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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840년 ◈
◇ 입당구법순례행기(840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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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圓仁(엔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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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卷) 제(第) 3
2
 - 개성오년(開成五年)
 
 
 

840년 7월

 

7월 1일 (음)

5
- 장안을 향해 떠나다
 
6
七月一日。為往長安。排比行李。見人說。從五臺往長安。向西南行。二千餘里。得到長安也。齋前。拜遠老宿。及講天台止觀文句二座主。及大眾訖。院主僧廣初。設空飯送路。齋後便發。院內大眾相送。到三門外。捫淚執手別矣。
 
 
7
7월 1일, 장안으로 가기 위해 행장을 준비註 176했다.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오대산에서 장안까지 가려면 서남쪽을 향해 2천여 리註 177를 가야 장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재를 들기 전에 지원노숙(志遠老宿), 《천태지관》과 《법화문구》註 178를 강의하던 두 좌주,註 179 그리고 여러 대중들에게 인사했다. 원주승 광초(廣初)가 정성스러운 식사를 마련해 가는 길을 환송하였다. 재를 마친 후 곧 출발하였다. 절 안의 대중들이 삼문註 180 밖에까지 전송해주었는데, 눈물을 닦으며 서로 손을 잡고 헤어졌다.
 
 
8
註) 176 원문에 배비(排比)라고 하였다. 가지런히 마련한다는 뜻이다. 준비(準備), 용의(用意)의 뜻으로, 안배(按排), 배비(排備) 등과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0쪽).
9
註) 177 흔주(忻州, 산서성 흔현)과 장안의 거리는 《통전(通典》 권179에 1,480리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라 흔현-오대현 사이의 150리, 오대현-오대산 사이의 180리를 더하면 약 1,800리가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1쪽).
10
註) 178 천태종의 삼대부(三大部)의 하나로서 실천의 관심문(觀心門)을 밝히는 《마하지관》에 대하여 《법화현의(法花玄義)》와 함께 교상(敎相)을 밝힌 천태대사 지의(智顗)의 저술. 587년에 금릉(金陵) 광택사(光宅寺)에서 그가 강설한 것을 제자 삼관정(三觀頂)이 필기한 것으로서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2쪽).
11
註) 179 법견(法堅, 法賢)과 현량(玄亮)이다. 법견은 지자(智者)의 《마하지관(摩訶止觀)》, 현량은 《법화경문구(法華經文句)》를 강의하였다(《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 5년 5월 16일조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1쪽).
12
註) 180 절의 누문(樓門). 열반으로 들어가는 세 가지의 해탈문, 즉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작문(無作門)의 삼문(三門)으로서 불문(佛門)을 의미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2쪽).
 
 

 
 

7월 1일 (음)

14
- 견고보살원에서 영선의 행적을 듣다
 
15
取竹林路。從前。向西南。踰一高嶺。到保磨鎮國金閣寺堅固[A27]菩薩院宿。遍臺供養主僧義圓。亦歸汾州去。今日竹林寺從花嚴寺。續後來同院宿。院僧茶語云。日本國靈仙三藏。昔住此院二年。其後移向七佛教誡院亡過。彼三藏。自剝手皮長四寸闊三寸。畫佛像。造金銅塔安置。今見在當寺金閣下。長年供養(云々)
 
 
16
대나무 숲 길을 따라 죽림사(竹林寺) 앞에서 서남쪽을 향해 높은 산마루 하나를 넘어 보마진국금각사(保磨鎭國金閣寺)註 181의 견고보살원(堅固菩薩院)註 182에 도착해 숙박했다. 오대를 두루 도는 공양주 승려 의원도 역시 분주로 돌아가려고 오늘 화엄사에서 우리 뒤를 따라 보살원에 와서 함께 묵었다. 보살원의 승려가 차를 마시며 말하기를
 
17
“일본국의 영선삼장(靈仙三藏)이 옛날 이 원에서 2년 동안 거주했다. 그후 칠불교계원(七佛敎誡院)으로 옮겨가 죽었다. 그 삼장은 스스로 길이 4촌, 넓이 3촌 크기의 손 껍질註 183을 벗겨내어 불상을 그리고 금동탑註 184을 만들어 거기에 안치했다. 지금 이 절의 금각(金閣) 아래에 있는데, 오랜 세월 동안 공양하고 있다.”
 
18
운운하였다.
 
 
19
註) 181 초본(抄本)에는 “보마진국금각사(保磨鎭國金閣寺)”라고 하였다. 《표제집(表制集)》 권6 진오대산수호마공덕표(進五臺山修護摩功德表)에 따르면 “沙門惠曉院 今年四月十日 中使魏明秀奉宣進止 令微僧就五臺大聖金閣保應鎭國寺 修護摩功德者”라고 하여 금각사의 정칙 사액이 “오대산금각보응진국사(五臺大聖金閣保應鎭國寺)”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마(保磨)는 아마도 보응(保應)의 오자가 아닐까 생각되므로, 여기서는 보응이라고 고친다. 아마도 금각사는 남대(南臺)의 서북, 금각령에 있었을 것이나,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이것이 중대의 사원에 속해 있다. 그 연기는 같은 책 권중 도의화상입화금각사(道義和尙入化金閣寺)에 상세하며, 그 외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1 당오대산청량사도의전(唐五臺山淸凉寺道義傳)에도 약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도의는 구주(衢州, 절강성 구현)의 사람으로 개원 24년(736)에 오대산에 올라 청량사에서 숙박하였다. 어느 날 코끼리를 탄 성승(聖僧)의 화현(化現)을 만나고 중대에서 한 동자의 인도를 받아 금교(金橋)를 보았다. 이 금교를 건너니 그곳은 모두 금색이었다. 삼문(三門), 누각, 당전, 낭무(廊廡)의 대가람이 있는데, 여기에서 성승(聖僧)에게 청하니 차와 약식을 주었다. 절 안에는 12원이 있는데, 만 명에 가까운 승려가 거주하였고 선과 율을 공부하였다. 그 영이(靈異)를 체험한 도의는 이 화현으로 인해 그 장소에 새로운 사원을 건립할 것을 발원하였다. 그러나 생전에 실현하지 못하였고, 머지않아 불공삼장(不空三藏)이 이를 이어받게 되었다. 《표제집(表制集)》 권2 청사의조승도환수금각사제(請捨衣助僧道環修金閣寺制)에는 영태 2년(766)의 상주문(上奏文)이 있는데, 도의의 체험에 의거해 택주(澤州)의 승려 도환을 공양주로 삼아 금각사 건립을 발원하여 현종이 내렸던 사액을 실현하기 위해 천자의 관료가 일체 협력할 것을 출원하였다. 다행히 대종이 칙허(勅許)를 얻은 불공은 제자 함광(含 光)을 수공덕승(修功德僧)으로 삼아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불편한 산중에 자재를 운반하고 공장을 시켜 일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사업이었으나, 불공도 스스로 사재(私財)를 희사하였고 대종을 비롯하여 재상, 절도사, 환관 등도 동참하여 순타(純陀), 도선(道仙), 법달(法達)을 공사 현장에 파견하는 등 특별한 열정을 기울였다(《표제집(表制集)》 권2 청수대산금각옥화등사교장방면추호제(請修臺山金閣玉華等寺巧匠放免追呼制)) 사원은 대력 2년(767) 일단 완성되었으나 계속해서 함광을 머물게 하였고 같은 해 불공도 몸소 오대산에 이르러 한층 사원이 충실해졌다. 입적할 때까지 그가 이 사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력 9년에 유언으로 가지고 있던 금전을 금각사와 옥화사에 시주하여 사원의 공덕과 장엄에 충당하라고 한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그의 뜻을 이은 사람은 제자인 서명사(西明寺)의 혜효(惠曉)로, 그는 금각에 안치했던 존상을 마무리하고 계인(契印)을 제작하였다(《표제집(表制集)》 권6 대력십이년왕오대산수공덕사사성은표(大曆十二年往五臺山修功德辭謝聖恩表) 원인(圓仁)이 이 사원을 방문한 것은 불공이 입적한 지 60여 년 뒤였다. 이 절은 그 뒤 흥폐를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는데, 현재의 모습은 청 건륭 연간에 중수한 이후의 규모이다(小野·日比野, 《五臺山》, 227-229쪽)(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1쪽).
20
註) 182 견고보살(堅固菩薩)은 견고의보살(堅固意菩薩, Drdhadhyasaya)의 줄임이라고 생각된다. 밀교적인 부살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다른 재난을 없앤다고 믿어지며, 현교(顯敎)에서는 지장보살에 대응된다. 다만 이 사원명은 도의(道義)의 12원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3쪽).
21
註) 183 원문에 수피(手皮)라고 하였다. 신체의 일부를 불보살에게 공양하는 것은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손가락 껍질을 벗겨 불상을 그렸다는 것도 같은 신앙에 바탕한다.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에 인용된 《연력승록(延曆僧錄)》 진목미거사(眞木尾居士)전에도 “居士 … 偶捨等禪師 誦新華嚴經一部 便論菩薩行門 菩薩摩訶薩供養諸佛 行檀波羅蜜 內財外財二俱捨施 居士師此行門 願行檀度 剝手皮 奉畵藥師淨土變一鋪 報恩供養”이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3쪽).
22
註) 184 청동으로 주물하여 만든 탑으로, 그 표면에 금도금을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93쪽).
 
 

 
 

7월 2일 (음)

24
- 금각을 열고 참배하다
 
25
二日。共義圓供主等及寺中數僧。開金閣。禮大聖文殊[A28]菩薩騎青毛師子聖像。金色顏貌。端嚴不可比喻。又見靈仙聖人。手皮佛像及金銅塔。又見辟支佛牙。佛肉身舍利。當[A29]菩薩頂懸七寶傘蓋。是勅施之物。閣九間三層。高百尺餘。壁簷椽柱。无處不畫。內外莊嚴。盡世珍異。顒然獨出杉林之表。白雲自在下而靉靆。碧層超然而高顯。次上第二層。禮金剛頂瑜伽五佛像。斯乃不空三藏。為國所造。依天竺那蘭陁寺樣作。每佛各有二脇士。竝於板壇上列置。次登第三層。禮頂輪王瑜伽會五佛金像。每佛各一脇士[A30]菩薩。二[A31]菩薩作合掌像。在佛前面向南立。佛[A32]菩薩手印容貌。與第二層像各異。粉壁內面。畫諸尊曼茶羅。填色未了。是亦不空三藏為國所造。
 
 
26
[7월] 2일, 의진 공양주 등과 절의 승려 몇 명과 함께 금각을 열고 대성문수보살註 185에게 예배하였다. 푸른색 사자를 타고 있는 성상(聖像)은 금색 얼굴에 단정하고 근엄한 모습은 비길 데가 없었다. 또 영선성인(靈仙聖人)이 손 껍질가죽에 그린 불상과 금동탑을 보았다. 또한 벽지불(辟支佛)의 치아註 186와 부처의 육신사리註 187를 보았다. 보살의 정수리에 해당되는 곳에 칠보로 장식한 산개(傘蓋)註 188가 걸려 있었는데, 이것은 조칙으로 보시한 물건이다. 금각은 9칸 3층이고 높이는 100여 척이 되었다. 벽과 처마 그리고 서까래와 기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팎의 장엄함은 세상의 진귀함과 기이함을 다하였고註 189, 전각은 삼나무 숲 위로 홀로 우뚝 솟아 있다. 흰 구름은 스스로 그 아래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고 푸른 지붕은 초연히 높게 두드러졌다.
 
27
그 다음 제2층으로 올라가 금강정유가(金剛頂瑜伽)註 190의 다섯 불상註 191에 예배하였다. 이것은 불공삼장(不空三藏)註 192이 나라를 위해 만든 것인데, 천축 나란타사註 193의 양식에 의거해 제작하였다. 불상마다 각각 협사(脇士)註 194 2명이 있고, 아울러 판자로 만든 단 위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다음으로 제3층으로 올라가 정륜왕유가회(頂輪王瑜伽會)註 195의 다섯 부처註 196의 불상에 예배하였다. 매 불상마다 각각 협사보살 하나가 있었는데, 두 보살은 부처의 앞에서 남쪽을 향해 서서 합장하는 상이었다. 불보살의 수인(手印)註 197과 모양은 제2층의 상들과는 각기 달랐다. 흰 벽註 198 안쪽 면에는 제존(諸尊)의 만다라를 그렸는데, 색칠하는 것이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이것 역시 불공삼장이 나라를 위해 조성한 것이다.
 
 
28
註) 185 금각 안의 문수상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기 때문에 그 양식은 명확하지 않다. 또한 도의가 감득(感得)했던 금각사의 보살상이므로 특수한 양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23층에 안치되었던 상과 관련해 생각해 본다면 다음의 추측이 가능하다. 즉 화현한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는 문수, 다시 말하면 일본의 이른바 도해문수(渡海文殊)는 아니고, 밀교 계통의 존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금각사는 불공이 건립한 것이고 23층의 여러 불이 모두 밀교적인 것이었다는 점에서 미루어, 예를 들면 도의의 감득에 시작된 점에서도, 제1층만이 현교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차라리 불공의 밀교적인 사상을 제존의 배치를 통해 구현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3쪽).
29
註) 186 불아(佛牙)의 “牙”는 치아를 말한다. 사리와 함께 인도를 비롯해 많은 불교국에서 신앙되었다. 《법현전(法顯傳)》 사자국(師子國)조에는 왕성(王城) 안에 불치정사(佛齒精舍)가 있다고 하였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11 승가라국(僧伽羅國)조에도 왕궁 옆에 불아정사(佛牙精舍)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당대(唐代)에도 불아에 대한 신앙은 매우 성행하였다(《입당구법순례행기》 권3 개성 6년 2월 8일조 및 주 참조) 여기의 벽지불아(辟支佛牙)라는 것은 아마도 몸을 불교에 바친 독각(獨覺)의 것이었다고 추측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6쪽).
30
註) 187 육사리(肉舍利)라고도 한다. 《법원주림(法苑珠林)》 권40에는, 사리에 3종이 있는데 첫째는 골사리(骨舍利)로 백색이고, 둘째는 발사리(髮舍利)로 흑색이며, 셋째는 육사리로 적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감진(鑑眞)이 여래의 육사리 3천립을 가져 왔고, 공해(空海), 원행(圓行), 종예(宗叡) 등도 가져왔다. 원인(圓仁)도 양주에서 벽지불의 사리 2립을 구해 얻었다(《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 속전에는 사리는 신앙하는데에 따라 그 수가 증가한다고 하나, 후세에는 많은 보석립(寶石粒) 등이 대용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6쪽).
31
註) 188 범어 Chattra의 음역이다. 본래는 일종의 산(傘)이었으나, 후에는 불당과 불상 등에 장엄하기 위해 천정에 매달아 늘어뜨렸다. 이를 천개(天蓋) 또는 보개(寶蓋)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6쪽).
32
註) 189 징관(澄觀)도 또한 “金閣岧嶢於雲端 猶疑聖化 竹林森聳於巖畔 宛似天來”(《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 권76)라고 하여 죽림사와 함께 금각사의 위용을 기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6쪽).
33
註) 190 《금강경(金剛經)》과 유가(瑜伽)를 말한다. 《금강경(金剛經)》은 《천왕경(天王經)》등 금강계의 경(經)을 의미하며 유가는 《대일경(大日經)》등 태장계(胎藏界)의 경(經)을 의미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3쪽).
34
註) 191 금강계(金剛界)의 5불이다. 《금강정경(金剛頂經)》에 설명된 유가(瑜伽) 18회(會)의 제5회인 세간출세간금강유가회(世間出世間金剛瑜伽會, 줄여서 금강유가회)에 나오는 비로사나(毘盧舍那, Vairocana), 아축(阿閦, Aksobya), 보생(寶生, Ratnasambhava), 무량수(無量壽, Amitayus), 불공성취(不空成就, Amogha-siddhi)이다.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에는 중앙에 비로사나[大日如來]가 흰색으로, 보관을 쓰고 지권인(智拳印)에 가부좌를 하였다. 아축은 동방에 앉는데, 황금색이고 그 수인은 왼손은 주먹을 쥐어 옆구리에 붙이고 오른손은 무릎에 늘어뜨리는 이른바 촉지인(觸地印)을 하였다. 보생은 남방에 앉는데, 몸은 금색이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배꼽 앞에 두고 오른손은 바깥쪽을 향해 피는 이른바 시원인(施願印)을 하였다. 무량수는 서방에 위치하는데, 몸은 금색이며, 그 수인은 삼마지인(三摩地印), 즉 양손을 겹쳐 놓는 것인데 보통은 이른바 미타의 정인(定印)이라고 부른다. 불공성취는 북방에 위치하는데 왼손은 주먹을 쥐어 옆구리에 붙이고 오른손은 펴서 가슴에 두고 있다. 이들 5여래는 5방에 위치하는데, 남면하여 일렬로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몽강(蒙疆)부터 하북지방에 걸쳐 보이는데, 요금(遼金) 이후의 5불은 대체로 병렬하며, 또한 중앙에 위치하는 비로사나상은 나발형인데 일본국의 불상(예를 들면 도쿄 안상사)과 같이 고계(高髻)에 보관을 착용한 보살형은 보이지 않는다. 이 보관은 일체여래관정(一切如來灌頂)의 보관 또는 오지관(五智冠), 오보관(五寶冠)이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7쪽).
35
註) 192 생몰 연도는 705~774이다. 범명(梵名)은 Amoghavajra이다. 진언종(眞言宗)의 제6조이다. 실론섬 출신이라고도 하고 북인도 사람이라고도 한다. 당에 건너온 금강지(669~741)를 스승으로 섬기고 그 역경(譯經)을 도왔다. 금강지의 유명(遺命)으로 밀교관계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천보(天寶) 초에 광주(廣州)에서 실론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온 때가 천보 5년(746)으로, 가져온 경전 및 실론왕의 칙서를 현종에게 바쳤다. 궁중에 단장(壇場)을 설하여 천자에게 관정(灌頂)을 주거나 또는 비를 기도하였다. 천보 8년(749) 다시 천축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중도에서 병이 들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가서한(哥舒翰, ?~756)에게 의탁하여 양주(涼州, 감숙성 무위현)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역경에 종사하였다. 이때 참여했던 자가 구자(龜玆)의 이언(利言, 地戰濕羅)이었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장안에 돌아가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 국가 안온의 비법을 행하였으나, 난이 확대되자 천자는 촉(蜀)으로 몽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당 황실에 대한 충성은 변치 않았고, 그 결과 숙종과 대종의 특별한 존경과 우대를 얻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보호 아래 마침내 역경사상 삼대가(三大家) 중 하나로서 많은 경전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한편으로는 밀교 포교의 실천 활동에도 노력하여 곳곳에 도량을 건립하고 가지기도(加持祈禱)를 행하고 불상 및 사원의 조영을 장려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 중에는 함광(含光), 혜초(慧超), 혜과(惠果), 혜랑(慧朗), 원교(元皎), 각초(覺超)가 유명하다. 그는 중국 밀교에 대한 조직화에는 손을 미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광범위한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이는 당나라에서 국가 불교가 최후로 개화하였던 때이기도 했다고 하겠다.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엄영(嚴郢)의 불공삼장비(不空三藏碑), 불공영상찬(不空影像讚)과 비석(飛錫)이 찬한 불공삼장비(不空三藏碑), 그외 조천(趙遷)이 찬한 불공삼장행장(不空三藏行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 등이 있으나, 《정원속개원석교록(貞元續開元釋敎錄)》 권상 및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開元目錄)》 15, 16, 원조(圓照) 찬 《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 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공의 불교적 특색은 실천적인 면이 두드러져 국가적 색채를 발휘하는 점으로, 위국(爲國)·호국(護國)이 항상 고창(高唱)되었으며 영태 원년(765)에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慶)》 2권을 번역하였다. 또한 임종시에는 재앙을 없애고 병을 없애며 비를 청하는 등의 행법(行法)을 닦았다. 특히 문수보살 신앙을 강조하였는데, 그 동기도 국가의식과 결부되어 특히 보살이 지(智)와 용(勇)의 권화(權化)라는 점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불공 자신이 번역한 경전 중에도 문수 관계 경전과 의궤가 많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07쪽).
36
註) 193 인도 비하르주의 라즈기르(Rajgir) 북쪽 11km에 있는 바라자온(Baragaon)에 옛 터가 있다. 굽타 왕조의 쿠마라굽타(Kumaragupta)가 창건했다고 전하며 5-12세기에 걸쳐 인도 불교학의 중심지였다. 7~8세기에는 이곳의 사운(寺運)이 성대하여, 현장(玄獎)과 의정(義淨)이 유학하였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9 마갈타국(摩竭陀國) 하, 나란타승가람(那爛陀僧伽藍)조에 교학의 성대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의정의 《남해기귀전(南海奇歸傳)》 권4에는 “至如那爛陀寺 人衆殷繁 僧徒敎出五千 造次難爲翔集 寺有八院 房有三百 但可隨時當處自爲禮誦”이라고 보여 8대원에는 3백 승방이 있고 5천 이상의 승려가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사원은 가운데 뜰을 둘러싼 4면에 승방을 두고 정면 중앙의 입구와 대칭하여 깊이 불당을 설치하였다. 부근에는 거대한 탑과 연못이 있었다. 현장의 시대에는 유식학이 행해져 당시 학거장(學巨匠)이 많았으나, 그 후 이곳은 밀교의 중심지가 되어 선무외(善無畏)도 머물면서 달마굽타(Dharmagupta)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2세기 이슬람 군의 침입에 의해 폐사되었으나 1915년 이후 여러 해에 걸쳐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져 예전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Excavation at Nalanda, Annual report, A.S.I, 1915~1935)(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1쪽).
37
註) 194 부처님을 좌우에 모시고 있는 보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협사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약사여래의 협사이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석가모니불의 협사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3쪽).
38
註) 195 정륜왕은 사종(四種) 전륜왕(轉輪王)의 한 분으로서 수미산의 사대주를 통치하는 제왕이다. 유가회(瑜伽會)는 요가(Yoga) 모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3쪽).
39
註) 196 오정륜왕(五頂輪王), 여래오정(如來五頂) 또는 오불정(五佛頂)이라고도 한다. “頂”은 존승(尊勝), 최승(最勝)의 뜻이다. 여래가 가진 가장 뛰어난 덕성을 다섯 가지로 들어 이를 오불(五佛)이라고 표현한다. 오불의 역명(譯名)에 대해서는 이동이 있으나 여기에서 말한 오불이라는 것은 아마도 불공(不空)이 번역한 《보리장소설일자정륜왕경(菩提場所說一字頂輪王經)》 5권에 의거한 일자정륜왕(一字頂輪王), 백산개불정왕(白傘蓋佛頂王), 승불정왕(勝佛頂王), 고불정왕(高佛頂王), 광취불정왕(光聚佛頂王)일 것이다. 일자정륜왕은 금륜불정왕(金輪佛頂王)이라고도 한다. 또한 당의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일자불정륜왕경(一字佛頂輪王經)》 6권, 《오불정삼매대라니경(五佛頂三昧陀羅尼經)》 4권은 이 경의 다른 번역본으로서, 존명은 백산개, 승(勝), 최승(最勝), 광취, 제장(除障)의 오불정으로 번역하였다. 이 신앙은 성당(盛唐) 시대에 널리 펴져, 일찍이 감진(鑑眞)도 화오불정상(畵五佛頂像) 1포(鋪)를 가져왔었다. 불공의 번역에서는 오불의 화상을 설명하였는데 그 상의 모습은 금강계오불의 중존(中尊)이었던 비로사나불(대일여래)의 보관(寶冠)에 나타난 오불정륜왕으로, 금각사(金閣寺)의 오불정이라는 것도 아마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원인(圓仁)의 《금강정경소(金剛頂經疏)》 권2에 “지금 탑의 위에 홀로 오정륜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의 정왕신(頂王身)을 가지고 모든 무상오정(無上五頂)의 지(智)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탑의 위, 즉 일반 건물의 상층에 안치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불정(佛頂)에 하나의 협사(脇士) 보살을 배치한 것은, 기록이 간략하여 구체적이지 않지만, 만약 태장계만다라의 중대팔엽원(中臺八葉院)과 같이 원주를 돌려 배치했다면, 여래와 보살을 번갈아 두었던 것으로 일대일의 관계가 된다. 따라서 전면 2보살이 중존의 협사로서 특별히 삼존이 되었다는 해석도 성립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0쪽).
40
註) 197 진언밀교(眞言密敎)에서 모든 불보살의 《입당구법순례행기》(本誓)를 표시하는 수상(手相)이다. 도는 수행자가 손가락으로 맺는 인(印)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3쪽).
 
