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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낙랑군(樂浪郡) 박제가(朴齊家) 베이징(北京) 유리창(琉璃廠) # 해왕촌
최근 3개월 조회수 : 3 (5 등급)
【문화】
(게재일: 2023.12.26. (최종: 2023.12.27. 09:28)) 
◈ 청에 파견 세키노 다다시, 낙랑군 유물 발견 보고서 써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탐방-2
청나라 유리창 문화거리를 방문한 사람 중에 두 명의 일본인 학자가 있다.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는 1906년에 청에 파견되어 중국 건축을 연구하고, 1908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낙랑군을 조사하였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평양 낙랑 유물을 대부분 우연히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도 하지를 않았다.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탐방-2
 
청나라 유리창 문화거리를 방문한 사람 중에 두 명의 일본인 학자가 있다.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는 1906년에 청에 파견되어 중국 건축을 연구하고, 1908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낙랑군을 조사하였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평양 낙랑 유물을 대부분 우연히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도 하지를 않았다.
 
 
유리창 문화거리(사진 안동립)
 
 
그는 《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는 책임자로 선정되어 1935년까지 15권을 발간했다. 그는 1918년에 베이징 유리창에서 한대(漢代) 유물을 대량 구매하여 조선총독부로 보냈다. 《세키노 다다시 일기(關野貞日記)》 대정(大正) 7년(1918) 3월 22일 일기에는 “오전에 죽촌(竹村)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북경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漢)나라 시대의 발굴물이 많다.
 
낙랑 출토품을 대체로 모두 갖추어 있어(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이라고 적었다. 학자들은 세키노 다다시가 평양에서 우연히 발굴했다는 출토품들 대다수가 사실은 북경 유리창 골동품점에서 구매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후지츠카 지카시(1879~1948) 교수는 도쿄제국대에서 중국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철학을 공부한 학자로 1926년부터 1940년까지 경성제국대에서 중국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후지츠카 지카시는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베이징 주재 해외연구자로 파견되어 유리창에서 수 만 권의 많은 연구자료를 수집했다. 1921년 가을 후지츠카는 유리창 서점에서 우연히 조선 선비의 이름을 발견한다.
 
청 진전(陳鱣)이 쓴 간장문초(簡莊文鈔)를 읽으면서 정유고략서(貞蕤藁略敍) 라는 글에 조선국 사신 박수기(朴修其) 검서(檢書)라는 이름을 처음 보게 되고, 박수기가 바로 박제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지츠카는 47세 되던 해인 1926년에 조선에 건너와. 인사동에서 19세기 조선 역관들의 시문과 편지 등 1,000여 점의 자료를 취득했다. 그리고 민영휘가 소장했던 〈세한도〉를 경매를 통해 얻었다. 〈세한도〉는 추사가 1844년 제주도에 유배를 가 본인이 원하는 책을 역관 이상적이 모두 구해줘 제자에게 고마움의 선물로 보낸 서화이다.
 
인사동 고서점인 한남서림에 우연히 들렸다가 《사가시(四家詩)》라는 책에서 박제가 이름을 보았다. 책 서문에는 청나라 작가의 서문이 있었고, 사가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4명의 신진학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박제가는 추사의 스승으로 베이징을 다섯 번이나 방문했다.
 
후지츠카 교수는 이후 박제가 선생 연구에 전념했다. 후지츠카 교수는 중국철학을 연구하면서 《논어》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유리창에서 옹방강과 완원, 추사 김정희를 접하고 연구 방향을 바꿨다. 1936년 58세에 〈조선조에서 淸朝 文化의 移入과 金阮堂〉 이란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추사의 집안 내력을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은 유당(酉堂) 영의정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의 증손으로, 할아버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가 되었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이주(金頤柱)이다. 추사의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俞氏) 유준주(兪駿柱, 1746~1793)의 딸이다.
 
김노경은 순조 임금의 깊은 신임을 얻어 선공감부정, 현감, 이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경상 감사, 공조 판서, 예문관 좌학, 홍문관제학, 좌부빈객, 예조 판서, 이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형조 판서, 한성 판윤, 병조판서, 광주부 유수, 호조 판서, 지돈녕 부사를 지냈다. 중국 사행(使行)으로 1809년 동지 및 사은 부사로, 1822년에는 동지사로 연경을 방문했다.
 
 
청나라 화가 나빙(羅聘, 1733~1799)이 그린 박제가 초상화
 
 
추사의 출생지는 후지츠카 교수의 주장으로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로 알고 있다. 2021년 8월 출간한 최열 선생의 《추사 김정희 평전》에는 추사의 출생지를 한양으로 주장한다. 근거로 든 문헌은 추사 외할아버지 유준주의 동생인 유만주의 일기 〈흠영〉 때문이다. 추사는 중앙우체국 자리인 낙동(회현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다. 추사는 어린 시절을 용산(蓉山)과 금호(琴湖, 흑석동), 백송이 있는 통의동 본가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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