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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군성적순례기’는 고우(故友) 빙허가 동아일보에서 조고(操觚)의 붓을 잡았을 때 억울한 일인(日人)정치 밑에서나마 뭉그러지려는 민족의 양심을 만분의 하나라도 구원해 내기 위해서 스스로 집필의 여가를 타서 험산 준령을 넘으며 장림(長霖) 탕수(蕩水)를 건너서 그 성적(聖跡)과 전설을 두루 밟아서 만천하 독자에게 호소했던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아득한 17 년전 옛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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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떳떳이 거리낌 없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을 빙허는 아는가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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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는 어려서부터 작란하던 글 동무였다. 그대는 가고 나만 살아서 이 세상에 영영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그대의 글이 다시 나옴을 보니 내 가슴은 사뭇 미어지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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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갔으나 그대의 문명(文名)은 이미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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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각에서 그대의 이글을 발간하는 뜻은 그대의 아름다운 문장을 전하려함이 아니라 다만 혼돈된 이 세상에 그대의 정신을 전하려는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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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허 사후에 이 글을 고이 보존했다가 해방 뒤에 그의 유족에게 원고를 넘겨준 남창 손진태 형의 고마운 우정을 친우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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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65년 7월 8일 단군 성적 순례의 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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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막(渺邈)한 상하 반만년 동방 문화의 연원이시며, 생생화육(生生化育), 2천 3백만, 단족(檀族)의 영과 육의 모태이시며, 혹룡강의 남, 황하의 북, 동해의 서, 망망한 5천여 리에 개지척지(開之拓之)하신 신공성적(神功聖蹟)을 남기셨으니, 이 광범한 문화권을 소고(溯考)하고 이 방대한 지역원을 봉심(奉審)하자면, 정말 까마득한 노릇이다. 1년은커녕, 10년은커녕, 일생을 두고 성과 열과 역을 경주하더래도 이 원념(願念)의 만분지일이나 아니 만만지일이나 달할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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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거늘, 공무와 속루(俗累)의 틈을 비기어 수주의 시일로, 분망한 여정에 몰려 할 수 있는 준비조차 갖추지 못하고, 덮어놓고 발정하고 말았으니, 대담하다면 대담도 하려니와 경솔하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리라. 그러나, 그러나! 스스로 믿는 바 있으니 그것은 성조께 대한 대작(大爵)과 신념이다. 한배님이 두호하시거니 단애에 수(手)를 철할 대용(大勇)도 기(起)치 말란 법 없으며, 왕검님이 받드시리니 절벽에 족(足) 인(印)할 영능(靈能)인들 생치 않으랴. 반체(胖體)와 둔족(鈍足)을 의구(疑懼)할 필요도 없거니와 불학과 무지에 주저할 연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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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식(衒飾)과 사념을 버리자,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억측과 모색을 함부로 말자, 해심(孩心)으로 돌아가리라, 백지 같은 적자(赤子)의 마음으로 님의 앞에 서리라, 끼치신 일괴석(一塊石)과 일부토(一抔土)를 뵈올 적마다, 고동하는 내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경건과 감격으로 묵시와 수교(垂敎)를 터득해 보리라, 촌맹야로(村氓野老)의 구비심서(口碑心書)로 옮겨 나려오는 소박하고 홍몽(鴻濛)한 전설이나마 그대로 새겨 유칙과 성훈과 또는 신앙심과 의지성(依支性)의 편린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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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마음을 정하니,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며 새벽녘에야 어느 결엔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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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보니 태양은 높이 솟아 우의(雨意) 실은 멍울멍울한 구름 사이에 숨바꼭질하면서 뜨거운 광선을 이따금 차창으로 들이친다. 좌우에 푸른 벌판이 훤하게 열림은 벌써 안주(安州) 평야에 들어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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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겁(百劫) 산하에 감회를 돋을 겨를도 없이 기차는 벌써 신안주(新安州)에 닿고 말았다. 9일 오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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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나리매 지국장 김병량(金秉亮) 씨가 반가이 맞아준다. 향산(香山) 행 자동차 편을 물으니 12시경에나 있다기로 지국에서 소게(小憩)하던 차에 사(社)로부터 전보가 나려왔다. 그것은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떠난 여구(旅具)를 부쳤으니 찾아 가란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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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역으로 알아보매 짐은 금일이나 명조에 도착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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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연기를 천추같이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에라, 이 기회에 안주읍이나 구경하리라 하여 지국장의 인도로 구안주읍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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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주역에서 경철을 타니 약 15리 거리에 30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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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의 고호는 식주(息州), 밀성(密城) 등으로 서방의 대읍이요, 변방의 요지다. 대륙의 풍운이 조선을 거치자면 먼저 압수(鴨水)를 지나고 의주(義州)를 넘어서면 수륙 병진으로 이 밀성을 지나치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엔 목사(牧使) 외에 대도호부를 두었고 공청(公廳)으로도 내아(內衙), 동헌(東軒) 등 각 청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사청(將士廳)이 따로 있으며 군기고(軍器庫), 쇄마고(刷馬庫)와 팔방(八防) 등, 군비가 자못 충실하여, 읍지에 의하면 군총장군(軍總壯軍) 4,996명, 납포군(納布軍) 4,475명, 방군(防軍) 575명 등 1만여 명이 상비해 있었다 한다. 성곽으로도 내성 외성이 위요(圍繞)되어 요새의 면목을 갖추었는데, 지금도 성지가 역연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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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백학산(白鶴山), 서로 기산(岐山), 동남으로 발본(鉢本) 등이 있으나 읍에서 50리 혹은 60리 멀리 떨어져 아득하게 운하(雲霞)에 잠기었고, 북으로 청천강을 밀면서 일망무제의 평원광야를 이루었으니, 백전산하(百戰山河)의 지리가 약여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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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당시, 을지문덕 장군이 백만 수병(隋兵)을 무찔러 세계전사상에 그 유례를 보지 못한 살수대첩을 얻은 지역이 저 아름인가 하니 감회가 자못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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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읍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 허술한 고사(古寺)가 칠불사(七佛寺)라 한다. 배후로 급추(急追)하는 여군(麗軍)에 몰리어, 주저할 판에 난데없는 칠승(七僧)이 나타나 옷자락을 걷는 둥 마는 둥, 물 위를 사뿐사뿐 짓쳐 가매, 수병도 그 뒤를 따라 건너다가, 모조리 빠져 죽어 표시(漂屍)가 강에 가득히 차서 물이 흐르지 않았다던가. 이 영이(靈異)의 적(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칠불사를 세우고 칠석(七石)으로 칠승의 상(像)을 새겼다는 것이 이 칠불사의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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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안으로 들어서니 법당도 거의 무너질 지경이요, 승당은 지붕 마루가 반 넘게 벗겨져 풍우를 며칠이나 폐(蔽)할지 말지. 법당 문을 열어 보니 탑상(榻床)에 일위 불(佛)만 쓸쓸히 앉으셨고, 정작 칠불은 간 곳 없다. 중을 보고 칠불의 유적을 물으니, 그런 것 다 없다고 고개를 흔들 뿐. 천년 옛일을 묻는 내가 부질없다. 사명(寺名) 남은 것만 다행이라 할까. 나는 다음과 같은 찬하 거사(餐霞居士) 최기남(崔基南)의 시를 읊으며 속절없이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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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에서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 광야가 우뚝한 소구(小丘)를 지은 지점에 익연(翼然)히 솟은 정자를 백상루(百祥樓)라 한다. 몇 층 돌층층대를 더듬어 누상에 오르니 난데없는 일진천풍(一陳淸風)이 옷소매를 스치며 축축히 땀 밴 흉금으로 상연(爽然)히 기어든다. 안계(眼界)는 끝없이 넓어지는데 한창 무성한 전곡(田穀)들이 벽파(碧波)인 양 굼실거리며 멀리멀리 운산의 기슭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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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청천강이 바루 이 누(樓) 발부리를 씻으며 흘러갔다 하나 이금(而今)엔 아득하게 서편으로 물러나, 점점의 청산을 널며 만폭(萬幅) 백련(白練)을 널어 놓은 듯 은색으로 번쩍인다. “금일양진처 석시위대하(今日揚塵處昔時爲大河)”는 글로만 보았더니 문자 그대로 실현된 곳이 이 곳이다. 산하도 변하거든 인사(人事)야 물어서 무엇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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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에 오른 이로 창상번복(滄桑飜覆)에 일국루(一掬淚)를 아낄 이 그 몇몇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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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의 창건 연대는 미상하나 이 누의 경을 읊은 고려 충숙왕 시가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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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절창이다. 이득한 운산의 금병(金甁) 속에 이 누는 정말 외로운 따오기처럼 나는 듯하다. 옛날의 ‘옥경(玉鏡)’이 시방은 푸른 들로 변하였을 망정 소주(小舟)를 점친 듯한 이 누의 형상만은 의구하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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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상에 소창(消暢)하고 있던 고로(古老)들이 원래(遠來)의 객을 위하여 고적(古蹟)을 설명해 준다. 저기 저 곳이 오도탄(誤渡灘)이요, 비루 그 위에 청천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류되며, 펀펀한 백사가 삼각형 섬을 지은 곳이 골적도(骨積島)라 한다. 오도탄은 수병(隋兵)이 멋모르고 칠불의 뒤를 따라 건너다가 전몰한 유역이요, 골적도라 함은 그 때 죽은 적병의 백골을 쌓아 두었다고 이름을 지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이따금 그 곳에서 작란하던 아이들이 도기류의 파편과 송곳 같은 시촉(矢鏃) 등을 얻어 기뻐한다는데, 속칭 ‘당장(唐葬)’이라 하여 무수한 무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던가. 그러면 그 무덤을 어느 편에서 묻었을까 하는 것이 고로들의 갑론을박하는 초점이요, 또 최대 관심처다. 추병(追兵)을 배후에 두고 전우를 묻어주고 갈 여유가 있었을까? 그러면 고구려 측에서 합장(合葬)의 노(勞)를 취하지나 않았을까? 아니다, 기구까지 넣어서 구수(仇讎)의 적병을 안장할 까닭이 없으리라, 물론(物論)은 이렇게 분분하다. 얼른 들으니 하일(夏日)이 장장하니 무용(無用)의 논의로 소일거리나 삼는 듯하지마는 기실은 거기 중대한 의의가 없지 않은 듯도 싶었다. 당시 고구려군의 기풍의 편린을 이 점에서 엿볼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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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지하면 당시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 등이 인솔한 구군(九軍)만 30만 5천여 명이었는데 실수에서 참몰을 당하고, 혼불부체(魂不附體)로 안주에서 압강까지 450리를 일일야(一日夜)에 줄달음질하여 만사(萬死)에 일생(一生)을 얻은 자가 불과 3천이라 하였으니 하룻밤 사이에 450리를 달음박질할 급한 형세이거늘 어느 틈에 전우의 시체를 수습할 생의(生意)인들 할 것이냐. 그 때의 무덤이 지금도 남았다면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고구려 측에서 묻어준 것이 명약관화다. 전시엔 구적(仇敵)이로되 한 번 전투력을 잃고 거꾸러지면 다 같은 가련한 인류가 아니냐. 만리 이역에서 백일하에 시골(屍骨)을 폭(暴)하는 것을 볼 제 동정의 열루(熱漏)로 묻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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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와 소지품과 무기를 그대로 넣고, 튼튼하게 편안하게 묻어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천년을 지난 오늘날까지 그 중총(衆塚)의 영자(影子)인들 남았겠으며, 기물의 일편인들 얻어볼 수 있으랴. 얼마나 고양된 기사도이며 관대한 금도(襟度)이냐. 나는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으쓱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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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루에서 고로들의 지점(指點)하는 손가락을 따라. 을지공의 전적 남긴 유역(流域)과 지대를 안력(眼力) 닿는 대로 바라보고 보살피고 새삼스럽게 그 풍공위열(豐功偉烈)에 감격하며, 그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승리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도연(陶然)히 취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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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천고에 상(想)이 치(馳)하고 흥(興)이 비(飛)하매, 새로운 용과 기가 유연(油然)히 용솟음함을 깨달았다. 과거의 위대하고 찬란한 광영 속에 심신이 현황(炫煌)하게 쌓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한 번 누하(樓下)로 발음 옮겨 정문 들어오는 좌편에 을지공의 깨어진 석상과 석비를 보고, 무참한 현실에 나의 채홍(彩虹) 같은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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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석상은 현존한 대로 전체를 합하면 5척이 될까 말까, 투구와 머리를 새긴 듯한 돌은 두 조각으로 깨어져 동체 위에 올려 놓였고, 그 동체 밑 아랫두리는 끊어져 달아났다. 석면은 음각으로 갑주(甲胄)를 새긴 것이 지금도 완연하다. 그리고 바루 그 옆에 석비(石碑)의 파편이 있는데 너비(廣)는 2척, 높이(高)는 3척이나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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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잠기는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석상과 석비 가까이 들어서서 그 비면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문자를 줏어 보았다. 정면에 “高句麗大臣 乙[고구려대신을]”하고, 그 밑은 떨어졌으며 우측면엔 ‘士林崔宗宅高鎭化金[사림최종댁고진화금]” 뿐이요, 좌측면엔 두 줄로 “山辰康益裕都有可李信[산장강익유도유사이신]─ . 翕別執事白楚伯康再賢養[흡별집사백초백강재현양]─.”이라고 하였으며 후면은 그 사적을 기록한 모양으로 14행을 적었는데 역시 밑은 떨어져 없고 윗머리에 글자 남은 것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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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箕城人諱文德乙支基氏高句麗嬰[공기성인휘문덕을지기씨고구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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煬帝伐高公麗徵天下兵水陸俱盡[양제벌고공려징천하병수륙구진]▣▣▣▣▣
106
浪道拔遼東陷鴨綠軍聲大振建莫[랑도발요동함압록군성대진건막]▣▣▣▣▣
107
外設機變見隋軍有飢色欲疲之每戰[외설기변견수군유기색욕피지매전]▣▣▣▣
108
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云止若[궁지리전승공기고지족운지약]▣▣▣▣▣▣
109
半渡而縱兵急擊殺右屯將辛世雄[반도이종병급격살우둔장신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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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至遼東惟二千七百人噫煬帝東伐[환지요동유이천칠백인희양제동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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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殆無子遺其豊功偉烈可以亘字宙[공태무자유기풍공위열가이긍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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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至今俎豆之薩之南岸有一片石[동지금조두지살지남안유일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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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風雨磨洗石己[구풍우마세석기]▣矣一州土民莫不[의일주토민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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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意略記其實因爲之銘[지의략기기실인위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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薩水浮浮功冠大東石依依[살수부부공관대동석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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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紀元二百二十年乙未上澣[숭정기원이백이십년을미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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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해 보았다. 할 수 있는 대로 냉정해 보았다. 그러나 연필 쥔 손이 떨리어 초(抄)하는 자(字)와 행(行)이 바루 잡히지 않음을 어찌하랴, 점점 비문은 흐리어 희미해지고 안광은 갈수록 몽롱해진다. 손바닥으로 비면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주먹으로 눈을 닦기 그 몇 번이었던고. 끝끝내 열루 한 방울은 수첩에 떨어지고 말아, 흐린 글자가 더욱 흐리게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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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석상은 본래 청천강 남안에 있던 것으로 이조에 들어와, 청천강 사우(祠宇)를 짓고 모셨던 것인데 중수를 게을리한 까닭으로 사우가 전복된 지는 이미 오래였고, 이 석상마저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필경엔 파쇄(破碎)의 겁운(劫運)을 당하게 된 것이니, 몇 년 전에 서문 밖 용현리에서 매몰된 것을 파내어, 농업학교 교정 등으로 전전하다가 재작년에 다시 현재 백상루 아래로 이전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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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은 기운다. 위인의 최후 모양으로 태양은 거룩한 숨을 모으며 뉘엿뉘엿 서천으로 그 광명체를 숨기고 만다. 시포(屍布)처럼 떠돌던 몇 조각 백운은 해 떨어진 자리로 슬금슬금 모여들어, 생채를 잃어버리고, 암연히 눈물을 지우는 듯. 문득 숭엄한 후광이 일어나며 그 붉은 광파(光波)가 용용(溶溶)히 흘러 일순간에 왼 우주를 적신다. 구름이란 구름은 모조리 산호처럼 타오르며 산하도 혈색이요, 초목도 혈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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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을지 장군의 석상도 혈루에 젖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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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동강이로 무참하게 부서진 석상을 또 다시 어루만지며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열화와 같은 적기(積氣)가 가슴에 치밀어 오르다가, 비애와 참괴에 지질린다. 웃어도 시원찮고 울어도 시원찮다 함은 이런 감정을 두고 이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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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 양제는 욱일승천(旭日昇天)의 세로 남정북벌에 소향무적(所向無敵)으로 지나(支那) 전토를 철환(鐵腕)하에 집어넣고 대고구려국과 자웅을 결하고자 천하의 병마를 모아, 에누리 없는 백만 대병을 들어 입구(入寇)하지 않았느냐. 승승장구한 그 맹장과 정병은 파죽의 세로 요동을 발(拔)하고 물밀 듯 짓쳐들어오니, 압수와 향산이 벌써 여국(麗國)의 유(有)가 아니었으며, 국도 평양의 위(危)함이 누란과 같았으니 만일 을지 장군이 없었던들, 당년 대고구려국이 멸망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조선 민족이 그때 벌써 어육(魚肉)이 되고 도탄에 빠져, 이 지구상에서 형(形)을 절(絶)하고, 영(影)을 잠(潛)하였을는지 모르리라. 