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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를 다고 ◈
《카탈로그》 본문	1928. 7 이상화

농민의 정서를 읊조림

1

비를 다고

2

사람만 다라와질 줄로 알았더니

3

필경에는 믿고 있던 하늘까지 다라와졌다.

4

보리가 팔을 벌리고 달리다가 달리다가

5

이제는 곯아진 몸으로 목을 댓자나 빠주고 섰구나!

6

반갑지도 않은 바람만 냅다 불어

7

가엽게도 우리 보리가 달증이 든 듯이 노랗다.

8

풀을 뽑느니 이랑에 손을 대 보느니 하는 것도

9

이제는 헛일을 하는가 싶어 맥이 풀려만 진다.

10

거름이야 죽을 판 살 판 거루어 두었지만

11

비가 안 와서 - 원수 놈의 비가 오지 않아서

12

보리는 벌써 목이 말라 입에 대지도 않는다.

13

이렇게 한 창 동안만 더 간다면

14

그만 - 그만이다, 죽을수 밖에 없는 노릇이구나!

15

하늘아, 한 해 열 두 달 남의 일 해주고 겨우 사는 이 목숨이

16

곯아 죽으면 네 맘에 시원할 게 뭐란 말이냐.

17

제발 빌자! 밭에서 갈잎 소리가 나기 전에

18

무슨 수가 나주어야 올해는 그대로 살아 나가 보세!

19

더러운 사람놈의 세상에 몹쓸 팔자를 타고나서

20

살도 죽도 못해 잘난 이 짓을 대대로 하는 줄은

21

하늘아! 네가 말은 안 해도 짐작이야 못했것나

22

보리도 우리도 오장이 다 탄다 이러지 말고 비를 다고!

【원문】비를 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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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 : 2023년 0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