 
41
불보살의 깨달음이나 서원을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손 모양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39쪽).
 
 
42
註) 198 원문에 분벽(粉壁)이라고 하였는데 흰 벽이라는 뜻이다. 벽화를 그리기 전에 바탕을 흰색으로 칠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1쪽).
 
 

 
 

7월 2일 (음)

44
- 보현도량 장경각을 둘러보다
 
45
瞻禮已畢。下閣到普賢道場。見經藏閣。大藏經六千餘卷。惣是紺碧紙金銀字。白檀玉牙之軸。看願主題。云鄭道覺。長安人也。大曆十四年五月十四日。巡五臺。親見大聖一萬[A33]菩薩及金色世界。遂發心。寫金銀字大藏經六千卷(云々)。亦有畫脚迹千輻輪相。并書跡之根申云。貞觀年中。太宗皇帝送袈裟使到天竺。見阿育王古寺。石上有佛跡。長一尺八寸。闊六寸。打得佛迹來。今在京城。轉畫來此安置(云々)
 
 
46
우러러 예배하는 일을 마치고 각을 내려와 보현도량에 이르러 장경각註 199을 보았다. 대장경 註 200 6천여 권註 201은 모두 감벽지(紺碧紙)에 금과 은으로 글자를 쓰고註 202 백단(白檀)과 옥, 상아로 두루마리 축을 만들었다. 발원주의 원문(題文)을 보니 이르기를
 
47
“정도각(鄭道覺)은 장안 사람이다. 대력(大曆)註 203 14년 5월 14일에 오대산을 순례하고 대성과 일만보살 그리고 금색 세계를 직접 보고 마침내 발심하여 금은으로 대장경 6천권을 필사하였다.”
 
48
운운하였다. 또 부처 발바닥의 천폭륜상(千輻輪相)註 204을 그린 것과 아울러 그 불적의 유래를 적은 글이 있었다. 이르기를
 
49
“정관 연간에 태종황제가 가사(袈裟)를 보냈는데, 사신이 천축에 도착해 아육왕이 세운 옛 절을 보았더니 돌 위에 부처의 발자국이 있었다. 길이가 1척 8촌이고 넓이는 6촌이었다. 그는 부처의 발자국을 두들겨 본떠 얻어 왔는데 지금 장안에 있다. 그것을 다시 옮겨 그려 와서 이곳에 안치하였다.”
 
50
운운하였다.
 
 
51
註) 199 대장경을 넣어둔 광을 말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3쪽).
52
註) 200 불교 관계의 서적을 모은 것의 총칭. 이 총서의 주요한 것이 경(經)·율(律)·논(論)의 3장이므로 삼장(三藏)이라고도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4쪽).
53
註) 201 대장경을 또는 일체경(一切經)이라고 한다.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중심으로 불교의 전적을 모은 것이다. 양(梁)의 승우(僧祐)가 찬한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수록된 것은 2,162부, 4,328권이고, 수(隋) 비장방(費長房)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는 1,076부, 3,292권이다. 당 도선(道宣)의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은 800부, 2,361권이다. 명전(明佺)의 《대주간정중경목록(大周刊定衆經目錄)》은 860부, 3,929권,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은 1,076부, 5,048권이다. 원조(圓照)의 《정원신정석교목록(貞元新定釋敎目錄)》에는 1,258부, 5,090권이 있다. 또한 불공이 대종(代宗)으로부터 하사받은 《일체경일장(一切經一藏)》의 권수도 5,050권으로 전단향축(栴檀香軸)에 직물로 짠 비단갑으로 표장되었다(《표제집(表制集)》 권3 사은사경화진인일체정일장표(謝恩賜瓊華眞人一切經一藏表) 그 권수로 추측해 보면, 일본 나라시대의 일체경은 주로 《개원록》을 기준으로 서사했던 대장경이었다(《대일본고문서》 권5의 158쪽, 권7의 86쪽, 권15의 52·103쪽). 이들 경전은 조정이 공인하여 입장(入藏)한 경전의 총수였으나, 이 이외에도 소장(疏章)의 종류가 많았으므로 만약 이들을 더한다면 권수는 더욱 늘어난다. 따라서 당시 대장경 6천 권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1에는 무업(無業, 760~821)이 금각사에 있었던 8년을 정리하여 대장경을 읽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 경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1쪽).
54
註) 202 감지(紺紙)에 금은니(金銀泥)를 이용해 서사한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2쪽).
55
註) 203 당 대종(代宗) 연간의 연호(766~779)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4쪽).
56
註) 204 석가의 32상(相) 중 하나로, 그 손바닥 및 발바닥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법륜(法輪)을 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전법륜의 도(圖)가 그 중심이 된다. 석가의 발바닥에 천폭륜상(千輻輪相)이 있었다는 것은 별역(別譯) 《잡아함경(雜阿含經)》 제13 등 여러 불전에 보이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권8 마갈타국(摩竭陀國) 화씨성(華氏城)조에는 불적(佛跡)이 길이 1척 8촌, 너비 6촌으로 여기에 윤상(輪相)과 화문(花文), 어형(魚形)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이는, 정관 연간에 태종황제가 보낸 가사사(袈裟使)는 왕현책(王玄策)을 가리킨다. 현책은 융주(融州, 광서현 융현에 치소가 있음)의 황수현령(黃水縣令)이었고, 정관 15년(641)에는 당시 내조(來朝)한 마가타국왕의 사자가 귀환할 때 이를 반례(返禮)하였던 정사 이의표(李義表)의 부사였다. 이것이 제1차 입축(入竺)이었다(643~646). 무사히 귀환하자 그 다음해에는 자신이 정사가 되어 장사인(蔣師仁)을 부사로 하고 재차 입축하였다(647~648). 마침 마가타국에 내란이 일어나 현책이 입국을 못하자 그는 토번 및 이파라(泥婆羅)의 병사를 모아 반역을 일으킨 신하를 잡아 귀조(歸朝)하였다. 제3차 입축은 고종대에 있었다(658~660). 이 3차에 걸친 입축에 대해 저술한 것으로는 《중천축행기(中天竺行記)》 10권(圖 3권)이 있다. 이 책은 전하지 않으며, 또한 그의 위대한 공적에 대해서도 《구당서》 권3 본기, 권198 천축국전, 《책부원귀》 권973, 《법원주림》 등에 약간의 일문이 전하는 정도이다(馮承鉤, 「王玄策事輯」, 《淸華學報》 8-1)) 그가 화씨성의 부처 족적을 그림으로 그려 가지고 돌아왔다는 것은 《법원주림》 권29에 “雙足石 長尺八寸 廣六寸 輪相華文 十指各異 … 貞觀二十三年 有使圖寫迹來”라고 보인다. 현책이 부처의 족적을 전사했다는 것은 일본 약사사(藥師寺)의 불족적에도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법륜처(轉法輪處)에서 이를 보았다고 했으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아육왕이 세운 옛 절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육왕이 세운 옛 절이라는 적은 화씨성(華氏城)의 근처에 있던 정사이며, 《서역기》에도 아육왕이 여기에 도읍하여 불족적을 보호하였다고 서언(序言)을 기록하였다. 따라서 지명은 다르지만 동일한 곳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3쪽).
 
 

 
 

7월 2일 (음)

58
- 지념만다라도량의 존상을 예배하다
 
59
次開持念曼㭟羅道場。禮拜尊像。此則不空三藏弟子含光。為令李家昌運長遠。奉 勅持念。修法之道壇面三肘。以白檀汁。和泥塗作。每風吹時。香氣遠聞。金銅道具甚多。惣著壇上。次開普賢堂。禮普賢[A34]菩薩像。三馬竝立。背上安置一[A35]菩薩像。堂內外莊嚴。綵畫鏤刻。不可具言。七寶經凾。真珠繡佛。以線串真珠。繡著絹上。功迹奇妙。自餘諸物。不暇具錄。禮看畢。却到院斷中。
 
 
60
다음으로 지념만다라도량(持念曼多羅道場)註 205을 열고 존상에 예배하였다. 이것은 곧 불공삼장의 제자인 함광(含光)註 206이 이씨 가문註 207의 운이 번창하고 오랫동안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조칙을 받들어 지념수법을 행하던 도량이다. 단(壇)의 면은 3주(肘)註 208 정도이고 백단목의 진액을 진흙과 섞어 발라 만들었다. 매번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기가 멀리까지 풍긴다. 금동으로 만든 도구도 매우 많은데, 모두 단 위에 놓여 있다. 다음에 보현당을 열고 보현보살註 209상에게 예배했다. 세 마리의 코끼리註 210가 나란히 서 있고 등 위에 보살상 하나가 안치되었다. 당 안팎의 장엄함과 채색된 그림 그리고 새겨놓은 조각품들은 낱낱이 다 말할 수 없다. 칠보로 장식한 경함(經函)과 진주로 수놓은 불상은 진주를 실로 꿰어 비단에 수놓은 것으로 그 솜씨가 기묘하였다. 나머지 여러 물건들은 자세하게 기록할 여유가 없다. 두루 참배를 마치고 원註 211으로 되돌아와 단중하였다.
 
 
61
註) 205 지념(持念)은 밀교의 비법(秘法)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만다라를 안치할 단을 설치하고 가지기도(加持祈禱)를 행하는 도량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4쪽).
62
註) 206 불공(不空)의 고제(高弟)이다. 비석(飛錫)의 대광지삼장화상비문(大廣智三藏和尙碑文)에는 범승(梵僧) 함광(含光)이라고 하였다. 불공이 1차로 입축(入竺)했을 때(741) 그 일행이 되어 실론섬에서 보현아사리(普賢阿闍梨,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존현(尊賢)이라고 하였다)로부터 스승과 함께 5부(部)의 관정(灌頂)을 받았다. 제2차 귀도(歸途) 때, 감숙성 무위(武威)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불공에게 5부(불, 금강, 보, 연화 갈마)의 비법을 배웠다. 광덕 2년(764)에는 대흥선사(大興善寺)의 49대덕 중 하나로 나라를 위해 행도(行道)하였고, 영태 2년(766)에는 스승의 명을 받아 금각사의 수공덕사문(修功德沙門)으로 현지에 갔다. 그를 보수사대덕사문함광(保壽寺大德沙門含光)라고 한 점에서 미루어보면, 그의 승적은 장안의 좌가(左街) 익선방(翊善坊)의 보수사에 속했다고 생각된다. 대력 2년(767)에는 산중의 보통원 건립도 하고 전후주(前後主)로서 금각자의 조영에도 임했는데, 그곳을 마침 순례하던 천태의 6조 담연(湛然, 711-782)과 교섭하기도 하였다. 담연은 그의 저술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권10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適與江淮四十餘僧 往禮臺山 因見不空三藏門人含光奉勅在山修造” 또한 《표제집(表制集)》 권3에는 불공의 유언이 보이니, 그에 따르면 5부의 비법을 배워 팔정도(八正道)의 심오한 뜻에 도달한 제자들이 차례로 죽고 6명의 고제만이 남아 있는데 그 필두가 함광이었다. 그 후 금각사의 수공덕은 혜효(惠曉)가 담당하게 되었으니, 함광은 임무를 마치고 하산했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입적하였을 것이다(《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 《불공삼장행장(不空三藏行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7)(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4쪽).
63
註) 207 당의 종실을 말한다. 그 시조는 이희(李熙)이며 이하 이천사(李天賜)-이호(李虎)-이병(李昞)-이연(李淵, 고조)-이세민(李世民, 태종)으로 이어진다. 이때는 제8대 대종(代宗)대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5쪽).
64
註) 208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2에 “1궁(弓)을 나누면 4주(肘)가 되고 1주는 24지(指)로 한다”라고 하였고, 《조상양도경해(造像量度經解)》에도 12지를 걸(搩)이라 하고 걸의 2배가 주이며, 4주가 1심(尋)이라고 하였다. 고대 제국에서는 척도의 기준을 신체의 일부분으로 하였으니, 인도에서도 팔꿈치의 길이를 기본으로 삼았다. 1심을 약 6척으로 하면, 그 4분의 1에 해당한다. 일설에는 약 18인치라고 한다. 다만 불상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길이의 2배라고 하니, 36인치가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5쪽).
65
註) 209 대승경전(大乘經典)에서 보현은 문수와 함께 석가의 협사(脇士)로서 만들어지는데, 하나는 코끼리, 다른 하나는 사자를 타고 각각 이(理)와 지(智)를 표징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세 마리의 코끼리에 탔다고 했으므로, 현교(顯敎)의 불상이 아니라 밀교의 보현연명보살(普賢延命菩薩)이다. 보현연명보살(Vajaramoghasamayasattva)에 대해서는 불공이 번역한 《불설일체제여래심광명가지보현보살연명금강최승다라니경(佛說一切諸如來心光明加持普賢菩薩延命金剛最勝陀羅尼經)》에 “我此延命法 先須彩畵普賢菩薩 如滿月童子形 五佛頭冠 右手捺金剛杵 左手持召集金剛鈴契 鬘(糸+條)緩帶 坐千葉寶華 下有白象王 象有三頭 鼻卷獨股杵 各具六牙 其象四足 踏一大金剛輪 輪下五千群象 各負其輪 於菩薩身 放百寶光 光外盡白月輪 衆彩莊嚴 盡得其像 敬於淸淨處 建立道場”라고 그 도상이 설명되어 있다. 불공과 금각사의 관계에서 미루어 볼 때, 금각사의 보현연명보살상도 이와 같은 의궤(儀軌)에 의거했을 것이다(원문 중 “契”는 “絜”가 아닐까) 또한 원인(圓仁)이 당에 있을 때 보현연명상에 깊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에 《금강정승초유가보현보살염송법(金剛頂勝初瑜伽普賢菩薩念誦法)》 (불공 역) 1권, 《보현금강살타유가염송의궤(普賢金剛薩埵瑜伽念誦儀軌)》(불공 역) 1권 등이 보이고 또 보현연명상(普賢延命像) 1포(鋪) 3폭(幅)이라고 하는 백묘화를 가지고 온 것에서도 알 수 있다.《별존잡기(別尊雜記)》 제5 보살부(菩薩部)에 수록된 보현연명보살도 안에 들어 있는 보현연명만다라의 배서(背書)에 “前唐院也本私加之”라고 하였으므로, 이에 통해 가져온 화상이 만다라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5쪽).
66
註) 210 판본에 따라서 ‘상(像)’ 또는 ‘상(象)’으로 되어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4쪽).
67
註) 211 견고보살원(堅固菩薩院)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7쪽).
 
 

 
 

7월 2일 (음)

69
- 남대를 순례하다
 
70
齋後。共[A36]供主頭陀僧義圓等數人。同為一行。向南臺去。從金閣寺西。去寺五里。有清凉寺。今管南臺。此五臺山。都號清凉山。々中造寺。此寺㝡初。故號清凉寺。寺中有清凉石(云々)。被頭陁引。向南臺去。不得到彼寺。出金閣寺三門。尋嶺向南。上坂行廿里。到南臺西頭。向東。傍臺南岸。行四五里。到臺上。竝无樹木。臺東南側。有供養院。從院向北。上坂三百步許。方到臺頂。於三間堂內。安置文殊[A37]菩薩像。白玉石造。騎白玉師子。軟草稠茂。零凌香花。遍臺芳馥。臺躰西北及東南。長嶺高低。邐迤而漸遠。東西北面。峻涯臨于邃谷。在頂向北。遙見四臺。歷然在眼前。[A38]廻首遍觀五頂圓高。超然秀於眾峯之上。千峯百嶺。松杉鬱茂。參差間出五頂之下。深谿邃谷不見其底。幽泉澗水。但聞流響。異鳥級翔眾峰之上。羽翼凌高。而飛臺上頂者稀矣。五頂之地。五百里外。四面皆有高峰張列。闡擁五臺。而可千里。竝其鋒刃。而有重壚周遶之勢。峰谷重々。不知幾重。且從東入臺山。入山谷行。五百里。上至巉巖之頂。下到深谷之底。動經七日。方得到五臺山地。其餘三方四維。亦是遠涉山谷。方到五臺。誠知五臺山。乃萬峰之中心也。五百毒龍潛山。而吐納風雲。四時八節輟雷。雹頻降矣。天色急晴。遊人不見長明之光景。每晴明時。觀于五臺。是淺黃之色。臺上忽見一點雲起。俄爾之間。重雲遍山。入此山者。自然起得平等之心。山中設齋。不論僧俗男女大小。平等供養。不看其尊卑大小。於彼皆生文殊之想。
 
 
71
재를 마친 후 공양주인 두타승 의원 등 몇 명註 212과 함께 일행이 되어 남대를 향해 떠났다. 금각사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청량사(淸凉寺)註 213가 있다. 지금 남대를 관리한다. 이 오대산 모두를 청량산이라 불렀는데, 산중에 세운 절 가운데 이 절이 최초였으므로 청량사라 불렀다. 절 안에는 청량석(淸凉石)이 있다고 한다. 두타승의 인도를 받으며 남대를 향해 떠났으나 그 절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금각사의 산문을 나와 산등성이를 따라서 남쪽을 향해 비탈길을 올라 20리를 가서 남대 서쪽에 이르렀다. 동쪽을 향해 대의 남쪽 언덕을 끼고 4, 5리 가서 대의 위쪽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모두 수목이 없다. 대의 동남쪽에 공양원이 있고 공양원에서 북쪽을 향해 비탈길을 300보 정도 올라가서 비로소 대의 정상에 도착하였다. 3칸의 법당 안에는 문수보살상이 안치되었다. 흰 옥돌로 만든 옥석사자를 타고 있다. 정산에는 부드러운 풀이 빽빽하고 무성하게 자라고 영릉향(零凌香)註 214註 215은 대에 두루 좋은 향기를 피운다. 대의 서북쪽과 동남쪽은 긴 등성이가 높고 낮게 비스듬히 이어져 점차 멀어져갔다. 동쪽, 서쪽, 북쪽의 삼면은 험준한 낭떠러지가 깊은 계곡에 임했다.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 멀리 네 곳의 대를 바라보니 눈 앞에 있는 듯이 역력했다. 고개를 돌려 다섯 봉우리를 두루 보니註 216 둥글고 불쑥 솟아 초연하여 여러 봉우리 위로 빼어났다. 1천 개의 봉우리와 1백 개의 산마루에는 소나무 삼나무가 울창하게 무성하고 간간이 들쑥날쑥하였으며, 다섯 봉우리의 아래쪽에는 깊은 계곡과 깊숙한 골짜기가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깊은 샘과 산골의 물은 단지 흐르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기이한 새들이 여러 봉우리 위를 층계지어 날고 있으나, 날갯짓하여 높이 뚫고 올라가도 대의 정상 위를 날아오르는 새는 드물다. 다섯 봉우리의 땅 500리註 217 밖은 사면이 모두 높은 봉우리가 줄을 지어 펼쳐져 오대를 둘러싸고 있어 1천 리나 될만하다. 그 칼날 같은 봉우리가 줄지어 겹겹이 담장같이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봉우리와 계곡이 겹쳐 있어 몇 겹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또 동쪽에서 오대산에 들어가려면 산골짜기로 들어가 500리를 가야하는데, 위로는 높은 바위의 꼭대기에 이르고 아래로는 깊은 계곡의 바닥까지 이르면서 7일 동안 움직여야만 비로소 오대산 땅에 도달할 수 있다. 그 나머지 세 방향과 네 모퉁이註 218 방향에서 들어가는 길 또한 멀리 산과 계곡을 넘고 건너서 비로소 오대에 도달한다.註 219 참으로 오대산이 만봉(萬峰)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겠다. 5백 마리의 독룡(毒龍)註 220이 산에 숨어서 바람과 구름을 토해냈다 빨아들였다 하고 있다. 사시팔절(四時八節)註 221 천둥이 그치지 않고註 222 우박이 빈번하게 내린다. 하늘이 급작스레 맑아져도 유람하는 사람은 밝은 광경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다. 매번 날씨가 개어 맑을 때 오대를 보면 곧 빛깔은 엷은 황색이지만, 대 위에서 갑자기 한 점의 구름이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여러 겹의 구름이 산을 덮는다. 이 산에 들어오는 사람은 자연히 평등의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 산중에서 재를 마련하면 승려와 속인, 남자와 여자, 대인과 소인을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공양한다. 그들을 존귀하고 천한 사람, 어른과 아이로 보지 않고 그 곳에서는 모두 문수보살을 생각하게 된다.
 
