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13】누르하치 20만 대군, 영원성 공격했으나 수차례 패퇴...많은 전공세웠으나 고자질로 헐뚣겨 경략 원숭환(袁崇煥)과 영원대첩(寧遠大捷)
중국 동북지역에서 크게 세를 펼치던 후금(後金)의 누르하치(努爾哈赤, 天明帝, 청태조, 1559~1626)는 당시 요동을 지배하였던 고려인 출신 요동총병관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의 지배 속에 후원을 받고 성장했다. 이성량은 요동 철령위의 지휘첨사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융경 4년(1570)에 요동총병관이 되어 여진족(女眞族) 방어를 담당하였다.
▲ 요동총병 이성량(사진:궁인창)
금나라 건국 전에 나온 902년 《요사》 문헌상에는 이 지역이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되어있다. 누르하치는 1583년 건주여진족 추장에 오른 뒤에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중원을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타 주변의 해서여진, 야인여진 세력을 규합하고 1616년 2월 17일 황제로 즉위하고 명나라 동쪽 지방을 공격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 요하 유역의 주민들이 대거 압록강을 넘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조선 땅으로 계속 이주했다. 경략 원숭환은 1626년 1월 누르하치가 싱칭시 영원성을 쳐들어 왔을 때 성 밖으로 일절 나가지 않고 이틀 동안 강력하게 성을 방어해 1:10의 적은 군사로 승리했다.
모문룡(毛文龍)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1621년 가도(假島)에 주둔하며 연대봉(333m) 주변에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여 조선왕조 광해군과 조정에 양식을 간청하며 청천강 이북에서 온갖 작폐를 일삼았다. 가도는 가죽나무가 많은 섬이라 가죽섬(皮島)이라고도 한다. 당시 모문룡은 1만 명의 난민을 끌어들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고 시도해 조선과 명이 모두 곤란했다.
▲ 누르하치(努爾哈赤, 天明帝)(사진:위키백과)
1629년 6월 명나라 요동 경략 원숭환(1584~1630)이 모문룡을 소환하여 쌍도(雙島)에서 주살하였다. 1626년 1월 누르하치가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영원성을 공격했다가 경략 원숭환(1584~1630)이 이끄는 명군에게 여러 차례 패퇴를 당해 후금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다. 명군은 누르하치가 이끄는 정예부대 기마병의 드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영리하게 군사 전략을 구사했다. 이 전투에서 누르하치는 심각한 부상으로 급히 후퇴했다. 당시 천계제는 산해관 밖의 고성(孤城)에서 누르하치의 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원숭환을 순무 겸 병부 우시랑(右侍郞, 국방부 차관)으로 승진시켰다. 이제 요동사령관이 된 것이다.
누루하치는 동북의 관문을 철통같이 수비하는 원숭환을 이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자 적들은 방어선 돌파를 위해서는 반드시 눈에 든 가시를 제거하려고 애썼다. 1627년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대릉하성과 소릉하성 등 여러 요새를 점령하고 금주성을 포위했다. 홍타이지는 부왕이 당한 치욕을 갚고 군주의 위엄을 보이려고 금주성 공략을 시도했으나 금주성 전투에서 군주의 체통이 완전히 무너졌다.
▲ 요동 경략 원숭환(1584~1630)(사진:바이두백과)
원숭환 총사령관은 명나라 조정의 지원을 받아 성벽을 더 보강하고 부장 조솔교(趙率敎)가 병력 30,000명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식량과 화력이 좋은 대포를 사전에 배치해 방어력이 좋았다. 이런 상황을 모른 홍타이지는 14일간이나 금주성을 포위 공략했지만 실패하자 방향을 바꿔 경량 원숭환이 지키는 영원성을 공격했다. 그런데 영원성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후금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어 홍타이지는 성을 공략하는 데 실패해 후퇴를 명했다. 홍타이지 머리에는 경략을 무너트릴 여러 방법이 생각이 났지만. 모두 무용지물로 소용이 없었다. 이에 직접 명나라 조정과 황제를 흔들 간계를 모색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제15대 황제 천계제(天啓帝, 熙宗, 1605~1627)가 16세에 등극하여 정사를 환관 위충현(魏忠賢, 1568~1627)에게 맡기고 황제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목공예 일에만 열중했다. 황제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대패질 솜씨가 워낙 뛰어나 50년 경력의 목수도 놀랄 정도였다. 당시의 목공 기술은 고급 기술로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다. 닝보 천일각에 많은 목공 작품이 남아있다.
