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요한 마음과 매인 데 없는 몸으로 청산(靑山)엘 홀로 거닐어 보자. 창해(蒼海)에 홀로 떠 보자. 가다가 며칠이라도 머물러 보고, 싫증이 나거든 돌아서도 보고, 번화함이 싫거든 어촌산사(漁村山舍)에서 적료(寂廖)한 꿈도 꾸고, 소조(蕭條)함이 싫어지면 유두분면(油頭粉面)의 넋두리도 들어 보자. 길가에 꿇어앉아 마음 놓고 앙천대소(仰天大笑)도 하여 보고, 대소(大笑)하다 싱겁거든 달음질도 주어 보자. 시냇물이 맑거들랑 옷 입은 채로 건너도 보고, 길가의 낙뢰송(落磊松)이 보이거든 어루만져 읊어도 보자. 가면(假面)의 예절은 악마에게 덜어 주고 싱거운 수식(修飾)은 속한(俗漢)에게 물려주어, 내 멋대로 천진(天眞)히 뛰어 보자. 구차(苟且) 한 생(生)에 악착스럽지도 말고, 비겁한 자기(自棄)에서 패망(敗亡)치도 말고, 내 멋대로 순진(純眞)히 노래해 보자, 하면서도 저문 날에 들 집이 없고, 무거운 안개에 등불이 돈탁(沌濁)해질 때 스스로 나그네의 애상(哀傷)은 뜬다.
4
차(車)를 타자. 너도 타고 나도 타자. 하필 달음질을 주어 어수선한 이 세상을 더욱 어수선케 만들 것이 무엇이냐. 고달픈 몸이라 너도 눕고 싶겠지만, 하물며 옆 사람이 깊이 든 잠결에 몸집이 실린다고 짜증을 낼 것은 무엇이냐. 짐이란 시렁 위에 얹으려무나. 자리 밑에 넣으려무나. 내 자리도 넓어지고, 옆 사람도 편켔거늘, 무엇이 그리들 잘났다고 그 큰 짐을 우마(牛馬)같이 양협(兩脇)에 끼어 안고 네 세상같이 버티느냐. 이 소같이 우둔한 사람들아, 차가 굴속에 들지 않느냐. 그 무서운 독와사(毒瓦斯) 같은 석탄연매(石炭煙煤)가 몰려 쏟히는데, 질식치도 않고 저대도록 있느냐. 담배들도 그만 피우라, 내 눈이 건어(乾魚) 같아진다. 이 촌마누라여, 그대에게는 흙 묻고 때 묻은 그 누더기 솜버선이 귀중키는 하겠지만, 나의 코앞에 대고 벗어 털 것이 무엇인고. ‘미라’ 같은 그 발맵시도 가련킨 하지만, 보기 곧 진실로 싫구려. 목초마도 아깝긴 하지만, 그 더러운 속옷만은 제발 덮어 두오. 아이 여행하거들랑 차도 타지 마라.
5
동해중부선(東海中部線)은, 옛날의 당나귀걸음이 제법 빨라졌다. 동촌(東村)은 대구지동촌(大邱之東村)의 뜻인가. 그보다도 어스름 달빛 아래 반야월(半夜月)을 지나고 대천(大川)을 끼고 도니, 청천(淸泉)·하양(河陽)·금호(琴湖)·영천(永川)·임포(林補), 모두 그 이름이 좋다. 날이 밝기 시작하니 계변교송(溪邊高松)이 군데군데 일경(一景)이요, 아침 안개가 만야(滿野)에 흩어지니 원산봉수(遠山峰岫)가 바다에 뜬 듯, 게다가 조돈(朝暾)이 현궁(玄宮)을 물들이니 채운(彩雲)이 빛나서 아화역(阿火驛)이라. 건천광명(乾川光明)에 이를수록 차는 자각돌의 벌판을 달리고, 해는 높아진다. 저 건너 저 양류촌(楊柳村) 계변(溪邊)에 번듯이 보이는 와옥정사(瓦屋精舍)는 옛적에 본 법하지만 물어 알 곳이 없고, 양지(陽地)에 기복(起伏)된 산맥은 북국(北國) 산맥의 준초(峻峭)한 맛이 전혀 없다. 들판엔 죽림(竹林)이 우거져 있고, 산(山)판엔 송삼(松衫)이 무성하여 옛적의 소삽(蕭颯) 띤 풍경은 가셔졌지만, 차에 오르려는 생도(生徒)의 촌민(村民)의 궁상은 흙 묻은 갈치요, 절여진 고등어떼들이다. 아아.
