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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삼제(三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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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11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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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머니 三題[삼제]
 
 
 

1. 銀佩物[은패물]

 
 
3
보통학교 들어간 이듬해 여름 방학이니까, 태권이가 열 살 났을 때의 일이다. 오래간만에 장마가 개어서 태권이는 아침부터 강가에 나가 장정들이 거칠은 붉은 물결 속에서 반두로 고기를 잡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 반두 훑어내는데 날비녀, 어해, 메기, 모래무지, 쏘가리 같은 것이 두세 사발씩 들어오므로 한나절을 부지런히 쫓아다닌 아이들에겐 개평으로 한 뀀챙이는 실히 될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태권이는 그것을 버들 꼬챙이에 정성들여 꿰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때가 기울어서 적지 않게 속이 쓰렸다. 그래도 물고기를 끓여서 점심을 먹으리라, 그때까지 어떻게 배 고푼 것을 잊을 수 있을 건가, 반찬이 되는 동안 한길로 나와서 동무들과 함께 매미를 잡으러 갈까.…… 집 안대문을 들어서니까 어머니는 방안에서 장롱문을 열고 옷을 꺼내어놓고 있었다.
 
4
“엄마 이거 어서 끓여줘…….”
 
5
바른손으로 번쩍 쳐들어 보이며 댓돌에 올라서서,
 
6
“뭐 해? 옷가지는 왜 다 꺼내놓는 거야?”
 
7
그때서야 어머니는 옷을 채국채국 덤여놓던 손을 놓고 태권이 쪽을 건너다보면서,
 
8
“너 고기 많이 얻어왔구나. 이 더운데 …….”
 
9
그러나 벌떡 일어서서 그의 고기를 받아주지도, 이마에 매달린 땀을 씻어주지도 않고, 다시 고개를 수그린 채 이번은 의복이 아니고 길쯤길쯤한 네모진 자줏빛으로 된 함을 모아놓고 있었다.
 
10
“으응, 이거, 물고기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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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투정으로 목소리가 변하니까, 그제서야 어머니는 일손을 놓고 치마 괴춤을 치켜 올리면서 일어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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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성에 거풍하느라구 그런다. 너 어디서 이렇게 많이 얻어왔냐. 배두 고프지 않던? 이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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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손으로 고기 꼬챙이를 받아 들고, 또 한 손으론 이마의 땀을 뻐억 문대어주었다.
 
14
“얘애, 선녀야. 너 아이 내려놓구 이 물고기 밸 타라!”
 
15
태식이를 업고 허청간으로 똘배를 먹고 섰던 누나를 불러서 아이를 받아 누이었고 한편 선녀는 고기를 들고 부엌 뒤꼍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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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이는 누나를 따라 뒤꼍으로 나가서, 고기를 쌍사발에 옮기고 조그만 접이칼로 흰 배를 가르는 것을 보고 있다가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17
“간장에 졸여? 고추장에 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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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으면서 어머니 곁으로 오는데 어머니는 태권이가 집에서는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여러 가지 패물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흰 은으로 만든 것들이었다. 언제, 김좌수네가 며느리를 맞을 때 큰머리하고 울굿불굿한 옷으로 단장한 뒤에, 머리와 허리와 손에 장식하였던 그런 패물들이었다. 김좌수네 며느리만 그런 것을 몸에 붙이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어머니도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함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놀라웠다. 그는 어머니 옆에 서서 한참 동안 눈부시는 장식품을 내려다보고 섰다가,
 
19
“이게 다 뭐야?”
 
20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태권이를 쳐다보다가 씽긋이 웃으면서,
 
21
“이건 뚝절, 이건 노리개, 이건 장도, 이건 향집, 이건 범의 발톱…….”
 
22
하나 하나 집어서 이름을 가르쳐주다가 굵다란 은지환을 쳐들어서는 손가락이 엉기성기하게 끼고서,
 
23
“이건 이렇게 손에 끼는 가락지.”
 
24
하고 말하였다.
 
25
“엄마가 아버지한테 시집 올 때에 차구 온 게다. 이건 이렇게 머리에 찌르구, 이건 허리에 차구…….”
 
26
어머니가 아직 늙지 않은 얼굴에 이쁘장스런 웃음을 그려 보일 때, 태권이도 입이 벌어지는 것을 다물 수가 없었다.
 