 
72
註) 212 원문에 수인(數人)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수십 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뒤의 문장에 두타(頭陀) 등 수십 인이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7쪽).
73
註) 213 금각사의 서남방 계곡 안에 있다. 남대로 향하는 경우는 약간 옆길로 꺾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계곡을 청량곡(淸凉谷)이라고 하며, 사원은 그 계곡 깊숙이 위치해 있다. 《고청량전(古淸凉傳)》에는 북위 효문제가 창건했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산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 이옹(李邕)의 오대산청량사비(五臺山淸凉寺碑)(《전당문(全唐文)》 권264)에는 “在炎漢時 卜中箭嶺 用肇造我淸凉寺 在北齊時 以八州租稅 食我緇徒”라고 하여 한대에 중전령(《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7월 6일에 보이는 효문제의 사전(射箭))에 창건했다고 하였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 따르면 “依山立名 起居巖側 前通澗壑 上接雲霓”라고 보이니, 이에 따르면 청량산에 따라 청량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된다. 경내에는 청량석(淸凉石)이라는 거석(巨石)이 있는데, 일설에는 이것이 절 이름이 붙게 된 근거라고도 한다.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에는 산위에 청량사가 있고, 산아래에 오대현 청량부(淸凉府)가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수대에는 석 가복(嘉福)(?-604)이 이곳에 있었고, 또한 측천무후 시대에는 사원이 중수되어 규모가 커졌으며 일찍이 금각사의 발원자인 도의(道義)도 이곳에서 유석한 바 있다. 또한 현종 시대에 청백(淸白), 회충(懷忠)의 두 사문이 선원(禪院)을 건설하기도 하여 선종도 행해졌던 것 같다. 또한 영목공주는 정토상과 동종을 기진하였고, 특히 천보실재(天寶七載, 748)에는 양귀비의 형인 양고(楊鈷)가 《일체경》 5,048권 및 여러 논소류(論疏類) 2천권을 봉납하였다(청량사비). 그러므로 당시의 성황을 상상하고도 남겠다. 현재의 건축은 모두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고 그 규모는 크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7쪽).
74
註) 214 Coumarouna-odorata 두과(豆科)의 식물이다. 보통 영릉향(零凌香)이라고 쓰나, 훈초(薫草), 혜초(蕙草)라고도 한다. 호남성 영릉현(零凌縣) 지방에서 많이 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었다고 전하며, 《본초강목(本草綱目)》 초부(草部) 훈초(薫草)조에도 소송(蘇頌, 1020~1101)의 말을 인용하여 “零凌香 今湖南諸州皆有之 多生下濕地 葉如麻 兩兩相對 莖方 常以七月中旬開花 至香 古云薫草是也”라고 기록하였다. 선향(線香) 등의 원료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7쪽).
75
註) 215 콩과에 딸린 풀, 여름에 작은 나비 모양의 꽃이 핀다. 약재로 쓰인다. 혜초(蕙草)라고도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5쪽).
76
註) 216 원문은 관(觀)이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글자의 획이 불명확하다. 혹은 도(覩)라고도 볼 수 있을까. 또한 남대에서 북쪽을 보면 마치 선(扇)의 요(要)에 서있는 것 같이 서대, 중대, 북대, 동대의 순서로 연이어 우뚝 솟아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8쪽).
77
註) 217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 봉역리수(封域里數)조에도 “環基所至 五百餘里”라고 하였고,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도 “此山 磅礴數州 綿五百里 左麟恒岳 隱嶙參天 右控洪河 縈廻帶地”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憾通綠)》 권중에는 “其上方三百里 東南脚卽恒山也 西北脚卽天池也”라고 하였고, 법장(法藏)의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1에는 산의 둘레가 4백 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징관(澄觀)의 《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 권76에는 “其山 磅礴數州 七百餘里 左麟恒岳 秀出千峰 右接孟津 長流一帶”라고 기록하였다. 하나는 3백 리, 4백 리라고 하고 또 다른 것은 7백 여리라고 하여 일치되지 않는다. 오대 5백 리라는 말은 세인의 귀에 잘 들리므로 이른바 어세(語勢) 때문에 잘 쓰이는 말이 되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8쪽).
78
註) 218 원문에 사유(四維)라고 하였는데, “維”는 “隅”와 같은 말이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 고유(高誘)의 주에 “四角爲維”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8쪽).
79
註) 219 오대의 순례길은 예부터 동서남북의 4도가 열렸다. 동도는 원인(圓仁)이 참대로(參臺路)로, 하북지방에서는 대체로 이 길을 이용하였다. 부평현성(阜平縣城)을 지나 사하(沙河)를 거슬러 올라 용천관(龍泉關)을 넘고 장성령(長城嶺)으로 대행산맥(大行山脈)의 뒤쪽을 내려와 사호천(射虎川), 청수하(淸水河)을 따라 대회(臺懷)에 도달하는 길이다. 강희제, 건륭제 등의 행행(行幸)에도 이 길이 이용되었다. 남도는 오대현성에서 각도령(閣道嶺), 체양령(厂+虎陽嶺)을 넘어 장방촌(醬房村)을 지나 계곡을 거슬러 청량사에서 금각사, 죽립사에 도달한다. 혹은 장방에서 남대의 남록을 향하여 영경사(靈境寺)를 거쳐 금각사 또는 황토저(黃土咀)에 이르러 동도와 합한다. 운경사 길은 원인(圓仁)이 장안으로 가는 도중에 통과하였다. 장안(長安) 낙양(洛陽)에서는 태원을 거쳐 북상하는데, 이 길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서도는 번치현성(繁畤縣城) 또는 대현성(代縣城)에서 아구진(峨口鎭)을 향하여 호타하(滹沱河)의 지류인 아수(峨水)를 따라 내려가 암두촌(岩頭村), 대욕구(臺峪口)를 거쳐 사자와령(獅子窩嶺)에 나아가 서대의 기슭에서 죽림사에 도달하는 길이다. 명치(明治) 35년에 이토 다다히로[伊東忠太] 도 이 길을 통과하였다. 북도는 번치현성에서 호타하를 거슬러 남욕구(南峪口)의 부근에서 그 지류인 화엄수(華嚴水)의 계곡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야자창(野子廠), 태평구(太平溝) 등을 지나 동대와 북대의 중간에 있는 화엄령을 넘어 대회(臺懷)에 도달하는데, 일본의 성심(成尋)이 송(宋) 희령(熙寧) 5년(1072)에 이 길을 왕복하였다(《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8쪽).
80
註) 220 5월 21일의 주 및 북대정상의 용당(龍堂)조 참조. 5백은 불교 경전에 자주 나오는 숫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9쪽).
81
註) 221 팔절(八節)은 동지, 하지, 춘분, 추분,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9쪽).
82
註) 222 원문은 “輟雷”라고만 하였지만, 라이샤워는 그 앞에 “不”자가 빠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랐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9쪽).
 
 

 
 

7월 2일 (음)

84
- 오대산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85
昔者。大花嚴寺設大齋。凡俗男女。乞匃寒窮者。盡來受供。施主𢛡嫌云。遠涉山坂。到此設供意者。只為供養山中眾僧。然此塵俗乞索兒等。盡來受食。非我本意。若供養此等乞([□@考]乞東本無)匃。只令本處設齋。何用遠來到此山。僧勸令皆與飯食。於乞匃中。有一孕女懷姙。在座備受自分飯食訖。更索胎中姟子之分。施主罵之不與。其孕女再三云。我胎中兒。雖未產生。而亦是人數。何不與飯食。施主曰。儞愚癡也。肚裏兒雖是一數。而不出來索得飯食時。與誰喫乎。女人對曰。我肚裏兒不得飯。即我亦不合得喫。便起出食堂。纔出堂門。變作文殊師利。放光照曜。滿堂赫奕。皓玉之貌騎金毛師子。萬[A39]菩薩圍遶。騰空而去。一會之眾。數千之人。一時走出。茫([□@考]茫東本忙今從池本)然不覺倒地。舉聲懺謝。悲泣雨淚。一時稱唱大聖文殊師利。迄于聲竭喉涸。終不蒙[A40]廻頋。髣髴而不見矣。大會之眾。飡飯不味。各自發願從今已後。送供設齋。不論僧俗男女大小尊卑貧富。皆須平等供養。山中風法。因斯置平等之式。自餘靈化。頻現多瑞。天下共知。今見齋會於食堂內。丈夫一列。女人一列。或抱姟兒。兒亦得分。童子一列。沙彌一列。大僧一列。尼眾一列。皆在床上受供養。施主平等行食。有人分外多索。亦不恠之。隨多小。皆與之也。
 
 
86
옛날 대화엄사에서 재를 크게 마련하여 속세의 남녀, 거지, 빈궁한 사람들이 모두 와서 공양을 받았다. 시주가 싫어하며 말하기를
 
87
“멀리서 산과 고개를 넘어 이곳에 이르러 공양을 마련한 뜻은 다만 산중의 여러 승려를 공양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세속의 비렁뱅이들이 모두 와서 음식을 받아가니 이것은 나의 본뜻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무리들에게 공양할 것 같으면 다만 그들이 있는 그곳에서 재를 마련하게 하지, 어찌하여 멀리 이 산에까지 와서 하겠는가?”
 
88
라 하였다. 승려들이 권하여 모든 사람에게 음식을 주도록 하였다. 거지 가운데 아이를 밴 여인註 223이 있었다. 임신한 채로 자리에서 자기 몫의 음식을 빠짐없이 받은 다음 다시 뱃속의 아기 몫을 달라고 했다. 시주는 그에게 욕을 하며 주지 않았다. 그 임산부가 재삼 말하기를
 
89
“내 뱃속의 아이는 비록 태어나지 않았으나 역시 이 또한 사람 수에 들어간다. 어찌 음식을 주지 않는가?”
 
90
라 하였다. 시주가 말하기를
 
91
“너는 참으로 어리석고 못났구나. 뱃속의 아이가 비록 한 사람의 사람 수에 든다 할지라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요구해서 음식을 얻었을 때 누구에게 주어서 먹게 할 것인가?”
 
92
라 하였다. 여인이 대답하기를
 
93
“내 뱃속의 아이가 밥을 얻을 수 없다면 나 역시 먹을 수가 없다.”
 
94
라 하면서 곧 일어나 식당을 나갔다. 식당 문을 막 나서자 문수사리로 변하여 빛을 발산하고 비추어 식당 가득히 환하게 빛났다. 백옥 같은 용모로 금빛 털이 난 사자를 타고 일만보살에 둘러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한 자리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일시에 달려 나가 어리둥절하여 넋을 잃고 땅에 넘어지는 것도 모르고 일제히 소리치며 참회하고 사죄하며 슬피 울어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일시에 대성문수사리를 목이 말라 소리가 다할 때까지 불렀으나 끝내 되돌아보는 은총을 입지 못하고 아련하게 보이지 않았다. 모인 무리들은 밥을 먹어도 맛을 잃었고, 각자가 발원하여 지금 이후부터는 공양물을 보내 재를 베풀 때는 승려와 속인, 남자와 여자, 대인과 소인,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따지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공양하겠다고 했다.註 224
 
95
오대산의 풍습과 법식은 이로 인하여 평등한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밖에도 영험한 조화가 빈번히 나타나고 상서로운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천하가 모두 알게 되었다. 지금 재회(齋會)를 보니 식당 안에서 남자가 한 줄, 여자가 한 줄로 섰는데 혹 아이註 225를 안고 있으면 아이 몫도 받았다. 동자 한 줄, 사미 한 줄, 대승 한 줄, 비구니 한 줄은 모두 상 위에서 공양을 받았다. 시주는 평등하게 음식을 나누어준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몫 이외에 더 많이 요구하여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고 음식의 다소에 따라 모두 그것을 주었다.註 226
 
 
96
註) 223 문수보살이 가난한 여인으로 나타나는 화현전설은 《광청량전(廣淸凉傳)》권중에 보인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2쪽).
97
註) 224 문수가 가난한 여자로 화현한 전설은,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중에도 “보살화신위빈녀(菩薩化身爲貧女)”라는 제목으로 연기를 수록하였다. 옛날 가난한 여인이 영취사(靈鷲寺)의 재(齋)에 두 아들과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가서 승려에게 자신과 두 아들 및 개의 시식(施食)을 받았는데, 또 뱃속에 있는 아이의 음식을 구하여 승려가 화를 내자 이들이 문수보살, 선재동자(善財童子), 우전왕(于闐王)으로 변하였다. 이후 귀천의 대우를 동일하게 하고 귀부를 나누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평등한 방식”이 이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19쪽).
98
註) 225 원문에 해아(孩兒)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姟兒”라고 썼다. 다만 십조(十兆)의 경(經)에 십경(十經)을 해(姟)라고 하여 자의(字意)를 달리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99
註) 226 시물(施物)에 대해서는 율(律)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다시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은 금지한다고 하였으나, 일면 중국의 관습법에서는 태아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7, 121쪽).
 
 

 
 

7월 2일 (음)

101
- 오대산의 총구는 냄새가 없다
 
102
山中多寒。五六七月。遍五臺五百里內。奇異之花。開敷如錦。滿山遍谷香。々氣薰馥。每臺多有䓗韮生。昔者。孝文皇帝。住此五臺遊賞。文殊[A41]菩薩化為僧形。從皇帝乞一座具地。皇帝許之。其僧見許已。敷一座具。滿五百里地皇帝恠云。朕只許一座具地。此僧敷一座具。遍滿五臺大奇。朕不要共住此處。遂以䓗韮。散五臺上。便出山去。其僧在後。將零凌香子。散䓗韮之上令无臰氣。今見每臺。遍生䓗韮惣不聞臰氣。有零凌香滿臺生茂。香氣氛氳。相傳云。五臺五百里。敷一座具地矣。今在南臺上。共頭陁等數十人。同求大聖化現。及夜不見。遂歸院宿。初夜。臺([□@考]臺下東本更有臺字)東隔一谷。嶺上空中。見有聖燈一盞。眾人同見而禮拜。其燈光。初大如鉢許。後漸大如小屋。大眾至心。高聲唱大聖號。更有一盞燈。近谷現。亦初如笠。向後漸大。兩燈相去。遠望十丈許熖光熖然。直至半夜。沒而不現矣。
 
 
103
산중은 매우 춥지만 5, 6, 7월이면 오대 500리 내에 두루 기이한 꽃들이 비단처럼 피어 펼쳐져 온 산과 계곡에 향기를 풍긴다. 대(臺)마다 총구(葱韮)註 227가 많이 자라고 있다. 옛날 효문황제(孝文皇帝)註 228가 이 오대에 머물러 노닐며 즐긴 적이 있다. 문수보살께서 승려 모습으로 변신하여 황제에게 좌구(座具)註 229 하나 깔 만한 땅을 청하였더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그 승려가 허락을 받고 좌구 하나를 깔자 500리 땅에 가득 찼다. 황제가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104
“짐은 단지 좌구 하나를 깔 땅을 허락했는데 이 승려가 좌구 하나를 깔자 오대에 두루 가득 찼으니 매우 이상하다. 짐은 이곳에 함께 머물 필요가 없다.”
 
105
라 하였다. 드디어 총구(葱韮)를 오대 위에 뿌리고 곧 산을 떠났다. 그 승려는 뒤에 영릉향(零凌香)의 씨앗을 가지고 와서 총구(葱韮) 위에 뿌려 악취를 없애게 하였다. 지금 대마다 두루 자라는 총구(葱韮)는 모두 악취가 나지 않는다. 영릉향이 대에 가득 자라 무성하여 짙은 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말에
 
106
“오대 500리는 좌구 하나를 깐 땅이다.”
 
107
라 한다.註 230 지금 남대 위에서 두타승 등 수십 명과 함께 대성(大聖)의 화현을 빌고 있지만 밤이 되어서도 나타나지 않아, 마침내 공양원으로 돌아와 숙박했다. 초저녁註 231에 남대 동쪽으로 계곡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마루 위 하늘에 성등(聖燈) 하나註 232가 있는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들도 함께 보고 예배했다. 그 등의 불빛은 처음에는 크기가 바리만 하더니 뒤에 가서는 점점 커져서 작은 집채만 하였다. 대중들은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 높여 대성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 하나의 등이 계곡 근처에 나타났다. 이 또한 처음에는 삿갓만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커졌다. 두 등 사이의 거리는, 멀리서 바라보니 10장 정도 되어 보였다. 그 불빛은 활활 타는 불꽃처럼 빛났으나, 한밤중에 이르러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108
註) 227 파와 부추이다. “韮”는 “韭”의 속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109
註) 228 북위(北魏)의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굉(宏, 471-499)을 말한다. 제6대 제왕이다. 그는 선비의 탁발부를 중심으로 한 북방민족의 중국화 정책을 열심히 진행했던 천자로, 태화(太和) 17년(493)에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특히 불교를 숭신했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운강석굴(雲岡石窟)을 조영한 최후의 천자였고 하남 용문에 새로운 석굴을 조영했던 천자이기도 했다. 낙양을 불도(佛都)로 삼았던 것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자세하다. 오대산에서는 청량사, 불광사(佛光寺), 대부도사(大孚圖寺. 大孚靈鷲寺) 등을 그가 창건한 것으로 본다(《고청량전(古淸凉傳)》) 다만 역도현(酈道玄)이 저술한 《수경법(水經法)》에는 지금까지의 이와 같은 설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갑자기 효문제 창건을 사실로 간주할 수는 없으나 《광청량전(廣淸凉傳)》에서 이를 한대(漢代)의 창건이라고 한 것에 비해서는 개연성이 있다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110
註) 229 앉거나 누울 때 땅이나 상 위에 까는 것이다. 범어 Nisidana의 음역이다. 승려가 사용하는 18구(具)의 하나이다(《선림상기전(禪林象器箋)》 복장문(服章門))(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111
註) 230 이 전설은 거의 유사한 내용이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도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憨山者 在北臺東北 世傳後魏孝文帝 臺山避暑 大聖化作梵僧 從帝乞一坐具之地 修行住止 帝許之 梵僧仍張坐具 彌覆百餘里 帝知其神 乃馳騎而去 廻顧 斯山岌然隨後 帝叱曰 爾好憨山 何隨朕耶 因此而止 故以名焉”이라 하였다. 이 전설은 북대의 동북쪽에 있는 감산(憨山)의 명칭 기원과 관련된 인연설화이다. 바라문신화에서도 위태천(韋駄天)이 삼계(三界)에 세력을 넓히고 횡폭했던 아수라(阿修羅)를 응징하기 위해 소인(小人)으로 화하여 3보(步)의 땅을 청하자 이를 작은 땅이라고 생각하고 주었는데, 위태천은 본성을 드러내 1보로 대지(大地)를 넘고 2보로 천계(天界)를 지나 불과 지계(地界)만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혹은 인도에서 기원한 설화인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112
註) 231 원문에 초야(初夜)라고 하였다. 밤이 시작하는 때로, 초경(初更)이라고도 한다. 오후 8시 전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113
註) 232 《자각대사전(慈覺大師傳)》에는 성등을 보고 돌아온 후 문수각을 건립하겠다고 맹세한 지(旨)를 기록하였다. 또한 《일본국고승전요문초(日本國高僧傳要文抄)》 권1 및 《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에는 종예(宗叡, 809-885)도 또한 성등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속청량전(續淸凉傳)》에도 장상영(張商英, 1043-1121)이 스스로 체험했다고 하여 비슷한 것을 목도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는 또한 북대 부근에서도 금은(金銀)의 성등을 보았고, 불광사(佛光寺)에서도 이를 보았다고 하였다. 오색운(五色雲) 등이 낮에 보였던 것과 달리, 성등은 모두 야간에 나타났다. 다만 《송사(宋史)》 권491 일본전에는 주연(奝然)의 말로 “巖肩晴前 拜聖燈於五臺之上”이라고 하여 암산이 개기 전에 성등을 보았다고 하였으므로, 어떤 것은 주간에도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차아(嵯峨)의 청량사 석가상 안에서 나온 《입송순례기(入宋巡禮記)》에 따르면 옹희(雍熙) 원년 3월 23일 “遊南臺 夜至三更 時有聖燈二炬現 勒拳知恭 歸命不任 豁此日之神魂 副當年之心願”라고 하여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삼경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일찍이 日比野丈夫도 돈황의 오대산도에도 성등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敦煌五臺山圖について」, 《佛敎藝術》 34) 남대에서 있었던 성등의 출현은 원인(圓仁)만 체험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적으로 유명했던 것이어서, 돈황본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도 “夜夜飛飜來点聖燈 聖燈焰焰向前行 照曜雪山遍地明”이라고 읊었다. 이와 같은 성등은 신등(神燈)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출현은 유독 오대산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일본에서는 용등(龍燈), 서구에서는 이른바 “Saint Elmo”의 빛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제법 많은 장소에서 보인다고 설명된다(南方熊楠, 「南方隨筆」 龍燈につい)(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1쪽).
 
 

 
 

7월 3일 (음)

115
- 칠불교계원에서 정소의 곡시를 베끼다
 
116
三日齋後。共頭陀等。同為一行。頭陀云。相送直到汾州。在路與作主人。從臺頂向南。下行十七里許。於谷裏。有一院屋舍破落無人。名為名([□@考]名字恐衍)七佛教誡院。院額題云。八地超蘭若。日本僧靈仙曾居此處身亡。渤海僧貞素。哭靈仙上人詩。於板上書。釘在壁上寫之。如後。
 
117
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尚詩(并序)
118
渤海國僧貞素
119
起余者謂之應公矣。公仆而習之。隨師至浮桑。小而大之。介立見乎緇林。余亦身期降([□@考]降東本作綘)物。負笈來宗霸業。元和八年。窮秋之景。逆旅相逢。一言道合。論之以心。素至於周鹽小子非其可乎。居諸未幾。早向鴿原。鶺鴿之至。足痛乃心。此仙大師。是我應公之師父也。妙理先契示于元元。長慶([□@考]慶東本作廣)二年。入室五臺。每以身厭青瘀之器。不將心聽白猿之啼。長慶五年。日本大王遠賜百金。達至長安。小子轉領金書。送到鐵懃。仙大師領金訖。將一萬粒舍利。新經兩部。造勑五通等。屬附小子。請到日本。答謝國恩。小子便許。一諾之言豈憚萬里重波得遂鍾无外緣期乎遠大([□@考]此句有疑无池本作元)。臨[A42]廻之日。又附百金。以大和二年四月七日。却到靈境寺。求訪仙大師。已([□@考]已或亡誤)來日久。位([□@考]位或泣誤)我之血。崩我之痛。便泛四重溟渤。視死若歸。連五同行李。如食之頃者則應公之原交所致焉。吾信始而復終。願靈凡兮([□@考]兮或分字)表悉([□@考]悉或志字)。空留澗水嗚咽千秋之聲。仍以雲松惆悵萬里之行。四月蓂落如一([□@考]如一恐一如)首途望京之耳。不那([□@考]那即那字▆超傳多用此字)塵心淚自涓。情因法眼奄幽泉。明朝儻問滄波客的說遺鞋白足還。
120
大和二年四月十四日書
 
 
121
[7월] 3일, 재를 마친 후 두타승 註 233 등과 함께 일행이 되었다. 두타승이 말하기를
 
122
“분주(汾州)註 234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바래다주겠다. 길을 가는 동안에 더불어 접대인이 되겠다.”
 
123
라 하였다. 대의 정상에서 남쪽을 향해 내려가 17리 정도 가니 계곡에 원(院)이 하나 있었다. 건물은 부셔져 허물어졌고 사람도 없었다. 이름을 칠불교계원(七佛敎誡院)註 235이라 하는데, 원 현판의 제명에는 팔지초난야(八地超蘭若)註 236라 적혀 있다. 일본 승려 영선 註 237이 일찍이 이곳에 거주하다 죽었다. 발해 승려 정소(貞素)가 영선상인을 곡(哭)하는 시를 판자 위에 써서 벽 위에 못으로 박아 두었다. 그것을 필사하면 다음과 같다.
 
124
일본국 내공봉대덕(日本國內供奉大德) 영선화상(靈仙和尙)을 곡(哭)하는 시와 서(序)
 
125
발해국 승려 정소
 
126
나를 깨우쳐준 분은 응공(應公)註 238이라 말할 수 있다. 공은 몸을 낮추어註 239 불법을 배워 스승을 따라 부상(扶桑)註 240에 이르렀다. 어렸으나 이미 남달라 승려들註 241 사이에서 홀로 우뚝 빼어났다.註 242 나 또한 승려 되기를 기약하고 책 보따리를 매고 와서 패업(霸業)註 243을 우러렀다. 원화 8년 늦가을 즈음에 여사(旅舍)에서 만나 한마디 말로 도(道)가 서로 합치되어註 244 마음으로 그것을 논하였다. 내가 대성하게 된 것은註 245 소자(小子)에게 그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월註 246이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일찍이 할미새가 사는 들로 가게 되었다. 할미새가 살 장소를 잃어버리는 심상치 않은 상태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대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참으로 한스러울 뿐이다.註 247
 
127
이 영선대사는 나의 스승 응공의 사부로, 불법의 묘미를 먼저 깨달아 중생註 248에게 나타내보였다. 장경(長慶)註 249 2년註 250에 오대산에 입실하여 매번 육신註 251을 부정(不淨)한 것이라 꺼려하고註 252 마음으로는 흰 원숭이의 울음소리註 253를 듣지 않았다. 장경 5년에 일본 대왕註 254이 멀리서 백금을 하사하여 멀리 장안에 이르렀다. 소자는 금과 서신을 전해 받아 철륵註 255난야(鐵懃蘭若)註 256까지 가지고 가서 전달했다. 영선대사는 금을 받고서 1만 개의 사리, 새로 번역한 경전 2부, 조칙(造勅) 5통註 257 등을 가지고 와 소자에게 맡기며
 
128
“청하건대 일본에 가서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답하라.”
 