6
서악(西岳)은 경주의 서산(西山)이니, 차창에서 내다보기 시작하는 고분(古墳)의 떼를, 평지의 광야의 고분의 떼를 놀라이 여기지 마라. 한무(漢武)의 고지(故知)를 본받아 서산낙조(西山落照)에 울부짖으려 함이 아니었겠고, 미타정토(彌陀淨土)의 서방극락(西方極樂)을 쫓으려 함이 아니었겠지만, 경주의 고분은 서악(西岳)에 펼쳐져 있다. 남산(南山)·북망(北邙)·동령(東嶺)엔들 고분이 어찌 없으랴만, 신라의 고분은 서악에 있다 하노니, 이 무슨 뜻인가 의심치 마라. 신라 불교문화의 창시정초(創始定礎)를 이루고, 신라국가(新羅國家)의 패기(覇氣)를 보이던 법흥(法興)·진흥(眞興)·진지(眞智) 제왕(諸王)의 능이 이 서악에 있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무열(武烈)의 능을 비롯하여 김인문(金仁問)·김양(金陽)·김유신(金庾信) 등 훈관(勳官)의 묘가 이곳에 몰려 있으니, 서악이 어찌 이 경주의 고분을 대표하는 지대라 아니하랴. 봉황대(鳳凰臺) 이남의 원분(圓墳)·표형분(瓢形墳), 구정리(九政里)의 방형분(方形墳) 등이 고고학적으로 귀중치 아니함이 아니나, 서악의 제분(諸墳)과 그 뜻을 달리한다.
7
차는 경주로 달린다. 산 같은 고분은 민가(民家)와 함께 셋넷, 하나둘 사이좋게 섞여 있다. 남(南)에도 고분, 북(北)에도 고분, 차는 고분을 바라보고, 고분을 끼고, 고분을 돌고, 고분을 뚫고 달린다, 달린다. 머리 벗겨진 고분, 허리 끊어진 고분, 다리 끊어진 고분, 팔 끊어진 고분, 경주인은 고분과 함께 살림하고 있다. 헐어진 고분은 자갈돌의 사태(沙汰)이다. 자갈돌의 사태, 고분의 사태, 돌무덤의 바다, 차를 내려 거닐어 보아라. 길에도 논에도 밭에도 두렁에도 집터에도 담에도 벽에도 냇가에도 돌, 돌, 돌, 진실로 경주는 돌의 나라이니, 돌은 곧 경주이다. 해주(海州)의 석다(石多)가 유명하지만, 경주의 다석(多石)도 그에 못지않는다. 다만, 해주의 돌들은 조풍(潮風)에 항쟁(抗爭)하고 조풍에 시달린 소삽(蕭颯)한 돌들이지만, 경주의 돌은 문화를 가진 돌이요, 설화를 가진 돌이요, 전설을 가진 돌이요, 역사를 가진 돌이다. 경주에서 문화를 빼고 신라에서 역사를 빼려거든, 경주의 돌을 없이 하여라.
8
인류의 역사는 돌에서 시작되느니, 신라의 문화만이 어찌 돌의 문화라 하랴. 원시석기시대(原始石器時代)의 문화란 어느 나라에나 있던 것이요, 돌의 문명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던 것이, 하필 신라만의 문화가 돌의 문화라 하랴. 숙신(肅愼)도 말갈(靺鞨)도 예맥(濊貊)도 고구려도 백제도, 기타 어느 나라도 모두 돌의 문명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의 돌의 문화는 ‘쌓는 문명’이요 ‘새기는 문화’가 아니었으니, 돌은 새겨지는 곳에 문화적 발달의 극한(極限)을 본다.
9
그러나 이러한 문화를 남긴 것으로서 신라문화의 특색으로 알지 마라. 만일 통삼(統三)의 주체가 신라가 아니었고 고구려였어도, 또는 백제였어도 그들은 의당 돌을 새기는 문화를 남기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를 공간적으로만 비교치 마라, 관념적으로만 대립시키지 마라. 신라에는 통일 이후라는 신세대가 연결되어 있고, 고구려는 통삼(統三) 이전이란 구기(舊期)에 속하여 있으니, 세대차를 무시하지 말아라. 고구려와 동세대의 구기(舊期)의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새기는 문화’를 아직 갖지 못하였던 것을 사가(史家)야 잊지 말아라. 백제 또한 그러하니, 그러므로 삼국기(三國期)의 조선의 문화는 돌을 쌓는 곳에 그친 문명세대였고, 통일 전후부터 ‘새기는 문화’가 발전되었으니, 신라의 문화를 전체로 ‘새기는 문화’로만 알지 마라. 구기(舊期)의 신라는 고구려·백제와 다름없는 축석(築石)의 문화이었느니라.
