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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하일기 12】요서에서 중원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관외 방어목적으로 성 축성
中 4대 고성인 랴오닝성 흥성고성 방문기
관광버스는 랴오닝성(遼寧省) 흥성고성(興城古城, 兴城古城, 영원위)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 고성을 방문한 것은 연암 박지원 일행이 건륭 45년(1780) 7월 19일 여름에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고성 밖에서 하루를 묵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12】요서에서 중원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관외 방어목적으로 성 축성
中 4대 고성인 랴오닝성 흥성고성 방문기
 
 
관광버스는 랴오닝성(遼寧省) 흥성고성(興城古城, 兴城古城, 영원위)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 고성을 방문한 것은 연암 박지원 일행이 건륭 45년(1780) 7월 19일 여름에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고성 밖에서 하루를 묵었기 때문이다. 흥성고성은 요서(遼西) 구릉 지를 배경으로 남으로는 발해(渤海)가 가까이 접해있다.
 
 
▲ 요서주랑 지도(자료:권오중, 《요동왕국과 동아시아》 28p)
 
 
흥성고성은 예로부터 요서 주랑의 중부지역에서 요충지로 꼽혔으며 요동(遼東)지역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추였다. 흥성은 요나라 성종 통화(統和) 8년(990)에 흥성 현이 처음 설치되고 치소(治所)가 위치했다. 이후 명나라 선덕(宣德) 3년(1428)에 요동 총병 무개, 도어사 포회덕이 성 건설을 청원하여 명나라 관외 방어체계 목적으로 이곳에 성을 쌓아 선덕 5년(1430)에 완성하고 영원위성(寧遠衛城)으로 불렀다. 성은 사각형 위성 설계를 기본으로 4개의 문에는 옹성이 설치되고 포대가 세워져 방어와 행정 기능을 담당했다.
 
 
▲ 흥성고성 홍이포(사진:궁인창)
 
 
흥성고성은 청나라 때에 중수하며 영원주성(寧遠州省)으로 개칭하였다가 1914년에 다시 이름을 현재의 흥성(興城)으로 다시 이름을 고쳤고 1986년에는 현과 시를 폐지하였다. 흥성고성은 명나라 만리장성 방어체계에서 유일하게 위성(위성 소성 보성 역성 해안 방어를 하나로 통합한 요새로서 특히 전략적 위치가 매우 중요했다. 성벽을 바라보니 조금 전에 본 금주성지와 다르게 웅장하고 홍이대포(紅夷大砲)가 있었다.
 
안동립 답사대장이 “관람 시간을 얼마나 주면 좋겠나?”라고 물었다. 대원들이 아무런 말이 없자, 안 대장은 중국의 4대 고성인 흥성고성, 시안고성, 형주(荊州)고성, 산서 평요고성을 설명하고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평요고성을 방문한 적이 있어 관람 시간을 30분으로 제한한다고 말했다. 반원형의 흥성고성 옹성으로 들어가면서 대형 대포를 보는 순간 이 장소가 명과 후금의 최대 격전지였음을 깨달았다.
 
명나라는 1604년 네덜란드 군대와 전투할 때 적의 대포 컬버린(Culverin)을 홍이포(紅夷砲)로 불렀다, 컬버린은 뱀(colubrinus)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어 개인용 화기로 사용되다 40kg 남짓의 대형화포로 진화하여 공격 대상을 먼 거리에서 포격하기 위해 함포형으로 개발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네덜란드 대포의 파괴력에 놀라 1618년에 대표를 수입하였고 1621년에는 복제품을 만들고 대량 주조했다.
 
 
▲ 컬버린(Culverin)(사진:위키백과)
 
 
명나라 기술자들은 겉 관은 구리, 소관은 주철로 주조하는 기술을 발명해 대포를 만들던 사람들은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세운 대포 주조공장에 초청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당시 광주(廣州)의 양광총독부(兩廣總督府)에서는 홍이포 생산에 주력하여 500문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흥성고성은 축조 당시 모습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고 내부가 개발되지 않아 학자들은 흥성고성 유적을 귀중하게 여긴다. 고성은 정방형 모양으로 축조 당시 모습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개발이 더뎌 학자들은 흥성고성 유적을 최고로 평가한다.
 
 
▲ 도로 보수공사(사진:궁인창)
 
 
흥성고성은 정방형 모양으로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다. 본래 성은 외성과 내성이 있었는데, 외성은 모두 무너졌다. 둘레가 3.2km, 높이가 8.8m로 4대 성문은 동쪽 춘화문(春和門) 남쪽 연휘문(延輝門) 서쪽 영녕문(永寧門) 북쪽 위원문(威遠門)이다.
 