129
고 하였다. 소자는 곧 승낙하였다. 한번 승낙한 말이니 어찌 만 리의 거친 파도인들 두려워하겠는가? 마침내 모든 인연의 도움을 모아註 258 원대한 목적을 기약할 수 있었다.註 259 돌아오는 날註 260에 임박하여 또 금 100냥을 부쳤다. 태화(太和)註 261 2년 4월 7일에 영경사(靈境寺)에 돌아와 영선대사를 찾았으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고註 262 비통함이 산이 무너지는 듯했다. 문득 네 번이나 큰 바다註 263를 건넌 것註 264은 마치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고, 연이어 다섯 번이나 여행을 함께 한 것은 밥 먹는 시간처럼 짧게 여겨진다.註 265
 
130
이러한 인연은 곧 스승인 응공과의 오랜 교분의 소치였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의 약속을 믿어 끝내 응답하였다. 바라옵건대 영혼이시여.註 266 계곡물에 천추(千秋)註 267를 오열하는 소리를 머물게 하고 구름 위로 솟은 소나무처럼 긴 세월註 268 동안註 269 탄식한다면, 4월 명(蓂) 한 잎 떨어지고註 270 또 한 잎이 떨어질 때註 271 길을 떠나 경성을 바라보는 날註 272에 만물이 모름지기 다 공(空)이라는 것을 나타내십시오.
 
131
속세의 헛된 마음 어떻게 할 것인가. 눈물만이 스스로 흘러내린다. 인정은 법안(法眼)註 273으로 황천註 274을 감싸고 후일 만일 창파를 건너온 객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명백히 말하라. 짚신을 남겨두고 맨발로 돌아갔다고.註 275
 
132
태화 2년 4월 14일 쓰다.註 276
 
 
133
註) 233 분주두타승(汾州頭陀僧)의 오대 12사 및 여러 보통난야(普通蘭若)의 10년 공양주 의원(義圓)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9쪽).
134
註) 234 산서성 분양현(汾陽縣)에 치소가 있다. 개성 5년 8월 1일조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9쪽).
135
註) 235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남대의 영적(靈蹟)으로 칠불곡(七佛谷)이 있다고 하였고, 또한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 남대에는 이에 대해 “七佛洞 臺西南二十里 古有七梵僧 至此入寂不起 遂立七佛像”이라고 하였다. 이 칠불곡, 칠불동이 칠불교계원에 해당할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29쪽).
136
註) 236 팔지(八地)라는 것은 팔입지(八入地) 또는 제팔지(第八地)라고도 하며, 보살이 거주하는 십지(十地)의 하나이다. 십지에 대해서는 《華嚴經)》에 십지품(十地品)이 있는데, 독립하여 《십지경(十地經)》으로서 설명될 정도이며, 그 중 팔지를 부동지(不動地)라고 하였다. 보살도를 행하는 곳으로, 제팔지에서는 인(人)과 법(法)이 일치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즉 이상적인 수업(修業)의 장소이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 또는 아란야처(阿蘭若處)라고도 한다. 초(超)는 최고라는 뜻이다. 최고의 수업 장소라는 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0쪽).
137
註) 237 나라[奈良]의 흥복사(興福寺)에서 법상종을 배웠고, 연력 22년(803)에 견당 유학승이 되어(慈蘊 찬 《법상수뇌(法相隨腦)》 오서) 다음해 7월 당으로 건너갔다. 《송사》 권491 일본전에는 흥복사의 행하(行賀)와 함께 백벽천황 24년에 입당하여 오대산을 참배하고 불법을 배웠다고 하였다. 백벽은 광인천황인데 그 24년은 없으므로 환무제 연력 24년을 잘못 기록한 것이며, 또한 행하의 입당은 천평승보 4년(752)이었으므로 이 또한 혼란이 있었던 것이 명확하다. 원화 5년 장안 예천사에서 반야삼장의 《대승본성심지관경(大乘本性心地觀經)》 번역에 참여하여 필수(筆受) 및 역어(譯語)가 되었다(《석산사장동경역장열위(石山寺藏同經譯場列位)》). 이후 소식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전하는 것이 대략 유일하다. 이에 따르면 원화 15년(820)에는 오대산의 정점보통원(停点普通院)에 있었고, 또한 금각사 견고보살원(堅固菩薩院), 철근사(鐵懃寺) 칠불교계원(七佛敎戒院), 영경사 욕실원(浴室院) 등에 있었다. 차아천황은 그에게 금 100냥을 하사하여 발해의 승 정소에게 부탁해 그에게 보냈다. 정소의 「시병서(詩幷序)」 및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개성 5년 4월 28일조에는 “일본국 내공봉 (번경) 대덕”이라고 하였다. 내공봉은 불경을 번역한 공으로 당의 조정에서 내려준 것인지 아니면 일본에서 준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내공봉이라는 이름은 당에서는 숙종 지덕 원년(756)에 두어졌고(《대송승사략》 권하), 일본에서는 보귀 3년(772)에 시작되었다고 한다(《진첨애낭초(塵添壒囊抄)》 제15) 따라서 이 둘에 다 해당한다고 이해된다. 그 후대에 감사하여 영선은 사리 일만 립, 신역경 2부를 정소에게 부탁해 일본에 바쳤다. 이에 대해 순화천황은 또 백금을 하사하였는데, 정소가 다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영선은 이미 욕실원에서 독살당한 후였다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0쪽).
138
註) 238 그 전기는 명확하지 않다. 정소(貞素)의 스승이다. 나를 깨우친다는 것은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라고 하였다. 기(起)는 계발한다는 의미이고, 상(商)은 자하(子夏)의 이름이니, 이 전거에 따른 것일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9
註) 239 원문에 부(仆)라고 하였다. 라이샤워는 “幼”의 오사(誤寫)가 아닐까 하였으나 확증은 없다. “起”의 대구자로서 “仆”를 사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의(文意)를 번잡하게 하지 않는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3쪽).
140
註) 240 부상(浮桑, 榑桑)이라고도 하며, 본래는 신목(神木)의 이름이라고 한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흑치국의 아래에 탕곡(湯谷)이 있고, 탕곡의 위에 부상(扶桑)이 있는데 십일(十日)이 목욕하는 곳이다”라고 하였고, 《십주기(十洲記)》(한의 동방삭이 저술한 책이라고 전한다)에도 “부상은 바다에 있다. 나무의 높이가 수천 장(丈)이고 천여 아름인데 두 줄기의 뿌리가 같고 서로 의지해 기대있다. 해가 뜨는 곳이다”라고 보인다. 《남사(南史)》 권79 동이(東夷)조에는 “扶桑國者 齊永元元年 其國有沙門慧深 來至荊州 說云 扶桑在大漢國東二萬餘里”라고 하였다. 본래 도교적인 사유의 소산으로, 이를 구체화한 사상과 결부되어 한나라 때부터 동방 2만여 리의 땅에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나라라고 하였고, 전하여 일본의 별칭이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3쪽).
141
註) 241 치도·치문과 같은 말이다. 승려를 말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7쪽).
142
註) 242 원문에 “介立見緇林”이라고 하였다. 개립(介立)은 어떤 것의 사이에 서있다는 말이다. 치림(緇林)은 치도(緇徒), 치문(緇門), 치류(緇流)와 같은데, 승려의 의복, 전하여 승도를 말한다. 치(緇)는 검은 색, 검은 색의 승려옷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4쪽).
143
註) 243 라이샤워는 “業”을 “葉”의 잘못이라고 해석하고, “覇”는 “貝”의 음과 유사하다 하여 패엽(貝葉, 패다라)이라고 보았다(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261쪽). 패(覇)라는 것은 제후의 장(長)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전후의 문의로 미루어 보아 불교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패엽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차라리 논종(論宗)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논의(論議)를 하고자 하는 사람을 논사(論師, abidharmika)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을 논복(論伏)시키지 않으면 논의를 그치지 않는 것을 형용하여 제패(制覇)라고 하는 점에서 연상하여 패엽이라고 한 것은 아닐까. 또는 특히 인명(因明) 등을 공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지도 모르겠다(《입당구법순례행기》 개성 4년 11월 22일조 주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3쪽).
144
註) 244 원문에 “一言道合”이라고 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13 원소(圓紹)전에도 “同氣相求 一言道合”이라는 말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4쪽).
145
註) 245 원문에 “素至於周恤”이라고 하였다. 주휼은 널리 생각한다는 뜻이다. 동학동지(同學同志)로 합일되어 의기가 완전히 일치된다는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
註) 246 원문에 거제(居諸)라고 하였다. 《시경》 북풍(北風), 일월(日月)에 “日居月諸”라고 하였는데, 그 뒤 광음(光陰, 세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4쪽).
147
註) 247 원문에 영원(鴒原)이라고 하였다.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 상서(常棲)편에 “脊令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이라고 한 것이 전거이다. 즉 물가에서 살 수 있는 할미새가 고원(高原)에 올라가 거처를 잃어버리니, 편안한 때에는 있을만하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서로 도와주지 못하고 다만 길게 탄식했다는 일을 읊은 것이다. 정의(情誼)가 그침이 없으나 사정 때문에 이별하는 것을 통한하는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4쪽).
148
註) 248 원문에 원원(元元)이라고 하였다. 인민, 백성을 말한다. 원원지민(元元之民), 원원만민(元元萬民)이라고도 한다. 《용재오필(容齋五筆)》 권9에 양한용인인원원자(兩漢用人人元元字)조가 있다. 또한 중생과도 같은 의미이다. 《신번호국인왕반야경(新飜護國仁王般若經)》 서(序)에 “皇矣至覺 子于元元”이라 하였고, 《성령집(性靈集)》 권1에도 “哀哀 末世諸元元”이라고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4쪽).
149
註) 249 당 목종(穆宗) 연간의 연호(821~825)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9쪽).
150
註) 250 822년이다. 4월 28일조에 따르면 영선(靈仙)은 원화 15년(820) 9월 15일에 참대(參臺)하였다고 한다. 이는 두 번째 참배였을까. 아니면 정소(貞素)의 잘못일 수도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5쪽).
151
註) 251 청어지기(靑瘀之器)의 청어는 육체가 부패하기 시작할 때 파란색으로 변해가는 모양을 말하며 육신은 그러한 오폐·어혈 등이 담겨 있는 기물로 본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8쪽).
152
註) 252 원문에 청어지기(靑瘀之器)라고 하였다. 어(瘀)는 병이 들었다는 말이다. 육신이 부패하는 단계를 청어(靑瘀)라고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5쪽).
153
註) 253 원문에 백원지제(白猿之啼)라고 하였다. 백원(白猿)은 청어(靑瘀)와 대구되는 말이다. 원숭이의 울음소리는 의마심원(意馬心猿)과 같은 말로, 마음이 동요하여 세속에 곧바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울음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것은 영선이 속세의 일에 초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5쪽).
154
註) 254 장경 5년(825)은 곧 천장(天長) 2년이다. 백금을 하사했다는 문장으로 보면, 아마 발해 사절에게 주어 보냈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4 발해조에 따르면 홍인(弘仁) 12년(822), 14년(824), 천장 2년(825) 발해가 일본에 입공(入貢)한 기사가 보이는데, 조정이 백금을 의탁한 것은 홍인 12년 혹은 14년의 발해 입공사였을 개연성이 있다. 사절 일행은 무사히 발해로 돌아갔고, 그 백금은 발해에서 입당사를 파견할 때 가져다 주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있는 입당사를 찾아보면, 경종 즉위 원년 즉 장경 5년 2월조에 발해가 숙위(宿衛) 대총예(大聰叡) 등 50인을 보내 입조했던 일을 들 수 있다. 발해는 당에 연이어 사신을 보냈는데, 그 전후로는 장경 4년(824), 보력(寶歷) 원년(825) 등이 있다(《구당서》 권199하 발해말갈전, 《책부원귀》 권972 조공5) 만약 이 일을 보력 원년의 것으로 본다면, 실은 정소가 그 해에 일본에 들어왔던 것으로, 지나치게 기간이 촉박하다.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4 천장 3년 5월 신사조에는 순화천황(淳和天皇)이 발해의 대사 고승조(高承祖)가 영선에게서 받은 표물을 전해 주니, 매우 기뻐하고 위로해 주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불가사의하게도 승려 정소에 대해서 조행(操行)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고승조가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영선의 표물이라는 것은 정소가 시병서문(詩並序文)에서 일만 립의 사리, 신경(新經) 2부, 조칙(造勅) 5통이라고 하였다. 새삼스럽게 이것들을 가지고 일본에 갔던 정소에 대해서 “操行所缺者”라고 한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으니, 아마도 본래 “操行無所缺者”라고 해야 할 것인데 무(無) 또는 불(不) 등 부정 의미 글자가 탈락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아마도 정소의 절조(節操)를 칭찬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인용된 정소의 서(序)에 “영선대사는 금을 받고서 1만 개의 사리, 새로 번역한 경전 2부, 조칙(造勅) 5통 등을 가지고 와 소자에게 맡기며 ‘청하건대 일본에 가서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답하라’고 하였다. 소자는 곧 승낙하였다. 한 번 승낙한 말이니 어찌 만 리의 거친 파도인들 두려워하겠는가? 마침내 모든 인연의 도움을 모아 원대한 목적을 기약할 수 있었다”라는 내용과 전연 합치되지 않게 된다. 또한 《유취국사》 권18 상사(賞賜)조에는 영선(靈船)의 제매(弟妹)에게 아파국(阿波國)의 벼 1천 속을 내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영선(靈船)은 영선(靈仙)과 같은 사람으로, 그러한 상을 내린 것도 조정에 표물을 바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찰해 보면, 여기의 일본대왕은 차아천황(嵯峨天皇)을 말하며, 나중에 백금을 하사한 왕은 순화천황이었던 것으로, 대략 잘못은 아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5쪽).
155
註) 255 암자의 이름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9쪽).
156
註) 256 원문에 철륵(鐵懃)이라고 하였는데 철륵난야(鐵懃蘭若)와 같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 따르면 서대 소속 사원의 하나였으며, 12고사(古寺) 중에 들어간다. “東峩谷南 有鐵勤寺 向陽寺 日照寺 塁石寺 並在谷中 林木高深 聯線不絶 佛廣寺僧 多來棲止”라고 보여, 불광사의 말사였다고 해석된다. 《청량산지(淸凉山志)》에는 서대의 서남 62리에 있으며, 당의 혜기대사(慧淇大師)가 창건했다고 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불광사의 서북 수 킬로미터 지점에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6쪽).
157
註) 257 또는 조칙(造勅) 5도(道)라고도 한다. 《각선초(覺禪抄)》 사리사(舍利事)조에는 기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長慶五年 日本大士 遠賜百金 遠至長安 小子轉領金書 送到鐵懃 仙大師領金 說將一萬粒舍利 新經兩部 告勅貞遮等 囑淨弟子 請至日本 答謝國恩” 이 글 중에는 잘못된 글자도 있으니, “大士”, “貞遮” 등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또한 “造勅”은 “告勅”이라고 하였다. 혹은 승려의 고신위기(告身位記)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大士”는 “大王”의 잘못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7쪽).
158
註) 258 원문에 “無外緣”이라고 하였다. 모든 불연(佛緣)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7쪽).
159
註) 259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9쪽).
160
註) 260 앞의 “일본대왕” 주에 따르면 천장(天長) 3년(826) 5월 이후였다. 이때 정소(貞素)는 백금을 전교(轉交)하기 위해 다시 참대(參臺)하였다. 뒤에 “연이어 다섯 번이나 여행을 함께한 것은 밥 먹는 시간처럼 짧게 여겨진다”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같은 해(826) 일본에서 발해로 돌아가 다시 오대로 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태화 2년(828)까지 그 사이 대략 2년을 요했던 것이 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7쪽).
161
註) 261 당(唐) 문종(文宗)의 연간의 연호(827~835)이다. 어떤 판본엔 ‘大和’로 되어 있으나 오기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09쪽).
162
註) 262 원문에 “泣我之血”이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상에 “高子皐之執 親之喪也 泣血三年 未嘗見齒”라고 하여, 친상(親喪)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였는데, 울 때 소리없이 피를 흘리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고대 북방민족에서 이면(剺面)이라 하여 얼굴을 잘라 죽은 사람에 대한 순장을 대신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읍혈이라는 것이 이와 관련되어 쓰였던 형용사라는 설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7쪽).
163
註) 263 명발(溟渤)은 대해의 별칭이다. 사중(四重)은 많은 바다의 뜻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8쪽).
164
註) 264 원문에 명발(溟渤)이라고 하였다.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18에, 명발은 대해(大海)의 별명이라고 하였다. 네 번은 원문에 사중(四重)이라고 하였는데, 많은 바다라는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65
註) 265 원문은 “連五同行李”라고 하였는데, 여러 간본이 모두 “連五”라고 썼다. 이는 연오(連伍)와 음이 통하여 조를 짠다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五”는 “互”와 글자 모양이 유사하므로 혹은 “互”자를 써서 연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연이어 여행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식경(食頃)은 밥을 먹는 짧은 시간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66
註) 266 원문에 영궤(靈几)라고 하였다. 궤는 책상이다. 영혼이 깃드는 곳이라고 하여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한 것이다. 영혼(靈魂)과 같은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7
註) 267 천년이라는 말과 같으며, 수명(壽命)의 가칭(嘉稱)이다. 탄생 등을 축하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천고(千古)와 같이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라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68
註) 268 원문에 “만리지행(萬里之行)”이라고 하였다. 천추지성(千秋之聲)의 대구이다. 죽어서 영원의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69
註) 269 피안에 이르는 죽음의 여행을 뜻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9쪽).
170
註) 270 명락(蓂落)의 명은 명협(蓂莢)을 가리킨다. 상서로운 풀로 음력 초하룻날부터 매일 한 잎씩 나서 15잎이 자란다. 그리고 16일 때부터 매일 한 잎씩 져서 그믐이 되어 끝난다고 전한다. 그래서 명협을 보고 일력을 안다고 한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49쪽).
171
註) 271 원문에 명락여일(蓂落如一)이라고 하였다. 명(蓂)은 명협(蓂莢)의 줄임말이다. 혹은 역협(曆莢)이라고 하는데, 상서로운 징조를 의미하는 풀 이름이다. 월초에 1협(一莢)이 나고 이후 하루에 1협씩 나서 15일에 15협이 된다. 16일 이후 1협씩 떨어져서 월말이 되면 죽는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명락이라는 것은 16일이 되며 여기에서 하나가 더 떨어진다는 것은 곧 17일을 말한다. 그러나 정소(貞素)가 이 「시병서(詩並序)」를 지은 것은 뒤의 문장에서 4월 14일이라고 하였으므로, 17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단, 정소가 생각을 잘못 하여 이러한 말을 썼는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72
註) 272 원문에 “首途望京之耳”라고 하였다. 초본에는 마지막 글자를 “耳”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日”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본래는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여 경성을 바라보던 날’이라고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므로, 감히 이렇게 해석한다. “之耳”의 두 글자를 글자 그대로 ‘갈 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조금 궁색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8쪽).
173
註) 273 불교에서 말하는 오안(五眼)의 하나. 즉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9쪽).
174
註) 274 원문에 유천(幽泉)이라고 하였는데 황천(黃泉)과 같은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9쪽).
175
註) 275 원문에 “的說遺鞋白足還”이라고 하였다. 백족(白足)은 소족(素足)이라고도 하는데 맨발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석가의 별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소가 연상하였던 것은 다만 달마(達磨)의 고사였다. 《보림전(寶林傳)》 권8에 “達磨 … 後魏第八主孝明帝大和十九年而入涅槃也 葬熊耳山吳坂 至三年後 時有魏使宋雲 西嶺爲使却廻 逢見大師手携隻履 語宋雲曰 汝國天子 早已崩矣 宋雲問和尙曰 何處去 達磨曰 吾歸西天 是時宋雲却到本國 國王果已崩也 遂聞奏後魏第九主孝莊帝 帝乃命使 令發此塔開棺而看 全身已還西天 唯 見一隻履在 遂奉詔取出 於東京少林寺供養 自開元十五年丁卯之歲 被竊將 五臺山華嚴寺中供養”이라 하여 관련 내용이 있으며, 비슷한 전설이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鈔)》 권3하 등 당대의 문헌 및 후대의 《벽암록(碧巖錄)》 권1,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 등에도 보인다. 이와 같이 짚신을 남겨두고 또는 짚신을 가지고 맨발로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달마의 전설은 중당(中唐)시대에 널리 유행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오대산 화엄사에 남겨진 짚신이 있었다고 한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보이는 화엄사 대혜화상(大鞋和尙)의 것도 혹은 이 짚신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 전설은 최징(最澄)의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証佛法相承血脈譜)》, 광정(光定)의 《전술일심계문(傳述一心戒文)》, 《금석물어(今昔物語)》에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원인(圓仁)에 대해서도 비슷한 전설이 생겨, 영해(榮海)의 《진언법(眞言法)》 권7에는 “어떤 기록에 이르길, 입멸할 때에 홀연히 간 곳을 알 수 없어 문제(門弟)들이 서로 찾았는데, 삽혜(揷鞋)가 여의산(如意山)의 계곡을 통과하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대일본불교전서》 106 수록)라고 부기하였다. 또한 달마는 중국에서 5번 독살(毒殺)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보림전》에 있는 《전등록(傳燈錄)》에도 보이는데, 달마가 6번째 독살로 드디어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 전설은 영선(靈仙)의 독사(毒死)와도 유사하므로, 정소가 특별히 이 고사에 기대어 영시를 썼을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39쪽).
176
註) 276 정소(貞素)가 다시 오대산을 올랐을 때 영선은 입적하였다. 그가 가져왔던 백금(百金)은 어떻게 되었을까. 승화(承和) 9년(842) 발해의 입공사였던 하복연(賀福延)이 일본에 가져온 발해국왕 대이진(大彛震)의 상표문에 그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전교(轉交)하지 못하게 된 백금은 당에서 귀국하던 발해의 사절이 가지고 돌아왔는데, 도리포(途里浦)에 도착했을 때 파도가 높아 침몰되었다고 한다. 도리는 《신당서(新唐書)》 권43하 지리지에 보이는데, 요동반도의 마석산(馬石山) 동쪽 도리진(都里鎭)에 있었으니, 지금의 여순 부근이다. 그 지명은 일찍이 발견된 정호(井戶)의 각문(刻文)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주문에 대해 일본 조정에서도 발해왕에게 보내는 글 중에 “前年聘唐使人却廻 詳知苾蒭靈仙化去 今省別狀 事自合符 亦悉付遣黃金 陷沒緣浦 雖人逝賚失 元圖不諧 而思夫轉送之勞 遙感應接之義”라고 하여 그 부득이함을 양해하는 것으로 끝맺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0쪽).
 
 

 
 

7월 3일 (음)

178
- 영경사를 둘러보다
 
179
於小窟中。安置七佛像當窟戶。有一堂。堂南邊。有一小菴室。於堂下有二屋。竝破落。庭地芒蕪而无人。昔於此窟前。七佛現矣。南行三里許。到大曆靈境寺。向老宿問靈仙三藏亡處。乃云。靈仙三藏。先曾多在䥫懃蘭若。及七佛教誡院。後來此寺。住浴室院。被人藥𭣦中毒而亡過。弟子等埋殯。未知何處(云々)。於寺三門兩邊。有聖金剛[A43]菩薩像。昔者。於太原幽鄭等三([□@考]三下池本有州字)節度府。皆現金剛身。自云。我是樓至佛。身作神。護佛法。埋在地中。積年成塵。再出現。今在臺山靈境寺三門內。三州節度使驚恠。具錄相貌。各遣使令訪。有二金剛。在寺門左右。其形貌躰氣。一似本州所現體色同。其使却到本道報之。遂三州發使來。特修舊像。多有靈驗。具如碑文。寫之在別。近三門側𠃵角。有山榆樹。根底空豁成窟。名曰聖鍾窟。々中時々發鐘響。々發之時。山峯振動。相傳云。斯是大聖文殊所化也。相傳呼為聖鍾谷。寺之正東。去寺十來里。有高峯。號為寶石山。窟中多有小石。每石現圓光攝身光五色雲。此亦聖人化現所致也。
 
 
180
작은 굴 안에 7개의 불상이 안치되었고, 굴의 문에 해당하는 곳에 당이 하나 있으며 당의 남쪽 가에는 작은 암실(菴室) 하나가 있다. 당 아래에는 집 두 채가 있는데, 모두 부서져 허물어졌고 뜰은 황폐하여 잡초만이 무성하고 사람은 없었다. 옛날 이 굴 앞에 칠불(七佛)이 나타났다고 한다. 남쪽으로 3리 정도 가서 대력영경사(大曆靈境寺)註 277에 도착했다. 노승에게 영선삼장이 돌아가신 곳을 물었더니 말하기를
 
181
“영선삼장은 일찍이 철륵난야와 칠불교계원에 많이 계셨다. 후에 이 절로 와서 욕실원(浴室院)註 278에 거주하였다. 어떤 사람이 독약을 먹여 중독되어 돌아가셨다. 제자 등이 매장하였으나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한다.”
 
