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려시대 미술공예품으로 도자공예(陶磁工藝)가 그 수로도 그 질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 유명한 고려도자가 함집(咸集)된 것이 이 개성박물관(開城博物館)의 특색이며, 그 중에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려청자와(高麗靑瓷瓦)와 화금청자(畵金靑瓷)를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랑거리의 하나라 하겠다.
5
고려청자와는 지금으로부터 칠백팔십오 년 전, 즉 의종(毅宗) 1년에 왕이 영의(榮儀)라는 술복자(術卜者)의 건의에 의하여 왕업(王業)을 연기코자 대궐 옆에 있던 왕제(王弟) 익양후(翼陽候) 호(皓)의 사제(私第)를 빼앗아 수덕궁(壽德宮)이라는 익궐(翼闕)을 세우고, 다시 부근 민가(民家) 오십여 구(區)를 헐어 치워 태평정(太平亭)이라는 일대 원유(苑囿)를 만들어 갖은 사치를 다할 때, 그 원유 안에 있던 양이정(養怡亭)이란 데 비로소 청자와를 올린 것이다.
6
동양에서 개와(蓋瓦)에 유채(釉彩)를 베푼 것을 사용키는 서역문화(西域文化)가 다분히 혼입(混入)된 한무(漢武) 이후인 듯하다. 남채(藍彩)·녹채(綠彩)·황채(黃彩) 등 여러 채유와(彩釉瓦)가 있을뿐더러 추벽(甃豊)에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니, 신라통일 초의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서 발견되는 남록계(藍綠系) 추벽은 그 일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서역 계통의 조달유(曺達釉) 또는 연유(鉛釉)에 의한 것들로 귀한 것이 아님이 아니나, 그러나 동양 독특의 철염(鐵鹽)에 의한 청자유(靑瓷釉)들은 아니다. 이미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청자는 동양 독특의 산물이요 또 가장 귀중가고(貴重價高)의 것으로 유명한 것인데, 의종이 이러한 청자유로써 개와를 만들어 덮은 것은 세계사상(世界史上)에서 오직 의종만이 능히 해 본 장난으로 사상(史上)에 유명한 것인데, 그 역사적 사실을 명증(明證)하고 있는 것이 곧 이 박물관 진열의 청자와이다. 이로써 귀중한 것이라 하겠으며, 다음에 유명한 것은 화금청자(畵金靑瓷)이니『고려사(高麗史)』조인규(趙仁規) 열전(列傳)에
7
仁規嘗獻畵金磁器 世祖問曰 畵金欲其固邪 對曰 但施彩耳 曰 其金可復用邪 對曰 磁器易破 金亦隨毁 寧可復用 世祖善其對命 自今磁器毋畵金勿進獻
8
조인규가 금칠로 그림을 그린 도자기를 임금께 바친 일이 있었는데, 세조가 묻기를, “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도자기가 견고해지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했다. 조인규가 대답하기를, “다만 채색을 베풀려는 것뿐입니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그 금을 다시 쓸 수가 있느냐”라고 하자, “자기란 쉽게 깨지는 것이므로 금도 역시 그에 따라 파괴됩니다. 어찌 다시 쓸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세조가 그의 대답이 옳다고 하면서, “지금부터는 자기에 금으로 그림을 그리지 말고 바치지도 말라”고 했다.
9
이라 있어, 고려조(高麗朝)와 원조(元朝)와의 교역물로서 큰 역할을 하던 것이 청자기(靑瓷器) 중에서도 이 화금청자기(畵金靑瓷器)였었다. 일찍이 이 현물(現物)이 발견되기까지는 학계에 여러 가지 추측설(推測說)이 있었으나, 이 현물이 발견된 후 유사품이 속속 천명되고, 겸하여 자기공예사상(陶磁工藝史上) 여러 가지 재미있는 문제가 많이 발천(發闡)되었다. 이로써 개성박물관의 보패(寶佩)의 하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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