사멸에서 흥륭으로 치욕에서 광영으로! 역사의 추축(樞軸)을 전환시킨 민족적 대은인이 그 누구이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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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라도 그에게 상관있는 것이면 일괴석, 일편목인들 어찌 소홀히 할 것이며 범연시할 것이냐. 금궤옥함(金櫃玉函)으로 귀중하게 간수하고 호각수사(護閣守祠)로 숭엄하게 모시어 후예 된 자 성의의 만분의 일이나마 표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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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전(訛傳)이라 하더라도 공의 존상을 새겼다는 것이 파편으로 전전하는데 이르러서야 다시 무슨 말을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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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 그뿐인가, 이 곳이 어디냐, 장군이 공전절후의 대승리를 얻어 천추에 병연(炳然)한 위공대훈을 세운 지역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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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단족(檀族)을 위(危)에서 안(安)하게 하고 망에서 흥하게 한 이 산, 이 강, 이 장소에서 장군의 석상은 안주의 곳을 잊지 못하고 구르고 구르다가 필경엔 수(首), 신(身) 지(肢)가 삼분되어 즐풍목우(櫛風沐雨)하고 있단 말이냐! 그 대조의 참(慘)이여, 기구한 겁운(劫運)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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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에 혈염(血染)된 석상은 안개 가린 누안(淚眼)에 셋도 되고 넷도 되고 다시 하나가 되어 어마어마하게 커지며 나를 꾸짖는 듯이 대지르기도 하고, 또는 산산이 부서져 가물가물 사라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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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통(號慟)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석양 속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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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조래(朝來)로 대우(大雨) 폭주(暴注), 폭풍까지 일어나 앉아 있는 방이 노도(怒濤)에 엽주(葉舟)처럼 흔들린다. 반자가 바람을 머금고 거대한 양서동물의 배때기처럼 불룩거리며, 이따금 처장(凄壯)한 함성을 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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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주에서 월림(月林)까지 자동차길로 2백리, 월림에서 묘향산 보현사까지 도보로 15리. 이 바람, 이 비에 어찌 발정을 하겠느냐고 여러 사람이 굳이 말린다. 초행에 위구(危懼)가 없지 않은데, 더구나 월림이란 곳은 인가없는 강변이요, 그분들의 말짝으로 ‘무인절도’란 위협에 또 일일(一日)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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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의 풍우성에 고달픈 객몽도 맺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새우니 7월 11일. 오후 12시 40분 모우(冒雨)하고 자동차에 몸을 맡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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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 자동차란 몸뚱이는 턱없이 크면서 채신도 없이 까부는 물건이다. 더구나 수 주야의 호우로 군데군데 길이 괘인지라 마치 미친년 모양으로 춤까지 추어제치니 배겨내는 장사가 없다. 머리는 천장에 대지르고 등어리는 안석에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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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임물에 흐지부지하던 비는 안주읍을 지나면서 억수로 또 따르기 시작한다. 운전대 앞창에 방울방울 구슬이 맺히며 줄줄이 흘러나리매, 운전수는 창 위에 장치한 쇠꼬챙이로 쥘부채를 펴듯이 물을 떨어뜨리기에 바쁘다. 나그네의 마음도 그 창경의 흐림을 따라 흐려진다. ‘초행’, ‘강변, ‘무인절도’! 아득한 앞길에 불안이 적지 않다. 간난(艱難)한 여정의 제일보를 내디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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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 양평으로 사이 좋게 늘어선 ‘아카시아’ 나무가 그 줄기차게 뺃은 뿌리를 빼어들고 턱턱 가루 누웠으니 야래(夜來)의 풍우가 얼마나 사나웠던가를 짐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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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价川)을 넘어서니 길은 청천강을 끼고 돈다. 강물은 흠씬 불었으되 이수(泥水)가 나지 않고 검푸른 수면이 때때로 흉용한 파도를 치며, 백만 수병(隋兵)을 통으로 삼킨 살수(薩水)의 옛 면목을 잃지 않은 듯. 강 가로내친 잔 돌, 굵은 돌도 흉물스러운 암갈색을 띠었는데, 거뭇거뭇 흑점이 박히어, 마치 그 때의 혈흔이 새로운 것 같다. 음산하게 나리는 궂은비 소리 사이로, 추추(啾啾)한 귀곡성을 들은 상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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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는 조금 뜸해졌다. 수멸수멸하는 물결에 가는 빗발은 돈짝만한 무늬를 그리다가 잔잔한 거품을 지어 흰 꽃잎처럼 동실동실 떠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스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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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구가 불쑥 머리에 떠오르며 유구한 자연 앞에 인사의 무상함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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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球場)에 이르매 나를 찾아 향산까지 들어갔다가, 헛걸음만 하고 돌아오는 영변지국장 차남두(車南斗) 씨를 만났다. 이떻게 반가운지! 인생 사희(四喜) 중에 ‘타향봉고인(他鄕逢故人)’을 넣은 것은 이런 해후를 두고 이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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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경, 월림에 도착. 청천강을 배로 건너, 15리 장정에 세우와 폭우를 번갈아 맞으며 우리는 걸었다. 향산 입구다. 청천강 상류, 향천강을 우편으로 끼고 들어간다. 외사항(外獅項), 내사항(內獅項)으로 들어서니 물은 더욱 맑아지고 돌은 더욱 희어지며 물가에 병풍같이 늘어진 층암(層巖)이 발채로 잡목이 울창한 군만(群巒)은 더욱 높고도 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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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투른 시 한 수를 읊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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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객(賓客)을 송영한다는 심진당(尋眞堂)으로 돌아드니 계곡은 더욱 심수(深秀)하고 유장해진다. 향천강 물은 백옥(白玉) 벽옥(碧玉)을 바수어 나리는 듯. 운해에 헤엄치듯이, 혹은 머리를 잃고 혹은 허리를 잃은 층층첩첩의 군봉들이 그 변화 자재(變化自在)의 위용을 홀현홀몰(忽顯忽沒)하니, 내 몸이 벌써 신역선경(神域仙境)에 들어선 줄 저절로 깨달았다. 배산(背山) 금강(襟江), 한 데로 활연히 열린 곳에 대소 범우(梵宇)가 즐비한 것은 물을 것 없이 묘향산의 주찰 대본산 보현사다. 향산 여관에 여장을 끄르니 11일 오후 6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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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은 본명 태백산으로 백두산의 직계 정맥(正脈)이 동으로 침침(駸駸)히 달려와서 거대무비한 천간지비(天慳地秘)를 이룩하였으니 그 구역은 실로 압록강의 남에서 평양의 북까지 4백여 리에 방박웅반(磅礡雄盤)하여 그 위대한 흉금에 서부 조선을 완전히 포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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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 희천, 덕천, 개천, 순천, 강동, 자산, 안주, 숙천, 순안, 영유, 평양, 강서, 용강, 삼화, 함종, 증산 등 17읍이 계(界)를 여기서 분하였으며, 관서에 횡류하는 살수와 폐수의 양대 하류도 원(源)을 여기서 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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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공(李公) 시환(時桓)의 사(詞)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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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설암 대사(雪巖大師)의 시도 결코 과장이 아니요, 그 실(實)을 영(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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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만(層巒)과 중장(重嶂)이 부용의 화관 모양으로 차곡차곡이 맺히고 겹겹이 쌓이어 그야말로 운소(雲霄)에 ‘삭출(削出)’한 듯한 위관(偉觀)! 숭엄웅혼, 호장한 대로 수경(秀景)과 기취(奇趣)까지 묵철(默綴)하였으니 청허(淸虛 : 西山[서산]) 대사의 4명산 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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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수이부장(金剛秀而不壯), 지리장이불수(智異壯而不秀), 구월부장불수(九月不壯不秀), 묘향역장역수(妙香亦壯亦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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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절찬도 과예(過譽)가 아님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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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산(外山)을 지나 한 번 내산(內山)으로 들어서면, 더욱 유현신비(幽玄神秘)한 경(境)이 열린다. 잡초와 잡목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초벽(峭壁)과 현애(懸崖)가 백설과 빛을 다투는데 무수한 향목이 밑으로 밑으로 취색(翠色)이 돋는 가지를 뺃은 양은, 일점 진(塵)도 허하지 않는다. 청허 대사로 하여금 “아미색계정여은(峨嵋色界正如銀)”이라 하였고, 운암 대사(雲岩大師)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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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함이 이 유리정토(琉璃淨土)의 색상을 만분지일에나 방불케 하였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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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의 비로봉(최고봉의 뜻)은 해발 6천여 척으로 백두산 다음 가는 고봉의 옥좌를 차지하였으며 그 다음의 수봉(秀峰)인 향로봉에 오르면, 동해와 가장 가까운 탓으로 새벽에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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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상서(洪尙書) 양호(良浩) 시에 “창해오경선견일(滄海五更先見日)”과, 임 장군(林將軍) 경업(慶業) 시에 “동림양곡운간일(東臨暘谷雲看日)”은 다 이 봉에 올라 장엄한 동해의 일출 광경을 읊은 것이다. 태산과 숭악(崇岳) 이 눈두렁으로 발아래 깔리고는 남명(南溟)과 북발(北渤)이 실개천처럼 눈밑에 기는데 망망한 청해에서 떠오로는 최초의 일광! 상상만 해도 장쾌하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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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기(小記)는 6분은 ‘향산이적(香山異蹟)’에서, 1분은 구전에서, 3분은 나의 실감에서 독자와 같이 향산의 개념이나 얻고자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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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조조(早朝), 단군굴 근참(覲參)의 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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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衆峰)은 구름 바다에 잠기고 계류(溪流)조차 안개자락에 흐리었음은 임우(霖雨)가 아직 쾌청을 않은 모양이다. 언제 호우가 천지를 뒤집을는지 모를 일이요, 앞길은 인적조차 끊어진 심산절벽이라, 우리의 준비도 대단하다. 폭우와 노영(露營)을 위한 캠프와 침구며, 솥, 냄비, 2일 양식과 의류 등 짐이 자못 부풀다. 인생이란 언제든지 중하(重荷)를 벗지 못하는가 하니 탄성이 절로 난다. 첫째 인도자가 문제다. 금일 행정(行程)은 단군굴, 만폭동, 금강굴인데 1년치고도 순례자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탓에 그 소삽한 길 ─ 의젓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용(山容)과 수태(水態)를 보아 그 방향을 더듬어 길을 만들어 가는 길 ─ 을 혼자 아노라고 장담하고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1년 전에 혹은 수년 전에 한 번 다녀온 이로, 모르는 길과 아는 길을 서로 절장보단(折長補短)하기로 하고 인도승(引導僧) 두 분을 얻었다. 짐꾼이 셋이요, 나와 차 군을 합하면 일행 7인이다. 성지와 영역(靈域)에 제일보를 내디디는 위구(危懼)와 경건에 옷깃도 저절로 여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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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를 뒤에 둔 지 2,3마장이 되었을까 말까, 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4,5인이 용신(容身)할 만한 입을 벌린 것을 국진굴이라 한다. 『영변읍진』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행인(荇人)이 태백 산하에 국(國)을 창하니 신라 시조 혁거세와 병립이라. 고구려 동명왕 6년 기축(한 성제 홍가(鴻嘉) 3년)에 여장(麗將) 오이(烏伊)와 부분로(扶芬奴)가 내공(來攻)하니 행인왕(荇人王)이 대패하여 이 석굴 속에 은신하였다가 필경 생금(生擒)되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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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흥망의 자최가 있구나, 하매 비 젖은 석면에 누흔(淚痕)애 새로운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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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을 한 번 넘어 빈발암(賓鉢庵)에 (암자는 흔적도 없다) 오르니 천주석(天柱石)이 전용(全容)을 나타낸다. 탁기봉(卓旗峰) 중복에 그 이름과 같이 하늘을 고인 듯이 직립한 거암이 돌올(突兀)하게 2백여 척을 솟았다. 인도승 하나가 설명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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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천주석은 단군굴에 올라서면 바루 정면으로 보이는데 그 때 단군님께옵서 굴에서 활을 쏘시면 그 화살은 10리 허(許)에 날라 저 바위를 맞히고, 여력으로 그 화살은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단군님께 날아왔답니다. 그러기에 단군님께서는 화살 하나로 무예를 강습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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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자기가 눈으로 본 듯이 역력히 지점하며 자못 흥분한 태도다. 나는 그의 엄숙한 얼굴찌에서 이지(理智)를 초월한 불멸의 신앙광을 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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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봉(賓峰)에서부터 길다운 것은 끊어지고 밭 바닥으로 들어서서 무성한 콩과 조 이삭을 헤치며 한참 가노라면, 다시 개울가로 내닫는다. 너덜너덜한 돌과 모래와 군데군데 고인 물을 뛰고 건너고 발을 적시고 잠그고 하다가, 윗머리가 엇비슷하게 내밀은 바위를 만나니 그 석면에 “단군굴 입구” 라고 묵흔(墨痕) 뚜렷한 5글자가 우리를 맞아준다. 얼마나 반가운지. 이것은 재작년 신안주지국장 김병량(金秉亮) 씨 일행이 순례하는 길에 뒤에 오는 이를 위하여 표지(標誌)로 남긴 것임을 미리 들어 알았다. 소삽한 이 길녘에 얼마나 유의 유조(有意有助)한가.
182
잡목 숲에 가린 급경사의 앞길을 바라보며 우리는 암상에서 소게(小憩)하였는데 그 때 인도승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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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봉의 동편으로 얼마쯤 꺾어 들어가면 직립한 큰 바위가 있고 그리 크지않은 석굴이 있어, 속칭 가단군굴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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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평안 감사나 영변 부사가 도임을 하면, 으레 체면치fp로 단군굴을 근참하는 법인데 발과 손으로 기어 올라도 위험한 길을 남여(藍輿)를 타고 행차하는 바람에 죽어나는 이는 승려들이었다. 고지식하게 혈한(血汗)을 흘리다가 못하여 가깝고 편한 거기를 단군굴이라고 속여 배례를 시킨 까닭에‘가’자가 붙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당시 감사 모모들의 각자(刻字)가 뚜렷이 남아 있다던가. 학정 앞에는 허위와 휼사(譎詐)가 도리어 공도요 정의다. 근참의 기념 각자가 그 글자의 사라지기까지 후인의 조소와 후매(詬罵)를 입을 줄이야 그인들 뜻하였으랴.
185
실지로 답사를 해 보고도 싶었으나 여기에서 가자면 또 딴 일이요, 더구나 성스러운 이 길에 그런 것을 보는 것이 도리어 불결하다는 생각이 나서 앞 길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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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록으로 들어서니 인제부터 오르막이다. 한 걸음마다 급해지고 한 자욱마다 촉해지는데, 길이란 형용도 없다. 초로(樵路)도 길이요 석경(石經)도 길이련만 이야말로 그대로 산을 타는 것이다. 인적부도처(人迹不到處)는 아니겠으되, 인적을 찾을 수는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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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목(喬木)과 거수(巨樹)는 볼 수 없고, 4,5년 혹은 6,7년생의 참나무, 전나무, 낙엽송 들이 땅이 비옥한 대로, 쭉쭉 곧게 올라가서 천일(天日)을 덮었는데 여러 해를 두고 떨어지고 썩고 한, 잎사귀가 작금의 장마에 젖을 대로 젖어서 미끄럽기가 완연히 빙판이다. 흙이란 별로 구경을 할 수가 없고 엽해(葉海)를 허위적거리고 발음 옮기는데, 한 자욱을 올려 놓으면 두 자욱씩 미끄러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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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 그뿐인가 풀이 길을 넘는가. 한창 자란 억새풀 사리 떼가 얼굴을 할퀴고 잔등을 벗기고, 팔을 물고 늘어진다. 풀은 헤칠 수나 있지마는 더욱 질색할 것은 칡넝쿨, 머루넝쿨, 다래넝쿨이 허리를 휘감고 발목을 잡아 다리는 것이다. 이 나무, 이 풀, 이 넝쿨이 모조리 비를 흠씬 먹은 탓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빗발이 우수수 떨어진다. 옷은 물에나 빠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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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계곡이 열리며 반공(半空)에 걸린 폭포가 군데군데 승경을 어루었으되 발을 올려 들이기에 전정신과 전신경을 집중한 탓으로 어느 결에 한 눈을 팔 여가조차 없다. 중턱에나 왔을까 말았을 때 문득 우렁찬 뇌성이 천지를 뒤흔들며 번쩍이는 자전(紫電)이 안개에 흐린 봉만(峰巒)에 연련한 섬광을 던진다. 앞이 캄캄해지자 비는 은죽(銀竹)을 곤두세운 듯이 나리지른다.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산상에서 비 맞는 맛이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이 상연(爽然)한 맛, 통쾌한 맛을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턱에 닿던 마른 숨길도 축축이 젖고, 땀에 목욕한 불덩이 같은 몸도 시원하게 식는다. 내 몸에 김이 무럭무럭 난다. 열철에 냉수를 끼얹은 듯. 살과 뼈가 통으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르는 듯하다. 제발 안개나 되어 다오! 임 나신 자리로 날아오르리라.
192
중턱을 넘어갈수록 수해(樹海)는 더욱 깊고 초림(草林)은 더욱 우거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미 쳇바퀴 돌 듯 산허리에 매달려 죽을 판 살판 기어오른 것인데, 인제부터 중복(中腹)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가는 양하여 천야만야한 현애(懸崖)가 눈 아래 아슬아슬하게 깔린다. 취우(驟雨)는 벌써 걷히고 하계의 무해(霧海)도 그 짙은 회색이 스르르 풀어지며 백색으로 옮겨 가는 듯하더니 어느 결에 올올이 경라(輕羅)로 나부끼며 슬금슬금 우리 발부리로 날아오른다. 우리는 운하(雲霞)를 밟는다. 능운보(凌雲步)의 선자(仙子)의 영능(靈能)도 이 신역에 들어서면 그리 어려운 노릇이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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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타원형의 동글갸름한 취엽(翠葉)과 청수(淸秀)한 간지(幹枝)를 가진 단목(檀木)을 발견하고 임의 편영을 뵈옵는 듯, 경건한 가운데로, 그 줄기를 쓰다듬으며 그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달린 어린애 모양으로 나는 기뻐하였다. 여기저기 고목 등걸이 쓰러지고 동량의 재(材)가 훌륭한 만한 거수(巨樹)가 턱턱 넘어졌는데 가장 늙은 인도승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194
“이것이 모두 단목이요, 옛날에는 이 창울한 단목이 하늘을 덮었다 하오. 단목뿐이겠소? 이 거궁한 산에 백년, 천년 묵은 고목이 들어 쌓이지를 않았겠소? 그런데 을묘년 탕수(蕩水)에 이 결단이 났구려. 을묘년이면 18년 전이 되겠소 을묘년 탕수야말로 신이 진노한 탓이지요. 갑오년 난리에 이 근읍 백성들이 전부 이 산으로 피란을 했소. 호수로 천 호, 인수로는 만 명이 넘었겠소. 이 군정들이 산림에 불을 함부로 처지르고 논을 푼다 밭을 간다, 마구 벗겨 먹었구려. 단군봉이 여기인데, 닭을 삶는다, 개를 퇴한다, 갖은 부정한 짓을 다 했구려. 그래 천벌이 없겠소? 옛날에는 이 태백산에 오르자면 미리 기구를 준비했다가 대소변을 받아 가지고, 멀리 나려가서 내버린 것이오. 그런 성지를 몰라보다니 글쎄 될 말이오? 갑오년에서 을묘년까지 한 20년 잘 해먹은 것도 하느님의 후덕이요 부처님의 자비지요. 산을 발가숭이를 맨들어 놓았으니 어찌 사태가 나지 않소. 집채만큼씩한 바위가 그대로 구을러 떨어지고, 폭포로 나리지르는 물이 골마다 바다를 이루어, 순식간에 절이고 집이고, 다 떠나려 가고 말았소 사람도 수백 명 죽었지요. 에 ─ 참 천벌이란 무섭습디다.”