182
운운하였다. 절의 삼문 서쪽 가에 성금강보살상(聖金剛菩薩像)註 279이 있다.
 
183
옛날 태원(太原), 유주(幽州), 정주(鄭州) 등 세 절도부註 280에 모두 금강신(金剛身)註 281이 나타나 스스로 이르기를
 
184
“나는 누지불(樓至佛)註 282이다. 몸은 신(神)이 되어 불법을 지키는데, 땅 속에 묻혀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티끌이 되었다. 다시 나타나 지금은 오대산 영경사 삼문 안에 있다.”
 
185
고 했다. 세 주의 절도사는 놀라 이상히 여겨 그 용모를 상세히 적어 각기 사자를 보내 찾아보게 했다. 그런데 두 금강상이 절 문의 좌우에 있었는데, 그 형상과 모양 그리고 체기(體氣)는 해당 주에 나타났던 모습과 꼭 같이 닮았다. 그 사자는 본 도(道)에 돌아가 이를 보고하였다. 마침내 3주는 사자를 보내와서 특별히 옛날 상을 수리하였더니 많은 영험이 있었다. 상세한 것은 비문註 283과 같은데, 그것을 별지에 베껴 두었다. 삼문註 284 옆 서북쪽註 285 모퉁이 근처에 느릅나무註 286가 있다. 뿌리 부분은 텅 비어 굴 모양이 되었는데, 이름하여 성종굴(聖鐘窟)註 287이라 한다. 굴 안에서 때때로 종소리가 난다. 그 종소리가 울릴 때면 산봉우리가 진동한다. 전해오는 말에, 이곳은 대성문수보살이 화현(化現)한 곳이라 한다. 그래서 서로 전하며 부르기를 성종곡(聖鐘谷)이라 하였다. 절의 정동쪽으로 절에서 10리를 가면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부르기를 보석산(寶石山)이라 한다. 굴 안에 작은 돌이 많이 있는데, 돌마다 원광(圓光),註 288 섭신광(攝身光),註 289 오색구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 역시 성인의 화현에 의한 것이다.
 
 
186
註) 277 《고청량전(古淸凉傳)》 권상에 “南臺靈境寂寞 故人罕經焉”이라고 하여, 초당(初唐) 시대에는 남대에 아직 창건되지 않았다는 말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영경이라는 이름을 제멋대로 썼던 것일 수도 있다.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남대의 금익삼사(今益三寺) 중 하나로 영경사가 있다.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 따르면 이 절은 남대를 지나 20리에 있는데, 명나라 성화 연간에 석 청선(淸善)이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물론 중건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대력(大曆)이라는 이름을 관칭하고 있는 점에서 볼 때, 그 창건은 적어도 대종(代宗)시대에 있었거나 아니면 그 때 대규모 조영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 자신도 소화(昭和) 15년 여름에 방문했었다. 돈황본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는 “南臺南級靈應寺 靈應寺裏聖金剛 一萬菩薩聲讚歎 聖鍾不擊自然鳴”이라고 보이는데, 여기의 영응사는 영경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니면 속칭 영응사라고 불렀던 것일까(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1쪽).
187
註) 278 목욕실(浴場)을 말한다. 보통은 삼문(三門)의 오른쪽에 짓는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0쪽).
188
註) 279 Vajra-sattva. 금강살타(金剛薩唾), 비밀왕(秘密王), 금강수(金剛手), 지금강(持金剛) 등이라고도 한다. 집금강(執金剛)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2쪽).
189
註) 280 태원부(太原府)는 병주(幷州)의 치소였다. 그 성을 진양성(晋陽城)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태원현성 밖에 그 옛 터가 있다(7월 1일조 주 참조) 산서(山西) 지방의 정치적, 군사적 중요 근거지였으며, 당대에는 북방 민족 돌궐의 침입을 방비하는 곳이었다. 《신당서》 권65 방진표(方鎭表)에 따르면 경운 2년(711)에 지절화융대무등제군주절도사(持節和戎大武等諸軍州節度使)가 두어졌고, 그 관할 지역도 넓게는 안문(雁門) 이북에 미쳤다. 개원 8년(720)에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동 11년에 태원부이북제군주절도사(太原府以北諸軍州節度使), 동 18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개칭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천보 초년(742)에는 천하의 10절도사 중 하나로서 55,000명의 군사가 상비되었으며, 흥원 원년(784) 일시 하동을 보령군으로 고쳤던 적이 있었는데, 이는 대략 3~4년간으로 이후 옛 이름으로 복구되었다. 유주부(幽州府)는 현재 북경에 있었다. 그 성은 오늘날 외성의 서부 및 그 교외를 둘러싸서 건축되었는데, 약간의 유구가 남아 있다. 이곳의 절도사는 해(奚)와 거란 등을 방어할 목적에서, 하동절도사와 같이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개원 2년(714)에 유주절도제주군관내경략진수대사(幽州節度諸州軍管內經略鎭守大使)가 두어진 것을 시작으로, 동 20년에는 유주절도사겸하북채방처치사(幽州節度使兼河北採訪處置使)라 하였고, 천보 원년(742)에는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개칭되었다. 이 무렵 군사수는 91,400인이라고 하는데, 그 병력은 10절도사 중 가장 많은 것이었다. 안사의 난 때 반란군의 근거지가 되어, 한때 모두 당의 통제 밖에 있었으나 보응 원년(762) 유주절도사라는 옛 이름으로 복구되었고, 군명을 노용군(盧龍軍)이라고 하여 노용군절도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정주(鄭州)는 하남성 정현(지금의 성치(省治))에 치소를 두었으며, 오늘날의 성은 당 무덕 4년(622) 조영된 것으로 전해진다(《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149 개봉부) 절도사도 같은 곳에 있었다. 그러나 절도사가 두어졌던 것은 단기간으로, 건원 원년(758) 8월에 안경서(安慶緖)를 토벌하기 위해 9절도사의 하나로 이광침(李廣琛)이 정채정도사(鄭蔡節度使)로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 4월에 등주자사 노경(魯炅)이 정주자사가 되어 진정영호절도사(陳鄭潁毫節度使)를 겸하였다. 그의 재임은 2개월간으로, 동년 6월에는 팽원요(彭元曜)가 정주자사에 임명되었고 또한 진정신광수등주절도사(陳鄭申光壽等州節度使)라고 하였다. 동년 9월에는 이포진(李抱眞)이 정주자사겸진정영호사주절도사(鄭州刺史兼陳鄭潁毫四州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그 달 말에 반란군 사사명에게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상원 2년(761) 8월에 이약유(李若幽, 國貞)가 진정등절도사를 요령하도록 하였다. 대종 보응 원년(762) 10월에 겨우 회복할 수 있게 되자 이에 동반하여 이포옥(李抱玉)이 진정택로절도사(陳鄭澤潞節度使)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은 절도부의 소재가 정주에 있지 않았다. 영태 원년(765)에 토번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이포옥이 봉상농우절도사(鳳翔隴右節度使)를 겸하게 되자 진정절도사라는 이름은 역사상 소멸되었다(《신당서》 방진표 및 《구당서》 숙종, 대종본기) 그러므로 대력 연간에 창건되었다고 여겨지는 영경사의 산문에 안치되었던 인왕상의 전설에서 정주부(절도사)가 언급되는 것은 시대적으로 모순이 된다. 이러한 절도사 전설이 금각사의 조영 당시 제주(諸州) 절도사로부터 기진(寄進)을 받았던 사실과 관련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새롭게 발생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당의 국가적 권력구조가 변하여 중당(中唐) 시대에는 지방 군벌로서 절도사가 크게 부상하였는데, 이들 또한 사원 및 교단과 밀접하게 결합했던 사실을 보여주는 기사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 왕왕 보인다. 이것도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전설로서 주의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2쪽).
190
註) 281 현겁(賢劫) 천불 중 천 번째인 누지불(樓至弗, Rucika)이 집금강신(執金剛神)이었다는 설은 일찍이 《대보적경(大寶積經)》제9 밀적금강역사회(密迹金剛力士會)에 서술되어 있다.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 권18에도 “盧至如來 古譯樓至 唐云愛樂 卽此賢劫中第一千佛 劫末後成佛 卽今之執金剛神是也 亦名密迹金剛”이라고 하였다. 집금강신은 평상시 금강저를 손에 들고 불법을 수호하는 신인데, 석가가 열반할 때는 금강저를 놓고 통곡했다고 하며, 열반도에 항상 그 그림이 그려져 있는 수호신이다. 《불입열반밀적금강역사애연경(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愛戀經)》을 비롯해 석가가 입멸한 곳을 방문했던 법현(法顯)도 또한 구이나갈성(拘夷那竭城, Kusinagara)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 있는 한 구의 금각역사상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것은 처음에 1존(尊)이었다. 이것이 뒤에 분신(分身)하여 2구가 되어 금강(金剛)과 역사(力士), 금강과 밀적(密迹) 혹은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등으로 나뉘었다. 그렇게 하여 2존이 서로 대하게 되었으므로 속세에서는 인왕이라고 부르게 되어 마침내 이것이 통칭이 되었다. 현장(玄獎)도 석가의 열반 모습에 대해서 서술할 때, 집금강신과 밀접역사의 2존이라고 하였다(《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권6) 일본에서는 동대사(東大寺) 삼월당(三月堂) 안의 집금강이 1존이지만, 같은 당에는 별도로 상대를 이룬 금강역사상이 있다. 또한 법륭사(法隆寺)의 중문 및 기타 사문의 인왕상 예는 일일이 들지 않는다. 이들은 갑옷을 입기도 하고 반나신(半裸身)이기도 한데, 전자가 고식이고, 후자는 당대 이후에 유행하게 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4쪽).
191
註) 282 현겁(賢劫) 천불(千佛) 가운데 최후의 부처님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1쪽).
192
註) 283 《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에 오대산대영경사비문(五臺山大靈境寺碑文) 1권이 있다고 하나 내용은 미상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4쪽).
193
註) 284 사원을 에워싸는 3곳의 문이라는 의미에서, 3개의 문비(門扉)가 있는 누문(樓門)의 뜻이 되었으며, 혹는 산문(山門)이라고도 한다. 삼해탈문에서(三解脫門)에 유래한다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4쪽).
194
註) 285 원문에 건각(乾角)이라고 하였는데, 서북쪽을 가리킨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4쪽).
195
註) 286 느릅나무과에 속한 낙엽 활엽 교목(喬木)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1쪽).
196
註) 287 《청량산지(淸凉山志)》 권2에 따르면, 남대의 남쪽 80리에 성종산(聖鐘山)이 있는데, 옛날에 신종(神鍾)이 날아와 바위 아래에 걸렸다가 후에 날아가 버렸다고 하여, 성종곡(聖鐘谷)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그 이름은 똑같지만, 곡(谷)과 굴(窟)이라 한 것이 서로 다르다. 《대당오대곡자(大唐五臺曲子)》에는 남대(南臺)조에 “遠眺遐方思情悅 或廳神鍾 感愧捻香爇”라고 하였고, 또한 《청량산지》에 따르면 그곳에는 칠불동(七佛洞) 외에도 지공동(志公洞), 법화동(法華洞), 천율동(千律洞) 등이 있었으며, 또한 보석산(寶石山)에도 또다른 굴이 있었다고 한다. 성종굴도 이와 같은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5쪽).
197
註) 288 불보살의 목이나 등 뒤에 원륜(圓輪)으로 방광(放光)하는 것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1쪽).
198
註) 289 불보살의 온몸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신광(身光)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2쪽).
 
 

 
 

7월 4일 (음)

200
- 법화사를 참배하다
 
201
四日齋後。向西南入谷踰嶺。行十五里。到大曆法花寺。重閣於峻崖上建立。四方涯面。盡是花樓寶殿。任地高低堂舍比櫛。經像寶物。絕妙難言。巡觀諸院。次入法花院。見神道和尚影。此和上在生。依天台法花三昧行法修行。長念法花經。四十三年不出院。感得六根清淨。遷化數年矣。其影及所持法花經。及三昧行法。并證得三昧坐處大椅子。並今見在。從法花寺。西北十五里。有佛光寺。
 
 
202
[7월] 4일, 재를 마친 후 서남쪽註 290을 향해 계곡으로 들어가 산마루를 넘어 15리를 가서 대력법화사(大曆法花寺)註 291에 도착했다. 여러 층짜리 누각이 험준한 벼랑註 292 위에 세워져 있다. 사방의 낭떠러지 쪽에는 온통 아름다운 누각과 보배로운 전각들이다.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경, 불상, 보물은 절묘하여 말로 다 할 수 없다. 여러 원을 두루 돌아보고 다음으로법화원으로 들어가 신통화상(神通和尙)註 293의 존영을 보았다. 이 화상은 살아있을 때註 294 천태의 법화삼매의 행법에 의거하여 수행하고, 오래도록 《법화경》을 염송하며 43년 동안 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육근청정(六根淸淨)註 295을 감득(感得)하였다. 돌아가신지 몇 년註 296이 되었다. 그 존영과 가지고 있던 《법화경》과 삼매행법 그리고 삼매를 체득할 때 앉아 있던 큰 의자들은 지금도 있다. 법화사에서 서북쪽으로 15리註 297 되는 곳에 불광사(佛光寺)註 298가 있다.
 
 
203
註) 290 아마도 서북쪽의 잘못인 듯하다. 영경사에서 내려와 방향을 착각했던 것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4
註) 291 關野, 常盤에 따르면 불광사(佛廣寺)의 동쪽 25리, 청량령(淸凉嶺)의 경부(頸部) 계곡에 있는데, 당우는 황폐화되었고 주석하는 승려도 없고, 예전의 흔적으로는 전탑과 엎어진 경당(經幢)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支那佛敎史蹟評解》 권5) 전탑은 8각형으로, 공문(拱門)에는 “대화엄경탑장(大華嚴經塔藏)”이라고 새겨진 제액을 달았고, 안에는 양(梁) 지공(志公) 12시가의 석각이 있는데, 여기에 북송 원우 4년(1089)의 연호가 있다. 또한 절 남쪽 산에는 방형의 전축(塼築)과 묘탑(墓塔)도 2개 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세가 다소 수복되어, 산의 주위에 작지만 계곡도 흘러 유정한아(幽靜閑雅)한 풍취가 있는 이 사원은 존승사(尊勝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주지도 있다고 한다(白煥采, 《五臺文物》) 《광청량전(廣淸凉傳)》 권상에는 금익사(今益寺)로서 남대에 속하는 3사 중 하나였다. 당대에 신영(神英)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명찰로 알려졌는데, 그 유래는 《광청량전》 권중 신영화상입화법화원(神英和尙入化法華院) 및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1에 상세하다. 전자에 따르면 신영은 속성이 한씨(韓氏)라고 하며, 하북성 창현(滄縣) 출신으로, 젊을 때 출가하여 후에 남악에 이르러 신회(神會)의 문으로 들어갔다. 말할 것 없이, 신회는 하택종(河澤宗)의 개조(開祖)였다. 그는 신영에게 “너는 오대산에 큰 인연이 있으니 빨리 북쪽으로 가서 문수대성을 참례하고 옛날의 유적을 찾아내라”라고 권유하였다. 신영은 법화원에서 거주하다가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나, 그 묘탑은 송대에 또한 존재했다고 한다. 현존하는 방형의 전탑 하나가 혹 신영의 것이 아닐까.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대력법화사 안에 법화원이 있었다고 하여, 이것이 신영의 고지(故址)인 사원의 일부분이었음을 알겠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신통(神通)이라고 한 것은 신영의 잘못이 아닐까. 또한 이 사원에 조영에 대해 불공(不空)이 힘썼다는 것은 《표제집(表制集)》에 보이니, 이 책에 따르면 원래 오마자사(吳摩子寺)라고 칭했는데, 그 조수(造修) 뒤에 대력법화원으로 고쳤다고 한다. 금각, 옥화, 화엄 등 여러 사원과 함께 이곳에서도 21인의 승려를 뽑아 나라를 위해 스스로 번역한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 및 《밀엄경(密嚴經)》을 전독하였고, 특히 법화사에서는 《법화경(法華經)》의 전독을 행할 수 있도록 주상하였다(권2 大曆二年諸臺山五寺度人抽像制) 신영과 불공은 마치 도의, 불공과 금각사의 관계와 비슷하다. 또한 원인(圓仁)이 방문했던 것은 조영 이후 약 50여년이 지나서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5
註) 292 원문에 “崕”라고 하였다. 초본(抄本)에는 “涯”와 비슷하게 되어 있는데 의미에 따라 “崕”로 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6
註) 293 신통(神通)과 신영(神永)은 한 글자를 달리할 뿐인데, 그 형상을 안치한 것, 법화원에 거주했다는 것, 법화삼매를 행했다는 것 등 자못 공통점이 보인다. 다만, 한 명은 성당(盛唐) 시대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수년 전에 죽었다고 하여, 바로 동일인이라 결정할 수 없으나, 본문의 수년은 수십 년이었는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7
註) 294 원문에 “在生”이라고 하였다. “生存中” 또는 “在世中”과 같은 표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8
註) 295 육근(六根)은 육식(六識)과 비슷한 것으로, 눈, 귀, 코, 혀, 심(心), 의(意)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 제6 법사공덕품(法師功德品)에 “만약 선남자(善男子), 선여자(善女子)가 법화경을 받아 지녀 읽거나 외우거나 해설하거나 베껴쓴다면 이 사람은 마땅히 눈의 팔백 공덕과 귀의 천이백 공덕과 몸의 팔백 공덕과 뜻의 천이백 공덕을 얻을 것이라나. 이 공덕으로 육근을 장엄하여 모두 청정하리라”라고 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09
註) 296 아마도 수십 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十”자가 탈락된 것은 아닐까(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10
註) 297 關野貞등에 따르면 법화사와 불광사의 거리는 20리라고 하였으니, 약 10리의 차이가 있다. 혹시 이 또한 “二”자가 탈락된 것인지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211
註) 298 오대현 두촌진(豆村鎭) 동북 10리, 신불광촌(新佛光村)에 있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정한(靜閑)한 곳으로, 지금도 불당과 누각, 방사 등이 있어 옛날의 성대함을 짐작하게 한다. “먼저 불광이 있었고 그 뒤 오대가 있다”라는 속언도 있으니, 오대산의 사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고청량전(古淸凉傳)》권상에 따르면 “(南)臺西有佛光山 下有佛光寺 孝文所立 有佛堂僧室十餘間 尊儀肅穆 林泉淸茂”라고 보이며, 이를 이어 수대에 중건되었고, 당초에 오대현 소과사(昭果寺)의 해탈선사(解脫禪師)가 다시 수리하였다. 그는 이곳에 40여 년 주석하며 《법화경》, 《화엄경》을 읽었고, 특히 화엄에 의한 불광관(佛光觀)을 행하여 원근의 승속이 많이 모여들었으며, 문하에 선업(禪業)을 배우는 자가 천여 인에 이르렀다고 서술되어 있다(《속고승전(續高僧傳)》 권20, 《고청량전(古淸凉傳)》 권하) 《오대산성경찬(五臺山聖境讚)》에는 “佛光寺裏不思議 馬瑙珍珠靑殿基 解脫和尙滅度後 結跏趺坐口笑疑疑”라고 하였으니 신앙을 모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광청량전(廣淸凉傳)》 권하) 또한 이 절은 연(燕) 탕창왕(宕昌王)이 창건하였는데, 마침 그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부처의 신광(神光)이 숲에서 널리 나오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광산에 의해 절 이름을 붙였다고 한 앞의 설과 합치되지 않는데, 연 탕창왕 또한 미상의 인물이다. 북위시대, 티베트계 서강(西羌)이 탕창국(宕昌國), 탕창왕으로 봉해졌으나, 관계는 없다. 불광사에는 해탈 이후 명승이 많이 유석(留錫)하였고, 일찍이 법조(法照)도 거주하였다. 그 외 관계가 있는 사람으로, 승방선사(乘方禪師), 무명화상(無名和尙), 원성(願成), 법흥(法興) 등의 이름이 《광청량전(廣淸凉傳)》에 보인다. 무명(?-793)은 하택종(荷澤宗)의 선사로 징관(澄觀)의 스승이었다. 또한 법흥은 절 안에 미륵대각(彌勒大閣)을 조영한 승려로, 이 각은 3층 9칸, 높이가 90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치한 존상은 장엄하였고, 주위에 갖춤은 없었으나 72현성(賢聖), 8대용왕, 오대(五臺) 여러 절의 성승상(聖僧像) 등 만여 존(문수 권속의 1만 보살 등을 포함했을 것이다)에 이르는 상을 모두 벽에 그렸다고 한다. 법흥은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에도 수록되어 있는 명승으로, 그 기사에서는 미륵각이 3층 7칸 96척이라고 하여 9칸이 아니라 7칸으로 되어 있다. 그는 태화 2년(828) 입적하였으니 원인(圓仁)이 입대(入臺)하기 10년 전에 해당된다. 또한 돈황에서 발견된 《오대산순례일기(五臺山巡禮日記)》 단간(斷簡)에도 관련 기록이 보인다. 만약 이 기록이 당말 오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혹 회창 폐불 당시에도 어느 정도 가람이 남아있었고 그 직후 중수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일설에는 회창 폐불 때 사원이 황폐화되어 후에 그것을 부흥하기를 원했다고 하였다. 그는 태화 3년(829) 출가한 이래 불광사에 있으면서 산문도검교(山門都檢校)로 활동하였고 나중에 원상대사(圓相大師)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광계 3년(887)에 입적하였다(《송고승전(宋高僧傳)》 권27, 《광청량전(廣淸凉傳)》 권하) 현재 경내에는 대중 11년(857) 건축한 본당(7칸 4면)을 비롯하여 같은 해의 기명이 있는 불정존승다라니경당(佛頂尊勝陀羅尼經幢) 및 건부 4년의 경당 등이 있다. 본당은 동찰(棟札)에 따라 선종(宣宗) 부흥 당시의 것으로 해석되어 《오대산순례일기》의 내용과 일치하나, 일기의 연대 추정을 확실히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문수전은 미륵각의 터에 금(金) 천회 연간 중수된 것이다. 절의 뒤에는 무구정광탑이 있고, 탑 안에는 천보 4년(745)의 기년이 있는 석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경내에는 정원 11년(795)의 방편화상(方便和尙, 無名) 6각전탑과 장경 4년(824) 해탈화상의 4각전탑 등이 있다(小野玄妙, 「唐天寶十一年造顯の五臺山佛光寺玉石釋迦佛像について」, 《佛敎の美術と文化》 | 常盤大定, 關野貞, 《支那佛敎史蹟》 제5집 | 梁思成, 《中國營造學社彙刊》 7-2 | 1951, 《雁北文物勘査團報告》(中央人民政府文化部刊) | 白煥采編, 《五臺山文物》 등)(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46쪽).
 
 

 
 

7월 5일 (음)

213
- 상방보통원에서 숙박하다
 
214
五日齋後。西南行二里。到上房普通院宿。
 
 
215
[7월] 5일, 재를 마친 후 서남쪽으로 2리註 299를 가서 상방보통원(上房普通院)註 300에 도착해 숙박했다.
 