27
“이건 다 뒀다 뭘해?”
 
28
하고 태권이가 물으니까, 어머니는,
 
29
“너희 색시 시집 올 때 주지. 장가 가기 전에 선채(先綵)로 쌌다가 …….”
 
30
그리고는 마치, 제가 시집 올 며느리인 듯이, 무릎 앞에 놓은 패물들을 다시 머리에다, 허리에다, 손가락에다 지니어보는 것이었다. 태권이는 다른 깊은 내용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장가 가고 색시 얻어온다는 것만이 어쩐지 부끄러워 그저 낯이 상기된 채 어머니의 어깨를 짚고 서 있었다.
 
 
31
몇 해가 지난 뒤의 일이다. 선녀도 태권이도 태식이도 잠이 들어서 아랫목에 갈라 누워 있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버지만이 작은 남포등을 걸어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32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사흘 전에 이곳을 떠나 시골로 고추를 사러 나갔었는데 오늘 해질 무렵에야 땀에 젖은 누런 고의 적삼에 빛 낡은 종이 파나마를 올려놓고 돌아온 것이다 . 한길에서 아이들과 장난을 치다가 태권이는 아버지의 오는 모양을 보았다. 지카다비를 신고 고의의 두 다리는 자전거 사슬에 쓸린다고 노끈으로 간뜻이 동여매고 쪼르르 한길을 지쳐오더니 집 앞에서 우뚝 멎고 덥벅 소리가 나게 안장으로 뛰어내렸다. 안장 뒤 짐틀에는 유지에 싼 납짝한 보퉁이와 낡은 펌프가 삼농이로 꽁꽁 비끌어매여 있었다.
 
33
태권이가 자전거 옆으로 쫓아가니까,
 
34
“저녁 먹언?”
 
35
그렇게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고,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니까,
 
36
“아이나 보든가 시험 준빌 하든가 하지 왜 장난만 치니.”
 
37
하고 말하면서, 땀을 씻던 감발처럼 된 타월을 다시 뒤꽁무니에 찌른 뒤 자전거 틀을 냉큼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장 거리, 술막 거리로 돌아다니면서 고추를 사서 소달구지에 맡겨 평양으로 싣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서는 고추 대신에 밤, 콩, 수수 같은 것을 같은 방식으로 사다가 평양 물산 객주로 실어냈다.
 
38
저녁을 먹고 아이들이 잠 들기까지는,
 
39
“고단하신데 일찍이 누우시지요.”
 
40
하고 어머니가 권하여도,
 
41
“오늘은 50리밖에 안 탔으니까 괜찮구먼.”
 
42
그러고는 커다란 주판을 내다놓고 제깍 소리가 나게 산알을 퉁기고 있었다.
 
43
“이번엔 얼마나 샀수?”
 
44
아이들이 잠이 드는 것을 기다려서 방문을 돌려 닫고 모깃불을 죽이고 한 뒤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45
아버지는 잠잠히 앉았다가.
 
46
“이번엔 괜찮을 것 같구먼두…….”
 
47
뜨즉뜨즉이 시작하던 말을 잠시 뚝 끊고나서는 어머니가 귀를 솔깃하니 기울이고 제의 낯을 빤히 건너다보며 다음 말의 기미를 눈치챈 뒤에야,
 
48
“밑천이 딸려서, 잘해야 헛수고나 면할는지…….”
 
49
단풍을 꺼내서 새로이 담배를 붙여 물었다.
 
50
어머니는 고개를 떨어뜨리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하는 말이 그 말이다. 죽게 쏘다녀도 밑천이 밭고 뒤가 딸려서 마음대로 장사 수단을 써볼 수도 없고 자본 많은 사람의 심부름이나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밑천밖에 없는 사람으론 아무리 한탄을 되풀이한대도 객쩍은 수작이 될 뿐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이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언제나,
 
51
“조곰 벌어서 자그마치 먹구 살지요.”
 
52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오늘밤에도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느 때 같으면 그저 끌끌 두어 번 혀나 차고 자리에 눕던 아버지가, 발깍 낯색을 달하면서,
 
53
“이 아이들은 다 무얼 먹이나. 무얼루 계집앤 살리구 무얼루 공불 시키나. 태권이두 내달이면 졸업이 아닌가 편지장이나 쓸 줄 알구 문서장이나 보게 해줘야 에미 애비된 책임이 아닌가.”
 