195
우리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송연(悚然)하였다. 그 때 이 산을 주관하는 보현사와 백성들 사이에 20년 동안이나 분쟁이 그치지 않아, 여러 번 소요와 참극을 연출하였다 한다.
197
몇 모퉁이를 돌아 오르니, 문득 외연(巍然)한 거암 ─ 거암이라느니보담 영이(靈異)한 일좌(一座)의 석산이 우리 앞을 막아 선다.
199
“인제 다 왔소”하는 바람에, 우리는 환성을 올리려다가, 인도승 또 하나가,
200
“인제 정말 난관이오.”하는 말을 듣고, 멈칫하는 사이에 그는 정말 장여(丈餘)의 위초(危峭)한 바위에 잔나비 모양으로 기어오르며,
201
“그 전엔 여기 더위잡을 나무도 있고, 사다리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
203
나도, 활(滑)하기 빙판 같은 그 거대한 석신(石身)에 파충처럼 배를 깔고 달라붙었다. 이야말로 유진무퇴(有進無退)! 상승이 아니면 추락이 있을 뿐인데 족하(足下)는 천인단애다. 생과 사의 관념이 번갈아 명멸하는 찰나, 무서운 원력(願力)이 선풍과 같이 전신을 뒤흔들며 수십보를 줄달음으로 기다가 일어서니, 몸은 표표연(飄飄然) 반공에 뜬 듯한데, 발은 광활신이(廣闊神異)한 일대 석굴의 최종단의 일부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졌다.
204
이 석굴은 ‘굴’이라느니보담 창궁(蒼穹)의 ‘궁(穹)’자나 우주의 ‘우(宇)’자나 띄어 ‘석궁’또는 ‘석우’라고 부름이 그 실감을 방불케 할 만큼 거궁하다. 높이는 4길이 넘을 듯, 전면의 넓이는 50척, 깊이는 35척 가량이니 굉걸(宏傑)한 전각(殿閣) 한둘을 넉넉히 들여앉힐 만하다. 석질은 아름다운 화강석으로 녹색 백색 무늬(文儀)가 각양각색의 선을 둘렀다.
205
우리는 시근벌떡거리는 숨을 죽이고 옷깃을 여미며, 엄연숙연(嚴然肅然)히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서니, 습습(習習)한 청풍이 옷소매를 날리며, 이 세상 것 아닌 이상야릇한 습기가 끊는 가슴을 헤치고 선선하게 엄습한다.
206
물이끼가 파랗게 덮인, 동편 석벼랑으로부터 한 줄기의 옥류가, 광선과 같이 번쩍이며 흘러나린다. 타는 듯한 갈증에 나는 위선 그 수정 같은 물한바가지를 떴다. 한 모금! 두 모금! 빙수도 이보담 더 찰까. 감로도 이보담 더 달까. 냉기와 이향(異香)이 심신에 스미는 듯하며 열화와 같은 육신이 냉회처럼 식어버리자 이는 쓰리고 몸은 떨린다. 손끝 발끝이 저리다. 나는 분명히 홍로(烘爐)의 진세(塵世)를 떠나, 임 계신 광한궁(廣寒宮)에 귀명(歸命)한 모양이다.
207
일행은 어느 결엔지 나무를 찍어다가 화톳불을 피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였다. 화씨 100도를 상하하는 요즈음의 혹서에 불을 쪼인다는 것부터 정말 기경(奇景)이다.
209
화톳불에 얼마쯤 몸을 녹인 우리는 다시 굴 안으로 순력(巡歷)하다가, 서편 그윽한 석벼랑 위에 정면 남향으로 세 분 위패(位牌)를 모신 것을 발견하였다. 좌편 조금 작은 위패는 “나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썼고, 중앙은 “나무단군천신지위(南無檀君天神之位)”라 하였고, 우편은 또 다시 “나무환웅천왕지위”라 쓰여 있다. 중앙과 우편은 위패의 크기와 솜씨가 같고, 좌편의 것은 조금 작을 뿐만 아니라 수법이 졸렬한 것으로 보아, 덧붙이기로 뒤에 모신 것을 잠작하겠다.
210
우리는 의론이나 한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낮추낮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만감이 전신에 소용돌이를 치며 고개를 다시 쳐들 수가 없었다. 약자(弱子)로 잔손(殘孫)으로 어버이 앞에 엎드린 것이다. 무안하고, 얼 없고, 부끄럽고, 무섭고……해서, 숙인 이 고개를 감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211
물적 유산은 고만두자.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 ─ 고구려와 신라에 와서 찬란한 탈목(奪目)의 색과 복욱(馥郁)한 경세의 향을 발하던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이 막상 인천(人天)을 흔동(掀動)할 대과를 맞으려 할 중대 시기에 지니지 못하고 조잔(凋殘)과 영락(零落)에 맡기었으니 얼마나 황공한 일이냐. 이런 잔손(殘孫)은 대천세계를 샅샅이 둘러보아도 그 유례와 비주(比儔)를 찾을 수 없으리라. 지옥겁과 도탄고를 열 만 번 더 치르고 더 겪어도 이 죄를 다 삭치지 못하리라. 참회의 화편(火鞭)이 양심을 후려갈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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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 스무 번, 골백 번, 잘 천 번 줄항복을 하고, 맹서맹서 하였다.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왔고, 올 생의(生意)라도 하였던고? 하도 기막히고 답답하기에 집안 어른을 뵈오려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지니신 한배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 뼈가 내 뼈이거든 뼈인들 아니 저리시며, 그 피가 내 피거든 핏줄인들 아니 당기시랴. 역정도 나시지만 그래도 눌러보시리라. 괘씸도 하시지만 그래도 거두어 주시리라. 밉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옆들고 받들어 주시리라. 두 팔을 벌리시고 오라, 오라! 부르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마음을 졸이시며 왜 안 오나, 왜 아니 오나! 바라신 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억천만 겁을 윤회한들 임 주신 뼈와 피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아아, 염통이 뛴다. 고동하는 이 가슴에 임의 손을 얹어 보소서.
245
성조(聖祖)의 영궁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우리는 시방 단군봉을 넘는다. 목표는 만폭동의 최고원지. 풀과 덩굴과 빙판 같은 부엽니토(腐葉泥土)와 사태(沙汰)와 현애(懸崖)와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행진이다. 거꾸러져도 보고 자빠져도 보고, 포복슬행(匍匐膝行) 부릴 수 있는 재조를 부리고,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찰과상과 열상 등 수십창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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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李白)이 촉도지난(蜀道之難)을 난어상청천(難於上靑天)이라고 호들갑스럽게 흥감을 떨었지만 청천도 오를 수 있는 길이라면 이보담 더 험하고, 더 위(危)하고, 더 급하고, 더 촉(矗)하지는 않을 듯싶다. 절벽을 만나 혼비백산의 변을 볼 뻔하기 무룻 7회, 방향을 잘못 잡아서 회정(回程)하기 무릇 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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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큰 흑암 위로 은류(銀流)가 날으는 것을 보고 우리 일행은 한결같이 “아!” 소리를 쳤다. 얼마나 많은 느낌을 붙인 이 외마디냐. 경탄과 찬미와 환희가 한꺼번에 뒤섞인 소리라. 무진한 윤회고를 겪다가 복지(福地)에 도착한 기쁨도 이러할 듯.
248
안전(眼煎)에 전개된 이 광경을 웅흔하다 할까 장엄하다 할까, 빼어난 봉만 이 대붕의 두 나래처럼 좌우에 펼칠 대로, 동곡(洞谷)은 활짝 열렸는데, 먹을 갈아 부은 듯한 시커먼 바위 머리 ─ 횡으로 80척이 넘을 듯한 어마어마하게 큰 반원형의 머리를 슬쩍 넘는 듯하더니, 폭포는 나리지른다. 물 떨어지는 데마다 널리 판판한 반석이 되고, 그 반석을 지나면 또 다시 비폭(飛瀑)이 되어 밑으로 떨어진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만 크고 긴 놈이 4 층, 조금 짧은 것이 3층, 모두 7층을 이루었는데 이 7층을 합하면 모두 80 길이 넘는다던가. 만폭동의 폭포라면 대개 그 입구의 무릉폭만 보고 돌아서고, 험난한 여기에는 유객이 적은 탓으로 실지로 재어 본 일도 없고, 뚜렷한 명칭조차 붙지 않았다 한다.
249
상하 7층에서 벽력을 나리며, 뇌정(雷霆)을 일으키며, 먹장 같은 직립 거암과 백옥 같은 펀펀한 반석을 무대로, 비류(飛流), 직주(直注), 활보(活步), 난무(亂舞)하는 양은 과연 신변(神變)을 단예(端睨)할 수 없는 은룡(銀龍)이 넘노는 듯하다.
251
반석 위에서 우리는 다 늦게야 점심 꾸러미를 끌렀다. 젓가락은 단지(檀枝)요, 먹는 물은 폭포다. 찬으로는 몇 가닥 미역과 한 숟가락 고추장 뿐. 장경(將景)과 활취(闊趣)가 모두 반찬인 양하여, 제각기 두 손으로 움켜쥔 주발만큼 씩한 밥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비말(飛沫)과 수연(水烟)이 찰 세라고, 어느결에 나타난 태양은 불볕을 나려부으신다. 척척한 옷이 불시에 마른 듯. 까마귀 몇 마리가 그리운 인간을 반기드키 요샛말로 저공비행을 하며 까욱까욱 지저귄다. 오늘 아츰 길 떠난 뒤로 생물을 만나 보기는 이 까마귀가 처음이다. 우리도 정다운 이 소리 나는 곳을 쳐다볼 제 노승 한 분은 “속가(俗家)에서는 까마귀를 보면 흉물이라고, 불길지조라 하지마는, 우리 산인들은 그 소리도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까우까우는 가우(嘉遇), 가우니 곧 잘 만났다는 뜻이라지요.”
252
하며 “고시레!”하고, 밥 한 술을 돌팍 위에 던져 준다.
253
화식(火食) 먹는 인간이란 절경도 참말 식후다. 배꼽이 일어서자, 일행은 활기가 넘친다. 이따금 홍소가 물소리를 누르며, 「향산가(香山歌)」 가 울리고, 「도라지 타령」이 나오고 곡조 모를 가락을 청승맞게 지르는 이, 콧노래를 웅얼거리는 이, 겨운 흥을 견디지 못하는 듯. 어떤 이는 옷을 활짝 벗고 고개를 폭포 나리막에 불쑥 내밀었다가, 차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도리도리도 하고, 어떤 분은 덤벙 물에 뛰어 들다가 걷은 옷도 다 버리고, 화난 듯이 물을 탕탕 차기도 한다.
254
승경에 겨운 흥을 다 못 풀고, 갈 길을 재촉하니 오후 4시경. 기구한 행정(行程)에 또 다시 죽을 판. 20리 나마를 휘다듬어 내원암 후봉을 넘어서니, 산등이 조금 펀펀하고 나무가 드뭇한 자리에, 굵은 참나무 기둥들이 우뚝 서고, 그 뒤는 굼튼튼하게 시립(柴門) 같은 것을 얼키설키 엮어서 비스듬히 뉘어 놓고, 그 위에는 또 다시 돌무더기를 쌓아둔 것을 발견하였다. 동행의 설명으로 그것이 곰 잡는 틀인 줄을 알았다. 과연 심산이구나, 하는 느낌이 다시금 새롭다. 백웅(白熊) 전설이 별안간 머리에 떠오르며 기이한 인연인 듯도 싶었다.
255
차 군(車君)과 나는 그 틀 위에 올라 짓궂게 쿵쿵 굴러 보다가, 문득 방아쇠처럼 장치한 나무가 벗겨지며, 곰틀은 벼락 치는 소리를 내고 나리떨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틀 밖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257
6시 30분경, 강선대(降仙臺)에 올라서니, 절벽에 우뚝 솟은 기암인데, 흙 한 점 없는 바위이거늘 청송 몇 주가 돌을 뚫고 어엿이 정자를 지어, 일진청풍(一陣淸風)이 일 때마다 송뢰(松籟)를 아뢴다. 선적(仙跡)은 찾을 곳이 없건마는, 사향노루의 똥이 콩알처럼 군데군데 흘러, 진세가 아닌 것만은 알려준다. 오늘밤에 숙박할 곳이 금강굴이란 바람에, 일행은 안심의 숨을 내쉬자, 다시금 시끌덤벙거리며 인환(人寰)에 들리라는 듯이 외마디 소리를 지를 때, 노승은 손을 내저으며 엄숙한 얼굴과 종용(從容)한 말소리로,
258
“떠들지들 마소. 여기가 어디라고 일모(日暮)가 박두한데 인성(人聲)을 낸단 말요? 산행엔 무어(無語)외다. 어인(御人) 지도대로 ─ 말하자면 인도하는 이의 가는 데로 뒤를 좇아오는 법이오. 산성(山聲)이란 참으로 멀리 들립니다. 누구에게 알릴 일이 있으면, 지팽이로 바위를 두어 번 뚝뚝 쳐도 산이 울려다 알아듣게 되는 거요.”
259
일좌(一座)는 숙연해졌다. 나는 이산의 제일 특이한 소산(所産)이 무엇인가를 나직히 물었다.
262
“산삼을 캐자면 7일 재계(齋戒)는 물론이거니와 산신제도 굉장히 지낸다오. 대개 7월 보름이 되면 입산을 하는데, 그야말로 천신만고지요. 산신님이 도우사 혹시 삼을 얻지 않겠소. 그러면 그 자리에 표적으로 나무를 덮어둔다오. 그것은 제 고생을 생각하여 뒤에 오는 이에게 여기 삼을 캐었으니 이 부근에 삼이 날 것 같다는 뜻을 알리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그 나무 덮은 것을 ‘고장자리’라 하오. 7월부터 입산하는 것은 조금 서두는 편이고 원래는 8월 15일을 지나야 산신님이 내어준다시지요. 가을철에 산삼에 목숨을 매달고 다니는 이가 퍽이나 많지요.”
263
노승은 잠깐 숨을 돌리는 듯하더니 다시 말끝을 잇는다.
264
“산삼보담도 더욱 참혹한 것은 석용(石茸) 따는 노릇이오. 산삼은 그래도 한 뿌리만 큼직한 것을 캐면 돈 천이나 생기기가 일쑤지만, 석용이란 한 바구니를 따와도 단 돈 10량이 되지 않는구려. 그래도 힘들기란 산삼 이상이지. 석용이란 산에도 맨 윗머리 석벼랑에 여는구려. 이것을 따자면 제 허리에다가 새끼를 메고, 새끼 한 끝을 바위 뿔따구니에 매어 놓고 신지무의(信之無疑)로 나려가지요. 석용이란 한 곳에만 모여 나지도 않고 여기저기 드뭇드뭇 붙어있기 때문에 새끼 닿은 대로는 이라도 가고 저리도 가지 않겠소? 이 사이에 칼날 같은 바위 이빨에 새끼가 닳는구려. 석용 따는 데 정신이 팔려 제 생명의 줄이 닿은 줄을 모르다가 뚝 끊어지는 날이면 아차 소리도 지를 새 없이 천인단애에 떨어지지요. 한 해면 시신도 못 찾는 이가 수두룩하지요.”
265
나는 인생의 생계가 곧 사인(死因)임을 다시금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268
금강굴은 서산 대사의 수도처로 유명하다. 주위 12장이 넘는 규형(珪形)의 거암이 동편의 3분지 1 가량만 땅을 디디고, 3면은 10수 척 가량 공중에 떠있는데, 이 바위를 지붕으로 집을 들여앉혔다. 간수는 4간이 될까 말까. 이 집도 언제 지었는지, 연대는 역시 미상하다 하되, 뼈대가 아직도 성한 것으로 보아 100년 안짝의 창건인 듯. 주승은 이도산(李道山)이란 함경도 중으로 여기 입산 독거한 지 벌써 10년이 넘는다던가. 나이는 50 가량, 귀는 절벽이 되어 남의 말은 도모지 못 알아 듣고, 이따금 고성으로 제 말만 떠들다가 기성을 발하며 홍소한다.
269
석간으로 나린 물을 세사(細砂)로 다시 걸렀으니 청렬(淸洌)한 물맛은 속장(俗腸)을 씻기에 넉넉하다. 이 물로 밥을 짓고, 윗산에서 우리 손으로 캐어온 고사리와 미나리로 찬을 맨들어 저녁을 마치니 어느덧 여름밤이 겨웠다.
270
밤이 들수록 공기는 더욱 맑아온다. 초저녁엔 젖빛 안개가 증봉(甑峰)의 중허리를 덮어버려 빼어난 봉우리만 꿈결같이 점점이 보이더니, 이윽고 반천(半天)에 깔렸던 운무가 스르르 걷히며 반달이 백옥으로 깎은 듯한 얼굴을 슬며시 내민다.
271
이 산, 이 밤, 이 달, 이 경(景)
274
청허 대사의 자영(自詠)한 일수를 읊조리매 과연 진념(塵念)과 속사(俗思)는 가뭇없이 사라지며 심신이 우화(羽化)나 한 듯이 가뜬하고 가벼워진다.
