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지식창고 궁인창의 독서여행
[광고]
[100 세트 한정] 행운의 2달러 스타노트+네잎클로버 컬렉션 35% 19,800원 12,800원
일반 (일자별)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북양함대 기지 뤼순항, 청 및 러, 일본 치열한 각축장...미아코 주민, 조공바치고 귀환 도중 태풍 만나 대만 표류 중 파이완족 만나 구조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면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무너지고, 봉건제에서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체제가 수립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를 침략해 이권을 차지하는 것을 본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본에서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면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무너지고, 봉건제에서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체제가 수립되었다.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를 침략해 이권을 차지하는 것을 본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서구화와 산업화를 추진하며 징병제를 도입 등 대대적인 사회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며 근대 입헌 국가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국력을 키운 일본 제국은 점차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화 정책을 본격화하며 표류민 학살을 핑계로 1874년 타이완을 침공하고,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1894년 청일전쟁 등을 잇달아 일으키며 대외 영토 확장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선포(사진:나무위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200년간 안정과 평화를 되찾았으나 19세기에 접어들어 매년 반복해 발생하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여기에 세도정치로 인해 혼란과 부패가 만연해 민심이 크게 동요되고, 고종의 군제개혁으로 기존의 5군영이 2영으로 축소되고,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구식 군인들은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아 불만이 조금씩 쌓였다.
 
1882년(고종 19년) 음력 6월 5일, 구식 군인들은 13개월이나 월급이 밀린 가운데 급료로 받은 쌀에 모래가 섞여 있자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과 합세하여 교련병대와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였다. 며칠 후 음력 6월 9일(양 7월 23일), 무능한 왕권과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군인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 그들은 총을 잡고 훈련대장 집을 찾아갔으나 면담을 거절당했다. 음력 6월 10일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閔謙鎬, 1838~1882)의 집을 쳐들어갔다. 흥분된 군인들에 의해 민겸호 등이 살해되고, 일본 공사관 외교관과 수행원이 사망했다. 고종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정권을 이양했다. 왕비는 창덕궁을 탈출하여 여주를 거쳐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음력 6월 11일 고종은 청나라 텐진에 사신으로 간 영선사 김윤식과 어윤중에게 비밀리에 군사 요청을 했다.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소식과 임오군란 소식을 전해 받은 두 사람은 청나라 북양대신 대리 張樹聲(1824~1884)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북양대신 대리 張樹聲(사진:바이두백과)
 
청나라 조정은 張樹聲 북양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양함대 제독 딩루창(丁汝昌)과 참모 마젠중(馬建忠, 1845~1900)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가서 조선의 정황을 살피도록 하였다. 딩루창은 중국 안후이성 차오후시 출신으로 1854년 태평천국 운동에 가담했다가 1861년 안칭 전투에서 정설기와 함께 투항한 후 이훙장(李鴻章)의 회군에 기병으로 입대하여 태평천국 진압에 참여해 유명천과 함께 복무했다. 1874년, 청나라 정부의 군비 축소 결정에 항의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이훙장의 주선으로 해군에 복직하였다. 1875년, 이훙장은 딩루창을 북양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880년, 딩루창은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으로 건너가 순양함 두 척을 인도받고,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그들의 조선 기술과 해군 제도를 시찰했다.
 
다롄시 뤼순커우구에 해군기지
 
딩루창은 자강운동을 지지하며 군함을 외국 조선소에 의존하지 말고 국내에서 현대적인 장갑순양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를 건설할 것을 촉구해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와 랴오둥반도 다롄 뤼순 해군기지는 1890년에 완성되었다. 청나라 북양함대 기지인 뤼순항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입구가 좁고 수심이 깊어 1년 내내 얼지 않는 천연 부동항으로 황해와 발해만을 통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가치로 인해 청나라,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다.
 
도리이 류조가 촬영한 파이완족(Paiwan)(사진:위키백과)
 
1871년 양력 11월 18일(同治 10년, 메이지 4년), 류큐(琉球, 오키나와) 왕국 슈리 왕부 나하에 조공을 바치고 고향 섬으로 돌아오던 배 4척 중 미야코(宮古島) 주민 69명이 탄 야마하라호가 태풍을 만나 대만 남동부의 바야오만(八瑤灣)에 표류하였다. 배에 탔던 69명 중 2명이 익사하고 1명이 실종되었다. 표류민들은 가파른 산을 방황하다 한족을 만나 남쪽으로 가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이 말을 믿지 않고 서쪽으로 가 11월 30일경(음력 10월 18일)에 파이완족(Paiwan)을 만나 고구마, 토란 죽, 쌀 등을 대접받았다.
 
파이완족(Paiwan) 가옥(사진:위키백과)
 
원주민들은 표류민들을 가옥에 가두고 감시했다. 원주민들이 사냥 가며 집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했는데, 불안감을 느낀 표류민이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탈출하였다. 원주민들은 이들이 반드시 해적을 끌고 올 것이라고 두렵게 생각해 탈출한 사람들을 추격하여 54명을 붙잡아 살해했다. 이때 살아남은 12명은 漢族의 도움으로 생존해 福州를 거쳐 류큐로 귀환하였다.
 