54
하고 역정조로 말하였다.
 
55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낯을 돌렸다. 그때에 태식이가 잠결에 홑이불을 발치 구석으로 차 밀어서 어머니는 그것을 가져다 아이의 배를 가리어준다.
 
56
아버지는 연달아 담배를 뻐금뻐금 빨았으나, 한참만에 캄캄한 뜰안을 바라보며,
 
57
“이번엔 꼭 틀림 없을 테니 임자 패물을 팔세. 은값이 또 지금처럼 고등한 땐 없을 거구…….”
 
58
하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조용히 낯을 들고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59
“그것만은 헐 수 없수. 아차 하는 날엔 태권이 선채를 무얼루 싸겠수. 패물만은 죽는 한이 있어두 내놓지 못하겠수.”
 
60
하고 대답하였다.
 
 
61
그럭하고 또다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태권이는 평양서 중학을 마치고 동경서 대학에 다닌다. 오래지 않아 그는 의학사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었으나, 화물 자동차를 2대나 두고 이 고을서도 제일가는 무역상을 벌여놓고 있었다. 그 동안 그는 장사에 성공한 것이다. 오십이 가까운 어머니는 이르게 단산한 것을 다행히 여겨, 아버지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심심하다고, 해마다 누에를 치고 질쿠나이(길쌈)를 하였다. 뽕 따는 것을 독려하고, 새로 늘려 지은 깊숙한 뒷방에는 틀을 2개나 놓고 명주와 항라를 놓게 하고 손수 채마밭을 돌보았다. 그래도 세간이 늘고 근심이 없어서 그는 몸이 차차로 비대해가는 것 같았다.
 
62
태권이가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넘어가던 해에 그는 약혼을 하였다. 어버이들이 서둔 것은 아니나 우선 당사자들이 의합해서 두 집 어버이들은 자식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한 것이다. 신부될 사람은 동경서 전문학교에 다니는 평양 색시였다.
 
63
약혼이 작정되기 전, 여름 방학 때였다. 어머니는 태권이가 보여주는 며느리 될 처녀의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64
“식은 어떡허니?”
 
65
하고 물었다. 영리한 아들은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66
“그건 어머니 소견대루 하게 하시죠. 평양서 결혼식을 올리구 색시잔치는 어머니가 주하셔서 여기서 구식으루 합시다. 그러면 되잖어요.”
 
67
하고 말하였다. 어머니는 만족하였다. 사진을 놓고 뒷방으로 가서 벽장을 열었다.
 
68
“너 이리 좀 오너라.”
 
69
아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데로 갔다. 어머니는 작달막한 궤를 열더니 그 속에서 자줏빛으로 옷대 위를 댄 몇 개의 함을 꺼내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열어놓았다.
 
70
“어머니 이게 뭡니까.”
 
71
하고 아들은 깜짝 놀랜다. 열 살 났을 때 단 한 번 본 것을 태권이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72
“네 처 될 색시가 예 이를 때 머리에 꽂구 손에 끼구 허리에 차구 할 패물이지. 자아 어떠니. 어미가 너희 아버지한테 시집 올 때 받은 패물들이다. 이게 뚝절, 이게 지환, 이게 노리개, 향집, 범의 발톱…….”
 
73
어머니는 흥분된 마음으로 설명을 늘어놓았으나 아들은 시무룩한 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74
“지금 색시가 그걸 어떻게 찹니까.”
 
75
드디어 아들은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76
“왜 어째서?”
 
77
어머니는 표정에서 웃음을 거두고 아들의 낯을 쳐다보았다.
 
78
“그까짓 은으로 맨든 거 통 합해두 실오래기 같은 반지값만두 못할 걸!”
 
79
어머니는 아무말도 건네지 못하였다.
 
80
아들은 그 기회를 타서 빠른 어조로 저의 설명과 의향을 늘어놓았다.
 