275
산허리와 안개는 짙은 빛이 차츰차츰 엷게 풀어지며 새하얀 흰빛으로 옮겨간다. 나부끼는 깁오리처럼 이 봉에서 저 봉으로 하늘하늘 아늘아늘 푸른 산 살을 아련히 보였다가 감췄다가. 장등에 흘러나리는듯이 보이면서 어느 절에 윗머리를 넣을꼬? 칠장산(七長山) 기슭으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문득 중봉에 다시 감돌아 올라 봉오리 한 개씩 두 개씩 흐려 버린다.
276
이 안개의 빛이란 정말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다. 희다 맑다 하여도 이대도록 희고 맑을 수 있으랴. 영롱한, 투명, 청정, 현요!─ 이 모든 형용사를 나열해 보아도 이 미묘한 백색을 꼬집어 표현할 길이 없다.
277
그나 그뿐인가, 그 가벼운 것이란! 우모(羽毛)에 비길까, 경라(輕羅)에 견줄까. 동풍에 휘날리는 유서(柳絮)와 방불하고, 옥경에 너울거리는 선희(仙姬)의 수무(袖舞)도 저러할 듯.
278
문득, 석굴 뒤로부터, 한 점 두 점 안개가 홀홀 불려 나온다. 갓 따 놓은 솜처럼 희게 피어난 안개 송이가 바루 우리 앉은 쪽 마루 옆을 스치며 몽실몽실 날아가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경이(驚異)였다.
279
꿈꾸는 듯이 안개의 작란만 바라보고 있던 차 군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 안개를 보자 신기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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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 안개가 집 뒤에서도 나오네, 저것 보아요, 뭉게뭉게 자꾸 나오네.”
281
하고, 안개를 잡으려는 듯이 두 팔을 내밀다가 별안간 뜰 아래로 나려선다. 그는 황홀한 웃음을 띠며 나를 보고,
282
“우리 안개 잡으러 가 볼까요?” 나도 웃으며 따라나섰다. 여기를 오면 누구나 저절로 시인이 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월영(月影)을 잡던 이청련(李靑蓮)의 고지(故智)를 본떠 석굴 뒤로 돌아보니, 주승이 외로이 석반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그 연기가 밝고 맑고 대기에 그대로 서리에 백무(白霧)의 화판(花瓣)을 이룬 것이다. 명월의 청휘(淸輝)가 더욱 빛나니, 용용(溶溶)한 몽환적 은파(銀波)가 투명한 공기와 어우러져, 완연한 유리세계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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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성운(噓氣成雲)!”이란 문자는 이런 경우의 광막한 표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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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에 뚜렷한 산형을 바라보며, 그 변화무궁한 환상이 심안에 명멸할 제 나는 인생을 생각하고 영겁을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하고 고달픈 꿈조차 맺을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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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다가 말고, 다시 깨어 보니 은하가 바루 눈 앞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만류(萬類)가 정적한 가운데 우 ─ 하고 나리지르는 폭포소리가 목침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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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오전 7시 발정. 최초 예정은 여기에서 중비로(衆毘盧)를 거쳐 비로봉을 반등(攀登)하려 하였으나 이 경로로는 아즉 한 사람도 비로봉에 올라본 이가 없고 억지로 올라가자면 왕복 4일정을 요하는데 요사이 같은 임우절(霖雨節)에는 생의(生意)도 못한 노릇이라 하여 일행이 굳이 말리므로 섭섭하나마 후기에 미루기로 하고 하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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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암 무너진 자최를 굽어보고 삼성봉을 지점하면서 나한굴(羅漢窟)을 잠깐 들러 8시 30분경 대향(大香) 두참이라는 곳에 이르니 무릉폭의 입구다. 도목(桃木) 수주가 명칭의 유래(由來)를 알리는 듯. 청계를 두어 굽이 돌아드니 규모는 비록 작을망정 수십장 비폭이 상하 2층으로 나누어 은사(銀絲)를 날리는데 하층에 떨어지는 급단(急湍)은 돌기한 암신에 부서지며 인공보담도 더 섬교(纖巧)한 분수(噴水)를 지은 것이 사랑스러웠다.
289
오전 10시, 수충사(酬忠寺)에 도착. 사태(沙汰) 밀린 자리에 쇄와(碎瓦)와 잔초(殘礎)가 산란하다. 정묘년 탕수에 그 굉대하던 건물이 휩쓸려 떠나가버리고 지금은 영각(影閣)만 남았는데 이 또한 반나마 경퇴(傾頹)하고 말았다. 영각 안에 들어가 보니 좌측 사명당 유정(惟政), 중앙 서산 청허당 휴정(休靜), 우측 뇌묵당(雷默堂) 처영(處英)의 영정을 모셨던 감실조차 군데군데 파열되었다.
290
이 수충사는 말할 것 없이 임진란 당시 휴정 서산 대사의 위훈을 표창하기 위하여 거금 214년 전 정조 18년에 창건하고 사액(賜額)까지 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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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에서 소게(小憩)도 못하고, 다시 행정을 재촉하니 그럭저럭 오전 11시, 오늘 해 안으로 향산의 제일 절경이라는 법왕봉(法王峰) 하의 상원암(上元庵)을 기어이 구경하고 다시 회정(回程)할 욕심인 까닭이다.
292
보현사 우측을 돌아 얼마 가지 않아 창고굉외(蒼古宏巍)한 일좌(一座) 고찰이 우리를 맞이하니 이것이 이 산 사원 중 최고 건물인 안심사(安心寺)다. 지금으로부터 960여 년전 고려 광종 19년에 개산조사(開山祖師) 탐밀대사(探密大師)의 창건한 것으로, 천년풍우에 아즉도 까딱없이 구용(舊容)을 보전한 것을 보면 당시의 건축이 얼마나 견고하고 내구성에 부(富)한가를 짐작하겠다.
294
일조(一條)의 청계를 옆에 끼고 급경사의 곡경(曲徑)을 상하(上下)하는데 숨이 턱에 닿고 땀이 목을 적시되 작일(昨日)의 행정과 비교하면 정말 탄탄대로다. 단숨에 5리허를 휘어넘으니, 기암과 괴석이 풍목(楓木) 수주를 머리에 이고 깎아지른 듯이 층층이 솟았는데 한 가닥 비류(飛流)가 백옥을 바수며 떨어진다. 그 밑에 지은 소(沼)는, 벽옥을 담은 듯이 연련하게 푸르다. 번번하게 다스려 놓은 듯한 황색 화강반석 위를 슬금슬금 기는 듯이 잔잔히 흐르는 그 물이란! 어쩌면 저렇게도 맑고 고울 수 있으랴. 사랑스럽고 정다운 품이 고운 임을 만난 듯. 명경을 들여다보며 방싯 웃는 선녀의 풍정(風情)에나 견줄까. 이 폭포를 이름 지어 금강폭이라 하였으니 기수(奇秀)한 금강산 한 모서리를 떼어 왔다는 뜻이리라.
295
구름과 이웃한 학소대(鶴巢臺)를 지나 옥반에 구으는 대하폭(臺下瀑)을 나려다보며, 인호대(引虎臺)하에 이르니 상원암을 지을 때, 인부가 길을 잃고 주저하는 차에, 난데없는 범이 나타나 길을 인도해 주었다 하여 이 명칭을 붙였다는 전설이다. 좌우는 천야만야한 단애요, 앞에는 층층절암이 가루 막혔으니, 당시의 인부가 아니라도, 나 또한 길을 잃을 지경이다.
296
꼬불꼬불 바위 위를 문자 그대로 석경을 더듬어 오르니 인적을 붙일 수 없는 양대 절암이 두 층으로 반공에 흘립(屹立)하였는데, 하층엔 약 6간통,상층엔 약 5간통의 철색(鐵索)을 걸어 두었다. 발끝을 겨우 놓을 만큼 암신(岩身)에 호방을 파고 철색은 손잡이로 철환을 연(連)한 것이다. 우리는 디룽디룽 그야말로 생명선의 철색에 매달려 오르는데, 하층 철환(鐵環)은 조금 촘촘하여 콧수가 100이요, 상층 것은 조금 성글어 50코를 헤아렸다.
297
인호대 위에 올라서니, 안전에 전개된 광경은 과연 기절장절(奇絶壯絶) 하다.
299
앞장을 섰던 차 군은 어느 결에 인호대 최동단의 암상에 우뚝 올라선다. “아, 기절(奇絶)! 기절!” 하고 환성을 지르며, 땀이 방울방울 맺힌 가운데도 황홀한 얼굴을 돌려 나를 어서 오라, 손짓한다.
300
천인단애에, 창송을 더위잡고 아슬아슬하게 발을 붙이니 굽어보는 눈이 어찔어찔한데, 눈앞 저만큼 산주폭(散珠瀑)이 곤두섰다. 눈보라처럼 날리는 물줄기는 끝마다 방울이 맺혀, 산산이 떨어지는 양은 과연 구슬을 끼얹는 듯.
301
한 번 눈을 오른 편으로 돌리매, 경(景)은 또 다시 변하여 용연폭이 3백여 척의 삭벽(削壁)에 기어 나린다. 몇 만년, 몇 억만년 물길에 갈리고 또 갈리고 바래고 또 바래어, 암신은 곱게곱게 희게희게 대패로 밀어놓은 듯하여, 물줄도 얼음을 지치듯이 가만가만히 밀려 나려온다. 폭포라면 연상되는 비류와 난무와 급하(急下)와 직주(直走)는 이 폭포 앞에 변형이요 광태일 따름이다. 홍상(紅裳)을 거듬거듬 조심조심 시부모 앞에 나아가는 신부의 걸음걸이도 저러할 듯. 단애는 깊고 깊은 물 떨어지는 자최를 조요(照耀) 찾을 수 없고 층만(層巒)은 높고 높아, 창송과 녹수조차 하의(霞衣)를 두른 듯한데 백일은 이 골 안에 영롱한 채홍(彩虹)을 일으키는 양하여, 수색(水色)과 애용(崖容)과 산형(山形)과 수영(樹影)이, 금강석으로 타오르는 듯. 보는 눈이 무시무시할 만큼 부시다.
302
여기서 몇 발자욱 옮기지 않아, 상원암 앞에서 법왕봉으로 고개를 돌리면 경은 또 다시 일변한다. 청천에 대지른 법왕봉은, 그 백설 같은 옥부(玉膚)를 속자의 눈에 보이기 싫다는 듯이, 그 변화자재의 안개 자락으로 얼굴도 가려 보고 가슴도 가려 보는데 어찌하면 천불만불의 열좌(列座)를 이루고, 어찌하면 선관(仙官) 선녀의 윤무를 그리고, 가지 각색의 물형(物形)을 황옥, 백옥으로 새겨낸다.
304
이 법왕봉 밑에 백련처럼 걸린 것이 천심폭(일명 天神瀑)이다. 용연폭보담도 석질은 더욱 희고 더욱 곱고 가만가만히 밀려 나려오는 물 줄기는 그 잔잔한 거품으로 가지각색 무늬를 놓는다. 2백여 척의 길고긴 팽팽히 잡아당긴 화폭 위에 그 신변자재(神變自在)한 화필은 은린과 옥척이 꼬리를 맞물고, 비금(飛禽)과 주수(走獸)가 날개와 갈기를 한데 어우른 듯, 옥경의 화원에 난만한 기화(琦花)와 요초(瑤草)의 각양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305
이 폭포는 2백 척 나마를 곱게곱게 밀리다가, 층암 속에 슬쩍 얼굴을 감추고 하계에 나려와서는 비단(飛湍)이 되고 이 비단이 눈부신 백석(白石)너덜에 떨어지자 길을 잃어버려, 군데군데 소폭, 소지 소소(小沼), 소분수를 지으며, 만뢰(萬籟)와 같이 울어 예다가 비단결 같은 석반을 소리 없이 지나 선적암(仙跡巖)에 모이고, 다시 길고 부신 꼬리를 빼어, 용연폭의 기경을 이룬 것이다.
306
용연폭 윗머리에 자배기를 하나 엎어 놓을 만큼 돌이 구멍이 뚫어졌는데 그 청람(靑藍)의 수색으로 보아, 그 수심이 몇 십 길이 되는지 모른다던가. 옛날 영맹(獰猛)한 용 한 마리가 천심폭 위에 살며 물을 흐리므로 상원암에서 금강삼대(金剛三昧)의 날을 보내던 도승이 신력으로 이 돌구멍에 몰아넣었다하여 이것을 용추(龍湫)라 한다.
307
상원암 입구 반석에 양봉래(楊蓬萊)의 호탕한 필치로,
308
“신선굴택(神仙窟宅), 운하동천(雲霞洞天)”
309
이라고 4자씩 두 줄로 새긴 것이 장광(長廣) 한 간통이나 뺃치었다.
310
상원암은 “은하만장전(銀河萬丈巓)”에 “반승공(半昇空)”으로 솟았는데 과연 설암 대사의,
313
이란 시가 실경(實景)에 방불하다. 여기 졸필을 농하느니보담 차라리 승개(勝槪)를 영(詠)한 고인의 시 2수를 적어 볼까.
333
오후 4시경, 점심을 마치고 도솔궁(兜率宮)에 범종(凡蹤)을 오래 머무를 인연이 없음을 슬퍼하며 길을 떠났다. 축성전(祝聖殿)으로 오는 길에 50척 나마를 반공에 천연돌기(天然突起)한 용각석(龍角石)을 쳐다보니 제명(題名)이 산란하다. 포영(泡影)과 같이 덧없는 인생이거늘 성명 3자나마 석신에 붙이려는 노력이야말로 가련하다.
334
석명제명환자소(石 面 題 名 還 自 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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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뢰열진식창태(風 雷 閱 盡 蝕 蒼 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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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제명(題名)한 이의 이런 자탄구를 생각하며 무상한 애수가 가슴을 누른다. 이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어영(御影)과 열성조 실록을 봉안하였다는 불영대(佛影臺)를 거치니 단군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단군께서 여기도 나려오시어 연무(演武)하셨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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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영대 맞은 편에 신건(新建)한 12층 탑이 있는데 인도승의 설명을 들으면 이 탑은 4년 전에 신조한 것으로 석가세존의 금사리(金舍利)를 모신 사리각이 탕수(蕩水)에 쓰러져 여기 이안(移安)할 계획이라 한다. 이 사리각의 유래를 설명한 휴정 서산 대사의 석비도 옮겨 놓았는데 수백년 풍우에도 그 웅경(雄勁)한 필치가 그대로 남아 문면(文面)이 자못 역력하다.
338
이 사리는 본래 양산 통도사에 모셨던 것으로, 임진란에 남도가 위험하자 숭대장 유정(四溟堂)이 이 사리를 모시고 금강산으로 봉안하려 하였으나, 금강산도 해로(海路)이므로 또한 위험을 느끼고 이 묘향산으로 이안한 연유를 설명하고, 그 다음으로 이런 문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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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초무군장(東方初無君長) 불열제후(不列諸侯) 신인단군(神人檀君) 출흥어태백산신단수하(出興於太白山神檀樹下) 위시조왕(爲始祖王) 여요병립야(與堯並立也) 연즉(然則) 태백산시태호(太白山始胎乎) 일국왕(一國王) 사조선국민(使朝鮮國民) 영탈동이지호(永脫東夷之號) 종안우삼계(終安于三界) 사역사동방(師亦使東方) 불실성불지인(不失成佛之因) 차비산지령야(此非山之靈耶) 위재(偉哉) 비도법중(非徒法重) 국역중(國亦重) 비도국중(非徒國重) 인역중야(人亦重也)
342
만력31년1월초길건(萬曆三十一月初吉建)
344
비도법중(非徒法重) 국역중(國亦重) 비도국중(非徒國重) 인역중야(人亦重也) 이 얼마나 애국애민의 열혈이 뭉친 문자냐. 사(詞)는 비록 간(簡)하나, 의(意)는 만근(萬斤)의 중이 있지 않으냐. 금강삼매의 그가 가사(袈裟)를 벗어던지고 장검하산(杖劒下山)한 포부와 면목이 눈앞에 약여하다.
346
오후 7시 보현사 도착. 총총(怱怱)한 일정 관계로 정작 주찰(主刹) 순람(巡覽)을 뒤로 미룬 것이다.
347
보현사는 관서의 거칠로 금년으로부터 965년 전 고려 광종왕 19년 탐밀 조사의 창건이다. 굉곽 대사(宏廓大師) 대에 이르러 산내에 대소 범우(大小梵宇) 3백여 처를 중창하고 승려 3천여 명을 옹(擁)하여 정토의 왕국을 이루었으며, 고려 공민왕 당년 성승 나옹 대사(懶翁大師)가 주석(住錫)하게 되자, 사운은 더욱 흥강(興降)하였다. 이조에 이르러서는 성승 서산 대사와 사명(泗溟) 송운 대사(松雲大師)가 머무르게 되자, 조선 팔도 사찰 도총섭(都總攝)의 지위까지 누리게 되었으나 그후 병란과 화재와 탕수의 겁운(劫運)을 여러 번 치루어, 부속되었던 암자와 사원이 백불존일(百不存一)하여 지(趾)가 있으되 명(名)이 없고, 명이 있으되 지가 없다. 이금(爾今)엔 본찰의 건물 외 수개의 암자가 있을 뿐인데, 현존의 건물 중 대부분은 거금(距今) 170년 전 영조대왕 37년 남파 대사(南坡大師)가 재건한 것이라 한다.
348
대웅전, 명부전, 심검당(尋劒堂)과 굉대한 만세루에서 1,600근이나 된다는 대종을 구경하고 서산 대사가 축조하였다는 19층 여래탑에 인공의 묘를 찬탄하고 대장전에 들어서니 불경과 각 명승들의 문집 판본이 그야말로 산적하였다.
349
사무실에 들러 사보(寺寶)인 나옹, 서산, 사명 3대사의 유물을 열람하였는데, 명장(明將) 이여송 등의 연명 감사장과 정종(正宗)대왕 어필 화상당지명(畵像堂之銘)에 감회가 다시금 새로웠다. 패엽범문경(貝葉梵文經) 오엽(五葉)을 보매 자양(字樣)이 한글을 흘려쓴 듯한 것이 기이하였다.