 
216
註) 299 2리는 아마도 20리로, “十”자가 탈락되었을 것이다. 오후의 일정이 불과 2리 정도라는 것은 비정상적이므로, 후주(後註)와 같이 법화사(法華寺)에서 상방보통원(上房普通院)까지는 대략 20리였다고 해석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1쪽).
217
註) 300 상방(上房)은 현재의 장방(醬房)이다. 상(上, shang)과 장(醬 , chang)은 대략 음이 비슷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상방에서 사양령(思陽嶺, 厂+虎陽嶺)까지 12리라고 하였는데, 장방도 또한 이곳의 동북 약 10리에 위치하므로, 거리상으로도 합치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1쪽).
 
 

 
 

7월 6일 (음)

219
- 사양령을 지나 건안사에 도착하다
 
220
六日早發。向西南行五里許。向南遙望高嶺。巖頂巉[A44]巘。中心有一大孔。透見那畔之空。其孔遠見。如笠子許大。斯乃孝文帝。射箭透過之處。向西南行七里許。到思陽嶺。昔儀鳳元年。西天梵僧。佛陁波利。來到此處。雨淚遙禮臺山。感得大聖化為老人。約([□@考]約池本作初)令却[A45]廻天竺取佛頂之處。今見建寶幢。々上篆佛頂陀羅尼及序便題波利遇老人之事。從思陽嶺。西南行十三里。到大賢嶺。於普通院斷中。路從嶺上過。當嶺頭有重山門樓。此乃五臺南山門也。齋後。向西南行五里許。到代州所管五臺縣。向西南行卅里。過胡陁河。到建安寺宿。
 
 
221
[7월] 6일, 일찍 출발하여 서남쪽을 향해 5리 정도 가니 남쪽으로 멀리 높은 산마루가 바라다 보였다. 바위 꼭대기는 깎아지른 듯이 가파른데, 그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어 구멍을 통해 저쪽 편 하늘이 보였다. 그 구멍을 멀리서 보면 삿갓만한 크기이다. 이것은 효문제(孝文帝)가 화살을 쏘아 뚫고 지나간 곳이다.註 301 서남쪽으로 7리 정도 가서 사양령(思陽嶺)註 302에 도착했다. 옛날 의봉(義鳳) 원년에 서천(西天)의 범승 불타파리가 이곳에 이르러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멀리 오대산에 예배하였는데, 대성이 노인으로 화현한 것을 감득하여 천축으로 되돌아가 불경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곳이다. 지금 보당(寶幢)註 303이 세워져 있다. 보당 위에는 불정다라니(佛頂陀羅尼)와 서문이 전서(篆書)로 기록되어 있다. 곧 불타파리가 노인을 만났던 일을 기록하였다. 사양령에서 서남쪽으로 13리를 가서 대현령(大賢嶺)註 304에 이르러 보통원에서 단중했다. 길을 따라 산마루 위를 지나니 마루의 정상에 해당하는 곳에 여러 층의 산문 건물이 있었다. 이것이 곧 오대의 남쪽 산문이다. 재를 마친 후 서남쪽으로 5리 정도 가서 대주(代州) 관할의 오대현 註 305에 도착하였다. 서남쪽을 향해 30리를 가서 호타하(胡陁河)註 306를 건너 건안사(建安寺)註 307에 도착해 숙박했다.
 
 
222
註) 301 《청량산지》에는 삽전령(揷箭嶺)을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남대 동쪽 20리에 있다고 하여 장소를 달리한다. 또한 대당 이옹(李邕) 오대산청량산비에는 한대(漢代) 중전령에 청량사를 창건했다고 서술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3쪽).
223
註) 302 사양령(虒陽嶺)이라고도 한다. 현재 이곳에는 존승사(尊勝寺)가 있고 경내에는 민국 시기 높이 9장 정도의 12각 9층 만장전탑(萬藏塼塔)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8각 3층의 거대한 석경당(石經幢)이 있다. 이 경당은 북송 천성 4년(1026) 건조되었으며, 여기에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이 새겨져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3쪽).
224
註) 303 천당(天幢)이라고도 한다. 특히 돌로 만들어 경문을 새긴 것을 석당 또는 경당이라고 한다. 탑이 묘에서 발달한 것임에 비해, 이는 나폴리기(旗)에서 출발하여 원류가 다르지만, 당대에는 외형이 유사하게 되었다. 다라니신앙이 성행하자, 각지에 경당이 만들어졌고 그 다수가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새겼으니 이러한 예는 각지에서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4쪽).
225
註) 304 사양령(虒陽嶺)의 서남, 오대현성의 동북에 있었던 고개로, 현재 각도령(閣道嶺) 또는 각자령(閣子嶺)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또한 관문도 있고, 남록에 남북대선(南北大仙)이라는 지명도 존재한다. 현(賢)과 선(仙)은 북경음으로 모두 Hsien이다. 차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이곳이 주요 참배로였고, 여기에 제1문이 있었다. 옛날에는 2중의 누각식 산문이 있었다. 또한 《오대산순례일기》 단간(斷簡)에 따르면 이곳부터 불광사와 건안니사(建安尼寺)까지는 대략 40리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6쪽).
226
註) 305 대주는 산서성 대현에 치소가 있었고, 안문(雁門), 번치(繁畤), 곽(崞), 당림(唐林) 및 오현(五縣)을 관할하였다. 또한 오대현은 한대에는 노사현(盧虒縣)이라고 불렀고, 그 치소는 현성의 북쪽 1리쯤인 고성촌에 있었다. 북위 태화 연간 여이현(驢夷縣)으로 개명하였고, 현치도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오대현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은 수 대업 이후였다. 동남은 노사수에 면하고, 서북면에는 높은 성벽을 축조한 요해처로, 이곳에는 깨끗한 샘도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6쪽).
227
註) 306 수원은 번치현 태희산(泰戱山)에서 발원하여, 대(代), 곽(崞), 흔(忻) 등의 여러 현을 거쳐 정양에 이르러 오대현에서 청수하(淸水河) 등과 합류하여 이윽고 대행산맥(大行山脈)을 침식하여 하북평원으로 나아간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6쪽).
228
註) 307 오대현 하변촌의 동북, 호타하의 남안에 대건안, 동서건안 등의 지명이 있다. 돈황의 「오대산도」에도 대건안지사(大建安之寺)가 보인다. 《오대산순례일기》에는 건안니사(建安尼寺)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비구니 법공(法空)도 출가하였다(《광청량전》 권하) 또는 이곳에 승사와 니사가 둘 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6쪽).
 
 

 
 

7월 8일 (음)

230
- 흔주 정양현에 도착하다
 
231
八日齋後。向西南行卅里。到忻州定襄縣七巖寺宿。
 
 
232
[7월] 8일, 재를 마친 후 서남쪽으로 30리를 가서 흔주(忻州) 정양현(定襄縣)註 308에 도착해 칠암사(七巖寺)註 309에서 묵었다.
 
 
233
註) 308 흔주(忻州)는 수나라 개황 18년(598)에 두어졌는데, 산서성 흔현이 치소였고, 곽하(郭下)의 현을 수용하였다. 정양현도 또한 그 관하에 속했다. 정양현은 일찍이 전한시대에 설치되었다고 하나, 채원(綵遠)의 허린거얼[和林格爾] 북쪽 20리에 두어졌다고 하므로 그 장소가 다르다. 그리고 당시는 이곳이 양곡현(陽曲縣)이라고 불렸으며 태원군(太原郡)의 소관이었다. 정양현치가 다시 이곳에 설치된 것은 당 무덕 4년(621)으로, 이때 옛 현성의 일부분을 개축하여 축소시켰던 것이다. 현재 현성 교외에 있는 한 변 1km 이상의 방형(方形) 고성지(古城址)는 한대의 양곡현성으로, 4문을 연 뒤에도 있었으며 당시의 기와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小野日比野, 《五臺山》, 260쪽)(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7쪽).
234
註) 309 정양현성에서 동남으로 약 18리에 칠암사가 있었다(《정양현지(定襄縣志)》 권1) 북쪽에서 바라보면 단층에 따라 병풍처럼 우뚝 서 있다. 계곡 사이를 올라가면 암벽의 중간 부근에 성모사(聖母祠)가 있다. 칠암은 근처에 있었던 7개의 동굴로 인해 이름붙은 것으로, 여기에는 동위(東魏) 천평(天平) 3년(536)의 제기(題記)가 남아 있다(청 우성수(牛誠修)찬, 《정양금석고(定襄金石攷)》 권1) 이 제기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 칠보산령광사(七寶山靈光寺)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칠암사의 전신 또는 정식 명칭이었을 것이다. 다만,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따르면 칠암사의 절터는 계곡의 입구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일찍이 이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사원의 옛 터는 명확하지 않았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7쪽).
 
 

 
 

7월 9일 (음)

236
- 호촌보통원에서 휴식하다
 
237
九日早發。西南行卅里許。到胡村普通院斷中歇。
 
 
238
[7월] 9일, 일찍 출발하였다. 서남쪽으로 30리 정도 가서 호촌보통원(胡村普通院)註 310에 이르러 단중하고 쉬었다.
 
 
239
註) 310 정양현치에서 남쪽으로 약 15리, 흔현 서쪽 약 22리의 산록에 호촌(湖村)이 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한호촌(胡村)일 것이다. 《정양현금석고(定襄縣金石攷)》 권3에는 호촌의 문수원(文殊院)에 있던 원(元) 연우(延祐) 4년(1317) 문수원비기(文殊院碑記)를 수록하였다. 혹은 이 문수원이 옛날 보통원의 후신일지도 모르겠다. 이 기록에는 “定襄□之男 距縣一十五里 有一墅曰胡村 東□淨明 南望叢蒙 西指神峯 北枕牧馬 土甘肥草 木葱蒨亘 古以來 建梵刹祈祥之處 爲一方種福之田”이라고 하였다. 원대에도 호촌(胡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현재 사용하는 호촌(湖村)이라는 이름은 와전일 것이다. 이곳으로부터의 일행 진로는 산록을 따라 서남으로 향하는 것이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8쪽).
 
 

 
 

7월 10일 (음)

241
- 석령진 남쪽의 보통원에서 숙박하다
 
242
十日早發。行卅([□@考]卅東本改廿)里許。到宋村普通院斷中。行卅五里。到名嶺鎮南關頭普通院宿。
 
 
243
[7월] 10일, 일찍 출발하여 30리 정도 가서 송촌보통원(宋村普通院)註 311에 이르러 단중하였다. 다시 35리를 가서 석령진(石嶺鎭)註 312의 남쪽 관문註 313 근처의 보통원에 이르러 숙박했다.
 
 
244
註) 311 흔현(忻縣)의 동남쪽 약 10리에 있는데, 대남송촌(對南宋村), 소남송촌(小男宋村), 북송촌(北宋村) 등의 지명이 존재한다. 송촌보통원은 그 어느 곳에 있었을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9쪽).
245
註) 312 초본(抄本)은 명령진(名嶺鎭)이라고 하였다. “名”은 “石”의 착오일 것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97 태원부(太原府)조에는 “(石嶺鎭) 在陽谷縣東北百二十五里 北去忻州四十里 爲幷代雲朔要衝 勢甚險固 唐武德三年 突厥窺晋陽 自石嶺以北 皆留軍戍之 至德中 置石嶺軍”이라고 하여, 흔현성에서 남쪽 40리, 양곡현성에서 동북 120리에 위치한다. 운중산맥(雲中山脈)과 계주산맥(繫舟山脈)의 사이, 부타하(滹沱河)와 분하(汾河)의 지류가 그 분수령에서 각각 남북류하는 지점에 있다. 옛날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해험고처였으므로, 만약 북방 민족 때문에 안문(雁門)이 파괴되면 이곳이 최후로 방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통전(通典)》 권179 흔주조에도 “定襄漢陽谷縣 有石嶺關 甚堅固”라고 하였다. 성심(成尋)도 돌아갈 때 이곳을 통과하였다. 《참천태오대산기(參天台五臺山記)》 권5에는 “熙寧五年十一月十二日 … 至石嶺關 重重門 四面垣上矢倉如城”이라 하여 성벽의 위에는 시창(矢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그 견요(堅要)를 약술함과 동시에 태원부에서의 거리는 95리, 석령관과 흔주 사이는 30리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돌아오는 길(희령 5년 12월 8일조)은 후자가 30리, 전자가 80리라고 하여 15리의 차이가 있다. 즉 “태원부-15리-백양목마포(白楊木馬鋪)-15리-양곡마포(楊曲馬鋪)-15리-탑지마포(塔地馬鋪)-15리-백정역(百井驛)-20리-대우마포(大盂馬鋪)-15리-석령관(石嶺關)”(往路), “석관령-20리-대우마포-15리-석정역-15리-탑지마포-15리-양곡마포-15리-태원부 평진역(平晋驛)”(歸路)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귀로에서 태원부-백양목 사이의 거리를 탈락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도 삼교역(三交驛) 즉 송의 태원부까지는 95리라고 하여 일치한다. 이에 비해 《일통지》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40은 모두 태원까지의 거리를 120리라고 하였고, 또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40에는 “石嶺鎭(陽曲)縣東北七十里”라고 하여 오히려 매우 적어졌으니, 이는 어떠한 이유일까(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59쪽).
246
註) 313 원문에 남관두(南關頭)라고 하였는데 남관(南關)과 같다. 두(頭)는 접미어라고 생각된다. 10만분의 1 지도를 살펴보면, 관성진(關城鎭)이 있고 그 남쪽 몇 리에 석령관이 있다. 아마도 이 부근이 양측으로부터 산에 가장 임박하는 곳일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0쪽).
 
 

 
 

7월 11일 (음)

248
- 답지점에 도착하다
 
249
十一日早發。行廿里許。到大干普通院斷中。行廿五里。至蹋地店宿。
 
 
250
[7월] 11일, 일찍 출발하여 20리 정도를 가서 대우보통원(大于普通院)註 314에 도착해 단중하였다. 다시 25리를 가서 답지점(蹋地店)註 315에 이르러 묵었다.
 
 
251
註) 314 석령진(石嶺鎭)의 남쪽에 있는 대우진(大盂鎭)이다. 돈황 출토 《오대순례일기(五臺巡禮日記)》 단간(斷簡)에도 대우점(大于店)이 보이는데, 북쪽으로는 흔주의 남쪽 조가점(趙家店)까지 60리, 남쪽으로는 백양수점(白楊樹店)까지 70리라고 하였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40에는 “大盂城 府東北八十里”라고 하였다. 춘추시대 우읍(盂邑)의 고지로, 한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현(盂縣)이 다스렸던 곳이라고 서술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1쪽).
252
註) 315 성심(成尋)의 기술에는 대우마포(大盂馬鋪)로부터 35리 내지 30리에 탑지마포(塔地馬鋪)가 있다고 되어 있다. 10만분의 1 지도에는 청룡두(靑龍頭)의 동쪽에 북탑(北塌), 남탑촌(南塌村)이 있다. 탑지(塌地)와 탑지(塔地)는 같은 음(tati)으로, 《도광양곡현지(道光陽曲縣志)》에서도 똑같이 탑지(塌地)라고 되어 있다. 다만,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된 이수(里數)는 성심의 이정(里程)과 비교하여 10리 내지 5리가 적으나, 동일 지점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도 답(蹋)과 답(蹹)은 같은 뜻으로, 군대의 앞에 나아가 척후답복(斥候蹹伏)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답지라는 것 또한 땅에 엎드려 적의 동세를 탐색하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이 설명이 타당하다면, 이곳은 북방 민족의 침입로에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의미에 의해 이러한 지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 권54 식화지에 따르면 “諸道置邸以收稅 謂之搨地錢”이라 하였다. 또한 《구당서》 식화지에도 제도(諸道)의 절도관찰사가 점(店)을 두어 차상(茶商)을 숙박하게 하고 매근(每斤) 탑지전(搨地錢)을 받았으며, 또한 통과하는 상인에게 세금을 부과했다고 하였다. 탑지(搨地)는 답지(蹋地)와 음이 통할뿐 아니라, 같은 뜻이라고 본다면 탑방(搨坊) 또는 정탑(停搨)은 즉 창고에 물건을 의탁하고 창부료(倉敷料)를 수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장소가 된다. 만약 그렇다면 이 지명의 기원은 경제적인 원인에도 기인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1쪽).
 
 

 
 

7월 12일 (음)

254
- 정각사 장원에서 수년을 보다
 
255
十二日五更發。行卅五里。到白楊普通院斷中。更行十五里。到三交驛歇。次入定覺寺庄。見水碾。名為三交碾。更行十五里。到古城普通院宿。
 
 
256
[7월] 12일, 새벽 4시경註 316에 출발하여, 35리를 가서 백양보통원(白楊普通院)註 317에 도착해 단중했다. 다시 15리를 가서 삼교역(三交驛)註 318에 이르러 쉬었다. 다음으로 정각사(定覺寺) 장원註 319에 들어가 수년(水碾)註 320을 보았는데, 이름하여 삼교註 321년(三交碾)이라 하였다. 다시 15리를 가서 고성보통원(古城普通院)註 322에 이르러 숙박하였다.
 
 
257
註) 316 원문에 오경(五更)이라고 하였다. 새벽 4시 전후로, 평단(平旦) 또는 인각(寅刻)이라고도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2쪽).
258
註) 317 백양(白楊)은 《오대산순례일기(五臺山巡禮日記)》의 백양수점(白楊樹店), 《오대산기(五臺山記)》의 백양목마포(白楊木馬鋪)에 해당한다. 지금도 백양수(栢楊樹)라는 지명이 존재하는데, 10만분의 1 지도에는 양장(養庄)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태원(太原)-흔주(忻州) 간 대로에서는 동쪽으로 기대어 있는데 마침 산록에 있다. 이곳이 옛날의 통로라고 이해된다. 또 양장(楊庄)과 태원시성(太原市城)의 거리는 약 십수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2쪽).
259
註) 318 현재의 태원시(太原市) 관내로, 당의 양곡현(楊曲縣) 소관에 속해있던 역명(驛名)이었다. 그 지명은 삼교성(三交城), 삼교구(三交口), 삼교진(三交鎭), 삼교채(三交寨) 혹은 당명진(唐明鎭)이라고 하였다. 삼교라는 것은 교통로 세 갈래를 의미하는 것인데, 북쪽에서 오던 길이 이곳에서 나뉘어져, 하나는 분하(汾河)를 건너 진양성(晋陽城)으로 향하고 하나는 서구(徐溝)에 이르며 멀리는 노안(潞安)에 도달하는 것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권96에는 “三交城 在陽曲縣北十五里 李燾長編河東有地名三交 宋史太宗紀 太平興國四年 命潘美屯 河東三交口 寰宇記皇朝平晋 移幷州於三交寨”라고 하였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40에는 “三交城 府北五十里 相云 晋大夫竇鳴犢所築城也 舊有三交驛 路通忻州 宋長編河東有地名三交 契丹所保 多由此寇 太平興國中 詔潘美屯三交口 潜師拔之 美積粟屯兵 寇不敢犯 賀懷浦將兵屯三交 卽此城也 一統志城在府北五里誤”라고 서술하였다. 그 지점에 대해서 《일통지》는 양곡현치 즉 태원성 북쪽 15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독사방여기요》에서는 부 북쪽 50리라고 하였으며, 《광서산서통지(光緖山西通志)》 권53·55 고적조에도 태원성과 삼교채는 다른 곳이라고 하였다. 《독사방여기요》의 50리는 아마도 옛 부성(府城, 진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대의 지리서는 삼교성을 태원성 북쪽 10리 내지 15리라고 비정했던 것이 된다. 그런데 이에 비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석령관에서 삼교역까지 95리라고 하였고, 《참천태오대산기》에 따라도 이와 같이 95리이다. 따라서 앞의 두 일기에 근본하여 지점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송(宋) 육유(陸遊)의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 따르면 “太平興國四年 平太原降爲幷州 廢舊城 徙州於楡次 今太原則又非楡次 乃三交城也 三交城 在舊城西北三百里 亦形勝之地 本名故軍 又嘗爲唐明鎭”라고 하여 송나라는 태원 즉 오대(五代) 때 북한(北漢)의 도읍(951-975)이었던 태원(진양)을 평정하고, 당대 이래 사용되던 북도(北都)라는 이름을 폐지하고 병주(幷州)라 이름하여 그 주치를 태평흥국 4년(979) 유차현으로 이동하였으며, 동 7년에 이르러 다시 바뀐 곳이 삼교성으로, 이것이 또한 일명 명당진이라고도 불린다고 서술하였다. 또,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 권23 태평흥국 7년조에도 2월 병주를 또 삼교채로 옮겼다고 하고, 주(註)에서 삼교채는 즉 곡양현이라고 기록하였다. 《노학암필기》에는 삼교성이 진양성에서 서북 300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 동북 30리의 오기라고 이해된다. 왜냐하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삼교역-15리-고성보통원(故城普通院)-15리-태원부라고 되어 있어 그 사이가 30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유의 300리가 30리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이 30리는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딱 맞는다. 다만, 《대명일통지》에서는 태원부와 태원현의 거리는 40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컨대 삼교역-삼교채=삼교성=당명진=양곡현이라는 점이 대략 인정될 것이다. 북송이 북한(北漢)을 멸망시켰을 때 종래의 치소를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그 결과 새로운 태원성이 산서 북부의 정치, 군사적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옛 성이 폐허화된데 비해, 그 새로운 치소는 나날이 번성했다. 성심도 또한 “莊嚴廣大驛 太原大府”(권5 희령 5년 10월 19일조)라고 그 인상을 서술하였다. 그 뒤 원(元) 초에 그곳을 여행하였던 마르코폴로에 따르면 “It is of the largest size, and very beautiful, a considerable trade is carried on here, and a variety of articles are manufactured, particularly arms and other military stores”라고 하였다. 명(明 ) 홍무 9년(1376)에 송(宋) 이래의 성곽이 또 동북부쪽으로 확장되었다. 주위는 13km, 높이는 11m에 이르렀으며, 성문 각루가 갖추어져 당당한 성곽이 되었고 그 이후 최근까지 명 초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신중국에 들어와서는 그 역사적 성벽이 모두 제거되고, 현대적인 시가가 되어 900년 동안의 규모가 일변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3쪽).
260
註) 319 정각사(定覺寺)는 미상이다. 사원의 장원에 대해서는 이미 적산(赤山) 법화원(法花院) 및 장백산(長白山) 예천사(醴泉寺) 장원에 대해 권2에서 주기하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5쪽).
261
註) 320 수차(水車)를 이용한 연애(碾磑)이다. 연애는 《당율소의(唐律疏議)》 권4 석문(釋文)에 “碾磨上轉石也 磑磨下定石也”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돌절구의 아랫돌이 애이고, 연은 상석으로, 둘을 마찰하여 곡물을 가는 도구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5쪽).
262
註) 321 당대 양곡현(陽曲縣)에 있었던 지명이다. 지금의 태원시(太原市) 관내에 있다. 심교성, 삼교구, 삼교진 또는 당명진(唐明鎭)이라고도 불렀다. 삼교란 한 길은 진양성으로 또 한 길은 서구(徐溝)로, 나머지 한 길은 노안(노안)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대청일통지》 권96〕(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55쪽).
263
註) 322 위치는 미상이다. 10만분의 1 지도의 북둔(北屯), 남둔(南屯) 부근일까. 현재 태원현치(太原縣治) 북쪽 부근의 고성은 진양현지(晋陽縣址)를 가리키므로, 라이샤워가 이곳을 그 고성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이다(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267쪽)(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6쪽).
 