81
“지금은 누런 금두 천하다는 시절이 아냐요. 그리구 또 우리 처 될 사람은 그런 복잡한 패물을 그렇게 좋아두 안 한답니다. 보석 든 배금 반지나 여름이면 비취나 지만옥이나, 그 밖엔 비녀 가락지 따위두 쓸데없다구 싸려건 반지나 싸란답니다. 선채엔…….”
 
82
어머니는 저의 고집을 세우려 들진 않았다. 그러나 아무러한 대꾸도 아들의 말엔 건네지 않았다. 다시 패물을 함에다 넣어서 궤에다 챙긴 뒤에 그는 아들이 나가버린 방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때, 둘째 아들 태식이도 방학이라고 평양서 올라와 있었는데, 버러지(벌레) 잡아넣는 통을 둘러메고, 밖으로부터 뛰어 들어와서 뜰 가운데를 건너 뒷마당으로 사라져 없어진다.
 
83
‘옳다! 태식이가 있다.’
 
84
속으로 그렇게 뇌며,
 
85
“태식이 처의 간선은 천하 없어두 내가 친히 나서서 봐야지.”
 
86
어머니는 빈 방안에 혼자 앉아서 나직이 소리를 내어 지껄였다.
 
 
 

2. 演說會[연설회]

 
 
88
태권이가 학부 이학년 때의 일이다. 결혼한 이듬해 여름, 아버지는 사랑 사무실에서 평양서 온 손님과 한나절 상용으로 이야기에 바쁘다가 오후 3시 가량에야 손님을 여관으로 보내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는 식모가 빨아온 빨래를 받아서 줄에다 널고 있었으나,
 
89
“여보 좀 들어오.”
 
90
하는 아버지의 부름에, 이내 손을 수건에 문대고 부엌으로 돌아 방안에 들어왔다.
 
91
“뭐 미숫가루래두 좀 타 올까요?”
 
92
아버지는 대답치 않고 머리를 흔든다. 어머니는 옆에 와서 어인 까닭을 몰라 뻐끔히 영감을 쳐다본다.
 
93
“이 애 있소?”
 
94
하고 건넌방을 눈짓하며 아버지는 묻는다. 눈짓하는 건넌방은 아들의 방이고, ‘이 애’ 라는 것은 며느리가 아니고 아들 태권이를 이름이다.
 
95
“점심 먹구 회관에 나가군 여태 들어왔나요.”
 
96
아버지의 묻는 뜻을 눈치채고 어머니도 눈가장에 근심을 그리면서 낯을 외면한다.
 
97
“그럼 그 애 혼자 있나?”
 
98
‘그 애’ 라는 건 며느리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99
“무슨 책인가 잡지를 끼구 누웠더니 자는지 모르지요.”
 
100
잠시 아무말이 없이 두 내외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담배를 꺼내서 붙여 물었다. 어려운 말을 시작할 땐 언제나 하던 옛날부터의 버릇이다. 담배를 뻐끔뻐끔 빨다가 느닷없이,
 
101
“그래, 종래 말리는 일을 할 작정인가?”
 
102
하고 마당을 향한 채 말한다.
 
103
어머니는 나직이 한숨을 짚고,
 
104
“제가 한다는 걸 나니 어떡허겠수.”
 
105
“그래, 그 앤 뭐라구 해?”
 
106
아버지는 담배를 털고 낯을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이번엔 어머니가 외면한 채 대답한다.
 
107
“그 앤 별수 있나요, 바깥 어른 하시는 걸 전들 어떡허겠어요, 할 뿐이지요.”
 
108
“그래 그놈보군 또다시 말해보지 않었나.”
 
109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역정조로 대들듯 한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욱 낮았다.
 
110
“왜 안 했겠수. 아침에두 말했더니 그저 싱글싱글 웃기만 허지요. 별 걱정 다 허십니다. 괜찮어요, 그러지요. 그래두 얘, 아버지가 그렇게 말리시구, 또 나이찬 아들보구 두번 세번 말 하시기 힘들다구 나더러 밤마다 야단이시니, 인제래두 그만두거라. 학교나 다 마치군들 무슨 짓을 못해서 방학에 온 녀석이 주목받는 청년들과 어울려서 연설을 허겠다, 하구 주언부언 타일러두 미친놈처럼 그저 싱글싱글 웃기만 헙니다그려.”
 