350
건둥건둥 사내를 일순하고 향산 여관에 돌아오니 오후 9시경, 자리에 누으니, 몸은 솜같이 피로하다. 과로한 까닭인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353
잔뜩 찌푸린 일기는 떠나는 이의 이회(離懷)를 더욱 설레게 한다. 그 동안에 정든 층만(層巒)과 청강(淸江)은 우기에 흐리어 서운한 이 발길을 눈물로 부여잡는 듯.
354
“다시 오리다, 다시 오리다.” 그들의 누용(淚容)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홀로 마음에 뇌이고 또 뇌이었다.
355
월림(月林) 나루를 건너니 만포선(滿浦線) 공사로 와글와글하는 소음이 유리정토에 맺었던 꿈을 가뭇없이 부순다. 채신머리없는 함석 지붕의 바라크, 짐차의 알성(軋聲), 번쩍이는 십장(什長)의 혈안, 수선스러운 인부의 비가! 무릉도원에서 진환(塵寰)에 귀양살이로 떨어진 듯하다.
356
길목에서 황진을 날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여러 번 손을 들었으나 차마다 만원이다. 1시간 나마를 기다리다가 못하여, 차 군의 제의로 짐꾼 하나를 얻어서 보행을 시작하였다. 얼마든지 가는 대로 가다가 혹 차를 얻으면 타기로 한 것이다.
357
5리나 걸어갔을 때, 자동차 하나를 만나 그야말로 사정사정 비대발괄해서 차 군과는 구장(球場)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 하나만 짐칸에 탈 수 있게 되었다.
358
월림에서 구장까지 차는 춤을 추며 줄달음질을 치는데 걸상도 없이 짐 위에 쪼구리고 앉은 나는 차가 뛰는 대로 몸이 치살렸다가 나리살렸다가하는 바람에 머리가 치받치고 잔등이 벗겨져 여정의 고난을 단단히 맛보았다.
359
구장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이토수향(異土殊鄕)에 동서를 분간치 못하겠는데 궂은 비마저 쏟아진다.
360
무턱대고 “음식점”이라고 쓴 장명등(長明燈) 붙은 집에 들어서니 주인인듯한 노파가 수상한 듯이 위아래를 훑어본다.
361
“점심 먹을 것 있소?” 나는 첫밗에 물었다. 아츰을 오전 8시에나 건둥건둥하고 오후 4시나 되었으니 시장기를 지나, 속이 쓰릴 지경이다. 노파는 눈을 한 번 껌벅하다가 다시 크게 떠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간단하게,
362
“없쇠다.”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어이없이 발길을 돌려 그와 같은 또 한 집을 찾아갔다. 때가 겨워 요기할 것은 없을망정 그 흔한 소주야 없으랴 하고 이번에는 “술 있소?”하고 물어 보았다. 주인인지 나그네인지 목로방에 삼사인 모여 있던 군정들이 우 ─ 내달아 역시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술 없쇠다.”하고 만다. 아모리 벽촌이기기로 식점(食店)에 밥이 없고, 주점에 술이 없을 리 있으랴. 그들은 아마 나의 행색을 수상하게 본 것이다. 나도 나 자신을 훑어보았다.
363
서투른 등산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골프 바지’, 땀밴 ‘셔츠’와 볼상없는 ‘캡’ ‘배낭’을 짊어지고 ‘피켈’(등산용 단장)을 짚었으니 과연 사나운 꼴이다.
364
‘위고’의 걸작 「레 미제라블」의 ‘잔발짠’이 처음 감옥에서 나와 모든 주막에서 거절을 당하던 대문을 생각하고 홀로 고소(苦笑)하였다.
365
다행히 보통학교 생도인 듯한 아이 하나를 만나, 여관에 찾아들어, 이 반시간의 ‘잔발짠’ 극을 마쳤다.
367
여관에서 소게(小憩)하는 차에 차 군도 짐자동차를 얻어 타고 들이닥치었다. 오찬이라고 마치니 오후 5시경. 구장까지 왔다가 천하의 기승(奇勝) 동룡굴(蝀龍窟)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하여, 솜같이 피로한 몸을 끌고 우중에 나섰다. 동굴을 관리하는 구장보교장(球場普校長)과 절충한 결과, 예외의 편의를 얻어 인도자 두 명과 함께 동룡굴 입구에 도착하니 오후 6시다.
368
이 동룡굴은 결코 근년에 와서 비로소 발견된 것이 아니요, 그 유래는 자못 오래다. 기록에 남은 것만으로도, 거금 1265년에,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6년(신라 문무왕 정묘)에 신라가 대군을 들어 고구려에 쳐들어오자, 보장왕은 대경실색하여, 당시 명승 적조 선사(寂照禪師)를 불러 불상, 경전 및 폐물을 부탁하되 “전란이 위급하니, 먼저 피신하여 이 불상을 신림(神林)에 봉안하고 향전(香典)을 끊지 말라.” 분부하였다. 어명을 받든 선사는 수명의 승려와 같이 불상을 모시고 피란하던 도차(途次) 신림 창울한 묘향산의 지맥 용문산 아래에 이르자, 산수가 명려함을 보고, 둔세(遯世)의 호적지라 하여 사방을 순탐하다가, 곡구(谷口)에서 일대 석굴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려는 찰나 문득 홍예(虹霓)가 동굴 속에서 일어나 하늘에 뻗치며, 오색영롱한 신룡이 무지개를 따라 나려 선사를 옹호하매, 선사는 일행을 돌아보며 “이 굴이야말로 부처님의 봉안소로 하늘이 주신 영지라.”하여 동룡굴이라 명명하고 굴 내에 들어가 전란이 진정하기까지 일년 나마를 피란하였다가 나종에 기념 삼아 동굴에서 동방 약 20리 되는 용문산에 암(庵)을 결(結)하여 현존의 용문사를 창건한 것이라 하였다. 보장왕이라면 고구려 말엽의 왕으로 비단 신라뿐이 아니라, 당국(唐國)과 간과(干戈)가 그치지 않아 경우(境宇)가 자못 요란 하였으니, 모시던 불상을 명승에게 부탁한 것도 무괴(無怪)한 노릇이라라.
369
아모튼지 세계에 종유동(鐘乳洞)이 많지마는 그 중에 유명한 자로 미국의 ‘메머드동’, 이태리의 ‘보타토미야동’, 일본 산구현(山口縣)의 ‘추방동(秋芳洞)’의 3동을 치던 것인데, 한 번 조선의 동룡굴이 세상에 나타나자 그 규모의 방대한 품으로나 신비적 기경이 많은 점으로나 천하에 관절(冠絶)한 대 종유동의 옥좌를 점령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370
역장역수(亦壯亦秀)의 산수묘의 극치를 발휘한 향산 일지맥 하에 기절괴절한 이 동룡굴을 땅속 깊이 감추었으니, 참으로 ‘천간지비(天慳地秘)’의 전용(全容)을 완성한 것이다.
372
반월형의 어홍한 대혈(大穴)─ 높이는 5척이나 될까, 너비는 10척이 넘을 듯─ 흉물스러운 아가리를 우리 앞에 벌렸다. 어두컴컴한 속으로부터 무럭무럭 떠오르는 김이 벌써 업얼(業蘖)을 삶아내는 지옥의 큰 가마솥을 연상케 하는데 한 걸음을 들어서니 이 세상 것 아닌 습습(習習)한 음기(陰氣)가 선뜩하게 몸과 맘을 휩싸며, 그야말로 외계와는 유명(幽明)이 서로 갈려 버린다. 발은 질척질척하는 이토(泥土)에서 미끄러지는데 굵은 철사로 여러겹 꼬아 놓은 철색을 부여잡아 간신히 몸을 지탱하면서, 한 걸음 두 걸음 행진하는 사이에, 두 인도인은 솜 뭉치에 석유를 덤벙 적시어 횃불을 켜 들었다. 거물거물하는 화광에 군데군데 물 고인 누런 길바닥이 드러난다. 황천길이란 이를 두고 이름인가 하였다.
373
한 40간통이나 걸어왔으리라. 문득 우리 앞에는 여러 길 되는 낭떠러지가 가루막혔다. 손이 쓰린 쇠사다리를 더위잡고 나려가노라니 과연 무저나락(無底奈落)의 명부로 떨어지는 듯 사다리가 끝난 곳을 세심동(洗心洞)이라 일렀는데 상하 좌우가 굴속답지 않게 훨씬 열리며 여기서부터 종유동의 특이한 광경이 전개된다.
374
돌이 자란다. 덤덤하고 단단하고 딱딱한 그 돌! 생이 없고 동이 없는 그 돌! 그 돌이 연한 풀과 같이 자라난다. 눈처럼, 싹처럼 트고 돋는다. 꽃과 같이 피어나고 젖과 같이 흐른다. 이것이 벌써 기(奇)가 아니냐. 그나 그뿐이냐. 이 생동하는 돌은, 밑으로부터 위로 생장하는 지상의 법칙을 깨뜨리고 위에서부터 밑으로도 거꾸로 자라난다. 이것이 벌써 괴(怪)가 아니냐.
376
이 자라면서부터 벌써 기와 괴를 일신에 구비한 돌들이, 하나가 아니요, 둘이 아니요, 만으로 억으로 천하와 지상에 뿌리를 박고 묘상(妙相)과 이취(異趣)를 갖추갖추 부리며, 임립도생(林立倒生)한 양은, 과연 형용에 절하고 상상에 절한 특이한 광경이다.
377
무수한 녹각과 상아의 수풀을 곤두세운 듯한 밑으로 명멸한 화광을 따라 지나가노라면, 모퉁이모퉁이 굽이굽이에 경이와 감탄과 전율과 황홀이 나를 기다린다.
378
절호의 피란지 안면동(安眠洞), 옥수(玉樹)의 경림(瓊林)을 이룬 종성동(鍾聲洞), 기봉과 수장(秀嶂)이 도현(倒懸)한 듯한 종유동(鐘乳洞), 수천명을 들여 세울 만한 광활한 연병장, 간신히 용신할 만한 협착(狹窄)한 석계동, 층층 점토(粘土)의 편복동(蝙蝠洞)의 숨 가쁜 재를 넘고, 까마득한 천정의 끝간 데를 모를 벽천동으로 나려가니 일행의 족적과 공음(跫音)이 꾀아리를 지어 원뢰(遠雷)가 우는 듯. 역장역수(亦壯亦秀)의 성불령(成佛嶺). 다기다괴의 다불동. 십대왕 무사탑(武士塔)의 의젓한 불좌와 인형들. 낙타석 사자암의 완연한 물상과 귀면들. 절벽과 석반이 균열(龜裂)한 구멍에 창해와 통했다는 심추(深湫). 소주를 저어 건너는 대지(大池). 분류(奔流)와 급단(急湍)이 나리 지르면서 넘치는 석폭포. 만조백랑(萬條白浪)이 오리오리 가닥가닥 굽이치며 그친 은파정(銀波庭). 천타기화(千朶琪花)가 만발한 채 표령(飄零)을 모르는 등화동(藤花洞). 석편으로 팔음석(八音石)을 뚜드리매, 높고 낮고 맑고 쉬고 연연하게 꺽꺽하게 구슬프게 청승맞게 아뢰는 묘음! 천래의 음보를 비장(秘藏)한 듯.
379
완연(蜿蜒) 10여 리! 표표한 신운(神韻)과 습습(襲襲)한 귀기가 서리고 떠도는데, 묘와 교와 정의 극치를 발휘한 일대 조각의 총종합이요 집대성이다. 이 조각이야말로 과연 생동한다. 그것은 정한 채 동하고, 유전하며 고정한 별세계다. 천변만화하며 상주영존(常住永存)하는 금강세계다.
380
이 혼암(昏闇)한 괴세계의 태양격이요 생명원의 구실을 하는 것은 수기(水氣)이리라. 함수량의 미묘한 차이를 따라 중암(中暗)의 명과 혼중(昏中)의 광이 담농(淡濃) 각양의 채색을 풀어낸다. 혹은 투명, 혹은 암담, 혹은 휘황, 혹은 몽롱. 영롱하게 보옥과 같이 번쩍이고 음울하게 사회(死灰)와 같이 스러진다. 으늑한 월광이 연파(烟波)에 부서지며, 회야(晦夜)에 성영(星影)이 꿈꾸는 듯.
381
이 명암으로 짜내는 능라 자락 속으로 그윽그윽히 스미며 가만가만한 유음(幽音)을 내는 듯 마는 듯하다가, 문득 침침하고 괴괴한 공기를 뚫고 한 방울 두 방울 똑똑! 떨어지는 낙수성! 이 단음이야말로 생명 창조의 환성이요 개가(凱歌)이리라.
383
기괴한 석조 명부(石造冥府)의 순례를 마치고 사바세계에 나오니 해는 어느 결에 떨어지고 밤이 깊었다. 오후 10시는 넘었을 듯. 그 사이에 이렇게 시간이 갔는가. 요지(瑤池)의 일찰나가 지상의 누천년이라는 황당무계한 고담도 허풍만이 아닌 듯싶었다.
384
7월 15일 오전 10시경 구장 출발. 신안주를 거쳐 단군의 천년 고도 평양에 이르니 밤 11시.
385
16일 정오가 겨워 강동지국 총무 김중보(金重寶)씨 인도로 강동에 도착. 수정천반(水晶川畔)에서 이 고을 유지 여러분이 일부러 원객을 기다려 주신다.
386
임경대(臨鏡臺)의 애상(崖上)에 대박산에서 건너 뛰셨다는 완연한 족적을 뵈옵고, 창송울울한 아달산(阿達山)이라 부르는 소봉을 돌고 단군전이란 동리와 제천골을 지점하며, 대박산릉에 이르니, 창창한 송림을 뒤로 두고, 경사 완만한 산록에 주위 140여 척의 일대릉이 뚜렷이 정남으로 자리를 잡았다. 산은 비록 높지 않으나 좌우는 장류(長流)를 끼고 앞으로는 멀리 운산 자락에 녹아드는 평야가 터져 강동 전군(全郡)이 일모지하(一眸之下)에 보인다.
388
단군묘재현서삼리(檀君墓在縣西三里), 대박산하위사백십척(大朴山下圍四百十尺) 언전(諺傳) 단군묘(檀君墓) 자본현봉수수호의(自本縣封脩守護矣) 정종(正宗) 병오(丙午) 현감서공형(縣監徐公濙) 정묘십년(正廟十年) 팔월수주(八月修奏) 계(啓) 명(命) 본도감사(本道監司) 조돈(趙暾) 순로(巡路) 친심(親審) 본관(本官) 춘추봉심(春秋奉審)
389
이라 하였다. 이로써 보더라도 이조의 말엽까지 숭앙의 제전과 봉심이 국령으로 거행되었던 것을 짐작할 것이다.
390
여말에 어떤 수령이 이 능을 파 보았더니 지하로부터 황옥관(黃玉棺)이 드러나 송연히 발굴을 중지하였다고, 부로(父老)는 전한다.
391
이 고을의 유지 김상준(金商俊), 김상화(金商和), 장운경(張雲景), 김천우(金天羽), 원용제(元容濟), 김경선(金景善), 장운익(張雲翼), 김이초(金利初), 조병운(趙秉雲), 여러 분의 발기로 단군릉 보존회를 조직하고 동릉의 수축과 수호각 등 여러 가지로 성적 보존을 구체적으로 강구한다는데 금추(今秋)에는 자진 성금의 대대적 모집에 착수하리라 한다.
392
그네들의 주장을 들으면 조선 팔도에 단군릉으로 구전이나마 되는 것은 여기뿐이요, 또 진부(眞否)를 의심하는 것부터 황송한 일이니 성릉을 모시게 된 것만 무쌍(無雙)의 은총을 드리우신 것이라 하여 군하(郡下)에서 진성갈력(盡誠竭力)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이 성조께 관한 것이니 전 민족의 성원을 기다린다 한다.
394
17일. 야래(夜來)로 대우(大雨). 조조 모우(冒雨)코 강동(江東) 발정. 오전으로 평양 귀착. 오후 평양지국 총무 한우성(韓祐成) 군과 함께 대성산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역로(歷路)에 모란봉 구비를 도니, 대동강엔 탁랑(濁浪)이 창일(漲溢)하건마는 능라도의 늘어진 유지(柳枝)엔 증유(曾遊)의 옛 풍정이 의희(依稀)하게 남았다. 강 건너 묘망(渺茫)한 평야에 신축된 비행장을 지점하며 저기가 고구려 성시에 20여 만 호를 포옹했던 서도(西都)의 구적(舊跡)인가 하매, 감회가 자못 깊다.
395
10리 나마를 휘몰아, “고구려왕궁지”라는 표적 선 데에서 차를 버리고 우리는 걷기 시작하였다. 논두렁 좁은 길로 이수(泥水)에 발을 적시며 얼마쯤 들어가니, 겅성자못한 창송의 구릉의 포용한 채로, 돌기한 초제(草堤)가 널찍한 방형을 지은 양이 궁성의 자최가 완연(宛然)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터는 안학궁(安鶴宮) 구지(舊址)로 고국원왕(故國原王) 시대의 왕궁이라던가.
396
이 왕궁의 후산(後山)이 바루 금명 대성산(大成山), 고명 대성산(大聖山)이다. 산상에 오르니, 과연 신룡이 구비 치듯한 무수한 못자리가 벌써 영이의 감을 일으키는데, 어떤 것은 제법 청람의 물을 담아, 푸른 솔과 누른 백합화 사이로 어른어른 얼굴을 내미는 것은, 규모는 비록 작을망정 백두산의 천지를 연상케 한다.
397
최고봉의 선왕당에 이르니, 구사(舊祠)는 아주 경퇴(傾頹)하여 버렸고, 함석 지붕을 이은 일간 치성당(致誠堂)이 있을 뿐이다. 이 치성당 앞도 하초(夏草)가 자랄 대로 자라 자못 황량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 신당의 내력을 기록한 석비가 산란하다.
398
그 중에 대표될 만한 『대성산 신당 사적비』의 문면은 이러하다.
