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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
원삼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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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 시대 (原三國時代)
한국 고대사에서 편년상 초기 철기 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시기. 고구려ㆍ 백제ㆍ 신라 삼국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단계로, 말 그대로 원초기의 삼국 시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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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 시대 (原三國時代) 독무덤 널무덤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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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으로 본 임실 (저작물)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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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4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향토】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99% 이상을 차지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 등록순
2024.01.04
Ⅱ. 선사시대 때 거점지역으로 발돋움
【향토】 인류가 불을 처음 이용하고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와 나무나 뼈로 만든 도구를 사용한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99% 이상을 차지한다. 임실군에 사람들이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임실군 신평면 가덕리 하가유적에서 뗀석기와 몸돌, 슴베찌르개, 각추상석기, 나이프형석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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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3) 백과 백제 (2) 백과 신라 (2) 백과 임실군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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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서 편년상 초기 철기 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시기. 고구려ㆍ 백제ㆍ 신라 삼국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이전의 단계로, 말 그대로 원초기의 삼국 시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래 문헌 사학에서는 이 시기를 삼한 시대 또는 부족 국가 시대로 불렀고, 고고학계에서는 김해 시대(金海時代) 또는 초기 철기 시대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들 용어들은 이후 삼국의 체제 정비와 일원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게 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의 하나로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원삼국 시대 개념이 제기되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특징으로는 청동기의 실용성 소멸, 철기 생산의 보급 및 확대, 김해 토기의 등장, 농경 문화 특히 벼농사 의 발전, 고인돌의 소멸, 돌널무덤의 발달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적지로는 한강 유역에 경기도 가평군 마장리(馬場里), 양평군 대심리(大心里), 서울 풍납동 토성(風納洞土城) 등이 있고, 낙동강 유역에는 창원 다호리(茶戶里), 대구 달성(達城), 고성 송천리(松川里), 김해 양동(良洞)·지내동(池內洞)· 부원동(府院洞), 부산 구서동(久瑞洞)·노포동(老圃洞), 경주 조양동(朝陽洞)·황성동(隍城洞), 합천 저포, 마산 성산 등이 있다.
 
이 시대에는 청동기의 실용성이 소멸되고 철제 도구가 널리 보급되어, 이전에 청동기와 철기가 함께 사용되던 시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에 따라 발달 된 철제 농기구를 바탕으로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을 뿐 아니라, 철과 철기 등을 낙랑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여 교역의 범위를 넓혀 나갔다. 그리하여 마장리와 대심리 유적지에는 제철(製鐵)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철제 도끼 등의 농기구가 출토되었다. 그러나 철기가 많이 보급되기는 하였지만, 아직은 석기류의 사용 흔적도 계속 보여진다. 돌도끼·돌화살촉·반달 모양의 돌칼 등 석기를 사용한 흔적도 남아 있고, 때로는 짐승의 뼈로 만든 골기(骨器)도 사용되었다. 장신구로는 벽옥ㆍ 수정ㆍ 활석 등으로 만든 구슬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토기는 회색 경질(灰色硬質)의 돗자리무늬 토기인 김해식 토기 와 소위 와질 토기(瓦質土器)라 하는 경질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이들 경질 토기는 재래의 민무늬 토기에 중국식 회도(灰陶)의 기술이 가미된 것으로, 태토(胎土 : 바탕흙)가 보다 정선 되고, 이전의 노천요(露天窯) 대신에 온도를 더 높일 수 있는 밀폐된 평요(平窯)나 등요(登窯)에서 소성되었다. 시문은 도박(陶拍)이라고 하는 시문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는 장식적인 효과보다는 기벽을 단단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이며, 제작 과정에서 아가리 부분에 돌림판을 사용한 흔적도 보인다.
 
원삼국 시대의 농업은 삼한 지역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많이 행해져, 김해 조개무지에서는 탄화된 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의 철기 문화가 낙동강 하류의 삼각지에서 발달하고, 수많은 저수지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은, 당시에 벼농사가 많이 행해진 것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루를 이용하게 된 것은 농경의 발달과 곡식 섭취가 일상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주거지는 움집이 대부분이지만 지상 가옥의 형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 주거 양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가옥 내부의 난방 방식은 바닥 한편에 양벽과 뚜껑을 평편한 돌 또는 흙판으로 조립해 터널식으로 설치하거나, 아니면 평편한 돌을 1m 정도의 타원형으로 편 뒤 그 위에 진흙을 덮고 한쪽에 바람막이 돌을 세워 놓는 형태의 화덕 이 사용되었다. 묘제(墓制)에 있어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원삼국 시대 초기에는 독무덤덧널무덤이 크게 유행하였으나, 후기에는 덧널무덤이 발전하였다. 이와 아울러 무덤의 규모도 점점 대형화되고 함께 묻는 부장품도 풍부해졌다. 이러한 문화적 양상을 보이는 원삼국 시대는 우리 나라에 있어서 선사 시대에서 진정한 의미의 역사 시대로 전환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로서, 역사학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기 구분에는 많은 문제점이 포함되어 있다. 먼저 기원전 2세기 말 이후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 있던 철기 문화를, 서력 기원을 전후하여 새로이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문화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다음으로 기원후 300년이라는 시간적 기준을 가지고 각기 다른 발전 상태에 있던 삼국을 한데 묶어서 설명하는 경우,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 물론 삼한 지역의 경우에는 기원후 300년 무렵이 시기 구분의 중요한 시기임이 분명하지만, 고구려는 사회 문화적으로 백제· 신라보다 최소한 1~2세기 앞선 수준에 있었다.
 
또한 현재 고고학계에서 사용하는 원삼국 문화라는 용어는, 고구려를 제외한 중부 이남 삼한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원삼국이라는 개념과도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한반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문화 수준의 편차가 크게 나타나므로, 소위 원삼국 시기의 문화 성격을 파악하는 방식에서도, 굳이 원삼국 시대라는 용어나 시기 구분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서로 다른 접근 방법들이 시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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