111
아버지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담배를 뜰 가운데로 팽개쳐버리며,
 
112
“소견대루 하래 망할놈 같으니. 유치장에 가서 썩어빠져야지, 그런 놈은!”
 
113
하고 사랑으로 나가버렸다. 뒤쫓아 사랑으로 나가서 사무실 쪽을 눈여겨보니까, 아버지는 두루마기를 입고 파나마를 쓴 뒤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사무 보는 서기에게,
 
114
“어델 가시나?”
 
115
하고 물어본다.
 
116
“평양 손님 들어 있는 여관으로 가셔서 만찬회 하시구 밤엔 요릿집에 가신답니다.”
 
117
어머니는 비로소 안심하고 다시 안방으로 돌아왔다.
 
118
그날 밤 천도교당에서는 예정대로 청년들의 연설회가 있었다. 태권이는 맨 마지막 차례로 ‘당면한 내외 정세와 의학도의 사명’이란 연제를 걸고 연설을 하였다.
 
119
저녁을 먹고 어머니는 집안을 돌아본 뒤 옷을 갈아 입고 며느리 방으로 건너갔다. 여느 때 같으면 며느리도 남편의 연설을 들으러 회장으로 갔을 것이지만 시아버지의 서슬이 두려워서 무료히 방안에 앉아 있었다.
 
120
“아랫댁 아주머니 앓는 데 댕겨올게, 집안 잘 돌아봐라.”
 
121
그렇게 타이르고 어머니는 집을 나왔다. 그러나 물역으로 돌아서 아랫댁으로 가는 체 길을 잡았던 어머니는 도중에 재빠르게 천도교당으로 발길을 돌려놓았다.
 
122
연설회장엔 사람들이 빼곡 들어앉고, 앉다가 남은 사람들은 뒤에 한물커니나 둘러서서 간간이 박수를 섞어가며 젊은 청년들의 연설에 취하여 있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하나 뚫고 머리를 들이밀어 보았다. 태권이 차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연단에 나서는 사람이 두어 차례 바뀌는 동안 어머니는 오붓한 자리를 하나 잡고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아들의 연설을 기다렸다. 이윽고 태권이 차례가 왔다. 우뢰 같은 박수 소리에 싸여서 높은 연단에 올라선 아들의 얼굴과 몸짓을 그는 고즈넉한 흥분을 느끼면서 우러러보았다. 까만 머리카락, 눈썹, 형형한 눈, 교복의 금단추가 번뜩이는 넓은 가슴, 커다란 주먹, 우렁찬 목소리, 저것이 나의 아들인가, 내가 친히 배를 갈라 낳은 아들인가……, 그러나 그는 다시 눈을 돌려 아들이 서 있는 옆으로 쭈르르니 앉아 있는 경관을 바라본다. 소름이 쪽 끼친다. 낯 익은 경부요 부장이요 형사들이었으나 딴 사람처럼 무섭다. 정복을 입은 경부는 칼자루를 잡고 뚫어지게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 두 형사는 고개를 수굿하고 아들의 말하는 것을 열심히 받아 쓰고 있다. 박수 소리가 나면 다시 깜짝 놀라서 아들을 쳐다본다. 아들은 군중의 환호소리 가운데서 곱부에 물을 따라 마신다. 수건을 내어 이마의 땀을 씻는다. 그러고는 다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123
어머니는 아들의 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면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흥분과 환희와 공포의 교착된 감정 속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연설이 끝났다. 와아 하는 함성, 박수, 이어서 뒤숭숭한 군중의 동요, 발자국 소리…… 어머니는 청중의 물결에 섞여서 회장을 나왔다. 아들에 대해서 청중들이 지껄이는 찬사를 꿈결같이 들으면서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124
바로 집 앞에서 뒷집 고무신 장사하는 젊은 주인을 만났다.
 
125
“천에 한 사람 쉽지 않습죠.”
 
126
어머니는 뜰을 건너 며느리 방으로 들어갔다.
 
127
“돌아오던 길에 나 연설 구경에 갔었다.”
 
128
그렇게 말해놓고는, 어인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래진 며느리를 환희에 가득 차서 다음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흥분된 표정으로 다시 놀라게 하여주었다.
 