399
오유(粵惟) 대성산(大聖山) 내백두산래용야(乃白頭山來龍也) 이묘향산위대조(以妙香山爲大祖) 이자모산위소조(以慈母山爲小祖) 불원천리이래(不遠千里而來) 작기성지고장(作箕城之庫藏) 흘립간간방(屹立干艮方) 기상(其上) 유백룡작지구십구처(有白龍作池九十九處) 시이(是以) 평양지명산야(平壤之名山也) 신당역고의(神堂亦古矣) 석자단군시지우금(昔自檀君時至于今) 수천년래(數千年來) 향화부절자(香花不絶者) 개신(槪神) 기최영지치야(其最靈之致也) 부단(不但) 양서지인(兩西之人) 역동경지인(亦東京之人) 내제자(來祭者) 부지기수야(不知其數也) 권자(睠玆) 구우지년구퇴락이구취물력(舊宇之年久頹落而鳩聚物力) 일신개건(一新改建) 비자고(卑者高) 곡자직(曲者直) 협자광(俠者廣) 암자명(暗者明) 진시(眞是) 명산대처지장려야(名山大處之壯麗也) 의래지인(儀來之人) 역여차칙(亦如此則) 서사당지불후야(庶斯堂之不朽也) 시왈(詩曰)
400
속천신장대개문(屬天神將大開門) 점열인간화복분(點閱人間禍福分) 팔로성지상하견(八路城池床下見) 만가언어안전문(萬家言語案前文) 진용굴활천년수(眞龍窟活千年水) 영기허성오색운(靈氣噓成五色雲) 회수임원래왕처(回首林原來往處) 사시향화객분분(四時香火客紛紛)
401
‘역여차(亦如此)’할 ‘후래지인(後來之人)’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사당(斯堂)’이 이미 ‘후(朽)’하였으니 천왕께 대한 죄송도 죄송이려니와 고인의 유촉(遺囑)을 저버림이 또한 크다 할 것이다.
403
18일도 대우(大雨)다. 오전엔 폭우로 쏟아지다가, 오후 2시나 되어, 조금 뜸하기에 한 군과 함께 자동차를 몰아 동명왕릉으로 향하였다.
404
호활한 대동(大同)벌과 중화(中和)벌을 지나, 채석리(採石里)에서 우리는 차에서 나려 걸었다.
405
중화 지국에서 얻은 인도자의 뒤를 따라, 우후의 이토에 버르적거리며 1시간 나마 걸었으리라. 실개울을 여러 번 건너뛰고 애기산의 골짜기를 찾아드니, 완만한 산록에 외연(巍然)한 큰 봉군이 솟았는데 능의 후산과 좌우에는 창창울울한 적송이 천일(天日)을 가리우고 정면의 안계(眼界)는 훤하게 터져 숭엄한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우편(右便)은 열리고 전후 좌편으로는 멀리 가깝게 석산(惜山)이 아늑하게 머리를 조아리니, 능의 위치부터 범안(凡眼)에도 범상치 않았다. 능을 걸음으로 재어 보니 28보 평방이나 되던가. 정제한 장군석과 석인석마(石人石馬)들, 단청 새로운 사적비각과 제당(祭堂) 등의 전려(典麗)한 건물들. 고대 동양에 가장 강력의 국가를 건설하신 성왕의 능다운 위의(威儀)를 갖추었다. 고적이라면 너무도 횡량하고 퇴폐한 것만 보다가 이 능을 뵈오니, 적이 마음이 든든하였다. 이조에 나려와서도 향화와 제전이 그치지 않고, 중수와 봉심이 거듭된 것은 각종 비문에 역력하다. 일일이 다시 초할 번(煩)을 피하거니와 동명왕의 전설처럼 또 생채육리(生彩陸離)한 설화도 그 비주(比儔)를 보기 어려우리라. 천제자 해모수(解慕漱)께서 하백(河伯)의 따님 유화(柳花)를 만나 땅을 그어 궁실을 짓고 주석을 베풀어 노셨다는 것부터 목가적 시취가 횡일(橫溢)하거니와 용궁에 들어가서 하백과 재조를 겨루고 하백이 취한 틈을 타서 유화를 다리고 나오다가 하백이 깨어, 유화를 우발수(優渤水)에 귀양 보냈다는 대문은 사실적 실감도 풍부하다. 일광이 따라가면서 비치어 대란(大卵)을 낳고, 그 대란을 견저(犬猪)가 불식(不食)하고 우마(牛馬)가 피지(避之)하고 조수(鳥獸)가 복지(覆之)했다는 영이점(靈異點).
406
또 부여왕 금와(金蛙)가 칠자(七子)를 두었으되, 재조가 다 주몽(朱蒙)만 못하여 시기(猜忌)로 음해하려던 것, 주몽이 어머니의 말을 좇아 건국의 원정(遠程)을 떠나는 것 등은 자못 인정의 기미(機微)를 뚫었다 할 것이니, 이 전설이야말로 영이와 시취와 인간미를 미묘하게 혼합 배치한 것으로 동서고금의 건국신화 중 백미(白眉)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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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조조(早朝) 숭령전(崇靈殿)을 근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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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시조동명왕지위(高句麗始祖東明王之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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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진 것을 뵈오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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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구태평행(行) 자동차에 몸을 실리다. 을지공묘(乙支公墓) 하를 찾아가는 길이다. 낮이 휠씬 겨워, 구태평에서 나린 일행은, 백양산 기슭으로 돌아들어 한 마장이나 가다가 현암산 밑에서 부로(父老) 한 분을 앞장세웠다. 무성한 풀과 애송이 솔을 헤치며 한참 올라가노라니, 앞섰던 부로가 “여기요!”하고 딱 선다. 우리는 그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이리(離離)한 잡초, 점점의 황색 백합화, 이삼년생 잔솔들이 총총히 늘어섰을 뿐이요, 봉군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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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이없이 지점하는 부로를 쳐다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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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을지 장군묘란 말이요?”하고 채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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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쇠다. 이 자리가 분명히 장군님 묘외다. 우리 어릴 때엔 판석도 있고 장군석도 있더니 인젠 다 없어졌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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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부로는 쿵쿵 땅을 구르며 말끝을 잇는다.
418
“자 ─ 이걸 보오, 이렇게 굴러보면 무슨 소리가 나지 않소? 이 밑이 그대로 땅바닥 같으면 이런 쿵쿵 소리가 나겠소? 밑이 허공이 되어 이렇게 울리는 것이오.”
419
우리도 그의 말을 따라 발을 굴러 보았다. 과연 밑이 궁글은 것만은 완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420
청천강반(淸川江畔)에서 장군의 석상을 뵈옵고 호통하던 나의 가슴은 또 다시 설렌다. 장군의 상이 그러하고 장군의 묘조차 이러하니 역사의 추축(樞軸)을 돌린 풍공위열(豐功偉烈)을 끼치신 공으로 일권석(一拳石), 일부토(一抔土)조차 누리지 못할 줄이야. 한그믐밤 빛 같은 암흑이 몸과 맘을 휩싸는 듯하다.
421
강서행 자동차를 얻어 타니, 오후 4시경. 강서에 나라는 즉시로 삼묘(三墓)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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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으로 오석산(烏石山), 좌편으로 무학산(舞鶴山)을 끼고 전답이 질펀한 평야 한복판에, 큰 봉분이 새파란 잔디를 이고, 정족지세(鼎足之勢)로 웬만한 산처럼 불쑥 솟았다. 묘라면 산복에나 산록에 자리를 잡는 줄로 상상하던 눈엔 그 위치부터 벌써 서투르리라. 연전(年前) 경주를 순력할 때에 넓은 들판에 점점이 녹봉(綠峰)을 이룬 대분(大墳)을 본 기억이 새로워진다. 고대엔 근세와 달라 대개는 준산을 피하고 광야에 묘를 쓴 모양이다. 입구가 조밀하지 않고 토지가 유여한 탓도 탓이리라. 그러나 그보담도 웅대한 규모와 굉걸(宏傑)한 장식을 부릴 대로 부리자면, 협착한 산악을 비비느니 보담 차라리 광활한 평야에 군색하지 않게 터를 잡는 것이 많은 편익이 있었으리라. 여기에도 호장한 고인의 기풍을 엿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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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묘는 『강서읍지』에 의하면 혹은 장군묘, 혹은 제왕총이라고 적히었을 뿐이요 그 연대와 묘주(墓主)는 미상하다. 관야(關野) 박사(博士)의 감정으론 적어도 1350년 전의 고총이 분명하다 하니, 그러면 고구려 당년의 무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동도인 경주는 비교적 곱다랗게 남아, 찬란한 당시의 문물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신라의 복이요 후인의 행이라 하겠으되, 고구려의 유적은 너무나 참담한 병화(兵火)의 겁운에 걸리어, 모조리 깡그리 파괴되고 인멸되고 말아 오늘날 그 때 문화의 편린이나마 찾을 길이 아득한 것은 얼마나 한(恨)할 노릇이냐. 효천(曉天)의 성신(星辰)처럼 요료(寥廖)한 그 고적 가운데, 이 삼분(三墳)이 남은 것은 정말 우리에게는 기적보담 더 탐탁하다 할 것이다. 사회(死灰)에서 보옥을 발견한들, 이보담 더 귀하고 더 중하다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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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가 처음 발견되기는 갑진년 일로전쟁 당시, 강서에 최초의 근세 학문을 수입한 문천(聞天)학교 학생들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한다. 속전(俗傳)에 이 삼묘 가운데에는 황금벼틀 등 기화진보(奇貨珍寶)가 많다 하여 병란에 상실하느니보담 차라리 발굴하여 학교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학생은 주장하였으나 학교에서 굳이 말리므로 그들은 비밀히 모험대를 조직하여 밤을 타서 발굴하기 시작하였는데 며칠 밤을 고심참담한 끝에 하롯밤은 괭이가 돌머리에 땅 하고 부딛치는 소리가 나자 윗머리에 올라섰던 학생 수명은 그대로 총중(塚中)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벌써 먼저 도굴한 자가 있어 묘위를 덮은 석반을 깨뜨리고 들어가 있는 보물을 모조리 훔쳐내고 다시 이를 맞추어 석반을 올려 놓은 것이 올라선 학생의 체중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떨어진 까닭이다. 그 때 학생들은 몽몽(濛濛)한 진애(塵埃) 속을 뒤지다가 엄청나게 큰 두개골 하나를 얻어 가지고 나왔는데 그 두개골은 어떤 미국인이 가져가 버리고 지금 조선에는 없어졌다던가. 고갱이와 알짜는 다 잃어 버리고 지금은 빈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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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총의 현실문(玄室門) 앞에 섰다. 석주와 석영(石楹)이 벌써 굉걸한 석전을 연상케 하는데, 인도자가 목문(발견한 뒤에 새로 만든 것)을 열어제치니, 선뜻한 음기가 얼굴을 스치며,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어둑한 속으로 발을 들이미니, 사방이 석벽인데 어른어른하는 단청이 형과 상이 분명치 않은 채로 굼실굼실 움직이어, 정말 용사(龍蛇)와 같이 비등(飛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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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차차 어둠에 익어지자 사면의 벽화는 더욱 뚜렷하게 나를 대지른다. 정면엔 현무, 우면엔 청룡, 좌면엔 백호를 그린 것이라 하나 내 보기에는 현무이고 청룡이고 백호이고, 거의 어슷비슷하여, 판연한 구별을 지을 수 없는 괴수들이다. 현세의 동물로 형용하라면 구(龜)와 호(虎)와 사(蛇)의 혼성체라고나 할까. 수형(獸形)은 그러하거니와 그 선명한 채색과 생동하는 선! 지체는 분명히 도약하고 미렵(尾鬣)은 역력히 반선(盤旋)한다. 그 주홍같은 입으로 숨소리가 들리는 듯, 웅휘한 기혼과 호장한 풍격은 이런 신필(神筆)을 두고 이름이라. 더구나 입구 양편에 그린 주작은 그 편편한 두 나래와 표표한 꼬리가 둥실둥실 석면을 떠나 푸드득 날아오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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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눈을 천장으로 돌리매 그 정치하고 기교한 구조와 수장(修裝)은 눈이 어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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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형으로 올라가다가 석영 한 층을 지나면 능형이 되고 이 능형이 또 석영 한 층을 올라서자 네 모를 비어 모서리마다 삼각형 한 개씩 남기고 또한 층 석영을 넘어 다시금 정방형을 이룬다. 한 층 두 층 층층이 좁아들며 정연한 변화로 마지막엔 조그만 정방형 천장을 완성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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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층층마다 삼각형마다 화초로 아로새긴 선을 둘렀는데 그 화초의 모양은 얼른 보면 다 같으되 자세히 보면 그 화형과 엽상(葉狀)이 벽마다 다르고 층마다 달라 문자 그대로 황홀난측(恍惚難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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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각종 각양의 화초 모양으로 선을 두른 속에는 빈틈 없이 형형색색의 그림이 가득가득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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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물결 위에 우뚝우뚝 솟은 기암을 타고 노는 이들. 아침 햇발이 바야흐로 밝고 붉은 볕을 던질 때 불로초 그늘 속으로 노루와 사슴이 넘는다. 봉황이 찬란한 나래를 훨씬 펴고 너울너울 날아가는데 요요(夭夭)히 붉은 천도를 따려는 선녀들. 일각(一角), 호미(虎尾), 녹신(鹿身), 마족(馬足)의 기린들. 청조(靑鳥)를 멍에하고 운산을 훌훌 날아 넘는 비선들. 이 모든 그림이 어느 것 하나 생동하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 중에도 더욱 나를 황홀케하는 것은 피리 부는 4선녀다. 연화의 화판(花瓣) 같은 맨발로 고이고이 구름을 헤치며 허공에 둥둥 뜨는 그 모양이야! 그 하늘하늘하는 가벼운 옷자락은 분명히 미풍이 나부낀다. 그 투명한 경라(輕羅)의 옷속으로 곰실거리는 옥부(玉膚)가 아른아른 내다보인다. 그들은 피리를 빼어내고, 바시시 웃으며 두 가닥 달빛 같은 흰 팔을 내밀어 나를 잡아당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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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놀아요 우리와 같이 놀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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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연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따스한 입김이 척척하게 내 뺨에 서리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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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홀히 넋을 잃었다. 만일 일행이 없었던들 나는 그대로 홀리고 말았는지 모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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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 잘 받는 종이가 아니요, 단단하고 얼룩덜룩한 돌에 무슨 붓으로 저렇게 그렸을까. 얼마나 돌을 다듬고 밀었으면, 저다지도 곱고 미끄러울까. 신품(神品)이 아니면 귀공(鬼工)이 분명하다. 사람의 솜씨로야 생의(生意)인들 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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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굴암에서 처음으로 석상을 보고 느낀 경이와 감흥이 다시금 새로워진다. 신라인은 돌에 새기고 고구려인은 돌에 그렸다. 여기 생각나는 것은 동서(東西) 양(兩)조선의 문명의 차이다. 고구려의 유적이 인멸한 탓으로 신라의 끼친 자최를 보고 두 나라가 거의 동시대라 하여 그 문화도 서로 비슷하였으리라고 독단(獨斷)한 것은 망상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상사(相似)한 많은 점을 가졌겠지마는 그 진수에 있어서 그들이 제각기 독특한 문물을 가졌던 것은 이 강서 고분과 경주 고분의 차이를 보아 그 편린을 짐작한 것인 듯싶었다. 그러나 새기고 그리는 방법은 다를지언정, 인공을 뛰어넘어 신공에 가까운 예(藝)의 지경은 동서가 방불하다 할 것이니, 더욱 더욱 고구려 유물이 온전히 전하지 않은 것이 섧고 애닯다. 귀중한 우리 문화의 한 모서리를 그대로 상실한 것이니 얼마나 비탄할 노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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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실(玄室)의 넓이는 동서 10척 3치. 남북 10척 4치 5푼, 천정의 높이 11척 5치 9푼이니, 전체의 크기가 요사이의 4간 방만하다 하면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사벽과 천정과 밑바닥이 모두 양질의 화강석의 대재(大材)로 축조한 것은 물론이다. 시험 삼아 사벽, 천정, 바닥 등의 석편을 세어 보니 47매가 되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도마형의 석상 한 개가 놓였는데 길이는 9척, 넓이는 3척 5치, 둘레는 5치가 넘었다. 관 두 개를 올려 놓았던 자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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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중총을 구경하였는데 그 구조와 수장은 대총과 대동소이할 뿐이었다. 여기는 관을 올려 놓았던 석상이 없는 것을 보아 대총의 부속실인 듯하다. 그리고 기이한 것은 후벽이 큰 돌 한 장으로 되었는데, 밑바닥과 벽이 연한 곳에 높이 1척 5치, 너비 3척의 조그마한 석편으로 땜질을 한 것이다. 거대한 석재를 맘대로 뜻대로 운용하는 당시이거늘 돌이 부족하여 군색한 땜질을 할 리는 만무한 노릇이니, 저 작은 돌이야말로 신비의 열쇠를 쥔 것이 틀림없다. 속전으로는 저 돌을 어찌어찌 누르면 통로가 열리고 그 통로로는 삼분(三墳)을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밑바닥이 덜컹 열리며 이 외부의 현실 외에 정말 내부의 현실이 따로 있고 황금 벼틀과 기화진보가 비장된 것이라고 한다. 비록 황당무계한 전설이라 하겠으되 그 소석(小石)이 무슨 장치를 의미한 것만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로되 오늘날의 발달한 건축공학으로도,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의문을 의문대로 그대로 묻어 둔 것은 불가사의의 일이라 하겠다. 대총, 중총 외에 소총도 발굴해 보았으나 여기는 아모 벽화도 없고 우마의 해골만 발견되어 다시 묻어 버렸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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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묘의 순례를 마치니 장장하일(長長夏日)도 어느덧 저물었다. 강서읍으로 돌아와 저녁을 마치고 지국장 박윤형(朴潤亨) 씨의 인도로 촌가(寸暇)를 비워 도보로 강서 약수로 향하였다. 달빛이 물결처럼 흐르는 논두렁 사잇길로 버레 소리를 들으며 10리 나마의 산책에 전원미를 만끽하였다. 약수터라고 다다르니 애기와 달라 배산임수의 청수한 풍경은 찾을 수 없고 질펀한 전답 사이에 약수를 중심으로 조그마한 촌락을 이룬 곳이다. 유객의 발을 멈추기엔 취할 것이 적다 하겠으되, 종용하고 가라앉은 듯한 기분이 가난한 환자의 요양지로는 적호(適好)한 장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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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는 미끈미끈한 산성을 띤 것이 자못 청렬(淸洌)하다. 