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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영국 군대, 타이완 상륙 시도
일본 메이지 정부는 1873년에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와 미즈노 준(水野遵, 1850~1900)을 타이완에 파견하여 조사 및 정보 수집을 진행하였다.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메이지 유신 등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내무대신, 문부대신을 역임하고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초대 臺灣 총독으로 부임하여 군정을 총괄했다.
일본은 청나라에 특명 전권대사로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1828~1805)를 파견했다. 전권대사는 수행원인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 1850~1894)를 통해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에 대해 청나라 조정의 책임을 엄중하게 추궁했다. 이에 청나라는 “타이완 원주민은 우리 문명 밖의 사람들로, 청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화외지민(化外之民)이 일으킨 사건이다.”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샤를 르 장드르(Charles W. Le Gendre)(사진:위키피디아)
샤를 르 장드르(Charles W. Le Gendre, 1830~1899)는 1830년 프랑스 울랭(Oullins)에서 태어나 랭스 왕립학교와 파리대학교를 졸업했다. 24살 때 브뤼셀에서 뉴욕 출신 법률가의 딸인 클라라 V. 뮬록(Clara V. Mulock)과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북군에 자원입대하여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부상으로 1864년 퇴역했다. 미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명예 준장 계급을 수여했다. 이후 그는 청나라 아모이(샤먼, 廈門) 주재 미국 총영사로 1866년에 부임하였다.
1867년 3월 12일 미국 상선 로버(Rover, 羅妹號) 호가 태풍으로 난파되어 조셉 헌트(Joseph Hunt) 선장과 아내 머시 G. 비어만 헌트, 선원 등 14명의 생존자가 두 척의 소형 보트에 분승하여 배를 탈출하였다. 보트 한 척이 원주민이 거주하는 구이주르(龜仔甪. 臺羅, Ku-á-lut, Kenting National Park)영역에 들어갔다가, 원주민에게 붙잡혀 전원 살해되었다.
영국은 생존자 구조를 위해 군함 증기선 코모란트호(HMS Cormorant)를 파견해 3월 26일에 난파선 근처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원주민들이 머스킷 총과 화살을 쏘며 강하게 저항하자 상륙에 실패해 철수하고, 미국 해병대도 육상 원정을 시도했으나 산악이 험해 포기했다. 영국의 코모란트호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저지하기 위해 진수하여 태평양 북서부와 남미 연안에서 운항한 영국 해군 스쿠르 추진식 증기선이다.
영국 군함 증기선 코모란트호
헨리 헤이우드 벨(Henry Haywood Bell, 1808~1868) 해군 제독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5년 7월 극동으로 파견되어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는 1년 후 1866년 7월 25일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1867년 4월 예비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 시기에 미국 동인도 함대는 미국 아시아 함대로 개편되었는데, 벨 해군 제독이 초대사령관으로서 기함 하트퍼드(USS Hartford)호를 비롯해 셰넌도어(USS Shenandoah), 오네이다(USS Oneida)호 등을 지휘했다.
헨리 헤이우드 벨 해군 제독(사진:위키백과)
밸 사령관은 1867년 6월에 로버호 사건에 대한 응징을 하기 위해 타이완 원정대를 조직해 해병대를 타이완 셰딩 자연공원 쪽에 상륙하도록 지시했다. 해병대는 원주민 파이완(Paiwan) 족 근거지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산악지형이 익숙하지 않고, 산악이 너무 험난하고, 울창한 정글과 무더위에 해병대원들이 길을 잃었다. 당시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날씨에 많은 병사가 열사병에 걸려 쓰러졌다.
타이완 셰딩 자연공원의 산호초 바위(사진:위키백과)
이 원정대의 지휘관은 미국 해군의 알렉산더 슬라이델 매켄지(Alexander Slidell MacKenzie) 소령이었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군인 집안으로, 매형은 일본을 개항시킨 매튜 C. 페리 제독이다. 1867년 6월 13일, 타이완 남부 파이완(Paiwan) 족 거주지 상륙 작전 중 매켄지 소령이 밀림을 통과하다 파이완족 전사들의 매복 기습을 받아 총에 맞아 전사했다. 미 해병대는 엄격한 훈련과 생존술을 체화했지만, 혹독한 열대 기후와 원주민의 게릴라 전술에 밀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밸 사령관은 부대 지휘관의 전사 소식을 접하고 애통했지만, 산악이 너무 험난하고, 울창한 정글과 무더위에 지친 해병대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즉각 해병대원 철수를 명했다. 벨 사령관은 타이완을 떠나 함대를 일본 근해로 돌렸다. 미 해병대 철수 소식을 들은 샤를 르 장드르 영사는 타이완 파이완(Paiwan) 족 마을을 방문하여 원주민 추장과 미국인 상선 및 선원 보호에 대한 비공식 안전 보장 협약을 맺었다.