 
 

3. 雨中出鄕[우중출향]

 
 
130
태권이가 학부 삼학년이 되던 해 여름 어머니는 난 지 두 달째 되는 어린 손자로 하여 벌써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아들 태권이는 점점 사회 사조에 물들기에 속도를 가하는 것 같았다.
 
131
친정에서 아들을 낳은 며느리는, 남편이 휴가에 돌아온다고 방학이 될 무렵에 시가로 왔으나, 안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건만 동경서 나온 아들 태권이는 색시도 없는 처가에 다니러 간다고 뿌르르 하면 안해만 있는 방을 비우고 평양 출입을 하였다.
 
132
“그 애가 무엇 하러 그렇게 자주 평양엘 나간다우?”
 
133
하고 아버지가 물으면, 어머니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서 며느리에게로 가져 갔다.
 
134
“아이 애비가 무슨 일루 그렇게 평양엘 나간다니?”
 
135
그러면 며느리는 아이에게 젖을 빨리다가,
 
136
“전들 알겠어요. 아버지한테 장래 개업할 일로 의논하러 가신다지요.”
 
137
하고만 대답할 뿐,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아버지에게 옮기면,
 
138
“개업? 학교 졸업허군 연구헌다면서 개업은 무슨 개업”
 
139
아버지는 믿지 않았다. 어머니도 물론 며느리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140
“그럼 그 애가 무얼 보아 댕기는 계집이 있겠수. 연구 그만두구 이내 평양다 개업할라는 게지요.”
 
141
하고 아들을 위하여 발명해본다. 아버지는 흥 하고 코방귀를 뀌고는 담배를 붙여서 연거푸 몇 모금 빨고,
 
142
“계집에 빠졌으면 걱정이 무슨 걱정인가. 오입치구두 왼 못 된 오입에 빠졌으니 말이지…….”
 
143
아버지의 하는 말의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어머니는 종시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듯이, 그저 영감 옆에서 부채질만 맥없이 거듭하고 앉아 있었다.
 
144
그러나 8월도 중순경, 평양을 잠깐 다녀온 태권이는 그 뒤로 다시 집을 떠나지는 않았다. 벌써 한 주일째나 그물을 가지고 이 고을 청년들과 고기 사냥을 나갔다.
 
145
어느 날 새벽, 아버지는 그 전날 장사일로 평양에 나갔고 태권이는 밤고기 사냥을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와서 아침 잠에 취하여 있었다. 날은 흐리고 보슬비가 내릴락말락하였다.
 
146
사무실에서 자던 자동차 조수가 대문으로 정복 경관을 안내해 데리고 뜰 안으로 들어왔다.
 
147
“서방님 찾으시는데…….”
 
148
그렇게 마루에 나선 주인 어머니께 아뢰고 조수는 다시 경관을 향하여,
 
149
“여태 주무십니다.”
 
150
하고 대답하였다.
 
151
“네 그러신가요. 그럼 내 아래쪽으로 순찰 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리죠. 서에서 잠깐 여쭐 말이 있다구 그걸 전하래서 그럽니다.”
 
152
경관은 어머니를 향해서 전하는 말씨로 공순히 말하고 그대로 뜰을 나갔다.
 
153
“여보, 일어나우, 순사가 찾으러 왔수.”
 
154
하고 안해가 흔드는 것을 못 들은 척하고 누웠었으나, 물론 눈은 감은채 태
 
155
권이는 뜰 안에서 주고받는 말을 소상히 알아듣고 누웠다.
 
156
그러므로 경관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신짝을 아무렇게나 발뿌리에 걸고 쫓아 건너와서,
 
157
“얘애 여태 자니? 경찰서에서 칼찬 순사가 데리러 왔으니 이걸 어떡허니?”
 
158
하고 어머니가 걱정조로 서두를 때 태권이는 눈을 뜨고,
 
159
“어데 데리러 왔어요? 잠깐 여쭐 말이 있어서 다녀가라는 건데요. 그런 일이 여태 없었수? 가끔 있는 일 아니유.”
 
160
하고 무사태평인 듯이 말하였다. 그러고는,
 
161
“에라 인제 자긴 글렀다. 어젯밤 추워서 잡은 걸 끓이구 소줄 서너잔 마셨더니 골치가 뗑한 걸.”
 
