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16】상징적 유물 확보위해 조씨 무덤 해체해 수백 개 상자 담아 옮겨 복원 조대수 무덤과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명나라의 오랜 관습은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대로 승계받는 것이다. 조대수(祖大壽)는 아버지의 군대를 물려받아 군문에서 근무하며 친족이 아닌 측근 장군들로 구성된 조가장(祖家將)이라는 군사 조직을 운영했다.
명나라 천계 원년(1621)에 광녕 순무 왕화정(王化貞, 1573~1632)이 조대수를 중군(中軍,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광녕위가 후금에 의해 함락되자 조대수는 군대를 이끌고 각화도로 피했다. 천계 3년, 총사령관이며 대학사인 손승종(孫承宗)은 조대수에게 닝위안(宁远)을 쌓도록 명령했다. 그는 닝위안 전투와 닝진 전투 두 차례에 걸쳐 닝위안을 지키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천계 6년(1626년) 조대수는 부총병(副總兵)에 올랐다.
▲ 祖大寿功德牌坊(사진:궁인창)
숭정 원년(1628)에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에게 요동(遼東)을 감독하면서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원숭환은 조대수를 전위 총병으로 임명하여 랴오 전위 장군의 인장을 달고 진저우(錦州)에 주둔하게 했다. 숭정 2년(1629년)에 후금 카안 황타이지(皇太极, 황태극)가 요새에 입성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고 베이징에 육박하자, 조대수는 원숭환을 따라 도시를 방어했다. 원숭환이 항복하고 옥에 투옥된 후, 조대수는 두려움에 떨며 출소했다. 이때 손승종은 사람을 보내 그를 소환했다. 이듬해 1630년에는 쭌융(遵永)에서 대승을 거두어 란저우(滦州), 쭌화(遵化), 융핑(永平), 첸안(迁安) 네 성을 수복했다.
▲ 흥성고성 남쪽 연휘문(延輝門)(사진:궁인창)
숭정 4년(1631)에 병력을 독려하여 대릉하성(大凌河城)을 쌓자, 황타이지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조대수는 원병이 궤멸하고 성안의 식량이 모두 고갈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후금에 항복하고 충성스러운 아들 1명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명나라로 돌아왔다. 송진(松锦) 대전에서 그는 진저우(锦州)를 2년 동안 지켰지만 숭정 15년(1642)에 다시 청나라에 항복했다. 청나라 조정은 여전히 그를 총병으로 임명하여 한군(汉军) 정황기(正黄旗)에 예속시켰지만, 병권(군사권)은 주지 않았다.
청나라 순치(顺治) 원년(1644년)에 조대수는 청나라 종실 어른인 八旗领袖 도르곤(多尔衮, 1612~1650)을 따라 입관하였다. 그는 순치 13년(1656년)에 사망하여 진국장군(镇国将军)으로 추증했다. 조대수는 한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가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는 수년 동안 후금에 저항했고 조대수 밑에서 많은 장군을 배출되었다. 그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왕조가 바뀔 때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좌도독, 영록대부가 되었다.
▲ 홍승주(洪承疇)(사진:바이두백과)
명나라 장수로 있다가 청나라 군대에 투항한 장수로 천수를 누린 사람은 홍승주(洪承疇, 1593~1665)이다. 그는 청나라에 귀순한 후 직접 군사를 이끌지 않고 전략가로 활동했다. 홍승주는 청조가 명나라의 통치질서를 복원할 것을 제의하여 명나라 행정조직을 빠르게 청나라에 모두 이어지게 하였다.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고, 유교를 신봉해야 한다고 조언하여 균형 잡힌 종교 체제를 확립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난징에 주둔하며 억압과 회유를 병행하며 명나라 장군을 설득하여 전쟁 기간을 단축하고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 빠르게 대륙의 질서를 잡아 힘들고 비참한 삶을 이어가며 공포에 떠는 많은 사람의 고통을 해소했다.
