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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청탁으로 이런 글을 초(草)하기는 하지만, 문단 사람으로 영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분도 많은 터에 나 같은 문외한의 말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시대지(時代遲)’한 사람의 말이라고 웃고 보아 주시오. 그러니까 나의 의견을 문단 총제의 생각하는 바와 같게 본다든가, 또는 나의 영화에 대한 무식을 그대로 문단 전체의 위에 덮어씌우지는 말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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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직 규격을 갖춘 예술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퍽 전부터 품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 예술이라는 말이 성히 유행하지만 아직도 영화는 다른 예술, 가령 예를 들자면 문학이나 음악이나 미술 처럼 규격을 갖춘 예술과 동렬에 설 수는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나 형화에 대한 불손한 말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문학이나 다른 예술 형식이 어느 정도까지 행로가 진(盡)한 데 비하여 영화는 아직 무한한 발전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여쭈려고 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이 보는 바에 의하면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점입니다. 하고(何故)냐 하면 영화인의 임무는 외람된 말이지만 여기서부터 출발한대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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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그것은 자기를 독자의 형식으로서 수립하고자 노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화가 예술로서 자기를 완성하는 단초를 지으려면 자신의 미학 내지는 예술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문학과의 상관 관계나 음악, 회화 등의 타 예술과의 의존 관계에서 떠나면서 자기의 미학을 가질 필요가 있겠읍니다. ‘동도(東道)’이래 영화는 예술로서의 독자의 길을 발견하였다든가 컷트 백이나 이동이나 몽타주나 와이프나 혹은 기타의 모든 카메라 워크를 이끌어서 영화의 예술사를 꾸미려는 이게게 있어서는 나의 생각은 쓸데없는 공연한 수작같이 들리겠지만, 영화를 선전의 도구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더구나 자본이나 기업의 토대가 없는 우리 고장에서는 이 방면의 새로운 노력은 영화의 자존심이나 또는 영화인의 자부심을 위하여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왕왕(往往)이 영화는 대자본가적 기업과 불리(不離)의 관계에 있는 탓에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실할 우려가 크다고 보겠는데, 영화가 하나의 예술로서 독자적인 미학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영화의 반성이 요청될 수 있으며 질적 저하를 방지할 길이 있으며, 어디에다 비준(比準)하여 스스로의 자존심을 유지해 갈 수가 있겠습니까. 문학의 장처(長處)를 이용한다고 하다가 오히려 문학주의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회화의 미처(美處)를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그림 엽서 속에 매몰되는 경우를 보아 왔습니다. 영화의 위에, 더구나 예술 영화의 위에 문예 영화니 음악 영화니 등등의 관사가 붙는 것은 선전의 소치라고는 하여도 결코 명예로울 것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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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우량한 영화가 모두 이러한 명칭에 의하여 불리워질 때에 영화는 그의 자존심을 유지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 같은 현상은 지반을 가지지 못한 예술 형식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인지는 모르나, 동시에 예술로서 형성 단초에 있는 영화로서는 지극히 위험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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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외국의 토론의 성과를 옮겨 오는 것을 보면 다른 고장에서도 이 방면의 학구는 그리 진척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십 년 전의 몽타주론도 그러하고, 최근 들리는 바 영화를 미미이크의 범주에서 생각해 보려는 노력도 결코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키 힘듭니다. 문학 같은 건 몇 세기를 뒤늦어서 겨우 우리에게 수입되었으나 영화의 역사는 동서가 한가지로 고작 삼 사십 년, 우리도 기술로는 몰라도 이론으로야 못 따라갈 것이 뭡니까? 여하튼 나는 이 방면을 생각하는 이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그의 필요성을 이처럼 강조해 보는 것입니다. 영화를 반석 위에 올려 앉히려면 이것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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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나는 현순간에 처하여 문학과 영화가 협력하고 있는 또 교류가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백철 씨의 이 방면의 글도 보았고 『문장』10월호에선 오영진 씨의 글도 보았는데, 이분들의 글을 보면 교류라고는 제목 뿐으로 결국 문학의 영화에의 일방적 교류만을 말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소위 문예영화의 성과를 검토하였을 뿐으로 영화가 문학에 끼치는 영향 현상은 그리 논구하지 않았습니다. 문학이란 쓴물 단물 다 보아 마신 예술 형식이므로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받아도 와야 하겠는데 우리 조선 문단의 현상으론 별론 이렇다 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영국서는 헉슬리 같은 분이 곧잘 영화적 수법을 문학 속에 도입하였다고 합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신여성과의 접촉이 없는 신세인지라 가끔 여성의 기질이나 풍속이나 심리를 배워올 뿐, 안티클라이막스의 방법과 몽타주론과 「무도회의 수첩」의 수법 등을 잠시 고려해 보았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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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一方) 문학이 영화에게 준 영향을 비상(非常)타 하여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예술영화로서 성공한 것 중에 문예영화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럼 영화가 문학에서 가져간 것이 무엇 무엇인가? 이것은 나의 의견에 의하면 좀더 엄격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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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가장 많은 것은 스토리라고 합니다. 선전의 효과상이라면 문제할 필요가 없고 그렇지 않다면, 확실히 영화인이 세계를 하나의 통일적인 스토리로써 파악하고 인식할 만큼 구상력(構想力) 〔누누히 하는 말이지만 결구력(結構力)이나 구성력이 아닙니다〕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증좌라고 보는데 어떨까요. 그리고 이것이 만일 나의 공연한 무고가 아니라면 현재의 영화인은 영화적으로 사색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되는 것입니다. 문예영화라는 것을 보고 가끔 빌려온 스토리라는 것이 얼마나 옹졸하고 맹랑한 것인가를 느낄수록 이러한 생각은 깊어집니다. 영화인은 그 맛 정도의 스토리조차도 생각해 낼 수가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비단 우리 영화인에 한한 것이 아니라, 풍전사랑(豊田四郞)에게도 이단만작(伊丹萬作)에게도 내전토몽(內田吐夢)에게도 그리고 듀비비에나 페에데에게도 말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엣센스의 파악만으로도 아니 되고 주관적인 신해석, 창조성을 보다 더 강조하고 싶다”고 오영수 씨는 말하였는데 이것을 지당한 말일는지 알수 없으나, 그렇다면 구태여 문학에서 스토리나 정신이나 생활이 나를 찾아 들일 필요가 없지는 않을까요. 확실히 없습니다. 오씨는 여기에서 결론을 맺지 말고 한 보 더 앞서도 무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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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문예영화의 시대를 청산하고 독자의 힘으로 사색하고 파악하고 표현하여야 하겠다. 영화는 구상력을 가지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독자의 미학을 수립하여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확립하여야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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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오씨가 가지려다가 아니 가진 결론을 내가 가져 보았다 하여도 과한 불손은 아니 되겠기에 이만 그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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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1940년. 6, ‘공수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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