핑요고성을 떠올리며 성안으로 걸어갔는데 성 내부는 하수관을 교체하고 길에 커다란 돌을 바닥에 다시 설치하고 있어 흙먼지가 많아 주변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 볼거리가 없었다. 길을 걷다 계요독사부(薊遼督師府)가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관은 명나라 말기 병부 대신 원숭환(袁崇煥)이 닝위안(흥성)의 길료군대와 주둔군을 감독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고 흥성에 주둔하면서 군사 및 지도기관을 건설한 곳이었다.
 
 
▲ 계료독사부(薊遼督師府)(사진:궁인창)
 
 
원숭환 장군은 랴오닝성 전체와 허베이성(河北省)의 기진, 텐진, 산동성 라이자우(萊州) 등 지역을 담당했다. 전시관 내부에는 명·청 시대의 고대 역사와 요동 전투 영웅의 삶을 소개했다. 닝위안(興城) 전투 장면과 군대 제복, 병기, 총기, 갑옷, 깃발 등을 전시하고 감옥 방은 명나라 태수부 감옥으로 수감자를 가두는 방을 재현했다. 계요독사부 담장에는 아름다운 동물 1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 종고루 이윤선 교수(사진:궁인창)
 
 
흥성고성 안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니 종고루(鐘鼓樓)가 보였다. 종고루의 종과 북은 평시에는 시간을 알렸고 전시에는 진군을 알리는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 주변에 안내판이 없어 가이드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황당 위치를 물었다. 고성 내에는 동북 3성에서 제일 오래된 문묘(文廟)와 영원대첩(寧遠大捷)을 기록한 조씨 패루가 있어 고덕지도(高德地圖) 앱을 보면서 주변 문화재를 살폈다.
 
 
▲ 종고루 표지석(사진:궁인창)
 
 
중국 동북지역에서 크게 세를 펼치던 후금(後金)의 누르하치는 당시 요동을 지배하였던 고려 출신 요동총병관 이성량(李成梁, 1526~1615)의 지배 속에 후원을 받고 성장했다. 이성량은 요동 철령위의 지휘첨사 관직을 세습했다. 이성량은 융경 4년(1570)에 요동총병관이 되어 여진족(女眞族) 방어를 담당하였다. 숭정 원년(1628)에 명나라 조정은 원숭환에게 요동(遼東)을 감독하면서 장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원숭환은 조대수를 전위 총병으로 임명하여 랴오 전위 장군의 인장을 달고 진저우(錦州)에 주둔하게 했다. 숭정 2년(1629년)에 후금 카안 황타이지(皇太极)가 요새에 입성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고 베이징에 육박하자, 조대수는 원숭환을 따라 도시를 방어했다. 원숭환이 항복하고 옥에 투옥된 후, 조대수는 두려움에 떨며 출소했다. 이때 손승종은 사람을 보내 그를 소환했다. 이듬해 1630년에 쭌융(遵永)에서 대승을 거두어 란저우(滦州), 쭌화(遵化), 융핑(永平), 첸안(迁安) 4성을 수복했다.
 
숭정 4년(1631)에 병력을 독려하여 대릉하성(大凌河城)을 쌓자, 황타이지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조대수는 원병이 궤멸하고 성안의 식량이 모두 고갈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후금에 항복하고 충성스러운 아들 1명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명나라로 돌아왔다. 송진(松锦) 대전에서 그는 진저우(锦州)를 2년 동안 지켰지만, 숭정 15년(1642)에 다시 청에 항복했다. 청나라 조정은 여전히 그를 총병으로 임명하여 한군(汉军) 정황기(正黄旗)에 예속시켰지만, 군사권은 주지 않았다.
 
청나라 순치(顺治) 원년(1644년)에 조대수는 청나라 종실 어른인 찰기영유(八旗领袖) 도르곤(多尔衮, 1612~1650)을 따라 입관하였고 순치 13년(1656년)에 사망하여 진국장군(镇国将军)으로 추증했다. 조대수는 한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가 지휘하는 명나라 군대는 수년 동안 후금에 저항했고 많은 장군을 배출하였다. 그는 명이 청 왕조가 바뀔 때 매우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좌도독, 영록대부가 되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은 천계 원년(1621년)에 요동 순무 왕화정의 명을 받아 1,907명의 용사를 이끌고 적의 후방에 깊숙이 들어가 저도, 해양도, 장산도, 광록도 등 2,000여 리의 해안 섬을 먼저 수복했다. 같은 해 7월 14일, 진강(단둥시)의 후금 주력이 쌍산에 가서 후금을 내리지 않으려는 백성을 몰살하고, 성이 공허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생원 왕이닝과 상의하여 진강 중군 천량책을 내응으로 삼고, 백여 명을 이끌고 진강을 야습하여 후금의 군사를 물리쳤다. 진강대첩은 명군이 후금과 싸운 이후 첫 번째 승리로 명나라 조정은 모문룡을 파격적으로 발탁하여 부총병으로 승진시켰다.
 