 

 
 

7월 13일 (음)

265
- 태원부 화엄하사에 도착하다
 
266
十三日。平明發。行十五里到太原府。屬河東道。此則北京。去西京二千來里。北門入到華嚴下寺住。見南天竺僧法達。從臺山先在。自云。我是鳩摩羅什三藏第三代苗裔。五臺山大莊嚴寺僧。下山來者。皆此寺下。故名華嚴下寺。彼供養主義圓頭陁。引到此寺。頭陁自從臺山為同行。一路已來勾當粥飯茶。无所關少。
 
 
267
[7월] 13일, 날이 밝을 무렵에 출발하였다. 15리를 가서 태원부(太原府)註 323에 도착했다. 이는 하동도(河東道)註 324에 소속되어 있는데, 이곳은 곧 북경 註 325이다. 서경(西京)에서 2천여 리註 326 떨어져 있다. 북문으로 들어가 화엄하사(華嚴下寺)註 327에 이르러 머물렀다. 남천축국 승려 법달(法達)을 만났다. 그는 오대산에서 먼저 내려와 머물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268
“나는 구마라습(鳩摩羅什)註 328의 3대 후예이다.”
 
269
라 하였다. 오대산 대화엄사註 329에서 산을 내려오는 승려들은 모두 이 절로 내려온다. 그래서 화엄하사라 이름하였다. 공양주인 두타승 의원(義圓)이 안내하여 이 절에 도착했다. 두타승은 스스로 오대산으로부터 동행자가 되어 같이 여행하는 동안 줄곧 죽과 밥註 330 그리고 차를 맡아 마련해주어,註 331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270
註) 323 분수를 경계로 태원시에서 서남쪽으로 대략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그 고지가 있다. 태원이라는 이름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상서》 우공을 비롯해 《춘추》 삼전의 소공 원년(기원전 541)조에 보인다. 옛날에는 진양을 중심으로 한 한 지역의 호칭이었으며, 도시 이름은 진양이라고 하였다. 진양이라는 것은 진수의 북쪽이라는 뜻이다. 진양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춘추 말기로, 조간자(趙簡子, 鞅)가 이곳을 본거지로 삼은 후이다. 이 조(趙)를 진(秦)이 멸망시킨 것은 기원전 222년으로, 이 때 태원군이 두어지고 진양이 그 치소가 되었다. 그 이후 혹은 병주에 들어가거나 그 관하에 증감이 있었어도 항상 진양이 중심이 되었고, 때때로 군웅의 근거지로서 혹은 북방 민족의 남하에 대해 방위하거나 북방 민족의 세력을 이용하여 중원을 위압하는 일이 많았다. 북제 고환(高歡, 496~547)도 이곳을 배도(陪都)로 삼았고, 당 태조도 또한 이곳을 근거로 독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대에는 이곳을 왕업의 땅으로 중시하였고 북도 또는 북경으로 명하였다. 또한 국초 이래로 총관부 및 대도독부를 두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위 태원부라고 한 것은 개원 11년(723) 이후의 호칭으로, 이 때 개원 원년(713) 설치되었던 경조부 및 하남부와 함께 삼경부(三京府)로서 특별 관제가 시행되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7쪽).
271
註) 324 당의 10도(道) 중 하나이다. 당은 정관(貞觀) 원년(627) 천하의 지세에 따라 10도로 구분하였는데 그 때의 하동도(河東道)는 현재의 산서 지방을 대략 포괄한다. 《신당서》 권39 지리지에는 “河東道 蓋古冀州之域 漢河東太原上黨西河雁門代郡 及常山趙國廣平國之地 河中絳晋慈隰石太原汾忻潞澤沁遼爲沈分 代雲朔蔚武新嵐憲爲大梁分 爲府二 州十九 縣百一十”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상산, 조국, 광평 같은 하북의 지역을 포함한 것처럼 기록하였으나, 실제로는 대항산맥 서쪽을 주로 하였다. 《신당서》 권65 방진표에 따르면 경운(景雲) 2년(711)에 북도장사(北都長史), 영지절화융대무등제군절도사(持節和戎大武等諸軍州節度使)를 두었고, 개원 8년(720)에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를 두었으며, 동 11년에는 고쳐서 태원부이북주절도하동도지도영전사(太原府以北諸軍州節度使支度營田使)가 있었다.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가 있었던 것은 동 18년(730) 이후로, 그 군무는 삭방(朔方)에 기각(掎角)하여 북적을 방어했다고 하며, 전적으로 돌궐과 거란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 관하에는 사군(四軍), 사수착(四守捉)이 있었고, 군사의 수는 55,000이었다. 치소는 태원부에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8쪽).
272
註) 325 진양에 북도(北都)가 두어졌던 것은 측천무후 때로, 양당서 지리지에는 이를 천수 원년(690)으로, 《당회요》, 《통전》에는 장수 원년(692)으로 기록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북경이라고 칭한 것은 천보 원년(742) 이후로, 장안을 서경, 낙안을 동경이라고 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보응 원년(762) 또한 북도라는 옛 이르으로 바꾸었다(《신당서》 숙종본기) 일찍이 고종과 현종은 친히 이곳에 행행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진양성은 현재의 태원현성을 포함하는 광대한 성곽이었다. 당대에 진양에 체재하거나 이곳을 통과한 일본인은 원인(圓仁) 한 사람만이 아니지만, 이곳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은 그 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69쪽).
273
註) 326 《통전(通典)》 권197에는 “去西京一千三百里”라고 되어 있고, 《구당서(舊唐書 )》 권39 지리지에는 “在京師東北一千三百六十里”,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40에는 “西南至長安 一千六百里” 등이라고 하였으므로, 실제로는 1500-1600리 정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2쪽).
274
註) 327 오대산의 화엄사별원(華嚴寺別院)이라고 한 것과 같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2쪽).
275
註) 328 인도 구자국(龜玆國)의 왕손이다. 7세에 출가하여 대승을 포교하다가 구자국왕이 되었으나, 후진(後秦)에 패하여 장안으로 피랍되어 불경의 번역으로 일생을 보냈다. 삼론종의 조사(祖師)로서 3천 제자를 두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4쪽).
276
Kumalajiva(244-313). 아버지는 구마라염(鳩摩羅炎)이며, 인도의 귀족 출신으로, 구자(龜玆, Kucha)에 가서 국왕의 여동생을 만나 구마라즙을 낳았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라즙을 출가시켜 인도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전진(前秦)이 구자를 쳤을 때(384) 잡혀서 양주(凉州)로 왔고, 홍시(弘始) 3년(401) 장안으로 가서 법화(法華), 유마(維摩), 반야(般若) 등 35부 297권의 경전을 번역하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권14) 일설에서는 74부 384권이라고도 한다. 그 경론의 대부분은 오늘날에도 또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자도 3천이었으며, 고제(高弟)로는 도유(道猷), 승예(僧叡), 승조(僧肇) 등이 있다(《양고승전(梁高僧傳)》 권2, 《진서(晋書)》 권95)(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2쪽).
277
註) 329 본문에는 대장엄사(大莊嚴寺)로 오기되어 있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4쪽).
278
註) 330 율(律)에서는 아침 일찍에는 죽을, 오시(午時)에는 밥을 먹도록 정해 있었고, 오시 이후에는 통상 밥을 먹지 않도록 하였으나, 차는 허락했던 것 같다. 이때 가볍게 먹는 것을 점심이라고 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2쪽).
279
註) 331 원문에 구당(勾當)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세화(世話, 보살핌, 시중)의 의미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2쪽).
 
 

 
 

7월 15일 (음)

281
- 숭복사 불전을 순례하다
 
282
十五日赴四眾寺主請。共頭陁等。到彼寺齋。々後入度脫寺。巡禮盂蘭瓫會。及入州見龍泉。次入崇福寺。巡禮佛殿閣下諸院。皆鋪設張列。光彩映人。供陳珍妙。傾城人盡來巡禮。黃昏自恣。
 
 
283
[7월] 15일, 사중사(四衆寺) 사주의 초청이 있어 두타승 등과 함께 그 절에 가서 재를 들었다. 재를 마친 후 도탈사(度脫寺)에 들어가 우란분회(盂蘭盆會)註 332를 순례하고 주(州)로 들어가 용천(龍泉)을 보았다. 다음에 숭복사(崇福寺)註 333에 들어가 불전을 순례하였다. 누각 아래의 여러 원은 모두 잘 정비되어 줄 지어 있으며 광채는 사람을 비추고 진기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갖추어 진열되어 있었다. 온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순례하였다. 해질 무렵에 자자(自恣)註 334가 있었다.
 
 
284
註) 332 7월 15일에 사원에서 행한 법회이다. 우란분은 범어 Ullambana(倒懸)의 음역이다. 《우란분경(盂蘭盆經)》에 따르면 목련(目連)의 청에 따라 석가가 7월 15일에 7세 부모 및 현세의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음식과 과일 등을 갖추어 번(幡)을 늘어뜨리고 등에 불을 붙여 승속(僧俗)에게 공양하면 그들이 도현(倒懸)의 고통에서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의거하여 이날 여러 부처 및 승려에게 공양물을 보시하고 선조의 망령을 제사지내는 법회가 행해졌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양 무제가 대동 4년(538)에 동태사(同泰寺)에서 우란분재를 열었던 것이 시초인데, 《형초세시기》에는 7월 15일 승니도속(僧尼道俗) 모두가 분(盆)을 마련하여 여러 부처에게 공양하니, 후대의 사람들이 《우란분경》의 설명으로 인하여 널리 꾸며서, 즉 나무를 새기고 대나무를 쪼개고 밀랍을 녹이고 비단을 잘라 꽃잎 모양을 만들어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기록하였고, 이에 의해 남조에서는 일찍이 일반적인 불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에서도 국초 이래로 조정 및 귀족 사이에 성대하게 치러졌던 것은 《법원주림(法苑珠林)》 권62 제사편을 비롯해 여러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4쪽).
285
註) 333 자세히는 대당흥국숭복사(大唐興國崇福寺)라고 하는데, 당대에는 천하의 명찰로 알려졌다. 당 고조(高祖, 李淵)가 의병을 거병했던 것이 이 사원이라고 하며, 경내에 호령당(號令堂)이 있다. 불공(不空)이 오대산을 순례할 때 이곳에 머물면서, 호령당 안에 보현보살상을 안치하고 삼장재월(三長齋月)과 매월 10일의 재일에 당 황실의 여러 천자를 위해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을 전독(轉讀)하였고, 또한 사원 내 정토원(淨土院)의 관정도량(灌頂道場)에서 14인의 승려를 선택하여 나라를 위해 《존승다라니(尊勝陀羅尼)》를 염송하도록 원하여 허락을 받았다(《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 권2 대력 5년 청태원호령당안상(請太原號令堂安像), 정토원추상제(淨土院抽像制)) 또한 경내에는 건원장수각(乾元長壽閣)이라는 5층 불각(佛閣)도 있었다는 것이 돈황본 《참오대산일기(參五臺山日記)》(불제4,648호)에 보인다. 또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송철(宋哲), 부구(浮丘, 권4), 거민(巨岷), 계륜(繼倫, 권7), 문상(文爽, 권21), 종식(從式), 승집(勝集), 계휘(繼暉), 식진(息塵, 권23), 혜경(慧警), 숭정(崇政), 사예(思睿), 회옥(懷玉, 제26) 등의 명승들이 이곳에 거주했던 것도 알 수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5쪽).
286
註) 334 범어 Pravarana의 음역이다. 하안거(夏安居)가 끝나는 날에 자기 자신이 범했던 죄업을 다른 청중에게 참회하여 스스로 희열을 만드는 것이다(《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제27) 《남해기귀전(南海寄歸傳)》 권2-2에도 “凡夏罷 歲終之時 此日應名隨意 卽時隨他於三事之中 任意擧發 說罪除愆之義 舊云自恣者 是義翻也”라고 기록하였다. 라이샤워가 다만 “In the evening (the people) carried on wantonly”(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269쪽).라고 번역한 것은 마땅하지 않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5쪽).
 
 

 
 

7월 16일 (음)

288
- 개원사 누각에 올라가다
 
289
十六日入開元寺。上閣觀望。閣內有彌勒佛像。以䥫鑄造。上金色佛身三丈餘。坐寶座上。諸寺布設。各選其勝。
 
 
290
[7월] 16일, 개원사註 335에 들어가 누각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누각 안에는 미륵불상註 336이 있었는데, 철로 주조하여 위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의 몸 높이는 3장 정도이고 보좌(寶座) 위에 앉아 있다. 여러 절에서 진열한 것은 각각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놓았다.註 337
 
 
291
註) 335 《참오대산일기(參五臺山日記)》에도 “立大中寺 入得寺門 有大閣 有鐵佛一尊”이라고 하였다. 대각(大閣)의 일이나 미륵불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대각 안에 철불이 있다는 점은 개원사와 통하는 것이다. 대중사가 혹은 개원사의 후신이거나, 회창배불(會昌排佛) 이후 부흥하여 이 때 선종(宣宗)의 연호를 취해 대중사라고 개명되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태평광기(太平廣記)》 권14 석 징공(澄空)조에는 “大佛寺在汾水西 隋開皇中 釋澄空於汾西將鑄佛像 鳩集金炭二十年 啓爐無成 又二十年 復無成 又二十年 登爐巓百尺 揚聲語觀者曰 吾欲捨命金液 倘大像圓滿 後五十年 當爲建重閣 俄金液赫耀 投身而入 及啓爐 鐵像高七十尺 莊嚴端妙 毫髮胥具 唐開元初 天平郡節度使李暠揖錢七萬緡 重閣覆之 北都謂之平等閣 計僧投爐日 至是適五十年”이라고 하여 대불의 주조에 관한 전설이 있다. 이것도 또한 철불인데, 7장(丈)과 3장(丈)은 일치되지 않지만, 불상을 세운 계산을 나타낸 것도 대략 일치하며, 또한 개원 연간에 중층의 불각을 세웠다고 하여, 은근히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6쪽).
292
註) 336 미륵신앙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유행하였고 조상(造像)도 성행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도 이미 문등현(文登縣)의 유촌(劉村)에 있었던 미륵 석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 표현은 도솔상생(兜率上生)을 기원하는 것과 당래하생(當來下生)의 때에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을 듣기를 염원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는 전자의 경우는 보살형, 후자는 여래형을 취한다. 여러 문헌에 나오는 미륵불은 대부분 후자이다. 산서(山西)에는 운강석굴 등에 교각 미륵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으나 담란(曇鸞)과 관계가 있는 교성현(交城縣)의 석벽산(石壁山) 현중사(玄中寺, 永寰寺)의 미륵은 개원 29년(741) 만들어진 철제 미륵불로 유명하다(《금석췌편(金石萃編)》 권84 「당태원부교성현석벽사철미륵상송병서(唐太原府交城縣石壁寺鐵彌勒像頌幷序)」) 오대산 불광사(佛光寺)의 미륵각은 별도로 주기한다. 또한 산서(山西) 출신의 측천무후가 스스로를 미륵불의 하생이라 하여 선전에 이용하였던 것도 상기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7쪽).
293
註) 337 이 조의 전문은 종성(宗性)의 《미륵감응초(彌勒感應抄)》 권5에도 인용되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7쪽).
 
 

 
 

7월 17일 (음)

295
- 절도동십장 호씨의 초대를 받다
 
296
十七日。赴節度同十將胡家請。共供主僧義圓。到彼宅齋。諸寺盂蘭瓫會。十五日起首。十七日罷。
 
 
297
[7월] 17일, 절도동십장(節度同十將)註 338 호씨(胡氏) 집에서 초청이 있어 공양주 승려인 의원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재를 들었다. 여러 절의 우란분회는 15일에 시작하여 17일에 마쳤다.註 339
 
 
298
註) 338 절도사 막하의 하급 장교. 《입당구법순례행기》 권1 개성 4년 2월 26일조, 동십장(同十將)의 주 참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8쪽).
299
註) 339 일본에서는 현재 13일에서 15일 사이이므로, 1일의 차이가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5쪽).
 
 

 
 

7월 18일 (음)

301
- 두타승 의원이 오대산화현도를 그리게 하다
 
302
十八日南天竺三藏法達邊。寫取五臺山諸靈化傳碑等。十八日欲向長安發去。頭陀僧義圓。見雇博士。自出帔[糸*奧]子一領。畫五臺山化現圖。擬付傳日本國。為待畫畢。不得發去。
 
 
303
[7월] 18일, 남천축국의 삼장 법달(法達) 곁에서 오대산의 여러 영험한 현상을 전하는 비지(碑誌)註 340 등을 베껴 적었다. 18일에 장안을 향해 떠나고자 하였으나, 두타승 의원이 그림 그리는 박사註 341를 고용하여 스스로 웃옷 한 벌註 342을 내어 오대산화현도(五臺山化現圖)註 343를 그려 일본국에 전하려 하였으므로 그림이 끝나기를 기다리느라 출발할 수 없었다.
 
 
304
註) 340 원문에 오대산제영화전비(五臺山諸靈化傳碑)라고 하였다. 《입당신구성교목록(入唐新求聖敎目錄)》에는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전비(傳碑))는 전기비지(傳記碑誌)의 줄임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9쪽).
305
註) 341 기술자의 존칭이다. 여기에서는 화가를 말한다(《입당구법순례행기》 권3 5월 17일조)(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9쪽).
306
註) 342 초본(抄本)에는 “帔糸+奧子”라고 썼다. 糸+奧라는 글자는 없으므로, 일단 “襖”로 고친다. 피자(帔子)는 배자(背子) 즉 견배(肩背)를 덮는 소매 없는 옷을 말하지만, “帔”를 “被” 즉 의복의 범칭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자(襖子)는 소매가 있는 겹옷 혹은 솜이 들어간 상의를 말하므로, “帔襖子”의 3글자를 일단 상의라고 보고 싶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79쪽).
307
註) 343 문수보살이 오대산에 나타났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5쪽).
308
화현이란 (불보살이) 변화하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화작(化作) 도는 응화(應化)라고도 한다. 이것을 그린 그림이 화현도이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58쪽).
 
 

 
 

7월 19일 (음)

310
- 진여성의 초대를 받다
 
311
十九日隨頭陁。赴女弟子真如性請。到宅斷中。因同巡臺來。今為主人。
 
 
312
[7월] 19일, 두타승을 따라 여제자인 진여승승(眞如性)의 초청으로 그 집에 가서 단중했다. 우리들처럼 오대를 순례하고 왔으므로 지금 접대하는 주인이 된 것이다.
 
 

 
 

7월 22일 (음)

314
- 비구니 진여심의 집에서 재를 들다
 
315
廿二日共頭陁赴尼真如心宅齋。亦是同巡五臺者也。
 
 
316
[7월] 22일 두타승과 함께 비구니 진여심(眞如心)의 집에 가서 재를 들었다. 역시 이도 우리처럼 오대를 순례한 사람이다.
 
 

 
 

7월 23일 (음)

318
- 대업사 율대덕원에서 재를 들다
 
319
廿三日共頭陁赴大業寺律大德院齋。尼大德三人。亦共頭陁。同巡臺來。
 
 
320
[7월] 23일, 두타승과 함께 비구니 진여(眞如)의 대업사(大業寺) 율대덕원(律大德院)에 가서 재를 들었다. 비구니 스님註 344 3명 역시 두타승과 같이 오대를 순례하고 왔다.
 
 
321
註) 344 원문에 니대덕(尼大德)이라고 하였다. 대덕은 범어 Bhadanta의 한역으로, 큰 덕업(德業)이 있다는 뜻으로, 고승들에 대한 경칭이다. 《불공표제집(不空表制集)》에도 대흥선사(大興善寺)에 49인의 대덕을 둘 것을 청할 때 “前件大德四十九人 並道業淸高 洞明經戒 衆所欽尙 堪爲師範”이라 기록하였고, 화도사(化度寺)에 염송승(念誦僧) 27인을 뽑을 것을 청할 때에도 “前件大德等 或業茂眞言 學通戒律 或敷宣妙旨 轉讀眞乘”이라고 서술하였다(권1,2) 다만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관여하는 학식 있는 고승을 특히 대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 현장(玄獎)이 정관 19년(645) 홍복사(弘福寺)에서 번경(翻經)을 시작하자 증의(證義), 철문(綴文), 자학(字學), 증문(證文)의 여러 대덕을 정했다고 보인다(《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권6) 번경과 윤문을 하는 대덕 외에 공봉(供奉), 인가(引駕), 강론(講論), 사주(寺主), 상좌(上座) 등의 이름을 관칭한 대덕도 있다(《석문사시고(釋門事始考), 찬자 미상 《속사적집람(續史籍集覽)》 3책 수록) 또는 임단대덕(臨壇大德) 같은 것도 있다. 선종(宣宗) 때 내전에는 선대덕(禪大德) 변(弁)과 조(肇) 2인이 출사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니대덕(尼大德)도 비구니 중 덕행이 높은 가리키며, 여기서 말하는 율대덕원(律大德院)이라는 것은 율에 밝은 비구니가 거주하는 사원이니, 비구니 사이에서는 특히 계율을 행하는 이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또한 19일, 22일, 23일의 기사에 따르면, 비구니승도 또한 친히 오대산 순례에 참가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해탈보통원(解脫普通院)에서 만났던 비구니는 모두 100인이었다고 한 기사와도 상응하여, 여성의 오대산 순례에 관한 기록으로서 주목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1쪽).
 
 

 
 

7월 26일 (음)

323
- 화현도 그리기가 끝나 장안으로 출발하다
 
324
廿六日畫化現圖畢。頭陁云。喜遇日本國三藏。同巡臺。同見大聖化現。今畫化現圖一鋪奉上。請將歸日本供養。令觀禮者發心。有緣者同結緣。同生文殊大會中也。齋後辭別院中眾僧。始向長安去。頭陀云。余本心。欲送和上。直到汾州。在路作主人。今到此間。勾當事未了。不免停住十數日間。不遂本請(云々)。同巡臺僧令雅云。余欲得送和上。向長安去。頭陁囑云。替余勤勾當。行([□@考]行下東本有里字)李努力。侍奉莫令遠客在路寂寞。便為同行發。
 
 
325
[7월] 26일, 화현도(化現圖)註 345 그리는 일이 끝났다. 두타승이 말하기를
 
326
“일본국 삼장을 만나 같이 오대산을 순례하고 함께 대성註 346의 화현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註 347 지금 화현도 한 폭을 그려 받들어 올립니다. 청하건대 가지고 일본에 돌아가서 공양하시고 그림을 보고 예배하는 사람에게 신심(信心)이 일어나게 하고, 인연 있는 사람은 함께 인연을 맺게 하여 다 같이 문수보살의 정토에 태어나도록 하십시오”
 
327
註 348라 하였다. 재를 든 후 원(院) 안의 여러 승려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비로소 장안을 향해 떠났다. 두타승이 말하기를
 
328
“나의 본래 마음은 스님을 분주 註 349까지 줄곧 바래드리며 여로(旅路)에서 안내하고 접대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지금 이곳에 도착해보니 맡아 처리해야할 일이 끝나지 않아 10여 일 동안 머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본래의 염원을 완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329
운운하였다. 함께 오대를 순례했던 승려 영아(令雅)가 말하기를
 
330
“내가 화상을 전송하여 장안을 향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31
라 하였다. 두타승이 부탁하기를
 
332
“나를 대신하여 여행의 여러 일들을 맡아 처리하는 일에 힘쓰시오. 노력하여 받들어 모시어, 멀리서 온 손님이 길에서 적막하지 않도록 하시오.”
 
333
라 하였다. 곧 영아와 동행이 되어 출발하였다.
 
