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인에게서 그 소위 자타인정(自他認定)이라는 특립(特立)된 존재가 되기는 단위 범주가 적으니만큼 비교적 용이한 일이라 하겠지만, 범위가 넓어져 가령 일국(一國) 문화(文化) 같은 것이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특수한 성격을 보이게 된다는 것은 실로 난중난사(難中難事)라 하겠다. 예를 미술공예에서 든다면, 금번 도쿄서 황기(皇紀) 260년 기념성전(紀念盛典)의 하나로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正倉院)의 어물(御物)이 공개되었는데, 그 보물들이 과연 일본자신에서 제작된 것은 무엇 무엇이며, 기타 외국서 수입 전래된 것은 얼마나 되느냐 할 때, 쇼소인 어용(御用) 담당으로 다년(多年) 이 방면에 연구가 깊던 고(故) 이노우 신리(いのう しんり)의 해답에 의하면, “とうも 船來品が多くこざいます 수입품이 많이 있습니다”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만 해답에서 만족되지 아니하고, 일본문화의 독자성을 연구하려는 이는 그 중에서 일본 자신의 제작이 무엇 무엇일까 알고자 할 것이며, 조선문화의 연구자는 조선에서의 전수물(傳輸物)이 무엇 무엇일까 알고자 할 것이지만, 중국문화 연구자로선, 특히 중국인으로 볼 때는 거의 다 저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여 조일문화(朝日文化) 연구자들이 제각기 자기 본령(本領)의 산물을 찾고자 함에 반하여 제법 자고(自高)의 처지에 앉아서 웃고 있을 것이다. 즉 조일학자(朝日學者)는 네 것 내 것을 가리려 눈이 벌게 있는데, 중국학자는 ‘너희들 싸움이야 어린애 짓이지’ 하고 민소자약(憫笑自若)코 있을 것이다. 이 싸움에 하등 관계없는 제삼자적인 서양학자들도 조일학자들 간의 이 시샘은 있는지 없는지 모두 중국 산물로 인정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조일학자 간의 싸움이란 어린애 소꿉장난 싸움 같은 것이요 싸움의 보람이 드러나지 않는다.
4
중국과는 도저히 싸움이 되지 않으니, 이야말로 누의(螻蟻)가 대목(大木)을 흔들려 하는 셈이 아닐까. 시대가 뒤지면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은 조선대로 문화의 특질이란 것이 점차로 엉클어져 중국문화에서 구별되는 것이 나타나지만, 또 문화의 종류에서 더 일찍이 형용되는 특질적인 것이 있고 더 늦은 특질적인 것이 있지만, 미술공예에선 적어도 신라통일대(新羅統一代), 즉 일본의 나라(奈良) 덴표대(天平代), 중국에서 당대(唐代)까지는 중국의 것에서 구별될 일본적인 것, 조선적인 것이 두드러지지 아니한 성싶다. 적어도 쇼소인의 유물이란 것을 중심하여 생각한다면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사실일까 한다. 쇼소인 유물 중에는 일본기년(日本紀年)이 기명(紀銘)된 것이 더러 있지만, 그 기년명(紀年銘)들이란 것이 그 물건의 조성(造成)을 말하지 아니하고 대개는 헌납(獻納) 인연의 세년(歲年)을 표시하는 것이 많으니, 일본기년명(日本紀年銘)이 있다고 곧 일본 제작으로 할 수 없으며, 또 기록에선 어떤 물건을 만들 적에 재료·물자를 황실(皇室)에서 하사한 것이 있으나 재료·물자는 비록 일본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공장(工匠)이 반드시 일본 공장들이었는지 미심(未審)하다. 예컨대 당대(當代) 공장의 기록에 남은 것을 보면, 고구려·백제· 신라·당(唐) 등 제국(諸國)에서 귀화한 인물, 도거(渡去)한 인물이 적지 않다. 우선 쇼소인이 예속되었던 도다이지 그 자체의 건립에서도 조사사관(造寺司官)이란 사람이 고려조 신(臣) 복신(福信)이라 한다. 물론, 이 한 사람이 오래 있었던 것이 아니요 혹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하여간 이와 같이 조사관(造寺官)에 고려조인(高麗朝人)도 있었던 것이다. 화사(畵師)로선 신라인 복마려(伏馬呂)·반만려(飯萬呂)란 사람도 있다. 물건에 의하여, 예컨대 적칠문관목주자(赤漆文欟木廚子)라든지 기자합자(基子合子) 같은 것이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진어(進御)란 것도 있고, 또 혹은 묵(墨)에 “新羅楊家造墨(신라양가조묵)”이란 제작명(製作銘)이 있는 것도 있고, 명칭이 신라금(新羅琴)이니 고려금(高麗錦)이니 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이렇게 두드러지게 알 수 있는 것은 전수(全數)에 비하여 몇백 퍼센트의 하나도 못 된다. 일본의 학자는 일본의 학자대로 두드러지게 일본 제작인 것을 찾고자 하나 아직도 자타가 공인할 수 있게 두드러지게 구별이 서 있지 않다. 즉 아직도 거의 중국 것이니라 해도 앙탈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5
지금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독자성의 발견(發見)·발양(發揚)이 영향되어 민족 독자의 문화 특질이란 것을 고조(高調)하려 한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 아니요 사실에 있어 없지도 않은 일이나, 역사의 조류 사이에는 이 문화의 민족적 독자성이 확연히 구별되는 때도 있고 구별되지 않는 때도 있다. 구별되지 않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 대로 그대로 역사의 전체적 풍모를 파악함이 진실로 역사의 객관적 파악이라 하겠는데, 문제를 이렇게 점잖이 처결(處決)치 아니하고 악착같이 그곳까지 파 들어가 구태여 나란 것을 내세우려 한다. 그야 물론 같은 형제간에도, 또 더욱이 남이야 전혀 구별키 어려운 쌍둥이 간에라도 상이점(相異點)을 구별하려 든다면 한 태양 아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격으로 어느 모로든지 다른 점이 보이기야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여 발견해낸 그 상이점이란 전체 가치관에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웬만큼 다른 것은 다른 것이라 구태여 내세우지 말고 대동(大同)으로 돌려 보냄이 대인(大人)의 풍도(風度)가 되지 않을까. 자타 공인이란 즉 보편성을 가진 곳에나 성립되는 것이요 또 대동성(大同性)에 있는 것이니, 보편성 없는 소이(小異), 자타 공인되지 않는 소소가치(小小價値)의 소이(小異)쯤이야 문제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문제로 하려 드는 것은 결국 소인적 국축성(局蹙性)에 있지 아니할까. 쇼소인 어물(御物)에서 구태여 알 수 없는 조선 것이라는 것을 찾으려던 나 자신에 대하여 내 자신이 민소불금(憫笑不禁)이다. 가가(阿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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