 
▲ 명나라 숭정제(사진:바이두백과)
 
 
습격을 당한 후금은 대군을 일으켜 모문룡을 공격했다. 모문룡은 후금의 요동 공격으로 대패하여 조선 땅으로 도주해 도움을 요청한다, 광해군과 신하들은 명분이 없어 평안도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椵島)에 임시로 머물게 한다. 동강진이 설립된 후, 모문룡은 전쟁으로 인해 집을 잃은 주민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모문룡은 극도로 낭비가 심해 낭비되는 군비가 계산할 수 없고, 상인을 모집해 금지 물품을 파는 일에만 열중했다.
 
경략 원숭환은 모문룡의 군비 지출이 막대하여 조정에 상서하고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모문룡을 직접 만나 조사하던 중 8살이 많은 모문룡이 너무 오만하게 자신만이 요동에 대해 잘 알고 익숙하다고 주장하며 경략에게 대들어 경략은 모문룡을 참살했다. 동강진을 지키던 모문룡의 부하들은 명을 배신했다. 그동안 동강진이 후금 군대의 남침을 견제했는데 이후에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가도가 빌미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명나라 숭정제는 귀가 얇아 떠도는 소문을 사실로만 여겼다. 황제는 원숭환이 경사를 방어하고 적을 물리쳤지만, 전투에서 여러 번 황제의 뜻을 거역하고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원숭환을 도성으로 불러들인 후 옥에 투옥했다. 이때 명나라 대학사 온체인이 앞장을 섰다. 그는 모문룡과 동향으로 평소 많은 뇌물을 받았다. 그는 “원숭환이 홍타이지와 내통하여 후금군을 황성으로 끌어들였다.”라고 모함하며 즉시 원숭환을 잡아들여 처형하라고 주장했다. 홍타이지가 군대를 동원해 베이징 황궁을 공격했을 때 원숭환이 군대를 이끌고 와 황제를 구했다. 이때 원숭환은 덕승문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자고 요청했지만, 숭정제가 이를 거부한 적이 있었다. 간신배들은 이를 두고 모반의 죄를 뒤집어 씌었다. 원숭환은 황제를 속인 죄, 모반의 죄, 대역모략죄로 숭정 2년(1630)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22일) 북경의 저잣거리에서 책형(磔刑)을 당했다. 청의 형벌 제도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책형은 죄인을 기둥에 묶어놓고 형리들이 온몸의 살점을 하나씩 발라내 고통을 주고, 사지(四肢)를 부러트려 심한 고통을 겪도록 하고는 다시 목을 베어 두개골을 완전히 부숴버리는 아주 잔혹한 형벌이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은 구국 영웅 요동 총사령관 원숭환의 나이가 당시 46세였다.
 
명나라는 숭정제가 집권한 이후 많은 인재와 고굉지신(股肱之臣)이 모두 사라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숭환, 조대수, 노상승, 손전정, 문진맹, 유종주 등이다. 숭정제는 17년간 황위에 있으면서 50명의 내각 인원을 바꾸고, 14명의 병부상서를 바꾸었다. 죽이거나 자살하게 만든 독사나 총독이 11명이고, 죽인 순무가 11명이다. 숭정제 치하에서 감옥에 가두고 구타당하며 치욕을 당한 관리가 많아 민심이 동요했다. 명나라 멸망 전인 숭정 14년에는 감옥에 갇혀있던 대신 관리가 145명에 달했다. 학자들은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명나라의 멸망을 촉발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명나라 경략 원숭환이 2만 명도 채 안 되는 군사로 누르하치와 황타이지의 13만 명의 군대를 격퇴한 영원대첩(寧遠大捷), 영금대첩(寧錦大捷)은 정말 기적 같은 전투라고 높게 평가했다. 중국 역사상 애국 명장으로 손꼽히는 원숭환의 주검이 사실상 명나라의 명암을 결정했다고 평가하는 중국 학자들이 많다. 원숭환의 죽음으로 명 군사들의 기세가 꺾이고 동북 군민들의 결사 항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각종 문제로 몸살을 앓다가 14년 후인 1644년 멸망했다. 1644년 4월 24일 이자성이 지휘하는 군대는 베이징을 포위하여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숭정제가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은 모두 도망가고 환관 왕승은(王承恩)이 홀로 남아 황제를 보필했다. 다음 날 아침에 자금성이 불에 타자 숭정제는 자식들을 피신시키고 자금성 북쪽에 있는 경산(景山, 88m)으로 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 토지묘 현판(사진:궁인창)
 
 
장군부를 지나 토지묘와 오랜 역사를 지닌 흥성 문묘를 담장 밖에서 구경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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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