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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유리창(琉璃廠)
유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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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琉璃廠)
중국 베이징 화평문 바깥에 위치한 큰 거리의 이름.
▣ 지식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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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 (琉璃廠) 베이징
▣ 시민참여콘텐츠
◈ 인기순 (1 ~ 4 위)
2024.03.25
전국 100년 이상 점포 1600개..베이징 류비쥐, 5백년간 야채절임 팔아
【문화】 라오쯔하오(老字号) 중국 베이징 유리창 문화거리는 민국(民國, 1912~1949년 10월) 시기에 화평문(和平門)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되었다. 유리창 문화거리에서 고서적, 서화, 골동품 등 많은 점포가 다양한 물품을 보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가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가이드가 질문했더니 가이드는 140개의 오래된 전통 점포(라오쯔하오, 老字号)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2023.12.26
청에 파견 세키노 다다시, 낙랑군 유물 발견 보고서 써
【문화】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탐방-2 청나라 유리창 문화거리를 방문한 사람 중에 두 명의 일본인 학자가 있다.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는 1906년에 청에 파견되어 중국 건축을 연구하고, 1908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낙랑군을 조사하였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평양 낙랑 유물을 대부분 우연히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도 하지를 않았다.
2023.12.24
악빈, 용문-운강 석굴 불상 잘라 외국에 팔아 횡재
【문화】 베이징 해왕촌공원 - 1 1920년대 해왕촌 유리창 골동품 상회에는 외국인들이 자주 찾아와 문화재급 물건을 자주 거래했다. 유리창 골동품 상인들은 외국인들이 원하는 물건이 없거나 제 때에 조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유리창 상인 중에 악빈(岳彬, 1896~1954)이란 패기만만한 젊은 골동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있었다.
2024.01.01
국가무형문화유산 보유한 기술자 50명 근무
【문화】 롱바오차이(榮寶齎, 영보재)-1 청나라 강희제 11년(1672)에 문을 연 송죽재(松竹齎)는 1894년에 ‘문학과 친하다’라는 우아한 이름을 따서 롱바오차이(榮寶齎)로 상호를 바꾸었다. 롱바오차이의 역사는 350년이나 되었다. 1950년 민관합동으로 ‘영보재신기’가 설립되고, 이어서 1952년 국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궈모뤄(郭沫若, 1892~1978)의 묵적(墨跡) 글씨를 대표 상호로 삼고 디자인했다.
◈ 등록순
2024.03.25
전국 100년 이상 점포 1600개..베이징 류비쥐, 5백년간 야채절임 팔아
【문화】 라오쯔하오(老字号) 중국 베이징 유리창 문화거리는 민국(民國, 1912~1949년 10월) 시기에 화평문(和平門)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되었다. 유리창 문화거리에서 고서적, 서화, 골동품 등 많은 점포가 다양한 물품을 보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가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가이드가 질문했더니 가이드는 140개의 오래된 전통 점포(라오쯔하오, 老字号)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2024.01.01
전황석으로 새긴 도장에서 뿜여져 나오는 기운 느껴
【문화】 롱바오차이(榮寶齎, 영보재)-2 일제강점기 당시 서화 수장가이자 인장 애호가인 이용문(李容汶, 1887~1951)은 1928년 여름에 베이징 유리창을 방문하여 전황석 등 도장 재료를 구입하고, 전각명가(篆刻名家)들의 작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허베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많은 고인(古印)을 사들였다.
2024.01.01
국가무형문화유산 보유한 기술자 50명 근무
【문화】 롱바오차이(榮寶齎, 영보재)-1 청나라 강희제 11년(1672)에 문을 연 송죽재(松竹齎)는 1894년에 ‘문학과 친하다’라는 우아한 이름을 따서 롱바오차이(榮寶齎)로 상호를 바꾸었다. 롱바오차이의 역사는 350년이나 되었다. 1950년 민관합동으로 ‘영보재신기’가 설립되고, 이어서 1952년 국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궈모뤄(郭沫若, 1892~1978)의 묵적(墨跡) 글씨를 대표 상호로 삼고 디자인했다.
2023.12.26
청에 파견 세키노 다다시, 낙랑군 유물 발견 보고서 써
【문화】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탐방-2 청나라 유리창 문화거리를 방문한 사람 중에 두 명의 일본인 학자가 있다.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는 1906년에 청에 파견되어 중국 건축을 연구하고, 1908년부터는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낙랑군을 조사하였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평양 낙랑 유물을 대부분 우연히 발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누구도 의심도 하지를 않았다.
2023.12.26
만주-한족 분성거주 정책 따라 손님 몰려 가게 번창
【문화】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탐방-1 중국 가이드 손광휘(孫光輝) 사장이 우리 일행을 처음 안내한 곳은 베이징 광장 근처에 있는 한국의 인사동 같은 유리창 문화거리였다. 문화거리는 800m로 짧지만, 역사가 오래된 장소였다.
2023.12.24
전국 도굴범 관계 맺어 귀중한 문화재 몰래 거래
【문화】 베이징 해왕촌공원 - 2 악빈(Yue Bin)은 1896년 허베이성 통현 장거좡(張各庄)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2년간 서당을 다녔다. 공부를 더 하고 싶고, 과거를 보고 싶었지만, 생활이 어려워 중단했다. 15살이 되었을 때 악빈의 부모는 아들을 베이징 작은 골동품 가게의 견습생으로 들여보냈다.
2023.12.24
악빈, 용문-운강 석굴 불상 잘라 외국에 팔아 횡재
【문화】 베이징 해왕촌공원 - 1 1920년대 해왕촌 유리창 골동품 상회에는 외국인들이 자주 찾아와 문화재급 물건을 자주 거래했다. 유리창 골동품 상인들은 외국인들이 원하는 물건이 없거나 제 때에 조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유리창 상인 중에 악빈(岳彬, 1896~1954)이란 패기만만한 젊은 골동품을 취급하는 상인이 있었다.
2019.09.01
【역사】 [스카이데일리 연재] 만리장성은 우리 선조들도 쌓은 성곽…만리장성 연장론 모두 허구
▣ 백과사전
중국 베이징 화평문 바깥에 위치한 큰 거리의 이름.
 