▲ 明熹宗的木匠梦(사진:바이두백과)
황제는 후금이 지금 득세하는 것은 금나라 황릉의 왕기가 너무 강하고, 이를 미리 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방사(方士)의 말을 고지식하게 듣고는 옛 금나라 황릉 일대를 모두 파괴하라고 명했다. 금나라 후손들은 이를 보고는 치를 떨고 항상 보복을 생각했다. 권신 위충현은 민전을 착복하고 염세를 조작하며 궁정의 청동기를 파괴하고 돈을 주조하여 이익을 추구했다. 그는 권좌를 장악해 마음대로 국정을 농락하다 숭정제가 즉위하자 유배되어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1626년에는 베이징의 군 화약고인 왕공창이 폭발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황제는 매일 나무를 만지고 놀며 이복동생의 공부를 점검하고 독려했다. 하루는 동생에게 “너는 나보다 더 뛰어나니 성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천계제가 뱃놀이하러 갔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었다. 황제는 즉위한 지 7년 만에 붕어해 이복동생이 황위에 올랐다. 그가 제16대 황제 숭정제(崇禎帝, 주유검, 朱由检, 1611~1644)이다.
숭정제는 강학에 열중하고 경전을 즐겨 읽으며 성현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따르며 배우려고 노력했다, 황제는 통찰력이 있고 주도면밀하여 항상 부지런했다. 숭정제는 즉위 초에 위충현 일파를 한 번에 제거하고, 백성의 세금을 감면케 해주어 인심을 얻고, 서양기술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궁궐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겪어 항상 의심이 많고, 스트레스로 인한 강박증세와 정신병적인 증세도 있어 독단적인 결정을 많이 했다. 그는 신하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너그럽게 다루지 못하고 엄하게 처리했다. 전장에 나간 장수가 패하면 바로 목을 베어 버려 모두 겁을 먹었다. 숭정제는 공문서를 처리하기 위해 밤까지 일하고, 매일 조회를 하고 강연에 참여했다.
▲ 明与后金战争势力图(사진:바이두백과)
원숭환은 천계 7년(1627) 염금대첩을 거둔 후 얼마 지난 후 후금과의 평화협의 등의 행위에 대한 비난을 받고 사직했다. 원숭환은 다음 해에 복직하여 숭정제에게 5년 안에 요동을 수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숭정제는 명의 많은 관리가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영달과 배를 채우려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명나라 구국 영웅인 원숭환 총사령관의 대활약으로 후금의 중원진출은 잠시 주춤했다.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하고 나서부터는 명에 대한 침략 정책을 조정했다.
1629년 10월 홍타이지는 명군이 버티는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만리장성 외곽의 희봉구를 통해 수도 북경으로 군대를 침투시켰다. 이는 총사령관 원숭환의 허를 찌른 기습작전이었다. 당시 숭정제는 황성이 적에게 기습당하고 전투 소리에 놀라 무척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황궁 안을 마구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원숭환은 금군의 황성 포위 정보를 전해 듣고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틀 밤낮으로 300여 리를 급행군한 뒤 후금군보다 먼저 경사(京師, 수도) 베이징에 도착했다. 11월 20일 경사의 광거문(廣渠門)과 좌안문(左安門)에서 후금군을 격퇴해 두 번째 위첸(于謙, 1398~1457)으로 불렸다. 위첸은 명나라 대신으로 영락제 19년에 출사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고후의 난(朱高煦之乱)을 평정하여 선종(宣宗)의 신임을 받아 산시(山西)와 허난(河南)의 순무(巡撫)를 지냈다.
기습공격에 강한 홍타이지는 이전부터 계획했던 반간계(反間計) 이간책을 가동했다. 후금은 명나라 내관들의 조직인 엄당(奄黨, 환관당)의 간신배를 매수해 “경략 원숭환이 부하들을 마구 학대하고, 군량미를 착복하며, 명나라 조정을 자주 업신여기고, 여진족과 몰래 내통하며 원숭환이 북경을 탈취하려 후금과 몰래 밀약을 했다.”라고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 허위 정보를 명나라 황제에게 계속 들어가도록 사주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엄당의 무리와 승진을 꿈꾸는 부하 장수들이 명 황제에게 온갖 이간질과 고자질을 해대며 원숭환을 헐뜯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