미국 아시아 함대 하트퍼드(USS Hartford)호(사진:위키피디아)
벨 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는 1867년 후반부터 서방 열강의 군함들과 함께 오사카 만(Osaka Bay)에 정박하며 효고항 개항을 이행하라고 압박했다. 원래 1868년 1월 1일에 효고항(the port of Hyogo. 현재 고베항)을 개항하기로 약속한 일본 메이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개항이 성사되지 않자, 1868년 1월 11일, 벨 제독 일행은 오사카 인근 요도강 하구에서 기함에서 내려 작은 보트로 옮겨 타고 덴포잔(Tempozan, 天保山)을 지나 상류로 올라가 히로가(Hiroga)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때 갑자기 높은 파도가 밀려와 보트가 전복되어 벨 제독과 부관인 존 H. 리드를 포함한 여러 명이 익사하고, 3명의 승조원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벨 제독의 장례식은 1월 14일 외국 함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1850년대 일본에 내항한 미국 흑선 함대(사진:위키피디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산요도(山陽道)에 속한 스오국(周防國)의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1841년 10월 16일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하급 무사 이토 다케베의 양자로 들어가 성을 ‘하야시’에서 ‘이토’가 되고 하급 무사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11세 때 동네 서당에서 글을 깨치고, 14세 때 무사들 잡역을 맡게 되었는데, 능력이 알려져 번사들의 조수로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 구루하라 료조가 이토에게 요시다 쇼인(1830~1859)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고 소개장을 써주었다. 이토는 1857년 요시다 쇼인을 만나고 그의 사학 松下村塾에서 수학하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1854년 24살 때 미국에 직접 가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려고 페리 함대 군함에 몰래 잠입해 밀항하려다 발각되어 에도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감옥에서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얻고 동료 죄수와 간수들에게 《맹자》, 《논어》 등을 가르쳤다.
요시다 쇼인(사진:위키백과)
요시다는 7개월 후 고향인 조슈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수많은 고전을 독파하며 간수들과 동료 죄수를 지도했다. 1855년 12월 옥에서 나온 요시다는 고향 집에 가택연금 처분을 받아 외출이 제한된다. 이시기 요시다 쇼인은 “서양의 침략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력을 더 키우고, 조선과 만주를 정복해야 한다.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세워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요시다는 1857년에 형기를 모두 마치고 가택연금에서 풀려 자유인이 되었다. 이후 삼촌이 운영하던 松下村塾을 물려받아 약 35~50여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 요인 암살 음모에 연루되고, 막부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었다. 혹심한 고문을 받고 암살 음모를 자백하여 1859년 10월 27일 텐마마초 감옥에서 만 29세 나이에 참수형을 당했다.
세계유산 松下村塾(사진:위키백과)
이토 히로부미는 스승 요시다 쇼인이 처형당하자, 동문인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가 조직한 단체에 가입하여 각종 테러 활동에 가담했다. 이후 1863년 5월 조슈번의 명령에 따라 영국 UCL 유학생 5명에 선발되어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그는 운이 좋아 화학자인 알렉산더 윌리엄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 Williamson) 런던대학교 교수의 저택에 하숙하면서 영어를 배우고 해군시설, 공장 등을 견학했다.
이토는 견학을 통해 서구의 발달한 문명을 보고 견문을 넓혔지만, 일본 국내에서 들려온 조슈번과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함대와의 시모노세키 전쟁 임박 소식을 듣자. 영국에 더 이상 오래 머물면 안된다는 생각에 급히 동료와 함께 1864년 6월에 귀국하여 바칸 전쟁을 막으려고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협상에 실패하여 전쟁이 벌어졌다.
4개국 연합국에 점거된 일본 마에다 포대(사진:위키피디아)
시모노세키 전쟁 과정에서 서구의 강대한 해군 군사력을 직접 경험한 이토는 강력한 천황제의 필요성을 느껴 에도 막부 타도 운동에 합류했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유신 선포로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신정부가 수립되어 효고에 직할 현이 설치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대영제국 유학과 뛰어난 영어 구사 능력을 인정해 28세의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효고현 지사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초대 공부경(工部卿) 등 요직을 역임하며 계속 승진하며 성장해나갔다.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사진:궁인창)
필자는 2017년 7월 9일 여수 소호마리나에서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에 참여하여 범선 코리아나(선장 정채호)를 타고 승조원인 모험가 이효웅, 작가 오문수 등과 함께 사흘간 푸른 바다를 항해하여 고베항에 입항했다. 당시 물길이 까다롭고 배 운항이 많은 세토내해 바닷길 안내는 사세보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와사키 선장이 한국 인천공항으로 입국하여 여수 소호마리나에서부터 고베항까지 왕복 항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대마도를 지나 시모노세키를 거쳐 일본의 세토내해를 통과할 때는 인근을 지나는 대형 선박이나 해운기관에서 수시로 운항 관련한 무선연락이 들어와 가와사끼 선장이 바로 항해에 관하여 대답하고 지시에 따랐다. 그는 시모노세키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여수까지 와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고향으로 갔다. 한일 양국의 선장은 30년 넘게 깊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 앞줄 왼쪽 새 번째가 정채호 선장이고, 둘째 줄 왼쪽 두 번째 붉은 옷을 입은 이가 가와사키 선장이다. 그는 전체 800km 항해 중에 잠시 잠을 자고는 항해를 주도했다. 일본 세토내해에서는 어선의 활동이 많아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심한 파도에도 항상 레이다와 자동항법장치를 주시하고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며 바다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사진:궁인창)
가와사끼 선장은 119톤 범선을 타고 45명과 함께 6개월간 세계 일주 항해 경력이 있지만, 항상 바다를 경외하고 존중했다. 필자와 동갑내기인 선장이 항해 지도를 들여다보며 항해 코스를 검토하던 그 시절의 모습을 문득 그리워져 옛 사진을 꺼내 보았다. 그때가 마냥 그리워 다시 바다로 나가 항해를 시작하고 싶어진다.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 중에 여유로운 자유 시간이 생겨 한국 수중고고학의 출발점이었던 고려 신안선 유물과 연관이 있는 임제종 총본산 교토 도후쿠지((東福寺), 세계유산 고야산(高野山)를 방문하고 기온 마쓰리 등을 참관하며 뜻깊은 여정을 보냈다.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사진:이효웅)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 관련 행사를 모두 마치고 2017년 7월 15일 고베항을 출항해 세토내해를 지나, 7월 17일에 무사히 여수 소호마리나로 귀환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