는데 갑자기 교통순경이 나타나서 버스를 세우고 나서 과속했다고 50위안의 벌금을 물리고 갔다. 조금 지나니 나통산이 보이기 시작한다는데 실제로는 다른 산이었다. 도로 좌우에는 논밭과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나통구 마을과 나통진이 나타났다. 민가의 아저씨에게 길을 묻기도 하여 ’대통구‘ 로 행했지만 아니라서 다시 길을 돌렸다. 10시에 ’대통구향‘ 서북에 있는 나통산 입구에 도착했지만 좁은 길이라 버스를 주차시키고 걸어서 갔다.
 
한참 걸어서 가니 산성 표지석이 나타나서 기념사진을 찍고 천천히 비포장도로를 따라 40분 정도 산행을 시작하였다. 나통산성까지의 산행의 도로를 보니 두 시간이나 소요될 것 같다. 지금 하산해도 11시 30분이고, 남은 오늘의 답사 일정은 통화시를 거쳐 환인의 흘승골성 답사 후 단동에서 숙박해야하는 일정이다. 답사단장으로서 목표를 앞에 두고서도 후퇴라는 괴로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통산성의 실체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 초행의 실수였다.
 
결국 현 일정으로는 ‘나통산성’의 답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되돌아왔다. 나통산성의 답사는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지만 마음이 매우 불편하였다. 이번 나통산성의 답사의 목적은 나통산성 일대와 ‘계림합달령’의 상관관계의 규명이었으며, 또한 300년 전 강희제가 ‘계림합달령’을 장백산으로 인식했던 지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규명이었다. 『滿洲源流考』와 『遼史』에는 “장백산은 구 회령현 남쪽 60리에 위치(長白山在舊會寧縣南六十里)한다”고 하였다. 또한 『水道提綱』에는 “유변 밖의 계림합달에서 토문하가 나오며, 토문하에는 세 하천의 원류가 있으며 이 물들이 합해져서 북류한다(土門河出柳邊外之鷄林哈達 …… 河有三源合 而 北流)”고 적혀있다.
 
당시 강희제가 장백산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무묵눌, 늑초, 목극등의 활동지역은 청조의 조종산으로 추정되는 휘발하와 계림합달령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 확실하였다. 중국이 역사적으로 주장하는 장백산은 백두산이 아닌 이 지역의 계림합달(鷄林哈達)이다. 그들이 끊임없이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우기는 까닭은 300년 전 자행한 ‘백두산정계비’ 설치의 사기극이 탄로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시 이 지역 일대에 대한 철저한 답사를 기약하면서 버스에 승차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정오 무렵이 되었으며, 곧 이밀(二密)마을을 지나쳤다. 좌측에 큰 산이 보였다. 삼원포(三源浦)가 여기에서 1km의 거리라고 하는 팻말이 보였다. 이 삼원포가 위에서 언급한 토문하의 세 하천 원류가 모이는 곳이다. 좌측 철로에는 화물열차가 지나간다. 통화가 29km라는 팻말에 기운이 솟았다.
 
오후 1시가 훨씬 넘어 통화에 도착했다. 황우촌(黃牛村) 식당에서 삼겹살과 불고기로 식사를 했다. 이 황우촌 식당에서 놀라운 광경은 10대 소녀의 종업원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대략 10여명이었으며, 여사장의 이름이 우계하(于季霞)였다. 중국식이지만 상추와 삼겹살은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다. 오후 3시 20분에 식당을 출발하여 산속의 도로를 통해 환인의 흘승골성으로 가기로 했다. 이 흘승골성을 중국은 ‘오녀산성’으로 왜곡시킨 지 오래됐다. 이윽고 흘승골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본래 824m의 천연의 요새인 흘승고성은 주몽이 오이, 마리 협보를 데리고 세운 산성으로 졸본성이며, 유리왕 22년(B.C45년)에 국내성으로 옮겼다고 김부식의 삼국사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기 도읍지는 대동강변의 평양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압록강변의 집안도 국내성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따라서 김부식의 삼국사 기록도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대동강의 평양을 후기 고구려의 수도로 왜곡시켰느냐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와 같은 김부식의 삼국사 중 고구려의 방대한 초기 기록을 완전히 왜곡시키려면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아니면 불가능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초기 고구려의 도읍지는 어디인가. 의무려산 일대라는 설이 있으며, 산서성 평요고성설도 있다.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후기 수도 역시, 요양설과 산서성 임분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이 왜곡시킨 식민사학의 주류들이 점거하고 있는 우리 학계에선 여전히 평양을 고구려 수도로 간주하고 있으며, 고려의 국경선과 윤관의 공험진의 위치마저 왜곡시킨 교과서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계 현실이요, 가짜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한국 역사교육의 엄연한 실상이다.
 
우리 일행은 오후 4시 50분에 흘승골성 주차장에 도착하였지만 산성의 답사시간이 너무 짧아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구나 중국 관리들은 버스 승차 및 시간상의 문제로 인해 입장권을 본래 가격보다 20위안을 더 인상하여 60위안을 받겠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흘승골성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단동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환인에서 단동행 도로가 6월 1일부터 9월 10일간 석 달 동안의 도로공사로 인해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계시로 우회하여 단동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한 일행이 깊은 산중의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중에는 선인동(仙人洞) 마을과 큰 산 아래 골마다 마을이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깨끗하고 새로운 건물인 팔리전자(八里甸子)학교가 나타났다. 세칭 중국의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보였다. 마을 옆에는 맑은 시냇물도 흐르고 목동이 양떼를 몰고 오는 광경도 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깜깜한 밤길을 버스가 급속도로 달리다보니 매우 위험한 밤길이 되었다. 밤 10시 15분이 되어서야 단동에 도착하여 북한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12시 무렵 숙소인 홍원대주점(泓苑大酒店)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압록강에 가서 유람선을 타고 낙후된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볼 수 있었다. 위화도에는 6.25전쟁시에 끊어진 다리가 보였다. 9시에 단동~대련 고속도로를 타고 대련에 도착하여 식사를 한 후 오후 3시에 인천행 배에 승선했다.
백두산(白頭山) 신채호(申采浩) 쑹화강([松花]江) # 고구려산성 # 나통산성 # 매하구시 # 장백산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 제3차 고구려 역사유적 및 산성을 답사하다.
• 청조의 조종산인 장백산이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을 향하다
• 고구려의 흔적 고구려산성을 답사하다
【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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