개설

과거의 명칭은 해왕촌(海王村)이었다. 원·명대에 유리를 굽는 가마가 세워져 궁전과 묘우의 유리기와를 공급하면서 유리창이라고 하였다. 청나라 초에 골동품 책방이 이곳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는데, 건륭 연간(1736~1795년)에 이르러 『사고전서』를 수찬하면서부터 학자와 문인들이 북경으로 모여들면서 유리창의 옛 서적들과 자화(字畫)·금석(金石) 및 문방사우 등의 점포가 크게 흥성하면서 문화가로서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청말 유리창에는 133개의 골동품가가 있었다. 1980년 중국 정부는 유리창을 중건을 시작하여 1984년에 준공하였다.
 

명칭 유래

원·명대에 유리를 굽는 가마가 세워져 궁전과 묘우의 유리기와를 공급하면서 유리창이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유리창은 북경 주변의 작은 촌락인 해왕촌이었다. 원대에 북경에 도읍을 건설하면서 원 정부는 토목공사를 시작하여 4개의 가마터를 설치하였는데 유리창은 그중 하나로 해왕촌에 설치되었다. 명대 내성(內城)을 건설하게 되자 궁전 건설의 필요에 따라 유리창은 관요로서 규모도 확대되었고 환관 중 최고 우두머리인 태감이 관장하게 되었다. 1553년 북경에 외성(外城)을 건설하여 도시 규모가 확대되자 유리창이 위치하였던 곳도 교외에서 성내로 바뀌었다. 그러나 유리 제작이 주변 환경에 오염을 일으킬 수 있어서 가마를 북경 서부의 문두구구(門頭溝區)의 유리거촌(琉璃渠村)으로 옮겼는데 본래의 유리창 터는 그 이름을 유지하게 되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모든 한관 및 상민들을 남성(南城)에 거주하게 하여 남성에 위치한 선무구에 한인들이 유입되었다. 또 전국 각지의 동향인이나 동종업자들의 친목도모 장소인 회관(會館)도 이 주변에 건설되면서 유리창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다. 1773년 건륭황제가 『사고전서』의 편찬을 명하자 이에 참여한 관료나 학자들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유리창에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서적과 문방 도구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늘어나 문화가로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청 말기에 이르러 유리창은 점차 골동품 시장이 들어서서 서점을 능가하여 130여 가구에 이르렀고 중화민국 초에는 200여 가구로 늘어났다.
 
유리창은 조공 및 무역을 위하여 북경에 온 사신과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더욱 번화해졌다. 조선의 사신들은 그 번화함을 본국에 돌아가 보고하기도 하였는데, 정조대에 정원시는 유리창은 호족(胡族)과 만족(蠻族) 상인들의 수레가 앞다투어 가느라 바퀴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매우 번화한 곳이라고 하였다(『정조실록』 4년 11월 27일). 특히 홍대용이 사행단을 따라갔다가 유리창에서 과거를 보러 온 중국 지식인 엄성(嚴誠) 등과 친분을 맺고 교류한 일은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중국 정부는 유리창의 규모를 더욱 확대하여 총 면적이 34,000㎡에 달하였다.
 

위치 비정

현재 북경 선무구(宣武區) 화평문(和平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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