컬컬한 목에 연거푸 너덧 사발을 들이키니, 오장까지 시원하게 씻어내는 듯. 위병 기타에 주효여신(奏效如神)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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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로 강서읍에 귀착하여 일박하고, 21일 조조, 기양(岐陽)에서 경철을 타고 평양에 이르러 다시 경의선으로 바꾸어 사리원에 이르니 사리원 지국장 이근호(李根浩) 씨가 맞아 준다. 동반으로 신천(信川)행 경철에 몸을 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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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망무제의 황해 평야에는 한껏 무성한 벼들이 바람을 따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너글너글한 광경은 망망한 대해에 만경창파가 굽이치는 양하여 흉금이 자못 호활해진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털털거리고 까불던 애기차가 신천 온천역에 나릴 때는 벌써 오후 5시가 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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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천은 고구려 시대의 승산군(升山郡)으로 그 일부는 백악(白岳) 구월산에 연접한 고명(古名) 문화군(文化郡)이다. 이 문화야말로 성조 단군께서 두 번이나 도읍하시고 마지막엔 구월산의 최고봉인 사고봉(思皐峯) 상에서 화신어천(化身御天)하신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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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의 여관에 들어 여장을 끄르고 제일착으로 여진에 더럽힌 몸을 온천에 흠씬 씻었다. 처음엔 곯은 달걀 냄새 같은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몹시 불쾌한 정도는 아니다. 온천도 알맞거니와 수정같이 맑은 수색이 더욱 개운하였다. 나는 흥컷실컷 탕 속으로 넘나들며 씻고씻고 또 씻고 헹구고 또 헹구었다. 몸도 몸이려니와 마음으로 마음의 빨래도 정하게 조촐하게 빨고 또 빨았다. 님 뵈오려 가옵는 이 길이어든 한 점의 진애와 속념을 행여 남겨 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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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야간부터 또 대우다. 행정 2주일 나마에, 며칠을 아니 빼고 임우(霖雨)를 맞았으니 설마 인제야 그치겠지, 구월산 입산에야 청쾌한 일기를 만나겠지, 하던 일루의 희망조차 끊어지고 말았다. 지난 동안에 대개는 취우성(驟雨性)을 띠어 몇 시간만 폭주하다가는 뜸해지는 것이 항례이러니, 이번 비는 밤새도록 나리퍼붓고, 아츰결까지도 줄기차게 쏟아진다. 여관의 유리창 문을 들붓는 소음을 들으며 화살같이 닫는 마음을 간신히 제어하느라니, 오정 때나 되어, 하늘이 스르르 벗겨진다. 신천지국장 박태례(朴泰禮) 씨와 여러 분의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동지국 총무 박태지(朴泰智) 씨와 함께 기어이 발정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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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면을 지났는데, 도로가 군데군데 무너지고, 개울물이 창일(漲溢)하여 자동차가 질팡갈팡한다. 조그마한 개울을 건너면 또 큰 개울이 가루막히고 승객이고 운전수고 운력으로 자동차를 떼밀다가 넘겨 놓으면 또 길바닥이 뚫어졌다. 풀을 베어 온다 모래를 긁어 덮는다 하여 한고비를 간신히 지나면 차륜이 잠기는 이토와 수렁을 또 만난다. 그야말로 일난거 알난래(一難去一難來)에 우리는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우리는 용(勇)을 고(鼓)하여 전진 또 전진하다가 문무면 사리고개 밑에 필경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인 자동차를 버리기로 중의(衆議)에 결(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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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발을 벗었다. 수 없는 실개천과 개울이 앞에 깔리어, 신을 신고벗고 하기에 괴로운 까닭이다. 신을 그대로 신고 배기려마는 미끄러운 돌을 밟기엔 맨발이 훨씬 나았다. 미적지근한 이토와 보실보실한 백사가 발바닥을 찔러 마지막엔 질적질적한 풀 위를 골라 디디기로 하였다. 완구(緩丘)와 곡경(曲徑)과 절강(絶江)과 단계(斷溪)를 넘고 건너기 15리 나마에야 우중의 패엽사(貝葉寺)에 당도하니 오후 5시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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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고개’란 데를 넘어 한동안 가노라면, 장엄한 구월산 연봉이 멍울멍울한 다갈색 구름 아래 거대한 병풍처럼 펼쳐 있다. 산기슭으로 아득한 지평선이 녹아들며, 널리 펀펀한 광야가 거침없이 활개를 훨씬 폈는데, 녹색 바탕에 흰 줄을 굵게 가늘게 그어, 가물가물 멀리멀리 사라지는 것은 이 옥야를 관류하는 장류(長流)들이다. 혹은 구월산, 혹은 달천천(達泉川), 혹은 척서천(滌署川) 등의 이름으로, 순탄하게 수 십리를 흘러나리다가, 서강(西江)을 이루고 재령강(載寧江)으로 합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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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옥야와 이 장류! 성조의 은총을 오로지 받음도 우연이 아니리라. 단종 임신(壬申)에 경창부윤(慶昌府尹) 이광제(李光齊) 소(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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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략) 신광제(臣光濟) 이고삼국유사(夷考三國遺事) 유왈(有曰) 단군왕검(檀君王儉) 이당요(以唐堯) 즉위후(卽位後) 오십년경인(五十年庚寅) 도평양(都平壤) 시칭조선(始稱朝鮮) 우이도당장경(又移都唐庄京) 환은어(還隱於) 아사달산(阿斯達山) 위신운(爲神云) 연즉(然則) 단군위군어사(檀君爲君於斯) 위신어사(爲神於斯) 불염어차지(不厭於此地)! 명의(明矣) ─(하략)
455
이공 광제(李公光齊)는 문화 사람으로 구월산 하의 삼성당(三聖堂)을 폐(廢)하고, 평양 숭령전에 단군과 동명왕을 합묘(合廟)하는 데 분개하여 이 상소를 올린 것이거니와, 명미(明媚)와 기수(奇秀)가 없는 채로 지광토후(地廣土厚)한 이 땅을 성조가 사랑하셨다는 실(實)만을 분명히 지적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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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월산은 고명 아사달산, 일명 백악으로 비록 서산 대사에게 “불수부장(不秀不壯)”이란 악평을 들었으되, 4대 명산 부끄럽지 않을 만큼 광무 100여리 거흉(巨胸)은 신천(信川), 안악(安岳), 은율(殷栗)의 3군을 포옹하고, 연봉중의 최고봉인 사황봉(思皇峯)은 해발 3040여 척으로 황해 전폭(全幅)에 군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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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엽사는 이 산의 주찰로 중국의 한산(寒山)과 비슷한 점이 많다 하여 한 동안은 한산사로 행세하다가, 다시 패엽사로 개칭한 것인데 사명(寺名)의 유래는 거금 1100여 년전 당승 패엽 대사가 주석(住錫) 포교한 탓이라던가. 대찰의 면목을 갖추기에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시대이었고 지금의 원우(院宇)는 약 60년 전에 하은 대사(荷隱大師)의 손으로 중창한 것인데 사관산림(寺管山林)이 400정보가 넘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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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조반을 마치고 주지 대리 이명교(李明敎) 씨와 박태지 군과 일행 3인이 단군대에 오르다. 비는 오늘도 쾌청치 않아 이따금 흑운(黑雲)이 어둑하게 고여 들면, 영락없이 폭우가 쏟아진다. 그러면 계속적이 아니요, 간헐적인데 우리는 반등(攀登)할 용기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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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대는 패엽사 우측 아래 석산으로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으나, 우거진 풀숲과 질적질적하게 미끄러운 석경이 다시금 순례자의 정성을 시험하였다. 급한 경사에 숨이 턱에 닿고, 땀과 비가 한꺼번에 왼 몸을 적시기 한 시간 나마에 우리는 단군대에 도달할 수 있었다.
461
절정에 오르고 보니, 안하(眼下)는 천인절벽이다. 수백 척을 위로 위로 내뽑은 석벽 위에 사람 두엇이 간신히 걸어앉을 만한 석상이 내밀었고, 이 석상 위에 바위가 슬며시 내밀어, 아늑한 품이 집안에 들어 앉은 것처럼 빗발이 들이치지 않는다. 돌 틈바구니에 용하게도 뿌리를 박은 두어 떨기 도라지꽃이 원래(遠來)의 근참자(覲參者)를 반기는 듯이 보라빛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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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석상 위에 위태위태하게 올라앉아 보았다. 이 돌, 이 자리! 까마득한 반만년 옛날에 성조께서 앉으셨던가 하니 경건의 정과 감격의 회가 다시금 새로워진다. 이 바위, 이 석벽은 분명히 성조를 뵈었으련만, 지금에 덤덤히 말이 없으니 끼치신 성적(聖跡)이 어디어디임을 누구에게 물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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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몰고 지나가는 일진풍이 두상(頭上)의 송림으로 우 ─ 하고 울리니 “거위다 거위다!”하는 천뢰(天籟)인 듯하였다. 묵상의 고개를 들어보매 안계는 끝없이 멀리멀리 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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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고 검던 구름장이 엷게 희게 풀어지는 듯하더니 문득 헤실헤실하는 운무를 걷어차며 찬란한 적제(赤帝)가 그 광명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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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둠침침하던 안계엔 수백리 청광이 찢어질 듯이 명랑하고 신선하게 전개되며 호망(浩茫)한 대야(大野)와 점점의 구릉이 발아래 머리를 조아린다.
466
거수(巨樹)와 교목(喬木)이 소봉과 소구에 그대로 착 달라붙은 양하여 완연히 물이끼처럼 깔리었고 대하와 장류가 가느다란 은사로 번쩍인다.
467
소봉 몇 개를 넘어 아득한 운산 아래, 의질(蟻垤)처럼 곰실거리는 사리원, 정면으론 질펀한 신천평야, 좌편으로는 넓은 들판이 끝난 곳에 사마귀처럼 박힌 듯한 안악, 우편에는 당장경(唐莊京)의 큰 내들이 츨기 나래같이 가물거린다. 코앞에 터진 듯한 사태 난 산기슭을 돌아들면 삼성사의 옛 터전을 찾을 수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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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에도 일광이 비친다. 천풍(天風)이 넘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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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에 오르시사 이 바위에 앉으시사 이 땅을 나려다 보시며, 민거(民居)를 점치시던 양을 뵈옵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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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東史綱目)』의 백악고(白岳考)에 의하면 단군께서 처음 평양에 도읍하시고 또 백악산 아사달로 천도하셨는데, 이 백악의 소재 지역에 대하여는 각설이 구구하나 『신지비사(神誌秘詞)』의 백아강설(白牙岡說)이 가장 타당하다 하였다. 백아강은 곧 백악을 이름이니 단군께서 도(都)를 이(移)하심이 고구려가 평양으로부터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긴 것과 신라가 금성으로부터 월성으로 건너간 것과 같다 하였다.
471
『여지(麗誌)』에 문화 구월산을 속칭 아사달산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아사(阿斯)는 ‘아홉’과 음이 근사하고 달(達)은 달(月)과 역시 음이 같은즉 아사달산은 곧 구월산을 이름이라 하였다.
472
막막한 만고의 일이며, 지역을 분명히 고중해 내기는 난중의 난사라 하겠으되, 성조께서 당장경에 이도하시고 아사달산에서 화신어천(化身御天)하신 것은 사가(史家)에도 이설(異說)이 적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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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만인절벽 위에 영이하게 내민 석상 위에 올라앉으면, 황해 전폭이 거의 일모(一眸)에 걷을 수 있으니 여기를 단군대라 하여 추모앙경(追慕仰敬)의 지정(至情)을 쏟게 함이 어찌 우연이라 하랴.
475
단군대에서 나려와서 소게하다가 오반(午飯)도 건둥건둥 다시 삼성사로 향하였다. 패엽사를 서(西)로 두고, 개천과 개울을 뛰고 건너고, 이수(泥水)의 곡경을 돌고 돌아 15리 나마를 나려오니 삼성리란 마을이 있고, 삼성리를 지나니, 전동(殿洞)이란 조그마한 동네가 있다. 이 전동을 안은 듯이 슬며시 솟은 청수한 일좌 토산이 곧 삼성사를 모셨던 삼성봉이라 한다.
476
우리는 봉하에서 삼성사 철훼(撤毁) 당년의 면장이던 김채형(金彩瀅) 씨를 방문하였다. 씨는 육순이 넘은 노인이다. 삿자리 방에서 어린 손자를 어루만 지다가 온 뜻을 고하니 은근히 우리 일행을 맞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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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를 추억하며 감개무량한 듯이 비교적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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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훼하기 전 삼성사에는 전감(殿監) 1인, 장의(掌儀) 2인, 감관(監官) 2인을 두었었고 달마다 삭망(朔望)에 봉심(奉審)하며 춘추로 연 2회의 제향을 올렸다. 춘(春)에는 2월, 추(秋)에는 8월로 달은 정해 있었으되 날짜만은 일정하지 않아 나라에서 택일하여 전물(奠物)을 나리는 것이 항례이었다고 한다. 최근의 중창은 60년 전 병자년으로 문화 주민들이 물력(物力)을 들여 개수하였는데 당시 면유(面有)인 전(田) 17두락과 답(沓) 16두락을 위토로 올려 제향에 보태어 쓰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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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명치 44년 곧 합방하던 이듬해에 별안간 철훼가 되고 말았습니다.”
481
“당시 군에서 삼성사 건물을 공매에 부쳤습니다. 그 때의 군수는 장휴(張烋) 씨요 재무주임은 상삼(上森)이란 사람이었습니다. 군에서 공매에 부쳤으니 차라리 우리 문화 주민이 낙찰을 시켜 보관하자는 의론도 있었으나 그때나 이 때나 어디 물자가 넉넉지 못한 탓에 주저주저하던 차에 천도교인 박관하(朴寬河)란 사람이 60원에 건물 4동을 사 가지고, 천도교구실(天道敎區室)을 짓고 말았습니다.”
482
전면장은 잠깐 말을 끊고 당시를 추억하는 듯이 멍하게 눈을 뜨는데 그 노안엔 눈물이 떠도는 듯하였다.
483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나려오던 성조의 사당을 왜 철훼를 하고 말았는가 지금도 그 까닭을 잘 모릅니다마는 공매에 부친 전 해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484
“전 해라면 경술년이지요. 경술년 8월입니다. 나철(羅喆) 선생이 제자 7분을 데리고 삼성사에 오셨습니다. 방 한 칸을 치우고 10여일 동안 공부를 하였는데 때가 그 때라 헌병들이 따라와서 같이 수직(守直)을 하고 있었습니다.
485
8월 10일일인가 봅니다. 나 선생이 방 하나를 따로 치워 가지고 들어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486
‘나는 며칠 동안 절식 수도를 해야 되겠으니 내가 문을 열고 나오기 전에는 너희들이 먼저 들어오지는 말라.’
487
하더랍니다. 나 선생은 방으로 들어가면서 방문을 안으로 닫아 걸어 버렸습니다. 하로가 지났습니다. 이틀이 지났습니다. 사흘이 지나도 아모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신상을 염려하는 제자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모리 절식수도를 하신다기로 전후 삼일간이나 물 한 모금 자시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아모리 나종에 꾸중을 뫼시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열어보자고, 급기야 문을 열고 보니…….”
489
“나 선생은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그 때 유서 12통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안다 한들 어찌 이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491
“사당은 철훼(撤毁)를 하였거니와 모셨던 위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93
“네, 그 위패는 우리가 잠깐 보관을 해 두었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보아 다시 사당을 신축하고 봉안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고, 미루적미루적 지나는 동안에, 대종교인 심근(沈槿)이란 이가 찾아왔습니다. 성신의 위패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니 차라리 나를 주면 대종교로써 봉안하겠다가에 그대로 내어 주었습니다.”
494
고로의 감회깊은 이야기에 때 가는 줄도 몰라, 어느 결에 석양이 겨웠다. 일행은 폐허의 삼성사나마 봉심할 차로 길을 재촉하였다. 반전반산(半田半山)의 구릉으로 얼마쯤 기어오르니, 인적이 오래 그친 양하여 길로 자란 잡초와 잡목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 행보조차 어려웠다. 이윽고 너르펀펀한 초원이 절정 위에 번뜩하게 열린다.
496
“바루 여기가 삼성사 옛터이오.”한다.
497
황량한 이 광경! 딸기 덩굴과 싸리 떼가 한데 어우러지고, 나무처럼 자란 초림 위에 칡덩굴이 뻗을 대로 뻗었다. 둘러막았던 담들도 무너지고 쓰러져 흔적만 남았을 뿐. 풀속으로 잠기는 발끝에 차이는 석괴들은, 잔초(殘礎)와 퇴체(頹砌)이리라.
498
『단군실기』에 의하면 태종 당년에 삼성사를 폐하고, 평양 단군묘에 합치하자 황해도 내에 악질(惡疾)이 치행(熾行)하므로, 성종 때에 이르러 단군 신사의 소재와 봉이리허(奉移里許)를 조사하게 되자 임진(壬辰) 2월 황해도 관찰사 이예(李芮)의 계(啓)에,
499
구월산 사우(祠宇)가 패엽사 서쪽, 대증산(大甑山), 임불찰(臨佛刹) 후에 있었는데 그 뒤 사하(寺下)의 소봉에 옮기고 또 소증산으로 옮겼다 하였으며 삼성당 내의 감실 모양을 그린 것을 초(抄)해 보면,
500
단인천왕(檀因天王) 남향이요, 단웅천왕(檀雄天王) 남향이요, 단군천왕(檀君天王) 동향이니, 병(並)판위(板位)라, 속전(俗傳), 고개목상(古皆木像)이러니 아태종조(我太宗朝)에 하륜(河崙)이 건의하여 제사(諸祠)의 목상을 혁파(革罷)할새 삼성목상이 또한 예파(例罷)요 의물해진(儀物諧眞)의 여부는 미가지(未可知)라.