▲ 조대수의 묘(Tomb mound of Zu Dashou)(사진:위키미디아)
조대수가 청나라 순치 13년(1656)에 베이징에서 사망하자 후손들이 무덤이 세웠다. 무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존경의 표시물로 후손들은 묘에 정성을 쏟는다. 이 무덤은 20세기 초에 당시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의 전무 이사였던 찰스 T. 커넬리가 중국 모피 사업을 하던 영국 상인 조지 크로프츠(Crofts)와 공모한 것이다.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은 1857년 자연사박물관으로 시작되어 1914년에 토론토 중심에 건물을 건립하고 개관하였다. 프랭크 달링과 존 A. 피어슨이 설계한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건물과 나중에 알프레드 H. 채프먼과 제임스 옥슬리가 확장한 건물이 있다. 캐나다 사업가 마이클 리친 크리스탈(Michael Lee-Chin Crystal)은 예술 후원자로 3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박물관은 2002년 박물관 3차 중축 공모에 건축가 대니엘 리버스킨드(Daniel Libeskind, 1946~ )을 선정하여 2007년 6월 12일 새롭게 개관하였다. 1968년까지는 토론토대학교의 관리를 받았지만, 현재는 독립된 기관으로 아프리카 미술, 아시아 미술, 유럽과 캐나다의 역사, 자연과학과 관련된 6백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조대수의 묘는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ROM 박물관에는 40개의 갤러리에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자연사 표본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관은 1999년 9월에 한국국제교류재단과 현지 교민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성되었다.
▲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사진:국립중앙박물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8년 영국 상인 조지 크로프트(George Crofts)는 캐나다에 와서 귀중품을 비밀 거래하여 영국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배에 실리기 직전에 캐나다 경찰에 발견되어 물건은 압류되고 상인은 배상과 감옥에 갈 신분이 되었다. 이때 왕립박물관 월리엄 부관장이 크로프트를 찾아와 모든 비용을 박물관에서 부담하겠으니, 중국에서 완전한 무덤을 하나만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박물관은 개관한 지 얼마 안 돼 상징적인 유물이 필요했다. 담당자들은 전 세계의 유물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무덤을 통째로 가져오라는 제안을 받은 크로프트는 위기를 벗어나려고 제안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목돈을 요구했다.
▲ 당고항(塘沽港)(사진:ROM)
박물관과 크로프트의 밀약이 체결되어 크로프트는 여객선을 타고 중국 당고항(塘沽港, 현재 텐진항)에 입항해 문화재 장수와 도굴 전문가를 찾았다.
▲ 조대수의 묘(사진:ROM)
1919년 이 무렵 조대수의 묘(Tomb mound of Zu Dashou)가 베이징 주변 용타이 마을(Yongtai Village, 永泰村, 今北京市海淀区清河街道永泰庄)에서 가족묘 형태로 발견되었다. 청나라 황실 무덤은 너무 커서 운송이 문제라 개인의 무덤을 고려했다. 크로프트는 캐나다로 가져갈 적당한 유물을 찾아 박물관과 협의했다. 그러나 통째로 무덤을 가져갈 방법이 어렵게 되자,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해 문화재 장수는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 돈을 건네고, 조상의 무덤을 중수한다는 명분으로 무덤을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해 모든 유물을 수백 개의 상자에 담으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 유물 운반(사진:ROM)
당시 무덤을 새롭게 고친다는 소식을 들은 현장(縣長)이 사람을 보내 무덤을 확인하려고 하자 중국인 도굴 전문가는 돈을 보내 조용히 무마시켰다. 묘의 석옹중(石翁中), 석문(石門), 제상(供桌), 오공(五供), 봉분난판(寶顶栏) 유물은 1921년에 토론토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에 도착해 박물관 측은 발견 당시의 정황대로 유물을 배치하고 복원하였다.
▲ 조대수의 묘(사진:위키미디아)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학예사들은 오랜 기간 중국 무덤 연구를 계속하여 2005년 큐레이터 클라스 루텐벡은 박물관에 소장된 무덤은 조대수 장군과 3명의 아내 유해를 위해 지어졌으며 유해를 포함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조대수의 고분은 청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양아들 조택윤(祖澤潤, 1579~1656) 장군의 묘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조택윤은 주우쥔(祖遇钧)의 다섯째 아들이었는데, 후에 먼 조상인 대수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바꾸었다.
【출처】
祖泽润,明末清初将领,辽东宁远人,初名世润,小名招哥,字荫溪。祖遇钧五子,后过继远房祖大寿为养子,改名泽润,字荫渊。
▲ 석옹중(石翁中)(사진:위키미디아)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중국관에 있는 조대수 고분의 부장품 옹중석(翁仲石)은 중국 진시황 시대의 용감한 장수로 키가 크고 흉노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완옹중(阮翁仲)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청동상에서 유래되었다. 완옹중의 이야기는 3세기경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전한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주도하여 편찬한 백과전서(百科全書) 《회남자(淮南子)》에 처음 주석으로 등장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