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는 언젠가 참회무용론(懺悔無用論)을 말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괴로운 것이 없고 또 불리한 것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던 듯하다. 참회는 사실 어려운 노릇이나, 그로써 속죄가 되는 것일까는 의문이다. 나 자신 참회한 죄장(罪障)은 이 고통을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렇지 못한 것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검은 고통의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더욱이 여러 사람이 관련케 되는 것은, 참회로 말미암아 나 자신은 시원해진다더라도 죄 없는 여러 사람에게까지라도, 오히려 청백(淸白)한 그 사람에게 근심의 뿌리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속죄가 아니요 가죄(加罪)라 할 것이다. 그러나 능히 참회할 수 있는 사람은 크다. 루소(J. J. Rouseau)는 사실 크다 하겠으나, 그러나 또한 그로 말미암아 그의 난륜(亂倫)·패륜(悖倫)·부도덕(不道德)이 얼마나 그와 그 주위의 사람을 불행케 했을고.
4
속죄는 반드시 참회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고통의 중압에 심장을 썩혀 죄장의 인과를 받으면서라도 비밀히 간직함이 속죄의 한 방편이 되지 아니할까.
5
그러나 문학자(소설·극, 기타 언어 표현을 요하는 예술가)의 불행이란 이 곳에 있다. 주관에 충실된 묘사가 참회의 일종이라면(이것은 객관적 문학이나 주관적 문학이나 간에 공통된 요건이다), 참회 없는 문학이란 성립될 수 없고, 문학다운 문학을 낳자면 참회할 만한 사실을 가져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문학가는 그 문학의 조성을 위해 자꾸 죄를 지어야 할 것이다. 즉 문학자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 위대한 문학자가 되려면 할수록 흉악한 죄를 자꾸 범해야 한다. 영원한 죄인이 됨으로써 영원한 작품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니, 사실로 작가는 불행하다. 교회사(敎誨師)도, 도덕가도, 그리고 영리한 사람도 예술가의 자격은 없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불행했던 까닭에 예술가로서 컸다. (죄는 행동에만 있지 않다. 마음이 범하는 죄가 오히려 무한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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