파이완족 (Paiwan, 파이완어: Kacalisian, 排灣族)은 타이완 남부에 사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이다. 그들은 고산족의 한 종족으로 넓게 해석하면 중앙 산악지대 북부 산지의 루카이족과 북동부 평지의 푸유마족이 포함된 남부 산지에 분포하는 부족이다. 이들은 파이완어와 중국어를 함께 사용한다. 1931년 말 인구 조사에서 파이완족은 30,118명이었던 사람들은 2000년에는 70,331명으로 증가하고 2014년에 96,338명이 되었다. 파이완족은 대만 원주민의 약 17.7%에 달했다.
 
신화에 따르면 파이완족의 조상들은 다우산 위의 ‘파이완’이라는 곳에 살다 퍼져 나왔으며 일부 사람들은 고향의 이름을 자기들의 이름으로 삼았다. ‘파이완’에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북쪽에 다우산(大武山)과 우뤄강(武洛溪), 남쪽으로는 헝춘반도가 있다. 일부 파이완족은 타이완 동남부의 구릉 지대와 해안 평원지대에도 거주한다. 원주민의 독특한 제의로 마사루(Masaru)와 말레베크(Maleveq)가 있다. 마사루는 한 해의 수수 계통의 메조 수확을 기념하는 제의이고, 말레베크는 5년에 한 번씩 조상과 신을 경배하는 가장 성대하고 중요한 제전이다.
 
파이완족(Paiwan, 排灣族) 남녀(사진:궁인창)
 
파이완족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수장 토카토크(Tok-a-Tok, 1817~1874)이다. 그는 18개의 파이완 부족을 하나로 규합하였으며, 1867년 미국 해병대의 타이완 원정에서 미국 군인을 무찌른 뒤 파이완족 영토의 해안을 지나는 배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식 협약을 샤먼 영사와 맺어 1867년 3월에 미국 상선 로버(Rover)호의 선원들을 죽인 파이완 부족민들의 면책을 이끌었다. 파이완족은 사람의 머리 사냥(獵首) 풍습으로 유명해 주변 민족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파이완 전사들이 머리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면 여자들은 마당에 모여 영웅들을 환영하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전투에서 승리해 획득한 적들의 머리는 돌기둥 위에 걸리고 그 앞에 술과 제물을 바쳤다. 희생의 제의가 시작되면 주술사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두개골에서 머리카락 한 다발을 뽑아 엄숙히 점치는 바구니 안에 넣는 의식을 거행했다.
 
의례용 해골 선반(사진:위키백과)
 
파이완족은 부족 내에서의 결혼만을 허용하고 족외혼을 금지했다. 5년마다 돌아오는 제의의 날(말레베크)이면 결혼을 원하는 남성은 많은 나무를 베어 자신이 구혼하고자 하며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여성의 가족에게 땔감을 바쳤다. 여성들은 손에 문신(紋身)하는 풍습이 있었다. 주술사는 문신을 받는 사람의 출신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도안의 문신을 해 주었다. 지체가 낮은 집안의 여성은 문신을 받을 수 있지만, 공동체의 허락을 받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어야 했다. 지체 낮은 여성과 귀족 여성의 문신 도안은 전혀 달랐다. 문신을 받는 고통스러운 과정은 긍지와 명예를 부여하고, 자신이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파이완족 손 문신(사진:CCTV)
 
문신을 받는 과정에 많은 금기가 있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임신한 여자가 문신 과정을 지켜보아서는 안 되며, 문신을 지켜보는 사람 중에 재채기하는 사람이 나오면 금기가 깨져 의식은 중단되고 다른 적절한 날을 골랐다. 원주민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문자는 없지만, 문신을 통해 가족 코드를 손등에 기록했다. 타이완에서 손등 문신(手紋)을 가진 노인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 타이완 인류학자들은 “엄지손가락에 새겨진 인형 모양의 특수한 도안은 그녀가 이 부락의 주인이라는 것을 기록한 것이고, 손등의 태양 도안은 그녀가 태양의 자손으로 부족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팔뚝의 격자무늬와 곡선은 가족이 소유한 땅과 강을 상징한다.”라고 설명한다.
 
타이완 지룽(基隆)항(사진:궁인창)
 
2023년 7월에 부산항에서 코스타 세레나(114,500t) 크루즈를 타고 출항해 2일 만에 타이완 지룽(基隆)항에 입항했다. 기차(TRA)을 이용해 타이베이로 이동하여 타이완 시립박물관을 방문해 〈Kialreba, 우태(霧臺)로의 귀향: 국립 타이완 박물관과 현대 루카이족의 대화 특별전〉 을 관람했다. 내부 전시장에는 150여 점의 루카이(Rukai, 魯凱)족 목조 조각품과 전통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타이완 원주민의 독특한 생활 풍습과 놀라운 조각 솜씨에 감탄했다.
 