162
하고 데석을 두어 번 두들기며 기지개를 폈다. 어머니는 아들의 태도에 안심하는 빛을 띠면서도 마음은 아직 홱 풀리지 못한 채 안방으로 도로 건너왔다.
 
163
아들은 제 방에서 나와서 보슬비가 그친 마당 귀를 잠옷 채로 서성거리고 돌았다. 그러고 있을 때 순찰하고 돌아오는 경관이 다시 들렀다.
 
164
“무슨 일이랍니까?”
 
165
하고 물어도 안면이 없달 수는 없는 경관은 그저,
 
166
“글쎄요. 무어 동경 사정에 대해서 잠깐 물어볼 말이 있다든가, 여하튼 가가리(담당)가 다르니까 자세히 알 수 있어야죠.”
 
167
하고만 말한다.
 
168
“그럼 내 낯 닦고 잠시 다녀나오죠.”
 
169
태권이는 세수를 하고 아침은 다녀나와서 먹겠다고 그대로 양복을 입고 경관을 따라 윗거리로 올라갔다.
 
170
어머니는 두 사람이 의좋게 대문을 나서는 것을 보고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집안은 설뚱해서 불안한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171
한 30분 지난 뒤에, 비가 제법 소리를 내어서 쏟아지기 시작할 무렵인데 아들 태권이는 경찰서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각반까지 깍듯이 올려친 정복 경관이 따라 서 있었다. 그리고 대문 밖에는 평양 가는 승합 자동차가 머물러 있었다. 태권이는 평양으로 가는 것이다.
 
172
“평양서 볼 일이 있다구 기별이 와서 지금 함께 자동차루 나갑니다.”
 
173
침착한 듯하였으나 얼굴은 어딘가 해쓱해진 것 같고, 목소리도 그럴싸해서 그런지 가느다랗게 떨리는 것 같았다.
 
174
어머니는 벌써 당황해서 침착성을 잃어버렸다. 호송가는 정복 순사는 이 고을 출신이어서 그는 대문에 들어서자,
 
175
“어머니 날 새 안녕하십니까.”
 
176
하고 인사를 하였으나, 어머니는 인사도 변변히 받지 못하고, 아니 그것이 인사인지 또 인사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딱히 모르는 사람처럼, 방석을 들고 나오더니,
 
177
“나리 여기 좀 앉으십시오. 우리 아이가 아직 조반을 먹지 못했는데 무어 좀 국물이래두 따끈히 먹여 보내게, 나리 좀, 잠시 동안만 지체해주십시오.”
 
178
경관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연해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고는 집안 사람뿐 아니라 당자인 경관까지 당황해 있는 가운데서,
 
179
“얘애 너 뭘 보구 그렇게 멍청하니 서 있니. 어서 상 차려 내와야지.”
 
180
하고 부엌을 향하여 핀잔조로 말하였다.
 
181
그러나 아들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작은 보퉁이를 꾸려 들고 그대로 마당에 나섰다.
 
182
“아아니, 너, 아침은 어떡허니.”
 
183
그러고는 며느리를 향하고는,
 
184
“너두 정신이 있니. 아침두 안 먹은 사람이 어델 비오시는 델 가라구 그대루 문밖에 내세우니.”
 
185
다시 부엌을 향하여선,
 
186
“상 좀 빨리 보아라! 무얼 그리 꾸물거리니.”
 
187
하고 서둘러대었다.
 
188
아들은 구두를 신고 섰다가 어머니의 하는 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189
“아침 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구 남 시간 정해가지구 정기루 다니는 차를 그렇게 오래 지체시키믄 쓰겠어요. 계란이나 서너 알 주시우.”
 
190
식모가 광으로 가서 계란을 가져오는 동안 어머니는 밖으로 나갔다. 발동도 죽이지 않고 기다리는 자동차로 쫓아가서 운전수를 향하여,
 
191
“여보 운전수 나리, 조금만 더 지체해주십시오. 이제 아침을 먹여서 내보내게…….”
 
192
그러나, 그때에 아들 태권이가 경관과 함께 대문에서 나오니까,
 
193
“그럼 운전수, 어데 도중에서래두 우리 아이 점심을 먹도록 해주시우.”
 
194
그렇게 다시 운전수와 경관과 그리고 자동차를 향하여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 절을 하고 있었다.
【원문】어머니 삼제(三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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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2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