 
334
註) 345 화현이라는 것은 변화하여 다른 것이 된다는 말이다. 화작(化作) 또는 응화(應化)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문수가 중생을 위해 그 자태 및 영이함을 나타내는 것을 가리키며, 이를 묘사한 것이 즉 화현도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5쪽).
335
註) 346 대성인(大聖人), 불보살(佛菩薩) 및 대성문(大聲聞) 등의 경칭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6쪽).
336
註) 347 문수 정토의 장엄은 극락세계보다 뛰어나서, 동방보광상다공덕해왕불찰(東方普光常多功德海王佛刹) 및 동방광명당(東方光明幢) 등 4대 보살이 사는 정토와 비슷한 모습과 문수사리수기회(文殊師利授記會)의 모습이 설명된다. (《보적경(寶積經)》)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문수대회는 《화엄경(華嚴經)》에 설명된 문수세계의 장엄한 모습을 가리킬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337
註) 348 56억 7백만 년 뒤에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인연을 맺게 됨을 의미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6쪽).
338
註) 349 산서성 분양현에 치소를 두었다. 분주는 북위시대에 설치하였다. 서위(西魏)-수(隋) 초에는 곽하(郭下)를 습성(隰城)으로 하였으며, 서하(西河)로 개칭한 것은 당 상원 원년(674)이다. 당시는 서하현을 곽하로 하였고, 효의(孝義), 개휴(介休), 영석(靈石), 평요(平遙)의 5현을 관할하였다. 서하를 분양(汾陽)으로 개칭한 것은 명 만력 23년(1585)부터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따르면, “汾州府城 周九里十三步 高四丈六尺 門四 元至正中 因舊址重築 明隆慶中甃甎 城外四面 皆有關 城池曲折 環貫四關 深廣各數丈 本朝增修”라고 보인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6쪽).
 
 

 
 

7월 26일 (음)

340
- 석문사를 순례하다
 
341
頭陁云。相送同出城。共巡禮西山去。便同出城西門。向西行三四里。到石山。名為晉山。遍山有石炭。近遠諸州人盡來取([□@考]來取池本作取來)燒。修理飯食。極有火勢。見乃巖石燋化為炭。人云。天火所燒也。竊惟。未必然矣。此乃眾生果報所感矣。山門有小寺。名為石門寺。々中有一僧。長念法花經已多年。近日感得舍利。見傾城人盡來供養。僧俗滿寺。不知其數。得舍利之初源者。念經僧夜於([□@考]夜於東本作於夜)房中。坐念經。有三道光明來照。滿房暉明。而遍照寺。尋光來處。從寺西。巖底出來。每夜照室及寺院。其僧數日之後。尋光到巖所。掘地深一丈餘。得三瓶佛舍利。青瑠璃瓶裏有七粒舍利。白瑠璃瓶中。有五粒舍利。金瓶之中。有三粒舍利。擎來安置佛殿中供養。大原城及諸村。貴賤男女。及府官上下盡來。頂禮([□@考]禮東國二本無)供養。皆云。是和上持法花經。不可思議力所感得也。從城至山。來往人滿路。稠密觀禮奇之。
 
 
342
두타승이 말하기를
 
343
“전송하여 같이 성을 나가 함께 서산(西山)註 350을 순례하고 갑시다.”
 
344
라 하였다. 곧 함께 성의 서문을 나가 서쪽을 향해 3, 4리를 가서 석산(石山)에 이르렀다. 이름을 진산(晋山)이라 한다. 산에 두루 석탄註 351이 있어 원근 여러 주의 사람들이 다 와서 채취해 가 불태워 음식을 요리하는데 화력이 매우 좋았다. 이에 보니 암석이 불에 그슬려 탄(炭)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화(天火)註 352가 태운 것이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는 곧 중생들의 과보(果報)에 감응해 이렇게 된 것이다. 산문에 작은 절이 있는데, 이름은 석문사(石門寺)註 353이다. 절에 한 승려가 있어, 오래도록 《법화경》을 염송한 것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근자에 감응하여 불사리를 얻었는데, 현재 성안 사람들이 모두 와서 공양한다.
 
345
승려와 속인들이 절에 가득하여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사리를 얻게 된 시초는 염경승(念經僧)이 밤에 방에 앉아 경전을 외고 있었는데, 세 줄기의 빛이 내려 방 가득히 환하게 비추고 절을 두루 비추었다. 빛이 오는 곳을 찾았더니 절의 서쪽 바위 밑에서부터 나와, 매일 밤에 방과 절을 비추었다. 그 승려가 며칠 뒤 빛을 찾아 바위 있는 곳에 이르러 깊이 1장 정도의 땅을 팠더니 3개의 병에 들어 있는 부처의 사리를 얻었다. 푸른 유리병註 354 안에는 7립(粒)의 사리가 있고, 흰 유리병 안에는 5립의 사리가 있었으며, 금빛 병 안에는 3립의 사리가 있었다. 받들고 와서 불전 안에 안치하고 공양하였다. 태원부(太原府) 성과 여러 마을의 귀하고 천한 남녀와 태원부의 높고 낮은 관리들이 모두 와서 극진히 공양하였다. 모든 말하기를
 
346
“이는 화상이 《법화경》을 견지(堅持)하여 불가사의한 힘에 감응한 것이다.”
 
347
라 하였다. 성에서 산에 이르기까지 내왕하는 사람이 길에 가득하고 빽빽하였다. 둘러보고 예배하고서 그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348
註) 350 태원부의 서쪽에 둘러 선 산이다. 여량산맥(呂梁山脈)의 지맥으로, 풍욕(風峪)이라는 계곡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어, 서부를 몽산(蒙山) 또는 태산(太山) 등으로 부른다. 석회암질의 산으로, 여기에 태산사(太山寺)와 개화사(開化寺, 法華寺) 등의 사찰이 있었다. 서남부를 용산(龍山) 또는 현옹산(懸甕山)이라고 한다. 진산(晋山) 또한 그 별명으로, 진수가 발원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산중과 산록에 동자사(童子寺), 천룡산(天龍山), 진사(晋祠), 우화사(雨花寺) 등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6쪽).
349
註) 351 한나라 때 석묵(石墨)·연탄(煙炭)이라 하여 야금(冶金) 등에도 이용되었다. 육조 때에 와서 석탄이라 부르고 연료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요리 만드는 화력으로도 이용되었다(김문경,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 중심, 2001, 360쪽).
350
註) 352 천연(天燃)의 불 즉 뇌전(雷電) 등에 의해 생긴 불을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9쪽).
351
註) 353 서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 아마도 풍욕변(風峪邊)에 있었던 사원일 것이다. 풍욕에는 《화엄경》의 각석으로 유명한 풍동(風洞)이 있는데, 일찍이 《화엄경》을 새겼던 120여 개의 돌기둥이었다(關野·常盤, 《支那佛敎史蹟》 권3) 고염무(顧炎武)는 이 각석을 북제의 것이라고 하였으나(《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 권2) 서체 및 측천문자의 존재로 미루어 최근에는 무후 시대의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한다. 지나사변 중 그 석주의 대부분이 진사(晋祠)로 옮겨졌다. 다만 이 유지에는 절 이름을 명시해 줄 만한 것이 없는데, 이 양자가 같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福井康順 박사는 소화 8년 동자사로 향하는 도중에 석문사의 고지를 발견했다고 하였다(福井康順, 「五臺山巡拜行記」, 《日光山輪王寺》 19호)(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89쪽).
352
註) 354 여기서 말하는 청유리는 벽유리(碧琉璃)라고도 하는데, 주로 코발트, 혹은 동(銅) 등에 의해 발색되는 것이다. 또한 백유리라는 것은 아마도 유백색 또는 무색투명한 유리를 가리킬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0쪽).
 
 

 
 

7월 26일 (음)

354
- 동자사를 순례하다
 
355
從石門寺向西上坂。行二里許。到童子寺。慈恩臺法師。避新羅僧玄測法師。從長安來。始講唯識之處也。於兩重樓殿。滿殿有大佛像。見碑。文云。昔冀州禮禪師。來此山住。忽見五色光明雲。從地上空而遍照。其光明雲中。有四童子。坐青蓮座遊戲。響動大地。巖巘頹落。岸上崩處。有彌陀佛像出現。三晉盡來致禮。多有靈異。禪師具錄申送。請建寺。遂造此寺。因本瑞。號為童子寺。敬以鐫造彌陁佛像。出現顏容顒([□@考]顒下恐脫然字)皓玉端麗趺座之體。高十七丈。闊百尺。觀音大勢。各十二丈(云々)
 
 
356
석문사에서 서쪽을 향해 비탈을 올라 2리 정도 가서 동자사(童子寺)註 355에 이르렀다. 자은(慈恩) 규기법사(窺基法師)註 356가 신라 승려 현측법사(玄測法師)註 357를 피해 장안에서 와 처음으로 유식註 358을 강술한 곳이다. 2층 누각에는 전(殿) 가득히 큰 불상이 있다. 비문을 보니 이르기를
 
357
“옛날 익주(冀州)註 359의 예선사(禮禪師)註 360가 이 산에 와서 거주했다. 어느 날 갑자기 오색으로 빛나는 구름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 두루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 빛나는 구름 가운데 동자 넷이 있었다.註 361 그들은 푸른 연꽃 대좌註 362에 앉아 놀고 있었는데,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켜 바위 봉우리가 무너져 내렸고 절벽 위 무너져 나간 곳에서 미타불상이 출현하였다. 삼진(三晋)註 363 사람들이 모두 와서 예를 올리니 영이(靈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선사는 빠짐없이 기록하여 아뢰고 절을 세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이 절을 세우게 되었다. 본래의 상서로운 일로 인하여 이름을 동자사라 하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미타불상을 조각해 만들었는데, 불상의 얼굴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註 364 흰 옥과 같이 아름다웠다. 결가부좌한 몸은 높이가 17장이며 넓이는 100척이고,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註 365은 각각 12장이다.”
 
358
운운하였다.
 
 
359
註) 355 《산서통지(山西通志)》 권186에 따르면 “동자사는 현의 서쪽 10리, 용산의 위에 있다. 북제 천보 7년(556) 굉예선사(宏禮禪師)가 창건하였다. 이때 두 동자가 있었는데, 산에 있는 큰 돌의 모습이 세존과 유사하게 보여 드디어 불상을 새겼다. 높이는 170척으로, 이에 의해 동자사라고 이름하였다. 그 앞에 연등을 세웠다. 높이는 1장 6척으로, 후에 이석당(二石堂)을 파고 여러 상을 안치하였다. … 금 천보 원년(1117)에 병화로 허물어졌고, 명 가정 초(1522) 도영(道永)이 중건하였다”라고 하였다. 굉예는 혹 홍예(弘禮)로, 청 건륭제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고쳤는지 모르겠는데, 그 전기는 상세하지 않다. 그 외 절에 관한 기록은 《북사》 권55, 《북제서》 권40 당옹전, 또는 같은 책 권8 후주본기, 《법원주림(法苑珠林)》 제14, 《태원현지(太原縣志)》 및 關野·常盤의 《支那佛敎史蹟評解》 권3, 小野勝年, 「晋陽の童子寺」(《佛敎藝術》 21호) 등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1쪽).
360
註) 356 초본(抄本)에는 “基”를 “臺”로 썼다. 라이샤워는 “臺”가 어떠한 종류의 부가적 경칭이 아닐까 하였으나(E. O. Reischauer, 《Enin's Diary》, New York:The Ronald Press Co., 1955, 272쪽), 이는 규기의 “基”를 취한 것으로 원문에는 아마도 “基法師”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규기(窺基, 632-682)는 장안 사람이다. 속성은 위지(尉遲)씨라고 하는데, 위지경덕(尉遲敬德)의 조카라고 한다. 따라서 선조는 우전 출신이라고 이해된다. 17세 때 출가하여 현장의 제자가 되었고, 오천축의 말을 배웠다. 25세 때 조(詔)에 응하여 현장의 역경 사업에 참여하였고, 현경 4년(659)에는 스승의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역출을 도와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에 앞서 원측(圓測)이 서명사에서 강의를 시작하자 현장은 다시 그를 위해 《인명론(因明論)》을 강의하고 아울러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게 하였다고 한다. 현장 만년의 대사업이었던 《대반야경》 600권의 번역에도 참가하였는데, 이는 용삭 3년(663)에 완성되었다. 규기가 오대산을 유람한 것은 그 후의 일로, 장안에서 산서에 이르렀다가, 돌아가는 길은 하북으로 나갔다. 《송고승전》 제4에 “行到太原”이라고 한 것은 이때의 일로, 이 책에는 동자사의 일은 보이지 않으나 아마도 그때 이 절에 머물렀던 것 같다. 장안으로 돌아간 후 자은사에 거주하였고, 현장의 의발(衣鉢)을 이어 법상종의 성립에 힘을 쏟아 마침내 조사(祖師)로 숭앙되기에 이르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2쪽).
361
註) 357 초본(抄本)은 현측(玄測)이라고 하였으나 원측(圓測)의 잘못이다. 현(玄)과 원(元)은 같은 뜻으로 여러 번 사용되며, 원(元)은 또한 원(圓)과 음이 같다. 따라서 원(圓)이 와전되어 현(玄)이 된 것이다. 원측(613~696)은 신라의 왕손이었다고 전하며, 3세에 출가하였고 나중에 장안에 이르러 원법사(元法寺)에 있으면서 비담(毗曇), 성실(成實), 구사(俱舍), 비바사(毗婆沙) 등 제론(諸論)을 배웠다. 현장이 돌아오자 그 문하로 들어가 유가, 유식을 배우고 서명사에 거주하면서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10권,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10권, 《인왕경소》 3권 등을 찬술하였다. 그 후 잠시 근교의 종남산에서 한거하다가 의봉 초에 다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무후 시대 지파가라가 번역한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3권, 《대승현식경(大乘顯識經)》 2권 등이 번역장에 증의(證義)로서 참가하였고, 또한 실차난타(實叉難陀)의 80권 화엄의 번역에도 참여하였다. 화엄의 완역을 마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이때가 만세통천 원년(696) 7월 80세의 나이였다(《대주서명사대덕원측법사탑명(大周西明寺大德圓測法師塔銘)》)(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2쪽).
362
註) 358 《성유식론(成唯識論)》의 준말. 법상종의 성전(聖典)으로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을 호법(護法)·안혜(安慧) 등의 10대 논사(論師)가 해석한 것을 취사하여 현장이 합역(合譯)한 것이다. 유식의 의리(義理)·진여(眞如)·수행(修行)의 위차(位次)를 밝힌 것이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7쪽).
363
註) 359 하북성 익현에 치소가 있다. 당대에는 신도(信都)를 곽하로 하여 남궁(南宮), 당양(堂陽), 조강(棗强), 무읍(武邑), 형수(衡水)의 6현을 관할하였다. 고대 9주 중에도 그 이름이 있는데, 산서 하북 및 하남의 일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3쪽).
364
註) 360 위의 동자사 주에 보이는 《산서통지》에는 굉예선사(宏禮禪師)라고 썼다. 또는 홍예선사(弘禮禪師)일까. 전기는 미상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3쪽).
365
註) 361 《산서통지》에는 2동자라고 하였다. 영이(靈異)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동자는 많은 경우 2인이었는데(예를 들면 《고승전》 권13 법헌전) 4인이라고 한 것은 과문(寡聞)의 범위 안에서는 유일한 예이다. 비문의 전문은 일찍이 없어져, 이를 비교할 실마리가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3쪽).
366
註) 362 청연(淸蓮)은 일반적으로 범어 Utpala(우발라)의 번역이거나 아니면 Nilautpala(니라오발라)의 번역이다. 그 학명은 Nymphaea Cyanea 또는 Nymphaea Caerulea이다. 연꽃의 일종으로 그 화변(花弁)이 푸르고 잎은 세로로 길다고 한다. 청연화에는 청색 외에 홍백(紅白)이 있다. 요컨대 이른바 연과 수련(睡蓮)으로, 매우 공경되던 인도의 꽃으로서 불좌에 사용되었던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4쪽).
367
註) 363 《사기》 권4 주본기에 “定王三十六年 三晋滅智伯 分有其地”라고 하였고, 학왕(郝王) 58년조에 “秦信周攻三晋”이라고 보이는데, 정의(正義)에는 “三晋韓魏趙也”라고 하였다. 진이 멸망하고 그 영역이 삼분된 것은 춘추와 전국시대 역사상 대사건으로, 분립했던 한, 위, 조 3국은 산서의 전역과 하남, 하북에 걸친 광대한 지역이었으나, 여기에는 만연(慢然)과 그 본거였던 산서 지방을 가리킬 것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4쪽).
368
註) 364 원문에 “顒然”이라고 하였다. 머리가 큰 모습, 또는 엄정하여 온화한 모습을 말하며, 또는 장대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4쪽).
369
註) 365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보처존(補處尊)으로서 지혜를 대표하여 삼악도(三惡道)를 건지는 무상(無上)한 힘이 있다. 위의 육괄(六髺)에는 보병(寶甁)을 이고 천관(天冠)을 썼으며, 오른손 손가락은 꼽아서 가슴에 대고, 왼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온몸에 자금색(紫金色)을 칠했는데 이 빛이 모든 세계를 비춘다고 한다(신복룡, 《입당구법순례행기》, 선인, 2007, 218쪽).
 
 

 
 

7월 27일 (음)

371
- 두타승 의원과 작별하다
 
372
廿七日粥後發。於此與供養主義圓頭陁別矣。共同巡臺僧令雅。同為一行。共往西京。從童子寺。南踰一嶺。到雨花寺斷中。從雨花寺向西南。出山行卌里。到清凉縣。入普通院宿。院主不解主客之禮。
 
 
373
[7월] 27일, 죽을 먹은 후 출발했다. 이곳에서 공양주인 의원(義圓) 두타승과 작별했다. 같이 오대를 순례한 승려 영아와 일행이 되어 함께 서경으로 갔다. 동자사에서 남쪽으로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 우화사(雨花寺)註 366에 이르러 단중했다. 우화사에서 서남쪽으로 산을 나와 40리를 가서 청원현(淸源縣)註 367에 도착해 보통원에 들어가 숙박했다. 원주(院主)는 주객의 예註 368를 알지 못했다.
 
 
374
註) 366 《태원현지(太原縣志)》 권3 사전(祀典)조에 “在縣南十里紙房村 洪武十年(1377)重建”이라고 하였다. 진수(晋水)의 수원신(水源神)을 제사하였던 유명한 진사(晋祠)의 동남쪽에 절이 있는데, 1964년 가을에 마침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다. 절 앞에 청류(淸流)가 흐르고, 다리를 건너 경내로 들어간다. 산문에는 “우화고찰(雨花古刹)”의 편액이 있고, 종루와 좌우의 배전 및 본당 등 근세에 조영된 여러 가람이 있다. 본당에는 석가, 약사, 아미타 3존의 소상(塑像)이 안치되어 있다. 그러나 주지가 거처하지 않아 황폐화되어 있다. 경내에는 원신대덕영탑(元信大德靈塔)이라 불리는 석주의 단편과 지방촌중수우화사교기(紙房村重修雨花寺橋記, 가경 6년) 및 중수우화사기(重修雨花寺記, 가경 23년) 등의 비가 있는데, 후자에는 “寺始於北齊天保間 重建於明洪武間 誠古刹也”라고 기록되어 원인(圓仁)이 방문했던 우화사지가 틀림없음을 보여 준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7쪽).
375
註) 367 초본(抄本)은 청량현(淸凉縣)이라고 잘못 썼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권40에 “淸原縣 (太原)府西南八十里 東至徐溝縣五十里 北至太原縣四十里 春秋時 晋之梗陽邑 漢爲楡次縣地 隋開皇十六年 始於梗陽故城 置淸原縣 大業初 省入晋陽 唐初復置 宋因之”라고 보인다. 경양성은 춘추시대 진의 대부 기씨(祁氏)의 읍이라고 전한다. 청원수(淸原水)는 현성의 서북쪽에서 나는 평천(平泉)의 벌칭으로, 그 물은 분하(汾河)로 들어간다. 당연히 현 이름은 이에 의한 것이다. 근세의 성 주위는 6리 정도이고 서문, 남문, 북문이 있으며, 명 경태 2년(1451) 중수하였다(《청원향지(淸源鄕志)》 권4) 이 지방은 포도의 산지로 알려져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7쪽).
376
註) 368 손님을 대접하는 의례를 말한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8쪽).
 
 

 
 

7월 28일 (음)

378
- 석고촌에 이르러 숙박하다
 
379
廿八日向西南行十五里。到晉村家斷中。西南行廿五里。到石高村。入石臺院宿。
 
 
380
[7월] 28일, 서남쪽을 향해 15리를 가서 진촌(晋村)註 369의 어느 집에서 단중했다. 다시 서남쪽으로 25리를 가서 석고촌(石高村)註 370에 이르러 석호원(石毫院)에 들어가 숙박했다.
 
 
381
註) 369 미상이다. 《광서청원향지(光緖淸原鄕志)》 권4 영방(營防)조에 따르면 성의 서남 15리에 동간촌(東干村), 20리에 고백진(高白鎭)이 있으며, 또한 그 남쪽 내지 서남쪽에는 가조촌(賈兆村), 왕명채(王明寨), 단촌(段村) 등이 있다(10만분의 1) 거리로 미루어 보면, 아마 이곳 부근인 것 같다. 이보다 남쪽에 신촌(辛村)이 있는데 일본의 발음으로는 비슷하지만 거리가 다르다. 또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서술례로부터 진촌모가(晋村某家)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촌가의 뜻 그대로 해석해도 괜찮겠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9쪽).
382
註) 370 문수현(文水縣)의 석후진(石候鎭)이다. 석후는 석호(石毫)라고도 쓰는데, 고(高)와 호(毫), 후(候)는 대략 음이 통할뿐 아니라 그 거리에서 추측해도 거의 차이가 없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199쪽).
 
 

 
 

7월 29일 (음)

384
- 두타승 의원의 문도 집에서 단중하다
 
385
廿九日西南行廿五里。到文水縣李家斷中。是義圓頭陀親門徒。飯食如法。齋後行卌里。到郭柵村。入村寺宿。院主僧。見客不喜。
 
 
386
[7월] 29일, 註 371서남쪽으로 25리를 가서 문수현(文水縣)註 372에 도착해 이씨 집에서 단중했다. 이 사람은 두타승 의원과 친근한 문도였다. 음식을 먹는 것은 법식대로 했다. 재를 마친 후 40리를 가서 곽책촌(郭柵村)註 373에 이르러 마을의 절에 들어가 묵었다. 원주승은 손님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387
註) 371 개성 5년 7월은 소월(小月)로, 29일이 말일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00쪽).
388
註) 372 당(唐)의 현치는 현재 문수현에서 동 10리에 있던 옛 현도(縣都)이다. 《문수현지(文水縣志)》 권2에 따르면 “文水故城 在縣東十里 金舊縣都卽地也 後魏建文水城 隋唐因之 宋元符間圮於水 因徙治章多里”라고 하였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등에 따르면, 원래 한의 대능현(大陵縣) 관내로, 북위 시대에 대능현을 없애고 수양현(受陽縣)을 두었다. 문수현으로 개명한 것은 수 개황 10년(590)이었다. 현의 서쪽 문수(文水)로 인해 이름하였다. 측천무후가 그곳 분유촌(枌楡村) 출신이었는데, 천수 원년(690)에 현명을 무흥현(武興縣)으로 개칭하였다. 무후의 아버지 확(彠)의 묘도 현성 서북 15리에 있다. 대시 문수현이라는 옛 이름으로 복구된 것은 신룡 원년(705)이다. 당시 현성은 매우 광대하여, 주위가 약 30리였고, 성내의 수전 경작이 가능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북송 원부(元符) 연간(1098-1100)에 치소를 옮긴 이래 현재에 이른다. 옛 성장(城庄), 동서구성(東西舊城) 또한 동북방으로 무오촌(武午村) 등이 있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00쪽).
389
註) 373 10만분의 1지도에는 기촌진(冀村鎭) 부근에 있다. 다만 그 터는 미상이다(小野勝年, 《入唐求法巡禮行記の硏究》 第3卷, 鈴木學術財團, 1967, 200쪽).
【원문】입당구법순례행기(84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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