10
‘쌓는 문명’에서 ‘새기는 문화’로의 전개, 이것은 석기문명(石器文明) 진전의 필연상(必然相)이니, 이것은 실로 신라민족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통일 이후의 조선문화의 특색이었다. 돌을 쌓는 문명을 지양(止揚)하고 차견(差遣)하고, 돌을 새기는 문화로의 진전은, 그러나 조선문화만의 역사적 진전의 필연상이 아니라 또한 세계문화의 진전의 공통상(共通相)이니, 어찌 신라민족만의 고유상(固有相)이요 특유상(特有相)이라 규정할 수 있으랴. 우리는 모름지기 이 ‘새기는’ 계단의 문화를 세계 인류문화사(人類文化史)의 한 계련(係聯) 속에서 이해할 것이요, 결코 신비로운 민족성의 성격만으로 이해치 말자.
11
돌을 ‘쌓는 문명’에서 돌을 ‘새기는 문화’로의 진전은 그 자체로서 돌의 문화를 부정할 모순적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다음에 나설 문화가 철류(鐵類)의 문화임이 틀림없으나, 철(鐵)은 마침내 살벌(殺伐)의 이기(利器)로 악마화(惡魔化)하고, 동양에서의 진정한 문화의 계단은, 특히 조선에서의 문화의 계급은 흙의 문화가 대신코 나섰으니, 이는 조선으로 하여금 현실적으로 불행케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었을 것이니, 예술적으론 정서의 고양(高揚)을 본다. 돌의 문화에서 흙의 문화로의 전환은 조선의 문화가 원심적(遠心的) 문화에서 구심적(求心的) 문화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주를 보고 송도(松都)를 보아라. 송도에는 깨어진 흙의 문화〔도자(陶磁)〕가 흩어져 있고, 경주에는 새겨진 돌의 문화가 흩어져 있으니, 양조(兩朝)의 문화는 이로써 비교된다. 장정(裝幀)의 색채로써 비유한다면, 경주의 문화, 신라의 책자(冊子)는 적지(赤紙)에 금자(金字)로써 표시하겠고, 송도의 문화, 고려의 책자는 청지(靑紙)에 흑자(黑字)로써 표시하리라. 〔이곳에 동철기문화(銅鐵期文化)는 재략(除略)하였다. 그것은 삼대문화(三代文化)를 규범으로 하던 조선조에서 논할 것임으로써이다〕
12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위업(偉業)과 김유신(金庾信)의 훈공(勳功)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이것은 문헌에서도 우리가 기릴 수 있지만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건천(乾川)의 부산성(富山城)도, 남산(南山)의 신성(新城)도, 안강(安康)의 북형산성(北兄山城)도 모두 문무왕의 국방적(國防的) 경영(經營)이요, 봉황대(鳳凰臺)의 고대(高臺)도, 임해전(臨海殿)의 안압지(雁鴨池)도, 사천왕(四天王)의 호국찰(護國刹)도 모두 문무왕의 정략적(政略的) 치적(治積)이 아님이 아니나,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을 찾으라.
13
듣건대, 대왕암은 동해에 있으니, 경주서 약 육십 리. 가는 도중에 준령(峻嶺)을 넘고, 길은 또 소삽(小澁)타 하며 장장하일(長長夏日)의 하루가 장정(壯丁)으로도 역시 부족하다 하기로 경성(京城)을 떠날 때 몹시도 걱정스럽더니, 막상 당지(當地)에 당도하고 보니 문명의 이기(利器)는 어느새 이곳도 뚫어내어 십일월 중순의 짧은 날도 거리낌없이 장도(壯途)(?)에 오르게 되었다. 덕택에 중간의 고적풍광(古跡風光)은 문자 그대로 주마관산(走馬觀山)격이어서, 이것은 분황탑(芬皇塔), 저것은 황복탑(皇福塔), 돌고 있는 곳은 명활산성(明活山城)의 아래이요, 저 건너 보이는 것은 표암(瓢岩)이로세. 저 속이 고선사(高仙寺)요, 그 안에 무장사(鍪藏寺)요, 언뜻언뜻 보이고 지나는 대로 설명이 귀를 스칠 때 차는 황룡상산(黃龍商山)을 넘어 멀리 동해를 바랄 듯, 구곡양장(九曲羊腸)의 험로(險路)를 멋적고 위태(危殆)히 흔들고 더듬는데, 생사를 헤아리지 않는다 해도 나의 다리는 기계적으로 물리적으로 오그라졌다, 펴졌다···.
14
험관(險關)을 벗어난 차는 마음 놓고 다시 대지를 달린다. 이리 꾸불, 저리 꾸불, 꾸불꾸불 도는 길이 계곡의 북안(北岸)을 놓치지 않고 꾸불꾸불 뻗고 있다. 계곡은 조선의 계곡이라 물이 흔할 수 없지마는, 넓은 폭원(幅原)에 그 많은 자갈돌은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가진 듯이 그 사이로 계남(溪ᅵ有)의 산음(山陰)에는 취송단풍(翠松丹楓)이 한 경(景)을 지어 있고, 계북(溪北)의 남창(南敞)에는 죽림(竹林)이 어우러져 있다.