〈Kialreba, 우태(霧臺)로의 귀향 특별전〉(사진:궁인창)
 
전시장에는 임천목 대만순행도(林天木臺灣巡行圖)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회화는 1733년 청나라 옹정제 때 황실 감찰관으로 巡臺御史를 지낸 임천목(林天木, 1684~1735)의 臺灣 순시 장면을 묘사한 역사 기록화로 1924년 일본인 화가 같나세 히로시(片瀨弘, Hiroshi Katase)가 임천목의 고향인 광둥성(廣東省) 산터우(汕頭)에서 모사한 작품을 전시하였다. 이 회화를 통해 청나라 시대 관원들의 臺灣 출순 장면과 풍습, 원주민 평포족 등의 생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전시장에는 타이완의 근대화를 이끈 역대 일본 총독들의 사진과 대만의 풍부한 생태를 연구한 식물학자 등도 함께 소개했다.
 
임천목대만순행도(林天木臺灣巡行圖)(사진:National Taiwan Museum )
 
1872년 류큐를 관할하던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미야코섬 주민 학살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 메이지 정부에게 타이완 출병을 건의했다. 당시 미야코섬 주민의 타이완 실종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일본 제국의 강력한 조치를 옹호했다.
 
1872년 10월, 빗추국(備中國) 아사쿠치군 카시와지마 촌(현재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 일대) 출신의 선주 사토 리하치 등 4명의 선원이 에비스마루(蛭子丸)라는 배를 타고 상업 활동을 위해 출항했다가 중국에서 활동을 마치고 1873년 1월, 귀환하던 중 태평양에서 강한 폭풍을 만나 표류했다. 상선은 1873년 3월 타이완 남부 원주민 거주 지역에 표착해 원주민들에게 포위되어 지니고 있던 물품과 식량을 모두 빼앗기고 폭행을 당했으나, 한인 주민들과 청나라 관청의 보호를 받아 복주(福州)와 상하이를 거쳐 약 10개월 만에 무사히 귀국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일본 조야에서는 타이완 정벌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1871년에 발생한 ‘류큐 표류민 살해 사건’을 계기로 臺灣 정벌을 고심하고 있었다. 일본 메이지 정부는 류큐 주민 사건뿐만 아니라, 빗추국 출신의 선원들이 타이완에서 피해를 입은 사건을 추가 명분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표착민 사건은 1874년 일본의 타이완 침공(征台の役〉의 직접적인 명분이 되었다.
 
영국 해군 아이언듀크호(사진:Ameba)
 
1872년 7월 9일 페루 화물선 마리아 루스호(Maria Luz, マリヤ · ルス号)가 수리를 위해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에 입항했다. 이 배는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출항하여 페루 서부의 가야오(Callao) 항으로 향하다 폭풍우를 만나 선체가 심하게 파손되어 가장 가까운 항구에 입항했다. 정박하던 배에서 중국인 한 명이 밤에 삼엄한 감시를 뚫고 탈출하여 옆에 정박 중인 영국 해군 군함 아이언듀크호로 헤엄쳐가 승조원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해군 승조원들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날이 새자 일본 관리를 불러 중국인을 넘겼다. 당시 요코하마 항은 개항된 항구로 외국 선박과 선원들에게는 당연히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곳으로 관리들은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탈주한 중국인 노동자를 다시 마리아 루스 호로 넘기려고 하였으나, 중국인은 “저 배에서 지독한 학대를 당했다. 나와 같은 사람이 231명이나 더 있다.”라고 말하며 구조를 호소했다.
 
영국 해군 함장은 영국 대리공사 로버트 그랜트 왓슨(Robert Grant Watson)에게 연락을 취했다. 왓슨 대리공사는 자신이 직접 영국 해병대원들을 이끌고 화물선 마리아 루스호에 승선하여 조사를 시작하는데, 중국인 쿨리(苦力)가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일본 정부에 청나라 노동자 구조를 요청했다. 일본 당국은 소에지마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마리아 루스 호의 출항을 금지한 후 배의 항해일지를 확인하고 간부급 선원들을 접견하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한 결과 중국인 전원이 문맹이라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조차 할 수 없고, 비인간적인 계약서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상당수 노동자가 납치된 사람들로 자신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상태였다. 노동자들은 사실상의 노예였고, 마리아 루스 호 선장 리가르 도 에레라(Ricardo Herrera)는 사실상 노예 상인과 다름없었다. 이 사건은 약식재판 형태로 열린 심리를 거쳐 중국인이 하선했지만, 마리아 루스 호의 선장이 정식 재판을 청구하여 러시아가 참여하는 국제재판이 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문화】 궁인창의 독서여행
• 미국 상선 로버호 난파로 보트 탈출한 생존자, 대만 원주민에 붙잡혀 전원살해...영국 및 미국 병력, 상륙시도 불발
• 북양함대 기지 뤼순항, 청 및 러, 일본 치열한 각축장...미아코 주민, 조공바치고 귀환 도중 태풍 만나 대만 표류 중 파이완족 만나 구조
• 뛰어난 엔지니어로 기술고문으로 두 경의선 부설권 차지...체불 임금으로 가난에 허덕이며 고인돌 및 사찰 둘러보고 책 남겨
(2026.05.21. 10:24)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광고]
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0
내서재
추천 : 0
▣ 다큐먼트 작업
지식지도
알림∙의견
모든댓글보기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