501
하였다. 폐허 위에 이런 기술로나 당시의 광경을 눈앞에 그려볼 줄이야 서북방의 울울창창한 송림에 하늘을 찌르는 수주의 적송이 옛말을 일러주기에도 목이 메인 듯이 우 ― 하며 저녁 바람에 울 뿐이다.
503
23일. 구월산 하산, 연순(連旬)의 임우가 인제 와서는 더욱 악성이 되어, 이따금 폭우로 쏟아지는 까닭에, 등산은커녕 자칫하면 평지의 교통조차 끊어질 지경이라, 할 수 없이 귀정(歸程)을 재촉하게 된 것이다.
504
개울과 시냇물이 이틀밤 사이에, 엄청나게 불어 심한 데는 넓적다리까지 넘는다. 게다가 산간 특유의 급경성을 띠어 동행의 조력이 없었던들 거의 몸을 지탱하기로 어려웠으리라.
505
20리 나마를 갈 때 모양으로 이토와 계류와 씨름하면서 나려오다가, 사리 고개를 넘어, 자동차를 타게 될 때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506
문화를 지나 단숨에 달려들어와, 문무면 건산리 ‘동고개’란 데 올라서니, 눈앞에 평양촌이 보인다. 이 평양촌은 고명(古名) 당장경(唐莊京)으로, 단군께서 평양으로부터 이도(移都)하신 곳이라 전한다.
507
병풍같이 에둘린 구월산 연봉을 왼편으로 두고 질펀한 광야가 끝 없이 열렸다. 서도 특유의 조 이삭이 한창 익어 무거운 고개를 추스르지 못하는 듯이 만경억경의 창파로 굽이치는데, 군데군데 수전도 섞이어 거진 발수(發穗)할 만큼 잘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지반이 비옥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508
장류가 구월산 산록으로부터 흘러나리는 장강은 수조(數條) 백련(白練)처럼 용용(溶溶)히 동서로 관통하여 축축히 대야를 적신다. 유천(柳川) 가는 신작로가 푸른 들판에 흰 줄을 치며 멀리멀리 가물가물 사라지는 것도 일경(一景)임을 잃지 않았다.
509
이 대평야의 한 복판에 달걀의 노른자위 모양으로 평양촌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수십 호 되는 소촌이라던가. 그러나 저 호망(浩茫)한 불고부저(不高不低)의 벌판엔 그리 많은 조영(造營)의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십수만호의 대도시를 현출함이 그리 난사가 아니리니, 성도의 구지로 부끄럼이 없다 할것이다.
510
구도(舊都)에 끝없는 공상을 자아내다가 문득 백악의 연봉을 쳐다보니, 어천(御天)하셨다는 사황봉이 벽천을 뚫고 일순간 뚜렷이 장엄한 거곡(巨谷)을 나타내다가, 고만 구름 속으로 녹아들고 말았다.
512
10월 23일 오전 9시 문치장(文致暲) 군과 함께 경성발 자동차로 강화에 향하다. 작일의 대박(大雹) 섞인 폭풍우도 하롯밤 사이에 가뭇없이 개이고, 벽옥과도 같이 영롱히 번쩍이는 하늘은 청추(淸秋)답게 상쾌하다. 음우와 장림에 부대끼는 하절의 등섭고(登涉苦)를 생각하매 얼마나 복 받은 일기냐. 그 때에는 채 발수(發穗)도 못하고 기름기름 녹발(綠髮)을 풀어헤치고 있던 벼들이 인제는 누런 고개를 추수르지 못하고 수확을 기다린다.
513
비록 증유의 지(地)는 아닐망정 “증일월(曾日月)은 기하(幾何)오 이강산(而江山)을 불가부식(不可復識).”이란 탄(歎)을 저절로 발하게 한다.
514
오후 1시경 김포에 도착. 똑딱선으로 바다를 건너 들어간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조망하며 완연히 봉소(蜂巢)와 같은 돈대(燉臺)를 지점할 사이에 배는 어느덧 갑곶진(甲串津)에 대었다. 이 갑곶진은 강화읍의 인후(咽喉)로, 해양의 풍운이 번복할 때마다 백전의 겁토이니, 고려 당년 몽고가 입구할 때 몽장이 돌아가 그 주장에게 보고하기를 강폭이 좁아서 갑주(甲胄)를 쌓아도 건너갈 수 있다 하여, 이 명칭을 얻었다던가. 이 전설을 보더라도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515
우리는 배에서 나려 연락(聯絡)하는 자동차를 다시 얻어 타고 강화읍까지 이르렀다. 폭넓은 도로, 즐비한 점포만 보아도 부읍(富邑)의 면목이 약여한 듯하였다.
516
전등사까지의 거리를 물으니 30리. 총망(怱忙)한 행정(行程)이라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자동차의 객이 되니 차는 외성을 끼고 돌아 월곶성(月串城) 문루(門樓) 조해루(潮海樓)를 빠져 나가는데 외굉(巍宏)한 건물들이 고색창연한 개외를 이고 여기저기 우뚝우뚝 솟은 것은 궁전과 관아(官衙)의 구지(舊趾)들이리라.
517
강화의 고명은 갑비고차(甲比古次)로 고구려 때에 처음으로 군(郡)을 두어 혈구(穴口)라 일렀고 신라 경덕왕 때엔 해구군(海口郡)이라 개칭하였으며 원성왕(元聖王)때에 혈구진(穴口鎭)을 베풀었고 고려 초엽에 진을 고쳐 열구현(洌口縣)을 만들었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천도하면서 강도(江都)라 부른 이래로 역대 군왕의 몽진(蒙塵) 행계(行啓)가 가끔 있은 관계상 행궁(行宮)과 이궁(離宮)의 시설이 비교적 완비하였으니 그 구적이 의연히 남은 것이다.
518
건둥건둥 보는 듯 마는 듯 지나치는 것을 고어로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하였지만 ‘주마’보담 몇 곱절 더 빠른 차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휙휙 은현(隱現)하는 풍물을 별견(瞥見)하는 것이니 환영보담도 더 부정확성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색창연한 구건물과 산성의 초루(礎壘)가 안계에서 홀현홀몰할 적마다 감회는 자못 새롭다. 군데군데 산란한 성허(城墟)는 한양과 송경의 인후 요지인 까닭으로 관방(關防)을 게을리하지 않은 표시이거니와 성곽과 진보(鎭保)와 돈황(墩隍)을 쌓고 또 쌓고 모으고 또 모은 반면에는 비풍(悲風)과 참우(慘雨)가 이 서해의 일엽도(一葉島)를 얼마나 번롱(翻弄)하였는가.
519
상고는 고만두더라도, 고려 시대의 몽고란과 왜구, 이조에 들어와서 임진란과 병자호란! 백겁의 산하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그 중에도 더욱 참절(慘絶)한 것은 병자호란이니 한성부가 실수(失守)하매, 군주는 산성에 몽진하고 빈궁은 여기 파천하셨다. 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녀(士女)가 울고불고 설한과 빙풍에 전지도지(顚之倒之)하며 난을 피하였다가, 여기마저 적군의 마제(馬蹄) 아래 유린하게 되니 만고의 비극은 빚어내지 않았느냐.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520
“시(時)에 도중피란사녀급(島中避亂士女及) 거인지(居人之) 찬복해빈(竄伏海濱) 혹암혈자(或巖穴者)는 개피함몰(皆被陷沒)하여 기자액(基自縊), 투애투수이사자(投崖投水而死者)를 불가승수(不可勝數)요 행로적아(行路赤兒)의 기어설중자(棄於雪中者)는 사자(死者)는 침자(抌藉)하고 생자(生者)는 포복(匍匐)하여 혹음사모지유(或飮死母之乳)하고 혹호모혹호야(或呼母或呼爺)하며 완전환사(宛轉還死)하여 유불인정시자(有不忍 正視者)이러라.”
521
이 수행(數行)의 기록은 문(文)이나 자(字)가 아니요 그대로 점점이 혈루가 아니냐.
522
이것은 외래의 병란이 자아낸 참극이려니와, 이보담도 더욱 비분의 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금지옥엽과 인인의사(仁人義士)가 군사(群邪)의 모함으로 이 섬에 유찬(流竄)하였다가 이내 원령(寃靈)을 지은 허다 사실이다.
523
춘원의 「단종애사」로 새삼스럽게 만곡(萬斛)의 눈물을 짜낸 안평대군 용(瑢)과 그 아들 우직(友直)도 여기서 사사(賜死)되었고, 임해군도 여기서 변사하였다. 8세의 영창대군 의(㼁)를 밀실에 가두고 불을 질러 질색치사(窒塞致死)케 할 제, 천진(天眞)의 대군은 벽을 손으로 긁어, 손톱조차 탔다는 대비극도 여기서 연출된 것이다.
524
이 외 무수한 참사를 매거하기에도 진절머리가 나거니와, 전화의 겁지로 유찬(流竄)의 배소로 가슴이 막히고 분통이 끊어지는 처참한 비극의 무대를 혼자 가루맡은 셈이다. 음모의 암찬(暗竄)과 정변의 비막(秘幕)도, 팽배한 파도성을 격하여 거침없이 꾸며내고 지어낸 것이다. 반도 산하의 눈물과 한숨과 비통과 원한의 한 결정체라고나 할까.
525
차창 너머로 내다보이는 어여쁘게 물들은 단풍도 내 눈에 반반(斑斑)한 혈루인 듯하였다.
526
자동차는 시가 지대를 벗어나와 굴곡과 경사는 있을망정 정제된 신작로 상으로 닫는다. 전개되는 광경은 처창(悽愴)한 사적(史的) 추억과는 딴판으로 명랑하다. 고거(高巨)하지 않으나 수려한 산판(山坂)에는 창송과 잡목이 가득가득 들어서서 푸른 바탕에 혹은 누르게 혹은 붉게 단풍의 수를 놓았는데 그 산(山) 발치마다 추양(秋陽)을 담뿍 안고, 10호 또는 수십호 농가들이 따스하게 덥들였다. 집 뒤엔 으레 몇 주의 감나무가 섰는데, 가지마다 포도 송이처럼 조롱조롱 달린 감을 이기지 못하여 척척 휘어졌다. 여기 감은 비록 굵지 않으나, 꺼풀이 얇고 씨가 적고 물이 많은 명산품의 하나에 오른다던가. 이 기름이 흐르는 듯한 농가 앞에는 대개 훤하게 들판이 열리고 전답이 질펀하다. 전(田)보담도 답(畓)이 많아 이 섬에서 나는 쌀만으로도 이 7만호의 농민이 3년을 먹고 오히려 남는다 한다. 섬이라면 초원과 황지가 연상되지마는 이 섬은 첩첩한 산협인데 모퉁이 모퉁이에 널찍널찍한 평야가 열리고 기름진 옥토를 지은 것이다.
527
남북은 해안까지 연장 70리, 동서는 40리, 주위 280리의 타원형(楕圓形)으로 지광으로도 조선 5대 도(島)에 한 몫을 볼 뿐 아니라, 본업은 물론이요, 화문석, 입연(叭筵), 축산 등 부업의 산액(産額)도 연평균 24만원을 돌파한다하니 부유한 농촌으로 명성을 떨치는 것도 우연히 아닌 듯하였다.
528
더구나 특이한 것은 외래의 세력이 아즉 이 도내에 침윤하지 못한 것이니, 상가도 거의 전부가 이 곳 인사의 경영이요, 농토도 숙명여고보 교유지 이외에는 소위 경답(京畓)이라는 것이 자못 희소한 점이다. 자작자급의 활례(活例)를 본 듯하여 마음이 매우 든든하였다.
529
차는 길상면 온수리의 대동을 지나 곱게 물들은 단풍과 청송을 양가로 끼고, 그야말로 화문석을 깔아놓은 듯한 누릇누릇한 잔디 위를 지쳐 올라간다. 유수한 동곡에 익연(翼然)히 솟은 큰 정자 아래 닿으니, 이 정자가 곧 전등사 뜰 앞 대조루(對潮樓)이다.
532
10리 주위의 삼랑성이 에둘린 금탕(今湯) 가운데 굉걸한 사우가 아늑하게 들어앉았다. 사전(寺前)의 정남은 정족산(鼎足山, 일명 傳燈山)이 가루 박히었으나 동방으로 동학(洞壑)은 끝없이 열려 멀리 창해가 떠 보인다.
533
이 전등사는 신라 아도 화상(阿度和尙)의 소전(所詮)으로 구명은 진종사(眞宗寺)라 일렀는데 고려 말엽 충렬왕 당년 원비(元妃) 정화 궁주(貞和宮主)가 옥등을 시사하였다 하여 지금의 명칭을 얻은 것이라 한다.
534
여러 번 겁화와 병란을 겪은 탓으로 겁건(劫建) 당시의 건물이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여조와 이조에 전후 5회의 중수로 현용(現容)을 유지한 것인데 최후의 중수는 용희 병오(丙午)이었고 고종 9년 임신(壬申)에는 승군 50명을 두고, 승장 총섭(總攝) 1인으로 지휘 감독케 하였다 하니 이 사지(寺趾)가 얼마나 요해지(要害地)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535
아득한 반만년 전 단군께서도 이 점을 벌써 보시고 3자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셨다 하여 삼랑성(三郞城)이라고 시방도 전하는데, 아들 한 분이 성 하나씩 맡아 쌓아서 지금도 삼봉이 완연한데, 현존한 성주는 5리 나마요 치첩(雉堞)은 705며 성문은 동서남북 4문이 있는데 동서북 3문은 본래 누(樓)가 없었고 남문에만 누가 있었는데, 이 누가 몇 천년 풍우에 훼폐(毁廢)되고 성곽도 퇴락된 데가 많아, 영묘(英廟) 기미에 유수(留守) 권복(權福)이 개수하고, 남루를 이름 지어 경해루(京海樓)라 하였다 하였으나, 이금(而今)엔 그 누마저 흔적조차 없어지고 전등사 입구에 문구만 뚜렷이 남았을 뿐.
536
이 삼랑성은 정족(鼎足)의 형을 지었다 하여 일명은 정족산성이라고도 일컫는데 벌써 바라보면 성벽의 잔체(殘砌)가 창울한 수림 사이에 거뭇거뭇하게 은현(隱現)할 뿐 아니라 성상(城上)에 심은 솔들이 거침없이 자라나 일자(一字)로 장림을 지은 것이 청수(淸秀)한 정취를 보태는 듯하다.
540
23일 조조, 행장을 재촉하여 마니산으로 향하다. 점운(點雲)도 없는 정유리(淨琉璃)를 깐 듯한 하늘을 우러러보고, 풍엽 너머로 늠실거리는 창해에 은파 금파를 끌어올리는 홍일(紅日)을 굽어보니 성역을 근참하기에 축복된 일기임을 못내 기뻐하였다.
541
“순무천총 양공헌수 승전비(巡撫千揔梁公憲洙勝戰碑)” 각(閣)을 보고 병인양요의 비희극을 추억하고 사고(史庫)의 옛 자최를 밟으며 『선원록(璿源錄)』등 국사(國史)를 간수하기에 얼마나 주도한 용의를 쓴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542
삼랑성의 서문을 빠져 나와, 애기산 두어 개를 오르고 넘으니, 길은 논두렁 위일망정 탄탄대로다.
543
한 20리나 왔을까? 하도면 문산리란 골짜기로 들어서니 검정 돌 너덜이에 맑은 시내가 소리치며 흘러나린다. 여기야말로 마니산의 기슭. 개울판에서 발이 잠기는 모래에 허우적거리기 수십 분. 경사 급한 비탈길에 매달리기 시간 나마. 쇠초(衰草)에 곱게 물들은 단풍과 올립횡와(兀立橫臥)한 기암괴석에 눈 줄 겨를도 없이, 뚜렷이 나려다보는 제천단(祭天壇)을 쳐다보며 걷고 기고 하였다.
544
오르고 또 올라, 마츰내 우리는 마니산 최고봉 제천단 위에 올라서니, 정오가 겨웠다.
545
하늘에서 바루 쏟아지는 듯한 청풍에 옷깃을 여미며, “해활천요만리개(海活天遙萬里開)”의 실경(實景)에 직면하고 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다.
546
동방으로는 인천과 경성이 역력히 보인다. 월미도 조탕(潮湯)의 지붕이 일광에 반사되어 번쩍번쩍 백금으로 번쩍이고 말안장 같은 취봉(翠峯)은 남산이 분명하다. 구름 사이에 헤엄치듯 늘어선 것은 삼각산 연봉이리라. 북쪽으로는 개성이 보이고, 송악이 보이고, 정서(正西)는 끝없는 운해다. 몇 십리 몇 만리 바다 또 바다! 문자 고대로 수광이 접천(接天)하였는데 저 멀리 나비나래처럼 하늘거리는 편주들은 이 바람에 불리어 은하수까지 치오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547
서북으론 연백평야(延白平野)가 한 가닥, 허리띠처럼 떠 보이는데, 해주 건너 파름파름한 운봉이 병풍처럼 반공에 솟은 것은 구월산 군봉이 갈데 없다. 남쪽으로 손바닥만한 강화도의 전용을 일모(一眸)에 걷을 수 있고, 점점도(島)가 구비치는 은파에 잠으러 드는 듯하다.
548
제천단은 일명 참성단(慙城壇) 또는 첨성대로 납작납작한 돌로 쌓았는데, 하단 상단이 있고, 상단으로 올라가는 데는 층층대가 놓였으며 단상은 네모가 났으나, 쌓아 올리기는 원형으로 되었다. 사방의 길이는 각 7척 6촌, 높이는 15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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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반만년 전에 성조께서 이 단을 쌓으신 후 퇴폐와 수축이 한두 번이 아니었겠으나 뚜렷한 역사적 기록은 없고, 이조에 나려와 인조 17년 기묘에 이 단을 중수하고 사당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그 옆에 천재암(天齋庵)이 주어있고 재지기(齋直)를 두고 제전(祭田) 10 여 무(畝)를 매년 맹춘에 제향을 올렸는데, 지금엔 당과 암은 폐한 지 오래고 제전은 군청의 관리로 넘어갔다던가. 성조의 끼치신 이 자최를 뵈옵고 자아치는 무량한 감개를 어찌 다 적으랴.
550
나철 선생의 시 한 수로 이 ‘성적순례기’를 마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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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2. 7. 29∼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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