15
저 골은 기림사(祇林寺)로 드는 골이요, 이 내는 석굴암(石窟庵)으로 통하는 길이라, 군데군데 설명을 귀담아 듣다가 어일(魚日)서 차를 버리고 광탄(廣坦)한 수전대야(水田大野)를 동으로 남으로 내려가면서 산세(山勢)와 수로(水路)를 따지고 살펴보니, 아하, 이것이 틀림없이 동해대해(東海大海)로 통하는 행주(行舟)의 대로(大路)였구나 깨닫게 되고 보니, 다시 저 계곡이 궁(窮)한 곳에 석굴불암(石窟佛庵)이 동해를 굽어 뚫려 있고, 이 계류(溪流)가 흘러 퍼져진 곳에 감은대사(感恩大寺)가 길목을 지켜 이룩됨이 결코 우연치 않음이 이해된다.
16
설(說)에 문무왕(文武王)이 승하(昇遐) 후, 소신화룡(燒身化龍)하사 국가를 진호(鎭護)코자 이 감은대사의 금당체하(金堂砌下)로 드나들어 동해를 보살폈다니, 지금은 사관(寺觀)의 장엄(莊嚴)을 비록 찾을 곳이 없다 하더라도 퇴락된 왕시(往時)의 초체하(礎砌下)엔 심상치 않은 그 무엇이 숨어 있을 듯하다. 사문(寺門)까지는 창파해류(蒼波海流)가 밀려들 듯하여 사역고대(寺域高臺)와 문전평지(門前平地)가 엄청나게 그 수평(水平)을 달리하고, 황폐된 금당(金堂) 좌우에는 쌍기(雙基)의 삼중석탑(三重石塔)이 반공(半空)에 솟구치어 있어 아직도 그 늠름한 자태와 호흡을 하고 있다. 사명(寺名)의 감은(感恩)은 물론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우국성려(憂國聖慮)를 감축(感祝)키 위한 것일 것이요, 호국용왕(護國龍王)이 금당대혈(金堂大穴)에 은현(隱現)코 있었다 하니, 금당이 역시 용당(龍堂)이라. 주산(主山)을 용당산(龍堂山)이라 함이 또한 그럴듯하나 이견대(利見臺)는 찾지 못하였고, 해적(海賊)이 감은사의 대종(大鐘)을 운수(運輸)하다가 어장(魚藏)코 말았다는 대종천구(大鐘川口)에 어촌부락(漁村部落)이 제대로 오물오물히 엉켜져 있다. 탑두(塔頭)에서 동해는 지호간(指呼間)에 보이고, 대왕이 성체(聖體)를 소산(燒散)한 대왕암소도(大王岩小島)는 눈앞에 뜨나 파광(波光)의 반사가 도리어 현란(眩亂)하니, 바닷가로 나아가자.
17
바닷가로 나아가자. 내 대해(大海)의 풍광에 굶주린 지 이미 오래니, 바닷가로 나아가자. 백사장이 창해(蒼海)를 변두리 치고 있는 곳에 청송(靑松)은 해풍(海風)에 굽어 있고, 현궁(玄穹)이 한없이 둥그러 있는 곳에 해면(海面)은 제멋대로 펼쳐져 있지 아니하냐. 백범(白帆)이 아니면 해천(海天)을 분간할 수 없고, 백파(白波)가 아니면 남벽(藍碧)을 가릴 수가 없다. 갈매기 소리는 파도 속에서 넘나 떠 있고, 까막까치의 소리는 안두(岸頭)에 떠돌고 있다. 대종천구(大鐘川口)에서 해태(海苔)가 끼인 기암(奇岩)에 올라 조풍(潮風)을 들이마시고, 부서지는 창파백조(蒼波白潮) 속에 발을 담그며, 대왕암(大王岩) 고도(孤島)를 촬영도 하여 본다. 이미 시든 지 오래인 나의 가슴에선 시정(詩情)이 다시 떠오르고, 안맹(眼盲)이 된 지 오래인 나의 안저(眼底)에는 오채(五彩)가 떠오르고, 이름 모를 율려(律呂)는 내 오관(五官)을 흔들어 댄다. 안내(案內)의 촌부(村夫), 나의 이 운(韻)을 깨달았던지 촌(村)에 들어가 맥주 일구(一甌)를 가져오니, 냉주일배(冷酒一杯)는 진실로 의외의 향응(響應)이었고, 평생에 잊히지 못할 세욕탁진제(洗浴濯塵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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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국지성(憂國至誠)이 중(重)코 또 깊으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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